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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1일 목요일

흑백영화에서 과부의 피를 만나다: 영화 <열녀문 Bound By Chastity Rule, 1962>

by 김재영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은희 특별전(2013년 6월 13일 ~ 30일, 시네마테크 KOFA 1관)’을 통해 영화배우 최은희의 영화 25편을 상영하였다. 그녀는 1947년 <새로운 맹서>라는 영화로 데뷔하여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1978년 북한으로 납치되어 남편인 영화감독 신상옥과 북한에서 <불가사리>, <소금> 등의 영화를 제작한 후, 198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녀의 굴곡 많은 삶의 흔적은, 마치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영화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시대까지 격변하는 시대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그 속에서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2년 개봉하여 제2회 대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열녀문(감독 신상옥)> 역시 과부의 정절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과 여성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을 통해 여성의 행복한 삶은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작품은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도시에서부터 농촌으로 빠르게 개화가 진행되고 있던 1920년 무렵, 어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평생 과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양반집 아씨(최은희 역)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아씨의 시할머니(한은진 역)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는다. 시할머니는 아씨에게 ‘신불사이군 여불사이부(臣不事二君 女不事二夫) 즉,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며, 외부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를 은장도로 찌르며 마음을 다스리라고 가르치는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이 집안의 머슴인 성칠(신영균 역)은 아씨를 연모하고 있는데, 그는 여성이 자신의 사랑과 욕망에 충실해야 하고,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결국 아씨는 성칠과의 동침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지만,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시아버지의 반대에 막혀 재가하지 못하고 성칠과 아이를 다른 마을로 떠나보낸다.

이 영화에서 아씨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그녀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속하고, 대상화한다.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등 양반 가문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아씨의 고독한 인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녀의 고통과 희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을의 남성들은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새참을 이고 논을 걸어가는 아씨에게 홀아비인 남성이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알고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지’라는 노래를 읊조리며 수작을 부린다. 아씨가 새참을 성칠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숲길에서 다른 남성은 아씨를 강간하려고 하다가 성칠에게 맞고 도망간다. 시동생은 비교적 아씨를 잘 따르고 위하지만, 상사병에 걸린 소년처럼 형수를 사모하는데, 형수가 성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배신감에 그녀를 괴롭히고, 모욕하려고 든다. 성칠은 그녀를 가장 아끼고 그녀의 삶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이지만, 그 역시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나긴 가뭄으로 논이 바짝바짝 말라가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환희에 젖은 채 아씨를 부둥켜 안게 되고, 이를 거부하며 뿌리치는 아씨를 쫓아가 반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