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하여 :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2018/02/26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_

이예은

첫 인상 

  17세기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소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서사의 형식이나 키쉬, 까슈, 마들렌 등등 첫 장면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유럽 문화를 환기시키는 단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캬바레 공연의 모티프를 수용한 듯한 무대와 의상은 지극히 유럽적인 것을 판소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접합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접합은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명백한 표현들이 그러하듯 인위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작품의 장면 장면마다에 뚜렷한 기획적인 의도가 서려 있으면서도 매 장면이 기획된 것 이상의 활력으로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기에는 구차한 살아있는 표현들 덕분이다. 이 공연은 그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을 글로써 기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 작품의 재미있음을 글로써 찬미하기 위해 ‘신세계’, ‘일대실험’, ‘성스럽기까지 하다’ 등의 표현을 쓰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 표현들은 과장이거나 억지이다. 이 공연을 포함하여 이자람의 작품들은 ‘신세계’나 ‘일대실험’ 등의 수식으로 표현 받을만한 단서들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수식으로 찬미받기에는 사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이자람의 작품은 늘 예상의 범위 안에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다. 여기에 미덕이 있다. 안전한 기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바로 이 두 영역, 안전한 것과 재미있는 것이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자람의 작은 위대함을 느낀다.
  작품의 내용은 ⟪소녀가⟫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제도적, 관습적 담론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저 아이와 여자가 결합된 상태에서 티끌 하나 자신의 존재를 결박할 수 없게끔 만들고 마는 한 소녀가 ‘소녀’라는 단어에 깃든 소녀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 소녀는 ‘소녀’라는 관습에 대항할 생각도, 그 관습과 경쟁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존 관습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보통의 성장가와는 다르다. 작품 속 소녀에게는 관습마저도 ‘미지의 숲’과 다를 것 없는 미지의 것이다.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작품 속 대사와도 같이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생의 모든 절기에 몰입하는 소녀의 행동은 관습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작품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유럽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접합, 내용적으로는 제도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대비라는 뚜렷한 모티프들로 읽히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은 명확하게 기획된 이 모티프들이 결코 안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된’ 것이라는 말은 미안한 표현일 만큼 이 작품만의 스타일로 명확한 말들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만 안일하지 않은 것.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 대중적이지만 작가적인 것. 몹시 이루기 힘든 그 양자들 간의 공존을 이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계가 견실하게 느껴진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세계를 증발케 하여 그 이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주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매혹적인 꿈을 꾸게 하거나 지독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 

  동그란 무대를 세 명의 악사가 둥글게 에워싸서 앉고 빨간 드레스와 슈즈를 신은 배우가 무대 위에 입장했을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와- 무대 좀 봐!” 했다. 이것이 공연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고체적으로 주름 잡힌 겹겹의 커튼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만든 무대 프레임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이 육중한 커튼이 조명에 닿아 다채로운 세계의 질감을 만들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힘차게 형상화해 낸다. 커튼 왼편에는 불투명한 빨간 전구줄이 야무지게 두 줄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조명과 흰 조명, 그리고 푸른 조명이 닿았을 때 명확하게 변화되던 커튼의 다채로운 질감과 함께 빨간 전구줄의 반짝거리던 빛을 기억한다. 반닥반닥 빛나는 재질로 제작된 아담하고 동그란 무대는 경사가 져 있고 바닥에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 무대 오른편 위에 오뚝 솟아 있는 작은 단상이 있는데, 이 공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경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단호한 공간이다. 그리고 배우가 율동을 만들 때 날 서게 회전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빨간 치맛자락의 곡선은 무대를 보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는 명랑한 이미지들을 돋운다. 이 작품은 눈으로 씹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마치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느낌이다. 눈으로 차곡차곡 소화하는 진귀한 이미지들과 함께 귀를 열게 하는 숱한 소리들,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때 나는 소리 “캉 찰캉 찰캉 차르르”, 철로 만든 드레스를 부술 때 나는 소리 “뿌셔뿌셔”, 미지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두근두근두근두근”하고 “가슴이 쓰르르르”하는 소리는 또한 이 작품의 내용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공연을 보면서 많은 순간 작품에 흡인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각, 청각 이미지들이 축적되면서 정말 똑 소리 나게 터져 나오는 표현! 표현! 덕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노골적이고 요염하기도 하고 천진하며 우매하기도 한, 그래서 엄청 웃기기도 한, 그러나 앙큼하게 감추어진 속내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이질적 느낌들이 놀이를 만들고 있는 표현, 표현들. 아주 놀기 좋은 놀이터를 작품의 테두리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정말로 아주 잘 놀고 있는 표현, 표현들. 이를테면 “찰캉!” 소리가 나는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기 전 자유로운 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무대 오른 편 단상 위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바람으로 불어오듯 자유가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찰캉! 찰캉!”하는 철 드레스가 몸에 입혀지는 순간 커튼에 닿아 반사된 백색 조명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그 순간 고조되는 북소리는 그 공간과 시간에 폐쇄적인 테두리를 재빨리 둘러치는 듯하다. 숲을 발견한 소녀가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사방군데 몸을 비벼댈 때에는 너무도 천진하고 야해서, 동시에 자신이 천진한지도 야한지도 모른 채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소녀가 “무엇인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는” 미지의 숲을 기어코 활보하며 “두근두근”대는 장면은 어떠한 관습적 지(知)도 압도해 버리는 미지의 지적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어 사랑스럽다. 소녀가 늑대에게서 달아나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푸른 조명과 함께 저녁 공기를 머금은 듯한 시원한 숲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기에서도 다시, 자유가 느껴진다. 이렇게 풍성한 이미지들과 함께 구성진 대사 몇 마디가 칼을 꽂듯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어 서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칼을 꽂듯 호소하는 순간들처럼 말이다. 이토록 작가가 자신을 호소하면서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 관객과 동반하면서 작가가 할 말을 하고 마는 기술이 놀랍다.   

서사

  작품이 지닌 몇 몇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징으로만 이어진다. 철로 만든 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미지의 숲이 상징하는 것, 나무의 길과 물의 길이 상징하는 것, 느끼한 목소리의 늑대가 상징하는 것.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명징한 상징들은 온갖 제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 작품의 열망과 대조적이다. 결국 작품의 열망은 제압적인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허물어버리는 것에 있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서사를 볼 때, 왜 이토록 제압적인 틀에 매달려서 자유를 꿈꾸어야만 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제압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을 철저히 이분하다보니 전형적인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서사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상징들 뿐 아니라 서사의 구조 또한 지나친 전형성을 따르고 있다. 보통의 여자 아이로 태어나서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게 되고, 그 드레스를 부수어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숲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에게 희롱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도리어 늑대를 희롱하게 된다는 서사의 얼개는 전형적인 동화 다시 쓰기의 구조이다. 기존의 동화 다시 쓰기 구조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구조에 대하여 이 작품만이 취하는 어떠한 태도가 있었더라면 보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조로부터는 어떠한 재발견도 각성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지독한 수미상관식의 대사가 서둘러 에필로그를 장식했을 때에는 설마 이대로 끝을 맺을까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상

  그 많은 매혹적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장면이 끝나고 ‘서사가 싱겁다’는 인상과 함께 보다 큰 차원에서 작품의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위대한 작업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는 재미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이토록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생각해 본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동시에 대중적이거나 명확한 기획 의도를 확보한 것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단어로도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그저 예술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은 뭘까. 동시에 ‘재미’라는 것은 뭘까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그리고 작품에 고찰이 없다면 재미란 무슨 의미일까? 라고도 질문한다. 여기에서 고찰이란 앞서 말한 이 작품에 부재하는 서사적, 주제적인 고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도 고찰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 속 표현들은 시종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끈끈한 줄로 이어 관객과 함께 가려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모든 표현들을 다 주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는 바람에 어떤 표현에 머물러 관객이 생각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작품이 관객에게 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했던 말 가운데 “관객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작가가 토대를 두고 있는 판소리의 정신에서부터 발로된 것이라 생각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관객 사이의 끈끈한 탄성을 다져가며 철저히 공감의 영역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가니 말이다. 무대와의 끈끈한 탄성 안에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50분의 상연 시간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공연과 관객 사이의 끈끈함을 너무 믿으려 하다 보니 기껏해야 정성 어린 우정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과 귀가 지극히 세심하게 열리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어떠한 세계와 정말이지 열심히 맞닿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서사와 상징들을 매우 안전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로 이끌어낸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이를테면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과연 작품 안에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예술의 가치로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