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1일 금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2탄 : 프로젝트 하자,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


극단 배우들의 실험,
“열정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프로젝트 하자의 관찰

@ 이대 하람 스튜디오

▷ 극단 배우들 × 프로젝트 하자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fkc6Gf)


극단 배우들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1. 극단 배우들 팀은 ‘열정 없이 연극하기’를 시도하며, 전시 형태의 발표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열정을 명분으로 한 착취, 부당한 폭력이 없는 연극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배우들의 생각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전시 역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이 고민하고,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질문들, 인터뷰 위주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 ‘열정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각자의 개념이 다를 것입니다. 크게는 1) 사랑하는 마음, 애정 2) 뜨겁고, 온도가 높은 것 3)에너지원, 동력 이라는 개념이 ‘열정’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문제가 될까요? 왜 우리는 열정 없이 연극하기에 대해 고민할까요?
2-1. 문제는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열정을 왜곡 또는 강요하며 ‘착취’하려는 시스템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정리되었습니다.

3. 열정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연극하는 롤 모델이 없어서, ‘열정 없이 연극하기’가 잘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열정 없이 연극하는 주변 연극인들을 보면, 목적이 사라지고 수단만 남은 모습뿐이었습니다. 열정 없이 창작하기는 모든 세대를 아울러 창작자라면 고민해봐야 할 명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냉정으로 연극하기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냉정으로 연극하기라는 것은 규약, 계약, 이성, 비판 등의 가치를 연극의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 활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행복 지수처럼 열정을 수치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열정의 수치가 낮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조사해보는 것이 ‘열정 없이 연극하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열정의 기준점은 각자 다르기에, 열정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세분화 시켜 개인별로 공식을 만든 후 열정 지수를 도출해낼 수 있다면 열정 없이 연극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어떤 모습일지, 또한 열정으로 연극하는 사람들은 꼭 문제인지 다양한 롤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가치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창작의 언어, 작업 방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오늘 본 것을 프로젝트 하자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1. 행복 지수라는 말이 나와서, 참관 다음 날 프로젝트 하자의 행복지수 요소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다들 요소, 중요도가 달랐습니다 1) 같이 하는 사람들: 가치관, 관심 분야, 작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지, 수평적 작업이 가능한지 2) 돈, 경제적 대가: 지금 나의 경제적 여건과 작업을 통해 기대되는 수입을 동시에 고려 3)작업을 통해 얻는 즐거움 정도 4) 현재 나의 몸, 마음 건강 정도 (생각보다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이를 공식으로 정리한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Ex) 작품과 나의 접점 개수 * 구성원(수평적 작업 가능성+몰입도) + 돈(기대수입+현재수입)/시간
 Ex) 건강(몸+마음)+구성원(가치관의 비슷한 정도+존중, 인정 가능성) + (나의 작품 애정도 * 너의 작품 애정도) + 기대 수입

2. 그동안 개인의 희생으로 ‘열정’이 유지되어 왔다는 점에서 프로젝트 하자는 깊이 공감하고, 실제로 이러한 문제점을 경계하며 화학작용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자는 ‘다수성, 보편성 없이 연극하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다수성과 보편성이라는 단어 안에는 열정을 강요하는 집단의 폭력성, 기존 연극 시스템이 젊은 창작자들에게 바라는 온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정이란 말로 포장된 착취 없이,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존중하며 적절한 거리감(냉정)으로 연극 만들기를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극단 배우들의 연습실 참관은 동시대의 창작자들끼리 맞닿는 지점을 고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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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 소사이어티의 실험,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극단 배우들의 관찰

@ 혜화 작업공간 섬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qHoHwV)


丙 소사이어티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를 맡은 丙 소사이어티의 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팀은 연극 <신토불이 진품명품>의 워크샵을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로 화학작용4 페스티벌에서 시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전시와 퍼포먼스 위주의 공연형식을 띠며 진정성 없이 비극을 다루는 연극을 기획 중이라고 한다.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는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까? 우리가 코미디를 연극으로 시연한다고 할 때 웃기려고 하기 보단 진지하게 했을 때 오히려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진정성’이란 ‘진지함’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예술에선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에, 丙 소사이어티 팀은 이 진정성을 깨부수고자, ‘장난감’으로 연극하는 것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장난감으로 연극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장난감으로 연출을 하는 것인지의 대한 뜨거운 토론들이 오갔으며, 장난감 기차와 고무 찰흙과 도미노가 부딪히면서, 아무 의도가 없는 것들이 부딪히며 그 장면들이 비극을 일으키며 연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로 공연을 구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각자가 생각하는 연극적인 것과 비극성들의 대해서 다뤄보고, 관객이 보고 느끼는 것이 진정성이 나타나지 않을 거면 어떻게 해야할 지 의논하는 시간들을 가졌으며, 유명한 희곡의 장면들을 아무 의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게 하면서 비극을 나타내면 어떨지의 대한 토론들도 이어갔다.

이에 ‘극단 배우들’은 ‘진정성’이란, 관객들이 이것을 보고 어떤 마음을 들게 하는지와, 결국 연극과 예술은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는데, 그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하면 모든 것들이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들의 언어로만 토론해왔던 丙 소사이어티 팀도 참고해보겠다며 관찰을 마치게 되었다.

오늘 본 것을 극단 배우들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사실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 와 우리가 맡고 있는 ‘열정 없이 연극하기’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열정’이란 단어와 ‘진정성’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비슷하며, 열정으로 임하고,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늘 들어와야 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극단 배우들’ 역시 진지함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뭉쳐서 만든 집단이고, 이에 작업방식도 치열하고 진지하게 진정성으로 작업에 임했다.

이번 참관을 하면서 제일 많이 느낀 것은, 연극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극의 기초, 연극은 즉 play, 놀이이다. 뛰어 놀고 그 안에서 몰입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것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대단한 예술을 하기 위해서, 기초적인 것보다는 어떻게 창의적인 더 좋은 예술을 보여줄까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 丙 소사이어티 팀을 보며, 연극의 기초. 사람들이 보고 놀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정성 없이 바라보는 것이 너무 어렵다 라는 생각도 들고, 화학작용 4를 발전시켜서 어떤 작업이 나오게 될 지 궁금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2019년 5월 29일 수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1탄 : 극단 Y,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의 실험,
“PC함 신경 끄고 연극하기”에 대한
극단 Y의 관찰

@ 불광역 청년청

▷ 콜렉티브 뒹굴 × 극단 Y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Itvkv8)


콜렉티브 뒹굴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단원 D) 청년청이라는 미완성의 공간을 (미완이라 함은 그 공간의 구성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고, 뒹굴 팀조차 입주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서술한다. 뒹굴 팀이 청년청이라는 공간을 어떤 장소로 사용해 나갈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이용해 연습실 참관을 온 외부의 예술가들을 화성탐사 로봇들의 서사로 안으로 끌어들였다. 참여자들은 화성을 탐사하는 로봇들과 일치되며 미지의 공간인 청년청을 탐험하고 자신의 작업실로 만들고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수행하는 임무들 사이에 연극예술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서사가 한 겹 더 덧씌워지는데, 그것은 사실에 대한 관찰에 머무는 로봇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우리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감지함과 동시에 확장시키는 시도였다.

(단원 B) 6-7년을 함께해온 팀이라서 그런지 자치규약이 꽤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내용을 재치 있게 담아내어 열린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그 내용이 상당부분 내가 지향하는 지점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 내 역할분담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있어서 이 팀은 리더와 팀원들이 어떤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연습 참여 당시에는 리더의 결정권에 대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았고 그의 결정을 팀원들은 잘 수용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늘의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을 맡은 사람이 우연히 리더였던 건가?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현재 우리는 천천히,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결정하는 일을 뒹굴 팀은 성큼 걸어갔다. 짬의 차이인가? 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방법이 달랐던 것도 있는 것 같다. 각자의 방식에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느낀 건데 '단원 B'한테는 천천히 가는 것이 안전하다.)
연습공간을 처음 만날 때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탐사하도록 했는데, 그 덕에 '다른 팀'이라는 거리감을 지우고 참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 공간 내에 나만의 작업실을 정하고 꾸미면서 다른 팀의 연습 참관이 아닌 체험학습에 온 것만 같아 마지막 즈음엔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잘 밟을 수 있게 설계 한 것 같다. 개인의 창작능력을 원활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원 A)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프로그램 기획자의 커다란 그림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본 자료로 준 내용들과 결론적으로 도출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오히려 프로그램 하는 동안은 어느 정도 잊고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결과물과 느낌은 내 고유의 도출이기도 하고 기획자가 의도한 도출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부터 어떤 방향에 갇히거나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형식이나 세계관(?) 등의 구축을 성실하게 해놓아 소극적이거나 참여를 주저하는 참여자들도 커다란 용기를 낸다기보다는 작은 동기나 의지로도 참여할 수 있었다.

(단원 C) 첫 만남부터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까지 설렘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 뒹굴 팀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생각들을 어떻게 발현시킬까 궁금했다. 이런 참여가 처음이라 좋은 긴장감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반대로 더 집중해서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 방식이 인상 깊었다.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은 나의 다양한 감각을 자연스레 사용하게 하였고,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뒹굴 팀은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구나 처음 느끼는 이 신선한 기분으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그들의 작업 속에 녹아들었던 것 같다.

오늘 본 것을 극단 Y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단원 B) 청년청 공간에서 제한을 두지 않은 점과 시청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점, 한 달 동안 오를 계단을 하루 만에 올라보았다는 점, 사람의 음성이 아닌 카톡방의 로봇이랑 소통했다는 점 등등의 진행과정들이 잠들어있던 몸의 감각을 조금 깨워주어서 신이 났었다. 또 지향하는 점이 닮은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어와 분위기는 우리와 완전 달라서 신기했다. 하긴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면서 한명씩 프로그램을 짜고 그가 만든 프로그램을 모두가 함께 실행하면서 어떠한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것도 충분한(충분하지 않을수도 있겠다. 많은-) 대화과정이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의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원 A) 매번 팀원들이 돌아가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타 팀원들이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한 프로그램 당 팀원 수만큼의 새로운 생각, 개념, 언어를 수집할 수 있게 한다. 또 그것은 팀원들은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진다. 의식적인 발견, 반복되는 검열이 없어도 말이다. 이것을 거친 언어로, 그 순간만큼은 외부와 잠시 차단되고 기존의 방식들을 망각함으로써 수행되는 방식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 팀은 거꾸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밟아나감으로써 우리를 다시 재정립하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나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되도록 기록하고, 물어보고, 되돌아가면서 우리만의 기호, 언어, 방식을 찾는다. 이러한 수행방식의 차이로 인해 팀의 분위기나 텐션, 서로를 대하는 방식, 협의하는 방식 등에도 다른 지점이 생겨나는 것이 신기했다.

(단원 C)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과정이 3-4시간 동안 지루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설렘과 즐거움으로 꽉 채워질 수 있도록 노력한 뒹굴 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단원 D) 극단 Y는 결과만큼 과정을 중요시하고, 구성원들이 평등하고 편안하게 예술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뒹굴 팀의 내규는 그런 극단 Y의 지향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뒹굴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가는지 궁금한 지점이 있었다. Y의 시간들 보다 더 긴 시간을 쌓아온 팀이라 상호간에 쌓인 맥락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PC하려 하지 않고 작업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PC하려 하지 않고 다양한 장치를 개발하겠다. 그 장치들을 개발하는 것이 PC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뭘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연습의 참관이라는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동의는 프로그램에서 생산된 결과물을(그 결과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어놓는 것에 대한 동의와 등치될 수 없다. 만약 프로그램의 성격상 미리 결과물에 대한 공지를 할 수 없었다면, 끝나고 난 이후에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을 것이다. (발표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무시되었고 이것이 뒹굴에서 말하는 PC하지 않기 위한 노력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의 창작 다른 결과들을 내기 위해 과정에서 필수적인 어떤 것들을 생략해 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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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하자의 실험,
보편성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콜렉티브 뒹굴의 관찰

@ 문래예술공장 3층

▷ 프로젝트 하자 × 콜렉티브 뒹굴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aqa7hq)

프로젝트 하자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배우 각자의 존(zone)으로 구성된, 참여형 공연에 가까운 연습 오픈이었다. 4개 존의 제목은 각각 ‘디디’s 키친,’ ‘천칭자리,’ ‘모모의 팔레트,’ ‘지구born’이었다. 뒹굴리안들은 프로젝트 하자의 발표 전 첫 참여 관객으로서 연습실 오픈에 함께 했다. 존마다 마련되어있는 팀원 각자가 제시하는 이야기와 방법을 참여자들과 함께 경험해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디디‘s 키친은 설정된 상황에 퍼포머와 참여자가 관계를 맺는 방법론을, 천칭자리는 하나의 키워드(그 존의 주인이 관심 있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양식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질문에 그림으로 답해보는 시간을 갖는 모모의 팔레트와, 계단의 층을 활용하여 개인의 기분의 층을 표시한 사진 전시 및 도슨트 퍼포먼스 형식의 지구born도 있었다. 개인의 기억 또는 개인의 감각을 그림이나 논의,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정하게 풀어내어, 관객 역시 자신의 감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에 가닿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하자는 ‘보편성이 아닌 개별성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실험 주제를 가지고 있다. 집단, 보편이라는 말 아래 쉽게 뭉개버리는 ‘개인’을 조명하기 위하여 하자는 팀원 개개인에게 집중해보는 과정을 거쳐 온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지점을 관객에게도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방법론을 택한 것 같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그렇지만 개인이 진심과 애정을 듬뿍 쏟은 각자의 키워드와 재료들이 하나씩 참여자들에게 소개되었다.

프로젝트 하자라는 팀은 ‘따뜻함’이 베이스가 되어있는 팀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우리 팀에 없는 또는 부족한 질감의 것이었다!) 개별성, 개인에 대해 묻고 답해가는 과정이 매우 정성스럽게 다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몰두해주고 집중해주는 시간을 가져온 것 같았다. 그런 개별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관객과 만나는 때에도 ‘하자의 힘’이 되리라는 기대도 되었다. 지극히 자기 얘기를 담담히 이어가면서, 관객에게도 그러한 시간을 열어주는 작업이 나오지 않을까.

오늘 본 것을 콜렉티브 뒹굴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하자가 팀원 각각의 이야기를 각자의 언어로 풀어내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뒹굴의 작업 방식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피드백 과정에서 두 팀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가 관찰되는 것이 재미있었다. 비슷한 연습 방법에서 출발하여 전혀 다른 결의 과정과 결과를 냈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뒹굴도 ‘개별성’이란 키워드로 설명 가능한 지점이 있지만, 이 개별성이란 말이 하자에서 사용될 때와 뒹굴에서 쓰일 때 전혀 다른 질감인 것 같다. 뒹굴에게 개별성은 개별 작업자의 창작 방법론, 콜렉티브를 구성하는 개인 작업자로서 개별 창작 언어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특징으로 구현된다. 뒹굴의 개별성은 관객을 호명하는 때에도 드러나는데, 섬세하게 타겟팅되어 초청된 (소수) 관객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자가 작업자의 개별성과 참여 관객의 개별성을 만나게 하는 지점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1) 뒹굴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흥미가 있다기보다 개인의 ‘방법론’을 찾고 모으는 데에 흥미가 있으며, 2) 참여자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들어가는 경험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개인으로서 거리를 두도록 하여 사회/집단적 맥락을 바라보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하자가 개별성을 키워드로 삼으며 개인의 이야기와 내면이 잘 보이는 작업을 한 것이 뒹굴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나도 그런데’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있었으며, 피드백 시간에도 ‘힐링’이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개인의 감각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대한 갈증이 관객에게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뒹굴이 전반적으로 감정이나 내면세계에 대한 따스함이 매우 부족(하다못해 춥고 시린 작업)하기 때문에, 가끔은 잊는 지점이기도 하다. 참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것들’을 꺼내 볼 수 있는 시간, 그것을 꺼낼 수 있도록 적절한 판을 까는 것, 그리고 꺼낸 것을 유의미하게 구성하는 것 역시 작업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하자의 작품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하자의 퍼포머가 뒹굴에게 ‘퍼포머가 어떻게 할 때 참여자가 마음을 연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참여자가 in 할 수 있는 환경, 예컨대 퍼포머가 참여자와 관계 맺는 방식, 공간의 빛과 음악 세팅, 타이밍 조절 등을 기획자이자 퍼포머로서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뒹굴이 퍼포먼스 자체와 더불어 공간 세팅이나 맥락에 관심을 크게 가지는 편이라 그렇게 대답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 하자 팀원들과 질문을 주고받고 피드백하며,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하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고 보아내는지, 우리 팀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업하는지 까지를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대 동료 작업자들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체험해보고 같이 이야기해보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즐거웠다.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3탄 : 극단 Y, 프로젝트 공공연희, 콜렉티브 뒹굴


‘그냥’ 해보기,
감각을 깨우기

- 극단 Y × 프로젝트 공공연희


  극단 Y와 프로젝트 공공연희(이하 공공연희)는 작업자 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에 대한 감각을 복구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거대한 도시의 사이클 속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들을 감당하며 살다 보면 온전한 나의 감각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몸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나에게 가장 편한 상태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삶과 예술 사이의 괴리는 자꾸만 커지게 된다.

  공공연희는 2018년 결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기획자 옥민아를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멤버들이 모여 2019년, 프로젝트 공공연희로 재탄생했다. 독특한 것은 연극하는 사람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팀이라는 점이다. 연기자, 작가, 음악인, 웹툰 작가, 디자이너, 영상 감독 등이 서로 교류하며 다원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연희는 하나의 집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보다는 함께 발굴한 이슈를 놓고 각자의 방식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향을 지향한다. 옥민아 대표는 그것을 하나의 커다란 꾸러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표현한다.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개체들이 커다란 매듭 속에 엮여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공공연희는 팀원들 자신을 포함해 청년예술을 하는 동료들의 작업이 어느 순간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신선하고 도전적인 시도를 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일이 점점 없어지고 타성에 젖어버리게 되는 문제에 경계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공공연희는 2018년에 감각스트레칭이라 명명한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잠들어버린 감각을 두드려 깨워보자는 것이었다. <틔우자 씨:발아> 라는 재치 있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감각스트레칭은 기본적으로 멤버들이 함께 도시농업을 하며 24절기의 순서에 따라 처서미식회, 한로상영회 등의 소소한 행사들을 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천천히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에 신체의 리듬을 맞춰 보면서 무뎌진 오감을 하나씩 깨워나가는 과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딱딱하게 굳은 감각을 바깥쪽을 향해 천천히 늘리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스트레칭이라는 명칭은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은 곧 나 자신으로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Y는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전후로 불어온 새로운 페미니즘의 바람 속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사적 영역에 관련된 사항들을 다른 주체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얼핏 당연한 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매우 많은 부분들을 간섭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외모, 체형, 말투, 행동거지, 사생활 등등. Y는 불쾌하고 부당한 오지랖에 대해 페미니즘이 날카롭게 벼린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간섭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발언해왔다. 탈코르셋을 다룬 <미의 기준>(2018)이 대표적인 예이다. 美의 기준을 me의 기준으로 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Y는 한국여성의전화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리플렛에서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연습실에서 더 온전하거나 완벽한 존재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거나 ‘잘 모르겠다’ 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세월이 무상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Y는「권리장전」을 통해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에게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어쩌면 완벽하지 않을 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2018년 극단 Y가 작성한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의 사이클에 들어간 예술인은 아직 뭔가를 만들기도 전에 무엇이 부족한지부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업지원서를 써본 사람들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내가 심의 기준에 얼마나 미달하는지, 그 기준을 넘기 위해서는 무엇을 극복하고 보완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이 미달태에 놓여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에 떨어졌을 때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지원 사업은 창작을 시작하는 시점과 발표하는 시점을 결정해버림으로써 예술가들을 정해진 스케줄 속에 가두어버리는 측면이 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연희는 기다리지 말고 그냥 시작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냥 하면 된다. Y의 맥락으로 오면 이 잠언(?)은 조금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2018)의 세 번째 단편인 <그냥요>에는 연습 후 회식 자리에 참석하기를 강요하는 선배에게 거절의 뜻을 밝히며 “그냥 술 마시기 싫어서요.” 라고 말하는 후배가 등장한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대신 “그냥 싫다” 라고 말하는 것은 꽤나 망설여지는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싫으니까 그냥 싫어, 라고 당당하게 대꾸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Y와 공공연희는 우리에게 온전한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리지도 눈치보지도 말고 그냥, 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건네주고 있는 듯하다.




예술가 비슷한 청년과
연극 비슷한 소통

- 프로젝트 공공연희 ×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와 콜렉티브 뒹굴은 이른바 예술하는 인간들의 존재론에 관심을 보이는 팀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존재론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자면 예술하는 인간들이 과연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한 탐구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가 일반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과 닮아 있는 특정 세대의 예술가, 즉 청년예술가들이다.

청년예술가, 그들은 누구인가? 세대론의 종언이 운위되고 있는 시대니만큼 ‘청년’이라는 레떼르는 공연히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청년은 그저 담론의 산물이거나 공모행정의 용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청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그 논의들은 청년예술가가 누구인지를 사실적으로 설명해주기보다 청년예술가는 어때야 한다는 당위로서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청년예술가는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그 언어들로 인해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공연희는 그런 피로감을 가로질러 청년예술가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려 하는 듯이 보인다. 2018년 감각스트레칭 프로젝트를 통해 감각을 깨우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번에는 영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고 말한다. 청년예술가의 영감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공공연희에 따르면 사실 감각과 영감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들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영감이 밖에서 번개처럼 찾아오는 것으로 상상하지만, 공공연희는 그것이 어딘가에 보이지 않은 채로 잘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보고 있었다. 곧바로 눈에 띄진 않지만 내 눈이 밝아지면 찾아낼 수 있는 어떤 것.

  공공연희가 꿈꾸고 있는 것은 청년예술가들이 영감을 발굴해내는 어떤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어떤 청년예술가로 가정된 사람의 방을 아주 디테일하게 구성해보고, 그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시의 형태로 오픈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대담한 관객이라면 그 방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열어 아이디어를 끄적여 놓은 메모를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예술가의 일상적인 공간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거기에 깃들어 있는 틀 잡히지 않은 영감에 접촉해보는 것. 공공연희는 그러한 실험을 통해 청년예술가가 실제로 어떤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를 나름대로 규정해보고자 하는 듯 했다. 예술에 대한 영감을 향해 서서히 전도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청년. 공공연희가 들려준 구상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예술가 비슷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각자의 영감은 각자의 작업에 있고, 각자의 작업은 작업을 하는 테이블과 방과 집에 있다면, 굉장히 보통의 존재인 청년예술가 한 명의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사는지, 몇 평에 사는지, 뭘 입고 먹고 사는지, 한 달에 얼마를 벌고 사는지.”
- 사무국 × 프로젝트 공공연희 인터뷰 중

  뒹굴의 경우에는 청년예술가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역으로 청년예술가-됨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던 것 같다. <바로 그 얘기>(2016)는 지구가 멸망한 후 신인류가 구인류의 잘못에 대해 재판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연이었다고 한다. 1621번째 재판에 이르러 피고석에 선 것은 공연예술가였다. 판사는 지구가 망해가는 판국에 연극이나 올리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 연극이라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문한다. 공연예술가는 연극의 시대적 소명 내지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을 항변의 근거로 삼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은 물론 연극을 기억하는 관객들도 극히 소수인 상황 때문에 그의 변론은 궁색해져간다. (이상의 내용 정리는 박종주가 drama-in.kr에 기고한 리뷰(🔗) 「어느 재판의 기록」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한편 <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1>(2016)은 연극에 재능이 없지만 지독하게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예술가들이 지원금 20만원을 놓고 싸우는 이야기였다고 전한다.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뒹굴은 예술의 가치, 혹은 청년예술가들의 존재의미를 코믹하고 시니컬한 터치로 다루는 작업들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라는 박스box의 효용성을 계속해서 문제 삼는 뒹굴의 작업에서는 메타연극 비슷한 효과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메타연극도 어쨌든 연극인지라, 연극도 아니고 연극이 아닌 것도 아닌 뒹굴의 공연 형식에 정확히 들어맞는 워딩이라 하기는 어렵다. 의외로 뒹굴의 공연 형식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그들의 초창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된다. <니나노 뒹굴>(2012)을 포함한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뒹굴은 그 시절부터 연극 비슷한 것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연극을 왜 해야 하는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연극을 할 수 없다, 라는 골머리 아픈 숙제를 풀고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뒹굴의 역사는 그 숙제를 풀어가는 역사였다고 할 수도 있다. 예술하는 인간이라 자존하고 싶다면 우선 그 예술이라는 것의 가치를 찾아내고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 뒹굴에게 연극 비슷한 소통으로 표현되는 어떤 공연들은 그 증명의 수단이자, 증명의 결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9년 5월 23일 목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2탄 : 丙 소사이어티, 극단 배우들, 극단 Y


진정성은 어디에 있고,
열정은 어디에서 오나?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와 극단 배우들(이하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을 종종, 아니 꽤 자주 후려치곤 하는 어떤 언어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팀들이다. 현재 호명되고 있는 청년 세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청년연극인들은 착취적인 환경에 대해 점점 예민해지는 감각과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사회에 진입한 청년들에 대한 착취는 비단 임금 체불이나 신체적 폭력 같은 물리적인 측면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어떤 기만적인 논리가 위아래를 순환하며 작동하고 있다. 기성이 되어가는 연극인들은 자기들도 가진 게 없다고 주장하며, 연극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들도 무언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일까?   

  병소는 그 물음의 진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다고 본다. 진정성은 정의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병소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성인지는 몰라도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까 뭔지는 몰라도 요구할 수는 있는 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한 대답도, 그것이 대체 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이 늘 열정을 내보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연극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배우들끼리 모여든 팀이라 오히려 그런 문제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우들의 멤버들은 극단에 들어가거나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바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팀을 만들었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배우들 역시 초창기에 프린지 페스티벌을 거쳐 갔다. 2017년에 프린지에서 <죽음과 소녀>의 일부를 발췌해서 용서와 죄책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공연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생 청년팀이 지속적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열심히 고민해서 지원서를 내도 듣보잡은 쳐주지 않는 현실, 연극을 자꾸 멈춰야 하는 현실 앞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연극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들의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마음은 양날의 검이 되기 마련이다. 어쨌든 계속 연극을 해야겠다는 열정은 스스로를 인질화한다. 임금이 무이자 할부마냥 찔끔찔끔 지불되어도, 이름 있는 연출이 연습실에서 재떨이를 집어던지려 들어도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최후의 질문은 “너 열정이 부족한 거 아니야?”일 뿐. 우리가 이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열정이든 진정성이든 그것을 내보이라고 요구받는 것은 언제나 권력 관계의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병소는 2014년 아오병잉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 아오병잉은 아시아+오프+병맛+잉여를 줄인 말로, 병맛 감수성이 인터넷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고 있던 시점에 연극도 잉여성이나 무용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열린 축제였다. 병소는 적절한 판이 깔린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한 마디로 진정성이란 걸 갖추지 않은 연극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한테 왜 그러세요>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3부작 꽁트였다.

  1부에서는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일체형 책상의 앞뒤를 돌려 뒷사람이 앞사람의 책상을 써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앞사람이 움직이면 뒷사람이 글씨가 자꾸 삐뚤어지는 식이었다. 2부에서는 차분한 요가 교실에 뽁뽁이를 깔아놓은 상황을, 3부에서는 좁디좁은 입시 무용학원에서 아이들이 발레 연습을 하는 상황을 보여줬다. 한 마디로 주어진 시추에이션 탓에 자꾸 억울해지는 사람들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메시지를 주려는 강박 없이, 자꾸 망하고 어긋나는 병맛스러운 상황만을 보여주고 거기에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 병소는 그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 없이 연극을 만들어보았던 초기의 시도 중 하나라고 회상한다. 이때 진정성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태도로서의 진지함, 또는 심각함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정과 진정성은 예술가에게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상상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병소는 한국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진실된 마음을 뜻하는 Sincerity와 진품인 것을 뜻하는 Authenticity가 결합된 상태로 통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한테 너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텅 빈 가짜일 것이다, 라는 논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말하는 열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열정과 진정성은 평가 권력을 지닌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할 자기증명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서 내가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를 지켜보고 평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면, 열정과 진정성은 처음부터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또 저기에 있음을, 혹은 잠시나마 여기를 저기로서 경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게 이 연극이라는 가상이 아닐까?”
- 2018년〈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공연 대사 중
  그러면 이 익숙하고 기묘한 단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병소는 진정성이 구성되거나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생기는 어떤  가상적 효과로서 진정성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책상을 무대로 썼던 <꼬마 짱꼴라>(2015)에서 인간을 말로 다룬 <노동집약적 유희>,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에 나오는 빈 의자들의 사물성을 차용한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사물과 신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들을 탐구해온 병소는, 이제 진정성 또한 그러한 효과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듯하다.


   

우리가 가부장 없이
협력하려면

- 극단 배우들 × 극단 Y


  극단 배우들과 극단 Y(이하 Y)는 작업 환경 내에 존재해온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위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 중인 팀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얼핏 보면 연습실은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집단으로 분류되는 팀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계와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할과 보직에 따라, 나이와 서열에 따라, 소속과 성별에 따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작업 환경 내의 위계와 불평등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를 인간적으로 쇼부 쳐서 해결하는 식 말고, 구조적 대안을 고민하는 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은 말 그대로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2017~2018년경에는 ‘창작집단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팀이지만 2019년에 이르러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극단 배우들’로 개칭했다. 연출이나 기술 스탭 등의 보직을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맡지 않고 매 공연마다 상의를 통해 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화를 통한 공동창작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는 점도 이 팀이 멤버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집마차>(2018)는 멤버들 각자의 에피소드를 모아 풀어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배우들은 연출자나 대표자에게 위계적인 중심을 부여하는 대신 배우 간의 평등한 소통을 중시하며 작업을 해온 것처럼 보인다.
  강윤지 연출의 1인 극단인 Y는 매 작업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러브콜을 보내 팀을 꾸리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Y는 수직적인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가부장을 지목한다. 가부장은 기본적으로 한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의미를 확장하여 어떤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Y는 연극계가 가부장에 의한 규율과 관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측면들을 들여다본다. 페미니즘과 젠더감수성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가져가고 있는 Y는 가부장에 의한 통치의 문제를 폭력적인 기율紀律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백스테이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위계 폭력들은 선배님이니까, 연출이니까, 어디 학과 교수니까, 연극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하는 이유 등등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가부장은 가해행위를 정당화하고 피해호소를 억압하는 바로 그 힘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Y가 이야기하는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성의 문제는 연출 중심주의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 하나의 팀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대부분 연출이다. 연출은 공연의 미학적 완성도를 책임지고 감독할 뿐만 아니라 작업에 있어서의 의사결정과정을 이끄는 직책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모든 결정권은 연출에게로 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권한이 막대한 만큼 책임도 막대하다. 마치 가장이라 불리는 존재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가부장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는 연극 사회 내에서 연출직을 맡는 사람은 한 팀을 책임질 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강윤지 연출은 나이가 어린 + 여성 연출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습실에서 엄격하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디렉션을 하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고정적으로 연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는 배우들의 경우에는 팀의 수평적인 관계성 자체가 가부장성을 중화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디렉션을 담당한 멤버와 디렉션을 받는 멤버 사이의 소통이 즉각적으로 솔직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이 팀이 기본적으로 배우라는 존재를 연출이 조종하는 인형이나 표현 도구가 아니라 독립적인 크리에이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만드는 작업은 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미리 결정된 사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는 크리에이터들이 매번 새롭게 부딪혀가며 바꿔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우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즉흥적인 에뛰드 연습을 통해 대본상에 없었던 장면들을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저희끼리 있으면 기본적으로 즐겁긴 해요. 포지션 상 동등하고, 서로의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어요. 다른 팀에서 할 때에는 연출부와 배우진 사이의 마찰이 있거나 선이 있게 마련인데, 저희 팀에서는 그 선 자체가 둥글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관계성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요.” 
- 사무국 × 극단 배우들 인터뷰 중
  Y는 2018년 11월 평등한 제작환경을 위해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을 작성한 바 있다. 가부장성으로 대표되는 작업 내 위계폭력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구성원들 각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들의 세목을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세상에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 서열, 권위의식이 거의 자연화되어 있는 이 연극판에서 대안적인 모델을 찾고자 하는 두 팀의 시도는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 없이도 되던데? 라고 쿨하게 대꾸할 수 있는 팀들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화학작용4] 함께-인터뷰 1탄: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丙 소사이어티


모든 ‘각자들’의 연극,
너와 나의 관계성

- 콜렉티브 뒹굴 ×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과 프로젝트 하자(이하 하자)의 출발점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정극 중심으로 공연을 올리는 대학 극회에서 떨어져나온 이른바 부스러기들이 헤쳐 모여 만들어낸 집단이라는 점이다. 뒹굴은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정극이 정말 재미있는지, 이 시대에 맞는 연극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든 팀이라고 한다. 하자 역시 비슷했다. 정극을 만드는 과정이 성향상 맞지 않는 데다 단체 생활마저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야합했다. 연극다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두 팀의 결성, 때는 2012년이었다.

  대학 극회를 발판으로 삼아 연극계에 진출하는 청년들은 많다. 이 과정은 흔히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장하는 서사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뒹굴과 하자는 세미-프로 양성소에서 착실히 연극수업을 받으며 성장한다는 줄거리를 조기에 절단했다. 그럼, 이 절단된 단면에서는 과연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생장점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뒹굴과 하자가 삐뚤빼뚤하게 걸어온 길은 그런 질문들과 씨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왜 항상 내 삶을 버려두고 예술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혹은 예술을 잘 하는 식으로, 혹은 잘 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너무나 큰 압박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모이게 되었습니다.”
- 2012년 〈니나노 뒹굴〉공연 당시, 성지수 대표의 발언
  뒹굴과 하자의 다른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길 거부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무릇 연극이라 하면 텍스트든, 연출의도든, 극단 기조든 간에 구성원들의 신체로 하나로 끌어당기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뒹굴리안들은 초창기 〈니나노 뒹굴〉 때부터 이미 팀원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 기-승-전-결을 거쳐 가는 작업 방식을 지양했다고 회고한다. 연극이 덩어리로 굴러가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상실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뒹굴이 예술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로부터 꺼내오고 싶었던 것은 각자의 것이었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가져와서 좋은 점을 찾아보고, 그것을 재료 삼아 놀아보면서 발전을 이루는 형태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2016년에 뒹굴은 그렇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갖고 드나들 수 있는 팀, 혹은 어떤 움직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콜렉티브collective를 달게 된다.

  덩어리 상태로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포부는 하자에게도 중요했다. 단체를 만들지 않고서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2~2014년 대학 동아리로 활동하던 시절 하자가 도전한 것은 위계 서열 없는 수평적 상태였다. 무조건 창작극을 하고, 작업을 위해 모이면 먼저 서로를 인터뷰한 다음 맞물리는 부분을 가지고 주제를 도출한다. 이슈나 주제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만나서 정해가는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하자가 방법론적으로 중구난방을 취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많은 공연팀에서 연출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듯이, 이슈 셋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상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목소리 비중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생팀들이 자신들만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어떤 의식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과 달리, 하자는 목소리의 다양성을 향해 팀원들의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서 넓히는 방향을 취했던 것 같다.
  이른바 연극다운 연극들의 성소가 극장이라면, 뒹굴과 하자는 우선 극장을 놓아두고 밖으로 떠나는 방법을 취했다. 뒹굴의 첫 공연은 포이동 화재 재건 1주년을 기념하는 ‘벽돌문화제’(2012)에서 트럭 두 대를 놓고 짧은 퍼포먼스를 가진 것이었다. 초창기에 뒹굴은 관객이 어둠 속의 눈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권위적인 극장 공간을 벗어나 관객들과 가깝게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장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같은 해 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열린 〈니나노 뒹굴〉의 경우에는 관객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체조를 같이 하는 참여 코너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게 연극인지 사회적 프로젝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논다면 관객과 함께 놀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그 이후로도 죽 이어져온 듯하다. 관객에게 배심원을 시켰던 〈바로 그 얘기〉(2016), 관객에게 요정을 돕는 베타테스터 역할을 시켰던 〈조커카드 베타테스터 파- 티〉(2017), 관객에게 흡연자 노릇을 시켰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2019) 등등.
  관객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공터로 나갔던 하자는 이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거리극을 하기도 하고, 대안학교나 난곡동 태권도 학원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고 한다. 하자는 관객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대신 1대1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대1의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태로. 뒹굴이나 하자나 그들의 팀을 구성하는 원리를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해보려 노력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라는 덩어리로 보는 대신 너와 내가 가진 각자의 것들을 보고자 하는 노력, 혹은 관계성의 실험. 2012년으로부터 7년 간 지속하고 있는 두 팀은 여전히 초창기에 발견했던 생장점을 구불구불 옮기며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의 몸이
무대 위를 서성일 때

- 프로젝트 하자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하자와 丙 소사이어티(이하 병소)는 팀 이름에 이미 자기정체성이 투사되어 있는 팀들이다. ‘하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왜 못 하지, 하는 푸념만 나누다가 ‘하자!’ 라고 결의했을 때의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딘가 조금씩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하자瑕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자의 전서아 연출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비주류의 정체성과 감성을 지닌 팀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병소의 이름에도 그러한 비주류 정체성과 감성이 투사되어 이다. 병소 역시 2012년에 결성되었는데(2012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는 한창 병맛이라는 유행어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술병을 굴리며 지병持病을 앓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하하하 우습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병맛 감성. 최종적으로는 갑과 을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아예 병이 되겠다는 선언으로서 丙 소사이어티는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계적 중심을 배제하고 천천히 지속하는 팀들은 구성원들에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자와 병소 역시 고정적인 멤버를 거의 두지 않고 그때그때 공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체 상태의 집합체가 아니라 느슨하고 액체적인 풀pool의 상태로 놓아두었던 셈이다. 멤버들은 각기 자신의 삶을 살다가 그 시간만큼의 고민을 안고 돌아온다. 병소의 경우에는 6년 만에 돌아와 작업을 하게 된 멤버도 있었고, 하자의 경우에는 멤버들이 각각 졸업과 취직의 관문을 넘은 뒤 2년 만에 다시 만나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2016년에 다시 모인 하자는 창작극에 공을 들이다가 2017년 밴드 GRiN과 콜라보한 음악극 〈안녕〉을 선보이게 된다.
  하자의 성격이 다소 변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이라는 공연이었다. 이사를 돕느라 해후하게 된 바이섹슈얼 여성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다. 전서아 연출은 하고 싶은 얘기가 정확히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하자라는 팀에 처음부터 비주류 의식이라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주류 의식이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자면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 딱 들어맞는 퍼즐을 이룰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끼리의 공존이 아닐까.

하나: 망가진 인간들끼리 위로가 되나.
유진: 망가진 인간들끼리는 위로가 된다. 난 아직 믿어.
-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대본 중 

  갑도 을도 아닌 병들의 소사이어티를 자처한 병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비주류의 모습에 주목했다. 〈노동집약적 유희〉 시리즈는 편의점, 식당, 서점 등의 알바 자리들이 늘어서 있는 커다란 부루마블 말판 위를 움직이며 생존을 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의 역할을 하게 되는 참여관객들은 최저임금만큼의 자본과 일정한 체력 수치를 갖고 이 비정규직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남기를 도모하게 된다. 한시적으로 어떤 공간에 머무르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자신이 머무를 공간을 사야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극장들 사이를 전전하며 무대 위에서 잠시잠깐 현존했다가, 다시 도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청년연극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집약적 유희〉는 애초에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했던 사업이 지원금에서 떨어진다든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다든가 하는 우연한 계기들이 겹쳐 이 공연은 2015년~2017년에 걸쳐 총 네 번이나 상연되었다. 물론 모두 다른 극장, 다른 장소에서였다. 병소는 매번 새로운 무대를 만날 때마다 그 공간성에 맞게 공연성을 개조해나갔다. 가령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단정한 블랙박스 무대를 만나면 방송 중계 현장처럼 만들었고, 연습실 공간을 만나면 관객과 함께 하는 레크리에이션을 삽입했고, 인터넷 공간에 Rodong.zip 파일을 흩뿌리거나 집회 신고를 넣고 보신각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현시하기 위해 절룩거리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비주류 청년연극인들의 몸. 그것은 칸으로 나뉜 부루마블의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말들의 모습과도 같다.
  2018년을 기점으로 하자는 그들의 창작 원천이었던 비주류 의식을 소수성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놓게 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소수의 소수의 소수이다. 다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는 일인칭적 감각에 대해 사고하기. 그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인식의 레벨을 옮겨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공연을 치르면서 하자는 소수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관객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호출한 관객들이 무대 위에 앉아 있을 때, 어떻게 소수적인 것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하자 역시 비주류의 몸을 어떻게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자가 있는 사람들의 소사이어티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