2020년 1월 15일 수요일

한국에서 동양인을 연기한다는 것

글쓴이_장영지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
박지해(Jihae Park) 작, 이오진 연출, 나희경 기획
부진서, 오남영, 변승록 정대용, 김신록 출연.
세종문화회관 S 씨어터
20.1.9 – 1.19.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는 <맥베스> 고등학생 판이다.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기 위해 같은 반 남자애를 죽이는 L(오남영)과 M(부진서)은 레이디 맥베스와 맥베스를, 살해당하는 D(정대용)는 던컨 왕을 즉각 떠 올리게 한다. <맥베스>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피어리스>의 전개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극장에 들어서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어리스>는 무대와 객석 공간을 완전히 뒤집었다. 원래 무대 공간에 간의의자를 배치하고, 객석을 무대로 쓴다. (저 많은 객석을 다섯 명의 배우만 사용한다!!) 객석 의자들이 학교 분위기를 내주기도 하고, 의자에 미리 등장인물의 인종을 표시해 둔 것도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인다. 또 서로 다른 위치에 붙어 있는 표식은 인종 문제가 이 작품에 중요한 지점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면 이름표가 사라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의적인(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여 한국 배우를 흑인, 백인으로 인식해야 한다. 연극의 이런 설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배우들이 모든 인종을 연기하는 한국 공연 특성상 작품의 중요한 지점인 인종 문제가 종종 흐릿해진다. 게다가 객석을 채운 관객들이 거의 다 한국인, 주인공 L, M과 같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미국 공연처럼 소수자의 권력 문제가 확연히 드러나기는 어렵다.


1/16 미국 원주민, 흑인, 동양인은 단 한 명에게 허락된 명문대 합격을 손에 넣기 위해 자신의 소수자성을 적극 이용한다. 우리의 주인공 L과 M은 이 전형을 이용해 대학에 가기 위해 미국 중부 어느 소도시로 이사 왔고, D(정대용)는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미국 원주민이라 받게 된 “인디언” 증명서를 늘 차고 다닌다. D에게 "인디언" 증명서는 새로운 삶을 부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D가 평범한 백인이었을 때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몇 안 남은 인디언의 후손임이 증명된 이후, 그러니까 소수 인종임이 확인된 이후 그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원주민 협회(?)에서 장학금도 받게 되었고, 아이비리그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 자리를 두고 소수 인종끼리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겉보기엔 멀쩡한(?) 백인인 D가 소수 인종 전형에 합격했을 때, L과 M은 마치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고 결국 그를 죽이기로 한다. 그런데 D가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는 동양인 여자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D가 L과 M에게 살해당한 후에는 흑인인 M의 전 남친(변승록)이 이 인종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한다. 고생고생해서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차지하다니!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한 L과 M은 흑인 학생까지도 없애 버린다. 이 치열한 입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종 간의 위계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관객으로서 이런 부분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다소 아쉽다. (한국의 경우 지역 균등 할당제로 학생을 선발하는 수시 전형이 소수 인종 전형에 비견될 만 할텐데, 분명 다른 느낌이다.)


<피어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L과 M은 대학에 가기 위해 같은 반 학생을 살해할 뿐 아니라 서로에게 살인의 책임을 전가한다. 이 장면들은 정말 섬뜩하다. ‘디아스포라’ 작품으로 소개된 한국계 외국인, 재외 교포들의 작품들은 자주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해왔다. 여전히 한국적 사고 방식, 생활 태도를 유지하는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갈등이 있을지언정, 고국을 떠난 고된 삶을 위로해주는 것은 가족 뿐이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함께” 외로움을 이겨낸다. 하지만 L과 M에게는 "가족"보다 자신의 욕망이 더 중요하다. 서로를 위해 진학 순서를 정해두었고 힘을 합쳐 D를 살해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서로의 손을 매몰차게 놓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그녀들은 동양인 쌍둥이라는 자신들의 소수자성을 적극 이용한다. 머리핀과 가방 색으로만 구별되던 그녀들이 머리핀과 가방을 뒤바꾸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M은 L을 연기하여 살인죄를 그녀에게 덮어씌우고, L은 죽은 M 대신 아이비리그에 입성한다. 앞으로 L이 M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죽은 D와 흑인, M의 망령까지 그녀에게 나타날지 모르니까.


<피어리스>는 <맥베스>를 재치있게 변주한 작품이었다. 3명의 마녀 대신 더러운 애(김신록)를 등장시킨 것도 매우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다른 인물들과 고등학교라는 배경과 잘 어우러진다. 마지막에 캐롤라인으로 변신한 배우의 연기도 무척 좋았다(김신록 배우님 미국인 연기, 늘 감탄하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손만 뻗으면 재미있는 일(또는 영상)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만큼 극장에서 재미를 주기는 어려워진 것같다. 하지만 <피어리스>는 작가의 재치, 배우들의 연기, 무대와 객석을 완전히 뒤바꿔 배우를 우러러보게 한 선택 등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지만 일찌감치 매진이었다. <피어리스>의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사진: 김솔

2019년 9월 9일 월요일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혹은 언제인가?

임승태

성공한 건축가 마틴(박윤석)이 50세 생일을 맞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TV 진행자인 로스(이준영)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마틴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실비아라는 이름의 염소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잘못 읽은 게 아니다. 염소다. 그리고 마틴이 말하는 사랑은 여느 반려 동물과 보호자의 관계가 아니라, 성관계를 포함한 것이다. 로스는 이 사실을 마틴의 부인 스티비(김수아)에게 편지로 알리고 그 결과 마틴과 스티비, 그리고 그들의 아들 빌리(박지훈)가 누리던 평화는, 무대가 난장판이 되듯, 산산조각난다.

아들 빌리가 게이라는 설정이 곁들여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충격적일지언정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틴과 스티비 부부는 아들의 게이 정체성을 존중해왔고 그것은 이 가족에게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읽힐 수 있다: 남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수간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마틴이나 그를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일 수 있지만, 작가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작품을 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틴의 어떤 말도 스티비의 반론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비아에 대한 마틴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그 관계에 염소가 동의했음을 마틴은 입증할 수 없고 그래서 그 관계는 일방적이고 진지하기에 더욱 병리적이다.

이 논쟁이 동성애에 대한 ‘메타포’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다. (메타포라는 단어가 실제로 대사로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작가가 혹시라도 이 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염려한 노파심의 반영일 수 있다.) 전선이 이종간(異種間)의 사랑에서 펼쳐짐으로써 동성간(同姓間)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이 그 전선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면 <실비아>는 마치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평화롭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이 2000년에 쓰인 작품이란 점을 감안해야 수간-동성애 메타포가 유의미하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 시점, 특히 미국을 비롯하여 가까이는 대만까지 동성간의 결혼이 허용된 시점에서 보자면 마틴/스티비 같은 부모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이런 부모는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이 작품의 논점이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 극을 마틴이 아니라 빌리를 위해 (어쩌면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위해)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연은 작품의 메시지를 충분히 잘 전달했다. 다만 지난 20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가 많이 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대를 특정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공연 초반 로스가 인터뷰 녹화를 위해 꺼내는 카메라가 DSLR 카메라가 아닌 ENG 카메라였으면 어땠을까. DSLR가 설치되는 순간 동시대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이야기가 동시대라고 하면 특별히 새로울 게 없고 그래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홍석천, 난 “호모다””라는 헤드라인이 스포츠신문 첫면을 크게 장식한 2000년 혹은 그 이전 어느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모든 상황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올비는 의문사 WHO를 유난히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WHEN이 더 중요하다.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올비 작, 라성연X베타프로젝트
2019년 8월 7일-11일 선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