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관객과의 대화 (11월 22일)

김재엽 작/연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 (2014.11.04-30,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11월 22일 공연을 마치고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나눈 질문과 대답을 일부 소개합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김재엽 연출과 두 배우 (오대석, 김원정) 를 비롯하여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와 시인 맹문재 안양대 교수가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좌측부터 김재엽 연출, 맹문재 시인, 김현경 여사, 오대석 배우, 김원정 배우


백석 시인에 나타난 여인 나타샤 처럼 그런 중요한 의미셨을 텐데, 그게 지금 돌아가신 이후에도 엄청난 추억으로 삶의 힘이 되시는지, 선생님과 사셨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얼마만큼 행복한, 사실은 살아내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지금까지의 영향은 무엇인지요.

김현경 여사

김 시인은 하루가 똑같은 날이 없었어요. 매일매일 정말 좋게 말하면 충동적이고 또 그런가하면은 꼭 봄날같이 따뜻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같은 날이 없으니까 감동의 연속이었어요. 시에도 나타나지만 시를 똑같은 영감으로 쓰지 않으셨어요. 꼭 시는 그 다음에 쓰는 시는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시 한편을 쓰면 큰 산고를 겪었다 하셨어요. 시를 한편 쓰면은 초고를 쓰고 난 다음에 나한테, “여편네한테”  꼭 필사를 시켰어요. 원고지에다. 근데 하나, 무지무지 섬세하고 깐깐한 양반이에요. 그렇게 충동적이고, 술도 폭음을 많이하신 양반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쓸 때만은 그렇게나 엄숙했어죠. 딱 옆에다 앉혀 놓고 미리 원고지를 다 준비해놓고, 그 다음에 만년필까지 준비하고, 만년필을 특별히 말하는 건 잉크 빛깔까지도 이 양반을 신경을 씁니다. 잉크 빛깔도 맞지 않으면은 쓰지를 않으세요. 그러니까 그 파이로트 잉크를 사기 위해서 마포에서 충무로 체육관까지 나와야 해요. 그 정도로 준비가 단단해요. 그리고 제가 옆에서 쓰는데 그냥 이거 베껴라가 아니에요. 옆에 앉으셔가지고 내가 그 원고를 보면서 시 제목 쓰고 김수영 쓰고 그 다음 제가 베끼기 시작하면 꼭 한줄 띄고 점찍고 행 바꾸고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거의 다 썼는데 저 같으면 그동안 쓴 게 아까워서 틀린 데만 고쳤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됩니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니까 몹시 힘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니 말하자면 그렇게 엄숙하게 다루시거든요. 돌아가신 지가 벌써 50년이 가까워 집니다. 46주기에요. 저는 46년 동안 반세기를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여편네죠. 그래도 아직도 제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건 47셉니다. 돌아가신 나이가. 그 젊은 나이가 아깝고. 또 하나는 진짜 빈틈없는 공부벌레에요. 공부하는 태도 책읽는 태도 번역하는 태도 시를 쓰는 태도는 생활하고 일치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남편한테 어리광같은 거 부려본 적도 없어요.  그게 용납이 안되니까. 그리고 그때도 그것이 하나도 괴로움이라든지 무슨 생활고로 연결을 안시켰습니다. 그냥 대단한 양반을 둘도 없는 남편을 모신 데는 게 큰 자랑이었어요. 그 당시에 무슨 동창회 같은 모임에 나가면 야 너 학교 때 꽤 허영심도 크고 그랬는데, 어떻게 지금 이러고 사느냐. 닭을 기른다며 이러면서 무시를 하는 거에요. 그게 반발이 되어서. (그당시에는 1960년대만 해도 김수영은 그저 참여 시인이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이라는 걸 잘 인식을 못해요. 그 당시만해도 서정시 청록파 시인이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모든 관념이라든지 서정 같은 걸 다 부인하잖아요. 혹시 시 구절에도 조금 낭만적이고 흐름이 좀 조용하고 그래서 내가 옆에서 베끼면서 아 이게 좋다 하면 거칠게 또 고칩니다. 그 당시에 제가 한 말이 있어요.) 그래 내가 김수영 시인하고 사는데, 김수영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시인이야 이렇게 큰 소리를 뻥 쳤어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40주기가 2008년도였어요. 그때 그 친구가 그 소리를 듣고 감명을 듣고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신문회관까지 찾아왔어요. 신문회관에서 40주기 학술대회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그 말을 다시 확인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참 그런 말을 했지. 그런 긍지로 살았어요. 그러니까 더 없는 감동의 연속이고 정말 나를 이렇게 오늘날까지 지켜주고 또 그 에스프리로 나를 이렇게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거. 그러니까 상식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진짜 대단한 행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 분한테 드리고 싶은 질문은 연극 보면 연출자가 배우들과 고민 많이 하면서 만든 연극 같아요. 준비하시면서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다면 알려주시구요. 연출자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 두개가 있는데, 지난번 알리바이 연대기 때도 재엽님 역할을 정원조 배우가 하셨고, 이번에도 또 하셨잖아요. 혹시 굳이 재엽님의 역할을 정원조 배우에게 맡기시는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하고요. 대사중에 “재엽아 너는 연극을 왜 하냐”이런 대사가 있는데, 이번 연극을 준비하시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원정 배우

저희가 1월에 워크샵을 했을 땐 저도 시대적 배경을 많이 알지 못했어요. 그 당시엔 “거미”라는 시가 저한테는 되게 와닿았습니다.

오대석 배우

대답을 하기 전에 여기 다 계신 분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어보셨을테고 좋아하시니까 남아계실 것 같은데요. 꼭 발화해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꼭 정답은 없으니까 그날 느낌대로 시를 꼭 소리내어 읽다보면 저도 이번에 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는데, 매일 매일 달라요. 제가 시를 계속 하잖아요. 저의 대사들은 거의다 산문에서 나온 말들이거든요. 이걸 매일 계속 발화를 하다 보니까 그때마다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최근엔 “저 하늘이 열릴 때”가 그런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집에 돌아가셔서 시를 한번 그냥 소리 내서 자기가 가장 편한 곳 있잖아요. 샤워하다가 아니면 술 드시다가 정말 그 시를 만끽을 한다는 건 눈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말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오거든요. 그게 여러분들 안에 김수영을 찾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현경 여사

남편의 작품 중에서 최고 작품 같다고 생각하는 건 “도취의 피안”이라는 시에요. 그게 정말 시를 쓰는 시의 방법론이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에스프리라든지 이런 것이 대단히 높은 시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이미지가 추상적이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시가 감동이 큰데 정말 누가 흉내낼 수도 없는 정도의 시라 생각하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냐 했더니, 이건 이 양반이 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향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사회주의라는 게 인도주의에서 왔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양반이 의용군을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돌아와서 정말 사경을 헤매었어요. 정말 죽을 고비를 두 번 이상 넘기면서 살아남은 게 신통하죠. 물론 참여시도 많고 “풀”도 있고 하지만 정말 시작으로서 시 자체로서 평가 받을 때 제가 제일로 생각하는 게 “도취의 피안”이구요. 그리고 또 제가 그렇게 47세에 요절하셨지만 좀 아깝죠. 지금 4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젊은 나이와 그 공부 벌레, 진짜 시인입니다. 학문도 깊어요. 철학 서적도 칸트서부터 하이데거까지 원서로 읽으시거든요. 노는 걸 못봤어요. 늘 책만 들고 있었지. 그렇게 간단없이 열심히 공부하셔서 그런지 아쉽다고 하는 양반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더 좋은 시를 썼을까. 또 시절에 있어서도 경고를 많이 하셨잖아요.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은 지금 읽어도 누구한테든지 영원한 시인에 있어서는 교과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서도 제가 생각할 때는 초기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쓴 시 하나하나가 다 완성이에요. 미완성이라는 건 없습니다. 하나하나 다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시인

저는 "눈"이라는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눈은 김수영 전집에 세 편이 있어요. 처음에 있는 시.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데고 기침을 하자. 눈 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을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자.” 라는 시인데요. 제가 20대 때 김수영을 처음 보면서 저하고 시 같이 습작하던 친구가 저보다 이 시를 먼저 외워서 멋있게 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젊은 나이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80년대 상황이니까요. 뭔가 이렇게 망설이고 눈치보고 문학을 한다는 저도 뭔가 이렇게 어떤 사회적 발언을 했을 때 나에게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이런 걸 망설였을 때 친구가 이 시를 담담하게 낭송하는 걸 보고 제가 시쓰는 방향을 새롭게 가져서 외웠던 시입니다. 눈은 기침을 하자는 젊은이 다운 부르짖음도 좋지만, 김수영 시는 철저히 관념을 배격한 시여서 눈이라는 게 어떤 관념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을 보면서 김수영 자신이 눈에게 자신의 마음을 동화 내지는 투사한 인식의 산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 시를 문학사상에다 내가 읽은 한편의 시에서 그 때도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김수영의 이 시를 읽으면서 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시적인것 이런 것이 아니고 자기 눈으로 보고 느끼고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상징화할 수 있는 것 그런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를 준 시입니다.

김재엽 연출

저는 작품 쓰기 위해 여러가지 시와 산문을 읽게 됐는데, 희곡을 써야 하는데 자꾸 시를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한 때가 많았습니다. 연극에도 나오는데 제가 대본을―   보통 때도 늦게 쓰는 편이긴 한데―많이 지체가 돼서, 과연 김수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많이 못 찾은 이유 중에 하나도 시를 한번 씩 읽고 나면 약간은 정지상태가 옵니다. 똑바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시인이 계속 이렇게 자기 삶에 대해서 투명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많이 나와서 그걸 타인을 보면서 자기를 반성하고, 다른 사물을 보면서 자기 마음을 투영하는 힘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강가에서”라는 시가 있는데, 자기 보다 남루해보이는 어떤 사내를 보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생의 어떤 건강한 기운은 도대체 뭘까. 자유롭고 그럴 수 있는 힘은 뭐지 이런 걸 반추하는 건데. 연극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서 이렇게 곁눈질 하면서 만들어내는 건데 거기에 내 자신은 얼마만큼 정직한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던져줘서 고민만 하다가 공연이 이렇게 배우들 몫으로 고스란히 올려진 것 같아서 상당히 송구스러운 그런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멋있게 생긴 정원조라는 배우를 캐스팅하게 되었구요. 정원조 배우가 사실은 두번째 제안할 때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는데, 흔쾌히 좋아해주었고 서로 오픈한 상태에서 얘기도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친구라서 계속 해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생각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얘기를 새롭게 해볼 생각입니다.

저는 시에 대해서도 문외한이고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인데요. 남산에서 하는 연극을 자주 챙겨보고 있는데, 작가님에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시와 김수영시인에 대해 잘 모르는 제 또래 관객층에게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싶었는지 그리고 두 번째로 작품 중에 김수영 시인과 강신일 배우의 마지막 장면이죠. 철조망 뒤편에서 마지막으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변한게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반세기가 지난 이 시대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작품 초반에 광화문 광장이 나오구요. 광장과 청와대 앞을 시를 읽으면서 걷는 행위는, 지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을 때도 우리는 결국 동시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는다면 그런 모습일 거 같다는 측면에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소통을 해보려고 하는 이유가 지금 현재 많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갈등들이 50년대 60년대 김수영 시인의 시대들의 갈등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미루고 미루고 못본척하고 지나쳐 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것들이 분단이나 한국전쟁 언론의 자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런 부분들이 시인이 몸부림치면서 얘기했던 부분들인데 사실은 우리는 50년이 지나서도 그때 당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혹은 시인이 온몸으로 괴로워 했던 예술가의 모습들이 우리는 어떤 부분은 간과하면서 내가 예술하려고 하는 부분만 생각하고 있지 세상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메시지라고 할 건 없지만, 이 시대 후배들 혹은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나는 모르고 있다. 혹은 모른다라는 사실 때문에 위축되어서 말 못하고 있는 게 많은 거 같은데,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것 만큼 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느냐, 사실은 그게 큰 문제인거 같고요. 알아야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 궁금한 건 또 물어볼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시인한테서 제일 많이 발견했던 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라기 보다도 내 자신한테 얼마만큼 솔직한지 내가 정당하지 못한 거에 대해서 내가 얼만큼 괴로워 할 줄 아는지 자기 양심의 문제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고 혁명을 꿈꾸는 것이 내 양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제일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혁명이란 말도 어릴 때는 사회적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뭔가 부담스러웠는데, 사실은 그게 내 자신을 내가 속이지 않고 지내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맹문재 시인

우리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랑 격변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나가려고 했던 시인이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김수영 시인이 온몸으로 지향했던 건,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적 모더니티를 추구했던,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외적인 환경들, 분단이라든가 언론의 자유라든가 기존의 유교적 인습이라든가 제도 이런 것들에 대항하려 했던 거 같아요. 오늘 김현경 여사가 여편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하나의 단어를 통해서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면모를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수영 시인이 여성을 일컫는 호칭 중에서 여편네가 가장 많아요. 여인 여성 그녀, 영자 등의 구체적 이름도 있지만, 여편네가 제일 많아요. 이 여편네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해서 여기 앉아계신 사모님을 보고 시에서는 여편네라 했지만 시인은 여편네를 하나의 시적인 상징체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만용에게”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는 양계장을 하면서 경영 적자가 나니까 여편네가 김수영 자신에게 나무랍니다. 계란 값이라든가 모이값을 가지고 나무라는데, 거기에 대항하는 시거든요. 나는 여편네에게 질 수 없다라고 외치니까 언뜻 그 시를 읽어보면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사모님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때 여편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인 것이죠. 근데 이 자본주의라는 게 우리가 속물근성으로 따라가는 그런 근대화를 이루어선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근대화여야 하는데,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상으로서 여편네라고 칭한 거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다른 언어로 예를 들어 사장놈이라든가 이런 말도 있는데 왜 여편네라고 했을까라는 것이 궁금한데, 바로 그런 점이 김수영 시인이 공부를 많이하고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는 나름대로의 전략이죠. 왜냐면 자본주의라는 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에 대항하는 전략도 단순해선 안되요. 사장 이렇게 쓰면 단순하잖아요. 사장이 어떻다라는 건. 여편네라는 말은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친밀하죠. 부모 형제보다도 친밀한 말이면서 또 여편네라는 말은 고용주와 고용인처럼 계약관계로 되어 있어요. 이혼을 하면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편네라는 말은 아주 친밀하면서도 아주 객관적인 언어인 거에요. 그랬을 때 여편네라는 말을 통해서 그 속성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침투되어 있어요. 우리를 속물근성으로 만들어 주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옭가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칭할 수 있는 말로 여편네라고 하는 것이죠. 그 대항체로 객관화하니까 그 대항체로서 적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언뜻 읽으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김수영 시인이 그렇게 자유정신을 지향하고 근대적 시정신을 가지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반여성주의적 언어를 사용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김수영 시인은 여성을 비하하려 했던 게 아니라 자본주의 속성에 물들어 가는 자신에 순응하지 않고 대항하기 위해 여편네라는 호칭으로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죠. 물론 여성주의 입장에서 보면 잠재된 내면의 남성주의적 면이 있다든가, 어디까지나 그것은 반여성주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지나쳐 보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김수영 시인은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고 그것이 관념이나 추상화가 아니라 지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처럼 철저히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성찰을 통해서 나가려고 했던 점에서 구체성을 띄고 시적인 힘을 받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수영의 시어들은 명사들이 많지만 여운이 많이 남고 인상이 짙게 있는데, 그것은 김수영 시인이 쓴 시어들이 명사로 화석화된 게 아니라 다 움직이는 동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한 단어가 시대에 저항하려고 했던 근대화를 지향하려고 했던 산물이 아닐까 그렇게 봅니다.

직접 한번 확인을 해봐야 겠습니다. 그 사모님, 댁에서 김수영 시인이 사모님을 부를 때 여편네란 말을 한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여사

집에서 여편네 소리는 안해요. 여보 소리 제일 많이 한 거 같고요.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죠. 정말 가슴으로 존경할만한 대시인입니다.

 요즘 언론의 중립성도 문제지만 그런 것들이 예술에까지도―광주비엔날레나 부산 국제영화제등 처럼― 침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을 준비하시면서 그런 고민은 없으셨는지요. 그리고 제목이 연극에서는 “내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라고 되어 있는데, 제목을 왜 지금의 시 구절로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어느날 고궁에 나오면서”가 제일 강력한 모티브를 주었던 거 같아요. 작은 일에 분개한다는 게 서로가 조금 양립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분개한다는 건 솔직한데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고 해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질문이 저는 결국 그게 그냥 답인 거 같았거든요. 그 말 자체가. 자기 모습에 대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 문장에서 다 나와버린 것 같아서 그렇다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한테, 나한테는 있는가. 부제는 그런 면에서 붙여 봤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뭐 이 정도 작품하는 건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요새는 압박을 가하거나 할 때 대놓고 하지 않거든요. 지원금 신청하면 떨어뜨린다든지 6개월이 지났는데 기억하고 있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어떤 일이 있겠죠. 있을 거 같고. 지금도 연극계에서는 연극인들이 세월호 관련해서 천막 농성하고 단식을 길게 하는 바람에, 뭐 꼭 그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예술위원회 쪽에서 35년동안 멀쩡하게 해왔던 (서울)연극제를 대관 심사에서 떨어뜨린 일도 있습니다. 나란 되게 소심한 사람입니다. 대범하게 잡아가든지 이러면 확 눈에 띄기도 하고 관객도 좀 많이 올 것 같은데,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조선 일보 기자들도 보고 가셨는데 기사는 안써주시고. 사람들한테 대화할 수 있는 브릿지(bridge)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하자고 충동질하거나 제가 뭘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전혀 아니구요. 오히려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서 극장이란 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면, 우리도 사소하게 뭔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정도의 차원이었지 이 작품이 대단한 걸 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희곡아닌 문학작품들이 연극무대에 많이 올려지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소설을 연극화하고 또는 소설을 낭독하는 공연도 있고, 이번엔 시가 중심이 되는 그런 공연인데, 극작가이자 연출을 겸하시는 입장에서 극작가로서 시가 자신에게 주는 가능성 또는 무게감, 반대로 연출가로서 시가 가진 가능성들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소설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소진 소설가님의 『장석조네 사람들』이란 작품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내러티브에, 영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시가 오히려 연극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김소진 소설가의 작품은 대사가 구어체로 방언을 사용하셔서 언어 자체가 그냥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연극이 되었던 거 같아요. 이번에 시 같은 경우는 세상이 하도 회귀를 하니까 정치라든지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에서 너무 옛날 목소리가 나오니까 저희들 세대만 하더라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목소리 사고 방식이라서 여기에 대해 과거의 우리 선배 선생님들은 어떻게 외쳤고 어떻게 대응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서 옛 시인들의 시를 읽어 봤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부담스러운 목소리를 가졌던 어르신들, 접어 놓았던 시인들을 다시 꺼내서 봤는데, 그때 부담을 느꼈던 건 거기서 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그들이 그 목소리를 내서 일종의 스스로 존재하려고 애썼다는 그 모습이 그때는 단지 하나로 어떤 수양의 관점에서 보였다면, 지금은 내가 하루를 살더라도 내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그 목소리가 되게 실존에 걸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가 좀 읽히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는 읽지 못했던 시들이 이제는 읽히는 걸 느끼면서 시가 만약 무대에서 발휘된다면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좋은 배우님들하고 같이 시가 공감대를 울릴 수 있으면 어떤 드라마적인 구성이나 잘 만들어진 연극 이런 거 말고 그냥 그 목소리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에게 동시대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 중에서도 김수영 시인의 시론이 소개되었습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쓰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출 선생님께서는 이 몸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고, 오대석 배우님께 그렇다면 연기라는 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재엽 연출

全존재라는 말도 많이 하지만, 존재 그 자체인 거 같아요. 머리나 생각을 하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 자체를 구별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사실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말하는 것 처럼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 시를 쓴다는 것이고 예술 한다는 것도 사실은 예술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예술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더라구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상황을 겪었다라는 느낌이거든요. 과연 진짜 전존재로 온몸을 받쳐서 작품을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그 말 속에서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오대석 배우

가장 중요한 기본은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기초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연기에 대한 생각은, 우선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똑같다라는 건 예를 들어 인간의 성격이 백만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똑같은 퍼센테이지로 태어나는 거죠. 흔히 우리가 보고 있는 나쁜 성질, 좋은 성질들이 백만 가지라 해도 모두 똑같이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퍼센테이지가 옮겨지는 거죠. 그후에 사회적으로 해선 안된다는 게 있으면 그 비율을 바꾸게 될 거고, 물론 바꾸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그래서 지금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전제하는 건 어쨌거나 사람은 다 똑같은 거에요. 우리가 길을 가다가, 저는 남자니까, 섹시한 여자를 보고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나서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한다는 것에서 내 안에 그 성질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단, 내가 사회적인 제한에 따라서 그런 걸 감추고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런 전제하에 제가 생각하는 연기를 하는 방법은 첫번째로 절 믿는 것인데 (예를 들면 살인자 연기를 하려면) 저도 살인자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러면 살인자 역할을 맡을 때 저에게 남아 있는 0.0001 프로 남아 있는 이 살인자의 성질을 배우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프리즘을 통해서 백프로로 만드는 거죠. 백프로로 만들면 제가 무대에서 살인자가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공연이 끝난 다음에 분장을 지우면 그 프리즘을 통해서 다시 나로 돌아오게 되는 건데, 제가 후배 배우들이나 선배 배우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의 유일한 면죄부의 공간이 종교가 아니고 무대라는 겁니다. 여기서는 역할에 따라 살인을 잔인하게 할수록 박수를 받게 되더라구요. 이 시작점은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만큼 사람들을 믿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제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키워서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되게 극단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에 그분들이 그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하고 나서 길을 잃어버려서 잠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시잖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중간과정의 프리즘을 좀더 잘 끊임없이 연마하고 있다면 이 (프리즘을) 오고가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녹취 정리 임승태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사물의 반란’: 문화역서울284 <최정화-총천연색> 그리고 국립현대무용단 <불쌍>

이흔정의 DRAMATIC.CITY

전시 <최정화-총천연색>

여전히 바쁘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유독 쓸쓸한 서울의 가을, 문화역서울284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꼭 닮은 전시가 열렸다. 최정화 작가의 <총천연색(總天然色)>이다. 그는 누군가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시선’을 주지 않으면 지나치거나 버려질 것들로 꽃을 피워냈다. 편하게 말하자면 ‘잡동사니’들로 말이다. 그래서 처음 전시를 보면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든다. 너무 흔한 플라스틱 접시, 빗자루, 장난감 왕관 같은 사물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그럴싸한 작품명으로 조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기 보다는, 작가처럼 세상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열심히 보태어 감상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았다. 애초에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든 사람, 사는 사람, 선물하는 사람, 버리는 사람, 그걸 다시 주워오는 작가까지 각자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 해본다. 그러자면 많은 사람과 삶과 이야기가 끌려 들어온다. 어렴풋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간의 무수한 관계와 삶의 역동이 느껴진다. 이렇게 ‘별게 아닌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관객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꽃의 만다라>
 이렇게 일상적인 사물들 혹은 재활용품을 이용한 작품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미술관이라는 제도 혹은 상징적인 공간에서 유명한 작가가 한 것이라면 뭐든 예술이 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되물어보자. ‘예술이 별거 아니다’라는 낮은 시선을 취한 유명한 작가의 작업이 우리의 잡다하고 조악한 일상을 다시금 소중하게 바라보게 하지는 않을까. 사실 전시된 물건 중에는 딱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다소 흉측한 것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형광색과 원색의 물건들을 계속 보고 있자면 아름답기보다는 현기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또 우리의 모습과 닮은 것 같다. 실수와 허점투성이인 스스로가 때로는 미워지고 쳐다보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따뜻하게 봐주면 어떨까. 미움과 분노, 자책과 실망이 무엇보다 쉬운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꽃 입니다’라는 작가의 말은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한 외침이니까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 <불쌍>

전시를 보고난 며칠 뒤, 최정화 작가의 설치 작품을 전시장이 아닌 ‘무대’ 위에서 만났다. 국립현대무용단과 최정화 작가가 ‘콜라보레이션’을 한 것이다. 이 둘의 만남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을까? 전시장에 있을 때와 무대에 있을 때 그 작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재치 있는 공연 제목 <불쌍>은 종교적 상징물인 ‘불상’이 여러 세대와 문화권을 이동하며 일상 속에서 고유의 신성함을 잃고 변형되어 속되게 사용되는 ‘불쌍’한 처지에 놓였음을 말하는 언어유희이다. 이 공연이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불상의 변형은 여타 문화, 전통, 종교, 인물 등의 ‘세속적인 상품화 및 변형’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공연에서조차 불상은 불쌍하게 또 하나의 ‘기호’이자 ‘은유’가 된 것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프랑스 파리의 ‘부다 바(Buddha Bar)’
<사진출처: Buddha Bar 홈페이지>

<불쌍>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유쾌했던 부분은 공연 초반부에 만들어진 ‘콜라주’였다. 무용수들은 동서양을 막론한 온갖 종류의 문화 아이콘을 무대에 끌고 나오고, 그것들을 무용수의 ‘움직임’을 통해서 콜라주한다. 슈렉, 아톰, 심슨 등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예수상, 불상 등의 종교적 상징물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싸우고, 키스한다. 불상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무대 위에서 하나의 ‘소도구’ 혹은 ‘장난감’이 된 것이다. 머리에 이고, 팔에 끼고, 손을 쓰다듬어 보고, 무릎을 베고 눕고. 무용수들의 손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불상과 예수상 등의 종교적 상징물들은 종교적 의미, 신성함, 아우라 같은 것은 모두 잃었고, 말 그대로 ‘가벼워’ 졌다. 무대에서는 조명이라도 받고 있지만 이 무용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저 불상들은 얼마나 굴러 다니고, 온갖 방식으로 수모(?)를 겪었을까?

동서양의 상징물을 콜라주하는 것은 시각미술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무대 위에서 무용수의 몸동작으로 콜라주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만들어냈다. 전시장이나 일상에 놓여있을 때와 달리, 무대 위에서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 움직임, 리듬, 속도감이 더해짐으로써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가 오브제에 덧입혀지고, 역으로 오브제의 성격과 영향에 따라 사람의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상호작용이 생겨났다. 사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몸’과 ‘오브제’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질수록 불상들은 더 초라해졌다. 움직이는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고정된 조형물의 대비 때문이기도 하고, 무용수들이 조각에 신체를 겹쳐서 발을 빨리 움직인다든지 하는 동작을 함으로써 우스꽝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서로 전혀 연관성 없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사이에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관계들이 생겨나고, 달라지고, 없어졌다. 예를 들면 캐릭터 가면을 쓴 무용수들의 몸이 엉키고 경합을 벌이면서 서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지거나 서로의 몸에 매달림으로써 위아래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이를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만드는 지속적이고 단일한 관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고 서로 교환되는 유동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무대에 특정한 소도구나 오브제를 등장시킨다면, 여기에도 ‘무용수’나 기타 요소들 못지않은 그 오브제만의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불쌍>에서 등장하는 최정화 작가의 설치물들은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 최정화 작가는 이번 전시 기간에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과 함께 소쿠리를 이용하여 빛을 조절할 수 있는 거대한 등을 설치했는데, 그 형형색색의 소쿠리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었다. 무용수들은 소쿠리를 ‘던지고, 몸에 쌓고, 징검다리처럼 밟고 지나가기, 무대에 쌓았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등’ 하나의 오브제를 한 가지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로써 오브제의 성격이 풍부해졌고 동시에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리듬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도 그 자체로 화려한 오브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무용단

스티로폼 도시락을 연결해 만든 무대 배경도, (콜라보레이션을 위해서 억지로 무대에 맞지 않는 오브제를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등퇴장로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공연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조명이나 프로젝션된 영상 없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스티로폼 도시락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설치되어 영상이 투사되었을 때 입체감을 만들어내었고, DJ의 음악이 어우러져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상의 사용을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오브제만큼이나 무술, 브레이크 댄스 등 여러 가지 다른 움직임들이 안무에 활용되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공연으로 직조되기보다는 나열만 되는 듯한 인상이었다. 재치 있는 제목과 ‘하이브리드 놀이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으나 잘 놀았다기 보다는 경직된 느낌이었다. 라이브 디제잉이 무대 한 구석에 있으면서 디제잉 다운 면모를 살리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국립무용단이지만 조금 더 젊은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그래서 관객도, 비록 앉아있지만, 신나게 놀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은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오히려 서로 독이 되어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데, 그래도 <불쌍>은 무용과 시각미술, 음악, 의상 등의 콜라보레이션이 서로를 보완하며 따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새로움’을 만들어 냈다. 더욱 과감한 시도를 기대한다.

공연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swQo6TQFj28

*이 글은 문화역서울284 모니터링에 게시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