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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8일 금요일

광기(狂氣)가 물성(物性)을 만났을 때: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2008,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2021)

글: 조혜인 (https://brunch.co.kr/@hichotheatre)

ⓒ Arno Declair, 2008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은 1947년 처음 개최되어 여름이면 인구 약 8만 정도 밖에 안되는 프랑스 남쪽의 조그만 도시 아비뇽에서 열렸다(임혜경, 76). 아비뇽은 변변한 공연시설 하나 없는 지방의 소도시였는데 유명 배우 장 빌라르와 제라르 필립, 몇몇 뜻을 같이하는 연극인들이 내려와 파리 연극과 차별화하면서 일반인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대중을 위한 연극을 선보였다(임혜경, 76). 포스트코로나(post COVID-19)시대를 맞이한 올해, 이러한 아비뇽의 기운을 담아 LG아트센터에서 기획공연으로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를 선보였다.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과 본 기획공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이 코로나로 발이 묶인 한국 관객들을 위해 LG아트센터 무대로 찾아온다. 올해로 75회를 맞이한 아비뇽 페스티벌은 영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양대 공연예술축제로 손꼽히고 있으며, 이 축제로 인해 작은 도시 아비뇽은 해마다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예술가와 관객들로 북적이는 예술도 도시로 변화한다. (...)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와과 함께 한국 관객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공연 5편을 필름으로 준비했다. 독일의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의 파격적인 <햄릿>, 벨기에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안무가 안느 테레사와 로사스 무용단의 <체세나>를 비롯하여 발표하는 창작극마다 몰리에르상을 휩쓰는 극작가이자 대표 연출가인 조엘 폼므라의 <콜드룸>, 프랑스 오데옹 국립극장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아비뇽 페스티벌 총 감독을 맡고 있는 연출가 올리비에 피의 <리어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프랑스 연극계에 떠오르는 신예 연출가 토마스 졸리의 <티에스테스>까지. 이름 하나만으로도 쟁쟁한 세계 공연예술계 대가들의 작품 5편을 5일간 LG아트센터 무대 위 대형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다. (LG아트센터)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는 LG아트센터 대극장 규모의 스크린을 통해 아비뇽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필자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과 조엘 폼므라 <콜드룸> 두 편을 관람했다.   그 중 <햄릿> 을 중심으로 본고의 논의가 펼쳐질 것이다. 한국 관객인 필자는 아비뇽의 공연과 어떻게 관계 맺었을까?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극’을 선보였다. 아비뇽의 무대 위, 지극히 연극적인 인물들을 통해 필자는 무엇을 감각했으며, 쓸 수 있을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 연극 속의 연극을 하였을까? 샤우뷔네(Schaubühne)의 <햄릿>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극중극은 어떠한 만남을 가질까?

우선 <햄릿>의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스터마이어는 “연극은 삶의 방식에 도전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는 곳이다.”라고 언급하며, 선대 연극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아르또(Antonin Artaud), 메이예르홀드(Vsevolod Emiljevitsch Meyerhold)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성장해나갔다. 이는 <햄릿>에 등장하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실현해 내었다. 오스터마이어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는 원작을 투명하리만큼 해석하고, 원작이 가진 이야기를 ‘지금, 이곳(Here and Now)’의 삶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배우에게 연기적 접근에 있어서 심리적 요구를 하기 전에 작품에서 어떤 장면이 매력있는지, 발전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며 세계관을 만들어간다. 연출가로서 배우에게 작품이 어떻게 해석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텍스트의 부분과 만나게끔 지원하며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오스터마이어는 독일의 동시대 연출가연극(Regietheater)을 공고히 하였지만, 연출가의 컨셉이나 지시에 대한 요구가 아닌 배우가 가진 표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어 또다른 의의가 있다. 오스터마이어는 그가 고집하는 미학을 반복하지 않으며, 매번 텍스트마다 발명을 하듯이 작품을 개발한다. 텍스트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텍스트의 내용을 핵심 삼는다. <햄릿>의 ‘햄릿’ 역을 맡은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는 오스터마이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오스터마이어에게는 희곡의 바닥을 헤집는 일종의 편집적 집착이 있다. 투명해지도록 해석을 한다. 배우에게 세밀하게 설명을 하고 배우는 배역의 역할에 대해 안전하게 느낀다. 그 설명은 리듬과 다이나믹한 구조로 된 일종의 악보와 같다. 거기에 희곡이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재료를 강조하고 아로새길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주어진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명료하고 정확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idinger)

또한 오스터마이어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예를 들어,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언급한 바 있다. 

한번은 오스터마이어가 입센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입센은 나에게 잘 만들어진, 플롯으로부터 촉발된 희곡을 제공해주는데, 이것은 나의 목적을 위해 다시 쓰기와 적용을 가능케 한다.”  

Ostermeier once said of Ibsen. “But he provides me with well-made, plot-driven plays, which I can rewrite and adapt for my purposes.” (Crawley)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작품의 본질에 가 닿으려는 오스터마이어의 작품관이 반영된 <햄릿>은 과연 어떤 공연이었을까?

공연은 햄릿의 아버지인 ‘햄릿 왕’의 장례부터 시작한다. 무대의 온 바닥에는 흙들이 충분히 깔려 있고, 장례식에 내리는 비는 스프링쿨러에서 발사된다. 흙 위에는 앞 뒤로 이동할 수 있는 사각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가로로 된 긴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황금색 체인으로 된 투명막이 내려와있다. 장례 중 햄릿은 손으로 흙을 집어본다. 아버지의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장례가 막 끝나자마자 연회가 시작된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의 결혼이다. 햄릿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애도로 침통해야 할 국가와 왕실에 ‘절제된 마음’이라며 그와 상반되는 분위기의 결혼식이 열린다. 흙, 땀, 물에 흠뻑 젖어 구석에 조촐하게 앉아 은박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햄릿만이 상식적인 애도의 과정을 겪는 국가 및 개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머지 인물들은 게걸스레 식사를 한다. 클로디어스는 거트루드와의 결혼을 선언하는데, 햄릿은 말한다. “전 이런 친자관계 필요 없습니다.”

거트루드의 노래가 이어진다. 괴상한 음색을 내는 거트루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투명막에 이미지로 투사된다. 일렉기타 소리가 삽입되며 그 기괴함은 절정에 치닫는다. 거트루드의 음성은 찢어지고, 햄릿은 거트루드의 위선적인 눈물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거트루드는 베일을 벗자 ‘오필리어’로 변신한다(1인 2역).

햄릿의 국가인 덴마크는 감옥과도 같아졌으며, 햄릿은 실성한 듯 절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 곁에서 디제잉을 이어나간다. (실제로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실제로 DJ 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와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은 햄릿의 기이한 행동에 심히 당황한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나간 식탁 위, 햄릿은 올라가 독백을 한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일에서 흔히 살 수 있는 ‘Ja!’(영어 ‘Yes’에 해당) 우유를 마구 흔들어 뿜어내며 광기에 휩싸인 채 햄릿의 명대사를 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햄릿은 그들이 여기로 오게 된 까닭을 말해준다. 오늘 저녁에 연극이 있을 거란 소식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는 다시한번 이어진다. 이번에는 엄숙하게, 비이성적인 햄릿이 아닌 이성적인 햄릿으로 되돌아온 듯 독백을 이어 나간다. 햄릿의 온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으며, 오필리어는 햄릿을 지켜본다.

햄릿은 오필리어와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때, 햄릿의 광기는 또 한번 그 수위가 치솟는다. 필자는 희곡 및 타 <햄릿> 공연으로 오필리어를 접했을 때, 실연으로 인한 오필리어의 자살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둘이 얼마만큼 사랑했기에?’ 라는 물음을 충족시켜주는 공연이 필자에겐 없었다. 그러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고 나니 왜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했을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햄릿은 순백의 옷을 입은 오필리어를 흙 속에 파묻으면서까지 저주하고, 냉대하고, 또 키스하며 자신의 사랑표현을 진심으로 하는 것 같다가도, 또 오필리어를 흙 위로 내동댕이 친다. 흙 위에서 난장을 벌이며 오필리어가 가진 순백의 사랑을 철저하게 더럽히는 장면은 흙이 가진 ‘때묻음’의 속성으로 인해 비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햄릿이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그러한 가학적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가했어야 할 햄릿의 아픔이 진흙처럼 묻어 나온다.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수모를 당했으니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감정적 이해가 되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이기에 여성 필자로서 조금은 불편한 부분도 있었지만, 흙이 가지고 있는 물성(物性, Eigenschaft der Materie)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만나 배우의 몸에 뒤엉켰을 때 폭발적인 광기(狂氣, Wahnsinn)가 발산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햄릿의 광기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임과 동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내적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다”(임승태, i). 

햄릿이 연극배우들과 만나 연습을 한다. 특히 연극에서 죽음 이야기를 할 때 숙부를 잘 관찰하라고 당부한다. 연극의 이름은 <쥐덫>이다. 연극을 보기위해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가 등장하고, 이 때 관객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 투명막에 투사된다. 극장에 앉아있는 관객들 또한 같이 <쥐덫>을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점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창출한다.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거트루드로 상징되는 역할로 등장한다. 두 젖꼭지에는 주스를 흘려 마치 피흘림을 연상시키고, 랩으로 왕 역할의 배우의 몸을 마구 감싼다. 왕비 역은 왕 역의 몸에 우유를 붓는다. 왕 역은 괴로워한다. 이어 붉은 피가 부어진다. <쥐덫>의 모든 이야기는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양심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왕이 곤히 자고 있을 때 독살당하는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 역은 결국 죽고, 그의 왕관은 왕비 역에게 간다. 독살 장면에서 배우와 클로디어스의 눈이 마주친다.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는 도망가고 햄릿은 기쁨의 춤을 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할까?

<햄릿>에서 배우들은 직접 카메라를 잡는다. 이런 카메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덴마크 왕실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장치이자 햄릿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햄릿이 계획한 연극 <쥐덫>이 끝나고 배우 아이딩어가 왕비 역에서 햄릿 역으로 전환할 때 햄릿의 배불뚝이 몸매를 위한 속옷을 착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장실 뒤에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고스란히 인지시킨다. 이러한 극중극에 대해서 심정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연기 스타일에서는 ‘가식과 위장’이라는 기본적 원칙으로 반영된다. 그가 뚱뚱보 의상을 입고 뚱뚱한 왕자로 나왔다가, 극 후반에서 뚱뚱이 의상을 벗어 던지는 것도, 가식과 위장의 세상적 현실을 조롱하는 하나의 오브제적 장치다. (심정순)  

이인순 또한 이러한 전환의 사이를 "‘연극적 행위를 감추려 하지 않기에 오는 행위의 진실’로 다가왔고, 또 소외효과가 가져오는 ‘연극놀이’의 자유로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이인순, 254). 또한 극중극은 “허구와 현실, 과정과 결과, 그리고 내용과 형식의 공존 및 이중성에 대한 연극적 사유인데, 이중성은 햄릿의 광증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이기도 하다”(임승태, 43). 광기는 ‘비규범성’과도 맞닿는다. 햄릿은 엉뚱하게 신부복을 입은 채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때 거트루드 앞에서 폴로니어스를 총살한다. 거트루드는 말한다. “Was habe ich getan?”[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Was ist mit dir?”[너에게 무슨 일이 있니?] 특히 거트루드가 오필리어로 전환되는 과정은 인상적이다. 필름이 곧 끊길 듯한 영상이 앞뒤로 반복되듯 배우 ‘예니 쾨니히(Jenny König)’는 반복동작을 취하며 오필리어로 변한다. 무대 위의 흙을 온 얼굴과 몸에 뭍이는 행위를 하고, 오필리어의 마지막은 ‘몸에 생수를 부어’ 표현한다. 흙과 물, 즉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사의 본질을 통해 오필리어의 죽음이 다가온다. 오필리어는 익사하는 장면에서도 대사를 하는데, 그 대사의 리듬마저도 영상이 끊길 때 나는 소리처럼 들린다. 온전히 익사하자 더 이상 오필리어의 말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CD가 불안정하게 튕겨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햄릿은 덴마크로 돌아온 ‘레어티스’와 결투를 치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햄릿의 광기 때문이다. 이 때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햄릿은 다시한번 소리를 치며 “Musik ausmachen!”[음악 꺼!]를 외친다. 음악이 꺼진다. 햄릿의 적은 그 자신의 광기인 점을 다시한번 주지시킨다. 드디어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레어티스는 검을 뽑아 들고, 햄릿은 식탁 위의 숟가락을 집어 든다. 그 사이에 클로디어스는 잔에 독을 타게 되고, 거트루드는 그것을 마신다. 계획에 의해 레어티스의 검에 독이 묻어 있다. 햄릿은 검에 맞는다. 숟가락을 놓은 햄릿 또한 레어티스를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로디어스를 찌른다. 광기에 어린 햄릿의 복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죽어가는 햄릿과 무대를 채우는 진공소리가 남는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아우성을 친다. 햄릿의 절규는 온 덴마크를 찌르고 마지막까지 광기의 동아줄을 붙잡는다.

필자는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며 햄릿의 ‘광기’에 집중했다. 과연 햄릿이 정신이 멀쩡하지만 끝까지 미친 척을 하는 걸까? 혹은 햄릿이 미친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 정말 미쳐갔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햄릿’만이 그 진실을 안다. 또한 2021 아비뇽 시네마 페스티벌의 <햄릿>은 흙, 물 등 물질이 주는 감각을 스크린을 통해 함께 느끼게 하면서 배우의 감각을 더욱 상상하게 했다. 비록 스크린이라는 겹이 있었지만, 만약 <햄릿>이 공연이 아닌 ‘영화’를 위한 상연이었다면 그만큼 배우의 감각에 대한 상상력에 함께 동참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햄릿이 흙을 먹는 장면이나, 오필리어가 흙을 뒤집어쓰는 장면 등에서, 만약 영화였다면 흙이 주는 냄새나 질감 같은 물성에 대해 간과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물성이 두드러지는 공연일수록 객석에 앉아서 배우와 함께 호흡할 때,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가 물질을 감각하는 것을 함께 더 상상하고 반응하게끔 해주는 것 같다. 만약 실제 아비뇽 객석에 앉아있었다면 그 감각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오스터마이어는 우리들 가까이로 와서 느끼고, 감각하게끔 하는 소통방식을 실천해냈다. <햄릿>의 배우들이 심리적 연기를 지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몸’을 통해 또다른 소통방식을 만들어냈다. 특히 흙, 물질은 이미지라는 정반대의 질감과 충돌한다. <햄릿>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신체와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처럼 <햄릿> 공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물성은 ‘햄릿’이 가진 지독한 광기가 인물들에게 전염되며, 또 다시 공연이 가진 물성이 전염된 광기들과 만나며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경험을 선사해준다. 특히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은 현대인의 고독이 잘 표상화 된 공연으로 아래와 같은 평가는 2021년 현재에도 유효하다. 

객석의 관객은 고통의 열병에 들떠 있는 광기의 청년 햄릿에게 때때로 감정이입이 가능해지고, 햄릿의 동시대적인 거친 언어는 일상에 억압되고 축소된 젊은이들에게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 공연은 포스트모던적인 신체 중심의 감각적 표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적 파스티쉬(pastische) 스타일”(심정순), 그리고 신사실주의가 만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내재된 보편적인 주제 – ‘삶과 죽음’, ‘삶과 연극’, ‘허상과 실제’ – 에 작금의 청년문화가 함께하면서 글로벌한 ‘대중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인순, 264)

이와 더불어 필자는 <햄릿>에서의 극중극은 단순한 복수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고, 감정이입을 통한 보는 이의 양심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검’과 같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관객으로 하여금 선악을 판단하게 하고, 극 속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과 골수를 쪼개는 힘’이 바로 연극에 담겨있다는 반증이다(히브리서 4:12). 이상으로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리뷰를 마무리한다. 두드러지는 광기와 물성으로 인해 2000년대 초반 공연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2021년에 스크린을 통해 만나보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공연예술 관계자들 및 관객들이 아비뇽으로 ‘몸(Körper)’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LG아트센터에 방문해 거리두기를 하며 아비뇽의 옛 공연들을 관람했다. 특히 코로나가 어서 종식되어 <햄릿>과 같은 공연으로 많은 관객들이 배우와 물성을 더욱 가깝게 감각할 수 있는 공연예술계로 나아가길 소망해본다.

참고문헌

심정순.「오스터마이어 <햄릿>: 몸, 감각,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미장센」. 『오늘의 서울연극』제1호, TTIS 편집부, 2020. 10.

“아비뇽 시네마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LG 아트센터, http://www.lgart.com/UIPage/perform/calender_view.aspx?seq=252591

이인순.「공연분석: 오스터마이어의 <햄릿>(프랑스 2008, 한국 2010)」, 『한국연극학』 Vol.1, No.52, 2014, 229-270. 

임승태.「한국 <햄릿> 상연에서의 광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임혜경.「60주년이 된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과 이론』Vol.- No.23, 2006, 78-86.

Crawley, Peter. <Ostermeier’s ‘Hamlet’: what did you expect?>. THE IRISH TIMES. 2014-08-23, https://www.irishtimes.com/culture/stage/ostermeier-s-hamlet-what-did-you-expect-1.1901339.

<햄릿(Hamlet)>.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라르스 아이딩어, 예니 쾨니히 출연. 샤우뷔네 제작.  2008.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LG 아트센터, 2021. 5.

Eidinger, Lars. 인터뷰.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기예술학과 연기양식론 수업자료 (교수자: 최영주),  조혜인 정리, 202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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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가려진 것을 보기: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

임승태

죽음의 시선

연극 <노란 벽지>에는 샬롯 퍼킨스 길만의 원작 소설에 본래 없던 시 한편이 삽입되어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방식은 다분히 극적이고 징후적이다. 시를 기억하지 못하던 주인공이 점차 기억을 회복함으로써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2a 30),  이 발견(아나그노리시스)은 안나의 운명을 바꾸는 급전(페리페테이아)을 동반하고 있다. 안나가 처한 상태(신경쇠약)와 원작으로부터 달라진 이 연극만의 결말(안나의 자살)을 놓고 보면, 시에 대한 망각이 중요한 징후이자 복선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사건의 결과를 놓고 보면 “죽음death”이란 마지막 시어는 신경쇠약을 앓는 안나가 이 시를 망각했던 그리고 애써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고자 했던 이유가 된다. 원작 소설에서 ‘나’가 벽지 뒤의 여인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종국에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준다면, 연출가는 여기에 시를 망각했다가 다시 발견하는 흐름을 겹쳐 놓음으로써 그 여인이 주인공 자신의 죽음 충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안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극적 아이러니를 확보하고, 이후 그것을 애써 기억하려는 안나의 모습에서 불길한 결말이 다가오는 서스펜스를 경험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소설이 연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제목을 대신하는 첫 행을 의식한 듯, “한줄기 빛”을 제공한다.

한편 시의 마지막 행에는 원작 소설과 이 연극을 매개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시어가 자리하고 있다. 안나가 망각하고 있던 “시선 (the) look”이라는 단어는 시를 다시 기억해내기 전에 이미 벽지 뒤의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혹은 벽지의 문양으로부터 그 죽음의 사자를 읽어내는 망상의 형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초점을 잃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망자의 시선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 마지막 구절로부터 이 연극이 라이브 카메라, 즉 시선을 조작하고 조정하는 행위를 이끌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수의 역설

2년 전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에서 케이티 미첼의 <줄리 아씨>를 보고 나서 나는 블로그에다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연된다면 큰 호응이 기대”된다고 감상을 남겼었다.  케이티 미첼의 또 다른 작품이 올 해 SPAF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예매를 서둘렀지만, 티켓을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한편에 자리한 걱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가 다시 봐도 흥미로울까? <줄리 아씨>를 보고 나올 때 옆에 있던 한 관객이 했던 말—“이런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 I’ve never seen this before.”—이 나에게도 적절한 반응이었다면, 이제 이런 걸 ‘다시’ 보게 되는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제목과 이야기가 바뀌었을 뿐 같은 형식이 되풀이될 위험성이 농후한 연극을 기다리던 나에겐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극장이란 우리말 단어가 여전히 연극 공연장과 영화관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이 둘의 병존과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줄리 아씨>도 <노란 벽지>도 무대가 크게 상하로 구분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매우 사실적인 세트가 펼쳐지는 아래쪽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 공간이자 촬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크린은 바로 그 무대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복수의 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무대에서 장면을 촬영하면 무대 밖 어디에선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이어 붙여 스크린에 영사함으로써 관객들은 한 편의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촬영 현장과 그 결과물을 위 아래로 동시에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TV 화면 한 켠에서 자주 목격하는 “LIVE” 표식 같은 역할을 하며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더불어 음향 기사는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지도록 필요한 소리를 만들어 덧입힌다. 영화의 효과음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러한 작업이 관객의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흥미가 더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것과 매개화된 것들이 경합을 벌인다. 이 광경은 그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관객은 마치 대위법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이, 아니면 피카소의 입체적 초상화를 볼 때와 같이, 복수의 채널로부터 전달되는 시청각의 자극에 대해 시종일관 선택하고 종합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공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기 위해서는 무대를 편안하게 관조하는 대신 순간순간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눈과 머리를 분주히 굴려야 한다.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 그리고 그것을 교차 편집하는 조정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그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경거리(show)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케이티 미첼이 라이브 시네마 쇼를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연극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구성원의 실수나 기계 오작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라이브 카메라가 사용되는 많은 공연에서 기계 오작동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미스터리는 학교나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빈번히 발생하는 일종의 도시 괴담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 위의 실수에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투사하게 되면서 긴장이 증폭된다. 그런데 이러한 결함들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 이외의 스태프들과 더불어,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물론 촬영상의 실수나 오작동이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그 실수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결점 같은 것이었다면,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마치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큰 가산점을 얻는 트리플 악셀로 승부하려는 어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첫날 공연에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찰나였지만 카메라 스태프 한 사람이 맞은편 카메라의 앵글 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순간 관객들은 마치 안나가 벽지 뒤에서 여자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한 남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공연을 곱씹을수록 이 순간이 하나의 망상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하는 스태프들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 생각하여 지각을 거슬러 ‘없는 것처럼’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에서는 마치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이 물화된 것인 양 그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얻기 위해선 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스크린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가부키의 구로코(黑子)처럼 그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배우와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우리의 습관같이 스크린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돌발 상황이 폭로하는 것은 연극과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관습이라는 필터를 거쳐 여과된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카메라 스태프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은 앞서 그 스케이트 선수가 점프에서 실패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훈련된, 혹은 관습에 무뎌진, 관객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이런 실수를 그저 없는 것처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물론 제작진의 연습 부족을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탈은폐된 이 연극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설령 공연 중에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연을 보는 것이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실수를 기다리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줄리 아씨>를 볼 때, 나는 더 이상 발표 당시의 긴장감을 기대할 수 없는 스트린드베리의 텍스트에서보다 무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영상의 매끄러운 흐름이 혹여 실수나 돌발 사고로 끊어지진 않을까를 긴장하며 보아야 했다. 드라마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이 서스펜스에 주목함으로써 나는 연극을 보는 습관적 태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케이티 미첼의 카메라는 무대 위에 분명히 있거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습적으로 없거나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도 우발적으로도 드러낸다. 프로이트를 따라 사소한 말 실수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을 찾아낼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연극의 공연에서 발생하는 실수로부터 그 저변에 놓여 있는 문제적 연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려서 보여줌: 스크린의 이중성

<노란 벽지>는 분명 <줄리 아씨>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노란 벽지>에서 카메라와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전작에 비해 더욱 진전된 연출가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줄리 아씨>에서는 다섯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배우의 앞, 뒤, 옆, 위 등 배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여러 대의 카메라가 배우를 둘러싸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역 배우와 둘 이상의 부분—뒷 모습이나 손만 비치는 식의—대역이 순차적으로 촬영되고 몽타주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케이티 미첼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매끄러운 영상이 사실은 몸을 조각조각 분할하고 다시 재조합한 분절의 결과임을 폭로함으로써 미디어가 사실임직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하는 조작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노란 벽지>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기에 초점거리를 달리한 두 대의 카메라가 나란히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하여 서로 다른 화각의 영상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 추가된다. 카메라 사이의 각도가 좁혀짐으로써 마치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더 많은 분절이 일어나고, 그만큼 인물의 모습은 더 섬세하게 포착된다. 카메라의 병치는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운동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에 대한 유비를 심화시킨다.

공연 중 간헐적으로 무대 전면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은 <줄리 아씨>에선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전술이다. 이 기간 동안 관객은 가려진 무대를 오직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연극사를 통틀어 이토록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제4의 벽을 관객 앞에 노출시킨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고지식한 제4의 벽은 카메라가 객석 방향을 촬영하기 위함과 같은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욕실이나 계단과 같이 처음부터 오직 스크린을 통해서만 확인해야 하는 공간도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관객을 문자 그대로 벽 뒤에 배치함으로써 벽지 속 그녀가 관객에 대한 은유임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이라면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할 장난을 연출가는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까? 관객을 적잖이 성가시게 만드는 이 장치가 노리는 것은 관객이 시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이화(異化) 효과임이 분명하다. 물론 관객 앞에 벽이 가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조금만 들면 그 벽 바로 위에 걸려 있는 스크린을 통해 벽 뒤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벽은 여전히 있지만 없는 듯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이중성은 스크린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즉 무언가를 보여주는 막이면서 동시에 가리기 위한 막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스크린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이 간편함 때문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촬영자가 프레임에 담고 편집자가 취사선택한 욕망의 몽타주란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선 만들어진 영상을 사실로 곧잘 믿어버린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객의 시선이 미디어를 지배하는 권력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케이티 미첼은 일시적으로 무대를 가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의 불편과 답답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그 잠깐이 불편하다면 미디어에 완전히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의 삶 또한 진실로부터 얼마나 차단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닫힌 본무대가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으로 유도한다고 해서 관객의 시선이 그곳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일방성에 저항하고자 그 동안 열려 있던 본무대 때문에 충분히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주변의 작은 부스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의 작은 부스에서는 한 여성 배우가 내레이터로서 목소리 연기를 펼치고 있고, 우측에는 음향 효과를 만들기 위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음향 장치가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 있었던 <줄리 아씨>에서 음향 담당자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제공했는데, 그에 비해 <노란 벽지>에서는 부스가 이러한 기회를 차단시킨다. 이런 점에선 부스 또한 음향 기사와 관객 사이에 둘러쳐진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보다 정밀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부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내레이터나 음향 기사가 부스 안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공연을 그 출발선에서부터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음향 기사가 라이브로 소리를 만들고 있긴 한 걸까? 그냥 소리를 만드는 시늉만 하고, 실제 소리는 이미 녹음된 것을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현장에서 만드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저 소리가 사실은 그렇게 믿도록 조작된 소리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이 연극은 라이브 공연과 그것을 녹화하고 편집한 영상을 동시에 보게 함으로써 관극 행위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인 동시성과 현장성이 주는 쾌감이 점차 사라질 때, 그 쾌감을 이어가는 동력이 불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의 의지였음 또한 분명해 진다.

스크린 너머로

나는 위에서 일부러 ‘연극’이란 말을 골라 썼다. 왜냐하면 이 공연을 연극이라 부르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이브) 카메라의 은유는 그 비판의 대상과 수위가 더욱 강력하고 통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러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메시지는 현란한 장치 없이 그저 “가난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내용은 없이 형식에만 집착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형식이 돋보이면 내용을 문제삼고 내용이 뛰어날 땐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비평가가 갖춰야 할 객관적 시각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반연극적 편견에 맞서 연극을 옹호하면서도,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내용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1450b 17-8).  케이티 미첼의 연극은 분명히 공연이나 배우 없이는 산출될 수 없는 어떤 효과에 대한 실험이다. 만약 <노란 벽지>의 문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간단히 “스파크 노트”의 친절한 해설을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의 연극화는 그 자체가 형식의 실험이며, 연극에서 소설을 이용하는 것은 내용을 빌어 형식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적어도 소설을 전유하는 연극에서 형식에 매료되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선에서도 불만이 들려온다. 이 또한 연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조롱하는 듯한 모습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작품이 다루는 많은 문제들이 연극성에 대해 더욱 깊은 성찰로 이끌지 연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케이티 미첼의 잡종적 시도로부터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 그 어디에도 결코 침해 받아선 안 되는 경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적 연극이 혹시라도 불쾌했다면 그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연극적 영화 <도그 빌>을 보면서 느낀 쾌감과 한 쌍을 이루는 것 아닐까. 물론 기술이란 언제나 자본의 손을 놓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세한 연극이 거대한 영화와 접목되는 것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하지만 연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연극의 잠재력과 범위를 축소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벽지의 색이 하필 노란색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선 몰라도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것은 작가나 연출가 또는 축제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노란 벽지>가 2014년의 대한민국에 초대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돌발적인, 그렇지만 강력한, 의미이다. 전국이 노란 색으로 도배된 세 계절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안나에게 처방된 휴식 요법, 즉 “가만히 있기”가 결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치명적 망상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일으킨 이 19세기 처방을 고집하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찾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방법이 그 옛날 전쟁 통에 서울을 몰래 벗어난 대통령에 의해, 그리고 가라앉는 배를 빠져나가는 선장과 선원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숙청당했고, 세월호에 남아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과 학생들은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현실의 카메라와 스크린이 얼마나 투명하게 가려진 무대를 중계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60년 전에 라디오는 서울을 빠져나간 대통령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시민들의 지식과 의식이 성숙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미디어가 권력자의 욕망을 몽타주하는 기술도 교묘해졌다. 기성 매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SNS나 외신을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권력자들의 욕망이 경합하는 모습을 더 자주 만날 뿐이다. 이 연극에서 무대 전면이 통째로 덮이고 스크린만 쳐다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을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 나 혼자만의 지나친 상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SPAF에서 초청한 해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작품들을 통해 오늘 이 시점의 한국연극이 나가야 할 바를 점검하고 반성하기 위함에 있다. 지난 여름 적지 않은 연극인들도 시민의 일원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했었다. 연극인들의 참여가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 극장 밖으로 나왔던 연극인들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연극제가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극장 앞에 가로 놓인 거대한 가림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 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옳다면, 지금 스크린으로 가린 그 어떤 것도 결국은 다른 스크린을 찾아 나타나게 되어 있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한 때이다. 애도를 충분히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오백여 명의 학부모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햄릿>이라도 하고, 스크린 뒤에서 곪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이 혁명적이라면 그것은 나라를 뒤집어 엎기를 기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한 인간이 바라보는 방식과 그리하여 사유하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는 <노란 벽지>라는 밖에서 온 연극 하나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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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회 젊은비평가상 공모 관계로 게재가 늦어졌습니다. 후보작으로 거론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를 드립니다.
** 드라마인으로 젊은비평가상 공모 지원작을 보내주시면 게재해드립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이용해주세요.

2014년 9월 6일 토요일

9월의 장바구니

산책

독자 여러분 안녕하셨나요? 모니터를 앞에 두고 인사를 건네자니, 무척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7월, 8월 연재를 쉬었기 때문에 혹,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몰라(정말 아름다운 상상이군요) 인사로 시작합니다. 답답한 세상 일들은 여전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고 하늘이 높아지니 조금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공연을 검색하고 예매를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복희>, 8월 26일 ~ 9월 21일, 남산 예술 센터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복희에게 슬픔이 강요됩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펴보니, 그녀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제목처럼 복희는 슬픔을 벗어내고 즐거움을 느끼며 홀로 설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호숫가 펜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밝힐 때, 혹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탐닉하고, 소비합니다. 교통사고도, 화재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도 이야기가 자꾸만 덧입혀집니다. 사람들은 인물과 성격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강요되고, 누군가에게는 우울감, 또는 넘치는 희망이 강요됩니다. 보고 나와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산 예술 센터의 원형 무대에 구현될 호수, 복희 이야기를 넘어서서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을 기대하고 극장에 갑니다.

<위키드>, ~ 10월 5일, 샤롯데씨어터 

 

영국 여행에서 뮤지컬 관람을 빠뜨릴 수 없지요. 가난한 여행자였지만 당일 할인 찬스를 이용해서 <위키드>를 보았습니다. 극장 내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주는 것에 즐거워하고, 작품에 감동해서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위키드>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 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는 다른 작품을 보러 갔었는데, 다음 날 친구를 데리고 가서 한 번 더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한참 동안 뮤지컬 넘버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아시아 팀이 대한했을 때 한 번 더 작품을 보았는데, 그때는 처음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캐스팅으로 진행될 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 시작된 작품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꽤 놀라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작품을 찾아주나 봅니다. 추석 연휴에 제공되는 할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매했습니다.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들이 어떨지(번역은 어떨지),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은 원작과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합니다.

<노란 벽지> 9월 25일 ~ 9월 27일,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국제 공연예술제(SPAF)가 9월 25일 시작됩니다. 총 21편의 작품이 공연되는데, 다양한 해외 초청 작품 뿐 아니라 극단 목화와 연희단거리패의 작품 등 국내 초청 작품들도 기대해 볼 만 합니다. 각 작품의 공연 기간이 매우 짧고 이미 조기 예매 등이 진행된 터라 티켓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심 있는 작품에 좌석이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예매하세요! <노란 벽지>는 SPAF의 첫 작품으로, 동시대 최고 연출가로 평가되는 독일의 케이티 미첼의 연출작입니다. 벽지 속에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믿는 주인공은 어떻게 될까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 분)같군요!)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방식이 그녀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