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6일 목요일

O…U

장 혜 경 (https://mailhide.io/e/PFTnlLsC)

발이 보슬보슬하다. 이전은 서걱서걱했다. 마당은 잔디와 돌 몇 덩이로 차 있었다. 그래서 서걱서걱했다. 신발은 발과 함께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슬보슬하다. 공연 전 원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관객이었다. 카펫 바닥이 양말과 마주 댈 때마다 보풀이 수많은 알에 달라붙고자 했다. 오른 벽에 돋은 계단을 오르자, 방 몇 개와 창이 있었다. 닫힌 문 하나를 열자 흰 양복 차림 한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한 사람은 두 층에 병존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내려가 피아노를 쳤다. 공간에 들이치는 흰 양복 차림 한 사람. 2층 관객은 다가들고, 1층 관객은 자리 잡았다. 공연에 익숙한 집단 습성인지, 외부 자극에의 호기심인지 단정 짓기 어려웠다. 시작 시각에서 약 3분이 흐르고, 서걱한 출입에서 스포이트로 손등에 물방울을 내려준 한 사람이 공연은 마당에서 시작된다고 알렸다. 정박했던 관객은 일제히 신발 차림이 됐다. 발이 서걱서걱하다. 관객은 안내에 따라 마당 한 귀를 에워쌌다. 발이 참 많다. 등장한 한 방울의 나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발 틈으로 흘러온 나의 말은 메이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메이는 파란 지구에서 빨간 지구를 산다. 사람이라 테두리 바깥에 붙어 산다. 대리나 주임쯤을 단 주변 사람을 위한 날에 빨갛게 동그라미 친다. 그들은 사람이라서 테두리 안에 산다. 워낙 잘 우는 메이에게서 태어나자마자 발밑으로 굴러떨어진 나. 이번 생은 웅덩이라지만, 눈물이었던 지난 생에 고여 있는 듯했다. 소리도 진동도 필요 없이 표표히 돌단 위 창으로 들어가 따라오라 손짓하는 나. 도로 양말 차림을 하는 관객. 발이 보슬보슬하다. 발의 감촉을 잘 기억해 두자. 

떠도는 나에게 강이 말을 걸어온다. 대화는 모두 피아노로 걸려 온다. 흰 양복 차림 한 사람이 치는 고체음. 고체를 매질로 두고 벽으로, 바닥으로, 그러다 공기로 퍼져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음은 대체음이기도, 아니기도 할 것이다. 다른 존재인 오리나 바람이라면 변환되어야 말이 통하겠지만, 같은 물인 강과 바다는 변환이 무용하다고 추측했다. 이 고체음은 나에게 말이 오는 형태이며, 같은 언어를 쓰든 쓰지 않든, 그리 오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반드시 ‘피아노 소리’로 온다고 확신할 수 없다. 사람에게 내가 받는 형태를 변환한 결과로써의 피아노 고체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어째서 이 음이 대체음으로 발탁되었을지를 나의 말에서 알아내길 바라며 들었다. 강은 제법 큰 물인데도 괄괄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나에게 차근차근 교섭을 시도한다. 나는 기죽지 않고, 도리어 강이 나와 함께 ‘나’가 되고 싶어 한다고 알아듣기도 한다. 강도 물러서지 않고 함께 강이 되자고 설득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큰 물은 기쁘지 않다면서. 이는 ‘’ 개념과 상응한다. 나는 합주 전 조율을 위한 ‘라’ 음을 내듯, 명상을 위한 ‘옴’ 소리를 내듯, 낮고 일정한 음정의 ‘온’을 길게 빼낸다. 물세계에는 물 하나에 온 하나라는 규칙이 있다. 온은 전부이자 일부이다. 모든 온은 단일 개체의 전부이고, 복수 개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한 방울의 전부를 상실하지 않으려 강을 거부한 것이다. 난 두려운 게 아니야, 그리운 거야. 물에게 죽음은 이전의 나와 다음의 내가 ‘너’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죽음은 나 하나 떠내려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메이를 잃는 것이다. 메이의 일부였던 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실이 아닌 상실이다. 나는 넘실거린다. 저러다 부딪혀도 섞이지 않을 관객에게 넘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동화의 춤’은 화려하고, 전형적인 춤 같았다. 즐거운 기색으로 나풀거리는 나에 매료되어 그만 ‘동화’를 동심 가득한 의미로 알아들었다. 착각에서 건져 올려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갈라져야 했다, 거실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나를 위해. 따뜻한 노란 빛을 내는 구체 조명이 하얀 다각형 탁상 아래 놓였고, 저녁의 푸른 빛이 마당 풍광과 한데 비쳐 들어오는 얇은 커튼이 홍색 중심의 긴 털실 구조물과 같은 높이에 걸려 있는 방이었다. 이 털실 구조물은 계단 옆에서 아래로 걸린 거미줄 같은 구조물과 비교했을 때, 그물 같았다. 갈라져야 했다. 길을 터주는 것은 나를 따르는 것이다. 이전 이동에서 맨 앞 관객이 다음 이동에서 맨 뒤 관객에 되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벽에 바싹 붙어 나를 보았다. 

쿵쿵 소리가 뒤꿈치 같았다. 강물이 되지 않기 위해 도망쳐 들어온 곳이 오리의 뱃속이라니. 건반 모르게 밟은 페달도 음을 낸다. 실낱같은 심음은 박동에 간신히 붙어 있다. 설명 앞에 서는 알아차림. 오리 뱃속임을 몰랐다 뿐이지, 방과 울림으로 생명체 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메이의 눈물. 오리가 될 순 없어. 실핏줄을 뒤집어쓰면 부속될 수 있다. 전부는 아니 될 수 있다. 털실 구조물을 쓰고 탁상 위에 앉아 기울이고 펼치는 나. 빛나는 구체를 쓰다듬는다. 너와 함께 네가 되고 싶어. 그 말이 어디를 향하는지 생각했다. 살아있는 알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나. 알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더 있었는데, 어째서 기억이 흐릿한지 나는 의아해한다. 살아있는 알은 아기 오리로 되고, 나는 거실 계단에 앉는다. 다른 벽에 바싹 붙어 그림자극 마임처럼 손과 팔로 나타낸 아기 오리를 구경했다. 통통 튀는 고체음. 더 이상 아기가 아니더라도 아기로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아기 오리에게 비비라는 이름을 준다. 정작 나는 이름을 받은 적이 없다. 메이는 사람이고, 사람은 눈물을 방울방울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눈물은 기억에서 감정으로 흐르며 나오는 부산물이고, 떠날 것이 확실하니 미련 없이 기억으로 상납하는 한 때의 유실물이다. 눈물 전후로 감정이 차 있고, 그 감정은 눈물 전후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눈물은 감정의 과도기이자 기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눈물은 방울방울 다르지만, 유일하지 않다. 나는 메이의 눈물 중에서도 한 방울로 존재하지만, 한 방울의 ‘나’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잊지 않아도 잊히는 기억을 말하던 내가 떠올린 기억. 비비의 엄마가 나의 일부를 먹은 일. 잊힌 알의 기억이다. 이는 메이의 눈물이 아니게 되고서 그 사실조차 모르게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충격에 휩싸인 나는 잠시 거실 안쪽 격자 유리 미닫이문을 닫고 모습을 감춘다. 

다시 나타난 나는 바다에 흘러들어 있다. 거칠고 사납고 아주아주 큰 물. 더럽지만 섞이지 않을 농장용 비닐에 들어 있다. 미닫이문이 열리지 않게 등으로, 팔로 버티던 나는 속절없이 젖혀진 오른 틈으로 배출되고 만다. 비닐에 구멍이 났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나. 위아래 문틀에 매달려 몸통만이 관객을 향해 굽이친다. 물 하나에 온 하나. 규칙에 따라 나는 ‘동화의 춤’을 춰야 한다. 이는 병합 의식이다. 물에게 잊어버림은 잃어버림과 같으므로, 나에게 동화는 위협이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던 물세계는 경직된 체제로 있던 것이다. 격랑을 헤쳐나온 나는 하나도 깨지지 않은 나의 ‘온’을 확인한다. 온은 구슬으로 표현된다. 피아노 고체음이 발탁된 이유를 다시금 상상했다. 공기음은 끝이 흩어진다. 반면 고체음, 특히 피아노 음은 끝이 구른다. 음으로 된 구슬 같다. 참 아름다운 경직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구슬이 깨진다. 바다의 온이 깨진다. 바다가 내가 된다. 나는 어디서든지 메이를 느낀다. 메이에게 뻗은 팔은 거둬지지 않고 해일이 된다. 그리움에 죽지 못해 죽인다. 물의 그리움은 이기심이라고 바람이 그랬던가. 묻어둘 수 없는 물은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널브러진 나는 나를 멈춰 달라 애원한다. 잦아든 바다는 나로서 계단을 오른다. 

계단 끝 벽 시작 면에 바싹 붙어서는 왼쪽 방에 쏙 들어간 내가 보일 리 없었다. 방 앞 바닥 희미한 털실 한 둘레만 보이다 메이를 찾았다며 창 앞에 나온 나도 보이게 됐다. 빨간 밧줄을 나뭇가지에 묶는 메이를 보고 있다. 나는 메이가 무얼 하는지 안다. 죽고 싶어. 메이는 고체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와 말한 적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간간이 내가 입에 담는 죽고 싶다는 말은 분명 메이의 말이었을 것이다. 죽음이 물세계 순리라 치더라도 나는 메이를 그리워하기에 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리움에 지쳐 순리를 따라가려 했더라도 필히 저항의 말을 따라붙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명한 근거는, 죽고 싶어라고 할 때만 뚝 떨어지는 음조였다. 메이에게서 뚝. 떨어질 때 흘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은 말보다 감정을 담는다. 죽고 싶어와 같이 태어난 내가 그토록 애타는 마음을 짓는 것은, 메이 안에서 몇 번이고 내쫓긴 애처로움의 반영이리라. 메이에게 가야 한다. 말리는 바람을 제치고 위로 오른다. 2층 창 맞은편에는 계단이 든 방이 있었다. 무수한 물방울에게 사과할 틈도 없이 밟고 위로, 위로, 구름의 꼭대기로. 관객은 이동할 틈도 없이 나와 꼭대기에 와 있다. 나는 마침내 기억하려는, 움직이려는, 사라지지 않으려는 힘, 물의 근원으로서의 ‘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한 사람의 관객에게 준다. 스물다섯 명의 한 사람에게. 어느 한 사람 빠뜨리지 않고 부어준다. 관객에게서 관객으로. 벽 구석에 붙어 있던 관객이라 받지 못하고 넘어가나 싶었지만, 나에 의해 한 바퀴를 더 돌아 받게 되었다. 그 세심함에 정말 물로서 온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눈송이가 되었다. 바람이 성을 낼수록 더 멀리 날아갔다. 나는 메이 가까이에 간다.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너는 눈에 부러진 나뭇가지로 살아남기도 하고, 내린 눈에 파묻혀 다음 계절까지 그곳에 있기도 하고. 무수한 눈송이만큼 무수한 너를 보는 한 방울의 나. 나는 너를 향해 하강하는 거야. 내리는 눈과, 계단을 내려가는 나. 열린 1층 창 한구석, 그 앞에서 끝을 낸다. 꼭대기에 오른 한 방울을 닮은 조명 곁에서, 한 방울의 내가. 

발의 감촉을 기억했는가? 이 공연에서 발의 감촉은 곧 이동이다. 이동은 곧 나의 흐름이다. 관객은 공연 전 서걱한 밖에서 보슬한 안으로 유도 받았다. 공연이 밖에서 시작된다는 예고는 없었으므로, 관객은 주로 안을 탐색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서걱 다음 보슬이라는 ‘감촉 경로’를 공연 전에 한 차례 밟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서걱 다음 보슬로 이동한다. 공연도 공연 전과 같은 경로를 탄다는 뜻이다. 그런고로 관객은 몰입 전 현실에서 한 차례 몰입의 이동을 경험한 셈이다. 이는 어딘가 모르게 이전의 나와 다음의 나라는 물(水)적 개념을 연상시킨다. 서걱에서 보슬이라는 이동을 두 차례 겪어 완결된 구슬 같은 순환 구조를 띠는 관객과 달리, 나는 서걱에서 보슬로 한 번 이동한다. 관객이 현실과 몰입으로 뚜렷이 나뉜 경직된 질서를 갖춘 것과 달리, 나는 혼재된 흐름을 지닌다. 마지막 장면은 완전한 안도, 완전한 밖도 아닌 곳에서 진행된다. 작은 스툴에 앉은 내가 기억을 되짚는 나인지, 기억의 나인지 알지 못한다. 이를 ‘나로 넘어진 나’로 풀어 보았다. 한 방울의 나는 ‘나’로 넘어진다. 한 번은 나를 잃지 않으려, 한 번은 나를 잃으려 넘어진다. 시작은 메이의 눈물로 있기 위해, 끝은 메이에게 가기 위해.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나를 잃지 못하고, 나를 잃어서라도 너를 향한 것이다. ‘나’로 넘어진 나의 ‘온’은 그래서 눈물 모양이 된다. 시작과 끝이 ‘나’로 매듭지어지는 구슬에서, ‘너’로 이어지는 눈물로. 너와 함께 네가 되고 싶어…

*필자 요청에 따라 대사 인용은 굵은 글씨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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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승태


한 방울의 내가

2024년 5월 23일(목) ~ 26일(일)
LDK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20길 8)

출연 | 경지은
작 | 현호정
연출 | 우지안
안무 | 하은빈
음악·연주 | 오정웅
미술·의상 | 윤이람
PM | 박종주
영상 촬영 | 김예솔비, 박정연
사진 | 전인
‘작은 모래알’ 원안 | 하은빈
그래픽 디자인 | 정소영
포스터 서체 | Velvetyne BianZhiDai
주최·주관 | 현호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작·공동창작 | 안티무민클럽AMC

2024년 6월 3일 월요일

예) 하고 흔들다.

장 혜 경 (https://mailhide.io/e/PFTnlLsC)


 사과는 장하다.
꼭 이상적인 사과가 아니더라도 사과에는 가죽도 있고 속살도 있고 뼈도 있어서, 곧추세운 척추뼈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깔끔하게 관통할 듯싶으니 말이다. 뼈는 가지런하게 어질러져 있어야 한다. 무작정 팔뼈를 앞으로 뻗어 줄을 맞추자, 옆으로 누워 껍질만 덮고 과육은 빼낸 일자허리 제물이 된다. 차갑고 딱딱한 제단에서 구른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성스러운 빛에 잘 쪼여야 한다. /바치기에 족한가요/ -내셨잖아요 /제 뼈가 그렇게 고아한가요/ -과하다 할 정도는 아니고요 오래 앉아서 문서 작업을 하세요 /사무직이냐고요/ -아뇨 이제 공연 기술 좀 하시라고요 그만 딴짓하고
예?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는 감각하랴, 기능하랴 바쁜데 아프기까지 한 신체를 한탄하는 몸의 책임자가 등장하는 극이다. 각기 다른 몸 셋 깊숙이 같은 몸 하나가 묻혀 있는 느낌을 준다. 그것이 잃어버린 몸이라면, 단서가 될 몸을 파헤쳐야 한다. 몸을 찾기 위해 몸을 해치다니, 지독히 의학적이지 않은가. 과연, 하루 8시간을 앉아서 근무하는 사무직 종사자는 허리가 아프다. 누구도 통증을 받고 싶지는 않다. 돈을 바치고, 몸을 바친다. 병원 측 재량에 따라 나누어 찍고, 나누어 뽑고, 문제만 추린다. 돈은 진료로 돌려받고, 통증은 평온에의 고대로 돌려받는다. 그래서, 몸은 돌아오는가? 돈은 바꿔 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통증은 버린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좇아오겠지만). 몸은 돌려받을 수 없다. 몸은 돌아와야만 한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 있는 부분을 자료로 설명받을 뿐이다. 

TV로 송출된 척추 엑스레이 사진을 곁에 두고, 병명을 밝히기까지의 여정은 배우1 (이동영 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배우2 (정나무 분)가 보라색이고 초록색인 우유 박스 하나당 주어진 네 개의 옆면을 돌려가며 차별 없이 바닥에 내려쳤고, 이는 매우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배우2가 우유 박스를 소리 내서 선별하는 반복은 노동이고, 차차 생긴 리듬의 빈 구간을 찾아 말을 끊어 연골로 넣는 배우1의 요령은 적응이다. 노동은 적응할 생각이 없다. 요란스레 걸러낸 박스를 바닥에 ‘1’ 자로 길게 나열하면, 배우2와 배우3 (박정근 분)이 위를 밟으며 부적합한 박스를 쳐낸다. 척추관협착증은 사진으로 체감된다. 병으로부터 죽어라 도망치고 싶을 때쯤 의사가 물증을 들이민다. 누가 진단명으로 머리를 뎅 치고 간 것 같다. 직후 나온 가톨릭 성가는 이러한 환자의 심정을 잘 헤아렸다.

사과는 비장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쌓인 우유 박스 탑 위에 군림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아닌 것이 자신으로 비유되는 일을 묵과해야 한다. 배우2는 우리가 이미 진짜 사과를 알고, 먹어본 적 있으므로 우유 박스 탑 위의 비대한 사과가 가짜임을 안다고 했다, 몸에 들어 있는 체계로 판단한다고. 그러면서 진짜를 깨문다. 신체는 비참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세운 뼈대 구조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몸 아닌 신체가 내 몸으로 여겨지는 일을 묵인해야 한다.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모두의 것이다.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지극히 혼자의 것이다. 사과의 경험이 베어물지도 않은 사과를 가짜라 판단하듯, 몸의 경험은 겪어보지도 않은 몸을 선뜻 기각한다. 다각도로 바라보면 해결될까? 어느새 배우1은 캔버스 같은 것에 사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다. 세잔이라는 화가는 온 방향에서 묘사한 사과를 탁상 하나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 뻑뻑한 물감으로는 매끄럽게 사과를 그릴 수 없다. 그러다 옆의 배우3에게 묻는다, 가짜 사과를 얼마에 샀냐고. 자그마치 구만 구천 원! 진짜 사과도 하나에 만 원이나 했댄다. 라면 몇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이 짧게 흘러나오고) 비스듬한 각도로 우측에 앉아 사과를 먹는 배우2의 얼굴이 앞에 놓인 카메라로 촬영되어 TV에 송출되며 그 맛있어하는 표정을 벚꽃이 일찍 개화할 만큼 심각한 기후변화와 심각하게 치솟는 과일값과 심각하게 감소한 수확량에 관한 뉴스 기사 제목들이 날개 돋친 듯 긁고 지나간다 (숨). 미학적 사과를 논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세잔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네 사과 ‘각’이기 때문이다. 생중계되는 그는 자신이 오른손잡이라 말하며 왼손으로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익숙하고 전형적인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살아있는 일을 한다면서. 손흥민이 왼발을 훈련했듯, 쓰면 쓸수록 단련되는 왼손의 감각을 좋아하는 그의 손놀림은 아슬아슬하다. 아니, 딱히 그 부위가 클로즈업되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다시 사계 중 봄 1악장, 짧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가느다란 전신거울 같은, 그런데 많이 두꺼운, 접이식인, 투명한 듯 그렇지 않은, 뭔가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반지러운 재질의 은빛을 표면으로 두른. ‘그것’이 왔다. 그것은 무대 좌측 구석에 놓이고, 볼록할 철(凸) 모양으로 쌓인 우유 박스 구조물 오른편에 배우3이 앉는다. 배우1은 흰색 물백묵으로 배우3의 얼굴을 그것에 그리기 시작한다. 단, 대상물의 설명에 의존할 것. 대상물3은 이목구비 이모저모를 털어놓는다. 순간, 조목조목 말하던 그가 우물우물한다. 그리는 사람1은 되묻는다. 뭐라고요? 대상물은 마지못해 분다. 그 설명에는 불만이 섞여 있다. 낯부끄러워 고객 센터에 접수하기는 그른 불만이다. 아무리 생김새에 창피함을 느낀대도 TV는 가차 없다. 이 광경은 대상물1과 그리는 사람2 간에도 펼쳐진다. 관객의 눈알은 무대 가로선 끝에서 끝으로 굴러다닌다. 순수 설명으로 그려지는 얼굴과 순수 기술로 송출되는 얼굴. 몸은 그 사이에 끼어 안중에 없다. 관객에게 희끄무레한 ‘진짜 얼굴’은 뒷전이 된다. 마지막 순서인 대상물2와 그리는 사람3에게 장면이 그대로 운반되지 않는 것으로, 몸은 더 찌그러진다. 대상물2가 변칙적으로 “메롱” 했기 때문이다. 이목구비 설명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없이 “메롱”이다. 혓바닥을 내미는 수만큼 혓바닥이 그려진다. 관객은 웃는다. “메롱” “하하하” “메롱” “하하하”. 대사 사이에 낀 지문을 펴서 보면 이렇다. “메롱” (관객이 TV의 혓바닥을 본다) (그리는 사람이 혓바닥을 그린다) (관객이 그려지는 혓바닥을 본다) “하하하”. “메롱”으로 TV는 관객 충성도를 얻었다. ‘그것’에는 차곡차곡 쌓인 가짜 얼굴 셋이 남고, 그것을 보기 위해 등진 배우 셋은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을 부른다. 사과 삼중창은 화음이 없어 하나씩 그만두어도 싱겁지는 않다지마는, 홀로 남겨진 배우3은 헛헛해 노래를 멈췄을지 모를 일이었다.

TV는 잠시 고전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튼다. 영화가 끊기기 무섭게 중앙에 세팅된 우유 박스 무리가 무대 역을 맡았다. 구겨진 돌 같은 얼굴을 쓴 배우3. 아니, 괴물의 이야기가 무성영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역을 맡아 우유 박스 위나 주위에서 연기를 하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맡아 내용을 내보내는 것이다. TV: 생김새 탓에 배척당하던 괴물이 어느 날 창문으로 보인 한 가정집 풍경을 동경하게 된다. 괴물은 열심히 가족을 모방하고, 방문하기에 이르렀으나, 구타당한다. 짓밟힌 괴물은 우유 박스에 걸터앉아 탈을 벗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벗는다. 배우3. 아마, 괴물은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괴물이라 불리고, 자신은 그 모습을 “너”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어 배우3. 혹은, 괴물은 말한다.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제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가 아픈 거예요.” 불가역적 변화를 일으킨 몸은 여전히 나로 감각되지만, 통증은 끊임없이 잃어버리기 전을 상기시키며 “너”로 분리되기를 권한다. 현존을 강제하는 동시에 한사코 반대하는 얄궂은 감각이다. 아픔은 몸을 모아 이름을 알린다. 하지만 아픔이 곧 몸이 될 수는 없다. 아픔의 이름이 몸의 이름을 대체하게 둬서는 안 된다.

배우들은 우유 박스를 계단처럼 좌우로 쌓아 마주 앉는다. 자, 어딘가 아픈 곳을 떠받들고, ‘아야아야’ 희랍 비극같은 울음을 내는 가면 쓴 현대인들이 납신다! 물론 가면은 ‘그것’에 그려진 ‘가짜 얼굴’들이고, 울음은 말소리지만 말이다. 대화가 아닌 말소리다. 재건축이라든가, 입봉작이라든가, 요양원에서 일하며 만난 치매 환자라든가. 저마다 하고픈 말만 하기 때문이다. 기껏 마주 앉아 놓고 마주 보지 못하는 노릇이다. 그게 영 갑갑했는지, 배우2는 가면을 벗고 일어나 관객을 마주한다. 요양원 이야기를 잇는다. 치매 예방에 좋은 손벽치기, 손등치기, 손끝치기 (배우는 관객에게 따라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것은 스킨십이랜다 (배우는 객석에 돌격해 열마다 목차처럼 선다). -우리 서로 옆자리 분과 손을 잡아볼까요 /예?/ -악수 말고 손을 잡으시라고요 /예/ -어떤가요 차가운가요 /예/ -지금 내가 손을 만지는 걸까요 상대가 내 손을 만지는 걸까요 /예/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마다의 울음은 마주치지 않아 관객에게 튄다. 어리둥절하다. 본 극에서 주된 긴장을 유발하던 구도는 TV와 몸이라는, 가로선이 아니었던가? 가로용지를 긴 쪽으로 넘기듯 객석으로 덮쳐온 장면이 버거웠다. 시종일관 변해버린 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화자가, 당신들은 몸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던 것이었을까? 아픈 허리를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의자였다. 통증은 유사 경험자 간의 공감을 매개로 거리를 좁혀 밀착시킨다. 불꽃이 튄다. 아픔을 나누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부지불식간에 어떤 ‘몸’으로 분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똥이 튄다. ‘손잡기’를 요구한 맨얼굴의 배우들은 무대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 대화 아닌 말소리를 낸다. 멀찍이 떨어지고픈 관객이 된다.

TV는 600타 타자 실력을 가진 사람의 스크립트와 내레이션을 튼다. 키보드를 바꾸고 나니 타자가 느려져 할 일을 시간 내에 마칠 수 없어 곤란하다는 말. 당장이라도 도로 600타를 칠 수 있는 키보드가 필요하다는 말. 몸은 당위에 진다. 해야만 하는 일에 무뎌져야 하고, 무뎌지지 못하면 걸러진다. 600타를 치는 나는 원래의 몸, 600타를 못 치게 하는 키보드는 변해버린 나의 몸. 비친 나를 “너”라고 부르던 그처럼, 우리는 병들어 가는 몸을 수긍하기 어렵다. TV는 신체검사 결과지를 튼다. 배우1: 참여 등급, 배우2: 3등급, 배우3: 2등급(민첩성 평균 이하). 무대 가운데를 천천히 줄지어 도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2: 앞, 배우3: 중간, 배우1: 뒤. TV는 그들의 모습과 내레이션을 튼다. 길을 가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주변인은 웃게 된다는 말. 주저앉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출 영상 속도가 빨라지고, 뒤이어 배우들도 빨라진다). 습관은 속도를 정했고, 그 속도를 바꿨어야 했다는 말 (배우2가 갑자기 신발끈을 묶는 바람에 배우3이 넘어지고, 배우3의 발에 걸려 배우1까지 넘어진다). 내레이션이 끝나고 (나머지 배우들 사이로 우뚝 선 배우3은 대략 이렇게 고함친다). “이게 다 내 탓이라고? 내 부족한 민첩성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나는 2등급이야. 이 사람들보다 더 높은데. 어우!!!!! 으아아아아!!!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측정 도구가 세밀해질수록, 개인의 몸은 우거진 병명에 가려진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속죄하게 한다. 비록 키보드에 적응할 시간도, 넘어진 뒷사람을 살필 여유도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잃어버린 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몸은 돌아오지 않는데. 몸에 주렁주렁 열린 과실로 믿어온 수식어와 의미, 의미. 그놈의 의미들이 사실은 치렁치렁 매달아둔 과욕이 아니었을까? 너도나도 결실을 맺기를 원하잖아, 안 그런 척해도 다 알아. 이 일도 저 일도 맺고 맺고 또 맺고 끝맺지 못하는 몸은 필요 없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가로로 긴 TV, 가로로 긴 무대, 가로로 긴 우유 박스
가운데
세로로 긴 엑스레이 사진, 세로로 긴 그것, 세로로 긴 사람들.
떠받치기 지쳐 가로만큼 드러눕고 싶댄다.
여행보다 먼저 여행 브이로그를 튼다거나, 영화보다 먼저 영화 요약 영상을 튼다거나.
날 것의 반응은 줄어들고, 그마저도 감각 기관에 굴려져 뭉툭해지고.
어쩌면 나에게 영원을 약속해 줄 것은 통증뿐일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가로로 가만히 맞잡고 있기보다는
세로로 흔들어 악수하고 싶다.
그것이 당신이든
통증이든 간에,
잘 지내고
싶으니까.


이 이미지는 필자가 공연을 감상하고 글과 한 쌍으로 작성한 두 개의 그림과 그림 제목이 담긴 이미지이다.

위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1이라는 제목이 달려있고아래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2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두 그림 모두 한국어 글자 예의 이응과 여이 예 자를 분리해 늘어놓은 모양이다.

 

하고 흔들기1

이응 하나를 꼭대기에 두고여이 예 자를 아래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세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하고 흔들기2

이응 하나 밑에 여이 예 자 하나를 쓴 조합을 옆으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가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역사시비 4월]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2024. 4. 5. (금) ~ 4. 14. (일)

만드는 사람들
공동창작
연출_정유진
출연_박정근, 이동영, 정나무
조명디자인_전규상
목소리 출연_송정화
기록 촬영_한문희
그래픽디자인_워크룸
기획_나유진, 노지상
공동기획_창작주체 예술공간 혜화
제작_그린피그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지원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