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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9일 토요일

한국 공연예술계 엥떼르미땅들과 사회적 권리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주형일 역, 『정치 실험』 (갈무리, 2018) 서평[1]

김민조
“부자가 되세요!”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 옆에 “자신을 표현하세요!”, “창조적이 되세요!”라는 신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은 장려될 뿐만 아니라 고용적격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창조에 대한 독려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정치 실험』 226~227면.

『정치 실험』에 묘사된 2003년 경 프랑스의 상황과 2018년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온도차는 현저하다. 약 15년 전 프랑스에서는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실업보험의 수혜 조건을 강화하고, 소득재분배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재건"이라는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엥떼르미땅[2]들의 투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공연예술계의 경우에는 아직도 실업보험은커녕 예술인복지의 개념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워크페어의 통치성과 권력효과를 운위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 내에 진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기화로 하여 국회에서 예술인복지법 개정 및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예술인 사회보장제도는 일반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정부가 추산한 한국의 문화예술인 규모는 약 54만 명에 달하지만 예술인복지법에 의해 수혜를 받은 예술인은 약 3만 4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2016년 기준)은 그 증거들 중 하나이다.[3]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는 연습비와 공연비를 온전히 자비로 충당한다거나 공연에 참여하고도 개런티를 지급받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특히 5년차 이하의 엥떼르미땅들에게는 창작활동을 통해 먹고 사는 모델보다는 창작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충하며 살아가는 모델이 더 일반화되어 있다. 젊은 창작자들은 대체로 이름 있는 팀에 들어가거나 노 개런티 공연을 전전하면서 ‘이 바닥의 생리’에 적응하고 버티며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커리어를 쌓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정부가 제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은 대부분 예술인 개개인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사업이 아니라 ‘유망한’ 극단이나 연출가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이기 때문이다. 지원사업에 선정될 수 있는 팀, 그래서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팀에 팔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게임”은 더욱 심화된다.

랏자라또는 이른바 복지국가의 “서비스”는 투쟁에 의해 획득된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체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부여한 “신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재건”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엥떼르미땅들은 국가가 식별할 수 있는 ‘좋은 예술’의 기준에 부합하는 창작물들을 더 많이, 더 쉼없이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신용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지원사업은 복지사업보다 더 문이 좁고 까다로우며, 더 시혜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국에서 시행되어 온 예술지원사업은 고용적격성을 기준으로 한 “불평등의 미분적 관리에 의한 통치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큐베이팅 사업과 같은 지원사업들은 표면적으로 창작예술인의 ‘육성’을 내세우지만, 이는 예술인들을 보편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추적조사”(신청서류, 면접심사, 교육이수 여부 등)를 바탕으로 걸러낸 소수의 적격자들만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원사업은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는 대신 돈을 내어주는 정부 부처나 정부 출연 재단의 시혜적 태도에 “의존”하게 만든다.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이러한 위계적 관계가 고착화되는 것에 비례해 정치적 타락의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사례는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length principle)에 의거해 2005년 수립된 예술분야 전문 협의체이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 청와대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배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검열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4]

그러나 최근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도 랏자라또가 말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이후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맞선 투쟁, 그리고 2018년 공연예술계 미투·위드유 운동은 ‘경제적인 것’의 프레임 너머에서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존재론을 문제 삼는 새로운 벡터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자신이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전성과 예속성의 감각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의 관리정치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각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기각하고 ‘살아남기 위해 동의할 것’을 강요하는 공연예술계 내부의 “품행 정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을 바탕으로 국가의 복지·지원 사업들을 모니터링하고 그 계획의 수립과 시행 과정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2017년부터 새로운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지원사업의 울타리에서조차 배제되어 있었던 청년·신진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최초예술지원, 서울시청년예술단, 유망예술지원, 민간청년예술공간지원 등이 그것이다. 청년예술단의 경우 사업액이 총 54억 원(2017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지원사업의 파이가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선정된 예술인들에게 사업비와 별도로 월 70만원 수준의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복지사업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예술창작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기초적인 생계를 위한 수급비를 지급하는 사업을 도입했다는 것은 분명 진일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랏자라또가 『정치 실험』에서 경고하고 있는 일들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평론가는 2017년 청년예술단이 연간 80회의 활동 증명을 요구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여전히 정부가 예술가를 ‘주체’로 보지 않고 지원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5] 달리 말해 창조에 대한 독려가 여전히 사회적 권리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작동하지 않고 고용 유인이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원사업이 되면 적절한 예술가가 된다”라는 한 청년연극인의 자조적인 표현처럼,[6]지원적격한 예술가로 인증받기 위해 수백 장의 기획서를 쓰고 활동증명서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 자체가 공연예술계 내부의 경쟁 게임을 부추기고 있다. 예컨대 ‘대학로 인력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인들의 소통은 외견상으로 매우 활발하지만, 필자가 경험하기로 각자의 예술관이나 지향성에 대해서 진지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현재 누구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업에 지원할 예정이며 다음번에는 어떤 ‘판’에서 작업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보통 노 개런티에 가까운 공연을 전전하는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경우에는 거리극, 단막극, 영세한 페스티벌 등에서 경력을 쌓아 이름 있는 중·대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장기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프로젝트 극단 중심의 자율적인 협업 체제가 점점 더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사업’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유지되는 한 결국 기존의 경쟁 구도 속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유력한 서울 시내의 극장, 명망가에 의해 지휘되는 극단, 거대 협회 주도의 페스티벌 등에 지원사업이 쏠려 있는 한 엥떼르미땅들이 다양한 삶의 형태들, 전략들, 기술들을 통해 “대항품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난망해진다. 랏자라또는 신자유주의야말로 “다문화주의”의 옹호자라고 말한다. 주체들의 실천을 겉보기에는 다양해보이는 수준으로 관리하는 기술, 그러나 각 계층들과 실천들 사이의 미분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조장하는 기술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혁명”의 위험을 저지하고 경쟁의 원리를 보존한다.

엥떼르미땅의 연대체가 감시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좀 더 나은 지원사업으로 무마하는 것, 새로운 복지사업으로 눈을 가리는 것, 그리하여 국가는 역할을 다했고 문제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자신을 경영하지 못하는 엥떼르미땅들에게 있다는 인식을 시민사회에 유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은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에 가로놓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진단서 내지 경고장이 될 수 있다. 공연예술은 끊임없이 공간 속에 실현되고 또 사라진다는 물질적 기호성을 갖는 장르이다.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빈 시간들”에 충분한 경의를 갖는 것, 비록 그 시간들을 무(無)로 환원시키는 자본의 논리에 고통받을지라도 그것이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전략”[7]에 불과함을 잊지 않는 것,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더 많은 연대체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 이 글은 필자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8년 5월 26일 개최한 『정치 실험』 서평회에서 발제한 서평입니다.
[2] 랏자라또는 엥떼르미땅(intermittent)을 “불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며 특히 공연,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고 밝혔다. 『정치실험』 9면.  
[3] 이종승, 「예술인 복지 정책, 당연권리인 사회보장제도에 진입하기 위하여」,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4] 노이정, 「연극 예술 지원 정책의 개혁 방향」, 《연극평론》 87호, 2017 참조.
[5] 김태희, 「확대되는 청년예술가 지원사업, 서울시와 예술가의 동상이몽」,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6] 김기일 작가·연출가의 발언. 송경화, 「우리는, 사람을, 만났다」, 《웹진 연극in》, 2017. 5. 11에서 인용.
[7] 류주연 연출가의 발언.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경남 창녕군 길곡면> 월례비평」, 《공연과 이론》 69호, 2018.에서 인용.  

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비유로 말하라》 : 말함과 들어줌의 새로운 역학

《비유로 말하라》, 유진 피터슨, 양혜원 역, IVF, 2008.
-말함과 들어줌의 새로운 역학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우리는 누구나 전적인 발화자 혹은 청자가 될 수는 없다. 때로는 스스로 발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청자가 되어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는 성장기에 줄곧 발화자가 되는 편을 좋아했다. 특히 연애를 할 때에는 가관이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기만 하면 연애를 하곤 했는데 여기에서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건 다시 말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차츰 성장하면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 정성을 다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인 만큼 나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 발화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몰입력이 깊어지면서 상대에 대한 친밀감과 공감력이 함께 깊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여 이제는 어느 편이 이야기를 하고 어느 편이 들어주는가라는 일방적인 관계의 지평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얼마나 들어줄 만큼 깊은가 그리고 또 나는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발화할 마음이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말함과 들어줌, 이 두 행위 사이의 일방적인 방향성 혹은 두 행위 사이의 양적 차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이 두 행위 사이의 쌍방적인 행위 자체에도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는다. 말함과 들어줌, 이 두 행위 사이에 형성되는 질적인 깊이, 너와 나 모두가 ‘아닌’ 우리 사이의 것에 집중한다. 오히려 우리보다는 우리의 ‘사이’, 언어보다는 ‘비’언어가 더욱 신뢰할 만한 것이다.

  이 생각에 도달하니 이야기를 듣는 것과 이야기를 하는 것, 그 행위 사이에는 그다지 큰 차이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야기를 주고받음, 그 안에서 형성되는 충일된 에너지, 어떤 새로운 숨결의 창조, 그것에 몰입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한 에너지에 집중하며 대화를 하고, 강의를 하고 나면, 혹은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나면, 너와 나 사이의 구분, 나와 세상 사이의 구분이 조금 볼품없이 부식되어 있어서 좋다. 관계들 사이의 장막이 남루하게 낡아져 있어서 좋다. 그 형편없는 남루함, 초라함과 낮아짐이 좋다. 그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이 맑아져서, 그럼으로 세상과 나, 존재와 가치를 둘러싼 구분들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신뢰할만한 언어의 형태는 (이를테면) 춤이다. 춤은 순간순간 변화하면서도 변화하는 형체조차 어떠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순간 안에서 솟아오르며, 솟아오른 그것은 오로지 공간과 기억 속에서 이내 사라지고, 다시 다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존재하나 끊임없이 사라지는 춤이라는 에너지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발화 에너지이리라. 춤의 에너지를 닮은 또 하나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시(詩)일 테다. 시와 춤의 공통점은 발화자와 청자, 주체와 상대가 (일상 언어를 주고받을 때의 주체와 상대에 비하여) 덜 가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춤 혹은 시로 소통하는 두 명의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두 명의 사람은 정작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 두 사람이 빚어내고 있는 춤 혹은 시가 돋보인다. 아니 우리 눈에 돋보이는 그것은 춤 혹은 시도 아니며, 춤과 시가 빚어내는 공기의 밀도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춤과 시가 가장 온전하고 훼손되지 않은 절정의 소통 에너지라면? 만일 소통의 가장 이상적인 실체가 춤과 시라면? 그토록 소통하고 싶어 하고, 그토록 이해받고 싶어 한 우리의 종착지대가 춤과 시라면? 이 책은 지금의 시기에 내가 당도한 소통과 진실과 화해와 가치의 ‘절정 지대’에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 준다. 유진 피터슨이 <비유로 말하라>에서 고찰하고 있는 텍스트는 성경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고찰하는 발화란 인간의 육성에 깃드는 구술 언어의 힘, 그 힘조차도 초월하는 (신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고찰하는 들어줌이란 끊임없이 구조화되지 ‘않은’ 채의 이야기들, 마치 여행 중의 발걸음처럼 자연스럽고도 불확정적인 것들 모두를 걸러냄 없이 받아주는 흔연한 들어줌이다. 말함과 들어줌의 역학 안에 신이 개입되자, 춤과 시의 지대 안에서 맛보았던 소통의 최대치가 다시 한 번 남루하게 부식된다. 황홀함이 초라함이 되는 순간. 최대치라고 믿었던 에너지의 정밀함이 흐리멍덩한 공기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주변의 것들과 비로소 섞이는 순간.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져서 지금까지의 구분과 정의,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으나, 인간이 신을 바라볼 때(혹은 신을 향할 때) 신을 닮을 수는 있다. 그리하여 신의 기운에 전염된 눈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것. 그것은 비단 예술만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시선이다. 학문과 예술과 삶에는 ‘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시선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고 삶을 지속하는 일은 그것의 종착점을 신이라는 단어로 발설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