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셰익스피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셰익스피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년 6월 18일 금요일

광기(狂氣)가 물성(物性)을 만났을 때: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2008,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2021)

글: 조혜인 (https://brunch.co.kr/@hichotheatre)

ⓒ Arno Declair, 2008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은 1947년 처음 개최되어 여름이면 인구 약 8만 정도 밖에 안되는 프랑스 남쪽의 조그만 도시 아비뇽에서 열렸다(임혜경, 76). 아비뇽은 변변한 공연시설 하나 없는 지방의 소도시였는데 유명 배우 장 빌라르와 제라르 필립, 몇몇 뜻을 같이하는 연극인들이 내려와 파리 연극과 차별화하면서 일반인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대중을 위한 연극을 선보였다(임혜경, 76). 포스트코로나(post COVID-19)시대를 맞이한 올해, 이러한 아비뇽의 기운을 담아 LG아트센터에서 기획공연으로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를 선보였다.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과 본 기획공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이 코로나로 발이 묶인 한국 관객들을 위해 LG아트센터 무대로 찾아온다. 올해로 75회를 맞이한 아비뇽 페스티벌은 영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양대 공연예술축제로 손꼽히고 있으며, 이 축제로 인해 작은 도시 아비뇽은 해마다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예술가와 관객들로 북적이는 예술도 도시로 변화한다. (...)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와과 함께 한국 관객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공연 5편을 필름으로 준비했다. 독일의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의 파격적인 <햄릿>, 벨기에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안무가 안느 테레사와 로사스 무용단의 <체세나>를 비롯하여 발표하는 창작극마다 몰리에르상을 휩쓰는 극작가이자 대표 연출가인 조엘 폼므라의 <콜드룸>, 프랑스 오데옹 국립극장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아비뇽 페스티벌 총 감독을 맡고 있는 연출가 올리비에 피의 <리어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프랑스 연극계에 떠오르는 신예 연출가 토마스 졸리의 <티에스테스>까지. 이름 하나만으로도 쟁쟁한 세계 공연예술계 대가들의 작품 5편을 5일간 LG아트센터 무대 위 대형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다. (LG아트센터)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는 LG아트센터 대극장 규모의 스크린을 통해 아비뇽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필자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과 조엘 폼므라 <콜드룸> 두 편을 관람했다.   그 중 <햄릿> 을 중심으로 본고의 논의가 펼쳐질 것이다. 한국 관객인 필자는 아비뇽의 공연과 어떻게 관계 맺었을까?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극’을 선보였다. 아비뇽의 무대 위, 지극히 연극적인 인물들을 통해 필자는 무엇을 감각했으며, 쓸 수 있을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 연극 속의 연극을 하였을까? 샤우뷔네(Schaubühne)의 <햄릿>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극중극은 어떠한 만남을 가질까?

우선 <햄릿>의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스터마이어는 “연극은 삶의 방식에 도전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는 곳이다.”라고 언급하며, 선대 연극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아르또(Antonin Artaud), 메이예르홀드(Vsevolod Emiljevitsch Meyerhold)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성장해나갔다. 이는 <햄릿>에 등장하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실현해 내었다. 오스터마이어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는 원작을 투명하리만큼 해석하고, 원작이 가진 이야기를 ‘지금, 이곳(Here and Now)’의 삶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배우에게 연기적 접근에 있어서 심리적 요구를 하기 전에 작품에서 어떤 장면이 매력있는지, 발전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며 세계관을 만들어간다. 연출가로서 배우에게 작품이 어떻게 해석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텍스트의 부분과 만나게끔 지원하며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오스터마이어는 독일의 동시대 연출가연극(Regietheater)을 공고히 하였지만, 연출가의 컨셉이나 지시에 대한 요구가 아닌 배우가 가진 표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어 또다른 의의가 있다. 오스터마이어는 그가 고집하는 미학을 반복하지 않으며, 매번 텍스트마다 발명을 하듯이 작품을 개발한다. 텍스트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텍스트의 내용을 핵심 삼는다. <햄릿>의 ‘햄릿’ 역을 맡은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는 오스터마이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오스터마이어에게는 희곡의 바닥을 헤집는 일종의 편집적 집착이 있다. 투명해지도록 해석을 한다. 배우에게 세밀하게 설명을 하고 배우는 배역의 역할에 대해 안전하게 느낀다. 그 설명은 리듬과 다이나믹한 구조로 된 일종의 악보와 같다. 거기에 희곡이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재료를 강조하고 아로새길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주어진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명료하고 정확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idinger)

또한 오스터마이어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예를 들어,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언급한 바 있다. 

한번은 오스터마이어가 입센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입센은 나에게 잘 만들어진, 플롯으로부터 촉발된 희곡을 제공해주는데, 이것은 나의 목적을 위해 다시 쓰기와 적용을 가능케 한다.”  

Ostermeier once said of Ibsen. “But he provides me with well-made, plot-driven plays, which I can rewrite and adapt for my purposes.” (Crawley)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작품의 본질에 가 닿으려는 오스터마이어의 작품관이 반영된 <햄릿>은 과연 어떤 공연이었을까?

공연은 햄릿의 아버지인 ‘햄릿 왕’의 장례부터 시작한다. 무대의 온 바닥에는 흙들이 충분히 깔려 있고, 장례식에 내리는 비는 스프링쿨러에서 발사된다. 흙 위에는 앞 뒤로 이동할 수 있는 사각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가로로 된 긴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황금색 체인으로 된 투명막이 내려와있다. 장례 중 햄릿은 손으로 흙을 집어본다. 아버지의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장례가 막 끝나자마자 연회가 시작된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의 결혼이다. 햄릿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애도로 침통해야 할 국가와 왕실에 ‘절제된 마음’이라며 그와 상반되는 분위기의 결혼식이 열린다. 흙, 땀, 물에 흠뻑 젖어 구석에 조촐하게 앉아 은박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햄릿만이 상식적인 애도의 과정을 겪는 국가 및 개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머지 인물들은 게걸스레 식사를 한다. 클로디어스는 거트루드와의 결혼을 선언하는데, 햄릿은 말한다. “전 이런 친자관계 필요 없습니다.”

거트루드의 노래가 이어진다. 괴상한 음색을 내는 거트루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투명막에 이미지로 투사된다. 일렉기타 소리가 삽입되며 그 기괴함은 절정에 치닫는다. 거트루드의 음성은 찢어지고, 햄릿은 거트루드의 위선적인 눈물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거트루드는 베일을 벗자 ‘오필리어’로 변신한다(1인 2역).

햄릿의 국가인 덴마크는 감옥과도 같아졌으며, 햄릿은 실성한 듯 절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 곁에서 디제잉을 이어나간다. (실제로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실제로 DJ 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와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은 햄릿의 기이한 행동에 심히 당황한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나간 식탁 위, 햄릿은 올라가 독백을 한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일에서 흔히 살 수 있는 ‘Ja!’(영어 ‘Yes’에 해당) 우유를 마구 흔들어 뿜어내며 광기에 휩싸인 채 햄릿의 명대사를 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햄릿은 그들이 여기로 오게 된 까닭을 말해준다. 오늘 저녁에 연극이 있을 거란 소식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는 다시한번 이어진다. 이번에는 엄숙하게, 비이성적인 햄릿이 아닌 이성적인 햄릿으로 되돌아온 듯 독백을 이어 나간다. 햄릿의 온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으며, 오필리어는 햄릿을 지켜본다.

햄릿은 오필리어와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때, 햄릿의 광기는 또 한번 그 수위가 치솟는다. 필자는 희곡 및 타 <햄릿> 공연으로 오필리어를 접했을 때, 실연으로 인한 오필리어의 자살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둘이 얼마만큼 사랑했기에?’ 라는 물음을 충족시켜주는 공연이 필자에겐 없었다. 그러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고 나니 왜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했을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햄릿은 순백의 옷을 입은 오필리어를 흙 속에 파묻으면서까지 저주하고, 냉대하고, 또 키스하며 자신의 사랑표현을 진심으로 하는 것 같다가도, 또 오필리어를 흙 위로 내동댕이 친다. 흙 위에서 난장을 벌이며 오필리어가 가진 순백의 사랑을 철저하게 더럽히는 장면은 흙이 가진 ‘때묻음’의 속성으로 인해 비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햄릿이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그러한 가학적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가했어야 할 햄릿의 아픔이 진흙처럼 묻어 나온다.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수모를 당했으니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감정적 이해가 되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이기에 여성 필자로서 조금은 불편한 부분도 있었지만, 흙이 가지고 있는 물성(物性, Eigenschaft der Materie)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만나 배우의 몸에 뒤엉켰을 때 폭발적인 광기(狂氣, Wahnsinn)가 발산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햄릿의 광기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임과 동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내적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다”(임승태, i). 

햄릿이 연극배우들과 만나 연습을 한다. 특히 연극에서 죽음 이야기를 할 때 숙부를 잘 관찰하라고 당부한다. 연극의 이름은 <쥐덫>이다. 연극을 보기위해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가 등장하고, 이 때 관객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 투명막에 투사된다. 극장에 앉아있는 관객들 또한 같이 <쥐덫>을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점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창출한다.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거트루드로 상징되는 역할로 등장한다. 두 젖꼭지에는 주스를 흘려 마치 피흘림을 연상시키고, 랩으로 왕 역할의 배우의 몸을 마구 감싼다. 왕비 역은 왕 역의 몸에 우유를 붓는다. 왕 역은 괴로워한다. 이어 붉은 피가 부어진다. <쥐덫>의 모든 이야기는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양심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왕이 곤히 자고 있을 때 독살당하는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 역은 결국 죽고, 그의 왕관은 왕비 역에게 간다. 독살 장면에서 배우와 클로디어스의 눈이 마주친다.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는 도망가고 햄릿은 기쁨의 춤을 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할까?

<햄릿>에서 배우들은 직접 카메라를 잡는다. 이런 카메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덴마크 왕실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장치이자 햄릿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햄릿이 계획한 연극 <쥐덫>이 끝나고 배우 아이딩어가 왕비 역에서 햄릿 역으로 전환할 때 햄릿의 배불뚝이 몸매를 위한 속옷을 착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장실 뒤에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고스란히 인지시킨다. 이러한 극중극에 대해서 심정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연기 스타일에서는 ‘가식과 위장’이라는 기본적 원칙으로 반영된다. 그가 뚱뚱보 의상을 입고 뚱뚱한 왕자로 나왔다가, 극 후반에서 뚱뚱이 의상을 벗어 던지는 것도, 가식과 위장의 세상적 현실을 조롱하는 하나의 오브제적 장치다. (심정순)  

이인순 또한 이러한 전환의 사이를 "‘연극적 행위를 감추려 하지 않기에 오는 행위의 진실’로 다가왔고, 또 소외효과가 가져오는 ‘연극놀이’의 자유로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이인순, 254). 또한 극중극은 “허구와 현실, 과정과 결과, 그리고 내용과 형식의 공존 및 이중성에 대한 연극적 사유인데, 이중성은 햄릿의 광증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이기도 하다”(임승태, 43). 광기는 ‘비규범성’과도 맞닿는다. 햄릿은 엉뚱하게 신부복을 입은 채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때 거트루드 앞에서 폴로니어스를 총살한다. 거트루드는 말한다. “Was habe ich getan?”[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Was ist mit dir?”[너에게 무슨 일이 있니?] 특히 거트루드가 오필리어로 전환되는 과정은 인상적이다. 필름이 곧 끊길 듯한 영상이 앞뒤로 반복되듯 배우 ‘예니 쾨니히(Jenny König)’는 반복동작을 취하며 오필리어로 변한다. 무대 위의 흙을 온 얼굴과 몸에 뭍이는 행위를 하고, 오필리어의 마지막은 ‘몸에 생수를 부어’ 표현한다. 흙과 물, 즉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사의 본질을 통해 오필리어의 죽음이 다가온다. 오필리어는 익사하는 장면에서도 대사를 하는데, 그 대사의 리듬마저도 영상이 끊길 때 나는 소리처럼 들린다. 온전히 익사하자 더 이상 오필리어의 말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CD가 불안정하게 튕겨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햄릿은 덴마크로 돌아온 ‘레어티스’와 결투를 치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햄릿의 광기 때문이다. 이 때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햄릿은 다시한번 소리를 치며 “Musik ausmachen!”[음악 꺼!]를 외친다. 음악이 꺼진다. 햄릿의 적은 그 자신의 광기인 점을 다시한번 주지시킨다. 드디어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레어티스는 검을 뽑아 들고, 햄릿은 식탁 위의 숟가락을 집어 든다. 그 사이에 클로디어스는 잔에 독을 타게 되고, 거트루드는 그것을 마신다. 계획에 의해 레어티스의 검에 독이 묻어 있다. 햄릿은 검에 맞는다. 숟가락을 놓은 햄릿 또한 레어티스를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로디어스를 찌른다. 광기에 어린 햄릿의 복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죽어가는 햄릿과 무대를 채우는 진공소리가 남는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아우성을 친다. 햄릿의 절규는 온 덴마크를 찌르고 마지막까지 광기의 동아줄을 붙잡는다.

필자는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며 햄릿의 ‘광기’에 집중했다. 과연 햄릿이 정신이 멀쩡하지만 끝까지 미친 척을 하는 걸까? 혹은 햄릿이 미친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 정말 미쳐갔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햄릿’만이 그 진실을 안다. 또한 2021 아비뇽 시네마 페스티벌의 <햄릿>은 흙, 물 등 물질이 주는 감각을 스크린을 통해 함께 느끼게 하면서 배우의 감각을 더욱 상상하게 했다. 비록 스크린이라는 겹이 있었지만, 만약 <햄릿>이 공연이 아닌 ‘영화’를 위한 상연이었다면 그만큼 배우의 감각에 대한 상상력에 함께 동참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햄릿이 흙을 먹는 장면이나, 오필리어가 흙을 뒤집어쓰는 장면 등에서, 만약 영화였다면 흙이 주는 냄새나 질감 같은 물성에 대해 간과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물성이 두드러지는 공연일수록 객석에 앉아서 배우와 함께 호흡할 때,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가 물질을 감각하는 것을 함께 더 상상하고 반응하게끔 해주는 것 같다. 만약 실제 아비뇽 객석에 앉아있었다면 그 감각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오스터마이어는 우리들 가까이로 와서 느끼고, 감각하게끔 하는 소통방식을 실천해냈다. <햄릿>의 배우들이 심리적 연기를 지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몸’을 통해 또다른 소통방식을 만들어냈다. 특히 흙, 물질은 이미지라는 정반대의 질감과 충돌한다. <햄릿>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신체와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처럼 <햄릿> 공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물성은 ‘햄릿’이 가진 지독한 광기가 인물들에게 전염되며, 또 다시 공연이 가진 물성이 전염된 광기들과 만나며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경험을 선사해준다. 특히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은 현대인의 고독이 잘 표상화 된 공연으로 아래와 같은 평가는 2021년 현재에도 유효하다. 

객석의 관객은 고통의 열병에 들떠 있는 광기의 청년 햄릿에게 때때로 감정이입이 가능해지고, 햄릿의 동시대적인 거친 언어는 일상에 억압되고 축소된 젊은이들에게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 공연은 포스트모던적인 신체 중심의 감각적 표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적 파스티쉬(pastische) 스타일”(심정순), 그리고 신사실주의가 만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내재된 보편적인 주제 – ‘삶과 죽음’, ‘삶과 연극’, ‘허상과 실제’ – 에 작금의 청년문화가 함께하면서 글로벌한 ‘대중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인순, 264)

이와 더불어 필자는 <햄릿>에서의 극중극은 단순한 복수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고, 감정이입을 통한 보는 이의 양심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검’과 같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관객으로 하여금 선악을 판단하게 하고, 극 속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과 골수를 쪼개는 힘’이 바로 연극에 담겨있다는 반증이다(히브리서 4:12). 이상으로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리뷰를 마무리한다. 두드러지는 광기와 물성으로 인해 2000년대 초반 공연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2021년에 스크린을 통해 만나보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공연예술 관계자들 및 관객들이 아비뇽으로 ‘몸(Körper)’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LG아트센터에 방문해 거리두기를 하며 아비뇽의 옛 공연들을 관람했다. 특히 코로나가 어서 종식되어 <햄릿>과 같은 공연으로 많은 관객들이 배우와 물성을 더욱 가깝게 감각할 수 있는 공연예술계로 나아가길 소망해본다.

참고문헌

심정순.「오스터마이어 <햄릿>: 몸, 감각,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미장센」. 『오늘의 서울연극』제1호, TTIS 편집부, 2020. 10.

“아비뇽 시네마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LG 아트센터, http://www.lgart.com/UIPage/perform/calender_view.aspx?seq=252591

이인순.「공연분석: 오스터마이어의 <햄릿>(프랑스 2008, 한국 2010)」, 『한국연극학』 Vol.1, No.52, 2014, 229-270. 

임승태.「한국 <햄릿> 상연에서의 광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임혜경.「60주년이 된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과 이론』Vol.- No.23, 2006, 78-86.

Crawley, Peter. <Ostermeier’s ‘Hamlet’: what did you expect?>. THE IRISH TIMES. 2014-08-23, https://www.irishtimes.com/culture/stage/ostermeier-s-hamlet-what-did-you-expect-1.1901339.

<햄릿(Hamlet)>.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라르스 아이딩어, 예니 쾨니히 출연. 샤우뷔네 제작.  2008.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LG 아트센터, 2021. 5.

Eidinger, Lars. 인터뷰.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기예술학과 연기양식론 수업자료 (교수자: 최영주),  조혜인 정리, 2021. 6. 


아래 버튼을 클릭하시면 이 글의 필자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donaricano-btn

2018년 8월 9일 목요일

a postscript to “애도의 연극, 연극적 애도”

임승태


사계절 연극제에서 만났던 <임영준 햄릿>을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내 느낌엔 내용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연출의 말에 따르면 2분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이라 한다. 어쩌면 리뷰를 쓴 이후에 다시 보는 것이라 특정 장면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몇 부분이 수정된 것도 발견했다. 그 변화에 내 글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쓰기보다 지난 해 <인디언 밥>에 썼던 글(http://indienbob.tistory.com/1033)을 약간 다듬어 2018년 공연의 리뷰로 대신한다. 다만 한 해가 지나면서 지하철 효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이 파악하는 속도도 느려진 게 아닌가라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욕심 같아서는 임영준이 5년에 한번쯤은 이 연극을 다시 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자칭 ‘대배우’ 임영준이 진정한 대배우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들의 팬들이 함께 보고 축하하며, 또한 우리 사회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대와 객석이 함께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

<햄릿>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는 사실은 그 유명한 극중극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다만 메타극(metatheatre)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라이오넬 에이블(Lionel Abel)이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던 한 가지 내용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햄릿은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극중 인물 스스로 ‘세상은 연극’(theatrum mundi)이라는 인식 하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적극적으로 플롯을 꾸미고 다른 인물을 조종하고 움직인다. 내 생각엔 바로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햄릿>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연극인들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연극적 실험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햄릿>은 극중 인물도, 그것을 공연하는 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극작가 의식에 충만해야 하는 작품인 것이다. 

<임영준 햄릿>은 공연 중 반복되는 여름 노래 메들리만큼이나 밝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과장된 쾌활함 사이에는 데뷔 ‘11년차’ 연극배우 임영준의 자기 연민이 언뜻언뜻 베어난다. 무려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준은 관객이 기대할 법한 연극을 시작하는 대신 자기 얘기, 그중에서도 자기가 해왔던 연극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낸다. 하지만 정작 연습할 때 입었다가 무대 의상이 되었다는,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하기 힘든 쫄 반바지 하나 입고 있는 배우의 행색은 우습고 또 서글프다. 근육과 살이 떨리고, 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를 튀기며 자신의 지난 10년(2017년 기준으로 10년이지만, 지난 1년간의 공연 내역이 추가되지는 않았다)을 되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배역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배우를, 심지어 그의 공연을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몰라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번 각인하면 잊기 어려운 배우가 또한 임영준이라는 것 또한 나는 지난 1년간 경험했다.)

<햄릿>은 지극히 가족극이기도 한만큼 <임영준 햄릿>에 배우의 부모님이 (영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등장은 그토록 당당하던 임영준을 한순간에 조그맣게 만든다. 선왕의 유령이 복수를 재촉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왕자처럼 임영준은 허상에 불과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날 때 욕조 뒤로 숨는다. (2017년 공연에서는 공간소극장의 구조적 이점을 살려 ‘쥐구멍’같은 공간으로 잘도 숨어 들어갔다.) 흥미로운 건 이 상황이 계획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반응을 보며 관객도 적잖이 긴장하게 된다는 점인데, 그건 아마도 관객 다수를 차지한 임영준의 또래들이 비슷한 심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변변한 자리 없이 제 앞가림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머지않아 TV에 나오는 성공한 배우가 되겠다는 임영준의 다짐을 들으며 관객들은 TV라는 말을 대신할 각자의 단어를 속으로 되새긴다. (극장이 넓어져서인지, 관객 구성이 달라져서인지 전년도 만큼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관객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어쩌면 그 원인을 배우에게서 찾을 수도 있다. 마침 오늘 공연에는 그의 부모님이 객석에서 ‘직관’하고 계셨다.)

아무튼 이 연극은 배우 임영준에 대해, 그가 해온 연극에 대해 말하며 <햄릿>의 메타극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적잖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만 80분을 채웠다면 그의 열성 팬이나 친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객이 끝까지 공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라는 희곡에 이런 대사가 있다. “연극에 대한 연극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재미있습니다.” 제작팀의 지인이 아닌 이상 이 소규모 연극을 보러 올 정도의 관객은 이미 연극에 대한 애정 혹은 애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무대에서 되풀이되는 연민의 정서가 특별할 건 없다. 모든 연민이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배우로 살기의 고됨만 있었다면 이 작품은 임영준 본인이 공연 중에 언급하듯 “제목만 햄릿”이라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영준의 다재다능함을 한껏 보여준 다음 하수민, 김정 두 연출가는 애도라는 중요한 주제를 적절히 등장시킨다. 애도에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2014년 이후의 한국 <햄릿>의 주된 흐름이다. 우리는 더 이상 라깡의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 작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이라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 복수를 실행하지 못하고 끝까지 괴로워하는 햄릿의 말과 행동은 비평가들이 오래도록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와 그로인한 막대한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이 인물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 제작된 <햄릿>은, 예컨대 김현탁의 <망루의 햄릿>과 이성열의 <햄릿아비>와 같이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인물의 슬픔을 종종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병치시켰다. 비록 얀 코트(Jan Kott)가 이 말을 하고도 반백년이 넘게 흐르긴 했지만, 세월호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비로소 우리의 “동시대인”이 되었으며, 애도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대상을 향한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유령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기억하고 애도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으라고 요청한다.

무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임영준은 “배고프다”란 말과 함께 컵라면 한 사발을 비운다. 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으나, 앞선 쾌활함이 과장된 것임을 감지했다면 이제 드디어 나올 게 나온다는 느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픈 예술가의 식상한 상징일 수도 있었던 컵라면 장면은 전동차 효과음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십대 정비사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부정적 지표에서는 여전히 OECD 으뜸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이기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1997년생이었던 김 군의 유품 가방에 들어 있었던 컵라면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임영준이 컵라면을 먹는 행위는 자신의 배고픔을 드러내기보다 김 군이 먹지 못한 컵라면을 대신 먹는 하나의 제의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야 말로 배우의 본분이거니와, 그 순간 임영준이 햄릿을 연기하는 목적이 단순히 모든 남자 배우의 로망이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죽음에 있음이 드러난다. 개인적 차원의 살풀이로 시작한 이 연극은 어느덧 사회적 차원의 씻김굿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일까. 임영준, 그리고 김정, 하수민 두 연출가는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이 보기엔 텍스트를 띄엄띄엄 읽고 A급 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저질 B급 코드를 총동원해 공연을 만든 듯 보일지 몰라도 실은 꽤나 성실한 모범생에 더 가깝다. (공연장을 나가며 나는 무대 바닥에 결코 가볍지 않은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의 첫인상은 대사를 이곳저곳에서 마구잡이로 발췌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내 햄릿의 주요 대사가 조목조목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유명한 제4독백이 빠질 수 없다. 임영준은 오디션을 보는 듯 여러 가지로 연기 톤을 바꿔가며 이 독백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낭송한다. 그중에서도 햄릿이 단도를 꺼내들기 직전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왜 <햄릿>이 지금 여기서 공연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별 오디션은 번번이 이 대사 시작 부분에서 멈추는데 이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아래 대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그 누가 견디겠는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폭군의 횡포를, 가진 자의 오만함을,
실연의 아픔을, 법의 더딤을,
관리의 교만을, 유덕한 사람이
무지렁이들에게 받아야 하는 모욕을.
이 단도 한 자루면 자신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부조리는 왕자라는 지위에서 쉽게 되뇔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차라리 백성을 개(돼지)로 여기는 거트루드가 그때나 지금이나 더 현실적이다. 일단 왕자가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면 연극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간접 경험해서라고 해두자. 중요한 건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 당시의 관객도 4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관객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임영준 햄릿>이 공연된 2017년, 그리고 2018년 여름에 이 대사는 구체적으로 구의역 김 군의 이미지로 구체화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갑질, 촛불을 탱크로 막으려 했던 계획, 약자에게만 엄격한 법 따위를 떠올리게 한다.

위 대사는 공연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졸역을 덧붙였으나, 적어도 이 독백의 첫 마디는 <임영준 햄릿> 프로덕션의 것을 직접 인용해야 한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그동안 살펴본 <햄릿> 번역서와 공연에서도 “To be, or not to be” 를 이 만큼 적절하게 옮긴 사례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느냐가 먼저냐 죽느냐가 먼저냐가 문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가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의 일상적 질문이라는 사실이 “왜 햄릿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나머지 부분을 구성한다. 이 질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 임영준의 질문이자 햄릿을 연구하며 비정규직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경력직만 찾는 구인 공고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오르지 않는 급여와 오르기만 하는 전월세금 앞에서 이 질문을 떠올린다. 아프다는데 그러니 청춘이라는 둥 붙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더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둥의 정신승리법을 알려주는 기성세대는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고선 위로하는 척하는 클로디어스를 닮아 있어서 더 밉살스럽다. (물론 임영준 배우가 늘어난 나이와 옆구리 살 때문에 스스로를 햄릿이 아니라 클로디어스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클로디어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다만 그러하더라도 임영준과 함께 햄릿의 질문을 되뇌는 동안 우리 모두는 어찌어찌 여전히 살아남았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존재하는 동안 이 우울한 질문이 계속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이 질문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하지만 <햄릿>은 남아있는 자들이 먼저 가야했던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살아낼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햄릿 왕자도 마지막 순간 호레이쇼에게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호레이쇼에게 맡겨진 임무는 특별히 영웅적이지 못한 우리 대부분의 것이기도 하다.

추신2
지난 1년간 조연출 박정호는 김정 연출의 시그니처 코드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할 수준으로 등장했다. <임영준 햄릿>은 김정 연출의 작품에서 조연출 박정호의 무대 위 역할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7년 6월 9일 금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이예은

2001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16년이 지났다. 이 공연도 16년을 더 살았고 나도 16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되는 일. 작품과 나 사이에 낀 긴 시간이 어지럽고 부끄럽다. 그 동안 연극의 힘을 부정만 해 왔던 나의 소란스럽고 편협한 관심사가 모조리 부끄러워지던 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편견이 0점이 되어 연극을 ‘구경’하는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있었던 시간.

성씨로 바뀐 가문, 저잣거리 놀이로 바뀐 대결, 잔치로 바뀐 파티, 춤꾼의 흥으로 바뀐 머큐쇼의 활기, 육담으로 바뀐 성적 지향, 그럼에도 끈기 있게 살아 냄으로 바뀐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전환점, 골계미로 바뀐 철학, 재담으로 바뀐 시, 운동으로 바뀐 긴장, 생명으로 바뀐 초월.

특히 긴장감과 화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분화된 갈등 구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시켜 내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관절이 오태석의 공연으로 와서는 시종 끊어지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열기로 승화된다. 오프닝 잔치 씬에서부터 놀이가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놀이인 역동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정서 속에 생존하던 힘이고 오태석이 우리 연극의 정신을 껴안으려 한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문과 가문이 대결하고, 사랑과 고통이 대결하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은 0이다. 대신 긴장감을 대체하는 역동과 힘이 있는데, 바로 그 힘 속에 모든 감정이 한 데 녹아있다. 이분화의 초월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철학이 역동 속에 공존하는 그 모든 삶과 죽음의 힘으로써 새로이 약동한다. 기쁨과 분노도, 슬픔과 환희도, 화해와 대결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탄성 속에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박력 있게 체감케 하는 음악적 리듬감과 움직임의 활력. 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전통의 정신 속에서 바로 이러한 긍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여태, 아니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이 힘을 발견케 한 오태석의 숨소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로미오가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hug)를 주는 장면은 화해와 대결의 구분이 초월적 고뇌로 승화되는 원작의 지점을 넘어 아예 화해와 대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월적 기지가 단지 깊은 아름다움이기보다 자연스러운 정신처럼 작품 속을 파고든다. 하여 장면 장면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질문이 불거져 나오는 고결한 장면들로서가 아니라 작품 너머에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을 한 데 껴안는 정신이 발현되는 장면들로 지속된다.
 
머큐쇼의 죽음 장면에서는 해학과 박력이 넘쳐난다. 이 장면에서 특히 웃음과 고통이 극렬히 공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건으로 희극과 비극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힘과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힘이 뜨겁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이 지점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랑과 고통, 화해와 대결의 이분법이 초월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어 다시 초월의 불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를 주었던 로미오가 머큐쇼가 죽고 허그 대신 칼을 물리는데, 공연의 이 장면에서 탄생한 급박하면서도 어지러운 운동감은 셰익스피어의 초월적 기지를 넘어서는 짠 내 나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만을 믿으며 화해도 쉽게 꿈꾸던 로미오가 고통과 맞물린 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며 기쁨 속에는 고통이, 가능성 속에는 불가능성이 한 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보다 한 차원 깊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뒤따를 사랑을 그럼에도 감행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죽음 같은 이별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하려고 죽음을 모의한다. 그러나 모의된 죽음은 정말로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서 사랑하고 싶었으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미숙한 첫 사랑의 극단화된 비극이자 죽음과 사랑의 선을 초월할 수 있는 첫 사랑의 극단화된 진실성이라는 사실도.

살아있고, 살아있고, 살아있다.
부러 무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현해내는 일, 작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요- 하고 외치는 숨소리.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억지 해석을 하거나 과장 찬미를 할 필요도 없이 공연의 생명 그 자체를 관객의 피부로 흡수하게 하는 힘.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를 오롯이 오태석의 것으로 살아내게 한 힘이 있다.
해석도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살아내게 한 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관절 마디마디에 묻힌 뜻이 오태석의 숨소리로 체감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태석의 것이 된 것, 그 이상이 있다. 원작도 오태석도 그 이상의 것도 공존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7. 6. 7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6월 1일 목요일

리어왕, 누가 왕을 가장 사랑하는가

임승태

1.
등장인물과 플롯에서 몇 가지 주요한 변경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너릴과 리건의 남편인 올버니와 콘월 공작, 그리고 글로스터의 장남 에드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에드거가 배제됨으로써 몇 가지 사건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두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도버 해협에서 리어와 만나고, 곧 절벽에 몸을 던진다. 에드거가 눈먼 아버지의 자살을 막고자 거짓말하는 장면을 해석적 입장에 따라 부차적으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충성스런 신하인 글로스터가 왕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광대가 더는 익살을 부리지 않고 진지해지는 것 역시 아마도 등장인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으나 광대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측면에서 이질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에드거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에드먼드가 전투에서 패배한 코딜리어를 곧장 칼로 찔러 죽이고 이어 켄트는 활로 에드먼드, 거너릴을 차례로 쏴 죽인다.
한편 다른 배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에드먼드가 더 많은 역할을 흡수했다. 서두에서 에드먼드는 원작의 버건디 공작을 대신하여 코딜리어의 구혼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로 직전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버지 글로스터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 터라, 그가 리어가 가장 사랑했던 딸인 코딜리어의 구혼자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2.
이러한 시도가 더 많아져 마침내 국악에서도 바그너와 같은 거대한 종합예술작품이 등장하는 날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각의 요소를 안배하고 완급을 조절할 연출가와 프로덕션에 맞춤하게 드라마를 다듬어줄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하겠다. 지금은 프로덕션을 받치고 있는 각 바퀴가 제각기 움직이는 바람에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축약되고 각색된 <리어>는 원작의 응집력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연희를 연결해주지도 못했다. 음악이나 소리는 전문적이었으나 드라마와 동떨어져 있거나, 없으면 더 좋았을 법할 때에도 배경으로 깔린다. 풍물을 통해 전투 장면을 표현한다는 취지는 좋았고 연희단의 공연도 흥겨웠다. 하지만 풍물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스크린에 비친 영상과 전쟁 효과음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때로는 풍물 소리와 뒤섞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임현빈이 맡은 소리는 애초 이러한 유형의 공연에 대해 내가 기대했던 바이지만, 그가 등장하는 소수의 대목에서만 셰익스피어와 국악이 직접 만날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TV 사극을 생각나게 했고, 대사나 몸짓에서 국악과 어울리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사용되는 영상은 비단 이 공연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를 공연할 경우 재고해야 할 일이다. 영화가 아닌 이상 셰익스피어를 사실적으로 접근해서는 본전을 찾기 어렵다. 빈 무대나 자연광, 변장 등 한국 연극 전통과 맥이 닿아 있는 셰익스피어 본연의 요소들을 이러한 성격의 공연에서 버려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2017년 5월 31일 이화여대 삼성홀
주최: 문화가있는날, 문화체육관광부
작곡 및 음악감독: 박경훈, 이아람
작창 및 소리광대: 임현빈
연주: 박경훈, 이아람, 성시영, 이정석, 전계열, 최태영
안무: 박준희, 소광웅
무용: 소광웅, 이세미, 유지희, 김병훈, 김우정, 조연정
풍물: 평택연희단
배우: 손성호, 남성진, 신현종, 윤상호, 이영숙, 김지은, 원종철, 윤도훈, 김진영, 김성진

2015년 8월 8일 토요일

휠+애인+산, 제물포 별곡

제물포 별곡: 조선판 베니스의 상인
오유아트홀 (도곡2 주민센터)
2015.8.7

글쓴이_임승태

극단 휠과 애인이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한다고 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minority’였다. 이 드라마에는, 작가 자신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반유대주의 정서가 뚜렷이 드러난다. 반면, 이 극의 타이틀 롤인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친구 바사니오에 대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할만한 근거는 다분하다. 아무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 안토니오와 샤일록이 채무관계로 얽히면서 이 극의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극의 결말은 한쪽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행복하게 해결된 코미디로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법관을 사칭한 채무자의 ‘제수씨’에 속아 재산을 몰수당하는 민족적 소수자의 서러움이 어려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이 1930년대 제물포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전환됨으로써 샤일록의 이름은 긴 다케시로 바뀌었다. 뚜렷한 친일행적을 보이지 않는 그의 이름을 굳이 일본식으로 개명시킨 것은 관객들이 마음 놓고 그를 미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실 극중 인물이 원작의 인물 성격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데, 새 한국식 이름을 암기하며 따라가려니 낯설고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더욱 얄미운 이름인 ‘긴 다케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일록이든 긴 다케시이든 그를 마음껏 미워하긴 힘들다. “제물포 별곡”이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그들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 또한 바로 긴 다케시를 통해서이다. 긴 다케시(백우람 分)는 구만석(안토니오, 호종민 分)의 부친에 의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고리대금업자가 돈을 마다하고 채무자의 살을 취하기 원하는 동기를 제공해준다. 그런데 "몸이 망가졌다"라는 말은 이 극에서 하나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전까지 관객이 배우의 핸디캡을 지우고 극적 가상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다면, 배우가 이 대사를 반복해서 하는 순간 관객은 더이상 배우의 신체적 장애를 모른 척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병신 취급”,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와 같은 대사 역시 단순히 극적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새삼스레 배우들의 몸을 지각하게 만든다. 긴 다케시의 대사는 그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게 어쩌면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제물포 별곡”을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온전히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이들의 연기는 비장애인 배우들과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측면에서 장애인 배우는 무대 위에서 비장애인 배우를 압도한다. 장애인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은 배우 자신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지만, 관객들은 이점이 그들로서는 불가항력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기 보다는 매순간의 의외성에 경탄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비장애인의 연기는 발성이나 표정 등에서 예측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투적이라고 느껴진다. 무대 위의 환상을 배격하고 몸의 현존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극단 애인과 극단 휠이 풀어가야할 과제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앞으로도 몸성(corporeality)이 관객을 매혹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재현과 현존을 오고가게 만드는 공연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바보 햄릿

에스티의 첫날밤에



대학로에 문제적인 포스터가 하나 걸렸다. 공연 포스터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초상화 그 자체이다. 밀집모자를 쓴 한 남자가 웃고 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다. 한국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도상을 그저 한 시골 촌부로 여길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초상화 상단에는 그의 별명 ‘바보’가 쓰여져 있으니 이 그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너무나 명백해진다.

그(의 얼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이나 걸개 그림을 자신의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지내고 있다. 이런 행동이 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이라면, 반대로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소비한다. 이들은 주로 포토샵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를 전혀 새로운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그들은 가라앉는 세월호 유리창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망자를 욕보임으로써 쾌감을 얻는 그들의 심리는 한편으로는 屍姦症(necrophilia)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곳에나 그의 얼굴을 기입하는 충동을 느끼는 그들은 표면적으론 그를 조롱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누구보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말 <변호인>이란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제작사 측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감독이나 주연배우는 가급적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이 특정 정치인과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노력은, 비록 뒤이어 개봉한 <겨울왕국>이 알 수 없는 대흥행을 이루면서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관객수 1100만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지난 5월에 김기덕 감독은 <일대일>이라는 영화를 극장에 걸면서 이 영화가 “[그 분]에게 드리는 고백이자 자백”이라 밝혔다. 이 영화는 그를 직접 언급하거나 그의 일대기를 그린 것도 아니지만 감독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의제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크게 실패했다. 관객수 7000명이라는 초라한 숫자로 개봉 8일차에 영화를 내려야 했다. 실제로 <일대일>은 감독이 말하듯 우리 사회에 결여된 상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록 때로는 영화밖 현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변호인>을 본 1%도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극장을 찾을 7000명이 김기덕의 팬인지 영화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호인의 실명을 직접 거론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김기덕이라는 문턱을 쉽사리 넘어오진 않는다는 점이다.

<바보햄릿>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 있다. 일단 첫날 공연에서는 포스터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적지않은 관객이 그에게 우호적인 그룹에서 단체로 극장을 찾은 것 같았다. 공연 중 객석은 더웠다. 난방도 냉방도 되지 않는 이 무렵 소극장이 늘 그럴 수도 있지만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에 관객들은 열심히 반응했다.

추모의 성격이 강한 공연임에는 분명했다. 극의 말미에는 그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이미 관객들은 전반부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가 언급될 때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데, 마지막에 오리지널 버전이 재생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 바닥에 놓여진 국화는 그를 추모하는 직접적인 제스쳐이기도 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햄릿>의 주제를 애도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결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애도하는 것은 단순히 그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극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그는 햄릿의 아버지 처럼 “나를 기억하라”하지 않고 “나를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버리는 일은 그대신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 바깥 프레임을 이루는 기사 정정 에피소드는 결국 한 소시민의 각성과 변화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실천을 강조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 이 연극은 먼저 간 그들을 남은 자들이 어떻게 기릴 것인지 질문한다.

“햄릿” 그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최근 트렌드에 따라 Shakespeare retold 방식의 설정, 테넌트의 <햄릿>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 CCTV 등이 이 공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이윤택의 <햄릿>과 닮은 점이 많다. 극 초반에 햄릿이 벗은 몸을 보여준다든지, 왕과 오필리어의 관계, 그리고 Closet Scene에서 햄릿이 어머니를 겁탈하려는 모습 및 왕비가 왕자를 달래주는 장면은 이윤택 버전의 되풀이라 할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내는 편지의 문구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연출 자신이 이윤택 <햄릿>의 초대 햄릿이란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런 아이디어들을 단지 이윤택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해아래 새로운 햄릿은 없다. 하지만 꿈이라는 상황 설정이 이 점을 가중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한 장면들의 정당성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

7월 20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070-8776-1356)

2014년 5월 9일 금요일

국립극단 <템페스트> 프레스 리허설

에스티의 첫날밤에

국립극단 450년만의 3색 만남 III <템페스트>
2014년 5월 9일(금)-25일(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출 김동현
무대 여신동
조명 최보윤

일부러 폭풍을 일으켜 배를 조난 시키는 이야기. 어쩌면 이 시점 아니 시국에 도저히 해선 안될 연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프로스페로의 힘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한동안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바다, 배, 침몰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의 상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공연이 이번 사고를 맞춰서 기획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시국에 '이런 연극'을 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아픔을 기억하는 한 방식이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템페스트>는 2014년 4월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나 <템페스트>를 통해 연극을 죄지은 사람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힘은 주로 말을 통해 전달되는데, 특히나 이 작품은 "말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윤색을 맡은 김덕수 작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벌어지는 <템페스트>의 모든 사건은 섬주인 프로스페로의 말에서 시작하고 그의 말로 끝난다. 나폴리 왕 일행의 배가 난파당하는 첫 장면을 비롯해 작품 전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내 말대로 하라는 연출자 프로스페로의 지시와 말씀대로 했다는 무대감독 에어리얼의 보고가 사건들마다 반복된다. 둘이 주고받는 말은 부부의 눈짓과도 같은 신뢰의 언어이다. 친밀한 신뢰의 말은 처음 만난 청춘남녀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조난당한 나폴리 왕자 페르디난드는 낯선 섬에서 만난 미랜더가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을 듣고서야 그냐가 여신이 아니라 지상의 처녀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말로 사랑을 나눈다. (프로그램, 4)
아쉽게도 8일 오후에 있었던 프레스 리허설에서는 세 장면 정도를 부분적으로 시연했기에 그 말들이 구체화되는 모습은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는 첫 장면에서 그 긴박한 상황을 배우들이 무대 앞에 있는 마이크 앞으로 나와 '말함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나, 캘리번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스피커'라는 점은 그의 '괴물성'을 말에서 찾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오달수의 캘리번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궁금해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날 리허설에서는 맨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아주 잠깐 출연할 뿐이었다.) 그외에 여러 배우들이 함께 약속된 움직임을 사용해서 장면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다양한 소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김동현 연출의 이전 작품들의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무대에는 쓰러져 가는 극장 무대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이 작품이 프로스페로의 연극임을 드러내고 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옷을 갈아입는 것 역시 지극히 '연극적'이다. ㉦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에스티의 첫날밤에] 노래하는 샤일록

450년만의 3색 만남 II - 노래하는 샤일록

공연기간 2014년 4월 5일(토)-20일(일)
화-금 20시, 토/일 15시, 월 쉼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극본/연출 정의신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지난 달 <맥베스>에 이어 이번에는 <베니스의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국내 수용 초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특히나 이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샤일록은 지금도 거의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사실 나머지 인물들의 이름은 상당히 까다롭다: 안토니오, 밧사니오, 포샤, 로렌조, 제시카 정도가 그나마 기억할만 하고 나머지 이름들―그라시아노, 사리니오, 사루니오, 네릿사 (프로그램에 따라 표기)―은 발음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라치아노Gratiano 라든지, 레오나르도Leonardo 같은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베네치아라는 점과 코미디라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낸다. 아마 지금 우리식으로 하면 인물의 이름이 카푸치노, 마키아토 정도일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하면 샤일록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누가 샤일록이 제목에서 말하는 바로 그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말하더라도 이상한 점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그만큼 비록, 프로그램에서 강태경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이고,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에서 샤일록이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말일테다.



3색 만남의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 아닌 바람에 서두가 길어졌다. 정의신 연출은 이번 공연의 제목을 <노래하는 샤일록>이라 이름 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제목은 공연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 줄거리는 원작을 따라가지만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 장면은 뮤지컬에 준할 정도로 노래와 음악 사용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이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수정하기 위해 극작가이기도 한 연출가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고쳐쓰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제시카와 로렌조의 서브 플롯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로렌조와 함께 달아났던 제시카는 로렌조의 망나니짓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원작에서 샤일록이 딸의 도주보다 재산을 잃은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면 이번 공연은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로 그려진다. 심지어 돈 대신 안토니오의 살점을 떼내는 일에 있어서도 원작에서는 안토니오의 반유대주의적 고리대금업 방해 행위에 대한 앙심을 동기로 설정했다면, 정의신의 샤일록에게 있어 그의 살을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망가진 딸에 대한 복수로 그려진다. 반면 로렌조는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샤일록의 인간미가 부각되는 만큼 로렌조는 나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신 연출은 인터뷰에서 안토니오의 우울증을 설명하기 위해 동성애를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다(25). 동성애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재현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안토니오가 밧사니오를 비롯한 친구들이 보이는 유대인 혐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에게 연민을 보이는 태도에서 그 또한 또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임을 표명한다. 포샤 또한 죽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언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삶도 사랑도 누리지 못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희극이 이렇게 진지해도 되는 걸까? "희극적 카타르시스"를 바라고 온 관객들이 결말에 당황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의신은 상관 없다며, 오히려 관객이 당황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24). 어쩌면 정의신의 이름을 보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이 정도로 당황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가 이 문제에 무감각하다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대신 이 진지함과 함께 공연은 시종일관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어릿광대 란슬롯은 원작의 재담 대신 슬랩스틱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여기에 안토니오의 네 친구들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정서적 흐름은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걸로 느껴지는데, 그만큼 그 두 장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모로코는 보라색 의상을 입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모로코 군주에 대해서만 "위아래로 흰옷을 입은 황갈색의 무어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Enter Morochus a tawnie Moore all in white,"   

그중에서도 단연 큰 웃음을 선사하는 인물은 구도균이 연기한 그라시아노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대 위에 구현된 베니스의 지형 지물 (다리와 곤돌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또한 전반부에서 연기했던 모로코대공의 강렬한 이미지가 후반부의 그라시아노에게 겹쳐짐으로써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 하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그의 연기만으로도 세 시간이 즐거우리라. 하지만 모로코대공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가장 성공적이기에 곧바로 이번 공연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샤일록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과 모로코대공에 대한 웃음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구도윤의 뱃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검게 칠한 몸 색깔과 손에 쥔 언월도, 수건으로 대충 말아 올린 터번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반아랍 정서를 건드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배 나온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과연 도덕적으로 완벽한 웃음이란 가능한 것일까? ㉦

덧붙임
벨몬트 포샤의 집으로 설정된 공간에 등장하는 촛대는 그 형태가 유대인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를 강하게 시사한다. 혹시나 싶어 관계자에게 포샤를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인지 물어보았으나,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애초 샤일록의 집에 사용될 것으로 만들어졌다가 리허설 과정에서 새주인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공연 사진 더보기: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541617609290750.1073741830.472276802891498&type=3&uploaded=26


2014년 3월 8일 토요일

450년만의 3색 만남 1 - <맥베스>

국립극단 <맥베스>

2014년 3월 8일(토)~23일(일)
명동예술극장
공연문의 1688-5966 (국립극단)

에스티의 첫날밤에 (프레스 리허설)


(재)국립극단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 세 편을 연속해서 무대에 올린다. <맥베스>는 그 선두 주자로 3월 8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병훈 연출은 텍스트에 직접적인 변형이나 가공없이 원작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거짓말 연기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말콤과 맥더프의 대화 장면이 생략된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유혹"을 중심 키워드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혹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세 마녀들은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과 짙은 화장을 한 팜므 파탈 무리로 그려진다. 



물론 맥베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여성은 언제나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이다. 지난 겨울 국립극단에서 해경궁홍씨 역을 맡았던 김소희가 이번에는 사도세자보다 더 무서운 남편을 둔 여성을 연기한다. 사실 이 역할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연출의 말을 통해 이 공연이 어떤 방향을 선택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맥베스 부부는]사랑하는 ... 사이지만 아이가 없음으로 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기 어렵다. 관계 유지를 위해 아이를 대체할 조건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남편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쟁터에 나가있는데다 아이가 없으니 맥베스 부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무기력과 외로움에 젖어있던 맥베스 부인에게 마녀의 유혹은 재밌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일순간 불이 붙을 수밖에 없다. 남편에 대한 맥베스 부인의 사랑은 강력할수록 파괴력도 크다. ...악행을 저지르던 맥베스 부인은 왜 두려워졌을까.  저 깊은 곳에서 왕좌를 얻었으나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이다. 남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철저히 혼자로 남게 되는 그 고적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내 "연출 인터뷰" p.29)

글래머러스한 여인을 마녀로 설정하고, 아이가 없는 무기력한 여인이 왕을 죽이는 모험을 감행한다고 해서 이번 공연이 연출가의 여성혐오가 두드러진다고 말하지는 말자. (작가가 이미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비극은 온전히 맥베스가 책임질 일이지 마녀나 부인 때문에 파멸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혹"이 아니라 "핑계"라 말하고 싶다.) 물론 덩컨 왕을 시해하기까지, 그리고 그 직후까지도 맥베스는 갈등하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맥베스는 아주 능청스러운 연기를 거뜬히 해내고 왕좌에 오른다. 박해수가 연기한 맥베스는 이 장면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이후로 맥베스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누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양심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맥베스는 잠을 대가로 내놓음으로써 범인들의 도덕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까지 등장하던 침대는 이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맥베스의 자리는 이제 침대가 아니라 왕좌로 고정된다.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자리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소품으로 사용되는 검이나 방패, 그리고 타공된 철제 패널로 만든 스크린 등이 관객들에게 무게감을 전달한다.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검이 상당히 무거워 벌써부터 한쪽 팔만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고 한다.) 철제 스크린에는 이미지나 영상이 투사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버남 숲 또한 철제 방패 위에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얼핏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요즘 시대에 영상을 사용하는 게 어느 누군가의 독점적인 아이디어일 수는 없듯이, 그것이 어떤 면에 투사되느냐 또한 누가 먼저인지를 굳이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컴의 병사들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대를 연상하게 한다. 시국에 민감한 관객은 이 장면이나 몇몇 대사들에서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접점을 찾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노골적이지 못한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갑갑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류의 보편적 유산인 셰익스피어를 보러 왔는데, 극장안에서마저 바깥의 지리멸렬을 떠올려야 하는 게 피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정치 싸움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맥베스>인 것을. ㉦


드라마인 페이스북 페이지로 오시면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해 주세요. 

2014년 3월 4일 화요일

3월 장바구니

by 산책



<유쾌한 하녀 마리사>, 3월 6일 ~  3월 23일, 두산 아트센터 Space 111

이 작품은 “이보다 더 웃길 수 없다! 포복절도할 막강 코미디!”라는 문구에 끌려 예매했습니다. 요새 실컷 웃을 일이 너무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으하하하 웃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예매하고 보니 <은밀한 기쁨>과 같은 극단인 맨씨어터에서 준비한 작품이네요. <은밀한 기쁨>에서 알콜 중독자로 분했던 서정연 배우가 자살하려다 하녀 마리사를 죽이게 되는 요한나를 연기한다고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남편은 바람을 폈고, 부인은 자살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어떻게 웃음을 만들지 기대됩니다.

이제는 국민 연극이 된 <라이어>를 무려 15년전, 그러니까 1999년에 보았는데, 사실 그 뒤로 코미디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오해와 우연이 만들어 낼 희극적인 상황과 사건들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만의 재기 발랄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매:

산책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리뷰

산책의 <은밀한 기쁨> 리뷰




<맥베스> 3월 8일 ~ 3월 23일, 명동 예술극장 

이병훈 연출, 김소희 배우, 박해수 배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 이름들 앞에서 제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고전은 종종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또는 나의 기대를 뛰어 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데, 사실 그러한 경험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아쉬울 작품인 것 같습니다. 혹 <맥베스>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첫 번째 <맥베스>로는 무척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매진임박이라고 하니, 망설이시는 분들은 얼른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매:

에스티의 <맥베스> 리뷰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극장편> , 3월 15일 ~ 3월 30일, 남산 예술 드라마센터 

다음은 <남산 도큐멘타>의 공식적인 작품 소개글입니다.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은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을 선보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드라마인 독자가 계시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소개가 대체 무슨 말인지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실 이 소개만으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또는 재미가 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 그래서 그것이 사실도, 허구도 아닌,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순간들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상상해 보는 이 작품은 1962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 곳을 지나간 사람들, 그곳에서 올려진 작품들, 출연한 배우들, 그들이 연기한 인물들을 불러낼 것 같습니다. 그 과거들을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기대됩니다.

예매:

서유미님의 <남산 도큐멘타> 리뷰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노니 타루: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by 에스티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2월의 장바구니

by 산책



<은밀한 기쁨> 2월 7일 ~ 3월 2일,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여러 이유로 작품을 예매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어윈 역을 맡은 이명행 배우 때문에 예매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푸르른 날에>에서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저는 이 배우에게 반했습니다. 주먹을 꼭 쥐고 함께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그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은밀한 기쁨> 공연 사진에서는 이렇게 생겼던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다른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은밀한 기쁨>은 영국 극작가 데이빗 해어(David Hare)의 작품으로, 전쟁 후 영국 최고의 희곡으로 극찬받았다고 합니다. 추상미 배우의 출연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여자의 사람이 파국으로 치닫는 드라마”라는데, 제목은 ‘은밀한’ 그리고 ‘기쁨’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무대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로미오 & 줄리엣> 2월 14일 ~ 2월 23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극단 여행자, 양정웅 연출의 <로미오 & 줄리엣>입니다. 이제까지 양정웅 연출의 작품은 꽤 많이 관극했습니다. 처음 극단 여행자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연출은 너무 똑똑하고, 배우들은 연기를 너무 잘하고, 고전은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너무”라는 말을 남발하며 “너무” 좋아했던 탓인지, 관성에 이끌려 계속 작품을 보러 가면서도 처음의 그 쾌감은 쉽게 느낄 수 없고, 되려 이런 저런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래 사귄 친구를 한 번 더 믿어보고 싶은 것처럼 또 한 번 믿어보려고 합니다(?). 남녀가 바뀐 로미오와 줄리엣을 얼마나 재기발랄하게 보여주는지 기대해봅니다. 이 글을 빨리 보시는 분들은 2일(일) 까지 50%할인 금액으로 예약하실 수 있다고 하니, 서두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40%할인, 커플 관계 인증시(?) 에도40%할인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


<롤리타> 2월 20일 ~ 3월 9일, 산울림 소극장

산울림 소극장에서는 기획 공연으로 “고전 읽는 소극장, 산울림 고전 극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4년 이미 <설국>, <분노의 포도> 이렇게 두 작품이 공연되었고, 제가 예매한 <롤리타>전에도 <홍당무>가 공연될 예정입니다. 고전은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죠. (나도 모르게 읽지 않은 작품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는 척 한 경험을,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롤리타’라는 말은 무척 선정적으로, 그래서 부정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도 책을 사서 읽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년 문학 동네에서 <롤리타>의 새 번역판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SNS에 이 책 사진을 올리고, 평들을 올렸던 생각이 납니다. “엄청나게 매력적인 소설”이라지만, 역시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산울림에 가기 전, 어쩌면 다녀와서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을 시작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1월 낭독 공연 <지금도 가슴 설렌다>를 재미있게 보고 왔습니다. <롤리타>역시 소설을 어떻게 들려주고, 또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롤리타 (반양장) - 10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문학동네


* 공연을 더 예매하면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두산아트랩] 양손프로젝트 <오셀로> 쇼케이스

양손프로젝트 <오셀로>
by 에스티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지원프로그램 두산아트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트랩은 일종의 중간 보고회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아직은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는 중간 단계를 (예비) 관객들과 공유하고 여기서 나온 피드백을 통해 최종 버전에 반영하는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필자는 이번 아트랩의 모니터 회원으로 선정되어 전체 공연을 볼 예정입니다. 첫 공연을 보고 글을 쓰지만, 공연 기간이 짧은 탓에 글은 공연이 끝난 후에 공개될 수도 있는 점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아침에 난생 처음 충치 치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선 치과에 별로 도움되지 않는 건치라고, 그런데 왜 그 어금니만 그렇게 썩었을까라면 의아해 하셨다. 생각해보면 오래 전에 이미 그 부위에 충치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그냥 방치해 뒀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나 잘 보이지도 않고 통증이 있지도 않은 어금니를 일부러 쳐다볼 일은 거의 없었다.

마취 주사를 맞았다. 잇몸에 바늘이 들어가니 아픈 게 당연하겠지만 마취 주사라는 게 원래 그런건지 주사약이 들어가면서 바로 마취가 시작되어서인지 약간 따끔하더니 이내 감각이 없어진다. 잠시 후 얼굴에 수건이 얹어지고 연장들이 입 속으로 들어가더니 공사장에서 돌 갈아낼 때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따금 골이 울릴 정도의 진동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통증은 없다.

이처럼 마취라는 건 마술과도 같다. 아직 절반 이상은 남아 있는 생니가 갈려 나가는 순간에도 통증이 없고, 치료가 잘되어서인지 마취가 깨고 나서도 별로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이가 있던 자리엔 어느새 나로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물질이 채워져 있다. 한동안 나라를 떠들석하게 한 우유 주사라는 마취제 또한 비슷한 마술을 부린다. 듣자하니 이 주사를 맞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고 그래서 깨고 나면 피로한 몸에 상쾌함이 채워져 있다 한다. 다만 문제는 이 약품을 피로회복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점인데, 여기서도 또 다른 마술이 펼쳐진다.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몇몇 여자 연예인이 프로포폴 주사를 맞은 게 적발된다. 그들의 이름은 비밀에 부쳐지고 이니셜로만 나타나는데, 그러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전국민이 집중하게 되고 결국은 포탈 실시간 검색어에 정답이 표시된다. 그러는 동안 정치 사회적 이슈는 몇 페이지 뒤로 감춰진다. 우유 주사를 온 국민이 맞고 잠드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진다.

베니스의 원로 브라반시오는 (장래) 사위 오셀로가 마술, 혹은 “마약”으로 자기 딸의 마음을 빼앗아갔다고 규탄한다. (… thou hast practised on her with foul charms, /Abused her delicate youth with drugs or minerals /That weakens motion. 1.2.73-5) 브라반시오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에겐 오셀로가 마술을 쓰지 않고선 데스데모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불행한 것은 그 사회에 만연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데스데모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정한 여인으로 전락하고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데스데모나가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3막에서 마감되었기에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언데드(undead) 같은 상태에 있다.) 따라서 브라반시오의 대사가 가진 중요성은 뒤에서 오셀로가 당하는 진짜 마술과 마약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때 유의미하다. 물론 이 마술을 베푼 마술사는 이아고이고, 그(녀)는 질투와 의심이라는 치명적인 마취제를 사용한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변호인》이 개봉합니다.

by 에스티


여기 저기서 많은 리뷰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을 아끼고 감상을 대신하여 리어가 죽은 셋째 딸 코딜리어를 안고 외치는 마지막 대사를 옮깁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나서도 이 대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변호인> 예매를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 불쌍한 바보가 목매달려 죽었다.
아냐,
안 돼,
생명이 없어!
어찌하여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
너는 다시 못 오는구나.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제발 이 단추 좀 풀어주게.
고맙네.
이것이 보이는가?
이 애를 봐!
봐, 이 애 입술을!
여기를 봐!
여기를 보라고!
(죽는다.)

- <리어 왕> 5막 2장 (김태원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301-2면)
*산문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인용자가 줄바꿈하였습니다.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햄릿>, 사유하지 않는 삶에 대한 공포

by 시뫄

<햄릿>
오경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3/12/11

비극적 영웅은 치명적인 성격의 결함(hamartia)을 가지며 그 결함이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이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의 토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영웅이 자신과 같이 어떠한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 즉 정화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햄릿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영웅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내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뿌리내린 수많은 햄릿과의 대면을 통해 느낀 것은 카타르시스와 비슷하다. 연민과 공포, 즉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한 자기연민과 그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통한 또 한 번의 자기연민으로 늘 어디엔가 호소하고픈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책으로만, 혹은 기타 매체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햄릿>을 드디어 무대에서 만나러 가는 내 기대는 미친 햄릿을 마주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그것이었다.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스즈키 다다시 <리어왕>

by 최희범

1.
몇 년 전에 스즈키 메소드 워크샵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무엇을 위함인지도 잘 모르면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아래로 이동시키는(grounding) 낮은 자세, 상하좌우 흔들림 없이 걷는 연습 등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이런 훈련이 실제 공연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었고, 워크샵 진행자들의 스즈키 메소드와 공연에 대한 열광어린 찬사를 보며 호기심이 더욱 커졌었다. 그 후 이번에 처음으로 스즈키 다다시 연출의 공연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오래 마음에 담아둔 호기심에 기대가 컸는데 나와 비슷한 기대를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는지, 공연 시작 전부터 객석의 분위기는 조용히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공연 시작 전 암전 상황에서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는 해프닝(!? 이전에는 공연 시작 할 때부터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까지 벌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흔들림 없었고,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하기 위해 몸 전체를 의식하고 통제하고 있을 배우들을 보며 그들이 자신의 몸 전체로 뻗치고 있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