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5‧18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5‧18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홍어와 <짬뽕>

by 에스티

2001년 9월 11일 CNN을 통해 중계된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 장면은 이후 미국 거대 자본 영화에서 반복되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탑이 무너질 때나 <아바타>에서 판도라의 홈트리가 미사일 공격으로 쓰러질 때 우리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저택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스타트랙 다크니스>에서 거대한 우주비행선이 맨하탄에 불시착하면서 고층 건물들을 무참히 파괴할 때 이 장면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앵글을 통해 상호 유사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 상업 영화들에서 이 장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리셰일지언정,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환기됨으로써 악당에 대한 반감과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 일치감이 쉽게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예리한 독자의 눈에는 이 글이 현란한 시각 효과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음이 발각되었으리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문학이나 영상으로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9‧11에 버금가는 사건은 아마도 5‧18일 것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만 하더라도 <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 <화려한 휴가> 등의 작품들이 오월의 광주를 그렸고, 이런 시도는 2000년 후반에 들어 <스카우트>나 <수퍼맨이었던 사나이>, 그리고 <26년>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판에서는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윤정환 작/연출의 <짬뽕>이 지난 10년간 공연되어 왔고, 정경진이 쓰고 고선웅이 연출한 <푸르른 날에>도 세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여기서 이들 작품을 따로 검토하거나 그 우열을 가릴 마음은 없다. 이 작품들 모두 국가에 의해 희생된 젊은 청춘을 애도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에 주목하면서도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연극적 재미를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나 간접적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광주는 결코 단순한 볼거리에 머물지 않는 무게로 다가온다. 이 두 작품의 미덕이기도 한 웃음은 이내 감정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갈 준비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독한 면이 있다. 또한, 장신부, 신작로, 그리고 오민호/여산 같은 피해자들이,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나옴으로써 영혼은 죽어버린”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그후로도 고통과 자기 학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관객들의 양심의 문을 자꾸만 불편하게 두드린다. 물론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그날의 기억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면 그 또한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빨강’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이 작품들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