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丙 소사이어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丙 소사이어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9년 6월 1일 토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3탄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공공연희, 극단 Y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실험,
공동연출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丙 소사이어티의 관찰

@ 홍대 옥탑 작업실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조촐한 규모였다. 작은 방에 4명이 모여 앉았다.
  • 우리는 동시 연출을 시도하려고 했다. 하나의 텍스트와 세 명의 다른 연출.
  • 다만 셋 다 만족할 수 있는 텍스트여야만 한다. 지금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찾기까지 어마어마한 과정을 거쳐 왔다. (일수 연출 멋지게 시를 낭송) 결국 우리의 합의는 바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 라면’ 이다.
  • 동시연출을 위한다면 해석의 여지가 많은 최소한의 텍스트만 가져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라면 뒷면의 기재된 조리법, 그만큼의 텍스트만 취하고 싶었다. 그 텍스트와 이 시 전반에 깔린 정서를 합쳐보려 한다.
  • 우리가 하려는 동시연출이란 그 누구도 방관자가 되지 않는 그런 환경인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오히려 더 방관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 슬프다.
  • 동등한 연출의 위치에서 함께 작업하며 다른 이의 태도를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무척 좋았으나, 책임감이 1/n 이 된다는 것. 부담을 덜 수는 있지만 그만큼 작품에서 한 걸음 떨어져 버리는 것이 딜레마였다.
  • 이번 화학작용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취지지만, 관객들이라 함은 결과에 무척 익숙한 사람들이라 (다른 팀들 또한 알게 모르게 결론 혹은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 것 같다) 준비를 하는 데 쉽지 않다.
맥주 12캔을 비웠다.

오늘 본 것을 丙 소사이어티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일수 연출님이 명언을 남겼다.
나는 철학이 하늘을 향해 뻗는 가지라면 예술은 그 가지에 달리는 열매라고 생각한다.

이 열매를 위해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누군가는 연출 누군가는 배우 누군가는 작가가 되겠지. 또 이 중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기생하기도, 혹은 강요하기도 하겠지.

동시연출로 완성된 공연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은 알지만
지켜본다는 것은 무척 기대되는 일이다.

이들의 과정에 하루 정도 개입해보았다는 게 즐거울 따름이다.


* * *


극단 Y의 실험,
가부장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관찰

@ 동숭아트센터

▷ 극단 Y × 프로젝트 공공연희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

극단 Y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과정에 집중한다는 말은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과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재화로 환산하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결국 좋은 결과물을 토해 내었을 때라야 만이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 부끄럽지 않았다.
정말 그러한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자리였다.
창작자로서 늘 염려하는 바이다. 나 역시 과정에 집중하여 과정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유예했다.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주변사람들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마음과 정성이었다.
나의 작업은 종종 사람을 다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했다.

이번 극단 Y의 연습 공개에 참여하면서 ‘과정에 집중한다.’는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되뇔 수 있었다. 일종의 정신적인 사치를 선물 받았다.
과정에 집중한다는 것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관계를, 사건과 사고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의와 불화. 강제와 강요. 미심쩍음과 침묵. 누군가의 희생. 억압과 묵과. 무언의 합의와 배제.
내가 익숙해져 있던 것들에 대한 딴지에 기꺼이 참여했다. 곰곰하게 고려해야할 이슈를 선물받았다.

유난하고 사소한, 섬세하고 예리한 발언이 난무하는 자리에서 발견한다. 우리 팀 스스로를 관찰해야 할 소실점의 좌표를 다소 확인한다.

오늘 본 것을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팀 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대리인을 당사자 외부에서 선정하여,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부여한다.
- 권리장전 中

감동적인 문구였다.
갈등에 대해 진지하게, 그 해결 방안에 대해 접근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자성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꼭 언급하고 싶다.

2019년 5월 23일 목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2탄 : 丙 소사이어티, 극단 배우들, 극단 Y


진정성은 어디에 있고,
열정은 어디에서 오나?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와 극단 배우들(이하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을 종종, 아니 꽤 자주 후려치곤 하는 어떤 언어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팀들이다. 현재 호명되고 있는 청년 세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청년연극인들은 착취적인 환경에 대해 점점 예민해지는 감각과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사회에 진입한 청년들에 대한 착취는 비단 임금 체불이나 신체적 폭력 같은 물리적인 측면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어떤 기만적인 논리가 위아래를 순환하며 작동하고 있다. 기성이 되어가는 연극인들은 자기들도 가진 게 없다고 주장하며, 연극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들도 무언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일까?   

  병소는 그 물음의 진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다고 본다. 진정성은 정의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병소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성인지는 몰라도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까 뭔지는 몰라도 요구할 수는 있는 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한 대답도, 그것이 대체 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이 늘 열정을 내보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연극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배우들끼리 모여든 팀이라 오히려 그런 문제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우들의 멤버들은 극단에 들어가거나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바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팀을 만들었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배우들 역시 초창기에 프린지 페스티벌을 거쳐 갔다. 2017년에 프린지에서 <죽음과 소녀>의 일부를 발췌해서 용서와 죄책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공연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생 청년팀이 지속적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열심히 고민해서 지원서를 내도 듣보잡은 쳐주지 않는 현실, 연극을 자꾸 멈춰야 하는 현실 앞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연극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들의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마음은 양날의 검이 되기 마련이다. 어쨌든 계속 연극을 해야겠다는 열정은 스스로를 인질화한다. 임금이 무이자 할부마냥 찔끔찔끔 지불되어도, 이름 있는 연출이 연습실에서 재떨이를 집어던지려 들어도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최후의 질문은 “너 열정이 부족한 거 아니야?”일 뿐. 우리가 이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열정이든 진정성이든 그것을 내보이라고 요구받는 것은 언제나 권력 관계의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병소는 2014년 아오병잉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 아오병잉은 아시아+오프+병맛+잉여를 줄인 말로, 병맛 감수성이 인터넷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고 있던 시점에 연극도 잉여성이나 무용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열린 축제였다. 병소는 적절한 판이 깔린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한 마디로 진정성이란 걸 갖추지 않은 연극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한테 왜 그러세요>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3부작 꽁트였다.

  1부에서는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일체형 책상의 앞뒤를 돌려 뒷사람이 앞사람의 책상을 써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앞사람이 움직이면 뒷사람이 글씨가 자꾸 삐뚤어지는 식이었다. 2부에서는 차분한 요가 교실에 뽁뽁이를 깔아놓은 상황을, 3부에서는 좁디좁은 입시 무용학원에서 아이들이 발레 연습을 하는 상황을 보여줬다. 한 마디로 주어진 시추에이션 탓에 자꾸 억울해지는 사람들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메시지를 주려는 강박 없이, 자꾸 망하고 어긋나는 병맛스러운 상황만을 보여주고 거기에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 병소는 그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 없이 연극을 만들어보았던 초기의 시도 중 하나라고 회상한다. 이때 진정성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태도로서의 진지함, 또는 심각함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정과 진정성은 예술가에게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상상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병소는 한국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진실된 마음을 뜻하는 Sincerity와 진품인 것을 뜻하는 Authenticity가 결합된 상태로 통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한테 너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텅 빈 가짜일 것이다, 라는 논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말하는 열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열정과 진정성은 평가 권력을 지닌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할 자기증명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서 내가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를 지켜보고 평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면, 열정과 진정성은 처음부터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또 저기에 있음을, 혹은 잠시나마 여기를 저기로서 경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게 이 연극이라는 가상이 아닐까?”
- 2018년〈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공연 대사 중
  그러면 이 익숙하고 기묘한 단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병소는 진정성이 구성되거나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생기는 어떤  가상적 효과로서 진정성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책상을 무대로 썼던 <꼬마 짱꼴라>(2015)에서 인간을 말로 다룬 <노동집약적 유희>,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에 나오는 빈 의자들의 사물성을 차용한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사물과 신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들을 탐구해온 병소는, 이제 진정성 또한 그러한 효과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듯하다.


   

우리가 가부장 없이
협력하려면

- 극단 배우들 × 극단 Y


  극단 배우들과 극단 Y(이하 Y)는 작업 환경 내에 존재해온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위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 중인 팀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얼핏 보면 연습실은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집단으로 분류되는 팀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계와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할과 보직에 따라, 나이와 서열에 따라, 소속과 성별에 따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작업 환경 내의 위계와 불평등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를 인간적으로 쇼부 쳐서 해결하는 식 말고, 구조적 대안을 고민하는 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은 말 그대로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2017~2018년경에는 ‘창작집단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팀이지만 2019년에 이르러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극단 배우들’로 개칭했다. 연출이나 기술 스탭 등의 보직을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맡지 않고 매 공연마다 상의를 통해 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화를 통한 공동창작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는 점도 이 팀이 멤버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집마차>(2018)는 멤버들 각자의 에피소드를 모아 풀어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배우들은 연출자나 대표자에게 위계적인 중심을 부여하는 대신 배우 간의 평등한 소통을 중시하며 작업을 해온 것처럼 보인다.
  강윤지 연출의 1인 극단인 Y는 매 작업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러브콜을 보내 팀을 꾸리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Y는 수직적인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가부장을 지목한다. 가부장은 기본적으로 한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의미를 확장하여 어떤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Y는 연극계가 가부장에 의한 규율과 관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측면들을 들여다본다. 페미니즘과 젠더감수성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가져가고 있는 Y는 가부장에 의한 통치의 문제를 폭력적인 기율紀律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백스테이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위계 폭력들은 선배님이니까, 연출이니까, 어디 학과 교수니까, 연극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하는 이유 등등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가부장은 가해행위를 정당화하고 피해호소를 억압하는 바로 그 힘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Y가 이야기하는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성의 문제는 연출 중심주의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 하나의 팀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대부분 연출이다. 연출은 공연의 미학적 완성도를 책임지고 감독할 뿐만 아니라 작업에 있어서의 의사결정과정을 이끄는 직책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모든 결정권은 연출에게로 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권한이 막대한 만큼 책임도 막대하다. 마치 가장이라 불리는 존재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가부장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는 연극 사회 내에서 연출직을 맡는 사람은 한 팀을 책임질 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강윤지 연출은 나이가 어린 + 여성 연출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습실에서 엄격하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디렉션을 하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고정적으로 연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는 배우들의 경우에는 팀의 수평적인 관계성 자체가 가부장성을 중화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디렉션을 담당한 멤버와 디렉션을 받는 멤버 사이의 소통이 즉각적으로 솔직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이 팀이 기본적으로 배우라는 존재를 연출이 조종하는 인형이나 표현 도구가 아니라 독립적인 크리에이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만드는 작업은 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미리 결정된 사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는 크리에이터들이 매번 새롭게 부딪혀가며 바꿔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우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즉흥적인 에뛰드 연습을 통해 대본상에 없었던 장면들을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저희끼리 있으면 기본적으로 즐겁긴 해요. 포지션 상 동등하고, 서로의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어요. 다른 팀에서 할 때에는 연출부와 배우진 사이의 마찰이 있거나 선이 있게 마련인데, 저희 팀에서는 그 선 자체가 둥글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관계성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요.” 
- 사무국 × 극단 배우들 인터뷰 중
  Y는 2018년 11월 평등한 제작환경을 위해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을 작성한 바 있다. 가부장성으로 대표되는 작업 내 위계폭력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구성원들 각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들의 세목을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세상에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 서열, 권위의식이 거의 자연화되어 있는 이 연극판에서 대안적인 모델을 찾고자 하는 두 팀의 시도는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 없이도 되던데? 라고 쿨하게 대꾸할 수 있는 팀들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화학작용4] 함께-인터뷰 1탄: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丙 소사이어티


모든 ‘각자들’의 연극,
너와 나의 관계성

- 콜렉티브 뒹굴 ×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과 프로젝트 하자(이하 하자)의 출발점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정극 중심으로 공연을 올리는 대학 극회에서 떨어져나온 이른바 부스러기들이 헤쳐 모여 만들어낸 집단이라는 점이다. 뒹굴은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정극이 정말 재미있는지, 이 시대에 맞는 연극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든 팀이라고 한다. 하자 역시 비슷했다. 정극을 만드는 과정이 성향상 맞지 않는 데다 단체 생활마저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야합했다. 연극다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두 팀의 결성, 때는 2012년이었다.

  대학 극회를 발판으로 삼아 연극계에 진출하는 청년들은 많다. 이 과정은 흔히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장하는 서사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뒹굴과 하자는 세미-프로 양성소에서 착실히 연극수업을 받으며 성장한다는 줄거리를 조기에 절단했다. 그럼, 이 절단된 단면에서는 과연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생장점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뒹굴과 하자가 삐뚤빼뚤하게 걸어온 길은 그런 질문들과 씨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왜 항상 내 삶을 버려두고 예술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혹은 예술을 잘 하는 식으로, 혹은 잘 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너무나 큰 압박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모이게 되었습니다.”
- 2012년 〈니나노 뒹굴〉공연 당시, 성지수 대표의 발언
  뒹굴과 하자의 다른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길 거부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무릇 연극이라 하면 텍스트든, 연출의도든, 극단 기조든 간에 구성원들의 신체로 하나로 끌어당기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뒹굴리안들은 초창기 〈니나노 뒹굴〉 때부터 이미 팀원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 기-승-전-결을 거쳐 가는 작업 방식을 지양했다고 회고한다. 연극이 덩어리로 굴러가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상실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뒹굴이 예술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로부터 꺼내오고 싶었던 것은 각자의 것이었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가져와서 좋은 점을 찾아보고, 그것을 재료 삼아 놀아보면서 발전을 이루는 형태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2016년에 뒹굴은 그렇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갖고 드나들 수 있는 팀, 혹은 어떤 움직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콜렉티브collective를 달게 된다.

  덩어리 상태로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포부는 하자에게도 중요했다. 단체를 만들지 않고서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2~2014년 대학 동아리로 활동하던 시절 하자가 도전한 것은 위계 서열 없는 수평적 상태였다. 무조건 창작극을 하고, 작업을 위해 모이면 먼저 서로를 인터뷰한 다음 맞물리는 부분을 가지고 주제를 도출한다. 이슈나 주제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만나서 정해가는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하자가 방법론적으로 중구난방을 취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많은 공연팀에서 연출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듯이, 이슈 셋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상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목소리 비중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생팀들이 자신들만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어떤 의식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과 달리, 하자는 목소리의 다양성을 향해 팀원들의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서 넓히는 방향을 취했던 것 같다.
  이른바 연극다운 연극들의 성소가 극장이라면, 뒹굴과 하자는 우선 극장을 놓아두고 밖으로 떠나는 방법을 취했다. 뒹굴의 첫 공연은 포이동 화재 재건 1주년을 기념하는 ‘벽돌문화제’(2012)에서 트럭 두 대를 놓고 짧은 퍼포먼스를 가진 것이었다. 초창기에 뒹굴은 관객이 어둠 속의 눈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권위적인 극장 공간을 벗어나 관객들과 가깝게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장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같은 해 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열린 〈니나노 뒹굴〉의 경우에는 관객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체조를 같이 하는 참여 코너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게 연극인지 사회적 프로젝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논다면 관객과 함께 놀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그 이후로도 죽 이어져온 듯하다. 관객에게 배심원을 시켰던 〈바로 그 얘기〉(2016), 관객에게 요정을 돕는 베타테스터 역할을 시켰던 〈조커카드 베타테스터 파- 티〉(2017), 관객에게 흡연자 노릇을 시켰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2019) 등등.
  관객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공터로 나갔던 하자는 이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거리극을 하기도 하고, 대안학교나 난곡동 태권도 학원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고 한다. 하자는 관객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대신 1대1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대1의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태로. 뒹굴이나 하자나 그들의 팀을 구성하는 원리를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해보려 노력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라는 덩어리로 보는 대신 너와 내가 가진 각자의 것들을 보고자 하는 노력, 혹은 관계성의 실험. 2012년으로부터 7년 간 지속하고 있는 두 팀은 여전히 초창기에 발견했던 생장점을 구불구불 옮기며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의 몸이
무대 위를 서성일 때

- 프로젝트 하자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하자와 丙 소사이어티(이하 병소)는 팀 이름에 이미 자기정체성이 투사되어 있는 팀들이다. ‘하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왜 못 하지, 하는 푸념만 나누다가 ‘하자!’ 라고 결의했을 때의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딘가 조금씩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하자瑕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자의 전서아 연출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비주류의 정체성과 감성을 지닌 팀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병소의 이름에도 그러한 비주류 정체성과 감성이 투사되어 이다. 병소 역시 2012년에 결성되었는데(2012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는 한창 병맛이라는 유행어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술병을 굴리며 지병持病을 앓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하하하 우습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병맛 감성. 최종적으로는 갑과 을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아예 병이 되겠다는 선언으로서 丙 소사이어티는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계적 중심을 배제하고 천천히 지속하는 팀들은 구성원들에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자와 병소 역시 고정적인 멤버를 거의 두지 않고 그때그때 공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체 상태의 집합체가 아니라 느슨하고 액체적인 풀pool의 상태로 놓아두었던 셈이다. 멤버들은 각기 자신의 삶을 살다가 그 시간만큼의 고민을 안고 돌아온다. 병소의 경우에는 6년 만에 돌아와 작업을 하게 된 멤버도 있었고, 하자의 경우에는 멤버들이 각각 졸업과 취직의 관문을 넘은 뒤 2년 만에 다시 만나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2016년에 다시 모인 하자는 창작극에 공을 들이다가 2017년 밴드 GRiN과 콜라보한 음악극 〈안녕〉을 선보이게 된다.
  하자의 성격이 다소 변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이라는 공연이었다. 이사를 돕느라 해후하게 된 바이섹슈얼 여성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다. 전서아 연출은 하고 싶은 얘기가 정확히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하자라는 팀에 처음부터 비주류 의식이라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주류 의식이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자면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 딱 들어맞는 퍼즐을 이룰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끼리의 공존이 아닐까.

하나: 망가진 인간들끼리 위로가 되나.
유진: 망가진 인간들끼리는 위로가 된다. 난 아직 믿어.
-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대본 중 

  갑도 을도 아닌 병들의 소사이어티를 자처한 병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비주류의 모습에 주목했다. 〈노동집약적 유희〉 시리즈는 편의점, 식당, 서점 등의 알바 자리들이 늘어서 있는 커다란 부루마블 말판 위를 움직이며 생존을 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의 역할을 하게 되는 참여관객들은 최저임금만큼의 자본과 일정한 체력 수치를 갖고 이 비정규직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남기를 도모하게 된다. 한시적으로 어떤 공간에 머무르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자신이 머무를 공간을 사야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극장들 사이를 전전하며 무대 위에서 잠시잠깐 현존했다가, 다시 도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청년연극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집약적 유희〉는 애초에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했던 사업이 지원금에서 떨어진다든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다든가 하는 우연한 계기들이 겹쳐 이 공연은 2015년~2017년에 걸쳐 총 네 번이나 상연되었다. 물론 모두 다른 극장, 다른 장소에서였다. 병소는 매번 새로운 무대를 만날 때마다 그 공간성에 맞게 공연성을 개조해나갔다. 가령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단정한 블랙박스 무대를 만나면 방송 중계 현장처럼 만들었고, 연습실 공간을 만나면 관객과 함께 하는 레크리에이션을 삽입했고, 인터넷 공간에 Rodong.zip 파일을 흩뿌리거나 집회 신고를 넣고 보신각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현시하기 위해 절룩거리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비주류 청년연극인들의 몸. 그것은 칸으로 나뉜 부루마블의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말들의 모습과도 같다.
  2018년을 기점으로 하자는 그들의 창작 원천이었던 비주류 의식을 소수성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놓게 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소수의 소수의 소수이다. 다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는 일인칭적 감각에 대해 사고하기. 그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인식의 레벨을 옮겨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공연을 치르면서 하자는 소수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관객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호출한 관객들이 무대 위에 앉아 있을 때, 어떻게 소수적인 것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하자 역시 비주류의 몸을 어떻게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자가 있는 사람들의 소사이어티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