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9일 목요일

기능 없는 글쓰기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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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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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침투하는 비체들 

2부. 기능 없는 글쓰기


6. 글쓰기, 기능, 미로

민조

이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일단 두 분께서는 전통적인 희곡 장르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계신데요, 연재님께서는 2019년에 저랑 인터뷰하셨을 때 희곡이라는 장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말씀해 주신 적도 있었죠.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났고요.  

2023년 1월 18일 수요일

침투하는 비체들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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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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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침투하는 비체들 


1. 팬데믹 이후 혹은 이전

민조

2022년 9월 《한국극예술연구》에 「이후의 신체를 조형하는 포스트휴먼 극작술-신효진 희곡 <머핀과 치와와>(2021), 김연재 희곡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2021)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실었는데요. 논문을 구상할 때 당연히 ‘비인간’, ‘동물-되기’ 이런 화두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작품들 내에서 소위 ‘서사적 종말’이나 인간 사회 내부의 어떤 거대한 ‘공동(空洞)’이 엿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장르상의 차이가 조금 있는데도요. 비인간 개념을 넘어서 우리의 현실, 관계, 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포스트휴머니즘이 사이버네틱스 기술을 통한 인간의 보완이나 향상 프로젝트로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팬데믹 위기 이후에는 정반대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고 봐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봤던 작품들 중에는 인간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안의 어둠이나 구멍으로 더 들어가려 하고, 그 구멍을 통해서 비인간 존재자들과 만나려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두 분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많이 했고요. 

신효진 작가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머핀과 치와와>가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던 2021년에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요. 

2023년 1월 7일 토요일

빛: 육체를 과묵히 관통하는 처음과 나중

조혜인


에릭 아르날 부르취(Eric Arnal-Burtschy)는 빛이 수행자로서 무한함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빛 퍼포먼스: 심연의 숲>을 고안하였다. 그리하여, 무한으로부터 상기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관객은 자기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입구 바닥 정사각형들이 분할된 형태로 구역을 이루고 있는 곳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는 마치 무덤 혹은 납골당을 환기하며 신발이 벗겨진 상태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즉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때로 상정할 수 있다. 관객이 벗어놓고 간 신발로부터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론적 관점이 떠오른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구두>(1886)를 분석하며, 낡은 구두를 통해 농촌 여인의 고단한 삶이 탈은폐(Aletheia)되고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본 공연에서 벗어놓은 관객의 신발 또한 마찬가지다. 신발은 무(無)가 아닌 ‘존재’이며, 신발 주인의 인생을 함축한다. 관객의 신발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상징’이다.


이러한 신발 벗기 행위와 공연장으로의 입장은 장례 절차를 상기시킨다. 신발을 벗고 공연장에 들어감으로써 관객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고, 바닥에 누워 고요 속에서 자기 몸을 관통하는 빛을 경험한다. 공간은 온전히 빛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사면이 막혀 있는 블랙박스가 아닌 영원히 확장되는 우주와도 같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빛줄기는 마치 이승 저편에 있는 어떠한 세계처럼 감각된다. 빛 줄기는 제리 주커(Jerry Zucker) 감독의 영화 <사랑과 영혼>(Ghost, 1990) 엔딩에서 등장하는 저승으로 가는 찬란하고도 밝은 입구처럼, 쉽사리 가 닿을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낯선 초대 앞에서 이승에 대한 미련이 소멸하는 것 같이, 관객들은 그 빛에 손을 뻗어 보기도 하고, 소실점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한다. 촉각으로 결코 감각될 수 없는 빛에 대한 육체적 갈망은 커져만 간다. 빛은 과묵하게 관객의 몸을 관통할 뿐이다. 반면에, 편안과 평온의 한 지점에서 관객은 계속 누워있는 행위를 선택하기도 한다. 관객마다 빛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빛에 자기 육체를 기꺼이 내어준다는 점에서 빛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