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다양한 신체, 다양한 ‘이완’: 극단 애인의 <무무> 연습 참관기

글쓴이_최희범

지난 11월 7일 토요일, 극단 애인의 2015년 신작 <무무>의 연습실을 방문했다. 극단 애인은 “연기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극단이다. 연기에 대한 탐구는 애인 작업의 큰 축을 이룬다. 대표 김지수씨가 “배우가 성장하는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고 극단 창단의 이유를 밝힌 것을 보면, 이 극단에게 장애인 단원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연습 참관의 목적은 극단 애인이 작품 연습 이외의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직접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임박한 시기라서 그런지, 아쉽게도 장면 연습과 런쓰루(도중에 끊지 않고 전체 작품을 연습하는 것) 외에 내가 보고자 했던 기본적인 배우 트레이닝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무려!) 두 번의 런쓰루와 연출과 배우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며 장면을 다듬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무무> 연습실, 내가 방문한 날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 연습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성 배우의 발전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이번 연습 참관에서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 배우는 그를 무대에서 처음 본 2년 전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표정은 풍성해졌으며,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신체적 특성들로 인해 “원활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 ‘장애’가 있는 그의 목소리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렁차지는 않았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가 갑자기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그의 근육들이 엄청나게 힘이 붙어서 전보다 확실한 제스처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차이, 이런 성장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는 무엇을 잘하게 되었기에, 나는 그가 연기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느낀 것일까?

배우들이 트레이닝 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강예슬 연출에게 평소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강예슬 연출은 주로 “이완”을 목표로 신체 및 발성 훈련을 한다고 답해 주었다. 특히 연습의 초반에는 연습 시간 대부분을 할애할 만큼 이완 훈련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훈련을 통해 배우들은 매 연습에서 실질적인 신체 및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 공연이 가까워지면 신체, 발성 훈련은 배우 개인들에게 맡겨지는데, 초반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된 배우들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하지성을 비롯한 극단 애인의 배우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완’ 훈련 덕분인가? 관객 앞에 서는 배우가 마냥 몸이 늘어지는 식으로 “이완”할 수는 없을진대, 그렇다면 배우에게 있어서 이완이란 어떤 것인가?

<무무> 장면 연습, 오른쪽 뒤가 하지성 배우(스테판 역), 왼쪽 앞이 최종혁 배우(가브릴라 역)

이완 훈련은 극단 애인만의 독특한 훈련 방식은 아니다. 대부분의 배우 및 연출가들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며, 많은 연기론이나 연기 훈련법들이 배우의 이완을 목적으로 명상, 호흡, 움직임을 접목시킨 트레이닝 방법들을 제시한다. 최초로 사실주의 연기 훈련법들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스타니슬랍스키(Constantin Stanislavsky)는 ‘신체 이완(physical relaxation)’을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연기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그는 스스로도 이완을 위해 요가 등을 훈련(수련)했으며, 이를 자신의 훈련법에 포함시킨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들이 ‘이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게, 코포(Jacques Copeau), 르코크(Jacques Lecoq) 등의 비사실주의 연기론들은 ‘중립(the neutr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데, 많은 연기 방법론들에서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적절한” 혹은 “좋은” 연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다.

장애 퍼포먼스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캐리 샌덜(Carrie Sandahl)은 그녀의 논문 “중립의 독재: 장애와 연기 훈련(The Tyranny of Neutral: Disability & Actor Training)”에서 연기 양식과 상관없이, 한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간주되는 ‘이완’, ‘중립’과 같은 개념들이 장애인 연기자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특히 “중립 상태”라는 비유적 표현이 신체 외형,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유연함, 자연스러움 등 이상화된 신체적 지표들에 의해서 평가된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선천적으로 비대칭적이고 유연하지 못한 근육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혹은 후천적으로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손상된 몸은 “적합하게 이완할 수 있는 신체(a body able to relax properly)”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적절하게 이완할 수 없는 신체는 연기를 위한 기본 조건이 충족될 수 없는, “연기 불가능한(disabled) 신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연기 교육 방법들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논리가 장애인 배우들이 겪는 불평등을 “은밀하게” 심화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선천적인 호흡기 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깊고,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이완된 호흡”을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굽은 등을 가진 누군가는 아예 운동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유연한 근육이 있는, 그래서 아름다워 보일뿐 아니라 안정되어 보이는 어깨 라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에게 ‘이완’이란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인가? 애인의 배우들이 하는 ‘이완’ 훈련은 정확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수행되는 것인가?

우리는 폴란드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의 연기론에서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여자의 흉곽이 길고 좁다면 그 여자는 연기를 하면서 대체로 횡경막을 시각적으로 통제하는 호흡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여자는 오히려 호흡에 척추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척추를 너무 의식하면 안 되고, 반응과 동시에 척추를 사용해야한다. 마치 뱀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바로 생명의 반응이다. 척추를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시키면 결코 안 된다. 척추를 유연하게 하면 호흡도 자유로워질 것이다.”(예지 그로토프스키, 『그로토프스키 연극론』, 현대미학사, 2007, 나진환 편역, 84면)

이 부분에서 그로토프스키는 독특한 신체 조건으로 인해 연기자 호흡의 정석이라고 간주되는 복식 호흡이 불가능한 배우의 경우를 제시하고, 그녀의 신체에 맞는 호흡 및 발성법을 통해서 ‘생명의 반응’으로서의 자유로운 호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로토프스키는 연기 훈련 메소드를 고정시키고 “기술을 얻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연기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장애인 연기자들을 위한 훈련법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모든 훈련은 연기자 개인의 신체, 정신적 조건에 맞추어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모든 훈련은 고정된 형태 혹은 방식의 신체, 목소리, 말투, 호흡, 움직임과 같이 이상화된 목표를 얻어내기 위한 반복 연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두 가지이다.

그로토프스키는 고정된 목표를 추구하며 자신의 신체 작동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을 기계화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기계화는 부자연스러운 연행이나 가식적인 허행을 낳을 뿐 좋은 연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기계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기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신체가 무대 위에서 “본래적”(혹은 “일상적”) 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방해물(blocks)’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이 방해물은 배우 개인이 가진 신체적 “약점” 혹은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특정한 말투, 호흡, 이미지, 나아가 특정한 감정에 매몰되어 훈련이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것이 됨으로써 훈련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토프스키는 배우가 상투적인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자기폭로(self-revelation)’로서의 연기를 하려면, 매 순간 자신의 ‘방해’를 초월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배우의 연행에서 진정한방해 요소는 물리적 약점 자체가 아닌,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신체, 심리, 정신적인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에서 연기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객들 앞에서 자기-폭로를 실행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배우를 양성하는 것이다. 배우의 자기-폭로가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연극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은 종종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배우의 현존(즉, 자기-폭로)은 영적, 정신적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해석된다(Phillip Auslander, From Acting to Performance: Essays i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London; Routledge, 1997). 비록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은 불확실한 형이상학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의 연기론은 여전히 다양한 연기 양식을 시도하는 많은 배우 및 연기 교사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가 특정한 훈련법들이 절대적 효과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은 기술 및 ‘메소드’에 매몰되어 자칫 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연기 훈련들에 제동을 걸며 연기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준다.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훈련법들은 장애인 연기자들에게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로토프스키와 작업한 배우들의 대다수는 비장애인이었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가 제시하는 훈련법들은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신체 및 정신적 능력의 범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연기론은 이상화된 연기 훈련의 목표들, 방법론들을 거부하고 메소드의 개별화를 주장함으로써 다양한 특성 혹은 “약점”을 지닌 몸들 역시 이완된 무대 위 현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이완’ 혹은 ‘중립’을 특정한 신체적 외형이나 소리, 말투 등의 시청각적 특성들에 국한시키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중립’, 각기 다른 ‘이완’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장애인 극단들이 그로토프스키 연기론을 배우 훈련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한다거나, 하지성 배우가 틀림없이 이 같은 ‘이완’ 훈련을 통해서 연기자로서 성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샌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로토프스키를 포함한 기존의 연기 훈련들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사용되는 용어들로 인해 장애인 연기자들이 겪는 불평등을 심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장애인 배우들 혹은 극단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기존의 연기론이나 훈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훈련법들이 다양한 신체를 고려하는 부분들을 눈여겨보고 재해석하여 연기 훈련의 방식과 대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주변화(marginalization)’된 신체가 무대에 오를 때 찾아오는 인식의 변화야 말로 극단 애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 가치이다.


애인에 의해 각색된 <무무>는 지적 장애인인 “게라심”(한정식 分)이 자유를 박탈당한 농노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다른 농노인 “에로쉬카”(백우람 分)의 대사, “나는 한 번도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단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갖지 못한 건 사랑하는 마음이었어. 자유가 없었던 거지. 이 큰 저택에 몸만 묶여있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갇혀 있었던 거야.”라는 말이 여운을 준다. 배우들의 말과 몸짓이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와 만나, 삶과 연극 및 연기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무>는 11월 13일 금요일부터 12월 5일 토요일까지 성북마을극장에서 공연된다.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몰래 먹는 사탕 같은 달콤함: 인피니트와 뮤지컬 <인 더 하이츠>

글쓴이_시뫄

출처: 뮤지컬 <인 더 하이츠> 페이스북 페이지

나는 뮤지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뮤지컬이 다른 공연예술 장르에 비해 전반적으로 화려하다는 것이다. 가끔 뮤지컬을 보고나면 내가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스펙터클에 현혹되기만 하지는 않았나, 하고 자기반성을 하게 될 정도다.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인 더 하이츠>(이하 <하이츠>)라는 뮤지컬의 포스터를 봤을 때도 랩과 비보잉이 가미된 신개념 뮤지컬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띠기는 했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그 작품에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미 모든 요소가 자극적인 뮤지컬 무대 위에서는 힙합의 자유로운 느낌이 잘 살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힙합 음악과 문화가 오늘날의 한국 대중문화에서 방송을 통해 전에 비해 손쉽게 소비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뮤지컬에 힙합을 접목시킨다는 것 자체도 화제성과 관객몰이를 위한 전략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 기대보다는 의심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금 13만원을 주고 결국 뮤지컬계의 소위 “듣보잡”이라고 할 수 있을 그 공연을 보고 왔다.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인피니트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두 명이나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이츠>는 뉴욕의 히스패닉 할렘이라고 불리는 워싱턴 하이츠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빈곤하고 차별받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희망을 그린 뮤지컬이다. 2008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토니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한국 초연인 이번 공연에는 인피니트의 메인보컬인 김성규와 래퍼 장동우가 각각 베니와 우스나비 역에 캐스팅되어 출연했는데(더블캐스팅을 넘어 트리플, 콰드러플 캐스팅이었지만), 특히 주로 랩을 하는 우스나비는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VIP석 예매를 감행하게 됐다. 인피니트는 힙합 그룹이 아닌 댄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 더 분명한 그룹이고, 따라서 팀 내 래퍼의 위상도 그다지 높지는 않다. (활동 다양화의 일환으로 래퍼 두 명이 유닛을 결성해서 따로 앨범을 두 차례 내기는 했지만.) 따라서 인피니트의 일곱 멤버들을 두루두루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노래의 파트가 많지도 않고, 연기활동을 병행하거나 예능에 활발하게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는 장동우에 대해 늘 어딘가 그리운 구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그가 주인공 격의 배역을 맡은 뮤지컬을 결국에는 보게 될 것이었는데, 비싼 티켓 가격에 한번, 그리고 보고 나서 실망할 걱정에 두 번, 그렇게 몇 번이나 예매를 망설이기는 했다. 결국 망설이다 뒤늦게 예매전쟁(피의 티켓팅을 줄여 “피켓팅”이라고도 한다)에 참전해 12열에 VIP 좌석을 구했다. 괘씸하게도 공연장 1층 전체가 VIP석이라서 내 자리는 성에 찰 만큼 무대와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코입이 분명하게 보일 거리에서(“면봉”만 실컷 보고 오는 것은 면할 거리에서) 내 아이돌을 볼 수 있다는데, 종국에는 예매 전 망설임에 허비해버렸던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아무도 캐스팅보드 앞에 서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팬질하러 왔다고 머글(팬이 아닌 사람)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고, 사실 인증샷이 필요 없기도 하다.

  사실 나는 그간 인피니트에 대한 나의 팬심을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로 여겨왔다. 공연예술을 공부하다 보니 “좋은” 퍼포먼스에 대한 내 나름의 관점과 기준이 생기게 됐는데, 종종 인피니트가 퍼포먼스로서가 아니라 멋지고 귀여운 이미지로 소비될 수밖에 없도록 자신들을 내보이는 것 같은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그들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인피니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데뷔 초 내세웠던 칼군무 때문이었다. 사실 멤버 7명 중 2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몸치에 가까워서, 제작자는 깔끔한 무대를 위해 칼군무를 하나의 전략으로 채택할 수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인지도도 없고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신인 아이돌 그룹이 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일곱 명 사이의 호흡뿐이었을 것이다.) 인피니트의 칼군무는 단지 일곱 명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박자에 맞춰 안무를 하는 것에 머무르기보다는,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절묘한 타이밍을 맞춰 무대 위에 하나의 유기적인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데뷔 6년차의 꽤 노련한 아이돌이 된 인피니트는 예전의 퍼포먼스와는 사뭇 다른 무대를 보여준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몇 번의 월드 투어를 거치며 안무 동작은 세련되고 여유로워졌지만, 안무 구성의 치밀함과 촘촘함은 예전 같지 않다. 화려해진 무대와 360도 카메라 같은 최신 기술을 사용한 최근의 “Bad” 뮤직비디오(https://youtu.be/BNqW6uE-Q_o에서 유튜브 앱으로 시청해야 체험 가능!)는 여전히 “칼군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만, 멤버 사이의 호흡과 퍼포먼스의 구성을 강조해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인피니트를 보여주기 보다는, 현란한 시각적 요소와 더불어 멤버 각각을 멋있는 모습으로 보여내는 것에 치중한다. 전보다 출연이 잦아진 예능 방송과 라디오, SNS 등 무대 밖의 연예활동 역시 멤버 각각의 귀엽고 친근한 모습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데뷔 초에 인지도가 없는 상태의 신인가수로서 인피니트가 퍼포먼스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다른 내세울 것들이 많아졌다는, 그들로서는 긍정적인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멋있고 귀엽고 잘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다른 아이돌과는 달랐던 인피니트의 무대를 기억하는 (세련되지 못한) 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EDM 비트의 감각적인 사운드와 시크한 안무를 보면서 퍼포먼스보다는 인피니트 자체를, 보다 정확히는 인피니트가 대표하는 “멋지고 좋은 것”만을 보게 되는 현상에 오히려 죄책감이 든다. 아이돌 스타로서, 멋지고 귀여운 환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이익을 창출하는 아이돌 산업의 논리 속에서 인피니트 역시 그럴 수밖에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그들이 “상품”이 아니라 “아티스트”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출처: 뮤지컬 <인 더 하이츠> 페이스북 페이지

  마찬가지로, 뮤지컬이 언제나 화려하고 멋진 이미지로 가득한 무대로 관객을 한바탕 홀리고 마는, 그리고 막대한 관객 동원력과 값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문화상품”이 아니라, 그 장르 고유의 감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써 감동과 울림을 주고 관객에게 각인되는 “예술작품”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자주 좌절되어 왔다. 하지만 의심을 안고 잔뜩 경계한 채로 단지 인피니트를 보기 위해 관람한 <하이츠>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라틴계 이민자 캐릭터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랩과 비보잉은 어떻게 녹아들었을까, 걱정했던 부분들을 눈여겨보았지만, 보는 내내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인피니트를 제외하고는 실력파 뮤지컬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았고, 그들이 노련한 연기로 납득 가능한 세계를 구축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늘 지나치게 화려하다고만 느꼈던 뮤지컬 무대가 <하이츠>에서는 작품의 배경에 걸맞게 비교적 소박하고 친근하게 만들어져있어서 좋았다. 까칠하고 말이 많지만 속정이 깊은 동네 미용실 원장 다니엘라 역을 맡았던 최혁주 배우는 작지만 다부진 외모와 특유의 된소리가 두드러지는 말투까지 완벽한 라티나latina를 구현해냈고, 주요 여자 캐릭터인 니나를 맡은 김보경 배우는 귀에 꽂히는 발성과 다듬어진 톤으로 뮤지컬의 정석 같은 노래와 연기를 보여줬다. 뮤지컬 무대에 처음 서는 장동우도 본인에게 맞는 가사를 스스로 써서 랩을 해서 그런지 억지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 어쩔 수 없이 김성규의 발성이 듀엣 중 상대역인 김보경의 뮤지컬 식 발성과 두드러지게 대조되기도 했고, 연기가 처음인 장동우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등 인피니트의 연기가 살짝 튀게 되는 순간들은 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비보잉은 아주 짧게만 삽입되고 대부분의 춤은 뮤지컬 특유의 군무로 채워져서, 힙합 뮤지컬을 표방하기에는 랩과 비보잉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았고 심지어 구색 맞추는 정도로만 동원된 것처럼 보였다. 또 그 외에도 음향이나 안무의 사소한 부분들이 내 심장을 가끔 조여들게 했지만, 결국엔 학예회에 참석한 학부모처럼 그저 너그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됐다. 내 아이돌의 학예회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 나는 애초에 바로 그것을 하러 간 것이기도 했다.

  갈수록 많은 아이돌 스타가 뮤지컬에 캐스팅되고 있는 요즘,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그들의 실력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인피니트를 좋아하고 아끼면서도 무대 위의 김성규와 장동우를 보며 그들과 뮤지컬 배우들과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인피니트 팬이 아닌 다른 관객들보다 그 차이에 더 민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 그 자체보다는 그 아이돌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뮤지컬과 아이돌의 조합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무엇보다 뮤지컬 산업은 아이돌 캐스팅을 통해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회차에도 평타 이상의 관객을 확보한다. 나처럼 학예회를 본다는 마음으로 예매하는 팬들은 공연의 이모저모를 뜯어보며 연출이나 작품에 대한 평가에 가혹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 번 이상 관람하는 팬도 많을 것이니, 뮤지컬 산업에서 아이돌 캐스팅이란 괜찮은 수익모델일 것이다. 나도 뮤지컬 자체에는 기대보다는 의심을 안은 채, 작품보다는 인피니트를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에 갔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게 된 <하이츠>는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공연 형식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은 완화시켜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형식의 혁신은 없었고 엄청나게 매력적인 뮤지컬 고유의 예술적 순간도 없었지만, 다음에 또 보고 싶을 만큼 노래와 연기를 아주 잘하는 뮤지컬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보았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우리 애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콘서트 무대나 예능 방송에서는 맏형이랍시고 다른 멤버들에 비해 애교 같은 것을 잘 보여주지 않던 성규가 “기싱꿍꼬또”부터 인피니트 대표 개인기인 전갈춤까지 보여줄 때, 나는 성규가 자신을 보러 온 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우스나비가 복권에 당첨되어 귀향을 앞둔 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울 때, 나는 (비록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했어도) 우스나비를 연기하는 장동우가 귀여웠고, (그 슬픈 감정에 동화되거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장동우가 자랑스러웠다. 다른 무대라면 메인보컬인 성규에 가려졌을 동우가 주인공이라니! 힙합 뮤지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할부 3개월로 예매까지 해가며 봤어도 그걸 봤으니 됐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나를 대중문화의 노예로 여겨도 어쩔 수 없다. 예술이 아니면 어떻고, 길티 플레저면 또 어떠랴, 이렇게나 달콤한데.

2015년 11월 1일 일요일

2015 SPAF 폐막작 <폭주 기관차> - “우리는 폭주하고 있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글쓴이_최희범



2015년 10월 30일, 그러니까 어제 저녁에 스파프(SPAF) 폐막작인 <폭주 기관차>를 보고 왔다. 시작 15분 전 쯤 도착한 공연장 앞에는 2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각각 손에 피켓을 들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한 팝업 씨어터 공연의 검열 및 공연 방해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관계자가 관객 한 무리를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3층으로 올려보냈다. 스파프 공연에서 처음 받아보는 마중 서비스였다. 공연장 로비 분위기는 이전 스파프 공연들에서와 사뭇 다르게 어수선했다. 객석에서는 시위 내용이 적힌 종이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오가고, 웅성거리는 소음 가운데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반쯤 정신 나간 듯한, 자신이 희대의 범죄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기관사와 화부가 열차 전체를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 기관차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스파프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두 대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연기하는 두 명의 범죄자는 음악과 긴박한 리듬으로 그들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기관차의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가속되는 극의 리듬, 그리고 그 안에서 얽히는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모순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말로 이 공연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미안하게도) 앞에 적은 간략한 줄거리 및 배우들이 피아노 연주를 통해 굉장히 시끄럽고 히스테리컬하게 광기를 표현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는 점 외에는 공연에 대해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다. 미숙한 한국어 자막 플레이가 이 공연이 과연 그런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인물들의 심리상태가 “탁월하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하기 힘들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담당자가 졸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을 정도로 미숙했던 자막 플레이는, 얼마 전 본 로버트 윌슨의 <소네트> 공연보다 한층 심각한 수준이었다.

<폭주 기관차>는 대사의 내용과 발화의 리듬이 매우 중요한 연극이었다. 일단 대사가 굉장히 길고 많았다. 또한 작품의 서사 전달과 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주로 대사 내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더욱이 주최측이 강조하는 “긴박한 리듬”은 연주되는 음악의 리듬 뿐 아니라 배우들의 발화의 리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즉 인물들의 말과 연주되는 음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작품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국어 자막 플레이와 배우 발화 간에 긴밀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연에서 자막 플레이와 공연 진행 싱크로가 계속 어긋나는데, 어찌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자막으로 인해 짜증이 치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관극은 흥미롭기도 했다. 반쯤 맛이 간 기관사와 화부가 자기들 멋대로 열차 전체를 폭주하게 만든다는 내용은 묘하게 현재의 시국을 연상시켰다. 이러한 연상은 공연장 바로 밖에서 벌어지는 시위로 인해 훨씬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검열 반대 시위 덕분에 이 공연은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공연은 시위 덕분에 연행을 에워싸는 “축제다운”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위대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앞에 진을 쳤다. 이로 인해 공연장에 들어와서 밖의 상황을 떠올릴 때 이 건물을 시위대가 공간적으로 에워싸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또한 공연 시작 전과 종료 후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시위함으로써, 관객들이 공연장에 들어와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전체 과정이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문화 인류학자로서 제의 및 축제성을 연구한 빅터 터너는 이 같은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통해 ‘리미널(liminal)’한 영역이 형성되며,1) 이 영역은 문화적으로 고정된 형상들이 새로운 것과 결합될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그 영역에 속한 사람은 구별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을 일상과 다른 맥락에서 읽게 된다. 터너는 이러한 특성을 ‘리미널리티(liminality)’라고 부르며, 이는 ‘축제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어제의 공연장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규범들로부터 일시적 해방을 누리는 축제의 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공연장 전체를 감싸는 긴장감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통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왠지 모를 동요가 많은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객들의 관극 경험에 부여된 새로운 맥락은 연극 작품을, 공연장의 분위기를, 다른 관객들의 태도 등을 비일상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구조적 상태를 전복하고 반구조의 상황을 만드는 가운데 상하, 우열, 대립의 장벽을 무너뜨리” 는 것으로서의 ‘축제성’을 경험한 것이다.2)

스파프 공연에서 이 같은 ‘축제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인즉, 스파프는 해마다 나름의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테마가 무엇인지, 그래서 각 프로그램들이 축제 전체의 어떤 맥락에서 기획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공연 관람을 통해서 이러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파프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이 테마라는 게 주최측에게도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각각의 공연 단체, 혹은 작품이 얼마나 유명한지, 유서 깊은지, 혹은 “핫”한지 등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스파프라는 축제에서는 10월 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해외 유명한 작품 및 극단들의 공연을 대학로에서 볼 수 있는 기회로서의 “축제”성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최측의 기획 의도와는 무관할지언정, 시위대가 이 공연에 끌어온 정치적 맥락은 공연 감상의 경험을 보다 ‘축제’답게 만들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스파프는 하지 못하는 것을 혹은 하지 않는 것을 해낸 것이다.

이 작품을 만약 국내 극단이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노스페이스 잠바와 수학여행이 무엇인가를 연상시킨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연 금지되거나 방해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연에서 대사를 다 빼고 배우들 피아노 연주로만 공연을 하라는 식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무대를 노래하다”라는 테마를 가지고 이 축제를 기획했고, 그래서 폐막작에서는 “노래”만 나오고 쓸데없는 “말”은 안 나오는 것으로 기획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 이 극단이 외국 단체였던지라 다행히도(?) 이런 혐의를 받지 않고, 무사히 그들이 기획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어제 자막 플레이의 어설픔으로 관객들의 인내심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것은 적어도 고의적 방해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아무쪼록 오늘 폐막작은 보다 나은 자막 플레이와 함께 무사히 마쳤기를, 또한 보다 대규모 진행된 예술 검열 반대 시위가 작품과 또 한 번 멋지게 협업할 수 있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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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놀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으로부터 빌려온 이 개념은 문지방이라는 의미의 ‘limen’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반 게넵은 전이 의례의 세 국면을 분리-전이-통합으로써 설명하며, 여기서 ‘분리’의 국면은 일상으로부터의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의미한다.

2) Victor Turner, Myth and symbol. Crowell Collier and Macmillan, 1968, p.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