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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9일 일요일

가공되지 않은 드라마를 꾸려가는 힘의 진실함

<말뫼의 눈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수희 작/연출 
2017/04/06

시작은 오해 

  두 여배우가 억지스러운 고등학생 분장을 하고 등장하여 둘만이 아는 암호 동작을 과장되게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대사로 나누는 첫 장면을 대했을 때 작위적인 드라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조선소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 다음 버스 정류장 앞에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제시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 명 씩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 쉴 틈이 없었다. 첫 공연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미리 계산된 분주함으로 이곳저곳에 배치된 설정들을 정신없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떠들썩함은 조금의 침묵도 어색해서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상으로 다가왔다. 많은 정보들을 인물들의 대사와 행위 곳곳에 알차게 설정시켜 놓고 가는 작품의 시작부는 전체적으로 차분하지 못했고, 꽤나 계산된 드라마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신뢰의 끈   

  그러나 간이식당에서 룸펜으로 나왔던 여자가 맨 앞 장면에 등장했던 수현이었음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 2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수현과 미숙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두 인물의 달콤하지만은 않은 우정이 감지되면서 일단 이 드라마에 몰입하기로 한다. 이 장면에서 작품을 달리 볼 수 있는 것은, 수현과 미숙이 오프닝에서 설정되었던 느낌으로 성장하기는 하였으나 어떠한 전형성도 탈피한 인물로 컸다는 사실이다. 시골 마을에 들어 선 조선소 따위에는 세상 관심이 없다는 듯 현실에 냉소적이고, 아니 세상살이에 냉소적이며,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수현은 어정쩡한 조건부를 단 성인으로 크고 있었고, 어린 시절 크레인 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 보겠다던 미숙은 돈 잘 버는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이 되어 (기껏해야 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자신의 포부를 (이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세파를 끌어안는 힘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 대목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마음이 열린 이유를 말하자면 이 두 인물이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들일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도 작품이 이 두 인물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질타를 하거나 편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면서도 이 두 인물을 나란히 애착 어린 시선으로 추적해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은 점점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커다란 신뢰로 바뀌었고 극은 결국 나의 깊은 내면과 손을 맞잡았다. 알고 보니 작품은 이 두 여자만의 드라마가 아니었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아버지 빽으로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으로 취업한 진수, 그리고 시종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 크레인이 들어 온 후 마을을 드나드는 사모님들을 보고 인생의 비애를 느낀 은옥, 마을에 돈이 돌자 어떻게든 기회 삼아 돈을 벌어보려는 은옥의 남편 등-의 동등한 드라마를 두루 살피며 참 착하게도 여러 고통과 여러 열망, 아니 고통과 열망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여러 당연함들-녹록치 않은 삶에서 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함-을 어떠한 폐쇄적인 주장 없이 평등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시종 작품 속 그 어느 인물의 드라마에도 작가는 편을 들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이의 드라마에 정성을 쏟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어려운 삶의 몫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작품을 만나가는 과정 안에서 흔쾌히 체감된다. 명백한 드라마를 구축하면서도 관객에게 어떠한 드라마도 주입시키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산뜻함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태도는 외면할 수 없는 세계이기는 하나 검은 먹물 같은 인물과 사건, 드라마, 작가의 할 말에 관객을 전부 가두어 놓고 질식케 하는 기존 드라마 연극의 태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이렇게 산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일인이기는 하지만) 작가와 연출자가 연극을 넘어 삶을 응시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즐겁다    

  그리고 즐겁다. 우선 작품은 탄력적인 연극성을 구사하며 즐거움을 자극한다. 작품 초반에 옆에 앉은 관객과 손을 잡으라고 했던 과감한(!) 제안, 은옥의 스토리텔링-은옥은 그 추레한 얼굴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핀 조명을 받으며 자기 고백을 하는데, 이 장면은 그 어느 장면보다 호소력이 짙다. 그 이유는 점층적으로 강렬해지는 핀 조명과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이 가진 고백적 권위도 있겠지만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지닌 생생함의 파장 덕분이다. 호미로 밭을 매다가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타게 된 경위를 서술하는 이 장면에는 한 개인이 바라 본 한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 명시된 뮤지컬적인 장면 연출-이 작품에는 은옥이 댄스홀에서 남편을 마주쳤을 때와 할매가 죽었을 때 뮤지컬적인 장면이 개입되는데 이 두 장면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처럼 가장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살맛나는 상상으로 제시된다.-, 버스 씬-은옥, 할매, 수현과 미숙이 하나의 프레임에 잡히는 버스 씬. 버스 씬에서 조각된 여자들의 풍경을 보며 이 연극은 진정 아무럴 것 없는 남루한 여자 인물들의 돋보임이라고 생각한다.-이 연극적인 의미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연극적 즐거움은 정형화된 드라마를 따르는 척하면서 결코 정형화되지 못하는 생의 균열들에 힘을 모으고 있는 지점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사의 점핑-미숙의 남편이 죽었다는 대사와 함께 붙는 다음 장면은 그 말을 한 할머니의 장례 장면이었던 것-, 구조의 컨트라스트-미숙과 수현의 관계는 기승전결로 완결되지만 작품의 전체 드라마는 결코 정박자로 굴러가지 않는 것-, 작품의 결말까지 발설되지 않는 비밀을 하나쯤 품고 있는 것-은옥의 행방-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인공 같은 인물을 가장 설득력 없는 인물로 설정한 것이 작품 속의 드라마에 균열을 가한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은 수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가장 잘 모르는 불투명한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지 않으며 극의 처음에서 끝까지 가장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제시된다. 얼핏 보면 작품의 서사적 화자 기능을 하는 듯한,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 인물이 전체 극에서 가장 희미한 아웃사이더로 밀려 나 있는 설정은 작품을 구태여 만들어진 극에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비쳐진다. 
  이토록 뚜렷한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만들어내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천착하는 힘으로부터 신중함과 따뜻함을 넘어서 절실함 마저 느낀다. 탄력적인 연극성으로 즐거움을 주는 노력 너머에는 오롯이 사람,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내려 하는 마음이 만져진다. 특히 남미정 배우가 연기한 할매의 모든 순간들이 그렇다. 버스 정류장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할매는 이곳에서 스치듯 만나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소소하고 거대한 싸움들, 저마다 절실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빚어내는 그 숱한 싸움의 순간들마다 막간처럼 개입한다. 드라마가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우물에 함몰되려 할 때마다 빠짐없이 개입되어 허투루 내뱉는 듯 하는 할매의 대사는 매 번 웃기지만 그 어느 정식 대사들보다도 진실하고 진지하다.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누구의 곁에도 에둘러 가 앉아 주고, 그러면서 또 이기적인 그녀는 결코 추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작품 전체를 떠받든다. 

작품의 선함에 대하여

  악인은 아무도 없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모든 삶의 선함을 믿는다. 작품이 직시하는 것은 오로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라는 악한일 뿐이다. 무대 위에는 제각기 이질적인 인물 군상이 한 데 공존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결국 삶을 잘 살아내 보려 하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이기적인 계산도 아니고 현실적인 치열함도 아닌 공동의 선함으로 비쳐진다. 모든 진정한 것들은 보편적이고 순수하다. 이를테면 사랑이나 잘 살아보려는 마음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며 순수한 감각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의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질적인 사람들이 지닌 개개의 선함에 대해서. 커튼콜을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을 잘 살아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삶과 연극의 경계 위에 서서 박수를 쳐 본다.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이예은, "깨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감각’에 대해서"

<처의 감각>
고연옥 작
김 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2018년 4월 13일

친화력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서사로 난해함이 개입될 줄 알았는데 작품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다방면의 친화력을 발산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 공간 속 관객들의 마음이 열릴까 궁금해 하며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합심하여 시종 열심히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더욱 정확히는 ‘생명체’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은 ‘곰’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에 국한되어 민족적인 정서를 그려내지 않고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진정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를 채워낸다. 근원적인 생명성에 대한 명상을 지향하지만 정작 작품의 주된 내용은 각자 다른 곳에 이상을 품은 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 현실을 얼떨결에 (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맞이하게 된 남녀가, 그 이상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차적인 현실을 부단히 열심히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한 부부의 공허와 열심. 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가능한 세계상을 아주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예상된 틀 없이 풀어낸다. 이를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어떠한 삶도 흘려버릴 수 있는 여자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현실도 참아내야만 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지위에서 가족-됨을 풀어내는데, 이러한 시선이 매우 보편적인 서사의 미덕을 획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떠한 순간에도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어떠한 담론으로도 환원하지 않으려는 정성을 보여준다. 비록 엔딩에서 남자는 이상을 향해 떠나가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떠나가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는 뚜렷한 결론을 보여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결말은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서 그다지 확고한 지위를 가지지는 못한다. 작품의 전반은 그럼에도 열심이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이었거나 그 생 안에 들어 차 있던 공허와 어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

남자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되는 정성은 동등하나 이 둘에 부여된 서사의 결은 다르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아 피어오르는 인물은 작품의 제목(‘처’)으로 내세워진 여자가 아닌 남자이다. 마음에 품은 이상은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있으나 구차하고 치열하게 살아내 보려는 남자(백석광 배우 分). 그가 갖지 못한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은 비현실적인 분장과 액팅으로 치장된 코러스 중의 한 명으로 설정되었기에 비록 그것이 진실한 생의 갈망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가 품은 미지의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명하리만치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 생생함은 작품의 결말부에 터져 나오는 그의 독백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동굴에서부터 서서히 세상 밖을 향해 나오는 동선을 보여주듯, 칠흑처럼 까만 조명 에어리어(area)에서 서서히 밝아져 오는 공간으로 진입하며 폭발적으로 “도망 칠거야”라고 외친다. 이 한 마디의 대사에는 그가 상실한 어떤 다른 곳에 있을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살아내 보려 하는 초미시적인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이 모두 한꺼번에 전달된다.
  남자의 생생한 묘사는 최순진 배우 分의 경우에도 돋보였다. 가련하리만큼 끔찍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맹렬한 욕구의 포악함까지, 푸념에서 애원에서 폭력으로 발전, 아니 변질, 아니 폭로되는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진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스펙트럼. 이것 역시 한 절망적인 인간의 생생함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장면을 도사리는 한 인간의 파장은 버릴 것이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생함이란 동물의 생명성과는 달리 이리도 교묘하고 책략적인 잔혹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여자는 살아있는 인물도, 그렇다고 상징화된 어떤 의미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는 경험치인 곰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곰과의 재회를 생의 간절한 열망으로 품은 채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후 남자 인간과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또 다른 남자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큰 흔들림 없이 곰과의 사랑을, 곰과의 사랑에서 얻은 반인반수의 아이를 상실한 기억을 생의 중심에 두며 그 부재감을 대체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남자 인간에게서 낳은 다른 아이이며, 이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일로써 자신의 모든 생 의미를 충족시키려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백석광 배우 分-는 이 여자의 현실화된 버전의 인물이다. 그는 곰과의 사랑이 어떤 다른 인간 여자와의 사랑으로 대치된 이 여자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이 작품은 보다 현실적인 남자의 서사를 통해 여자의 서사를 관객에게 체감될 수 있는 것으로 병행시킨다.)
  여자에게서 감각되는 것을 굳이 단어로 설명하면 희미하지만 인간과 인간 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하고 은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대인 모성일 것이다. (작품에는 이 여자를 모성의 상징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시각들도 존재한다. 여자는 공연 내내 시종 한 명의 딸로서 호명되기를 강요당하는 것, 정작 그녀의 어머니는 초자아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제시되는 것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듬고 있는 모성이란 종국에까지 가서 살아남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능적인 버팀목으로 주제화되지도 않고, 신화적으로 비약되지도 않는다. 단지 동물적인 숨과 피처럼 공연의 전반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정한 주제나 상징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외려 공연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그릇처럼, 하나의 공간처럼, 하나의 숨결처럼. 여자는 물처럼 어떤 공간 속의 공기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마음을, 혹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어떤 갈피를 떠돌며 흘러가듯 존재하여서 극을 보는 내내 잡혀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여자는 관객에게 공감되거나 심지어 낯설어지지도 않는데, 이는 인물의 의도적인 공백화 혹은 부재화라고 감각된다. 여기에는 무용수로서만 무대에 서 온 윤가연 배우의 관습화되지 않은 모든 몸짓과 표현의 몫도 분명히 있었다. 이 배우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몸짓과 발성과 표현들은 ‘연극’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곧잘 설명이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관습적 표현들을 거세시켜버린다. 작품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정작 빼곡하게 들어 차 있던 남자 캐릭터들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어 차 있던 작품의 골격들은 희미해지고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기억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공간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존재 자체이다. 실로 작품에서 ‘처’는 부재하며 오로지 ‘처’를 향하는 모든 뜨거움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하는 ‘처’의 감각이 공연의 전반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공연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도 주제화되거나 신비화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그래서 추앙되지도 강조되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존재했던 것이 조용히 바라다 보인다.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작품 어딘가에 무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을 준다.

공간성

  동굴에서 만나 산장에서 잠자리를 가진 남녀가 이제는 집이라는 현실 공간으로 내려 와 부부 생활을 시작할 때 텅 빈 무대 위에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무대 바닥의 한 가운데가 전체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제 안과 바깥으로 구분된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돈을 벌러 나가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적 현실 무대가 공연의 무대 위에 들어차는 것이다. 경계 없던 땅에 구획선이 생기자 고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전체의 땅은 힘을 잃고 그저 구획선만이 삶의 근거가 되는 이 헛헛한 삶의 사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또 이런 구획선이 생기자 배우들이 객석 안으로 난입하거나 무대 가장자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명확한 도발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처럼 구획선 안에서 벌어졌던 삶을 자연의 힘으로 깔아뭉개듯 다시 무대는 육중하게 하강한다. 흙에서 난 인간이 다시 흙이 되어 돌아가는 순간이다. 재에서 재로. 이 인간 보편의 신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무대의 상승과 하강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열고 닫는 박력 있는 무대 연출이다. 그 거대한 판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 동안의 시간, 그리고 잡음 섞인 움직임의 사운드가 많은 서사를 대신한다.
  장면들을 만들 때 남산예술센터 특유의 공간성이 빛을 발한 대목이 있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성이라 한다면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모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데 쉽게 바라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아무리 객석이 만석이 되어 관객들이 빼곡히 차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몇 초 만에 낱낱이 발견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렇게 객석에서 객석이 잘 들여다보이는 시각성 덕에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객석의 공간으로 진입을 하는 순간에는, 여느 극장에서라면 단지 일차원적인 경계 넘기에 머무를 이 동선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최순진 배우가 객석으로 돌진하여 객석 한 가운데의 열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말 외로워 죽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정말이지 이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멸할 것만 같이 외로운 한 개인의 사투를 보여주는 듯했고(심지어 리어왕의 미친 외로움이 보이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의식하면서 무대의 끝과 끝에서 대화를 나누는 백석광과 그의 옛 여인 장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라는 환상적인 모티프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밖에도 잦은 조명의 변화로 무대와 객석이 율동감 있게 하나가 되었다가 서서히 분리되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의 관극을 하자니 한낮의 운동장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분을 느꼈다. 극장이 지닐 수 있는 공공성, 그 역동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젊음

  작품은 결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두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이지만 끊임없이 쇄도하는 코러스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 배치된 정형화된 극 구조를 구태여 에피소드 식으로 교란시키려 노력한다. 각 챕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시작케 하는 코러스의 재기발랄함과 챕터와 챕터 사이의 입체적인 전환들. 코러스들은 드라마적 구조를 나열적 구조로 해빙시키고 다시 나열적 구조를 드라마적으로 몰입케 하는 흔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인물과 내레이터는 물론이고 한 배우의 몸체들이 되기도 하고, 공간과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 바깥으로 나와 연극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가 연극 자체가 되기도 하는 이 풍부한 코러스들! (17년 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던, 늙지 않는 이수미 배우의 기개에 박수를 보낸다.) 텅 빈 무대 공간을 현란하고 소란하리만치 가득 채운 음악과 조명과 코러스들의 무용적 합(合)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상상력이 낭자함에도 모든 표현들이 닫혀 있지 않고 개방성과 건강함과 귀여움을 내포할 수 있는 힘. 작품을 받아들이기 쉽게, 즐기기 쉽게, 응원하기 쉽게, 신뢰하기 쉽게, 사랑하기 쉽게 만드는 이러한 힘은 많은 부분 코러스들이 만들고 있다.
  실로 이 공연은 무용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이유는 율동감 있게 공간을 연출해서만도 아니고,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해서 윤가연 배우와 백석광 배우가 코러스들과 함께 연극임에도 무용에 더욱 가까울 정도의 완성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용적이라는 인상은 연출자의 열려 있는 상상력 덕분이다. 연극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연극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개방성이 돋보이는 연출. 과도한 연극성을 추구하는 연출자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배타적 숭고함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젊음의 탄력성으로 느껴졌다. 튕겨져 나올 것 같이 기운차고 기분 좋은 표현과 표현력. 그렇다고 빤히 ‘나 젊다’ 식의 선언을 함으로써 자칫 ‘어쩔래’ 식의 도발적 표어를 내거는 것도 아니다. 으스대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으며 숭고한 가름막을 쳐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보지도 않는 이 상큼함. 아니 이 솔직함. 아니 진솔함. 젊은이다운 기상으로 감각되는 이 진솔함.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 들어 차 있는 명랑하고 성긴 기운들. 오색 미러볼이 만드는 바닥의 문양과 예쁘게 반짝거리는 빨간 알전구 등,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듯한 재미있는 음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가는 두 남녀. 사랑도 당위도 책임감도 없이 취해버리는 그 밤의 현실을 이토록 귀여운 환상으로 접근하다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귀엽고 무의미한 순간으로 인해 그토록 녹록치 않은 현실을 길게 길게 살아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한 이러한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럴 법하다. 술이 깨고 바로 다음 날 장면에 객석까지 환하게 들어 온 째한 조명은 정말이지 바로 ‘술 깬 다음 날’ 기분을 이 공간에 들어차게 한다.

‘연극의 감각’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끝이 보이는, 심지어는 이미 끝을 내린 채로 극이 시작되는 숱한 연극 작품들에 지쳐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면에 있어서나 작품을 풀어내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다. 작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에 섣불리 도달해 버린 채로 극을 진행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단단한 틀 안에서 관극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게 하는 숱한 연극 작품들. 그 작품들이 극복하지 못한 성급한 폐쇄성을 이 작품은 차고 넘치는 풍부함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배우가 만들고 또 연출이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을 휘어 감싸는 무용과 젊음이 있었기에, 아니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연극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하는 이토록 소박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낸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하여 :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2018/02/26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_

이예은

첫 인상 

  17세기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소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서사의 형식이나 키쉬, 까슈, 마들렌 등등 첫 장면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유럽 문화를 환기시키는 단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캬바레 공연의 모티프를 수용한 듯한 무대와 의상은 지극히 유럽적인 것을 판소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접합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접합은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명백한 표현들이 그러하듯 인위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작품의 장면 장면마다에 뚜렷한 기획적인 의도가 서려 있으면서도 매 장면이 기획된 것 이상의 활력으로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기에는 구차한 살아있는 표현들 덕분이다. 이 공연은 그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을 글로써 기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 작품의 재미있음을 글로써 찬미하기 위해 ‘신세계’, ‘일대실험’, ‘성스럽기까지 하다’ 등의 표현을 쓰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 표현들은 과장이거나 억지이다. 이 공연을 포함하여 이자람의 작품들은 ‘신세계’나 ‘일대실험’ 등의 수식으로 표현 받을만한 단서들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수식으로 찬미받기에는 사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이자람의 작품은 늘 예상의 범위 안에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다. 여기에 미덕이 있다. 안전한 기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바로 이 두 영역, 안전한 것과 재미있는 것이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자람의 작은 위대함을 느낀다.
  작품의 내용은 ⟪소녀가⟫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제도적, 관습적 담론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저 아이와 여자가 결합된 상태에서 티끌 하나 자신의 존재를 결박할 수 없게끔 만들고 마는 한 소녀가 ‘소녀’라는 단어에 깃든 소녀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 소녀는 ‘소녀’라는 관습에 대항할 생각도, 그 관습과 경쟁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존 관습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보통의 성장가와는 다르다. 작품 속 소녀에게는 관습마저도 ‘미지의 숲’과 다를 것 없는 미지의 것이다.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작품 속 대사와도 같이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생의 모든 절기에 몰입하는 소녀의 행동은 관습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작품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유럽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접합, 내용적으로는 제도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대비라는 뚜렷한 모티프들로 읽히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은 명확하게 기획된 이 모티프들이 결코 안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된’ 것이라는 말은 미안한 표현일 만큼 이 작품만의 스타일로 명확한 말들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만 안일하지 않은 것.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 대중적이지만 작가적인 것. 몹시 이루기 힘든 그 양자들 간의 공존을 이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계가 견실하게 느껴진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세계를 증발케 하여 그 이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주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매혹적인 꿈을 꾸게 하거나 지독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 

  동그란 무대를 세 명의 악사가 둥글게 에워싸서 앉고 빨간 드레스와 슈즈를 신은 배우가 무대 위에 입장했을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와- 무대 좀 봐!” 했다. 이것이 공연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고체적으로 주름 잡힌 겹겹의 커튼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만든 무대 프레임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이 육중한 커튼이 조명에 닿아 다채로운 세계의 질감을 만들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힘차게 형상화해 낸다. 커튼 왼편에는 불투명한 빨간 전구줄이 야무지게 두 줄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조명과 흰 조명, 그리고 푸른 조명이 닿았을 때 명확하게 변화되던 커튼의 다채로운 질감과 함께 빨간 전구줄의 반짝거리던 빛을 기억한다. 반닥반닥 빛나는 재질로 제작된 아담하고 동그란 무대는 경사가 져 있고 바닥에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 무대 오른편 위에 오뚝 솟아 있는 작은 단상이 있는데, 이 공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경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단호한 공간이다. 그리고 배우가 율동을 만들 때 날 서게 회전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빨간 치맛자락의 곡선은 무대를 보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는 명랑한 이미지들을 돋운다. 이 작품은 눈으로 씹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마치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느낌이다. 눈으로 차곡차곡 소화하는 진귀한 이미지들과 함께 귀를 열게 하는 숱한 소리들,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때 나는 소리 “캉 찰캉 찰캉 차르르”, 철로 만든 드레스를 부술 때 나는 소리 “뿌셔뿌셔”, 미지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두근두근두근두근”하고 “가슴이 쓰르르르”하는 소리는 또한 이 작품의 내용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공연을 보면서 많은 순간 작품에 흡인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각, 청각 이미지들이 축적되면서 정말 똑 소리 나게 터져 나오는 표현! 표현! 덕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노골적이고 요염하기도 하고 천진하며 우매하기도 한, 그래서 엄청 웃기기도 한, 그러나 앙큼하게 감추어진 속내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이질적 느낌들이 놀이를 만들고 있는 표현, 표현들. 아주 놀기 좋은 놀이터를 작품의 테두리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정말로 아주 잘 놀고 있는 표현, 표현들. 이를테면 “찰캉!” 소리가 나는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기 전 자유로운 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무대 오른 편 단상 위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바람으로 불어오듯 자유가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찰캉! 찰캉!”하는 철 드레스가 몸에 입혀지는 순간 커튼에 닿아 반사된 백색 조명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그 순간 고조되는 북소리는 그 공간과 시간에 폐쇄적인 테두리를 재빨리 둘러치는 듯하다. 숲을 발견한 소녀가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사방군데 몸을 비벼댈 때에는 너무도 천진하고 야해서, 동시에 자신이 천진한지도 야한지도 모른 채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소녀가 “무엇인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는” 미지의 숲을 기어코 활보하며 “두근두근”대는 장면은 어떠한 관습적 지(知)도 압도해 버리는 미지의 지적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어 사랑스럽다. 소녀가 늑대에게서 달아나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푸른 조명과 함께 저녁 공기를 머금은 듯한 시원한 숲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기에서도 다시, 자유가 느껴진다. 이렇게 풍성한 이미지들과 함께 구성진 대사 몇 마디가 칼을 꽂듯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어 서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칼을 꽂듯 호소하는 순간들처럼 말이다. 이토록 작가가 자신을 호소하면서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 관객과 동반하면서 작가가 할 말을 하고 마는 기술이 놀랍다.   

서사

  작품이 지닌 몇 몇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징으로만 이어진다. 철로 만든 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미지의 숲이 상징하는 것, 나무의 길과 물의 길이 상징하는 것, 느끼한 목소리의 늑대가 상징하는 것.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명징한 상징들은 온갖 제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 작품의 열망과 대조적이다. 결국 작품의 열망은 제압적인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허물어버리는 것에 있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서사를 볼 때, 왜 이토록 제압적인 틀에 매달려서 자유를 꿈꾸어야만 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제압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을 철저히 이분하다보니 전형적인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서사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상징들 뿐 아니라 서사의 구조 또한 지나친 전형성을 따르고 있다. 보통의 여자 아이로 태어나서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게 되고, 그 드레스를 부수어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숲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에게 희롱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도리어 늑대를 희롱하게 된다는 서사의 얼개는 전형적인 동화 다시 쓰기의 구조이다. 기존의 동화 다시 쓰기 구조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구조에 대하여 이 작품만이 취하는 어떠한 태도가 있었더라면 보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조로부터는 어떠한 재발견도 각성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지독한 수미상관식의 대사가 서둘러 에필로그를 장식했을 때에는 설마 이대로 끝을 맺을까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상

  그 많은 매혹적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장면이 끝나고 ‘서사가 싱겁다’는 인상과 함께 보다 큰 차원에서 작품의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위대한 작업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는 재미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이토록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생각해 본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동시에 대중적이거나 명확한 기획 의도를 확보한 것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단어로도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그저 예술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은 뭘까. 동시에 ‘재미’라는 것은 뭘까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그리고 작품에 고찰이 없다면 재미란 무슨 의미일까? 라고도 질문한다. 여기에서 고찰이란 앞서 말한 이 작품에 부재하는 서사적, 주제적인 고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도 고찰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 속 표현들은 시종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끈끈한 줄로 이어 관객과 함께 가려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모든 표현들을 다 주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는 바람에 어떤 표현에 머물러 관객이 생각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작품이 관객에게 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했던 말 가운데 “관객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작가가 토대를 두고 있는 판소리의 정신에서부터 발로된 것이라 생각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관객 사이의 끈끈한 탄성을 다져가며 철저히 공감의 영역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가니 말이다. 무대와의 끈끈한 탄성 안에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50분의 상연 시간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공연과 관객 사이의 끈끈함을 너무 믿으려 하다 보니 기껏해야 정성 어린 우정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과 귀가 지극히 세심하게 열리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어떠한 세계와 정말이지 열심히 맞닿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서사와 상징들을 매우 안전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로 이끌어낸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이를테면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과연 작품 안에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예술의 가치로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연극 태교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예은

  열 달 동안 태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찾다보니 태교에 좋은 예술 작품을 찾는 일이란 무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특히 태교에 좋은 연극을 찾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임신 기간 동안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20세기까지 연극사 강의를 해야 했던 터라 시대별 주요 희곡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씩 통독해야만 했는데, 시대를 불문하고 태교에 좋은 연극 작품을 찾아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복수의 심연을 거슬러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고 그 한계성 속에서 단지 신의 필요를 호소하는 아이스퀼로스, 혹은 그 한계성 속에서 철저히 인간의 파멸을 욕망하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한계성으로부터 신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피는 소포클레스에게서마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생명체와 연결 지어 줄 만한 적당한 지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저열한 욕망이나 교조적인 도덕으로 점철된 로마 비극은 물론이고 와 닿지 않는 관념들의 나열인 중세 종교극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생명체에게 전해 줄 에너지를 찾기는 힘들었고. 진실은 지금-여기의 현실에 있지 않고 인공적으로 구축된 어떠한 숭고한 체계 속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세상을 훈계하려 드는 라신의 고정관념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분법적인 가치들을 혐오하면서도 그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무시할 수 없어 작품의 배경에 넌지시 깔아 놓고는 그 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점점 미쳐가는 햄릿, 맥베스, 리어, 오셀로의 침잠으로부터도 태교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로 다른 이유와 형태로 시종 죽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죽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극복한 대신 세상을 전면적으로 훈계하려 들거나 세상을 불신해버리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들. 무엇이 되었든 그 무언가와 화해하지 못한 수많은 인간들을 창조해내며 존재를 세상과 구분 지으려 하거나 존재를 자체적으로 분열시키려 하는 현대 작가들에게서 태교의 단서를 찾기란 더욱 만무했다. 이 모든 회의감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시력을 가진 체홉에게서도, 현실과 이상 사이의 연결에 고군분투하는 내 사랑 괴테에게서조차도 태교의 수준까지를 바랄 수는 없었다.

  왜? 왜일까? 왜 연극은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들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태교란 당연히 목적성이 뚜렷한 교훈이랄지 환상적인 해피 바이러스를 좇는 동화 속 서사 같은 것으로 충족되는 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다르게 말한다면, 이제 막 탄생기에 접어든 생명체와 예술이 접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순간이란 연극에서 왜 이토록 만들어지기가 어려운가라는 질문 정도가 될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대충 이런 말이다. 연극에서는 왜 그리 ‘기쁨’이라는 걸 만나기가 힘들까? 무턱대고 향해가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 성찰적이면서도 분명하게 맺혀지는 기쁨 같은 것 말이다. 대상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파해내면서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이 따뜻하게 터져 나오거나 흔들림 없이 신뢰를 주는 아주 실제적인 기쁨 같은 것. 복잡하고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것들의 층위가 두텁게 첩첩 쌓인 어떤 고지대 위에서 비로소 터뜨릴 수 있는 희망이나 떨림 같은 것.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존재와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단지 태교의 마음만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을 이어내어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하는 인간 보편의 소망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곧 인간에게 좋은 예술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태교라는 barometer가 들어 선 이후 예술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이 글을 쓰게 된 것인데, 사실 내가 만난 연극 중에서 태교에 좋은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없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베케트와 프리엘의 작품들이 그렇다. 두 작가의 일부 작품들만큼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있다. 더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 본다면 콜린 히긴스의 작품 <해롤드 & 모드>에서 노년의 죽음을 눈앞에 둔 모드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청년 해롤드에게 “그래도 우리에겐 친구가 있잖아”라고 말하자 해롤드가 “누구요?”라고 물으니 다시 모드가 “인.류”라고 분명하게 발음하던 순간 같은 것도 내가 경험한 태교에 좋은 순간이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가 미쳐 만나본 적 없는 태교에 좋은, 아니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연극들이 무궁무진하리라 믿는다. 다만 나의 어마어마한 무지가 문제일 뿐.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우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무수히 존재할 그 작품들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항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고프다. 그 풍성한 세계와 이 빈약한 세계 사이에는 늘 거대한 간극이 있다.

2017년 11월 4일 토요일

다큐라는 형식을 이용한 자기 옹호식의 일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예은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형식을 따라 이 글도 1부와 2부로 구성하였다. 감정적인 크리틱 1부와 관찰자적인 크리틱 2부로 이 글을 구성한 것은 파렴치한 감정 선과 자기 냉소적 관찰 선을 모순적으로 공존케 하는 영화의 형식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방향성은 에필로그에 있다. 

크리틱 1부


나의 존재함이 섬세한 만큼 타인의 존재함도 섬세하게 다루어지고, 타인의 존재함이 거친 만큼 나의 존재함도 거칠게 다루어지는 시선. 그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어떠한 세계가 창조되는 것. 작가가 어떠한 서사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진실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 있다. 극적인 서사이든 다큐적인 서사이든, 무대 위의 서사이든 영상 안의 서사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타인의 감정과 존재는 ‘남의 것’이라 쉽게 비웃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존재는 지독히 세심하게 천착하는 형식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명수(정재영 분)의 여자 친구를 ‘여편네’의 전형으로 전락시켜 ‘그런’ 여자들과 사는 ‘그런’ 남자들을 허식적이고 피곤한 존재들로 유형화한다. 그렇게 유형화시킨 인물들을 한 데 잡아 ‘너희들’이라고 지시하며-‘나’는 ‘나’로 표현되지만, ‘너’는 ‘너’라는 개인이 아니라 ‘너희들’이라는 무리로 표현된다- ‘너희들’과 다른 ‘나’의 섬세한 정체성에 함몰되어 세상을 ‘나 vs 너희들’로 이분한다. 하여 ‘너희들’과 달리 최소한 분노할 줄 아는 개인인 ‘나’는 숭고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영화는 시종 분노를 터뜨린다. 1부 술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영희(김민희 분)의 모습은 이 영화가 드러내는 끔찍하리만치 편파적이고 피상적인 시선이 극단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여기에는 나와 너 사이의 어떠한 가능함도 없다. 현실에서는 이원화되어 있던 ‘나와 너’가 ‘나를 넘어선 나’와 ‘너를 넘어선 너’가 되어 영화 안에서 만나 현실을 초월한 어떤 시선을, 어떤 인물을, 어떤 가능함을, 어떤 세상을 만드는 가능성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풍랑이 지나간 후 고요만 남은 듯한 김민희의 선(禪)적인 연기 스타일로 진행되어 따분하리만치 차분한 듯하지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매친 분노에 도달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 역시 자연스레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그 분노는 영화 속에 배치된 철저히 ‘나’를 옹호하는 분노에 동조하는 분노도 아니고, 당연히 홍상수-김민희의 리얼한 관계가 자극하는 어떤 지점과도 전혀 상관없는 분노이다. 관객의 일인으로서 내가 느낀 분노는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표면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서 스스로가 욕지거리를 해대는 이 영화의 태도에 대한 분노이다. 영화로써 현실의 ‘나’를 옹호하려는 ‘나’, 고작 인터넷 기사에나 대응하려고 만든 정도에 지나지 않는 피상적인 ‘나’만 있을 뿐 영화로 인해 무언가를 향해 보다 확장된 나, 보다 가능한 나, 그리하여 보다 정확해진 나란 찾을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가 시종 담아내고 있는 것은 제목 그대로 ‘밤 (유예된 시간의 저편 속)’의 ‘해변 (유예된 공간의 저편 속)’에서 ‘혼자’뿐이다. 현실과 관계 맺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 속에 함몰된 이 영화는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가능한 일들을 오로지 ‘나 혼자’라는 비좁은 영토 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작품으로부터 관객을 배제시킨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형식은 ‘너희들’ 모두로부터 단지 ‘혼자’가 되기 위한 ‘나’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영화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어 역시 ‘혼자’가 되어버린 관객 1人인 나는 이 영화의 형식이 의도한 바를 더 없이 충실하게 따라간 것일지도.

크리틱 2부


그러나 거기, ‘밤의 해변’에는 결국 아무도 없다. ‘혼자’라고 표현된 ‘나’ 자신조차도 말이다.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해 현실의 ‘나’를 옹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여기에서의 ‘나’는 영화와 현실 그 사이 어디에도 없는 그저 ‘나일뿐인 나’ 밖에는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토록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나’ 자신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영희라는 인물을 시종 자취 없이 사그라지기를 바라며 이방의 도시들을 유령처럼 떠도는 인물로 만든 이유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존재로서도 그녀는 부재하고 말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러한 암시는 1부의 마지막 장면, 해변에 혼자 서 있던 영희가 급작스럽게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되는 장면으로 시각화된다. (이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끌어내는 배우는 상징적이게도 영화의 실제 카메라 감독인 박홍열씨이다.) 결국에는 혼자 남았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는 장면이다. 시종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검게 늘어뜨린 긴 머리를 한 여인의 이미지로 영희를 그려낸 것도 시종일관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는 혹은 그녀가 따라다니고 있는 죽음의 욕망, 부재하고 싶어 하는 끈질긴 욕망의 투사이다. 2부에서 해변가 호텔에 들어가자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시킨 사내가 저승사자처럼 등장하여 열심히 창문을 닦는 행위를 하는 것 또한 아무도 아는 척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 영희는 열렬히 이곳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호소한다.


이 지점에 들어서자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판단이 전환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너희들’과 ‘나’를 이분하면서도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하고 마는 것이라면, 영화는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형식 자체를 냉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의 사이를 그토록 조야하게 비하시켜 놓고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만든 그 형식을 비웃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금 한 줄기 의혹스러운 희망이 생긴다.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형식으로 이용하면서 그 프레임 안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거기에서 모자라 ‘나’를 옹호하는 문법은 다큐인 척 하는 그러나 사실은 채 현실을 보조해주기 급급한 현실미만의 치졸한 것들이 저지를 수 있는 극단의 파렴치함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반전은 그 파렴치함을 펼쳐놓고는 스스로가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히 변태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현실과 영화, 현실과 예술이라는 경계 위에서 다큐라는 흥미로운 방식을 다시금 새로이 접하게 한다. 이제까지의 홍상수가 저지른 적 없었던 끔찍함이자 그 끔찍함에 대한 졸렬한 자조이다. 하여 이 텍스트는 홍상수라는 인물 전체를 근원적으로 회의하게 만듦과 동시에 언짢은 기분으로 다시금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리얼한 관계에는 관심 없고,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가 자기 형식을 끔찍이 이용해 먹고 있는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이 시종 실망스러웠음과 동시에 그 실망스러움을 스스로가 전시하고 있는 그의 태도가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홍상수의 다큐’라는 형식이다. 단지 영화라는 형식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 현실에 대고 편파적인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정체성이면서 그와 동시에 현실을 이용하고 마는 이 영화를 작가 스스로가 비웃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영화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성이다. 이 지점에서 다큐와 극 사이를 어슴푸레 오고 가며 다큐도 극도 되기를 거부했던 기존의 홍상수는 사라졌다. 아울러 다큐와 극 사이를 망연히 오고 가기 위해 홍상수가 친히 사용해 왔던 반복적인 형식들-꿈 기운과 술기운에 의존한 기묘한 반복적 장면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도 사라졌다. 대신 다큐도 이용하고 극도 이용하면서 관객 따위는 됐고 심지어는 영화 따위도 됐다고 선언하며 단지 ‘혼자’가 되고 싶어 사투를 벌이는 홍상수가 새로이 출현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며 자조하고 등지는, 그래서 이제까지 반복적으로 지속시켜 온 숱한 그의 영화적 형식들을 다 내던지고 터럭 하나 걸친 것 없이 혼자가 된 홍상수의 뒤태가 이제까지의 홍상수를 가장 강인하게 드러내주는 본태 같은 것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그러나 영화 전반을 놓고 본다면 영화의 몸체는 양의 비중으로서나 질의 비중으로서나 자기의 형식을 자조하는 관찰 선보다는 자기 형식에 스스로 함몰된 감정 선에 더욱 치중해 있다. 아니 이 둘은 비교의 차원이 되지 못할 정도로 영화는 감정 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내 건 관찰 선은 사실 이 모든 감정 선을 다 말해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꿈’이라는 프레임을 덧입었을 뿐 영희와 영화감독(문성근 분) 사이의 사랑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뜨거운 술자리나, ‘죽음’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덧입었을 뿐 시종 ‘나’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성난 눈을 치뜬 채 세상을 치받고 싶어 하는 기운은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적 외피를 온전히 압도한다. 즉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은 작품의 에너지로 전혀 승화되지 못한 채 작품으로부터 이용당할 뿐이며 영화의 내용과 질은 전적으로 ‘너희들’과 분리된 ‘나’의 옹호로 가득 채워져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도 홍상수의 기존 작품들에서처럼 어김없이 술이, 그리고 술을 마시고 취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술은 기존 홍상수 작품에서의 술과는 완연히 다른 기제이다. 이 작품에서의 술은 ‘꿈’,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물에게 내던져진 것이기는 하나 결코 인물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의 영희는 결코 <하하하>와 <북촌방향>의 유준상처럼, <우리 선희>의 이선균처럼 술이라는 장치에 압도당해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영화 배후의 사건인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대중의 일원인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시종 이 영화가 제발, 부디,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넘어서는 영화이기를 열렬히 바랐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를 관찰하는 영화적 시선을 형식으로 활용할 뿐 결국 ‘나’를 호소하는 현실적 감정을 텍스트 내용의 요체로 만드는 자기 옹호식의 일기에 지나지 않았다. 영희의 꿈 속 술자리에서 직접 발화되고 있듯이, 우리는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만을 늘어놓는 이 영화의 어디로부터 가치(?-가치라는 단어가 이 영화의 리뷰 중간에 개입되는 것이 생경하기는 하지만)를 찾아야 하는지 실로 의문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의문이 새로이 제기되는 이유는 영화에 내재된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에 지나지 않는 진실은 이제까지 홍상수가 보듬어 낸 일기적 가치와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의 일기는 자기 질문이 아닌 자기 옹호로 가득 차 있는 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만큼 홍상수의 다큐는 이 작품으로 인해 한걸음 퇴보하였다. (평단에서는 이 영화로 인해 홍상수의 형식이 한걸음 진보하였다고 입을 모으지만 말이다.) 자기를 질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저 편과 맞닿을 수 있으나 자기를 옹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곳과도 맞닿을 수 없다. 다큐에서든 극에서든. 아니 현실에서든 예술에서든.    

결국 이 글은 가치니 성찰이니 초월이니 관찰 선이니 하며 작품을 훈계하는 평면적인 글로 읽혀질 것만 같아 씁쓸하다. 영화를 경험하는 과정과 글을 써 가는 과정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질문들이 기어이 일목요연한 방향성을 틀어 이 글을 만들게 된 것은, 어쩌면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내 속에서 촉발되지 않은 것은 없는” 영화라고 이 작품을 소개한 홍상수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기어이 확고한 하나의 방향으로 영화를 틀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이리라. 이 작품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은 현실과 예술, 그 사이를 운신하는 다큐라는 형식에 대해 가지는 양가적 감정이다. 현실과 최대한 맞닿아 있으면서 바로, 그 맞닿아 있음으로 인하여 현실을 다시금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는 어떤 예술의 가능성. 하여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성보다는 현실과 예술 사이의 가능성, 그것이 다큐라는 형식의 미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2017년 9월 22일 금요일

‘간혹’ 가능한 것들을 향한 믿음: 극단 풍경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 브라이언 프리엘 ⟪Faith Healer⟫에 대하여


이예은

  언젠가 드라마-인에 김현탁 연출의 작품을 드라마투르기하면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작품 비평문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맥락의 글이다. 최근에 번역 및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한 공연을 통해 역으로 공연 작품의 원작에 대해 새로이 발견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이다. 희곡을 공연으로 세우는 과정 안에서 경험했던 자기 반성적 질문들과 그 질문들을 통해 다시금 발견한 희곡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정리하며. 

  비평할 작품은 극단 풍경의 박정희 연출이 각색한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인 브라이언 프리엘의 ⟪Faith Healer⟫이다. 프리엘의 작품은 진실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 쯤에서 각자 웅크리고 앉아서는 한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움직이지 않는 시선들로 가득하다. 특히 ⟪Faith Healer⟫는 이렇게 각자의 작은 무덤들 속에 고여서 나름의 구원을 내다보는 세 인물의 입김과 체온이 섞여 이러 저러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Faith Healer⟫는 동일한 현실을 공유한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세 인물이 그 현실을 서로 다른 무게 중심을 지닌 기억들로 재편해 가는 과정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소재만 동일할 뿐 그 크기와 질감, 온도, 앵글은 제각기 다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무대 위에 세운다면 무대는 아마도 기형적인 그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프리엘은 이 세 명의 이야기를 각기 홀로 등장케 하는 형식을 택한다. 원작은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프랭크의 순서로 각각의 인물이 홀로 등장하여 자신의 기억을 발화하는 장면으로 연쇄된다. 하나의 무대 위에서는 함께 지속될 수 없는 저마다의 균열된 이야기일 것이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허락된 고독한 무대 공간 위에서 이들 각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고백적 양식으로 관객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호소한다. 우리가 믿는 모든 진실이란 한 데 모아 놓고 보면 이토록 기형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각자가 호소하지만 전모를 들여다보면 기형적인 것이 되는 진실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진실의 본성 혹은 진실의 존재 여부를 질문케 하며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보다는 균열이다. 그러나 균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 작품이 정작 질문코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진실의 영역이다. 허구적 기억이 가진 진실의 가치에 주목하며 프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을 발설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렇게 발설된 진실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 (공연 전단 드라마투르그의 글에서)

  이 세 인물은 어쩌면 끝내 한 곳에 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평생을 산다. 그러나 이 세 인물이 결국에는 가 닿아 보려고 힘을 다해 쏟아내는 믿음, 그 지향의 강도는 팽팽하다. 이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의 방향은 상이하지만 그 지향의 강도는 동일하기에 결국 이 세 인물은 한 보도 나아갈 수 없는 곳에 머무르고 만다. 그렇다, 이들은 철저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평생을 고군분투한다. 지극히 가까운 동반자의 지향이 나의 그것과 다른 방향에 있을 때, 그러나 그와 나는 헤어질 수 없는 애착의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마치 한 보도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서로를 욕망함과 동시에 자아를 꿈꾸게 되는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들은 평생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유랑하지만 결국 꿈쩍 않고 부동하는 시간대를 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랭크와 신의 관계, 그리고 그레이시와 프랭크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프랭크는 신을 좇아 유랑하고, 그레이시는 프랭크를 좇아 유랑하지만 결국 이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정박 당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원작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은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힘들의 팽배하는 운동성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힘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모가 기형적으로 보이나, 그와 동시에 그 힘들은 서로 다른 힘들이기에 또한 서로를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그 전모가 기형으로 판명되는 것은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순수한 기대 탓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며-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를 반사하고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을 반사하며- 만들어내는 다면적인 입체 조형이 우리라는 ‘예기치 못한’ 한(≠‘기형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깔려 있는 힘이 발견될 때, 혹은 보이는 것 너머의 힘이 발견될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은 허구와 대립하는 항목이 될 수 없다. 허구와 허구 사이의 균열들 그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아래에 깔려 있는 것, 혹은 그 전체를 감싼 것. 물질이나 언어로는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이상 혹은 이면의 것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 

  원작 ⟪Faith Healer⟫는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faith', 즉 신 혹은 신적인 것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들 사이의 허구와 허구와 허구를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을 바라본다. 프랭크가 자기 자신에게 기대했던 것, 그레이스가 프랭크에게 기대했던 것은 모두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이었다. 독백으로 진행되는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의 균열된 이야기들을 소환하여 결국에는 그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려 하는 이 작품의 구조(형식)는 결국 인간의 가시 영역을 넘어서 어떠한 다른 차원에 다다르고자 하는 이 작품의 주제와 합치된다.     

  공연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원작을 ‘개별적 기억들의 균열’에 의거한 ‘총체적 진실의 부재’로 읽는 것에 집중한다. ‘각자는 자신의 뇌의 편향성에 따른 기억에 의존하여 산다’ 고로 ‘기억을 담보로 한 존재들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고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결론으로부터 시작된 연습 과정에서 진실과 허구는 양분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는 논리를 가지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진실과 허구는 대립 항이 아니라 서로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상호적이고 연쇄적이며 개방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화두들이기에 논리를 빌린 언어 구조로는 호소력 있게 설명될 수 없다. 진실과 허구는 끊임없이 상이하면서도 지침 없이 서로를 포섭하는 예기치 않은 관계인 것이다. 

  연출자와 함께 원작의 제목을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하며 무엇보다 ‘간혹’이라는 단어에 맺힌 절묘함에 기뻐했던 그 순간에는 돌이켜보니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다. ‘간혹’ 어떠한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빗겨가지만은 않으며 그 순간이 ‘간혹’ 있는 이상 많은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어떠한 식으로든 서로를 욕망하거나 체념하리라는 이 모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간혹’이라는 단어에는 어느 것도 편들지 않는 무심함이 있어서 좋았다. 알 수 없는 미래가 비로소 과거가 된 이후에나 말해질 수 있는 겸허한 회고의 무심함. 사실 이 ‘간혹’이라는 화두 안에 깔린 것들, 상이한 것들이 부딪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대한 고요한 믿음,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기다림과 고독, 그리고 겸허함과 항구함은 내가 요즘 가장 치중하고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연극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을 전하는 강의와 논문이 만들 수 있는 진실, 나아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존재가 만들 수 있는 진실, 진실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이러한 것들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고작 (혹은 무려) ‘간혹’ 실현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나오며 바로 그러한 세밀한 맥락에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단단하게 발음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가, 글은 다 끝나가지만 이 글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진실이란 왜 발설되기 어려운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발설되기 어려운 진실을 발설하는 일에 대해서. 아니 그 일의 효력에 대해서. 사실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바라보고 세워내려 하던 과정에서 독자로서 관객으로서 드라마투르그로서 고뇌한 것이지만 동시에 작품 안에서 프랭크와 그레이시가 고뇌한 질문과 동일하다. ‘간혹’ 존재할 수 있는 진실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효력은 진실의 편을 옹호하는 호소력이나 진실의 편을 부정하는 폭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단지, 간혹 깊어질 수 있는 개별자들의 내면과 만나는 질문의 형태로 공유될 뿐이다. ‘간혹’ 가능하기도 한 것이라는 진실의 정체성이 곧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의 정체성이 진실 나름의 형식으로 공유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프랭크의 신을 향한 믿음이기도 했고, 그레이스의 프랭크를 향한 믿음이기도 했던 그것-이 바로 원작의 제목에 놓여진 'faith'의 의미이다. 프리엘의 ⟪Faith Healer⟫는 진실이 가진 가냘픈 내면과 형식의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는 가운데 그 주변을 유랑하는 이들의 애타는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진실을 호소하는 힘도, 진실을 부정하는 힘도 없다. 단지 어떠한 가녀린 가능성에 대한 지향이 있을 뿐이며, 그 가능성을 향한 마음이 끔찍이도 열렬할 뿐이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용비어천가

이예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영진 리의 <We're gonna die>를 미국 관객들과 함께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미국이었고, 미국 관객들이 있었고, 미국에서 살아내고 있는 영진 리가 무대 위에 있었다. 2017년도 국립극단 제작 <용비어천가>는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한국에서, 한국 관객들 앞에서, 한국 배우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영진 리의 오리지널 버전 공연과 국립극단 제작 버전 공연 사이에 낀 애매함은 단지 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지역성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애매함의 전부였을까?
     
사소한 외로움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늘 비극적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비극이 된 모든 사건이 응원 받는 이야기. 아프고도 즐거운 이야기, 신이 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그녀 스스로에게서 모두 응원 받는다. 영진 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양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위로한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을 들으면서 ‘참 강건하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나와 너를 깊은 곳까지 끌고 가서 기어이 나의 깊이와 너의 깊이를 만나게 한다. 그래서 특정한 인간의 특수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보편의 만연한 애잔함으로 만든다. 나와 너를 연결하고 고통과 응원을 연결하는 이러한 시선은 내게 강건함으로 와 닿았다. 이것은 또한 그녀가 살아 온 인생에서 빚어진 힘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구별과 차별, 다름과 억압, 분노와 부당함을 온 몸으로 껴안고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 가능성과 상상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보다 깊은 차원의 힘. 흔히 ‘히스테릭’이라는 단어와 ‘코미디’라는 단어를 합쳐서 ‘히스테릭 코미디’라는 단어로 그녀의 작품을 수식하고는 하는데, 사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히스테릭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고 히스테릭과 코미디를 단지 결합한 무엇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히스테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씁쓸함만 있는 것도,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출되고 다듬어진 공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살아내고 있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삶을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내고 있음이 느껴졌기에, 그래서 강건했다. 비록 미국인 관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인 내가 영진 리의 공연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미국인 관객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공간에는 미국인과 한국인을 넘어선 ‘살아남은 인간’의 온기가 있었고 우리 모두가 울고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팔목이 떨어져라 박수를 보낸 이유는, 미국계 한국인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을 응원하는 열렬함 때문이었다.    

<We're gonna die>에서도 일부분은 인종 차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종 차별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각자가 삶을 살고 있지만 사는 동안에는 ‘삶’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그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하여 그녀는 결코 현실을 고발하지도 토해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며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의 전체에 'We're gonna die'라는 제목을 붙인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순간의 살아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죽을 것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몫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올해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이라는 기획 타이틀의 한 프로그램으로 섭외된 순간부터 영진 리의 공연은 ‘미국계 한국인’의 공연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온몸에 걸쳐 입게 되었다. 비한국과 한국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취지로 붙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정의내릴 수 없는 내면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선 보이겠노라는 다소 민망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온전히 영진 리의 것은 아닐지라도 공연의 어느 틈새에는 영진 리의 강건함이 있겠지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신록 배우가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모습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공연은 시종 ‘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 그리고 그 시선에 대해 ‘한국’인이 가지는 감정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한국인과 미국인, 그 사이의 균열에 집중하는 이 공연은 급기야 그 많은 한국인 관객들로 하여금 짠 내 나는 눈물을 몇 번씩 뽑아내고 말았다. 사실 나도 몇 차례 울었다. 울면서도 궁금했다. 영진 리의 강건함을 한국인의 아픔으로 만든 이유는 무얼까?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연출자에게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지만, 대화가 시작되고 연출자가 한 말을 듣고는 그냥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연출자는 원작을 해석하지 않고 오로지 ‘재연’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해석이 없었다는 공표에 할 말이 없어진 것도 잠시, 그가 말한 재연의 대상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영진 리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사건, 공기의 겉면을 재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과연 이 공연은 원작 공연을 재연한 것일까? 어떠한 삶이 몇 몇의 코드가 될 때, 삶의 진행이 무언가의 고발로 치환되고 전시될 때 실체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껍데기로 왜곡된다.  

지금 여기의 이들의 공연이 아닌 누군가(영진 리)의 이름을 빌린 공연. 창작자들이 작품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지는 기획‘된’ 공연. 나 역시 기획자로서나 드라마투르그로서 그러한 상황에 끼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이 있으니… 아쉬움을 느끼기에 앞서 지금 이곳 내가 속한 곳에서 연극‘함’의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타이틀 그 이상이 되지 못한 기획의 폭과 질문이 부재한 연출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선 배우, 배우들의 사투는 눈물을 쏙 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진실했다.

***
국립극단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 중(中) <용비어천가>,
영진 리 작, 오동식 연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2016. 6. 3.

2017년 6월 9일 금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이예은

2001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16년이 지났다. 이 공연도 16년을 더 살았고 나도 16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되는 일. 작품과 나 사이에 낀 긴 시간이 어지럽고 부끄럽다. 그 동안 연극의 힘을 부정만 해 왔던 나의 소란스럽고 편협한 관심사가 모조리 부끄러워지던 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편견이 0점이 되어 연극을 ‘구경’하는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있었던 시간.

성씨로 바뀐 가문, 저잣거리 놀이로 바뀐 대결, 잔치로 바뀐 파티, 춤꾼의 흥으로 바뀐 머큐쇼의 활기, 육담으로 바뀐 성적 지향, 그럼에도 끈기 있게 살아 냄으로 바뀐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전환점, 골계미로 바뀐 철학, 재담으로 바뀐 시, 운동으로 바뀐 긴장, 생명으로 바뀐 초월.

특히 긴장감과 화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분화된 갈등 구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시켜 내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관절이 오태석의 공연으로 와서는 시종 끊어지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열기로 승화된다. 오프닝 잔치 씬에서부터 놀이가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놀이인 역동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정서 속에 생존하던 힘이고 오태석이 우리 연극의 정신을 껴안으려 한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문과 가문이 대결하고, 사랑과 고통이 대결하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은 0이다. 대신 긴장감을 대체하는 역동과 힘이 있는데, 바로 그 힘 속에 모든 감정이 한 데 녹아있다. 이분화의 초월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철학이 역동 속에 공존하는 그 모든 삶과 죽음의 힘으로써 새로이 약동한다. 기쁨과 분노도, 슬픔과 환희도, 화해와 대결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탄성 속에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박력 있게 체감케 하는 음악적 리듬감과 움직임의 활력. 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전통의 정신 속에서 바로 이러한 긍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여태, 아니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이 힘을 발견케 한 오태석의 숨소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로미오가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hug)를 주는 장면은 화해와 대결의 구분이 초월적 고뇌로 승화되는 원작의 지점을 넘어 아예 화해와 대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월적 기지가 단지 깊은 아름다움이기보다 자연스러운 정신처럼 작품 속을 파고든다. 하여 장면 장면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질문이 불거져 나오는 고결한 장면들로서가 아니라 작품 너머에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을 한 데 껴안는 정신이 발현되는 장면들로 지속된다.
 
머큐쇼의 죽음 장면에서는 해학과 박력이 넘쳐난다. 이 장면에서 특히 웃음과 고통이 극렬히 공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건으로 희극과 비극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힘과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힘이 뜨겁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이 지점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랑과 고통, 화해와 대결의 이분법이 초월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어 다시 초월의 불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를 주었던 로미오가 머큐쇼가 죽고 허그 대신 칼을 물리는데, 공연의 이 장면에서 탄생한 급박하면서도 어지러운 운동감은 셰익스피어의 초월적 기지를 넘어서는 짠 내 나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만을 믿으며 화해도 쉽게 꿈꾸던 로미오가 고통과 맞물린 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며 기쁨 속에는 고통이, 가능성 속에는 불가능성이 한 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보다 한 차원 깊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뒤따를 사랑을 그럼에도 감행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죽음 같은 이별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하려고 죽음을 모의한다. 그러나 모의된 죽음은 정말로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서 사랑하고 싶었으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미숙한 첫 사랑의 극단화된 비극이자 죽음과 사랑의 선을 초월할 수 있는 첫 사랑의 극단화된 진실성이라는 사실도.

살아있고, 살아있고, 살아있다.
부러 무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현해내는 일, 작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요- 하고 외치는 숨소리.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억지 해석을 하거나 과장 찬미를 할 필요도 없이 공연의 생명 그 자체를 관객의 피부로 흡수하게 하는 힘.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를 오롯이 오태석의 것으로 살아내게 한 힘이 있다.
해석도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살아내게 한 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관절 마디마디에 묻힌 뜻이 오태석의 숨소리로 체감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태석의 것이 된 것, 그 이상이 있다. 원작도 오태석도 그 이상의 것도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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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7. 6. 7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뜨거움의 ‘형식’, 혹은 형식의 ‘뜨거움’에 대해서 : 오태석 작, 김현탁 각색/연출 <자전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어떤 정의할 수 없는 경계에 서서 작품을 바라본다는 건.
작품의 안과 밖에서, 
믿고 싶었던 소망과 와 닿지 않는 허망 사이에서,
뜨거운 열렬함과 물적인 에너지 사이에서.

창작과 감상, 
감상과 비평, 
그 사이 사이에는 모호한 틈새가 있어서 작품을 보고나서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야. 라고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작품을 내적으로 응원하고 소망하는 입장에서, 외적으로 기대하고 관찰하는 입장으로 굴절되는 지점에는 과연 어떠한 전승과 어떠한 변수가 있는 걸까. 김현탁 연출의 작품은 내게 여전히 정의 내려지지 않는 어떤 경계 선상에 서 있다. 분명히 절실하고 번뜩이는 대화로, 아니 대화 이상의 교감으로 어떤 언덕의 지점들을 함께 바라보았던 순간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데... 관객으로 돌아 간 나는 그의 작품 안에서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잠재하고 있을 어떤 열기의 흔적들을 찾으며 작품에 집중하는데... 분명 무대 위에서는 형식을 넘어서는 에너지의 열기가 구현되고 있는데... 무대 위의 후끈한 기온이 피부에 와 닿아 스미기도 하는데... 그런데도 그 열기와 에너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열기와 에너지에 대한 나의 질문은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것이다. 이토록 무대 위에서 ‘진실로’ 에너지를 구현하고 있음에도, 심지어 무대 위의 열기가 객석 너머로 불어오고 있음에도,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 ‘물적’인 에너지로 ‘보여지는’ (‘체험되는’이 아니라) 이유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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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의 양 옆선에 자전거 대열이 배치되어 있고, 이 자전거들은 불특정 관객들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돌려진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무성의하게 자전거가 돌려졌을 때에는 이 공연이 멈추게 된다.라는 경고성 메시지와 함께) 관객의 ‘비’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둘러싸여진 이 무대는 시작부터 어떤 출구 없는 테두리 안에 갇혀지는 느낌이다. 어떠한 에너지의 강요. 그것의 시작. 그리고 무대의 앞 선에는 무엇이든 극도로 직시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듯한 과장된 광원이 배치되고, 무대의 뒷 선에는 이 광원에 의해 투사된 배우들의 그림자가 매 장면마다 흐릿하게 확장된 채 어른거린다. 이렇게 사방이 과장되고 강요된 에너지의 edge로 둘러싸여진 그 한가운데에 무대가 있다. 출구 없이 증폭된 에너지가 조장되는 그 한 가운데에.
  배우들이 등장하고, 이따금 그들은 오태석 원작의 <자전거>의 대사들을 읊는다. 장면의 구성은 <메데아 온 미디어>와 <열녀춘향>에서 시도된 바 있었던 다양한 채널들의 연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만의 특이점이 있다면 다양한 채널들 속에 공통적인 시선이 있다. 이를테면 각종 담화의 ‘주변’ 담화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가 모두 끝난 이후에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선언문, 수술대 위에 환자를 올려놓고 주고받는 뒷이야기, 지하철에서 구걸을 호소하는 걸인에서부터 선거장에서 표를 호소하는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진실이 아닌, 그것들을 에워싸고 둘러싼 주변의 담화와 액션들, 어떠한 핵심의 ‘나머지’ 상황에 집중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실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저마다 집착의 지점들을 붙들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려 하는 듯이.

  이 연극의 매 장면들은 형식을 위한 ‘의도적인’ 형식으로 보여진다. 구태여 형식들에 또 다시 형식들을 덧대고 있는 느낌. 그가 마지막 장면에 배치한 세월호 사건의 ‘주변’을 둘러싼, ‘나머지’ 상황들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연극 안에서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모든 장면들이 어떠한 전시를 위한 형식들로 다가왔다. 여기에서 잠깐,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형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편견이다. 김현탁의 형식을 놓고 말들이 많다. 그의 연극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진정성이 있는 형식을 구현하느냐 라고. 형식이냐, 진정성이냐의 문제가 마치 이분법적인 구분선을 지닌 답인 것처럼. 그러나 그 어떠한 작품인들 형식과 진정성 사이에서 자기만의 명확한 좌표를 표명할 수 있을까? 작가는 형식과 진정성 내지 철학,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선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시선이 어떠한 지점에서든 정당성을 가질 때 비로소 작품과 관객이 교감할 수 있게 된다. 김현탁을 옹호하든, 거부하든, 그 이유가 단지 그가 지닌 ‘새로운 형식’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단지 ‘새로움’을 옹호하거나 거부하기 위함이 비평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오늘 새로운 것을 보았노라” 라며 작품을 칭찬하거나 폄하하는 정도의 감상이 비평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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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형식‘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다. (보다 편견을 벗은 단어로서의 형식’성‘에 대해서) 형식 그 자체를 표면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형식성 그 자체에 대해서. 형식 자체를 신봉하는 형식성의 절실함에 대해서. 무대의 시작 형식이 그러했고, 그리하여 매 장면들 마다 매번 무대는 배우들의 땀으로 움씬 적셔졌다. 그런데 이 배우들의 그 절실한 땀과 기운은 관객에게 촉각적인 감화로 전해지기보다는, 시각적인 imagery로 물화되어 저 무대 위에 고여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의 형식‘성’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이런 느낌.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친구가 슬픔 혹은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나는 저 친구의 슬픔 혹은 분노를 코앞에 놓고도 바라보고만 있다. 미안하게도 힘들겠다 라는 가식적인 말조차도 안 나온다. 심지어는 네가 몸을 떨고 있는 그 슬픔 혹은 분노가 어리석고 한심하게 ‘보인다’. (‘느껴진다.’가 아니라) 그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그의 슬픔 혹은 분노의 ‘내용’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소유이고 개인의 몫인 모든 감정 가운데, 옳은 것이 어디 있고 틀린 것이 어디 있으랴. 문제는 그 친구가 울어대는 ‘방식’에 있다. 너는 내가 울 테니 한 번 꼼짝 말고 거기 앉아서 나를 봐, 너는 내가 화를 낼 테니 한 번 거기 앉아서 그냥 나를 봐. 라는 식의 태도 때문이다. 아무리 아끼는 친구라도 그런 태도로 내 앞에서 술잔을 들이킨다면 싸대기를 한 대 날려줄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 꼴이 보기 싫어 그 친구가 울어대는 내용에까지 시비를 걸고 싶어질 것이다. 만일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대상이 헤어진 남자친구라면, 이렇게 시비를 걸 것이다. “네가 그 딴 식으로 울어대니까, 그런 놈이나 만나지.” 혹은 “진짜 사랑이나 했냐?”라고.

  다시 형식과 내용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나 형식과 내용은 그 작품만의 시선과 질서 안에서 어느 정당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지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관객과 함께 호흡되어야 한다. 그 정당한 지점은 마치 선원근법화의 소실점과 같아서 분명히 존재하나,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다. 피카소가 말했듯 ‘내용과 형식, 그 가운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데 섞이는 지점’이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의 문제에 대해서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창작 혹은 비평에 반대한다. 즉, 단지 언어를 해체하고 드라마를 해체하고 장면을 해체하면 실험(형식)‘적’ 연극이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정치 사회 이슈를 거들먹거리면 주제(내용)‘적’ 연극이라고 이분화하는 시선을 전제로 깔고, 어떤 작품의 기여도를 위계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느 작품에서나 형식과 내용은 뜨거운 소실점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상보적 경쟁자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마다 그 뜨거운 소실점이 어디에 위치하며, 그 소실점을 향해 형식과 내용이 어떠한 각도의 선을 긋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정작, 그 소실점이 관객에게 어떻게 반향되는가이다. 다시 말해 형식과 내용 가운데 무엇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이 만나는 그 뜨거운 지점을 망각하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뜨거운 지점의 불가항력적인 힘 안에서, 관객을 포섭해달라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극의 형식과 내용의 상관관계를 읽어낸다면, 이 작품은 형식 안에 내용을 달구어내려고 한 연극이다. 전작들에 비해 형식에 더욱 형식들이 ‘덧’대어졌다. 그리하여 형식의 구조가 더욱 고도화되었다. 그것은 형식이 보다 집중적으로 탐구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형식의 뜨거움으로 결국 내용을 형식화하려고 했다. 형식 안에 내용이 환원되어 있다. (형식 안에 내용이 ‘치환’되었다는 말로 오해하지 말기를)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에 구명조끼를 입은 여학생이 절규를 하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BGM으로 깔고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나와 기계춤을 추며 커튼콜을 하는 장면에서는 분명 두 가지의 축이 충돌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텐데. (고도로 형식화된 시선으로 내용을 전시하는 태도와 그 태도 안에 서려 있는 내용에 대한 풍자가) 그것이 ‘지나친’ 가학성으로 다가왔다. 과연 이토록 아프고 현재적인 정서까지도 형식‘화’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라고. 아픔을 전시하는 이러한 가학성은 지나친 것 아닌가? 여기에서 ‘지나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과연 이 작품에는 어떠한 뜨거운 소실점의 좌표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하도 고함을 쳐 대니까 정작 고함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연극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일행과 대학로에서 가장 지저분한 술집을 찾아 가 막걸리나 마시자, 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동시에 어떤 ‘숨김없는’ 것들이 갑작스럽게 그리워졌나보다. 형식과 내용을 불문하고 <메데아 온 미디어>나 <열녀 춘향>에 서려 있던 어떤 즐거움이 사라졌다. <혈맥>과 <세일즈맨의 죽음> 안에 갇혀 있던 에너지가 더욱 갇혀진 상태로 고도화되었다. 그 어떤 전작들보다도 냉소적이고 악다구니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뜨겁고 치열해지기도 했다. 혹자는 진심으로 이 공연을 보고 퉁퉁 부을 만큼 울면서 나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이 연극의 모든 표현이 열렬한 뜨거움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여 이 작품이 보다 현실에 가까워졌노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어지러워졌다. 다시 한 번 비평의 ‘불’가능함을 절감하면서. 모든 작품은 개개인의 가치관과 꿈과 욕망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므로, 우리는 비평 이상의 감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단, 비평과 감상이 어떤 구분법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형식 혹은 내용으로 구분된 원리랄지, 새로움이라는 단순한 지표에 의한 원리만은 아니기를. 김현탁 연출이 빚어내는 현상을 필두로 극단적 욕망들이 교차하는 감상의 형식들이 흥미롭다.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2014년도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만난 공연들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저도 한 번 써 봤습니다. ‘연극人’을 따라해 본 꽃점평 (그러나 꽃점은 없습니다. 그리고 쓰다 보니 다소 길기도 합니다.)

# 두산 아트랩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윤성호 작, 전진모 연출, 두산 스페이스111, 8/28~8/30 

(+) 낭독이 이야기로, 이야기가 이미지로, 이미지가 순간으로 전환되는 지점들. 찰나의 순간을 넘어서자, 작품 속 망연한 표현들이 희미한 연기를 뚫고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무대 위의 이미지적인 몸체가 ‘분명히’ 맞닿는 순간들을 보았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그 희미한 공기 속에 비계처럼 끼어있는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엇갈림.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막연하나, 그것을 표현해내는 이미지들은 정확하다.  

# <아버지를 찾아서>, 이승헌 연출, 옴브레 음악 감독, 게릴라극장, 8/28~9/7 

(+) 인간에게서 상식이라는 장치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흔쾌히’보여주는 태도가 박력 있다.
(+) 땀으로 젖은 두 배우의 몸, 그 촉각적 기억. 그리고 어느 순간에 컷을 잘라도 인상적인 스틸 이미지가 나올 법한 두 배우의 끊임없는 살아있음.

# <래빗홀>, 데이빗 린제이 작, 김제훈 연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8/21~9/6 

(+) 연극과는 가장 상관이 없는 먼 타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연극의 첫 장면을 시작했던 방법. ‘그’ 사건의 가장 먼 데에서부터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방법. 가장 평범해 보이는 듯한 순간에서부터 매 장면을 시작했던 방법. 바로 이 방법들에 작품의 시선이 스며있다. 마치 ‘그’ 사건이 타인의 것이었기를 바라는 이들의 시선. 고통을 일인칭화하는 것의 지독한 어려움.
그래서 결국 장면들의 말미에는 ‘그’ 고통이 피할 곳을 찾다가 나의 고통으로 안착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이 가만히 병들고, 우묵한 슬픔을 응시하는 모습들.
신의 세계에서마저 위안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온전히 또 다른 우주를 꿈꾸지만... 그래서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눈에만 보이는 ‘래빗홀(토끼굴)’이지만... 그러나 이 작품 속에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래빗홀에 빗대어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통로이기보다, 강애심 배우가 힘겹게 읊는 한 장면 속에 녹아 있다. 지독한 고통을 주머니 속의 벽돌처럼 지니고 살아 온 그 세월의 어려움을, 지극히 어렵게 쓰다듬으며 “...좋아” 라고 내뱉는 그 한 마디의 대사 속에. 지극한 고통을 쓰다듬어 온 세월의 지극한 무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 태도의 힘.  
(-) 오로지 대본의 훌륭함에 의존하고 만 연극.    

# <남산에서 길을 잃다>, 백하룡 작, 김한내 연출, 국립극단 소극장 판, 9/16~9/28 

( ) 삼국유사프로젝트라는 기획의 타이틀과 이 공연의 사이, 혹은 삼국유사라는 기획의 소재와 이 공연의 근저에 놓인 진심의 사이, 보여주고자 하는 순간과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사이, 그 사이가 너무 멀다.

# <반신>, 하기오 모토 만화 원작, 노다 히데키 작/연출, 명동예술극장, 9/20~10/5
(+) 뇌리에 부딪칠만한 대사의 율동감. 그것이 배우들 몸의 율동감으로, 무대의 미술적 율동감으로 이어지면서 연극의 세계가 마치 마리아와 슈라의 움직임처럼 한 데 손을 맞잡고 돈다. 두 개의 나선이 소용돌이치며 서로를 감싸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빗겨간다. 늘 붙어있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의 아연한 리듬감
(+) 이렇게 전반적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끊임없이 지속되는 코믹한 공기의 탁월함
(+) 슈라 : “고독이라는 거 말이야, 사실은 좋은 거지? 그렇지?”
(-) 마리아와 슈라를 잇는 의상이 보다 탄력적이고, 상상력을 만발케 하는 소재였더라면...
(-) 연극이 슈라를 상실한 이후, 무대에 보다 적막감이 흘렀더라면... 슈라의 상실을 보다 상실‘감’으로 채워 넣었더라면... 후반부에 개입된 환타지는 지나친 감이 있다.

#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이경성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9/13~9/21 

( ) 작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둘러싼 곳에는 분명히 진심과 따뜻함이 느껴지는데, 그 시선이 작품에 착지하는 속도가 자꾸만 더딘 느낌
( ) 자꾸만 ‘자연스러움’을 읽으려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것이 의심된다.
( ) 애순씨가 등장하는 순간의 앞뒤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났으면...

# <먼 데서 오는 여자>,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 게릴라극장, 9/12~9/28 

(+)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라기보다는. 망각을 둘러싼 기억과 기억을 둘러싼 망각, 그것의 사이를 다루는 이야기
(+) 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보듬어내는 말들의 부피, 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으로 더듬어내는 아픔의 깊이, 대본에서 우러나오는 연극성, 연극성을 초월하는 대본의 힘
(+) 11년 전의 과거로 굳이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의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함 속에 숨겨진 것의 의미

2014년 7월 30일 수요일

화학작용_선돌편 시리즈와 “일회 공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화학작용’ 선돌편 : 7/9~8/31, 선돌극장> 


 스무 개의 극단(혹은 그룹)이 자생적으로 모여 하나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축제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이 게재가 되는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7/9~8/31, 선돌극장) 이들이 만들고 있는 축제의 이름은 ‘화학작용’이다. 예기치 않은 극단들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기획된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오롯이 우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토너먼트 식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편성된 두 개의 팀이 한 회 차의 공연을 구성하는 식이다. 현재 네 번째의 공연 순서까지 진행이 되어 총 여덟 개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화학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공연들의 프로그래밍은 어쩌면 독립된 기획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획적 컨셉을 축제의 이름으로 내 건 숱한 ‘축제식’ 공연들은 기획이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획이 작품을 압도하여 정작 작품의 색채는 기획의 그늘 아래 퇴색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의 목소리가 기획이라는 테두리선에 부식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비단 축제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의 목소리가 기획의 틀에 의존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숱한 과잉 기획의 공연들 가운데 오히려 기획의 독립성이 부재한 ‘화학작용’ 속 공연들은 솔직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란 조금 우연하고도 계산되지 않은 채로 발생한다. 이것은 으레 축제 혹은 기획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하나로 규정되어 왔던 것들,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전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채 계산되지 않은 스무 개의 공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의 층위가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것은 더욱 축제로 다가온다. 스무 개의 극단이 조금 거칠고 솔직하게 모여 있고, 그럼으로 비로소 ‘모여 있다’라는 느낌,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여 있다’라는 느낌을 실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 축제.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굳이 이 공연의 묶음을 축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공연 전체에 대한 리뷰는 축제가 끝나갈 즈음에 다시 쓸 것을 기약하며,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공연 팀에 속해 있던 구자혜 연출의 <일회 공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회 공연>
일시 : 7/20~7/24, 선돌극장
관극일시 : 7/21, 선돌극장
연출 : 구자혜
작가 : 고연옥, 김민정, 백하룡, 이리, 전소영, 오세혁, 정소정, 구자혜, 윤성호, 미하엘 뮐러
출연 : 이리, 장윤실, 박경구, 전박찬, 최순진, 김석기

공연화된 대본의 조각들 :
2006년   고연옥 작 <칼디의 열매>
2007년   김민정 작 <검은 입들의 집>
2013년   구자혜 작 <침입>
    년    미하엘 뮐러 작
2012년   윤성호 작 <미인> 그리고 <미인> 중 공연되지 않은 <누수공사를 기다리며>
2012년   이리 작 <배우L의 독백 - 훈제란과 자전거 도둑에 대하여>
2012년   전소영 작 <오늘의 날씨>
2010년   정소정 작 <뿔>
2001년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윤성호 작 <당신에게>
흥얼거림 : 미하엘 뮐러 중 마지막 페이지 노래 부분 (미하엘 뮐러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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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회공연>에서는 발표는 되었으나 무대 위에 상연되지 못한,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못한 문장들”을 모아서 무대 위 장면으로, 혹은 무대 위 장면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그 미완의 생명들을 소생시킨다. 고연옥, 윤성호, 전소영, 정소정, 백하룡, 이리 작가 등의 작품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의 파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 꺼내어 놓는다. 시작부터 날카롭게 집중력을 모으게 했던 것은 바로 작품이 꺼내어 놓은 이 시선 자체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탄생했던 것의 죽음, 죽은 것의 소생, 탄생과 죽음과 소생 그 사이를 둘러싼 것들. 혹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조차 없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그것들의 사이를 오고 갈 시선의 힘이 왠지 몹시 반가웠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무언가를 애써 에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선의 힘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작품이 취하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사이를 떠도는 시선은 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무대의 잠재 혹은 무대의 잔재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게 하는 쾌감을 자극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분장실 속 물건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불가능하고도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다.


# 윤성호 작 <미인>의 한 장면
  한창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까닭모를)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듯한 연인이 등장한다. (사실 이 이별은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이별이지만, 군 입대라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이 장면은 문맥이 생략된 채로 보여지는 만큼 이 둘의 이별은 까닭 모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문맥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연인이 등장한다. 이 둘은 그들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재연한다. 모든 연인에게는 처음이 있다. 그것은 돌이켜 보고 난 후에야 아는 것이지만. 모든 연인에게는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장면으로 존재한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들이 보낸 한 시절은 마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과 기억, 기억과 또 다른 기억, 사실, 사실과 기억된 사실, 망각. 그들은 첫 순간을 복원해내며 이 단어의 사이와 사이를 떠돈다. 이 둘은 그토록 선명했(으리라 믿었)던 첫 순간을 복원하려 들지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 첫 순간이 한없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순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안다한들, 아니 그것이 설령 우리 스스로의 사건이라 한들, 우리는 어느 순간 순간들의 행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생략, 어느 소소한 망각,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과 그것들을 소생시키려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 작품의 초반을 여는 이 장면에서 가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싼 모든 까닭모를 미완성과 그 미완성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느 한 순간의 미완성이 한데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장면 안에서는 어떤 맺혀진 순간의 힘이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존재했던 것, 기억을 초월한 기억. 어쩌면 이 공연은 생략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라졌으나 존재하는 것, 흔들리면서도 고요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이어지는 윤성호 작 <미인> 가운데 “누수 공사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말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말들, 점증되는 짜증과 불신,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헛소리들, 계속해서 지연되는 시간,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그 상태.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배우들이 지면 속의 카툰처럼 벽면에 붙어 서 있다가 차츰 연극 속의 인물로서 호흡을 찾아가며 무대 위로 서는 동작이 흥미로웠다. 텍스트에서 연극으로, 그 테두리를 넘는 행위를 보여주는 움직임. 죽어 있던 것의 호흡, 생략된 것의 복원. 그리고 바짝 무대 앞 선까지 나온 이들이 한 줄로 정렬하여 반복되는 대사를 읊고 그 대사들의 반복은 시간과 정서의 점증을 빚어내는데, 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그토록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서 있으면서도 정서와 시간의 부피를 증폭시켜내는 힘이란!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제시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이것은 마치 소리 없는 텍스트가 빚어내는 감정과 시간의 증폭 같았다. 다시 말해 연극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독서의 행위 같았다. 관객은 무대 위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 장면이 만드는 효과는 독자가 텍스트를 마주할 때의 효과였기 때문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묵독할 때 텍스트 속의 기호는 낱낱한 문자들일 뿐이나, 독자가 그 기호의 결 사이 사이에서 숨을 쉬며 기호라는 질료를 자신의 감정으로 증폭시키는 묵독의 과정, 그 내면의 행위를 무대 위로 뽑아 표현한 듯한.
  이 대목 즘에서 생각했다. 이 연극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 이유는 (그 숱한 메타 연극들이 저지르고 마는 식상한 화법들처럼) 나 이렇게 논다, 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텍스트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다양하게. 반복되고 늘어지고 지연되고 인내하는 언어의 힘으로 장면의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 안에서 다시 언어는 지루하고도 의뭉스럽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텍스트가 연극 안에서 놀고, 그 놀이 안에서 연극은 장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청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 이리 작 <배우 L의 독백>
  정말 잘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잘 해 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파토가 나버린 일처럼.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공연 때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자 했‘는데’, 갑작스럽게 내일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하고.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루라도 해 보려고 훈제란을 샀‘는데’, 그 훈제란을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혹은 너무 쉽게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일처럼.
  세상에 정말 잘 나오려 했‘는데’, 그렇게 잘 나와서 잘 살려 했‘는데’........... 나오자마자 의미를 상실해버린, 혹은 의미를 박탈당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언어. 그래서 ‘그냥’ (별 각인 없이) 죽어버린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곧 연극 자체가 되게 하는 연출의 방향이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전체적인 할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이 공연 전체의 공기를 오롯이 자기의 이야기 속에 실어내었다. 이 연극은 이런 연극입네, 특히나 이 연극은 이런 ‘메타’ 연극입네, 하면서 연출자나 배우가 직접 나서서 서사를 풀어 놓는 그 숱한 연극 놀이들을 만나 왔지만, 이 작품만의 표현 방식은 특별했다. 지극히 재미없을 수도, 복잡하기만 할 수도 있었던 첩첩 쌓인 메타 서사를 특별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귀에 유유히 전달되게 하는, 자연스러움과 집중력. 아 좋은 스토리텔러의 힘이란!
  이 장면의 연기를 한 배우가 사실은 이 장면의 언어들을 만든 작가(이리) 본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난 후,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낸 ‘메타의 메타의 메타 속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의 작가 속 작가’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 공연조차도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드러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이 구태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서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사라질 뻔한 것들의 운명은 어떤 글을 세우고 부수고의 연속선 안에서 때로는 살아남았고, 때로는 사라졌을 어느 창작의 형체를 둘러싼 것들이다. 창작의 입장에서 창작이란 이토록 불명확한 과정임에도, 수용자에게 창작은 마치 그것이 명확한 테두리를 지닌 무언가로 여겨진다. 하여 미완된 작품의 생략을 복원해내고, 완성된 작품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이 공연의 행위는 이토록 불완전한 창작자와 이토록 명백한(듯 보이는) 수용자 사이의 시선과 시차를 희미한 발짓으로 거스르고, 에둘러가는 데에 있다. 이 공연의 엔딩도 (윤성호 작 <당신에게>의 부분) 이러한 작가의 희미한 정체성에 화두를 실고 있다.

#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곧고 차가운 벽.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 너무도 잘 보인다. 서로 자기의 편에서 단 한 발도 저 편으로 섞이려 들지 않는. 아무리 그 방에서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소통을 갈망해도 현실은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다. 그 차가움과 냉담함과 단절이 너무도 안정적이다. 빗금으로 그어진 조명 분리선. 그 선에 대한 인식 하나로 표현된 일련의 움직임들. 단절된 소통을 다급한 분노로 표현해내는 움직임과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소통 같은 것)를 습기 차게 갈망하면서도 몸으로는 다시 단절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자포. 그것의 반복이 너무도 안정적이고 차갑다. 여고생을 상처받은 사슴 같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 것도 이 장면에서 전해지는 그 철저한 단절, 그 꿰뚫을 수 없는 냉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가느다란 빗금 조명등과 가늘게 삽입된 crack 사운드. 단 두 가지의 질료만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장면일 뿐인데, 이 파편의 유희에서 작품의 질긴 공기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건. 이토록 파편의 시가 해 낼 수 있는 것을 미완의 연극으로 그려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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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되었으나 상연되지 못한, 상연되었으나 생략된 장면과 언어들을 ‘일회 공연’으로 올려 낸 이 작품. 이 작품의 소개를 받았을 때에는 그 생략된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연극이려니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조금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이 자꾸만 빚어내는 어떤 사이를 떠돌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생략이 아닌 생략이 되기까지의 것, 그래서 또한 부활이 아닌 그것이 되살아나기까지의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 연극은 순간이 아닌 순간과 순간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 속 장면들은 오롯이 대본과 유희하고 있다. 대본을 연극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대본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대화가 즐겁다. 대본과 연극 사이의 유희의 대화가. 그래서 두텁고, 새롭고, 줄기차다. 기대할 수 있는 연출과 배우와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즐겁다. ㉦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엔론>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사진출처: http://fb.com/doosanart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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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본) 이수인 연출의 전작들 <오이디푸스왕>, <노부인의 방문>, <왕과 나>에서 일관되게 표현된 소거법이 이 작품에서도 당당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텍스트랄지, 소재랄지, 공연 ‘이전’에 존재하는 질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언가의 재료들이 당당하게 ‘소거된’ 채로 공연을 대면하고 있는 느낌. 나는 이것을 이수인 연출 특유의 소거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일관된 느낌의 소거법이 무대 연출로 전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장면 중간 중간에 난데없는, 사실 자주 불필요하게도 느껴지는 이질적 언어들의 삽입법. “ㅆㅂ”, “ㅆ” 같은 욕이랄지 난데없이 쌀랑한 바람 한 줄기 지나갈 것 같은 엉뚱한 유머나 엉뚱한 리액션의 삽입. 특히 이번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삽입된 손발이 오그라드는 ‘헐리우드’ 액션.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전작들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스타일이라고 느끼고 있다. 마치 체홉의 언어 가운데 “차가 식었네요.”와 같은 대사가 주는 이상하고도 쓸쓸한 효과. 그 어떤 짤막한 생경한 틈새를 굳이 삽입하여 장면의 전체 형세를 순간 정지 화면으로(pause) 만들어 놓는 것.

  기존에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이 두 가지 연출법이 이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나 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소거법은 잘 꾸며진 배경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고, 난데없는 이질감의 삽입 역시 철저하고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구현해내는 연출법들이 더욱 공들인 성찬이 되어 차려져 있었다.    

# 음악적인 리듬으로 배열된 장면들의 미학 :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

  작품 초반부터 주식시장의 생리와 용어들이 발설되는 이 연극은 분명 관객들을 몰입할 수 없게 하는 생경한 요소들을 가득 안고 있다. 그러나 주식 시장의 생리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들의 욕망을 표현해내는 능력, 텍스트를 넘어선 미학적인 표현 능력이 결코 한 순간도 이 작품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면마다 시종 음악과 운동이 겸비되는 비트가 모티프를 이룬다. 무릎을 까딱 까딱거리는 배우들의 몸, 인물들 사이에 까딱 까딱 분절되는 대사들, 복잡하게 깜빡 깜빡거리는 주식 시장의 조명등, 금방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장면들의 명멸성 전환. 무대 위의 모든 율동들이 명멸하는 비트의 미감을 입어 다양한 장면들의 성찬을 이루어낸다. 특히 주식시장을 묘사하는 코러스의 막간 장면들은 비트감 넘치는 단체 쇼트의 효과를 준다. 욕설과 긴장과 욕망이 비협화음처럼 부딪치고 화음처럼 섞이며 떠돈다.

 무대 위의 모든 명멸은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자본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명멸로 다가온다. 이 연극 속의 공간은 주식 시장의 공간과 아울러 자본 시장의 공간성, 그리고 우리 욕망의 공간성마저 확장적으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미술적인 언어, 음악적인 언어가 매우 심플한 지대에서 어려운 경제 용어들을 넘어선, 그리고 복잡한 텍스트를 넘어선 간단한 것들을 발설한다.

# 우리 욕망 속의 해부도 :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이 작품은 비단 엔론을 둘러싼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엔론이 부여한 생존의 논리, 그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논리를 닮았다. 다시 말해 엔론이 만들어 놓은 그 ‘텅 빈’ 상자는 자본주의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꼴이다. 우리는 제각기 실체는 텅 비어 있는 상태로‘라도’ 어떤 한 상자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텅 빈 상자인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다시 그 안의 또 다른 텅 빈 상자를 소유하려 한다.

  우리 욕망의 종착점, 혹은 실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이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깜빡 깜빡 명멸하는 빨간 등으로 연출된다. 이 작은 빨간 등의 명멸이 무대 전체에 명멸하는 조명 효과를 주면서 언제라도 이 모든 우주를 폭파시킬 수 있는 위태로운 핵처럼 표현된다.

  이 작품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욕망체이자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 혹은 이토록 큰 덩어리가 되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이 욕망체의 실제를 무대화한다. 여러 개의 텅 빈 상자들과 아주 작은 크기의 빨간 등, 그리고 빨간 등에 투사된 이 무대 전체의 명멸감, 그리고 이 모든 욕망체가 붕괴될 위기 마다 초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세 마리의 쥬라기 공룡들, 공룡들이 뱉어내는 기분 나쁜 (그것마저 비트감이 탁월했던) 소음들로.

  공룡들이 뱉어내는 소음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초침 소리를 닮았다. 무대에서 비트감으로 표현된 사운드 가운데 하나이다. 엔론의 사장 제프리는 공룡의 소리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의 초침 소리인지 모를 것에 시달린다. 그가 보안 요원을 불러 바닥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는데, 보안 요원이 그건 당신의 손목시계 초침 소리가 아니냐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목 즈음이다. 이 작품에 희미하게 <맥베스>의 모티프가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 욕망이 광기가 되어버린 한 사내. 그렇다면 제프리를 추동하여 텅 빈 상자를 가지게 한 앤디는 레이디 맥베스? 더 거슬러 올라가 제프리가 사장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모함했던 클로디아는 뱅코우를 의식한 인물인가.

  맥베스의 입김이 이 작품 안에 서려 있는 것을 감지하게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극히 희미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이 작품을 빛나게 했다. 결코 맥베스를 맥베스‘적’인 모티프로 활용하지 않고, 맥베스의 입김을 희미한 망령처럼 미약하게 서려놓게 한 것. 그래서 돈, 혹은 돈과 비슷한 무언가에 착종된 현재 우리 모두의 욕망체가 맥베스가 품었던 욕망과 어렴풋이 연결되게 하면서 조금 더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실체가 의식된다.

  예고했던 대로 텅 비어 있던 거대한 상자는 결국 아주 작은 빨간 등에 의해 폭파되어버리고 만다. 얼마 전 커다란, 텅 빈 상자가 아주 작은 등의 폭파로 붕괴되어버리는 사태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이 작품 속의 논리를 단지 미국 시장에서 벌어진 사태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모든 논리는 지금 우리의 현재를 장악하는 논리들 그것 자체의 모습이다. 의도적으로 한 장면에서 엔론의 사장을 “선장”이라 지칭하고 “바지나 입으시죠”라는 대사를 삽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객은 이 연극을 보는 내내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았을 것이다. ㉦

2014년 4월 13일 일요일

극단 뛰다 <바후차라마타>

극단 '뛰다'의 <바후차라마타>
연출 : 배요섭
공연장 : 남산드라마센터
관극 : 4/12 (토) 7시
by 이예은



  '뛰다'의 공연은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고 순례 중에 있는 여행의 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잠깐이나마 그 여행에 동행하고, 공연이 끝나면 여전히 이들은 어딘가에서 그 여행을 멈추지 않아주기를 하는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관객으로서 '뛰다'의 공연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은 그 어떤 작품적인 것을 조금 넘어서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작품을 보듬는 마음에 대한 것이 더욱 크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느끼게 할까, 또 무엇을 반성하게 할까. 연극이란 것이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연극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연극이 이런 것이라면 참 해 볼만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가지게 해 주는...

  사실 '뛰다'는 내가 연극과 첫사랑에 빠질 무렵, 연극이라는 아름다움을 나의 감각 속에 깊숙이 각인시켜 준 극단이다. 하륵, 하륵 하면서 음악 같기도 춤 같기도 한 그 하나의 단어로 결국 세상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어버렸던 <하륵 이야기>는, 분명 작은 무대이면서 하나의 큰 우주였다. 단 하나의 단어로도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말하는 서사의 상상력이 아름다웠고, 동시에 그 상상력의 공간을 채워 넣는 정성 어린 소리들과 율동들의 세밀함이 빛났다. 어떠한 세계의 초월을 거뜬하게 이루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거뜬함을 지극히 정성 어린 습기들로 일구고 있는 농부 같은 견실함이 아름다웠다. 이어지는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또채비놀음놀이>를 기다리고 만나면서 그 어느 어린이 관객보다도 커다랗게 기뻐할 준비를 하며 무대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항상 다시 기다렸다. 그 어떤 새로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줄지. 마치 팀 버튼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커서는 코엔 형제와 미셸 공드리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세상의 다양한 드라마들을 최대한 많이 이 감독들의 연출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뛰다'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러했다. 연극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이 극단의 작업으로 만나고 싶었다. 이러한 기대가 든 것은 연극 집단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뛰다'가 표현하고 드러내려 하는 것은 단지 무언가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품고 있는 그것. 다 말로 할 수도, 다 말해질 수도 없는 정신과 정성. 그것이 장면 장면마다에 결코 거짓말 하는 법 없이 묻어 있어서 좋았고, 그 진심은 배요섭 연출이 이 공연 프로그램북에 쓴 말처럼 “어떤 화려한 미장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임을 안다.

  이 공연에서도 '뛰다'는 그 어떠한 화두 혹은 장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 어떤 주제나 형식으로 따지자면, 이 공연에서 다루고 있는 성 정체성, 성 전환 수술, 트랜스젠더, 동성애 등의 화두를 발설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일인지 모른다. 이 공연은 이 화두를 발설하거나 질문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화두와 관련된 그 어떤 아픔을 이입시키거나 이해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에 있지도 않다. 그러면 이 화두를 둘러싼 무엇에, 어디에 이 공연은 존재할까?

  작품 초반부에 공연은 무던히도 관객과 배우, 그리고 배우와 캐릭터 사이를 소통케 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그럼으로써 현실과 서사, 사실과 사실 가능성, 그리하여 나와 타자 그 ‘사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호소하고 표현하고 싶어 했다. 배우들은 저마다 어떠한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를 하고 있었으나 그 연기의 대부분은 스토리텔링이었기에 허구와 현실 사이를 호소하였고, 장면의 중간 중간에 연출이 “연출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연출로서” 등장하여 무대 위에 허구가 ‘아닌’ 것들을 개입시키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초반부의 이 모든 호소들은 표현되고, 보여지고, 질문되고, 그리하여 호소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연이 중반부 즈음에 달했을 때 연출이 관객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이 무대 위에서 한 번 객석을 바라보면 어떻겠느냐고. 마치 힘겹게, 힘겹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술이나 한 잔 하자’와 같은 태도였다. 초반부의 모든 장면들이 어느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 걸으며 채 율동을 터뜨리지 못한 터라 그 제안에 흔쾌히 자리를 일어나 무대 위로 걸어갔다.

  관객들이 자리를 옮겨 앉았을 때 연출은 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결국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했다는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제까지 이 공연을 보던 관객들이 객석에서 느꼈던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연출이 몇 번 관객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그의 말이 비로소 처음으로 몸으로 들어 왔다. 이어서 그는 그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이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한다. 이 공연의 순간 역시 그러했다. 관객의 몸이 무대의 몸속으로 들어 온 그 순간. 이토록 간단한 몸의 이동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공연의 창작 과정에서의 경험들이 이 공연을 보는 관극 과정 안에서 다시 고스란히 체험되고 있었다.

  무대 위로 관객을 초청한 것은 저 너머의 세계를 한 번 넘어와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무대 위에서 바라본 객석,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 본 무대,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본 이 공연은 이 공연이 그토록 넘어보고 싶었던 그 너머의 세계였다. 관객이 무대의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공연도 실제와 합치되고, 이 모든 재료 안에서 글래디가 고백을 한다. 자신이 성을 바꾸게 된 역사를. 그 고백은 실제이다. 우리는 함께였다. 무대 안에서, 상처 안에서. 너무도 간단한 몸의 움직임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공연 초반부에 그토록 어렵게 호소했으나, 그럼에도 체화되지 못했던 이 공연 속의 화두들. 그 화두들이 체험이 되어, 아픔이 되어, 상상 너머의 것이 되어 이 공간 속에 낭자하다. 공연 초반부에 쌓여 온 것들은 어쩌면 이 순간의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 위한 축적의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체험이라는 것, 예를 들면 간단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이동하는 행위. 그 행위는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선 위에서는 그 어떠한 표현이나 발설이나 그림으로도 풀어내지 못하는 영역의 공감을 너무도 간단하게 끌어낸다. 세상의 모든 화두나 담론들 그 바닥에 서려 있는 아주 간단한 진리,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하고 싶고, 우리 모두는 상처 받으면 아프다 라는 사실 같은 것. 이토록 간단한 진리란 어쩌면 매우 간단한 체험만으로 체득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객석에서 무대로 건너오라고 한 이 공연의 제안처럼. 단, 체험은 그 간단함 속에 오로지 한 가지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 어떠한 거짓도 없는 진심일 것. 그렇기에 체험이란 그 어떠한 표현이나 주제, 방법론을 뛰어넘는 것이다. 진리란 사실 매우 간단해서 그 어떠한 강요도,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리란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이어서 그 어떠한 화두들에도 적용이 된다. 이 공연에서 성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걷어내면, 이 공연의 자세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어그러진 삶 속에 적용된다.

  참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기보다 연극을 체험하고 온 기분이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극장 안에서 크게 숨을 쉬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배우들과 연출이 이 날의 공연이 어떠했는지 스스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보통의 공연 같으면 너무도 당연히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야 노트를 들고 연출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이 날의 공연 모니터링을 하는데, 그 모습을 관객 앞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태도가 예쁘다. 이 공연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 안에서 벌어진 정신적인 것들을 오롯이 관객 앞에 꺼내고 싶어 한다. 그 순수와 그 자연스러움이 관객에게까지 유출될 수 있는 힘이란, 연출이 공연에 개입을 해서도 아니고, 모든 배우들이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건네서도,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서도 아니다.

  이 공연이 해 낸 몫은 그 어떠한 방법이나 내용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힘, 체험의 힘을 이루어내었다는 점에 고마움을 느낀다. 연극에서 체험을 끌어내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운 일일까? 보는 입장에서는 늘 기다리고, 만드는 입장에서는 늘 고민한다. 관객과 가장 몸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단지 그 몸의 열기만으로는 결코 이끌어낼 수 없는 그것. 오히려 우리의 몸이 이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얼마나 우리는 먼 곳에 있는가를 느끼며 극장 문을 나설 때가 대부분이다. 체험을 만나는 일은 마치 진짜 사람을 만나고 오는 일처럼 어렵고, 또 불가해하다. 우리가 ‘함께’라는 것의 체험. 그것은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극장 밖의 세상으로도 흘러들어간다.

  <노래하듯이 햄릿>, <앨리스 프로젝트>,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를 보면서 '뛰다'의 새로운 모습들에 새로운 기대를 가졌었는데, 오늘의 이 공연은 '뛰다'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체험의 에너지와 진실의 깊이와 무게감의 질감이 전작들과 조금 다르다. 더디게, 부디 오래 오래 성장하고, 건강하고, 계속 살아나가길. ㉦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유미리 작, 성기웅 연출 <정물화>

https://www.fb.com/12thTTS/posts/614370755303375

연극 <정물화>
관극 : 대학로예술극장, 3/14
작 : 유미리
각색/연출 : 성기웅

by 이예은

Prologue
교실 문이 열린다. 녹이 슨 난롯가에는 얼굴이 벌개진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고, 낯선 선생님이 들어온다. 예를 들면 삼월 이일, 한 교실에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 모여 앉은 그 첫날, 교실의 천장은 늘 조금 높았다. 공기의 한 군데는 너무도 뜨거웠고, 나머지 대부분의 공기는 차가웠다. 난롯가에 앉은 몇 몇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춥다며 검정 스타킹의 다리들을 교복 치마 안에서 심하게 흔들어댔다. 시끄럽고도 고요하다. 호기심 가는 아이를 발견하여 쳐다보다가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린다.


+
  초연 때의 선돌극장 무대보다 더욱 단정하고 반듯하게 정돈된 무대였다. 재공연을 보고나서야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들리는 느낌이다. 이것은 장면과 장면 사이 순간들에 대한 것이리라. 이 연극에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사이의 장면들이 많다. 그 장면들은 마치 우리 일상의 틈 사이에 반투명하게 서 있는 시(詩)처럼 어중간하게 서 있다. 인물들의 대화가 오고 가는 그 틈 사이에, 혹은 한 인물이 움직이고 대사를 하는 그 틈 사이에 무언가 불투명한 것이 끼어 있다.

  그것은 이 연극이 다루고 싶어 하는 시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 연극에는 문학이라는 소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연출의 행간에 문학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에 빗대어진 것인지, 아니면 문학과 연극 사이의 것인지, 어쨌거나 이 연극의 행간에 녹아 있는 잘 알 수 없는 것. 나는 그것을 정서라고 느끼고 있었고, 그 정서가 이 작품의 대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언가 잘 알 수 없는 것. 그것은 나나코(전수지 분)가 왜 죽고, 후유미(류혜린 분)의 언니는 왜 죽었는가에 관한 궁금증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궁금증이었다. 이 교실 안에 마치 태초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그저 처음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죽 존재할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연극 속을 떠다니는 이 알 수 없는 힘의 매력은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상세 감각들과 혼재해 있다는 점에 있다.

+
  반장 치하루(박민지 분)와 덤벙대는 카오리(서미영 분), 보이시한 나츠코(김희연 분)를 바라보고 있으면,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그 인물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껴버렸는지, 여기저기에서 ‘나는 너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어’라는 듯 바쁘게 웃음의 리액션을 보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인물들이 어느 여고의 교실에든 있을 법한 ‘바로 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고 시절에 꼭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 모든 제스쳐와 표정과 말투와 웃음 소리들. 예를 들면 반장 치하루가 종이에 코를 박고 엎드려 글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쓰는 포즈며, 시험 용액을 들고 사랑의 주문을 외우듯 과학 공식을 외우는 동작, 카오리가 머리를 반만 땋은 채 헐레벌떡 교실에 들어오는 모습, 그리고 가슴 만지기 놀이. “육이오가 왜 일어났게?”라고 물어보고 “왜?”라고 하면, “방심해서”라면서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던 우리 여고 시절의 가슴 만지기 놀이가 떠오른다. 우리가 아는 유미리 작가의 고독한 정서, 그 이면에는 그녀의 유년 시절에도 분명 이렇게 빼곡하게 들어 찬 어느 상세한 유희의 기억들이 있었으리라.

이런 상세 감각은 성기웅 작/연출의 작품 <삼등병>에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건만, 마치 군대에 가면 정말로 저러할 것 같은 세 명의 남자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 같은 그 느낌. 이 느낌은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클레이메이션의 캐릭터가 인간의 제스쳐, 인간의 말투를 너무도 완벽히 따라해 내어, 오히려 그 캐릭터들이 더 인간 같아 보이는 순간에 느껴지는 궁극의 호감 같은 것이다. 어떤 재현 이상의 재현. 너무도 ‘그’ 인물인 것 같은 것을 넘어설 정도의 ‘그’ 인물 같음. 연극에서 인물 창조란 재현이냐 탈-재현이냐의 문제라기보다 결국 그 인물을 어느 정도 살아있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닐까. 스타일보다는 결국 실제적 전달력이 중요하다.

  <정물화>에서 이러한 상세 감각은 아주 작은 것들의 긴밀한 포착들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포착들은 매우 작고도 다양하다. 이 연극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나의 장면에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은 히라타 오리자 작/성기웅 연출의 <과학 하는 마음>에서처럼 군데군데 따로 모여 앉은 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터뜨려 관객이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를 선택하게 하는 명징한 다발성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하나의 장면에서 모든 것들이 동시에 말을 하는 연출로 녹아 있다. 이 연극에서 관객은 하나의 장면 안에 있는 그 작고 상세한 것들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
  <정물화>에서 치하루, 카오리, 나츠코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상세한 감각들은 이 하나의 교실에서 나나코와 후유미가 만들어내는 망령 같은 비현실적인 기운들과 공존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여고생의 정서 안에서 가장 이상한 두려움 같은 것으로 느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학교의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을 거무튀튀한 변태의 눈빛, 다른 하나는 바로 나츠코와 후유미 사이에서 오고가는 그것. 예를 들어 1분단 맨 뒤에 앉아 있는 조금 낯선 아이가 수업 시간 내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 굳이 단어로 표현하자면 동성애에 대한 이상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사진출처: https://www.fb.com/12thTTS/posts/609395499134234

  예를 들면 이 두 가지의 이상함 같은 것을 둘러싼 알 수 없는 것들이 여고 시절의 교실 안을 군데군데 망령처럼 떠 다녔던 것 같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것을 마다 않을 만큼 현실적으로 떠들어대면서도 한켠으로는 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기묘함에 일제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귀를 기울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단지 동성애 혹은 변태라고 축약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떠한 알 수 없는 기운에 대한 증폭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와 같은 기묘함에 대한 강한 거부와 기대와 두려움과 기다림과 떨림은 늘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러한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나면 아이들은 일제히 “이건 비밀이야.”라고 말하면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 연극 역시나 비밀과 소문에 집중한다. 후유미의 언니가 왜 죽었는지, 나나코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관객은 이 작품만을 봐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은 연극 속에서 철저히 비밀에 묻혀 졌고, 그리하여 소문만 무성한 채로 끝이 났다. 만일 사건에 의한 플롯 진행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어리둥절한 연극일 수 있다. 이 연극은 부러 비밀과 소문으로 사건들을 철저하게 삭제하고 그 자리에 대신 사건들을 둘러싼 기운들을 채워 넣는다. 나나코가 연극 중간 중간 계속해서 귀신들과 교신하는 것, 그리하여 처음부터 이 연극을 채우고 있었던 이유 모를 죽음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은 나나코와 후유미 사이에 오고 가는 이유 모를 설렘과 함께 연극 중간 중간을 떠다니는 초월적인 기운이다.

  <삼등병>과 <정물화>. 군대와 여고. 이 두 세계는 철저히 교차되지 않을 법한 세계이지만, 이 두 세계를 떠올릴 때 공통적으로 환기되는 느낌이 있다. 무언가 정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거대하게 초월적인 느낌. 우리는 매우 상세한 현실을 살아갈 때 어쩌면 가장 거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관계로, 나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 나는 여고 시절에 그러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과 방금 끝난 수업 시간의 선생님 흉을 깨알 같이 보거나 어제 본 TV 프로그램의 남자 주인공 이야기를 피 튀기며 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 가 귀를 막고 시를 쓰기도 했다. 아, 그 폭발적인 잡담과 폭발적인 고요. 돌이켜 보면, 세속과 초월이 어찌 그토록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존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 시절은 그 폭발적인 것들이 너무도 작고 좁은 우리 교실, 내 책상 위에서 모두 공존하던 아주 이상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치하루, 카오리, 나츠코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상세한 감각도, 나나코와 후유미 사이에서 오고 가는 지극히 초월적인 감각도 모두 하나의 교실 풍경 안에서 동등하게 회고된다. 군대에 가보지 않은 내가 <삼등병>을 보고도 마치 그들이 된 듯 아주 좁고도 낱낱한 그들의 상세 감각을 느꼈듯이, 여고를 나오지 않은 남자 어른들도 <정물화>를 보면 이러한 상세 감각들을 느낄 수 있을까?
   
+
  이 연극은 계속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싶다. 마치 어린 시절의 사진첩을 긴 세월이 흘러 다시 꺼내어 보았을 때, 그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제야 기다림에 지친 인물처럼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듯이. 이 연극은 시차를 두고 곱씹고 곱씹어서 계속 그 장면의 틈새에 있는 보이지 않았던 것,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계속 발견해 가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 속에서 새로이 시(詩)가 될 수 있는 순간을 재발견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왔는데 문득 문학이 그립다.

상세감각
예를 들면 허진호 감독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보여준 지독히도 상세한 감각. 수박을 먹을 때에는 씨를 멀리 뱉기 놀이를 한다랄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여러 명이서 먹을 때에는 미리 아이스크림에 금을 그어 놓고 먹기를 시작한다랄지, 증명사진을 찍을 때에는 꼭 앞머리와 옆머리로 얼굴을 최대한 가려 얼굴을 작게 나오려고 한다랄지... 누구나 사소하게 공감할 법한 감각들을 다양하게 포착하여 비주얼라이징함으로써, 사건에 의한 플롯팅이 아닌 그 이면에 흐르는 섬세한 정서로써 플롯팅을 이끌어가는 작업을 본인은 ‘상세 감각’의 연출법이라고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세 감각의 연출법은 특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연출을 할 때에 정밀하게 요구되기도 하는 일반적인 연출법이다. ㉦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셜리에 관한 모든 것> - 시(詩) 쓰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by 이예은

+

  호퍼의 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호퍼의 회화가 어떠한 느낌이며, 그 느낌이 왜 좋은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시(詩)’를 설명하라 했을 때 결코 그 ‘시’가 다른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년 뉴욕 여행을 하는 기간 동안 휘트니 뮤지엄에서 호퍼의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만져 보고 온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많은 습작들에서 완성작으로 발전되는 호퍼의 빛, 어둠, 색, 구도, 정서의 추이를 보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호퍼의 회화 연출법은 많은 부분이 연극 작업의 연출법과 닮아 있다. 인물들의 블로킹을 구성해 내는 섬세한 표현력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명암으로 프레임의 정서와 상황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표현이 가능한 연극의 장면 연출법 같다. 호퍼의 회화는 운동성이 없어도 이미 연극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짧은 트레일러에서 호퍼식의 구도가 영상 프레임 안에서 정말로 이미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겠나.


트레일러, 혹은 메이킹 필름 


+ 작년 그의 작품들 앞에 서서 썼던 메모들


• Gas, 1940

빛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서 있는 남자가 마치 조각상 같다. 그만큼 빛의 명암이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빛의 과장된 표현이 인물을 실물처럼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곳곳마다에 닿은 빛들이 경건하고, 엄숙하게 느껴져서 그림 전체가 숭고한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는 느낌이다. ‘빛’이 ‘형’의 숭고한 부분(순간)을 빚어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알게 한다. 


• Nighthawks, 1942

빛과 어둠의 영역의 구획이 마치 몬드리안의 도안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 가장 할 말 없는 부분, 가장 불필요한 부분이 가장 환하게 강조되어 있다. 종업원의 신산한 표정-> 신사의 ‘또’다른 고단한 표정 -> 여자의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관객의 시선의 동선을 이끈다. 이 세 명은 마치 한 공간에서 대화를 해야 마땅한 듯한 블로킹을 이루고 있으나 저마다 홀로 있다. 이 세 명의 분열된 정서가 축적되어 있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이 맺히는 곳은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이다. 이들의 분열된 정서는 점차 ‘축적’되어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하필이면) ‘뒷’모습에 맺히는 것이다. 각자 분열되고 따로 노는 표정과 정서들이 이제, 관객을 철저히 외면하기로 한 어느 외딴 남자의 ‘뒷’모습에 맺혀 그 분열감의 정점을 이룬다. 결국 이 그림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가장 할 말 없어 보이는, 가장 흥미 없어 보이는, 가장 이야기(서사) 없어 보이는 벽면이다. 모여는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세 명의 무리와 그들과 동떨어진 한 명의 남자는 저마다 상대에게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분열감의 고조는 가장 할 말 없는 곳이 가장 highlight된 벽면의 ‘공백감의 강조’와 어우러지면서 결국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있는 느낌이다.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농밀하게 축적된 외로운 에너지들의 모임을 그린 것만 같다.

• Manhattan Bridge Loop, 1928

호퍼는 지평선 구도를 좋아한다. 끝나지 않는, 그래서 그것의 한 부분을 표현할 뿐이라는 듯한 구도의 그것. 그 끝나지 않는 수평선 속에서 ‘작게’ 스쳐 지나가는(머물다 가는) 인물을 함께 그린다. 공간 안에 함몰된 인간 생존 조건의 외로움을. 


• New York Movie, 1939

영화관은 암실인데 암실에서도 잔존하는 빛들에 집중하는 아이러니.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빛들-영화관 내부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빛, 단일 광원의 빛과 상충하는 여백의 빛들이 강조된다. 어셔 직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이 가장 강조가 되고, 그 빛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매우 환하게 빛난다. (마치 이 빛은 렘브란트의 빛처럼 어둠 속을 철저히 밝힌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 않은 객석 보조등의 빛이 강조가 되고, 그 빛을 따라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머리가 반사된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 앵글들 또한 세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의 얼굴 앵글과 어셔의 얼굴 앵글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호퍼 속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서로를 마주보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여백’을 차지하는 빛이 가장 전면적으로 강조가 되고, 영화관이라는 군집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홀로’인 사람들이 강조가 되는 쓸쓸한 관찰력


• Room For Tourists, 1945

이방의 빛, 
여행의 순간. 
빛으로 할 말을 다 하는구나. 


+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했다기보다는 호퍼의 회화에 ‘시’를 덧입힌 작업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단편의 ‘시극’들이 모여 회화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회화에 서사를 덧대어 영화화하지 않고, 회화에 시를 덧대어 영화화한 것은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다. 회화와 시가 긴밀하게 공유하는 진공의 순간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섬처럼 떠도는 공백의 순간들이 서사의 자리를 대신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흐름의 지속보다는 정지된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정말로, 영화의 대부분은 ‘정지’되어 있다.
  이 영화가 호퍼를 ‘영화화’했다고 말하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의 대부분이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ause된 한 순간, 그 순간의 포착, 그 포착의 수직성, 수직의 초월성, 초월의 틈입. 사진과 회화에서 추구하는 대상의 표현‘력’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영화라는 형태로 재창조하려 한 노력이 역력하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회화에서 구현해 놓은 수직적 초월의 순간을 굳이 ‘덜’ 완전한 순간으로 지연시킴으로 인해서 이 영화가 이룬 것은? 각색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결절점이, 원작의 생명력을 ‘재’창조해내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를 이루었는가를 질문한다. 원작인 회화에 내재된 호퍼‘적’ 시를 이 영화는 이 영화‘적’ 시로 과연 재창조해내었는가? 영화는 호퍼에서 연상되는 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의 시를 창조했어야 했다.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시여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명히 예상했던 종류의 쾌감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회화’가 단지 영상 이미지로 ‘운동’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설렘이 약동한다. 마치 매우 은밀한 것과 매우 능수능란한 것이 교합된 듯한 느낌. 이것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전문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육화된 목소리로 들었을 때의 설렘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다. 시와 회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의 은밀한 작동은 음악이나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토대로 하는 매체가 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설렘이다. 그 단편적이고도 내면적인 소요. 그것은 ‘단지’ 그것이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면적인 소요가 실제로 입 밖의 소란스러운 육성으로 터져 나오고 말 때에 우리는 이상한 쾌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은밀한 이름이 물질로 체현된 것을 본 것만 같은 화끈거림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는 일, 회화를 영화로 풀어내는 일. 그것은 왜 ‘부끄러운’ 일일까? 십 이 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추억의 장소에 십 이 년 만에 찾아 가 ‘그것’으로 그리워하던 것이 정말로 ‘그것’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 ‘그것’의 실재는 기이한 반가움이면서 동시에 맹렬하고도 선정적인 폭력이었다. 그토록 향수하고 꿈꾸어 온 ‘그것’은 어쩌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문학을, 그래서 연극을, 그래서 예술을 갈망하는 만큼 ‘그것’을 이야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희미하고도 긴 강박관념은 아직까지도 날 에워싸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상처받기 때문이다. 대학교 국문학과에만 진학하면 문학도, 예술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열망만을 가지고 살아 온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열망하던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누구도 문학‘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문학‘을’ 강간하는 법만 알려주더라. 하며 동기들과 소주잔을 붙들고 울던 때가 생각난다. 예술과 ‘첫’사랑하고, 제도에 ‘첫’상처를 받았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린 시절의 진지함.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시 쓰기’는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한다는 그 매혹적인 기획은 좋았으나 그 기획이 꼭 넘고 가야만 했던 연출법, 영화의 방법으로 ‘호퍼라는 시’를 쓰는 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호퍼를 영화화함으로써 내면적 은밀함을 육화시키는 묘한 쾌감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사실 기획이 과하게 매혹적일 때에는 실제 작업이 그 기획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기획의 단계에 머물렀을 때에만 유효한 매력‘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기획의 콘셉트를 체화해내야만 하는 창작의 몸체는 우리의 몸과 같이 연약하고 유동적이다. 그래서 늘 기획 작업을 할 때에는 머리와 입술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꾸만 연역하려들지 말고 귀납해서 아래로부터 올리고, 올려서 기획을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기획자는 연출자보다 더 연출자여야 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 시를 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순간을 순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호퍼를 영화로 보고 싶어 했을까. 이 영화의 연출력에 실망을 하면서도 호퍼의 잔상에 집중했던 그 시간은. 무언가 너머의 것을 창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함께 알고 있기에 호퍼를 이미 영화로 만든 이 작업 앞에서 또 다른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시를 쓰는 이에게 시를 타박하는 말들을 덧붙여 시 ‘쓰기’의 작업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탓이다. ㉦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서른을 말하는 무게: <파니핑크>와 <출출한 여자>

by 이예은

+ 8년 후의 <파니핑크>,
‘서른’이라는 나이를 발설하는 것에 대한 오만함

  서른이 되기 몇 해 전,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 아직까지도 분명히 ‘좋은 영화’라고 각인되어 온 작품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작품의 원제가 사실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친구의 뒤늦은 부음이라도 접한 것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이 1994년도 발표한 <파니핑크>.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고 흰 해골모양의 액세서리로 온통 얼굴과 몸을 휘감은 파니가 ‘서른’에 대해서 논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탐욕하는 것만 같이 온 몸을 뼈 무늬로 분장한 흑인 게이 친구 오르페오는 끊임없이 어느 누군가의 잠재적 타나토스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장례 수행에 참가하여 매일 매일 “육신은 흙이 될 것이다”를 읊으며 죽음을 연습하는 파니...


 영화는 온통 분주하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장례를 치르는 한 편의 장송곡 같다. 영화의 이곳저곳은 비주얼로, 사운드로 그 장송곡의 세부 리듬들을 구현하기에 바쁘다. 실제로 파니의 유일한 친구 오르페오가(그러나 처음부터 ‘실존’하는 인물 같지 않아서 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파니의 끔찍한 고독함을 영화 내내 느끼게 했던) 달빛을 온 몸에 한껏 담아내며 ‘신화적’ 죽음을 맞이하고, 파니를 둘러싼 온 우주는 하얗게 흔들리면서 한 세계를 떠나보내고, 한 세계를 맞이하며 끝이 난다.

파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영화 내내 그토록 장송하고 싶어 했던 오르페오, 매일 밤 집에 있는 관 속에 묻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 안에 그대로 묻혀 있는 것만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파니, 그들은 어쩌면 ‘이십대’라는 은유된 세계 전체를 말하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스물아홉까지의 거대한 한 세계를 보내고, 서른이라는 거대한 한 세계를 맞이하는 인생의 절기에 관한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생각된다.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그럼에도, '인사이드' 르윈

by 이예은



  코엔 형제의 ‘최초의’ 음악 영화가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음악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코엔 화되었을까?’였다. 음악이라는 감각적 달콤함도, 예술이라는 열정적 사명도 비껴갈 것이 분명한 ‘코엔 식’의 음악 영화의 전개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지극히 코엔적이면서도, 기존의 코엔적인 것을 비껴가며 그들 나름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말하고 싶다. ‘음악 영화’라고 말을 하기에 이 영화에는 음악적 순간들이 지극히 빈약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빈약한 음악적 순간들을 둘러싼, 그 나머지 것들의 팽배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이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정작 영화의 대부분은 ‘아웃’사이드 르윈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영화를 못보신 분을 위한 예고편: 

+ 사실은, ‘인사이드’가 아닌 ‘아웃사이드’ 르윈    


  클럽 공연 무대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 무대를 비추는 흔들리지 않는 노란 핀 조명은 건조하고도 안전하다. 안온한 이국성을 풍기는 작은 클럽의 무대. 한 곡의 노래를 긴 테이크로 잡는데, 사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르윈’(오스카 아이삭)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노래를 하게 내버려두는 두 장면 가운데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