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31일 금요일

두 가지 복수, 다른 모습

산책

  얼마 전 (또) 한 대학의 남학생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성차별과 성희롱에 해당하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중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지 왜 대학에 왔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특히 이 내용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나 역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이제는 대기업의 대리인가 차장이 된 옛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여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어려운데, 입시 경쟁만 더 치열하게 하면서 꼭 대학을 가야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 묻고 기 막혀 했으나, 그 친구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전히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라니, 이렇게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유난히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런 저런 일들에 다 불편해 하는 프로불편러(혹은 불편충)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이런 불평등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연극계에서도.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2월과 3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과 <메디아>(로버트 알폴디 연출)를 연이어 관극했다. <조씨고아>는 원나라 이야기이고, <메디아>는 그리스 신화이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복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복수하는 사람의 성별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

  먼저 <조씨고아> 이야기를 해보자. 도안고의 계략 때문에 조순을 비롯하여 조씨 집안 일족이 몰살당한다. 이때 조삭(조순의 아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도안고는 출산 후 이 아이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삭의 아내를 감금했으나, 그녀는 복수의 씨앗이 될 아이만을 살리기 위해 시골 의원 정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영은 평소 조순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이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이를 숨겨 달아난다. 이때 정영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 분명 후일 복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정영이 아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아의 어머니가 자결하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장군도 정영과 아기를 도망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도안고가 고아를 추적하고, 그를 찾지 못하면 또래인 모든 아기들을 죽이겠다고 하자, 정영은 고아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는다. 공손저구 역시 목숨을 걸고 이 계획에 가담한다.

  아기를 빼앗긴 정영 부인의 애 닳는 울음이 아직도 생각난다. 왜 자기 아들이 죽어야 하냐고 울부짖는 어미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데려가는 정영의 모습도 떠오른다. 죽음을 선택한 공주와 장군, 공손저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고 20년간 고아를 키운 정영의 모습은 분명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졌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아이를 살려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인에게 걸맞는 최후를  위한 고귀한 복수. 조씨고아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 복수의 씨앗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물론 도안고 집안을 멸족함으로써 복수는 성공한다. 20년간 고아를 키우며 복수의 날을 기다려온 정영의 얼굴에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 안도와 허무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어쨌든, <조씨고아>에서 복수는 고귀한 것, 권선징악의 아름다운 결말을 완성하는 것이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더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여자, 그녀가 바로 메디아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메디아의 복수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메디아가 자식들을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들이 많은 것도 이 이야기를 치정극,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타국, 코린토스로 왔으나 남편은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바람이 나고, 곧 결혼을 한단다. 메디아 자신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고, 아이들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이 순간, 메디아는 공주와 왕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다소 길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의 장면을 아래에 인용해보자.


메데이아 나는 내 자식들을 죽일 거예요.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이아손의 집을 송두리째 허물 것이며,
가장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나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인 죄를 피해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친구들이여!
그래야만 해요. 내가 살아서 뭘 해요?
내게는 조국도 집도 불행의 대피처도 없어요.
내가 한 헬라스 남자의 감언이설을 믿고
선조들의 집을 떠났을 때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던 거예요.
그러나 그 자도 이제 신의 도움으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그 자는 앞으로 내가 낳아 준 자식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고, 새 신부도 내 독에 의하여
고약한 여인으로서 고약한 죽음을 당해야 하니
그 자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할 테니까 말예요.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역, 791행 ~ 806행)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메디아의 여러 감정이나 이유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지는 연출의 마음이지만, 알폴디는 메디아를 ‘이기적인 여자’로 그러니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죽어 마땅한 여자’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여자의 선택”이라는 부제를 달고서는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다니. 메디아는 남편을, 이아손은 새 신부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식을 잃었다. 그런데 메디아만이 죽음으로 처벌당한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하는가? 결혼을 앞둔 이아손이 자식들을 본체만체 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는가? 메디아가 어머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환상이거나, 혹은 굴레일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단지 달라진 결말에서만 느껴진 것은 아니다. <메디아>의 코러스들은 모두 여자배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메디아가 등장하기 전, 첫 장면에서 그녀들이 보여준 모습은 메디아에 대한 질투, 그리고 험담이었다. 코러스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끝까지 지속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것일까.) 이혜영 배우가 분한 메디아의 강렬함이 연일 찬사를 받고 있는데, 무대 위의 메디아는 그저 “나쁜 여자” 그래서 “벌 받은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고 후회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알폴디는 메디아에게 속죄할 기회도, 악녀의 이미지도 빼앗아 버렸다. 메디아는 이기적인 여자, 그 이상도 아니기에 자식까지 죽이는 선택을 하고서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속죄할리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마차타고 유유히 떠나는 메디아가 두려웠던 것일까?

  복수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옳고, 메디아의 복수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정영도 메디아처럼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영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상상하고, 헤아려야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택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아름답게 그려졌다. 복수를 완성한 그들은 선을 이루었고, 이제 자신을 위해 목숨 내어 준 사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정영은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내에게 속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아의 복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매력적이지만, 신경질적이고, 악한 여자.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자일 뿐이었다. 결국 메디아는 죽음으로 처벌당해야 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홀로 남은 이아손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이런 끔찍한 결말을 맺게 된 것에 대해 후회할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게 될까? 그렇다면 알폴디는 복수의 (그나마) 고귀한 면을 이아손에게만 준 것이다. 알폴디의 결말은 어쩌면 새로워보이지만, 악녀 메디아를 처벌하는 오래된 남성적 위계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과, 불편함을 남긴다.

2017년 3월 18일 토요일

창작 뮤지컬 제19차 <빨래> 관람 후기

성지수

공연예술 작품이 막강한 힘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 ‘힘’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권위’란 단어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막강한 권위를 가진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근래에 상연되는 ‘고전’의 사례를 생각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먼저 관객은 극장을 찾기 전부터 관극 경험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작품의 힘이 세니, 적어도 아주 망작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 말이다. 또 하나, 관객은 암묵적으로 약속된 관람 태도가 정해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서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이런 장면은 이렇게, 저런 장면은 저렇게 받아들이고 반응해야만 한다는 느낌. 약속되어 있는 것과 다른 관극 경험은 (예를 들어 감동을 받아야 할 장면에서 아무 감흥이 없다거나) 공연 탓이 아니라, 철저히 ‘이 작품을 잘은 모르는 관객인 나 개인의 문제’가 된다. 이렇듯 관객은 권위 있는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뭘 좀 알아야’ 겨우 입을 뗄 수 있는 입장이 된다. 꼭 ‘고전’이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 받으며 10년 이상 장기 공연을 해 온 작품도 그렇다. ‘뭘 모르는’ 관객은 오랜 기간 그 작품을 사랑한 수많은 관객들과, 오랜 기간 같은 작품을 상연한 제작진 및 배우들 앞에서 감히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진다.

뮤지컬 <빨래>를 보고 온 나의 입장이 지금 그러하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졸업공연으로 시작하여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상업 작품으로 정식 초연된 이래로 오픈 런에 가깝게 공연 중이며,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상 및 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 작곡상 및 극본상을 수상했고, 하는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정보는 어렴풋이 알고, 오랜 공연 기간을 걸쳐 생겼을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와 추억 등등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공연장을 찾았던 나는, 지금 입을 다물어야 한다. 십여 년 째 꾸준히 극장을 찾는, 또는 다양한 캐스팅 조합 별로 같은 차수 공연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그래서 어떤 자리를 예매해야 공연 도중 남자 주인공의 사인을 받기 쉬운지 등을 너무도 잘 아는 <빨래> 팬들 앞에서 나 같은 ‘빨래 초짜 관객’의 불평은 그 자체로 예의가 없는 짓이 된다. 그런 것들이 이미 창작 뮤지컬 <빨래>의 ‘힘’, 권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관람 평은 “좋았어요.” “감동 받았어요.” “노래들이 귀에 계속 맴돌아요.” “배우들이 멋져요.” 정도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한마디 하려고 드는 것은 현재 이 작품이 가진 결함 때문이다. 이 글은 공연이 가진 젠더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이것이 어떻게 작품 전체의 구성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부디 이 쓴소리, 아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헛소리가, 뮤지컬 <빨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아프게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빨래>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강조된 서사는 몽골 노동이주청년 ‘솔롱고’와 강원도 여자 ‘나영’의 러브라인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나영은 끊임없이 대상화된 여성으로만 그려지면서 나영은 하나의 인물로서 주체성을 갖지 못한다. 솔롱고와 나영의 ‘사랑’은 줄곧 솔롱고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솔롱고에게 언제부터 호감을 가졌는지, 이 호감이 언제 이웃사람에 대한 친절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이 친절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랑’이 되었는지와 같은 감정의 변화에 대해 나영은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할/노래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두 사람이 상냥한 말을 주고받는 장면은 참 많이도 나오지만, 그 정도 상냥함이야 살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영의 직장동료가 “무슨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좋아보인다.”라고 하는, ‘썸’이나 연애를 시작할 때 주변인물들이 하는 스테레오타입의 대사에도, 그것이 나영이가 솔롱고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연결고리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관람한 날의 ‘나영’의 연기가 능숙하지 못해서 대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없지 않은, 그 섬세한 감정 변화가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던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본 나영은 끝까지 솔롱고에게 ‘타인에 대한 친절’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옥상에서 함께 빨래를 널다가 솔롱고가 나영의 손을 덥썩 잡는 장면에서, 아 이제 따귀를 날리면 딱 좋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 주인공 솔롱고의 경우 배우 개인의 연기가 부족하더라도 <빨래>의 대표곡인 “참 예뻐요”를 솔로로 부르는 등 자기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는 반면, 나영에게는 그럴 솔로곡, 그럴 장면이 주어지지 않는다. 대사 처리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끝까지 상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 몇 마디만을 가지고, 나영은 러브라인의 여자 주인공 자리를 지켜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곧이어 키스를 하더니 살림방을 합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솔롱고의 노래 “참 예뻐요” 장면은 나영에 대한 대상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나영이 이사를 오다가 떨어뜨린 책을 솔롱고가 주워주었을 때 한 번,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인사를 했을 때 한 번 만나고 나서 그들이 세 번째로 마주치는 장면에서, 솔롱고는 공장장, 또 다른 이주 청년 ‘마이클’과 함께 슈퍼 앞에서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대 한켠에서 이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무대 다른 쪽에서 나영이 슈퍼에 가기 위해 등장한다. 나영이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슈퍼에 들어갔다 나오고, 그곳에 놓고 간 책을 슈퍼 주인으로부터 넘겨받는 그 시간동안 솔롱고, 마이클, 공장장은 나영을 빤히 쳐다본다. 여기까지야 나영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고, 그러므로 그건 칭찬이고, 이 정도면 시선 강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시선 강간은 단순히 음흉한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훑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은, 사람은 ‘꽃’이 아니기 때문에 이유를 막론하고 충분히 가깝지 않은 타인을 대놓고 쳐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무례한 행동이다. 이 무례함을 무례함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여기에 젠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철저하고 명백하게 나영에 대한 대상화가 이뤄진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진다. 주변은 모두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 구석의 솔롱고와, 막 집에 가던 중인, 그래서 무대 한가운데에 있는 나영에게만 국부조명이 떨어진다. 시간이 멈춘다. 음악이 시작된다. 솔롱고가 노래를 시작하며 홀로 움직인다. 나영은 동작이 멈춰진 채로 환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중앙에 ‘놓여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솔롱고 뿐이니 동작이 멈춰진 사람은 나영 혼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실험대에 올려진 것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 타의(솔롱고의 의도)에 의해 고정되어 전시되는 것은 나영 뿐이다. 노래를 부르며 서서히 나영에게 다가가는 솔롱고는, 남성의 시선에서는 사랑하지만 가 닿을 수 없는 이를 향한 간절함을 표현한 것일 수 있지만, 여성의 시선에서는 폭력 그 자체이다.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 나를 해부용 실험동물처럼 속박하고 전시하더니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만지기라도 하려는 걸까. 마침내 그의 손이 거의 나영의 손에 닿을 때 쯤, 나영을 강조하던 조명은 꺼지고 나영이 먼저 솔롱고의 손을 잡는다. 솔롱고의 환상 속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영의 움직임과 말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나영의 말과 행동이 솔롱고의 기대일 뿐임을 안다. 이제 나영은 고정된 객체에서 남성의 환상대로 반응해주기까지 하는 (그것도 아주 ‘주체적으로’ 데이트를 이끄는 것으로 그려지는) 객체가 된다.

작품의 큰 소재 줄기인 연애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여자 주인공 나영의 입지는 자연스레 작품 내에서도 애매모호해진다. 아무리 직장에서 불의에 맞서려 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려 해도, 귀가만 하면 솔롱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 인물이 사용하는 동선 등을 보면 나영이 주인공임이 확실한데도, 과연 이 역을 주연이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영이 지워진 자리, 즉 주연이라는 자리에는 주인 할매, 희정 엄마, 그리고 솔롱고가 남는다. 그리고 이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조합은 상당히 이상하다. 차라리 솔롱고까지 사라져버렸다면 ‘참 열심히 사는 두 여자와, 그들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이렇게 되면 나영과 솔롱고는 조연이 됨), 작품에서 솔롱고의 자리는 여전히 견고하다. 연애라는 작품의 큰 줄거리의 유일한 적극적 주체이자, 이 감정을 솔로곡인 동시에 작품의 대표곡을 부르며 이끌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인 할매의 장애를 가진 딸이 한밤중에 많이 아팠을 때, 나는 당연히 솔롱고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야 중심인물인 세 사람 간의 끈끈한 관계 형성이 비로소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정말로,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할매의 딸을 들쳐 업고 새벽을 달려 병원에 간 것은 희정 엄마였다. 솔롱고는? 철저히 대상화된 나영을 ‘얻는 데’ 성공할 뿐이다.

왜 나영 없이 솔롱고의 자리만 견고한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남은 솔롱고가 다른 주연들과 어떠한 관계인 건지 작품이 섬세히 그려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솔롱고는 그저 주인 할매, 희정 엄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사이, 그들로부터 나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얻는 데 도움을 받는 정도의 얕은 관계만을 유지한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굴곡진 인생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주인 할매와 희정 엄마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시켜야하는지, 이 셋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얽혀있는 것인지 <빨래>는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솔롱고가 나영이를 ‘데리고 살게 되는’ 얘기(두 사람이 방을 합치는 것은 나영이가 솔롱고의 방으로 이사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상하다, 나영은 어쨌든 파주 공장으로 일을 나가고, 솔롱고는 또 임금을 떼먹혔댔는데... 솔롱고의 방이 더 넓은거겠지. 그래, 그런 것이어야만 하겠지, 하는 추측은, 무지한 관객인 나만의 몫으로 남는다)랑, 저 두 여인의 기구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작품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나영이 지워지고 솔롱고-주인 할매-희정 엄마라는 ‘연결고리가 미약한 조합’이 중심이 되어버린 <빨래>는 정리되지 못한 산발된 에피소드의 나열이 되어버린다. 관객이  이 서로 관계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봐야 할 이유가, 그것도 결코 안락하다고 할 수 없는 의자에 160분 동안이나 앉아서 봐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로 <빨래>에 대해 무지한 관객이지만,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한 사람, 이번 시즌에도 연출을 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에게 작품을 통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선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성 연극인의 작/연출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대상화된 시선 때문에 작품의 구성이 위태롭게 여겨지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여성 관객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 약간의 조사를 통해 이 작품이 2003년 이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분이었던 공연 길이는 160분으로, 삽입곡은 7곡에서 18곡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상업화’ 과정에서의 러브라인 강화, 이로 인한 솔롱고 비중의 강화 등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슬펐다.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작품을 다듬는 과정에서 고려된 그 ‘많은 관객’이, 소위 ‘뮤덕’이라 불리며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는 20-30대 여성 관객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 서나영을 지워버린 것은 여성 연극인 추민주 혼자가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는 헛소리에 가까울 관람평을 굳이 작성하고 굳이 게재하는 이유이다. 나는, 뮤지컬 <빨래>는 심각한 젠더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으며, 주요 인물 구성의 측면에 미숙함이 있어서 작품의 서사 구조의 안정성마저 떨어지는, 그래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이토록 망가진 메데이아

no_name

그래요. 메데이아(a.k.a. 메데아, 메디아)가 이아손의 손에 죽는 게 현실적이겠지요. 맞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해요. 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냐고요. 그런데 현실적인 것을 찾으려면 애당초 2500년 전 이야기를 뭐하러 다시 해요? 게다가 요즘 국립극단은 지금 이곳의 현실, 여기 우리 사는 얘기 하는 거 불편해하잖아요? 아리스토파네스로 입장 곤란해진 거 알아요. 그렇다고 에우리피데스를 가져와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요? 쫄아 있는 게 너무 보이잖아요. 아직도 쫄아 있으면 어떡해요. 블랙리스트 다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당신이 마지 못해서 그런 거라 누가 믿겠어요? 정치극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굳이 리얼한 치정극을 할 건 또 뭐에요? 리얼한 거 좋지요. 그런데 현실을 외면하면서 리얼하려니 스텝이 꼬이잖아요. 아무리 한남충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라지만 이아손 같은 찌질남이 메데이아를 죽이는 꼴을 왜 무대에서 봐야할까요? 메데이아가 자기 아이들을 칼로 찌르고 피 흘리며 죽는 건 또 왜 봐야 하나요? 여혐이라 욕먹는 에우리피데스도 그건 안 했다고요.

아녜요. 메데이아가 살아서 떠나는 게 더 슬프잖아요. 그게 진짜 비극이잖아요. 그래야 살아 있는 동안 아이들을 죽인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아이게우스에게서 낳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기가 죽인 아이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메데이아 스스로 그러잖아요. 그날 하루만 잊고 평생 울어야 한다고요. 자기도 감당 못 할 잘못을 저지르고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고요. 해결되면 안 되는 고통이라고요. 살아있는 게 지옥이라고요. 그런데 한 날 한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냐고요. 아무리 황당해도 용수레 타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야 한다고요. 관객들이 좋아서 손뼉 치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투명 실린더는 괜찮고, 용수레는 왜 안되는데요?

이아손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선 안 돼요. 찌질한 놈이라 그럴 자격도 없는 데다가, 눈앞에서 새신부도 장인도 두 아들도 다 잃었잖아요. 그럼 그 모든 걸 복수할 기회도 잃어야죠. 그래야 아찔하잖아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볼 거 아녜요. 이아손에게 허락된 건 통곡이지 메데이아를 죽이는 손쉬운 분풀이가 아니에요. 뭐 잘했다고 이아손의 소망이 이뤄져야 하나요? 메데이아를 이토록 망가뜨리면 어쩌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