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목요일

보기해 보기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18개의 의자로 객석, 한 개의 의자로 무대, 옆의 모니터는 뻐끔뻐끔 열심히 빛으로 말을 뱉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 1분 이상은 흐른 신촌극장의 객석이 무대보다 먼저 막을 올리며 “해설자”를 선보인다. 해설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맨 뒤 높은 의자의 관객으로서, 그의 해설이 시작되고 1분 이상이 흐른 후에야 이것이 스피커의 음성이 아님을 깨달았다. 해설자는 “상상해 보기” 문장을 차곡차곡 쌓아 사북 삼고, 극장의 살을 탄탄하게 펼쳐 관객의 상상을 부채질한다.


우리는 곧잘 공연을 ‘보러 간다’는 말을 사용하고, 말은 곧장 공연을 ‘보고 온다’는 말로 읽히지만, 상상해 보자. ‘보고 온다’와는 다르게, ‘보러 간다’에는 관람, 즉 ‘보기’가 암시되지만, 보장되지는 않는다. 공연을 보려고 교통수단을 이용해 몇 시간이고 소모했어도, 간발의 차로 입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매한 줄 알았는데, 예매한 줄만 알았던 매진 공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쥘 수 있는 것은 ‘가기’뿐이다. “상상해 보기”로 기억된 수많은 “보기” 해설에서 이러한 ‘미완결’이 느껴졌다. ‘보러 가기’가 곧 ‘보기’가 아닌 ‘가기’를 보장하는 것과 같이, “상상해 보기”도 “상상하기”가 아닌 “해 보기”만을 보장한다는 사실에서.


해설자는 수신인으로서 극장에 도착한 투명한 편지봉투 속 사만 구천 개의 조각 난 편지를 읽어내기 위해 발신인 재현 역으로서 행위자를 소개한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말이 현재, 행위자의 말이 과거를 대변한다고 한다. 자막으로 표시되는 말은 서체로 구분되고, 반투명한 글씨는 음성이 닿으면 테두리 안이 차올라 불투명해진다. 영적인 존재는 투명하다는 인상을 지니므로, 본 극의 특수한 자막 형태는 우선 “강령술”이라는 시놉시스 속 용어를 상기시킨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는 것인지, 해설자는 들쑥날쑥한 번호가 적힌 편지를 스마트폰 이미지 번역 기능을 써서 번역하려 든다. 번역 후에도 여전히 뜻 모를 말로 한가득하니 도리 없이 행위자에게 발신인 행세하게 한다. 처음은 빙의다. 행위자는 귀신으로서 얼마나 집중해서 좌표를 고정하는지를 설명하고, 해설자가 러닝타임을 인질 삼아 독촉하는 인터뷰에 어쩔 수 없이 극장에 편지를 보낸 이유를 발설한다. 다음은 회상이다. 행세는 온전한 빙의가 될 수 없었으므로, 행위자는 발신인의 기억 속 세 가지 상황의 세 명의 상대방을 연기한다. 발신인의 친구, 발신인의 애인, 발신인의 집을 방문한 보험사 직원. 행위자의 대사로부터 발신인이 상대방 셋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셋은 자신의 죽음을 고하는 발신인에게 합리적 ‘증명’과 합당한 ‘서사’를 요구한다.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정신질환자와 성소수자를 향한 너그러운 폄하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면서 거론되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행위자를 재현 속 재현으로 이끈다. 발이 추워 온몸을 긁는, 문 잠긴 화장실에 9년이나 갇힌 사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되풀이되는 말은 문을 넘지 못한다. 화면에서 보라색 글씨가 나오는데 열린 입은 없다. 벌어진 일을 대하는 주변 분위기가 자신과 동떨어져 공감되지 않는다는 음성이 스피커에서 울릴 뿐이다. 폭언을 퍼붓는 애인을 넘어 방문한 보험사 직원은 이미 사망했다는 발신인의 말을 믿지 않지만, 업무상 답변과 끄덕거림을 거둘 수는 없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든다”라는 해설자의 지시에 따라 목을 굽히던 행위자는 어느덧 분노로 재현을 멈춘다. 대사를 외우지도 않고 편하게 읽기만 하는 해설자를 나무라고 지시문에서 벗어나 해방감에 겨운 춤을 춘다. 춤사위는 글씨를 걸친 보라색 클럽, 입은 다시 스피커의 몫이다. 노는 곳에서 추모하는 분위기가 거북하다는 음성이 들린다. 행위자는 숨이 가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본 극은 사회적 참사 희생자를 기억하는 산 사람을 다룬다. 앞서 설명한 해설자와 행위자의 위치를 되짚어 보자, 어떤 경우에서든 해설자는 현재에, 행위자는 과거에 몸담는다. 자막의 특수성도 되새겨 보자, 발화로 불투명해지는 글씨. 알아보자, 자막을 보는 관객에게 해설자는 이미 현재를 지났다는 사실을. 해설자가 관객의 현재로 기능하려면 자막은 그의 발화에 따라 나타나야 했다. 따라서 해설자를 일종의 ‘메타현재’라고 불러 보자. 그는 애써 대사를 암기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초침 소리”를 “초오오오치이이이임소오오오리이이이”라고 발음하며 시간을 양껏 늘어뜨린다. 힘껏 대사를 달달 외고, 시간이 없다며 재촉당하는 행위자와는 처지가 다르다. 현재는 존재만으로 충분하지만, 과거는 그 존재가 없어 고달프다. 존재가 없어 자리할 수 없고, 자리할 수 없어 “이상한 기분”이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해설자는 현재가 아니다. 진짜 ‘현재’인 관객이 넓은 아량으로 “상상해 보기”를 베풀어야 행위자와 구별될 수 있다. 현재에 대한 현재, 현재가 인식하는 현재. ‘메타현재’를 ‘현실’로 풀어써 보자.


현실은 지금을 ‘지이이이그으으음’으로 발음한 것만 같다. 현재라는 말보다 현실이라는 말에 묻힐 수 있는 순간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통탄스러운 현실을 비판할 때 저마다 다른 양을 퍼담는다. 그러므로 ‘밈’에서 제목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숏츠’를 넘기는 행위자가 등장하는, 말 많은 해설자가 정신없이 통설하는 본 극 역시 누군가에게는 MZ세대의 산만함을 지적할 거리가 될지 모른다. 단시간 콘텐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주의 집중력을 탓하곤 한다. 따라서 “스와이프”하는 행위자의 모습은 관객에게 반성의 시간을 삽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는 빠르게 ‘업데이트’된 사람만을 원한다. 한 정보에 머무를 여유는 없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산 사람의 지금으로 이루어진다. 현재를 누리는 산 사람의 감정은 점점 짧아진다.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발신인은 거부한다. 극장에 “불러오기”를 금지한다. 급박하고 존중 없는 강령술을 거절한다.


사람은 고운 입자로 만들어져 고운 입자로 만들어진다.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들어가도 탈을 내지 않을, 부딪혀도 시끄럽지 않을, 고운 입자. 어디까지나 고와야 한다. 빛나야 한다. 특별해야만 하니까. 오색 빛깔 조명에 행위자의 오로라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태양에서 지구로 밀려든 무수한 조각이 마찰하며 내는 빛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로 부정된 “귀신”들은 증명된 오로라의 증명되지 않은 안으로 든다. 그곳은 “클럽”이다. 소리가 없는, 보이지 않는, 냄새가 없는, “만져지지 않는” 존재들이 부대낀다. 기꺼이 부닥침은 어울림의 증거다. 짧은 입자가 부딪혀 긴 반짝임을 이룬다. 성급한 이해를 내려놓은 행위자는 마이크를 든다. “귀신은 사디스트”라 주창한다. 오색 빛깔 미러볼에 악보를 표시하는 노래방 모니터. 행위자는 마이크를 건네며 “귀신은 사디스트”라 관객과 제창한다. 과거, 현실, 현재가 반투명한 가사에 음성을 부닥쳐 불투명하게 만든다. 불가해함을 인정하고,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불투명한 확신을 앞세우지 않기. 박자를 놓치고, 실수로 다른 버튼 누르기. 미래만 불참한 노래방에서 다가올 가사를 불안해하고, 지나간 가사를 기억하며 불러 ‘보기’.


해설자는 수신인에서 발신인이 된다. 그는 현실이 아닌 자신을 해설하기 시작한다. 조각 편지 아닌 산문 편지를 짚고 숲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수신인이 된 당신과 죽은 나무를 보고, 맛없는 담배를 말아 문 이야기를 한다. 당신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뗏목에 태워 이별하는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과 오래오래 작별하는 내용과 피어오르는 안개가 자연스레 제사를 상상하게 했다. 다만 제사는 주로 고인과 생전 가까웠던 이들이 치르지만, 발신인과 수신인 사이 그러한 관계 서술은 찾기 어려웠다. 만난 적 없는 존재와 헤어질 수 있는가? 매체의 다양화로 주고받음 없이 유대감을 제공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왜 현재인가? 이들은 반응을 내놓는 대가로 현재를 받아왔다. 비대면 공연은 현재를 맡은 관객에게서 반응을 덜어냈다. 일방향적 감상(感想)으로도 충족되는 감상(鑑賞)의 유대감이 확산된다. 이는 관계 정의가 중요한 유대와는 다르다. 따라서 유대감만으로 이루어지는 애도가 언제나 신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애도할 겨를도 없이 보랏빛으로 질려 떠나가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극 중 편지는 일방향적 감상(感想)의 던지기일 수 있다. 사만 구천 개의 조각난 편지가 사람 아닌 극장에 닿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반응 없는 산 자가 여전히 관객이라면, 반응 없는 망자가 관객이 못될 이유는 또 뭔가? 관객은 이미 반응하기에서 반응해 ‘보기’로 퍼지고 있다. 산 자가 반응 아닌 존재만으로 현재를 받아낸다면, 망자는 현재만 아닌 관객이렷다. 산 자가 망자를 상상해 볼 때, 정중함의 결여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망자의 ‘관객됨’이 불가결하다. 더듬더듬 거친 무례한 강령술이 낯선 자와 오래오래 작별할 수 있게 했을 테다.

 

사실, 극은 초장부터 결론을 내고 있다. “투명한 편지봉투도 봉투”라는 결론을 말이다. 간발의 차로 입장하지 못한 공연도, 예매한 줄만 알았던 매진 공연도 ‘보러 가기’라는 ‘미완결의 완결’이다. 그러나 상상해 보기, 기승전결을 뿌리치려 한 창작자를. 상상해 보기, 순서 정렬을 밀어내려 한 필자를. 오로라와 숲이 내뿜는 반투명한 안개 속 나는 가장 불투명했다. 불쾌했다. 안개와 함께 섞여 보고 싶었다. 미완결되고 싶다. 완결로 증명을 요구받고 싶지 않으므로.

 

그러니 상상해 보기…해 보기…해 보기해…보기 해…




[ 극장 지평좌표계에 귀신을 고정시키는 방법 X 최현비 ]
2024년 1월 12일(금) - 1월 20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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