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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월요일

7번국도 단상

임승태

  무대 위에는 자동차 한 대가 해체되어 있었다. 뼈대를 앙상하게 드러낸 메인 프레임을 비롯하여 시트와 같은 큰 부품들은 뒷무대 구석에 있고 나머지 작은 부품들은 무대 바닥 전체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는 조명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무대는 무언가를 제시하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미지를 스스로 떠올리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직 아이’ 그림과 같다. (지나간 유행을 비유로 든 것에 대해 젊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공연에서 직접 사용하는 가장 주도적인 이미지는 길이다.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여러 장면의 배경이 되는 7번 국도, 그리고 인물과 인물이 만나고 헤어지는 여러 상황 속의 길이 (특히 조명을 통해) 무대에 그려진다. 무대 바닥의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 내는 격자를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그들의 절제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정해진 길로만 가다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체스판 위의 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크고 작은 기계 조각들의 배열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른 이미지를 소환한다. 지영이 이야기를 할 때면 직접 언급은 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공장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혹은 그 반도체가 장착된 전자 기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주영이 이야기 때에는 밥먹으러 갈 때도 맞추어야 하는 군의 대오가 떠오른다.
  하지만 텍스트가 감추고 있던 모든 죽음이 드러나고 나면 앞서 일었던 기계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가져가기 어렵게 된다. 조각난 자동차의 잔해는 어느덧 마치 생명을 다한 유기체가 서서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품들이 무작위로 놓여 있었다면, 혹은 어느 순간 대오가 헝클어진다면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전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무대 위에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만지거나 들거나 옮길 법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8년 낭독극을 못 본 입장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공연은 거대한 무대 오브제 위에서 벌어지는 낭독극 같은 인상을 준다. 배우들은 부품들 사이를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고 나가며 거의 변함없이 부동 자세로 대사를 관객에게 전달했다. 격행대화(stichomythia)의 향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양의 대화가 오고가지만, (의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배우들이 고함치듯 내뱉는 대사들은 그것이 극적 대화이길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단적인 부동성이나 배우들의 절규, 그리고 사이사이 긴 침묵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아는 관객에게 희생자 및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단한 방식이었고,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연극에서 ‘연극적 재미’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관객을 힘들게 만드는 선택이기도 하다. 지루함, 피로함을 토로하는 관객 반응도 적지 않고, 나 역시 공연 후반 5분에 한번씩 핸드폰을 열어본 한 관객의 ‘관크’를 당해야 했다. 최소한 지난 5년간 연극이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왔고 이번 작품은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참사와 연극은 정확히 반대되는 사건이기에 전자를 후자에 담는 시도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조금 더 긴 호흡이 필요해 다음 기회로 미룬다.

7번국도
2019.4.17~2019.4.28
남산예술센터
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95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이예은, "깨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감각’에 대해서"

<처의 감각>
고연옥 작
김 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2018년 4월 13일

친화력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서사로 난해함이 개입될 줄 알았는데 작품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다방면의 친화력을 발산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 공간 속 관객들의 마음이 열릴까 궁금해 하며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합심하여 시종 열심히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더욱 정확히는 ‘생명체’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은 ‘곰’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에 국한되어 민족적인 정서를 그려내지 않고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진정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를 채워낸다. 근원적인 생명성에 대한 명상을 지향하지만 정작 작품의 주된 내용은 각자 다른 곳에 이상을 품은 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 현실을 얼떨결에 (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맞이하게 된 남녀가, 그 이상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차적인 현실을 부단히 열심히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한 부부의 공허와 열심. 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가능한 세계상을 아주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예상된 틀 없이 풀어낸다. 이를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어떠한 삶도 흘려버릴 수 있는 여자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현실도 참아내야만 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지위에서 가족-됨을 풀어내는데, 이러한 시선이 매우 보편적인 서사의 미덕을 획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떠한 순간에도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어떠한 담론으로도 환원하지 않으려는 정성을 보여준다. 비록 엔딩에서 남자는 이상을 향해 떠나가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떠나가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는 뚜렷한 결론을 보여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결말은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서 그다지 확고한 지위를 가지지는 못한다. 작품의 전반은 그럼에도 열심이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이었거나 그 생 안에 들어 차 있던 공허와 어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

남자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되는 정성은 동등하나 이 둘에 부여된 서사의 결은 다르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아 피어오르는 인물은 작품의 제목(‘처’)으로 내세워진 여자가 아닌 남자이다. 마음에 품은 이상은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있으나 구차하고 치열하게 살아내 보려는 남자(백석광 배우 分). 그가 갖지 못한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은 비현실적인 분장과 액팅으로 치장된 코러스 중의 한 명으로 설정되었기에 비록 그것이 진실한 생의 갈망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가 품은 미지의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명하리만치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 생생함은 작품의 결말부에 터져 나오는 그의 독백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동굴에서부터 서서히 세상 밖을 향해 나오는 동선을 보여주듯, 칠흑처럼 까만 조명 에어리어(area)에서 서서히 밝아져 오는 공간으로 진입하며 폭발적으로 “도망 칠거야”라고 외친다. 이 한 마디의 대사에는 그가 상실한 어떤 다른 곳에 있을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살아내 보려 하는 초미시적인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이 모두 한꺼번에 전달된다.
  남자의 생생한 묘사는 최순진 배우 分의 경우에도 돋보였다. 가련하리만큼 끔찍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맹렬한 욕구의 포악함까지, 푸념에서 애원에서 폭력으로 발전, 아니 변질, 아니 폭로되는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진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스펙트럼. 이것 역시 한 절망적인 인간의 생생함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장면을 도사리는 한 인간의 파장은 버릴 것이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생함이란 동물의 생명성과는 달리 이리도 교묘하고 책략적인 잔혹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여자는 살아있는 인물도, 그렇다고 상징화된 어떤 의미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는 경험치인 곰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곰과의 재회를 생의 간절한 열망으로 품은 채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후 남자 인간과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또 다른 남자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큰 흔들림 없이 곰과의 사랑을, 곰과의 사랑에서 얻은 반인반수의 아이를 상실한 기억을 생의 중심에 두며 그 부재감을 대체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남자 인간에게서 낳은 다른 아이이며, 이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일로써 자신의 모든 생 의미를 충족시키려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백석광 배우 分-는 이 여자의 현실화된 버전의 인물이다. 그는 곰과의 사랑이 어떤 다른 인간 여자와의 사랑으로 대치된 이 여자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이 작품은 보다 현실적인 남자의 서사를 통해 여자의 서사를 관객에게 체감될 수 있는 것으로 병행시킨다.)
  여자에게서 감각되는 것을 굳이 단어로 설명하면 희미하지만 인간과 인간 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하고 은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대인 모성일 것이다. (작품에는 이 여자를 모성의 상징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시각들도 존재한다. 여자는 공연 내내 시종 한 명의 딸로서 호명되기를 강요당하는 것, 정작 그녀의 어머니는 초자아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제시되는 것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듬고 있는 모성이란 종국에까지 가서 살아남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능적인 버팀목으로 주제화되지도 않고, 신화적으로 비약되지도 않는다. 단지 동물적인 숨과 피처럼 공연의 전반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정한 주제나 상징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외려 공연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그릇처럼, 하나의 공간처럼, 하나의 숨결처럼. 여자는 물처럼 어떤 공간 속의 공기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마음을, 혹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어떤 갈피를 떠돌며 흘러가듯 존재하여서 극을 보는 내내 잡혀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여자는 관객에게 공감되거나 심지어 낯설어지지도 않는데, 이는 인물의 의도적인 공백화 혹은 부재화라고 감각된다. 여기에는 무용수로서만 무대에 서 온 윤가연 배우의 관습화되지 않은 모든 몸짓과 표현의 몫도 분명히 있었다. 이 배우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몸짓과 발성과 표현들은 ‘연극’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곧잘 설명이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관습적 표현들을 거세시켜버린다. 작품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정작 빼곡하게 들어 차 있던 남자 캐릭터들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어 차 있던 작품의 골격들은 희미해지고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기억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공간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존재 자체이다. 실로 작품에서 ‘처’는 부재하며 오로지 ‘처’를 향하는 모든 뜨거움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하는 ‘처’의 감각이 공연의 전반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공연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도 주제화되거나 신비화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그래서 추앙되지도 강조되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존재했던 것이 조용히 바라다 보인다.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작품 어딘가에 무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을 준다.

공간성

  동굴에서 만나 산장에서 잠자리를 가진 남녀가 이제는 집이라는 현실 공간으로 내려 와 부부 생활을 시작할 때 텅 빈 무대 위에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무대 바닥의 한 가운데가 전체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제 안과 바깥으로 구분된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돈을 벌러 나가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적 현실 무대가 공연의 무대 위에 들어차는 것이다. 경계 없던 땅에 구획선이 생기자 고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전체의 땅은 힘을 잃고 그저 구획선만이 삶의 근거가 되는 이 헛헛한 삶의 사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또 이런 구획선이 생기자 배우들이 객석 안으로 난입하거나 무대 가장자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명확한 도발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처럼 구획선 안에서 벌어졌던 삶을 자연의 힘으로 깔아뭉개듯 다시 무대는 육중하게 하강한다. 흙에서 난 인간이 다시 흙이 되어 돌아가는 순간이다. 재에서 재로. 이 인간 보편의 신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무대의 상승과 하강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열고 닫는 박력 있는 무대 연출이다. 그 거대한 판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 동안의 시간, 그리고 잡음 섞인 움직임의 사운드가 많은 서사를 대신한다.
  장면들을 만들 때 남산예술센터 특유의 공간성이 빛을 발한 대목이 있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성이라 한다면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모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데 쉽게 바라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아무리 객석이 만석이 되어 관객들이 빼곡히 차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몇 초 만에 낱낱이 발견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렇게 객석에서 객석이 잘 들여다보이는 시각성 덕에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객석의 공간으로 진입을 하는 순간에는, 여느 극장에서라면 단지 일차원적인 경계 넘기에 머무를 이 동선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최순진 배우가 객석으로 돌진하여 객석 한 가운데의 열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말 외로워 죽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정말이지 이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멸할 것만 같이 외로운 한 개인의 사투를 보여주는 듯했고(심지어 리어왕의 미친 외로움이 보이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의식하면서 무대의 끝과 끝에서 대화를 나누는 백석광과 그의 옛 여인 장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라는 환상적인 모티프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밖에도 잦은 조명의 변화로 무대와 객석이 율동감 있게 하나가 되었다가 서서히 분리되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의 관극을 하자니 한낮의 운동장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분을 느꼈다. 극장이 지닐 수 있는 공공성, 그 역동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젊음

  작품은 결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두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이지만 끊임없이 쇄도하는 코러스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 배치된 정형화된 극 구조를 구태여 에피소드 식으로 교란시키려 노력한다. 각 챕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시작케 하는 코러스의 재기발랄함과 챕터와 챕터 사이의 입체적인 전환들. 코러스들은 드라마적 구조를 나열적 구조로 해빙시키고 다시 나열적 구조를 드라마적으로 몰입케 하는 흔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인물과 내레이터는 물론이고 한 배우의 몸체들이 되기도 하고, 공간과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 바깥으로 나와 연극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가 연극 자체가 되기도 하는 이 풍부한 코러스들! (17년 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던, 늙지 않는 이수미 배우의 기개에 박수를 보낸다.) 텅 빈 무대 공간을 현란하고 소란하리만치 가득 채운 음악과 조명과 코러스들의 무용적 합(合)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상상력이 낭자함에도 모든 표현들이 닫혀 있지 않고 개방성과 건강함과 귀여움을 내포할 수 있는 힘. 작품을 받아들이기 쉽게, 즐기기 쉽게, 응원하기 쉽게, 신뢰하기 쉽게, 사랑하기 쉽게 만드는 이러한 힘은 많은 부분 코러스들이 만들고 있다.
  실로 이 공연은 무용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이유는 율동감 있게 공간을 연출해서만도 아니고,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해서 윤가연 배우와 백석광 배우가 코러스들과 함께 연극임에도 무용에 더욱 가까울 정도의 완성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용적이라는 인상은 연출자의 열려 있는 상상력 덕분이다. 연극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연극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개방성이 돋보이는 연출. 과도한 연극성을 추구하는 연출자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배타적 숭고함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젊음의 탄력성으로 느껴졌다. 튕겨져 나올 것 같이 기운차고 기분 좋은 표현과 표현력. 그렇다고 빤히 ‘나 젊다’ 식의 선언을 함으로써 자칫 ‘어쩔래’ 식의 도발적 표어를 내거는 것도 아니다. 으스대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으며 숭고한 가름막을 쳐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보지도 않는 이 상큼함. 아니 이 솔직함. 아니 진솔함. 젊은이다운 기상으로 감각되는 이 진솔함.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 들어 차 있는 명랑하고 성긴 기운들. 오색 미러볼이 만드는 바닥의 문양과 예쁘게 반짝거리는 빨간 알전구 등,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듯한 재미있는 음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가는 두 남녀. 사랑도 당위도 책임감도 없이 취해버리는 그 밤의 현실을 이토록 귀여운 환상으로 접근하다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귀엽고 무의미한 순간으로 인해 그토록 녹록치 않은 현실을 길게 길게 살아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한 이러한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럴 법하다. 술이 깨고 바로 다음 날 장면에 객석까지 환하게 들어 온 째한 조명은 정말이지 바로 ‘술 깬 다음 날’ 기분을 이 공간에 들어차게 한다.

‘연극의 감각’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끝이 보이는, 심지어는 이미 끝을 내린 채로 극이 시작되는 숱한 연극 작품들에 지쳐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면에 있어서나 작품을 풀어내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다. 작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에 섣불리 도달해 버린 채로 극을 진행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단단한 틀 안에서 관극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게 하는 숱한 연극 작품들. 그 작품들이 극복하지 못한 성급한 폐쇄성을 이 작품은 차고 넘치는 풍부함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배우가 만들고 또 연출이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을 휘어 감싸는 무용과 젊음이 있었기에, 아니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연극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하는 이토록 소박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낸다.


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사라진 무엇

임승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원작 권여선
각색/연출 박해성
출연 신사랑, 황은후, 노기용, 우정원, 신지우
2017.11.23-12.03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동명 제목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적절한 신체와 음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서술 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서스펜스는 아쉽게도 사라져야 했다. 권여선의 원작은 각 소절이 서로 다른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됨으로 인해 독자가 해당 소절을 읽을 때 이번에는 누가 서술자인지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독자에게 일정한 긴장감과 능동적 참여를 허락한다.

이 두 가지는 두 형식이 가진 특성을 서로 맞바꾼 것이니 얻은 만큼 잃었고, 잃은 만큼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성에 있어서 발생한 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무대 버전에서는 이야기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이야기 하나가 생략되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공연을 보고 난 이후 소설을 통해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이야기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을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할 경우 생략은 불가피하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일야화’처럼 어떤 이야기가 길게 길게 지속되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연극은 한두 시간, 길어도 서너 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도록 신속히 핵심 사건에 접근하고  신속히 결말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소설의 연극화는 기본적으로 압축을 전제하는 작업이므로 단순히 어떤 장면이 생략되는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그냥 서재에 머무르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하지만 이번 각색에서 윤태림의 딸 실종 사건이 원작만큼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것은 소설 각색의 일상 다반사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이 문제가 작품의 제목 혹은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은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에서 왔다.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해언의 동생 다언의 입을 빌어 이 말을 다시 쓴다. 아니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신 당신이라고. 인간들이 도무지 뜻모를 고통 속에서 죽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섭리를 믿을 수 있겠냐고. 오히려 이 모든 게 당신의 무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언과 상희의 대화 속에서 신의 섭리는 부정되는 반면 시에 대한 믿음은 재확인된다. 신은 믿을 수 없지만 시는 믿자는 그들의 대화는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실종된 태림의 딸이 ‘혜은’이 되어 다언의 엄마 품에 있다는 이야기를 포함할 때와 하지 않을 때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섭리를 부정하는 말이 다언의 입에서 나올 때, 독자나 관객은 그녀의 고통을 알기에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절규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가 영아 납치 사건의 주범 혹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같을 수 없다. 이럴 경우 다언과 그녀의 어머니가 벌인 일을 우리가 한편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으로 신의 섭리를 말하는 순간 우리의 도덕 감정은 선뜻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해자가 신의 섭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정의를 실현—그것이 정의 실현이든, 복수이든, 아니면 단순히 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이든—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결정적으로 다언과 독자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신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작가의 결정적 고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다언의 결정적 행동을 삭제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가족을 잃는 불행 앞에서 한 인물이 신적 섭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만들었다. 원작의 경우 정의에 대한 갈망, 섭리에 대한 회의, 그러면서 동시에 자의적 정의의 실현 또한 대안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각색은 결론에서 온전히 섭리에 대한 불신이 제시되고, 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낭만적 전망을 내어 놓는다. 이 소설에서 섭리에 대한 고민이 영(Wm. Paul Young)의 <오두막>(The Shack)이나, 엔도 슈샤쿠(遠藤 周作)의 <침묵> 만큼 심화되지 않는 만큼 주인공이 섭리를 문제 삼는 것으로 끝맺는 각색은 결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선 공교롭게도 신과 시가 서로 경쟁한다. 주인공은 신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을 고발하면서 그 대안을 시에서 찾는다. 하지만 시를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행동 역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에 작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신적 섭리에 일정부분 의구심을 드러내지만 섭리를 부정하고 신이 아닌 시를 믿는 자(들)의 행동 역시 대안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윤태림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위선이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역겨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위선이란 신을 믿는 자 뿐만 아니라 시를 믿는 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음을 경고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연극에서의 각색은 작가가 취하고자 했던 윤리적 긴장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그로인해 시를 우상의 위치에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실체 없이 이름만 있는 그 무엇

글쓴이_산책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공연 내내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란 단어를 수없이 듣는다. 일반적이지 않게 긴 제목을 공연 제목으로 혹은 누군가를 부르는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그 집요함, 고의성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상한 제목이 귀에 딱 붙지 않아 어색하기도 하다. 뭔가 이상하다. 한편, 제목을 외칠 때마다, 지금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란 연극을 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긴 제목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두부터 오락가락하는 것은, 작품이, 또 작품을 본 감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 공연에 버무려져 있다. 하나씩 맛보았다면, 나름 맛있었을지도 모를 음식이 그야말로 잡탕이 되어, 어떤 맛이 나긴 하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맛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짠 맛 좀 느껴보려고 하면, 매운 맛이 공격하고, 매운 맛을 느끼고 있자면, 시큼한 맛이 올라온다. 솔직한 심정은…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B급 코드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패러디 한 배달의 민족 광고
언제부터인가, B급 코드(혹은 병맛)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가수 크레용 팝이나, SNL 코리아, “강남 스타일”, 배달의 민족 광고, 가끔 동생이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마음의 소리>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킹스맨>도 그런 맥락 안에 있다. 이런 B급 코드의 효과는 꽤 높다. 대중들, 관객들이 B급 코드의 가벼움, 유머, 신선함에 반응하고 환호한다. 다른 사람이 뛰어다니며, 서로의 이름표 떼는 것을 왜 봐야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젊고 어린 동생들은 병맛코드를 즐기지 못한다며 안쓰러워했다. 점잖은 체 하지 않는 B급 코드는 젊고, 신선한 것으로도 여겨지기도 한다.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하 <소뿔>)은 포스터부터 B급 코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극중극 내의 감독은 우리 연극은 아무 생각없이 웃게 만들 것이라고 호언 장담을 하는데, 어떤 부분들은 실제로 그렇다. ‘싼마이 연기의 달인인 황백호의 연기와 대사는 기가막힐 정도로 저렴하며 가볍다. 극중 옹 순경과 황백호의 여자 친구(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하다니!)는 산티와 성적(sexual) 코드를 마음껏(?) 발산한다. “오빤 나의 핫도그야.”같은 성적 농담들도 군데 군데 심심치 않게 삽입되어 있다. 성적 코드는 1차적인 본능을 건드리며 사람들의 웃음을 유도하는 강력한 것이지만, 관객들의 공감을 얼마나 끌어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B급 코드 속에, 소고기 개방과 같은 정치 문제, 경찰 수사 문제, 혹은 갑질 문제, 연극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을 숨겨 두고 있으니,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진짜 작가나 연출의 속내, 그 의도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저 맥락없는 섹시 여 경찰은 웃으라고 끼워넣은 것인지, 젠더 문제까지 다루려고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녀들은 섹시미, 백치미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보여줄 뿐, 그것을 깰만큼 신선하지 않다. 그래서 웃음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판을 깔아 두고 마음껏 B급 코드를 보여주지도 않으면서(청소년 관람 불가 연극도 아니고), 이런 병맛 코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고 성찰하게 해주지도 않는다. 극중극의 감독은 소떼 퍼포먼스, 소뿔 장례식, 사람들의 시위 장면, 등이 재미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맥락없이 끼어드는 장면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될 뿐이다. 정부, 빨갱이, 민중과 같은 단어들을 외치지만, 그런 표현들을 굳이 가져다 쓰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vs 실체 없이 이름만 있는 

분명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형식을 통해 연극적 유희성을 획득”하겠다고 소개했다. 이 소갯말은 극중극의 감독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공언된다. 공연을 보신 다른 관객들은 어떤 점에서 이런 면들을 발견하셨는지 무척 궁금하다. 필자는 만화나 영화를 즐기지 않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재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했다. 만화 캐릭터같은 인물들이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것은 인정한다.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일진 여고생이라든가, 난데 없이 취조 중에 랩을 하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B급 정서를 드러내면서, 전체 서사의 맥락을 끊어버려, 이야기를 말이 안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만화같은”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같은”이란 수사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다. 극중극중극이 반복되면서 마치 플래쉬백이 되듯, 이미 본 장면을 반복하고, 관객에게 기시감을 제공하는 것이 영화같은 형식이라 여긴 것일까? 이 작품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극중극중극의 형식은 영화같다기 보다는 연극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극이 극중극이 되고, 여기에 때로 실제 현실—극장 밖에 폴리스 라인을 치라고 지시하는 것 같은—이 난입하면서 (많은 리뷰가 소개하듯이) 무엇이 연극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리게 하는 척한다. 그런데 마치 현실처럼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것도 실제처럼 보이는 허구일뿐이다. 남산드라마센터에 폴리스 라인이 둘러져 있다 해도, 어느 누가 이것을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그것인 실제인 척 하는 허구, 자연인인척 하는 등장인물일 뿐이다. 현실과 공연이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고, 현실과 공연을 혼동하는 극중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그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이 아쉽다. 진짜 B급 코드, 연극적 유희성을 달성하고자 했다면, 관객에게 그것을 애써 전하지 말고, 알아차려도 그만, 그 반대여도 그만이라는 대담한 태도를 보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다만, 첫 번째 극이 극중극이었음을 알게 되고, 극 바깥의 현실(인척하는 극)이라고 생각했던 겹이 다시 계산된 극중극중극이었음을 알게 될 때, 관객들은 자신이 본 것이 몇 번째 층위에 있는 것인지 다시 따져봐야 하는 인식의 즐거움은 누릴 수 있다. 

첫 번째 보고 있던 극이 연출과 작가가,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극중극의 구조가 된다. 3번 층위와 2번 층위가 서로 교차하며 서사가 진행되던 중, '진짜'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3)번과 (2)번을 모두 극중극중극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마지막에 끼어 든 층위도 현실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에 비유했으나, 이 작품은 열면 열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처럼 보이는 층위가 끼어들수록 그 구조가 점점 확장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연기도 못 바꾸는데 현실을 어떻게 바꿔?

공연 내내 갈피를 잡지 못했던 마음이 마지막 10여분 동안, 그 길을 찾았다. 다소 진부한 에필로그였으나, 작가의 속내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연기도 못 바꾸는데, 현실을 어떻게 바꾸냐는 한탄처럼 (내 글은 엉망이면서, 다른 작품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있겠냐는 지금의 내 심정처럼) 마지막 10분은 작가와 연출이 이 복잡한 구성, 구조, 인물들을 모두 빠져나오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 들려주고 싶었던 주제를 꺼내 놓았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당수로 소뿔을 자르고 도망간다는 기상천외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공연 중에 길을 잃었던 황백호는 길을 찾기 위해 공연장 밖으로 나간다. 그가 소뿔을 자르고 다니더라는 등의 소문만 무성하다. 사람들은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그것을 잡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에 힘있는 어떤 사람들은 꾸며내서라도 그 무엇을 현실화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힘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것은 무대 위의 이야기지만 현실이다. 재미가 주제라거나, 머리를 텅 비우라는 말들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그래서 두려워하는 그 존재가 과연 관객에게는 어떤 것인지 물으며, 공연은 끝난다. 아니, 극중극중극에 충실하게 위해 이 모든 것을 공연 연습인양 마무리하며, 휴식 시간을 갖자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배우들은 휴식이 끝나면 다시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극장 밖을 나서면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담소도 나누고, 담배도 피고 있다. 그 장면에서야 극중극중극중극의 재미가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 자연인으로 드라마센터 밖에 서 있는 것일까, 등장 인물로 서 있는 것일까. ㉦



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관객과의 대화 (11월 22일)

김재엽 작/연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 (2014.11.04-30,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11월 22일 공연을 마치고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나눈 질문과 대답을 일부 소개합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김재엽 연출과 두 배우 (오대석, 김원정) 를 비롯하여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와 시인 맹문재 안양대 교수가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좌측부터 김재엽 연출, 맹문재 시인, 김현경 여사, 오대석 배우, 김원정 배우


백석 시인에 나타난 여인 나타샤 처럼 그런 중요한 의미셨을 텐데, 그게 지금 돌아가신 이후에도 엄청난 추억으로 삶의 힘이 되시는지, 선생님과 사셨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얼마만큼 행복한, 사실은 살아내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지금까지의 영향은 무엇인지요.

김현경 여사

김 시인은 하루가 똑같은 날이 없었어요. 매일매일 정말 좋게 말하면 충동적이고 또 그런가하면은 꼭 봄날같이 따뜻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같은 날이 없으니까 감동의 연속이었어요. 시에도 나타나지만 시를 똑같은 영감으로 쓰지 않으셨어요. 꼭 시는 그 다음에 쓰는 시는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시 한편을 쓰면 큰 산고를 겪었다 하셨어요. 시를 한편 쓰면은 초고를 쓰고 난 다음에 나한테, “여편네한테”  꼭 필사를 시켰어요. 원고지에다. 근데 하나, 무지무지 섬세하고 깐깐한 양반이에요. 그렇게 충동적이고, 술도 폭음을 많이하신 양반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쓸 때만은 그렇게나 엄숙했어죠. 딱 옆에다 앉혀 놓고 미리 원고지를 다 준비해놓고, 그 다음에 만년필까지 준비하고, 만년필을 특별히 말하는 건 잉크 빛깔까지도 이 양반을 신경을 씁니다. 잉크 빛깔도 맞지 않으면은 쓰지를 않으세요. 그러니까 그 파이로트 잉크를 사기 위해서 마포에서 충무로 체육관까지 나와야 해요. 그 정도로 준비가 단단해요. 그리고 제가 옆에서 쓰는데 그냥 이거 베껴라가 아니에요. 옆에 앉으셔가지고 내가 그 원고를 보면서 시 제목 쓰고 김수영 쓰고 그 다음 제가 베끼기 시작하면 꼭 한줄 띄고 점찍고 행 바꾸고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거의 다 썼는데 저 같으면 그동안 쓴 게 아까워서 틀린 데만 고쳤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됩니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니까 몹시 힘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니 말하자면 그렇게 엄숙하게 다루시거든요. 돌아가신 지가 벌써 50년이 가까워 집니다. 46주기에요. 저는 46년 동안 반세기를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여편네죠. 그래도 아직도 제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건 47셉니다. 돌아가신 나이가. 그 젊은 나이가 아깝고. 또 하나는 진짜 빈틈없는 공부벌레에요. 공부하는 태도 책읽는 태도 번역하는 태도 시를 쓰는 태도는 생활하고 일치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남편한테 어리광같은 거 부려본 적도 없어요.  그게 용납이 안되니까. 그리고 그때도 그것이 하나도 괴로움이라든지 무슨 생활고로 연결을 안시켰습니다. 그냥 대단한 양반을 둘도 없는 남편을 모신 데는 게 큰 자랑이었어요. 그 당시에 무슨 동창회 같은 모임에 나가면 야 너 학교 때 꽤 허영심도 크고 그랬는데, 어떻게 지금 이러고 사느냐. 닭을 기른다며 이러면서 무시를 하는 거에요. 그게 반발이 되어서. (그당시에는 1960년대만 해도 김수영은 그저 참여 시인이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이라는 걸 잘 인식을 못해요. 그 당시만해도 서정시 청록파 시인이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모든 관념이라든지 서정 같은 걸 다 부인하잖아요. 혹시 시 구절에도 조금 낭만적이고 흐름이 좀 조용하고 그래서 내가 옆에서 베끼면서 아 이게 좋다 하면 거칠게 또 고칩니다. 그 당시에 제가 한 말이 있어요.) 그래 내가 김수영 시인하고 사는데, 김수영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시인이야 이렇게 큰 소리를 뻥 쳤어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40주기가 2008년도였어요. 그때 그 친구가 그 소리를 듣고 감명을 듣고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신문회관까지 찾아왔어요. 신문회관에서 40주기 학술대회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그 말을 다시 확인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참 그런 말을 했지. 그런 긍지로 살았어요. 그러니까 더 없는 감동의 연속이고 정말 나를 이렇게 오늘날까지 지켜주고 또 그 에스프리로 나를 이렇게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거. 그러니까 상식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진짜 대단한 행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 분한테 드리고 싶은 질문은 연극 보면 연출자가 배우들과 고민 많이 하면서 만든 연극 같아요. 준비하시면서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다면 알려주시구요. 연출자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 두개가 있는데, 지난번 알리바이 연대기 때도 재엽님 역할을 정원조 배우가 하셨고, 이번에도 또 하셨잖아요. 혹시 굳이 재엽님의 역할을 정원조 배우에게 맡기시는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하고요. 대사중에 “재엽아 너는 연극을 왜 하냐”이런 대사가 있는데, 이번 연극을 준비하시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원정 배우

저희가 1월에 워크샵을 했을 땐 저도 시대적 배경을 많이 알지 못했어요. 그 당시엔 “거미”라는 시가 저한테는 되게 와닿았습니다.

오대석 배우

대답을 하기 전에 여기 다 계신 분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어보셨을테고 좋아하시니까 남아계실 것 같은데요. 꼭 발화해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꼭 정답은 없으니까 그날 느낌대로 시를 꼭 소리내어 읽다보면 저도 이번에 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는데, 매일 매일 달라요. 제가 시를 계속 하잖아요. 저의 대사들은 거의다 산문에서 나온 말들이거든요. 이걸 매일 계속 발화를 하다 보니까 그때마다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최근엔 “저 하늘이 열릴 때”가 그런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집에 돌아가셔서 시를 한번 그냥 소리 내서 자기가 가장 편한 곳 있잖아요. 샤워하다가 아니면 술 드시다가 정말 그 시를 만끽을 한다는 건 눈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말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오거든요. 그게 여러분들 안에 김수영을 찾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현경 여사

남편의 작품 중에서 최고 작품 같다고 생각하는 건 “도취의 피안”이라는 시에요. 그게 정말 시를 쓰는 시의 방법론이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에스프리라든지 이런 것이 대단히 높은 시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이미지가 추상적이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시가 감동이 큰데 정말 누가 흉내낼 수도 없는 정도의 시라 생각하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냐 했더니, 이건 이 양반이 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향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사회주의라는 게 인도주의에서 왔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양반이 의용군을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돌아와서 정말 사경을 헤매었어요. 정말 죽을 고비를 두 번 이상 넘기면서 살아남은 게 신통하죠. 물론 참여시도 많고 “풀”도 있고 하지만 정말 시작으로서 시 자체로서 평가 받을 때 제가 제일로 생각하는 게 “도취의 피안”이구요. 그리고 또 제가 그렇게 47세에 요절하셨지만 좀 아깝죠. 지금 4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젊은 나이와 그 공부 벌레, 진짜 시인입니다. 학문도 깊어요. 철학 서적도 칸트서부터 하이데거까지 원서로 읽으시거든요. 노는 걸 못봤어요. 늘 책만 들고 있었지. 그렇게 간단없이 열심히 공부하셔서 그런지 아쉽다고 하는 양반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더 좋은 시를 썼을까. 또 시절에 있어서도 경고를 많이 하셨잖아요.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은 지금 읽어도 누구한테든지 영원한 시인에 있어서는 교과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서도 제가 생각할 때는 초기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쓴 시 하나하나가 다 완성이에요. 미완성이라는 건 없습니다. 하나하나 다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시인

저는 "눈"이라는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눈은 김수영 전집에 세 편이 있어요. 처음에 있는 시.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데고 기침을 하자. 눈 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을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자.” 라는 시인데요. 제가 20대 때 김수영을 처음 보면서 저하고 시 같이 습작하던 친구가 저보다 이 시를 먼저 외워서 멋있게 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젊은 나이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80년대 상황이니까요. 뭔가 이렇게 망설이고 눈치보고 문학을 한다는 저도 뭔가 이렇게 어떤 사회적 발언을 했을 때 나에게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이런 걸 망설였을 때 친구가 이 시를 담담하게 낭송하는 걸 보고 제가 시쓰는 방향을 새롭게 가져서 외웠던 시입니다. 눈은 기침을 하자는 젊은이 다운 부르짖음도 좋지만, 김수영 시는 철저히 관념을 배격한 시여서 눈이라는 게 어떤 관념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을 보면서 김수영 자신이 눈에게 자신의 마음을 동화 내지는 투사한 인식의 산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 시를 문학사상에다 내가 읽은 한편의 시에서 그 때도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김수영의 이 시를 읽으면서 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시적인것 이런 것이 아니고 자기 눈으로 보고 느끼고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상징화할 수 있는 것 그런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를 준 시입니다.

김재엽 연출

저는 작품 쓰기 위해 여러가지 시와 산문을 읽게 됐는데, 희곡을 써야 하는데 자꾸 시를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한 때가 많았습니다. 연극에도 나오는데 제가 대본을―   보통 때도 늦게 쓰는 편이긴 한데―많이 지체가 돼서, 과연 김수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많이 못 찾은 이유 중에 하나도 시를 한번 씩 읽고 나면 약간은 정지상태가 옵니다. 똑바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시인이 계속 이렇게 자기 삶에 대해서 투명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많이 나와서 그걸 타인을 보면서 자기를 반성하고, 다른 사물을 보면서 자기 마음을 투영하는 힘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강가에서”라는 시가 있는데, 자기 보다 남루해보이는 어떤 사내를 보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생의 어떤 건강한 기운은 도대체 뭘까. 자유롭고 그럴 수 있는 힘은 뭐지 이런 걸 반추하는 건데. 연극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서 이렇게 곁눈질 하면서 만들어내는 건데 거기에 내 자신은 얼마만큼 정직한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던져줘서 고민만 하다가 공연이 이렇게 배우들 몫으로 고스란히 올려진 것 같아서 상당히 송구스러운 그런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멋있게 생긴 정원조라는 배우를 캐스팅하게 되었구요. 정원조 배우가 사실은 두번째 제안할 때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는데, 흔쾌히 좋아해주었고 서로 오픈한 상태에서 얘기도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친구라서 계속 해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생각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얘기를 새롭게 해볼 생각입니다.

저는 시에 대해서도 문외한이고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인데요. 남산에서 하는 연극을 자주 챙겨보고 있는데, 작가님에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시와 김수영시인에 대해 잘 모르는 제 또래 관객층에게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싶었는지 그리고 두 번째로 작품 중에 김수영 시인과 강신일 배우의 마지막 장면이죠. 철조망 뒤편에서 마지막으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변한게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반세기가 지난 이 시대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작품 초반에 광화문 광장이 나오구요. 광장과 청와대 앞을 시를 읽으면서 걷는 행위는, 지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을 때도 우리는 결국 동시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는다면 그런 모습일 거 같다는 측면에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소통을 해보려고 하는 이유가 지금 현재 많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갈등들이 50년대 60년대 김수영 시인의 시대들의 갈등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미루고 미루고 못본척하고 지나쳐 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것들이 분단이나 한국전쟁 언론의 자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런 부분들이 시인이 몸부림치면서 얘기했던 부분들인데 사실은 우리는 50년이 지나서도 그때 당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혹은 시인이 온몸으로 괴로워 했던 예술가의 모습들이 우리는 어떤 부분은 간과하면서 내가 예술하려고 하는 부분만 생각하고 있지 세상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메시지라고 할 건 없지만, 이 시대 후배들 혹은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나는 모르고 있다. 혹은 모른다라는 사실 때문에 위축되어서 말 못하고 있는 게 많은 거 같은데,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것 만큼 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느냐, 사실은 그게 큰 문제인거 같고요. 알아야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 궁금한 건 또 물어볼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시인한테서 제일 많이 발견했던 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라기 보다도 내 자신한테 얼마만큼 솔직한지 내가 정당하지 못한 거에 대해서 내가 얼만큼 괴로워 할 줄 아는지 자기 양심의 문제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고 혁명을 꿈꾸는 것이 내 양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제일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혁명이란 말도 어릴 때는 사회적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뭔가 부담스러웠는데, 사실은 그게 내 자신을 내가 속이지 않고 지내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맹문재 시인

우리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랑 격변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나가려고 했던 시인이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김수영 시인이 온몸으로 지향했던 건,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적 모더니티를 추구했던,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외적인 환경들, 분단이라든가 언론의 자유라든가 기존의 유교적 인습이라든가 제도 이런 것들에 대항하려 했던 거 같아요. 오늘 김현경 여사가 여편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하나의 단어를 통해서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면모를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수영 시인이 여성을 일컫는 호칭 중에서 여편네가 가장 많아요. 여인 여성 그녀, 영자 등의 구체적 이름도 있지만, 여편네가 제일 많아요. 이 여편네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해서 여기 앉아계신 사모님을 보고 시에서는 여편네라 했지만 시인은 여편네를 하나의 시적인 상징체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만용에게”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는 양계장을 하면서 경영 적자가 나니까 여편네가 김수영 자신에게 나무랍니다. 계란 값이라든가 모이값을 가지고 나무라는데, 거기에 대항하는 시거든요. 나는 여편네에게 질 수 없다라고 외치니까 언뜻 그 시를 읽어보면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사모님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때 여편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인 것이죠. 근데 이 자본주의라는 게 우리가 속물근성으로 따라가는 그런 근대화를 이루어선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근대화여야 하는데,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상으로서 여편네라고 칭한 거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다른 언어로 예를 들어 사장놈이라든가 이런 말도 있는데 왜 여편네라고 했을까라는 것이 궁금한데, 바로 그런 점이 김수영 시인이 공부를 많이하고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는 나름대로의 전략이죠. 왜냐면 자본주의라는 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에 대항하는 전략도 단순해선 안되요. 사장 이렇게 쓰면 단순하잖아요. 사장이 어떻다라는 건. 여편네라는 말은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친밀하죠. 부모 형제보다도 친밀한 말이면서 또 여편네라는 말은 고용주와 고용인처럼 계약관계로 되어 있어요. 이혼을 하면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편네라는 말은 아주 친밀하면서도 아주 객관적인 언어인 거에요. 그랬을 때 여편네라는 말을 통해서 그 속성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침투되어 있어요. 우리를 속물근성으로 만들어 주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옭가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칭할 수 있는 말로 여편네라고 하는 것이죠. 그 대항체로 객관화하니까 그 대항체로서 적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언뜻 읽으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김수영 시인이 그렇게 자유정신을 지향하고 근대적 시정신을 가지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반여성주의적 언어를 사용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김수영 시인은 여성을 비하하려 했던 게 아니라 자본주의 속성에 물들어 가는 자신에 순응하지 않고 대항하기 위해 여편네라는 호칭으로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죠. 물론 여성주의 입장에서 보면 잠재된 내면의 남성주의적 면이 있다든가, 어디까지나 그것은 반여성주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지나쳐 보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김수영 시인은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고 그것이 관념이나 추상화가 아니라 지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처럼 철저히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성찰을 통해서 나가려고 했던 점에서 구체성을 띄고 시적인 힘을 받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수영의 시어들은 명사들이 많지만 여운이 많이 남고 인상이 짙게 있는데, 그것은 김수영 시인이 쓴 시어들이 명사로 화석화된 게 아니라 다 움직이는 동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한 단어가 시대에 저항하려고 했던 근대화를 지향하려고 했던 산물이 아닐까 그렇게 봅니다.

직접 한번 확인을 해봐야 겠습니다. 그 사모님, 댁에서 김수영 시인이 사모님을 부를 때 여편네란 말을 한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여사

집에서 여편네 소리는 안해요. 여보 소리 제일 많이 한 거 같고요.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죠. 정말 가슴으로 존경할만한 대시인입니다.

 요즘 언론의 중립성도 문제지만 그런 것들이 예술에까지도―광주비엔날레나 부산 국제영화제등 처럼― 침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을 준비하시면서 그런 고민은 없으셨는지요. 그리고 제목이 연극에서는 “내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라고 되어 있는데, 제목을 왜 지금의 시 구절로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어느날 고궁에 나오면서”가 제일 강력한 모티브를 주었던 거 같아요. 작은 일에 분개한다는 게 서로가 조금 양립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분개한다는 건 솔직한데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고 해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질문이 저는 결국 그게 그냥 답인 거 같았거든요. 그 말 자체가. 자기 모습에 대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 문장에서 다 나와버린 것 같아서 그렇다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한테, 나한테는 있는가. 부제는 그런 면에서 붙여 봤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뭐 이 정도 작품하는 건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요새는 압박을 가하거나 할 때 대놓고 하지 않거든요. 지원금 신청하면 떨어뜨린다든지 6개월이 지났는데 기억하고 있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어떤 일이 있겠죠. 있을 거 같고. 지금도 연극계에서는 연극인들이 세월호 관련해서 천막 농성하고 단식을 길게 하는 바람에, 뭐 꼭 그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예술위원회 쪽에서 35년동안 멀쩡하게 해왔던 (서울)연극제를 대관 심사에서 떨어뜨린 일도 있습니다. 나란 되게 소심한 사람입니다. 대범하게 잡아가든지 이러면 확 눈에 띄기도 하고 관객도 좀 많이 올 것 같은데,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조선 일보 기자들도 보고 가셨는데 기사는 안써주시고. 사람들한테 대화할 수 있는 브릿지(bridge)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하자고 충동질하거나 제가 뭘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전혀 아니구요. 오히려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서 극장이란 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면, 우리도 사소하게 뭔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정도의 차원이었지 이 작품이 대단한 걸 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희곡아닌 문학작품들이 연극무대에 많이 올려지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소설을 연극화하고 또는 소설을 낭독하는 공연도 있고, 이번엔 시가 중심이 되는 그런 공연인데, 극작가이자 연출을 겸하시는 입장에서 극작가로서 시가 자신에게 주는 가능성 또는 무게감, 반대로 연출가로서 시가 가진 가능성들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소설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소진 소설가님의 『장석조네 사람들』이란 작품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내러티브에, 영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시가 오히려 연극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김소진 소설가의 작품은 대사가 구어체로 방언을 사용하셔서 언어 자체가 그냥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연극이 되었던 거 같아요. 이번에 시 같은 경우는 세상이 하도 회귀를 하니까 정치라든지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에서 너무 옛날 목소리가 나오니까 저희들 세대만 하더라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목소리 사고 방식이라서 여기에 대해 과거의 우리 선배 선생님들은 어떻게 외쳤고 어떻게 대응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서 옛 시인들의 시를 읽어 봤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부담스러운 목소리를 가졌던 어르신들, 접어 놓았던 시인들을 다시 꺼내서 봤는데, 그때 부담을 느꼈던 건 거기서 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그들이 그 목소리를 내서 일종의 스스로 존재하려고 애썼다는 그 모습이 그때는 단지 하나로 어떤 수양의 관점에서 보였다면, 지금은 내가 하루를 살더라도 내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그 목소리가 되게 실존에 걸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가 좀 읽히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는 읽지 못했던 시들이 이제는 읽히는 걸 느끼면서 시가 만약 무대에서 발휘된다면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좋은 배우님들하고 같이 시가 공감대를 울릴 수 있으면 어떤 드라마적인 구성이나 잘 만들어진 연극 이런 거 말고 그냥 그 목소리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에게 동시대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 중에서도 김수영 시인의 시론이 소개되었습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쓰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출 선생님께서는 이 몸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고, 오대석 배우님께 그렇다면 연기라는 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재엽 연출

全존재라는 말도 많이 하지만, 존재 그 자체인 거 같아요. 머리나 생각을 하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 자체를 구별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사실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말하는 것 처럼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 시를 쓴다는 것이고 예술 한다는 것도 사실은 예술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예술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더라구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상황을 겪었다라는 느낌이거든요. 과연 진짜 전존재로 온몸을 받쳐서 작품을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그 말 속에서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오대석 배우

가장 중요한 기본은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기초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연기에 대한 생각은, 우선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똑같다라는 건 예를 들어 인간의 성격이 백만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똑같은 퍼센테이지로 태어나는 거죠. 흔히 우리가 보고 있는 나쁜 성질, 좋은 성질들이 백만 가지라 해도 모두 똑같이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퍼센테이지가 옮겨지는 거죠. 그후에 사회적으로 해선 안된다는 게 있으면 그 비율을 바꾸게 될 거고, 물론 바꾸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그래서 지금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전제하는 건 어쨌거나 사람은 다 똑같은 거에요. 우리가 길을 가다가, 저는 남자니까, 섹시한 여자를 보고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나서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한다는 것에서 내 안에 그 성질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단, 내가 사회적인 제한에 따라서 그런 걸 감추고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런 전제하에 제가 생각하는 연기를 하는 방법은 첫번째로 절 믿는 것인데 (예를 들면 살인자 연기를 하려면) 저도 살인자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러면 살인자 역할을 맡을 때 저에게 남아 있는 0.0001 프로 남아 있는 이 살인자의 성질을 배우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프리즘을 통해서 백프로로 만드는 거죠. 백프로로 만들면 제가 무대에서 살인자가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공연이 끝난 다음에 분장을 지우면 그 프리즘을 통해서 다시 나로 돌아오게 되는 건데, 제가 후배 배우들이나 선배 배우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의 유일한 면죄부의 공간이 종교가 아니고 무대라는 겁니다. 여기서는 역할에 따라 살인을 잔인하게 할수록 박수를 받게 되더라구요. 이 시작점은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만큼 사람들을 믿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제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키워서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되게 극단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에 그분들이 그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하고 나서 길을 잃어버려서 잠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시잖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중간과정의 프리즘을 좀더 잘 끊임없이 연마하고 있다면 이 (프리즘을) 오고가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녹취 정리 임승태

2014년 9월 6일 토요일

9월의 장바구니

산책

독자 여러분 안녕하셨나요? 모니터를 앞에 두고 인사를 건네자니, 무척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7월, 8월 연재를 쉬었기 때문에 혹,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몰라(정말 아름다운 상상이군요) 인사로 시작합니다. 답답한 세상 일들은 여전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고 하늘이 높아지니 조금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공연을 검색하고 예매를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복희>, 8월 26일 ~ 9월 21일, 남산 예술 센터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복희에게 슬픔이 강요됩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펴보니, 그녀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제목처럼 복희는 슬픔을 벗어내고 즐거움을 느끼며 홀로 설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호숫가 펜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밝힐 때, 혹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탐닉하고, 소비합니다. 교통사고도, 화재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도 이야기가 자꾸만 덧입혀집니다. 사람들은 인물과 성격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강요되고, 누군가에게는 우울감, 또는 넘치는 희망이 강요됩니다. 보고 나와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산 예술 센터의 원형 무대에 구현될 호수, 복희 이야기를 넘어서서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을 기대하고 극장에 갑니다.

<위키드>, ~ 10월 5일, 샤롯데씨어터 

 

영국 여행에서 뮤지컬 관람을 빠뜨릴 수 없지요. 가난한 여행자였지만 당일 할인 찬스를 이용해서 <위키드>를 보았습니다. 극장 내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주는 것에 즐거워하고, 작품에 감동해서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위키드>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 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는 다른 작품을 보러 갔었는데, 다음 날 친구를 데리고 가서 한 번 더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한참 동안 뮤지컬 넘버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아시아 팀이 대한했을 때 한 번 더 작품을 보았는데, 그때는 처음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캐스팅으로 진행될 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 시작된 작품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꽤 놀라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작품을 찾아주나 봅니다. 추석 연휴에 제공되는 할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매했습니다.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들이 어떨지(번역은 어떨지),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은 원작과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합니다.

<노란 벽지> 9월 25일 ~ 9월 27일,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국제 공연예술제(SPAF)가 9월 25일 시작됩니다. 총 21편의 작품이 공연되는데, 다양한 해외 초청 작품 뿐 아니라 극단 목화와 연희단거리패의 작품 등 국내 초청 작품들도 기대해 볼 만 합니다. 각 작품의 공연 기간이 매우 짧고 이미 조기 예매 등이 진행된 터라 티켓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심 있는 작품에 좌석이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예매하세요! <노란 벽지>는 SPAF의 첫 작품으로, 동시대 최고 연출가로 평가되는 독일의 케이티 미첼의 연출작입니다. 벽지 속에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믿는 주인공은 어떻게 될까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 분)같군요!)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방식이 그녀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

2014년 4월 7일 월요일

4월의 장바구니

by 산책


<히스토리 보이즈>, 3월 14일 ~ 4월 20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히스토리 보이즈>는 영국의 앨런 베냇의 대표작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그들의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영국 초연(2004년) 당시에도 호평을 받고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로도 개봉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3월 연강홀에서 초연되었고, 올해 재공연하게 된 작품입니다. 특별한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많이 알려진 작품인데 저는 이제서야 좀 궁금해져서 뒤늦게 예매했습니다. 벌써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고, 작품이 좋고, 또 멋진 배우들이 많이 출연해서 그런지 여러 번 관극하신 (특히 여성 관객)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3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또 고등학생들의 고민과 토론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데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찾는 데에는 분명 어떤 에너지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열정적으로, 그래서 아름답게 보일 그들의 토론 장면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산책의 <히스토리 보이즈> 리뷰 바로가기



<바후차라마타>, 4월 5일 ~ 4월 20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난 여잔 아니에요. 하지만 여자에 가까워요.”
3월 장바구니에서 소개한 <남산 도큐멘타>와 패키지로 예매한 작품입니다. 예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궁금해서 입니다. 무대에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나를 포함해서 관객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그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분법적인 성(性)의 구분’과 이에 맞서는 ‘대안적 젠더(제3의 성)에 대한 제안’도 좋지만 그저 사람으로서의 그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2부에서 관객들은 연극 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만들어 지는 새로운 이야기와 소통 방식들도 기대해 볼 만 한 것 같습니다.

덧붙임: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좋은 삶이 있을 때 좋은 연극이 있는 것만큼, 좋은 연극이 좋은 삶을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라는 소개가 무척 마음에 드네요.

이예은의 <바후차라마타> 리뷰 바로가기


<노래하는 샤일록>, 4월 5일 ~ 20일, 국립극장 달오름 

이미 드라마인에는 <노래하는 샤일록>에 대한 리뷰가 게재되었습니다(http://www.drama-in.kr/2014/04/shylock.html).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이지요. 첫 번째 작품인 <맥베스>도 즐겁게 관람했기에 사실 별다른 고민 없이 예매한 작품입니다.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 역시 에스티님의 리뷰를 확인하세요). 5월에는 <템페스트>도 예매하려고 합니다(템페스트는 4월 25일까지 예매 시 30% 할인을 받을 수 있답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 연작을 모두 관극하면 이 봄이 다 지나가겠네요. ㉦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극장과 내외하는 사이 1] 극장을 만나다,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

by 서유미


남산도큐멘타: 연극의 연습 - 극장 편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출: 이경성 (크리에이티브VaQi)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

얼마 전 수업 과제로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 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장 자크 루빈, 『연극 이론의 역사』) 글의 필자는 연극의 기저가 되는 텍스트(여기서 텍스트는 연극의 문학적 텍스트, 즉 희곡을 의미함)가 연극에서 가지는 절대적인 권위에 대해 서술하면서, 연출가의 창조적 기량조차도 텍스트의 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출가는 ‘텍스트의 공명상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 연극이 서야 할 자리인 무대 위에서, 종이 위에 있어야 할 텍스트가 그 힘을 휘두른다면 연극은 무대 저편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편한 마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연극은 ‘오로지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들’로 무대를 가득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은, 연극만이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배우들은 “우리 연극은 연출이 중요합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텍스트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능을 연극 내에서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즉, 텍스트에 봉사하기는커녕, 텍스트를 완전, X무시해버린 연극이다.

도큐멘타  (*줄거리 노출*)

이 연극의 주인공은 62년 드라마센터로 개관하여 현재 남산예술센터로 불리는 ‘극장’이라는 공간이다.
드라마센터 개관공연인 <햄리트>의 독백을 하는 배우가 무대 한 가운데 서 있다. 신파조의 독백을 하는 도중, 배우 한 명이 무대 뒤편에서 한 무리의 관객들을 이끌고 오며 그들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이들은 ‘유령산책’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관객들로 사전에 신청을 하면 배우들과 함께 극장 주변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하나씩 방문한다) 독백을 마친 배우 앞에 서서히 조명기가 내려오고 배우는 그 조명기 중 하나를 뺀다. 여섯 명의 배우들은 “우리의 연극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연극을 소개한다. 그 중 핵심은, “우리의 연극의 주인공은 극장입니다” 일 것이다. 다음으로 62년 <햄리트> 장면, 극장이 자금난을 겪었던 당시 설립자인 유치진과 김종필의 대화 장면, 자금난으로 연극이 상연되지 못하고 결혼식, 연주회장, 연희장 등으로 활용되었던 역사적 고증 재현 장면 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빈 무대. 텅 빈 무대에 극장의 이 곳 저 곳을 보여주는 영상이 투사된다. 무대, 객석, 무대 천장의 조명기, 조명기가 내려갈 때 맞물리는 철제 기기들, 바닥, 무대 뒤편 공간, 기계적 무대, 헐벗은 공간, 배우도, 관객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존재하는 극장 그 자체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극장의 ‘독백’. 막간극으로 유치진의 희곡 <대추나무> 한 장면이 끝나면 배우와 연출이 극장 주변을 다니면서 인터뷰 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투사된다. 이어지는 ‘남산 오디션’ 장면에서는 ‘오디션‘이라는 극장과 조우하는 특정 형식을 빌려 극장 주변에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인 중앙정보부의 고문 장면을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다시 한 번 <햄리트>. 마지막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 장면, 모두가 죽어 버리는 그 순간이 펼쳐진다. 무대감독(여자 배우)은 햄릿과 레어티즈가 쓰러져 죽은 곳에 (교통사고 현장에서 그러하듯) 흰색 분필로 마킹한다. 배우들은 “우리의 연극은”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텅 빈 무대, 극장 미니어쳐가 놓여 있다. 무대 조명이 이것을 협소하게 비추고, 조명기가 (마치 인사하듯) 무대 바닥까지 내려오면, 암전. 연극이 끝난다.




극장과의 첫 만남, 감상

프로그램북에서는 이 연극을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
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글만 보더라도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에 제대로 반기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에서 극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텍스트 외부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좋았던 것은 여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깜깜한 극장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던 극장의 독백 장면이다. 극장의 이 곳 저 곳을 조명이 비춘 후, 암전이 되면 극장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떠나는 장소. 그러나 그들과 상관없이 늘 이 곳에 꿋꿋이 존재하는 극장. 이 극장이 그 짧은 순간 동안, 처음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공연에서 공연 그 자체를 위해 숨겨져야 했던 것들이 노출되는 순간들, 예를 들면 조명기가 바닥 끝까지 내려오는 장면은 극장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대 천장에 숨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만을 수행해오던 투박하고 묵직한 조명기들이 처음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순간, “숨겨왔던 나의~” 노래가 떠오르면서(?) 극장과 처음으로 가장 솔직한 상태로 대면하였다. 희한하리만큼, 괜히 통쾌하기도, 후련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조명기가 무대 바닥까지 천천히 내려올 때에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에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듯 했으며, 커튼콜 때 여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에서도 굳이 조명기 뒤에 서서 인사를 하는 것 또한 이 연극의 주인공이 극장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지시적인 장면은 좀더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겼다. 극장 모형이 빈 무대 위 홀로 남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마지막 장면. 모형은 단지 모형일 뿐이고, 극장이라는 진짜 주인공이 그 뒤, 그 앞과 그 옆, 온 곳을 둘러싸고 있는데…… 자신을 그대로 모방한 모형 극장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본 진짜 극장이 조금 섭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우들은 유쾌했다. 완전히 비-재현적인 연극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 방식은 철저히 재현적이라는 점은 또 다른 재미를 낳았다. 중간 중간에 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고 느꼈던 진솔한 이야기들도 들었으며, 배우들의 말로 극장을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극장이 주인공인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단지 극장을 더 드러내고 극장에 의해 소비되는 기호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은 가끔은 웃음을, 때로는 불편함을 낳았지만, 그 장면들이 생산해내는 모든 감정들은 내가 배우의 연기를 보았을 때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과 관계하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여기, 이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새로운 지점에서, 극장과 나는 만났다.


+남산예술센터, 극장을 나오며

프로시니엄무대가 주류인 요즘의 극장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특히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설렌다. 반원형 돌출 무대인 이 극장에서는 어느 자리에서도 무대와의 거리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배우와 무대, 연극에 더욱 쉽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로 이 곳에서 본 연극들은 그 내용과는 상관 없이 왠지 모르게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 샤우뷔네 극단의 <햄릿>은, 안팎으로 제대로 미쳐서 극장 공간을 여기 저기 누비고 다니던 싸이코 햄릿의 정신질환이 내게 옮겨 올 것만 같은 두려움을 남겼었고, <천개의 눈>을 보면서는, 타로의 미궁 속에 나 또한 자로와 함께 갇혀버린 상태에서 깜깜한 극장 안, 마치 천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남산예술센터에서 본 연극의 기운과 그 여운이 나에게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은, 이곳의 특수한 공간적 구조가 연극에게 주는 힘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극장을 나오며 갑자기 체홉의 단막극 <백조의 노래>가 떠오른다. 스베뜰로프는 몇 십 년 동안이나 연기 생활을 했던 그 극장을, 아무도 없는 밤 홀로 남아 처음으로 마주한다. 조명이 꺼지고 모든 소도구들이 제멋대로 놓인 무대는 더 이상 환상을 자아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노출된 채로, 단지 텅 빈 죽은 공간으로 처참히 전락한다. 만약, 스베뜰로프가 극장의 숨소리를 들었더라면, 극장이 건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자신이 이끌어 온 희극 배우로서의 인생이 절대 허황된 시간들의 모음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

(* 사진 및 동영상 출처는 남산예술센터 공식웹사이트(www.nsartscenter.or.kr) 및 남산예술센터 페이스북(www.facebook.com/namsan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