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2일 월요일

7번국도 단상

임승태

  무대 위에는 자동차 한 대가 해체되어 있었다. 뼈대를 앙상하게 드러낸 메인 프레임을 비롯하여 시트와 같은 큰 부품들은 뒷무대 구석에 있고 나머지 작은 부품들은 무대 바닥 전체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는 조명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무대는 무언가를 제시하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미지를 스스로 떠올리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직 아이’ 그림과 같다. (지나간 유행을 비유로 든 것에 대해 젊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공연에서 직접 사용하는 가장 주도적인 이미지는 길이다.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여러 장면의 배경이 되는 7번 국도, 그리고 인물과 인물이 만나고 헤어지는 여러 상황 속의 길이 (특히 조명을 통해) 무대에 그려진다. 무대 바닥의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 내는 격자를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그들의 절제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정해진 길로만 가다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체스판 위의 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크고 작은 기계 조각들의 배열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른 이미지를 소환한다. 지영이 이야기를 할 때면 직접 언급은 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공장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혹은 그 반도체가 장착된 전자 기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주영이 이야기 때에는 밥먹으러 갈 때도 맞추어야 하는 군의 대오가 떠오른다.
  하지만 텍스트가 감추고 있던 모든 죽음이 드러나고 나면 앞서 일었던 기계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가져가기 어렵게 된다. 조각난 자동차의 잔해는 어느덧 마치 생명을 다한 유기체가 서서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품들이 무작위로 놓여 있었다면, 혹은 어느 순간 대오가 헝클어진다면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전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무대 위에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만지거나 들거나 옮길 법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8년 낭독극을 못 본 입장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공연은 거대한 무대 오브제 위에서 벌어지는 낭독극 같은 인상을 준다. 배우들은 부품들 사이를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고 나가며 거의 변함없이 부동 자세로 대사를 관객에게 전달했다. 격행대화(stichomythia)의 향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양의 대화가 오고가지만, (의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배우들이 고함치듯 내뱉는 대사들은 그것이 극적 대화이길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단적인 부동성이나 배우들의 절규, 그리고 사이사이 긴 침묵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아는 관객에게 희생자 및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단한 방식이었고,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연극에서 ‘연극적 재미’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관객을 힘들게 만드는 선택이기도 하다. 지루함, 피로함을 토로하는 관객 반응도 적지 않고, 나 역시 공연 후반 5분에 한번씩 핸드폰을 열어본 한 관객의 ‘관크’를 당해야 했다. 최소한 지난 5년간 연극이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왔고 이번 작품은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참사와 연극은 정확히 반대되는 사건이기에 전자를 후자에 담는 시도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조금 더 긴 호흡이 필요해 다음 기회로 미룬다.

7번국도
2019.4.17~2019.4.28
남산예술센터
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95

2019년 4월 2일 화요일

[#fair_play] 극단 Y,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극단 Y
2018년 11월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하나, 나는 나 자신을 우선순위로 둘 권리가 있다. 즉,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존중받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언제든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작업을 중단했을 시 가급적 대화를 제안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
하나, 나는 누군가가 외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거나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발언을 하거나 위계를 작동시킨다고 느낀다면(모든 혐오발언 포함), 그를 저지하거나 나의 입장과 의견을 발화할 권리가 있다.
하나, 성별·나이·경력 등에 의해 생기는 위계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작업이 시작 되기 전 반말/존댓말 및 호칭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작업에 앞서 반말/존댓말 및 호칭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하나, 나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작업 전후의 밥/술자리 등의 자리는 의무가 아니며 서로에게 강요할 수 없다.
하나, 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타인의 역할을 존중하고 신뢰한다. 역할에 따른 권한을 존중하되, 한 사람에게 과중한 책임과 업무가 일임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소통한다. 구성원들이 나의 역할 및 권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함께 토의하고 그 결과에 따를 의무가 있다.
하나, 나는 연습 및 공연에 관련된 약속 시간을 지킬 의무가 있다.
하나, 나는 공연제작과정 전반에 걸쳐 타작업자들을 존중한다. 평가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제안한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혐오 발언 및 욕설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 나는 공연제작과정 중 이야기하게 되는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연습실에서 알게 된 타작업자들의 이야기를 외부에서 발설하지 않는 것을 약속한다.
하나, 공연제작과정 중 문제가 발생했을 시 문제와 관련된 교육 및 워크샵(ex-성폭력 예방교육)을 제안할 수 있고, 나는 문제해결을 위한 교육 및 워크샵을 함께 참여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한 예산은 가급적 공적인 제작비로 지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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