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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의 찝찝함

임승태

나는 이 연극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켄터키주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이미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2012년 “Complia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 같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초연이 2014년이었다는 점이나 연출의 변에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연극을 세월호, 특히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가만히 있으라”가 남긴 상처는 우리 사회에 여전하기에 이 말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변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제 검열관이 사라졌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어딘가 고약한 데가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은 이 작품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음, 혹은 말 잘 듣지 않음을 실천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은 가만히 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하지 말라는 담탱이의 조회 시간 잔소리는 매번 제 시간에 온 학생들이 듣게 마련이다. 과거 어느 공연에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순간 한 관객이 일어나 오셀로를 권총으로 쏴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은 그 사람보다 정의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재미나 감동과 같은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한 유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끝까지 봐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말 잘 듣는 게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만히 있었던 학생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던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혹은 차예슬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일차적 책임은 선장과 선원, 해경, 대통령에게 있고, 형사를 사칭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 혹은 최대한과 같이 시킨, 혹은 마땅히 시켜야 할 일도 시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커튼 콜 당시 내 뒤의 한 관객은 웃음 지으며 퇴장하는 최대한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외쳤다. 비록 이 말이 내가 관람한 저녁에 나온 관객 반응의 최대치였지만, 점잖은 관객들도 속으로는 그 이상을 외쳤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삼천만원을 잃었다. 옆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스 피싱이 퍽치기 강도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면 핸드폰을 보조 배터리에 연결해서 여섯 시간씩 범죄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을 잘 들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리에게 당하는 양의 약함을 문제삼는 것과 흡사하다. 비극이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아고의 악함을 문제삼지 않고, 오셀로의 귀 얇음과 데스데모나의 지나친 친절을 문제삼는다. 이아고나 최대한은 수퍼 빌런이지, 간단히 헤치울 수 있는 조무라기 악당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오그본/차예슬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건/연극에서 주목할 문제이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이들이야 말로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박종주의 표현대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이 연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스튜어트/최대한의 사악함이나 오그본/차예슬의 불쌍함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 중간에서 이 끔찍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지극한 평범성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하루의 삶 속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것보다 내게 손해가 없기를 바라며, 내게 이익이 된다면 정의를 잠시 외면할 준비도 되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불편한 것은 바로 나의 비열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은 이 연극을 끝까지 참고 봄으로써 카타르시스 없는 불편함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러한 사건에 연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와 (부)매니저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김미옥과 그의 배우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강성기를 비난하면서도 일말의 연민을 거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 주는 불편함은 배우들이 단체로 펠라치오 시늉을 하는 것을 강제로 훔쳐봐야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85분에서 90분간 극장에 앉아서 그것을 접하는 것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사건에 무언의 배우로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사도/마조키즘 성향을 활성화 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옮겨 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김수정의 저자권(authorship)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Compliance 와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선제적으로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Compliance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자가 후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가? 몇몇 대사를 비롯하여 몇가지 설정—Compliance의 금발 머리, 치킨 샌드위치 가게와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노란 머리, 삼계탕 집—상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알리바이 연대기> 리뷰를 대신하여

by 에스티

지난 해 많은 관심과 호평이 있었던 <알리바이 연대기>의 재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월초에 오늘 첫공연을 예약했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극장에 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공연을 보고 나왔습니다. 가는 길에도 새로운 뉴스를 열어보고 무소식에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었습니다. 화가 났고 지금도 화가 납니다.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우리 모습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부끄럽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을 떠안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기자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모든 팩트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정치인들은 자기를 뽑아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처럼 기웃거립니다. 죽은 자들과 유가족 앞에서 자기들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역겹습니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것밖에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방치해온 우리들 모두의 탓입니다. 천안함,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때 내 잘못은 아니라며 우리가 만들었던 알리바이의 결과를 우리는 오늘 보고 있습니다.

ⓒ권은비 http://omn.kr/7u4h

2014년 3월 4일 화요일

3월 장바구니

by 산책



<유쾌한 하녀 마리사>, 3월 6일 ~  3월 23일, 두산 아트센터 Space 111

이 작품은 “이보다 더 웃길 수 없다! 포복절도할 막강 코미디!”라는 문구에 끌려 예매했습니다. 요새 실컷 웃을 일이 너무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으하하하 웃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예매하고 보니 <은밀한 기쁨>과 같은 극단인 맨씨어터에서 준비한 작품이네요. <은밀한 기쁨>에서 알콜 중독자로 분했던 서정연 배우가 자살하려다 하녀 마리사를 죽이게 되는 요한나를 연기한다고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남편은 바람을 폈고, 부인은 자살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어떻게 웃음을 만들지 기대됩니다.

이제는 국민 연극이 된 <라이어>를 무려 15년전, 그러니까 1999년에 보았는데, 사실 그 뒤로 코미디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오해와 우연이 만들어 낼 희극적인 상황과 사건들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만의 재기 발랄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매:

산책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리뷰

산책의 <은밀한 기쁨> 리뷰




<맥베스> 3월 8일 ~ 3월 23일, 명동 예술극장 

이병훈 연출, 김소희 배우, 박해수 배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 이름들 앞에서 제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고전은 종종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또는 나의 기대를 뛰어 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데, 사실 그러한 경험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아쉬울 작품인 것 같습니다. 혹 <맥베스>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첫 번째 <맥베스>로는 무척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매진임박이라고 하니, 망설이시는 분들은 얼른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매:

에스티의 <맥베스> 리뷰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극장편> , 3월 15일 ~ 3월 30일, 남산 예술 드라마센터 

다음은 <남산 도큐멘타>의 공식적인 작품 소개글입니다.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은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을 선보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드라마인 독자가 계시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소개가 대체 무슨 말인지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실 이 소개만으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또는 재미가 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 그래서 그것이 사실도, 허구도 아닌,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순간들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상상해 보는 이 작품은 1962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 곳을 지나간 사람들, 그곳에서 올려진 작품들, 출연한 배우들, 그들이 연기한 인물들을 불러낼 것 같습니다. 그 과거들을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기대됩니다.

예매:

서유미님의 <남산 도큐멘타> 리뷰




2014 수다연극 - 청춘인터뷰 (함스타)

by 함스타

연극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이 하나 둘 차례로 나와서 자기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누구입니다. 스물 여덟살이고요. 데뷔한지 1년 되었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저는 박누구입니다. 서른 두살이고요. 데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등등. 9명의 배우가 각자의 실명과 나이 그리고 데뷔 연차를 밝히면서, 그렇게 <2014>가 시작되었다.

작: 공동창작
연출: 이영석
단체: 프로젝트 그룹 코라
공연일: 2014.02.12. ~ 02.16.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관람일: 2014.02.13.

배우들 자신의 이야기 — 디바이징 씨어터

프로젝트 그룹 코라의 <수다연극>은 이번 <2014>가 처음은 아니다. 2012년 상반기에 <수다연극>의 모태가 되는 공연이 당시 연출이 출강하던 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서 학생들의 실제 이야기를 담아 학기말 공연으로 올려졌고, 이후 앵콜 공연을 거쳐, 같은 해 10월에는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인 두산 아트랩에서 <수다연극: 청춘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2014년 2월, (무려) 예술의 전당에서, (무려) ‘신진 유망 연출가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또 하나의 <수다연극>이 관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안타깝게도 2012년에 몇 차례 이루어진 공연들을 모두 보지 못했지만, 그 컨셉과 창작 방식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었다. 예컨대 연극이 철저히 공동창작으로 구성되었다든가, 연극에서 배우들이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정도는 말이다. 때문에 공연을 보기 전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기대와 의심이라는 야누스의 얼굴로 떠올랐다.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니 ‘삶의 연극화’니 하는 프로그램북의 문구가 이러한 질문에 더욱 불을 당겼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진짜’ 자신들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연극이라는 거짓말, 혹은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거짓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질문에 대한 작품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배우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의 ‘내용’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을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 대한 내용을) ‘연기하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럽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있는 사람은 연출뿐이었다는 것이 이 연극의 최대 아이러니다.)

물론 그렇다. 연극이란 본디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실제인 양 받아들이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약속이 없다면, 그 어떤 말을 한대도 그것은 ‘연극’일 뿐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연극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다연극>과 같이 (그리고 오늘날 다큐멘터리 연극이나 소위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의 연극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공연자들의 실제 이야기로 이루어진 공연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예컨대 <수다연극>의 청춘 배우들은 자신들의 공연에 대해서 ‘연극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분명히 연극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다연극>에서는,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그 말도 거짓말이다.

<수다연극>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연극’이라는 규정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에 항존하여 그것을 아름답고 흥미롭게 만드는 특별한 긴장들이 만나는 지점. 허구냐 실재냐, 거짓이냐 진실이냐, 재현이냐 현존이냐의 문제들이 부딪치는 지점. 이런 지점들을 보다 과감하게 돌파했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 봄직한 굵직한 문제들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2014>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수다’연극의 말, 말,말

<수다연극>을 보고, 혹은 보기 전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술자리에서 들으면 훨씬 재미있을 이야기를 왜 굳이 연극으로 봐야 해?” 혹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극장까지 와서 내가 이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해?”

가능한 대답들 중 유일하게 정당한 대답이 있다면, ‘그것이 들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는가? 잠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대답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당최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인가? 가치라는 게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가? 잠깐, 질문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어 신과 우주에 대한 논증까지 가기 전에 질문의 방향을 돌려보자. 그 이야기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왜 ‘이야기’인가?

2012년에 연출은 다음과 같이 썼다.

“관객은 허구적 캐릭터의 행동action을 ‘보기’ 보다는 무대 위 사람들 삶의 이야기story를 ‘듣게’ 된다. 일상을 영위하는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서 체험이 무대를 채우게 되며, 말하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통해 공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삶의 연극화’와 ‘연극형식의 확장’ 은 그대로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되는 것이다.” (2012년 두산아트랩 <수다연극: 청춘수업>)

2014년의 공연에서도, ‘말하기’가 공연의 혹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라는 연출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 (관객)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말’로써 전달할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공연 후반에 한 배우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고’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공연 내내 그 사고에 대해 에둘러서 암시만 하다가,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다소간’ 털어놓는다. 그렇게 언급을 피하고 싶고, 그렇게 얕게 밖에는 털어놓을 수 없을만큼 그의 인생에 큰 상처가 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리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저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된 도리로서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다 보여주지 않는 배우를 만나러, 속시원치 못한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배우의 가장 사적인 내면의 처절한 밑바닥을 보러 극장을 찾은 것 또한 아니다. 관객은 그저 배우의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을 뿐이다. 그 속에 삶의 진실한 어떤 한 조각이 흔적이나마 담겨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 공명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차라리 배우가 그 당시 느꼈던 처절한 마음을 괴성을 질러서 표현했다면, 막춤이라도 추고 노래라도 불러서 쏟아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관객은 그 슬픔과 상처의 강렬함,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자 달려온 의지까지도 함께 경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관객으로서 나는 그렇다. 배우들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강렬할 수 있을지, 그래서 나를 어디로/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 — 재현과 현존의 경계에서 

르네 마그리트가 평범하디 평범한 파이프 하나를 그리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듯이, 대상은 재현되는 순간 더이상 원본이 아니다. 경험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더이상 그 실재 혹은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결국 <수다연극>은 재현의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무대 위에서 뱉어지는 모든 말들이 단 한 순간도 재현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재현에 그치지 않는 살아있는 순간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세워보고자 하는.

1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이 영화 촬영 현장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좀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이 장면은 실제 경험을 재연한 것도 아니라, 사실상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 분명히 배우들도 그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계속 자신이라는 가면을 쓰지도 벗지도 못하던 배우들이, 재현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역할’이라는 가면을 제대로 쓰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어정쩡한 연기를 보기가 상당히 거북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연출과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 반원형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가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보다 안정을 찾았을 수도 있고, 이야기의 주제가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이 좀 더 깊숙한 주제로 들어가면서 관객의 공감대가 넓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주요했던 건 공간 배치의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객석 발코니를 포함하여 공간을 다원적으로 활용하던 1부와 달리 모두가 관객을 마주보고 일렬로 앉음으로써,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아, 저 유명한 제 4의 벽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더 이상 관객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시선을 주고받으며, 마치 관객이 없는 듯 떠들 수 있게 되었고, 관객들 또한 무대 위 대화를 마치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듯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재현과 현존 사이를 휘청거리며 위험한 줄을 타던 작품은 비록 재현으로 안착되고 말았지만.

삶의 연극화를 꿈꾸며

짐작해 보건대, 연극이 끝나고 연출이 많이 들은 코멘트 중 하나가 “차라리 아주 다 짜고 쳐 보지 그랬어…”가 아닐까 싶다. 아마 제대로 짜고 쳤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작보다 더 완성도 있는 연극, 보기에 즐겁고 편안한 연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연출이 보여준 말을 가지고 노는 뛰어난 감각과 밀도 있는 연출력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이미 가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혹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어려운 법이니까. 프로젝트 그룹 코라가 <수다연극>을 혹은 디바이징 씨어터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싹을 틔운 ‘연극’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소중히 키워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리뷰는 <오늘의 서울연극> 제 41호에서 재수록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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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끼님의 리뷰도 함께 보아요.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2014 수다연극-청춘인터뷰 (한토끼)


 보고 쓴 사람. 한토끼




보러가기 전엔 이영석 연출의 전작 <숨쉬러 나가다>와 같이 말의 밀도가 높은 연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레짐작하고 언어가 주가 되는 연극에 대한 서두를 신나게 미리 써두고 출발했는데. 보고 나니 <우리 사이>와 같은 사실주의적 노선에서 더 나간 쪽으로 분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쓰니 엄청 많이 본 것 같다. 사실 내가 본 4개 남짓 작품들을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나누어본 것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개 안되는 정보라도 잘 나눠서 간수하고 싶어하니까. 아무튼 이영석 연출의 작품들은 당연히 다양했지만 대체로 말이 풍성했는데, 그 때문에 말과 연극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실제 인터뷰같은 수다들이 실제 어느 사람들의 모습들과 겹쳐있었다. 내가 그의 인터뷰를 들을 때에 리얼리티는 리얼리티의 조상이 되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로 이루어진 리얼리티 쯤이 되지 않을까.

<숨쉬러 나가다> 중에서
ⓒ극단신작로2011


연극은 배우를 업으로 결정해 준비 중이거나, 막 시작했거나, 한참 활동 중인 26~33세까지 9명의 배우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대에는 인터뷰 현장인 듯 책상과 물병만이 놓여있다. 각각의 배우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 소개를 하며 시작한다. 몇 살이고, 데뷔한 지 몇 년이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러니까 이 배우들은 자신이 그 배우인 동시에 그 배우를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인터뷰어가 있다. 바로 이 공연의 연출가이기도 한 이영석 연출인데, 그는 직접 무대에 등장해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는 어떤 생각에서 이 배우들을 모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지금의 청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이 공연의 시작이다.

이 과정은 마치 페이크(fake) 다큐멘터리처럼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져서 이 상황이 실제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터뷰인지 아니면 대본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인지 궁금해지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풍부한 현장성을 띠고 있지만 사실 2% 빼고는 다 대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완벽하게 허구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대본 자체가 실제 배우들의 삶과 성격에서 추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다시 쌓아올린 실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적인 허구는 기껏해야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재연한 지점에서만 순간 생겼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형식으로 창작되는 연극을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라고 한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배우들이 참여하는 창작 방법이다. 기존에 준비된 희곡 대신 배우들이 극의 주제 선정과 자료 조사 등 공연 준비의 첫 단계부터 함께 한다. 즉흥극이나 꼬메디아 델라르떼와 비슷하게 보이는 면이 있지만 디바이징 씨어터에서는 참여자들이 진행될 장면과 결말을 미리 합의하여 완성해둔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형식으로 인터뷰 현장을 재현하면서 이 공연에서는 재연의 이중성이라는 긴장감이 생긴다. 관객 모두는 이것이 재연이란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인터뷰 현장을 중계하는 듯 하지만 연극은 원래 짜고 치는 거니까. 관객이 모두 이것이 진짜가 아님을 의심하고 있는 긴장감. 여기에 더하여 어디까지 가정하고 어디까지 속아주어야 하나 고민하는 관객의 이중적 고민. 이러한 지점은 모호함 속에서 관객의 집중을 구하며 극 전반적으로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들의 웃음은 지금 이 순간의 웃음인가, 그때 그 웃음의 재연인가?

이 공연에서 이 모호한 재연성을 지닌 구성 형식으로 조심스럽게 포장해서 관객 앞에 풀어놓는 것은 원래의 소재였던 배우개개인의 잡담 섞인 신변이 오가고 진심 섞인 얘기와 넋두리가 오가는 부산스러운 인터뷰 현장이다. 인터미션이 지나 시작된 2막에서도 연기에 대한 생각에 이어 먹고사는 상황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차분히 이어진다. 여기서 일반적인 연극에서 기대할법한 허구는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관객에게는 다소 김빠질 일일수도 있겠다.

실제 현장인지 아닌지의 진위를 알아내는 것은 이 공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극에서 진짜 인터뷰로 보이도록 집중하면서 조명하는 것은 페이크 속의 새로운 허구적 이야기보다는 인터뷰이의 모습 자체이기 때문이다.

수다연극은 많은 말들로 현실의 어떤 순간과 대상을 다치지 않게 떠다가 정밀하게 다시 풀어놓는다. 이 바탕에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무척 면밀한 관찰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한번 보고 선을 백번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백번 보고 선을 하나 그리는 것. 아마 이 공연을 위한 프로덕션 과정에서도 배우들에 대한 여러 겹의 면밀한 관찰과 이야기 듣기, 꺼내기가 있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 바닥에는 현재를 함께 사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깔려있었을 것이고.

어떤 정황이나 사람을 한마디 말로 정의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때로는 폭력적이다. 어떤 시각의 일방적 설정 자체가 그러하다. 때문에 어쩌면 무언가를 그대로 떠오고 함께 보기 위해서는 수없이 부유하고 떠도는 질문과 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테이블에서 마주하고 나누는 말은 부끄럽거나 솔직하지 못해서 미처 서로에게 다 닿거나 이해되지 못하더라도 그곳의 공기에는 어느 순간 함께 하고 있다는 리얼리티가 떠다니게 마련이다. ㉢㉣㉤㉦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혜경궁 홍씨>

by 서유미

<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변호인》이 개봉합니다.

by 에스티


여기 저기서 많은 리뷰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을 아끼고 감상을 대신하여 리어가 죽은 셋째 딸 코딜리어를 안고 외치는 마지막 대사를 옮깁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나서도 이 대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변호인> 예매를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 불쌍한 바보가 목매달려 죽었다.
아냐,
안 돼,
생명이 없어!
어찌하여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
너는 다시 못 오는구나.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제발 이 단추 좀 풀어주게.
고맙네.
이것이 보이는가?
이 애를 봐!
봐, 이 애 입술을!
여기를 봐!
여기를 보라고!
(죽는다.)

- <리어 왕> 5막 2장 (김태원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301-2면)
*산문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인용자가 줄바꿈하였습니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지독한 밀리터리 가스펠 뮤지컬: <해피 투게더>

by 에스티
이수인 작, 연출 <해피 투게더>
2013.11.15-12.15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

이전에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영화와 드라마가 있었지만, 난 그 둘 다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란 남자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병헌과 전지현이 남매로 나왔던 연속극의 제목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병헌이 2군 야구선수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 해에 방송된 <미스터Q>의 경우 본방사수를 할 수 없어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서 봤었지만, 서울에 상경한 이듬해 나는 그만 TV드라마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더 있을까 싶어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니 예전에 노래하다가 틀리면 머리 위에 쟁반이 떨어지던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한 예능 프로의 한 꼭지라고 한다.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원대한 포부가 없더라도 이정도는 누구나 꿈꾸는 소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고, 이 이름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작품의 제목으로 반복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 소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11월 15일 개막한 동명의 연극은 이 제목을 가장 반어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그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다: 연극 <노란달> (부제: 레일라와 리의 발라드)

by 서유미

장소 / 백성희장민호 극장
원작 / 데이비드 그레이그 David Greig, <Yellow Moon>
연출 / 토니 그래함 Tony Graham 
극단 / 국립극단

1895년 크리스마스, 미국 미주리 주에서 '수사슴' 리 쉘튼Lee Shelton이 빌리 리옹스Billy Lyons을 살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Stagger Lee’는 이 사건의 내용을 가사로 옮긴 미국 포크송이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50년대 말 오랜 기간 빌보드 차트에 머무른 로이드 프라이스Lloyd Price의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연극 <노란 달>은 이 노래와 이를 배경으로 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극은, 굉장히 다르지만 동시에 굉장히 비슷한 10대 소년과 소녀의, 일종의 여행기이다. 아버지 없이, 알코올 중독의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리.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하며 진짜 '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레일라. 둘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던 그들은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상과의 소통 불화라는 어떠한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 그러던 어느 밤, 그 사건이 일어난다. 우연히 만난 둘. 때마침 리는 엄마의 남자친구 빌리와 언쟁을 벌이게 되고, 그가 자신의 모자를 뺏으려 들자 그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을을 떠나게 된, 아니 떠날 수밖에 없었던 리와, 그와의 동행 길을 선택한 레일라의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