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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월요일

두산 아트랩: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백인경

북적거리는 도시 속을 느릿하게 미끄러져 가는 버스 안에서 뒷좌석에 몸을 묻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본다. 지나는 거리마다 차와 사람으로 가득하다. 모두들 빠르고 익숙한 몸짓으로 각자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빠 보인다. 두산 아트랩 하반기 공연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는 마음은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사이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길 위의 풍경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광장은 이렇게나 넓고, 하늘은 이렇게나 높으며, 시간은 이렇게나 빠르게 지나가는데, 몸과 마음은 버스 뒷좌석에 묻힌 채 덜컹덜컹 고빗길을 넘어간다. 지금 여기, 우리가 속한 이곳은 누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세계인가. 우리는 어떻게 지워지고 있으며 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역사가 한 권의 책과 같다면, 우리의 지금 이 순간들은 어떠한 문장들로 서술될 것인가. 세상이 한 편의 연극과 같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곳은 어떠한 장면들로 구성될 수 있을까?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별일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20대를 노래한다. 두 명의 배우와 두 개의 큐브가 엎치락덮치락하며 평범한 2000년대의 나날들에 매듭을 엮는다. 자취방, 과방, 할아버지의 장례식장, 연구실, 동네 호프집… 장소가 바뀌고, 옷이 바뀌고, 유행가도 바뀌고, 이상형 마저 핑클에서 소녀시대로 바뀌어 가지만, 한 해 두 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그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기현은 여전히 기현이고, 성우는 여전히 성우이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이지만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20년 지기 절친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특별한 사건 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기억들(souvenir)과 과장된 몸짓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구성 속에서 예의 그 공감의 정서를 느끼기보다는 보편적 추억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 직면해야만 했다. 무대를 중심으로 기역(ㄱ)자로 배열된 객석에서는 동시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건너편의 관객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롱다롱한 추억 속으로 채 빠지기도 전에, 나의 지난날들을 돌이키기도 전에, 먼저 웃고 먼저 끄덕이는 낯선 사람들과 대면해야만 하는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무대 위에 펼쳐진 이야기가 다양한 의미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때 그 시절의 낡은 기념사진 같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것이기에 특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똑같은 표정들로 가득한 단체사진처럼.

아프니까 아직 청춘인 건지 청춘이라 아직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하고 나 또한 별다를 것도 없지만,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잔잔한 호수라고 해도 그곳을 건너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물장구를 쳐야만 하는가. 호수에 내던져진 이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헤엄치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헤엄칠 수도 없고, 또 헤엄의 방식에는 정답도 없다. 어쩌면 나는 극장에서 나마 너무너무 진부해서 오히려 신선한 무언가를, 아니면 너무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놀라운 무언가를, 뭔가 그런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밥 한 끼 하자는 정겨운 인사조차 무색해지는 요즘에는 특히나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무얼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

2014년 3월 5일 수요일

[두산아트랩]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

by 백인경

미래주의의 창시자 필리포 마리네티는 

“The Variety Theatre”(1913)에서 연극이 다양성과 서커스 쇼의 원칙에 따라 “놀라움, 레코드 세팅, 그리고 신체의 광기에 대한 연극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연극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려는 이탈리아 미래파의 이러한 시도는 러시아의 아방가르드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연극에서의 연극성”에 대한 그들의 탐구 또한 서커스 형식에 의지했다. 서커스는 단순히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가 가진 순수한 물질성으로 -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연약한 신체 또는 고도로 훈련된 강인한 신체 - 관객들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문학에 종속되어온 연극을 연극 고유의 매체성에 입각하여 “재연극화” 함으로써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지각방식과 경험방식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커스’라는 단어가 들어있긴 하지만 바바서커스는 실제로 서커스 공연을 하는 극단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향하는 ‘연극’이 무엇인지 그 이름을 통해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바서커스는 다음과 같이 자신들을 소개한다: “드라마를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며, 무대라는 공간 안에서 다양한 형식과 연극성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드라마와 연극성,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는 그들의 야심찬 포부는 고골의 텍스트를 통해 실험된다.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은 

단편소설 <외투>를 원작으로 한다. 텅 빈 무대 위에서 흔들거리는 공중 그네와 다양하게 제작된 가면들의 사용은 새롭고 신선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적절하다거나 자연스러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거센 러시아의 찬바람을 뚫고 등장하는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공연 내내 유일하게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을 사용한다.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두산아트랩]피지컬 씨어터;지호진 연출 <왕의 의자>

by 백인경

TV와 영화, SNS와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무대 위에서 행위하는 살아있는 몸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만나기 위해 여전히 극장을 찾는다. 행위하는 몸과 그것을 관찰하는 몸이 마주한 공간에서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서사와 살아있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관계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또 다시 어떤 기대를 품고 티켓을 예매하게 하는 연극의 힘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호진 연출의 <왕의 의자>는 연극적 경험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다: 피지컬 씨어터. 피지컬 씨어터라는 용어가 요즘 현장에서 특정한 연극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의 신체를 의미하는 “Physical"과 전통적인 드라마(재현 연극)를 연상시키는 “Theatre"의 만남은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과연 <왕의 의자>는 살아 움직이는(가끔씩 구르고 날아다니기도 하는) 배우의 몸들이 장관을 이루며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을 ‘보여'준다. 깨알같은 조연들의 코믹 연기와 코러스들의 현란한 아크로바틱, 주연 배우의 열연과 마침맞은 캐스팅, 익숙한 스토리텔링은 관객들이 부담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하였으니 ‘액션이라는 영화적 장르의 무대화’라는 연출의 의도는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이 연극을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연극은 재밌으면 장땡이니까."
- <왕의 의자>, 제작노트 중에서

"연극은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피지컬 씨어터의 서사적 결합’에 대한 연출의 실험과 노력이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것을 단순히 무대 위로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이 연극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왕의 의자>는 '액션 영화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엔 충분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액션 영화에서 느끼는 재미가 어떻게 연극적 재미로 전환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아쉬움과 이에 뒤따르는 물음표들을 남겼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관객과 배우는 모종의 약속 같은 것을 한다. 소품으로 사용된 총에서 실탄이 발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간단한 음향과 조명, 그리고 쓰러지는 배우의 행위를 통해 관객들은 ‘저 사람이 총을 맞아 죽었구나’라고 믿어버린다. 영화에서 한 비중있는 인물을 죽이기(?) 위해서는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와 치밀한 장면구성, 확실한 행동과 사실적 이미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연출이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연극에서만 가능한 상상력의 힘이라고 하자. (나는 상징과 은유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반대로 신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연극이기 때문에 훨씬 곤란한 지점이 많다. 가령 영화에서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신체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배우가 피를 뿜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 잔인함에 압도되기 보다는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어버린다: '저 소품은 어떤 맛일까?' 혹은 '저거 언제 어떻게 입에 넣었지!' 관객들 또한 살아있는 신체를 갖고 있기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체성에 대한 나의 고민은 소위 ‘떼씬’이라 부르는 장면에서도 이어졌다. <왕의 의자>는 무대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와 마이크 대에 꽂힌 긴 칼 외에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다. 제작 여건 탓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불친절함은 오히려 무대 위의 몸을 부각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막은 바닥에 누운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부터 시작된다. 연극의 초반에는 배우들이 땀을 흘리며 군무를 추는 뮤지컬 스타일의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박자에 맞춰 열심히 움직이는 배우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관객들을 들썩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라이브’로 본다는 것은 잘 만들어진 어떤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생생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러나 막상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액션 씬에서는 군무씬에서 느꼈던 만큼의 에너지가 전달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상의 위험이 있는 장면들이기에 ‘합’을 맞추기 위한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합’이 매끄러우면 매끄러울수록 신체의 물질성은 이미지 뒷편으로 밀려나 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액션씬이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였다면 아마도 (배우는 물론이며) 관객들은 고통스럽고 불안한 에너지에 압도되어 연극을 편안하게 즐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많은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자학적 행위를 했던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신체가 서사나 이미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그것의 물질성은 기호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TV 드라마에서의 신체성!


드라마와 신체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연극사에서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1960년대 이후 무대에서 나타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을 포착한 한스 티스 레만이 <포스트 드라마 연극> 시대를 알린지 15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대 위의 신체들은 드라마와 그것 고유의 물질성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펼치고 있으며, 관객들 또한 그 팽팽한 긴장 관계를 그것 그대로 즐기기 보다는 '혹시 나만 중요한 서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차 연출가의 노트를 뒤적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연극에서 신체성과 서사는 그만큼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된 여정의 끝에 이르러, 쏟아지는 땀방울에 옷이 흥건히 젖은 배우가 텅 빈 무대에 앉아 몸을 부르르 떨며 흐느낄 때 그 어떤 장면에서 보다 ‘살아있는 몸’을 느꼈다면 그들이 실은 가장 밀접하고도 상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씨어터는 원래 피지컬하다. 그렇다면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떤 theatre를 어떻게 physicalize 할 것인가? 연출가에게 또한 관객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영원한 숙제이자 공연예술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일 것이다.

<맥베스> 혹은 <햄릿>을 연상시켰던 강기둥 배우의 열연!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두산아트랩] 굿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by 백인경


한국 전통 무속 신앙인 무교(巫敎)를 하나의 종교로 볼 것인가 하는 데는 여러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의 제의 양식인 굿은 집단적 신명의 분출 방식으로 여전히 우리 문화 곳곳에 남아있다. 특정 종교를 떠나 하나의 전통 문화로 접근한다면 음악과 춤, 그리고 개개의 염원과 기원이 어우러져 하나의 신성을 이루는 굿의 현장은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짜 제대로 된 굿판을 체험하기는 힘든 시대가 되었으며, 굿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무지한 관객의 입장에서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의 쇼케이스를 지켜보았다.

비빙(Be-Being)의 젊은 연주자들이 모여 그들 나름의 시선으로 해석한 굿을 무대 위에 펼쳐 놓았다. 그들의 굿판은 무대 한켠에 걸린 커다란 봉제 인형에 무녀 의상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행위는 마치 혼을 맞이하는 듯 느리고 그러나 정갈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숨 죽여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한 공연은 그들의 연주와 다양한 영상, 그리고 무녀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쇼케이스가 진행되는 60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때문이었을까? 굿은 물론이며 전통 음악에 대해 무지한 이 관객은 어떤 호흡도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공연 전에 나눠 받은 안내문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연주자가 해석한 굿에 대한 이야기가 각기 독립된 무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해서 그랬던 건지, 최소한 이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선 굿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신명을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받아들이기에 무대와 객석이 나뉘어진 블랙 박스라는 공간이 내겐 너무도 경직된 곳이라 그랬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굿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고민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심 미안한 마음 마저 들었다.


굿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라보는 시선. 극장을 돌아서면서,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음악 공연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남겨졌다. 이 공연에서 음악 외적인 부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나레이션으로 삽입된 무녀들의 인터뷰와 여러 종교적 메세지들을 편집한 영상은 그저 소리에 속하는 것일까? 해석을 요구하는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로 읽혀야 하는 것일까? (영상에 자막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미처 안경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혹시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심 불안해졌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 이외에 무대 위에 셋팅된 다른 오브제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와 어떤 의미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공연이 끝나고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공연이 굿에 대한 그들의 오랜 워크샵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질의와 응답을 통해 그들의 고민에 조금 더 가까이 귀 기울일 수 있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이 공연에 대해 내가 취했어야 했던 하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굿은 접근하기에 따라 종교, 의식, 음악, 연행, 문화, 그리고 어떤 초자연적 에너지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채로운 특성이 굿을 매력적인 탐구 대상으로 만들지만, 그 연구에 대한 결과물이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질서와 형식으로 재립되어야만 할 것이다. 공연이라는 장은 이 다채로운 특성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구취하기에 얼마나 마침맞은가. 이번 쇼케이스를 통해 그들의 고민과 해석을 엿볼 수 있었기에 나아가 본 공연에서 그 고민과 공부의 단계를 넘어선 그들만의 신명나는 무대 한판이 기대된다.

함께 읽기: [두산아트랩3]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이 바라본 굿 by 에스티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부유하는 삶을 위한 한 편의 동화 : 영화 <젤리피쉬>

by 백인경


지난 11월 12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 (http://www.cinematheque.seoul.kr)에서 열린 이스라엘 영화제에서 5년만에 <젤리피쉬>를 스크린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왠지 이스라엘 하면 모래바람이 부는 노란 빛의 하늘과 서걱거리는 공기를 떠올리며 이것이 LP판이 내는 따뜻한 잡음과 오래된 필름의 낡은 빛과 닮아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대규모도 아니고, 세련된 CG와도 무관한 영화지만 그래서 디지털 디바이스와는 더 어울리지 않는 영화 <젤리피쉬>.

무언가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해석 보다는 번역의 여정이다. 비언어적인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동안 유실되는 것들. 문장으로 포획할 수 없기에 눈 앞에서 상실되어 가는 것들을 온 마음으로 애도하는 동안, 쉴 새 없이 깜빡이는 커서의 비트에 따라 키보드 위에 얹어진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이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 <젤리피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들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대신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은교> : 몸을 보다 / 몸을 읽다


by 백인경


영화 <은교>를 보게 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열일곱 소녀와 일흔 살 노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일흔 살의 박해일이 궁금했다. 거대한 광고판에서 마주친 노인 박해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피부와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순수하게, 어떠한 상상도 기대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슬프고 조금 불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아렸다. 은교의 발가벗겨진 몸이, 서지우의 무기력한 런닝 셔츠가, 노인이 ‘되어버린’ 이적요의 불룩한 배가, 피고 지고 시들어가는 꽃송이처럼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 내밀면 만져질 것처럼.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