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용비어천가

이예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영진 리의 <We're gonna die>를 미국 관객들과 함께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미국이었고, 미국 관객들이 있었고, 미국에서 살아내고 있는 영진 리가 무대 위에 있었다. 2017년도 국립극단 제작 <용비어천가>는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한국에서, 한국 관객들 앞에서, 한국 배우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영진 리의 오리지널 버전 공연과 국립극단 제작 버전 공연 사이에 낀 애매함은 단지 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지역성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애매함의 전부였을까?
     
사소한 외로움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늘 비극적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비극이 된 모든 사건이 응원 받는 이야기. 아프고도 즐거운 이야기, 신이 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그녀 스스로에게서 모두 응원 받는다. 영진 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양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위로한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을 들으면서 ‘참 강건하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나와 너를 깊은 곳까지 끌고 가서 기어이 나의 깊이와 너의 깊이를 만나게 한다. 그래서 특정한 인간의 특수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보편의 만연한 애잔함으로 만든다. 나와 너를 연결하고 고통과 응원을 연결하는 이러한 시선은 내게 강건함으로 와 닿았다. 이것은 또한 그녀가 살아 온 인생에서 빚어진 힘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구별과 차별, 다름과 억압, 분노와 부당함을 온 몸으로 껴안고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 가능성과 상상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보다 깊은 차원의 힘. 흔히 ‘히스테릭’이라는 단어와 ‘코미디’라는 단어를 합쳐서 ‘히스테릭 코미디’라는 단어로 그녀의 작품을 수식하고는 하는데, 사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히스테릭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고 히스테릭과 코미디를 단지 결합한 무엇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히스테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씁쓸함만 있는 것도,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출되고 다듬어진 공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살아내고 있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삶을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내고 있음이 느껴졌기에, 그래서 강건했다. 비록 미국인 관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인 내가 영진 리의 공연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미국인 관객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공간에는 미국인과 한국인을 넘어선 ‘살아남은 인간’의 온기가 있었고 우리 모두가 울고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팔목이 떨어져라 박수를 보낸 이유는, 미국계 한국인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을 응원하는 열렬함 때문이었다.    

<We're gonna die>에서도 일부분은 인종 차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종 차별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각자가 삶을 살고 있지만 사는 동안에는 ‘삶’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그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하여 그녀는 결코 현실을 고발하지도 토해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며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의 전체에 'We're gonna die'라는 제목을 붙인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순간의 살아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죽을 것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몫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올해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이라는 기획 타이틀의 한 프로그램으로 섭외된 순간부터 영진 리의 공연은 ‘미국계 한국인’의 공연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온몸에 걸쳐 입게 되었다. 비한국과 한국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취지로 붙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정의내릴 수 없는 내면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선 보이겠노라는 다소 민망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온전히 영진 리의 것은 아닐지라도 공연의 어느 틈새에는 영진 리의 강건함이 있겠지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신록 배우가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모습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공연은 시종 ‘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 그리고 그 시선에 대해 ‘한국’인이 가지는 감정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한국인과 미국인, 그 사이의 균열에 집중하는 이 공연은 급기야 그 많은 한국인 관객들로 하여금 짠 내 나는 눈물을 몇 번씩 뽑아내고 말았다. 사실 나도 몇 차례 울었다. 울면서도 궁금했다. 영진 리의 강건함을 한국인의 아픔으로 만든 이유는 무얼까?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연출자에게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지만, 대화가 시작되고 연출자가 한 말을 듣고는 그냥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연출자는 원작을 해석하지 않고 오로지 ‘재연’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해석이 없었다는 공표에 할 말이 없어진 것도 잠시, 그가 말한 재연의 대상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영진 리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사건, 공기의 겉면을 재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과연 이 공연은 원작 공연을 재연한 것일까? 어떠한 삶이 몇 몇의 코드가 될 때, 삶의 진행이 무언가의 고발로 치환되고 전시될 때 실체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껍데기로 왜곡된다.  

지금 여기의 이들의 공연이 아닌 누군가(영진 리)의 이름을 빌린 공연. 창작자들이 작품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지는 기획‘된’ 공연. 나 역시 기획자로서나 드라마투르그로서 그러한 상황에 끼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이 있으니… 아쉬움을 느끼기에 앞서 지금 이곳 내가 속한 곳에서 연극‘함’의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타이틀 그 이상이 되지 못한 기획의 폭과 질문이 부재한 연출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선 배우, 배우들의 사투는 눈물을 쏙 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진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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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 중(中) <용비어천가>,
영진 리 작, 오동식 연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2016.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