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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극단 애인, 《손님》

by 에스티

<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홍어와 <짬뽕>

by 에스티

2001년 9월 11일 CNN을 통해 중계된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 장면은 이후 미국 거대 자본 영화에서 반복되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탑이 무너질 때나 <아바타>에서 판도라의 홈트리가 미사일 공격으로 쓰러질 때 우리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저택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스타트랙 다크니스>에서 거대한 우주비행선이 맨하탄에 불시착하면서 고층 건물들을 무참히 파괴할 때 이 장면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앵글을 통해 상호 유사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 상업 영화들에서 이 장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리셰일지언정,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환기됨으로써 악당에 대한 반감과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 일치감이 쉽게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예리한 독자의 눈에는 이 글이 현란한 시각 효과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음이 발각되었으리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문학이나 영상으로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9‧11에 버금가는 사건은 아마도 5‧18일 것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만 하더라도 <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 <화려한 휴가> 등의 작품들이 오월의 광주를 그렸고, 이런 시도는 2000년 후반에 들어 <스카우트>나 <수퍼맨이었던 사나이>, 그리고 <26년>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판에서는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윤정환 작/연출의 <짬뽕>이 지난 10년간 공연되어 왔고, 정경진이 쓰고 고선웅이 연출한 <푸르른 날에>도 세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여기서 이들 작품을 따로 검토하거나 그 우열을 가릴 마음은 없다. 이 작품들 모두 국가에 의해 희생된 젊은 청춘을 애도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에 주목하면서도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연극적 재미를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나 간접적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광주는 결코 단순한 볼거리에 머물지 않는 무게로 다가온다. 이 두 작품의 미덕이기도 한 웃음은 이내 감정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갈 준비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독한 면이 있다. 또한, 장신부, 신작로, 그리고 오민호/여산 같은 피해자들이,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나옴으로써 영혼은 죽어버린”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그후로도 고통과 자기 학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관객들의 양심의 문을 자꾸만 불편하게 두드린다. 물론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그날의 기억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면 그 또한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빨강’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이 작품들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