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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일 금요일

답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 ≪생각은 자유≫


 박종주

1년. 그가 한국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다. “질문만 던지는 연극을 만드는 데에 질린” 그는 무언가 답을 찾기를 기대하며 독일행을 택한다. 150편이 넘는 연극을 보고, 독일, 일본, 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그 1년을 보낸다. 무언가 답을 주는 연극을 그는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은 자유〉(김재엽 작, 연출)은 그 1년의 성과 ― 인터뷰, 사진, 영상, 연극 리플렛까지 ― 를 모아 만든 연극이다. 두산아트센터 인문극장 “갈등” 시리즈의 하나로 상연되고 있다.
어떤 연극인의 (특별한) 일상에 관한 연극이므로 〈생각은 자유〉는 자연스레 연극에 대한 연극이 된다. 연극의 도시 베를린에서 연극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여주고, 베를린의 연극인들이 가진 생각을 들려주고, 그것들을 보고 듣는 한국의 연극인이 하는 고민을 풀어 놓는 그런 연극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연극인 동시에, 작가가 본 여러 연극들, 그리고 그가 만든 여러 연극들에 대한 연극적 비평이다.
〈생각은 자유〉를 이끄는 것은 거의가 주인공의 방백이다. 그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읊는다. 그러고 나면 그 구체적인 상황이 배우들의 연기로 재현된다. 그렇다 보니 무대 전환이 빠르고 배우들이 일인다역을 맡는 일도 많다. 때로는 관객 일부를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다소간 산만한 가운데, 적지 않은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

시작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세월호다. 그가 베를린으로 떠난 2015년의 사회적 화두였고 따라서 연극적 화두였던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이 연극은 연극의 사회적 소명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세월호만은 아니다. 전작의 소재였던 용산 참사나 민중총궐기를 주최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수감 소식 (마침 5월의 마지막날 그의 형이 확정되었다. 징역 3년, 벌금 50만원.) 등 몇 가지 사회적 이슈들이 언급된다.
공공극장에서의 작품 검열이 있는 나라에서 연극을 해 온, 용산 참사를 “그저 소재로 가져다” 연극을 만들었던 그에게 베를린의 연극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공극장 예술감독이 정부에 대한 항의시위를 기획하는 모습도, 이주니 제 3세대니 하는 사회적 이슈들이 극장에서 직접, 그것도 당사자들에 의해 다루어지는 모습도 말이다. 〈생각은 자유〉는 그런 모습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에 1차적인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했다. 한국의 관객들에게, 정확히는 ‘연극인’인 관객들에게 말이다. (전혀 우습지 않은 장면들에서 웃었던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 배우나 언급되는 연출가를 알고 있는 연극인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외의 연극을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혹은 한국의 연극 이상의 것을 상상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새로웠을지 모르겠다. 무대에서 반복되는 대사 중에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 있으니 보인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그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되물음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그 관심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여행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물리적인 ‘밖에 있음’을 요구하는 어떤 것은 아닐 터이다.
그의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이주Migration”라고 표현한다. 돌아갈 곳과 돌아갈 날을 정해 둔 이에게 어울리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이주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시각에서부터 그는 “세계시민”의 시각을 또한 배운다. 그러나 나는 의심한다. 그의 시각이란,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관객의 시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안내서 한 권을 들고 극장을 찾아 골목골목을 돌아 다니는, 적은 노력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남이 찾은 답을 얻어 가기 위해 극장을 찾은 그런 관객 말이다.

극장과 광장

『연극과 정치』였던가, 그가 읽은 책은 그에게 고대 그리스 시민들에게 극장에 가는 일은 의무였다고,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그런 의무였다고 알려 준다. 극장이란 곧 국가의 대소사를 논하는 광장이요 토론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극장 정신이 오늘날 베를린에 살아 있음을 본다. 사회적 이슈들을 토론하는 곳으로서의 극장, 낯 모르는 이들이 말을 나누는 곳으로서의 극장을 그는 그곳에서 체험하고 돌아 왔다.
귀국을 앞두고 짐을 싸는 그에게 아내는 묻는다. 새로운 연극이 무대에 올라야 할 곳이 극장일지 광장일지를 말이다. 그의 답은 단순하다. 극장을 광장으로, 광장을 극장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연극이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가 출국 전에 품었던 ‘답을 주는 연극’에 대한 꿈을 접지 않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소위 선진국의 사례를 알리는 이 연극은, 관객을 무대에 올리고서도 그들에게 자리를 채우는 것 이상의 역할을, 그 이외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껏 제도화된 극장 안에서 이 연극이 만드는 공간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교실에 가깝다. 아는 (것으로 전제된) 사람이 모르는 (것으로 전제된) 사람을 상대로 혼자서 내내 이야기하는 그런 교실 말이다.
글쎄, 나는 그의 전작들을 보지 못했고 그가 얼마나 달라져서 돌아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 확인한 점이 있다면 한 장면 정도를 빼고는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내내 엄마의 역할이었다는 점 정도다. 그 1년간 그가 연극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과연 충분히 경험하고 충분히 고민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연극만 따로 떼어 고민하는 것으로는 ― 연극과 이어질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 충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종류의 광장을 열 준비가 되어 돌아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연극이 그러하듯, 광장은 연극이 끝난 이후에 열릴 것이다. 극장 바깥에서 대화를 나누는 관객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 광장을, 책 한 권 (그가 읽은 『연극과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 이상을 하지 않은 채 끝나 버리는 (그 정보들을 물론 연극은 일종의 현장성을 갖고서 전하지만) 이 연극이 연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광장을 여는 것은 연극인들이 아니라 늘 관객들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최초로 정부를 상대로 싸웠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

한국 바깥에서 살아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극장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극장으로서의 광장, 광장으로서의 극장을 운운하지 않아도 이미 곳곳에 광장이 있다는 사실이라든가 하는 점들 말이다. (어느 정도는 겸손이겠지만) 그 스스로 그저 소재로 삼았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용산 참사를 갖고서 거리에서 싸우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시를 읊었던 사람들이 있었듯 말이다.
극장이 광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교실의 꼴을 벗어나는 일일 터이다. 작가나 연출이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면, 극장에서 ‘가르침’은 일방향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혹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장에 모인다고 생각하고서 만들 때에야 연극이 광장을 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지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든, 답을 주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관객들이 해 본 적 없을 질문, 관객들이 갖지 못한 답이라는 믿음은 극장을 지루한 교실로 만들 뿐이다. 광장이라는 수사가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평등한 이들이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고 서로를 설득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극장이 광장이 되기 위해 우선 필요한 점은 그러한 평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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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작/연출
〈생각은 자유〉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2017.05.23.-06.17.
5월 30일 관람.


2017년 5월 24일 수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과 말 잘 듣는 관객들


 박종주

90분간, 말 잘 듣는 사람들

직원 열 명이 채 안 되는 어느 식당에 의문의 전화가 걸려 온다. 스스로를 서울지방경찰청 강남 경찰서 강력한 형사라고 밝힌 남자. 그는 가게에서 지갑을 도난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 왔다며 매니저에게 협조를 구한다. 그가 원하는 협조란 놀랍게도 포천에서 서울로 돌아 오고 있는 자신을 대신해 수사를 진행해 달라는 것, 정확히는 용의자에 대한 심문을 대신해 달라는 것이다.
용의자는 2주 전부터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상고 출신의 노란 머리 — 피할 수 없는 용의자의 표식이다 — 여성이다. 잠깐 저어하던 매니저는 형사의 설득에 이 이에 대한 심문과 조사를 실시한다. 사장에게 책을 잡히고 싶지 않은 매니저의 욕망과 자기 사건을 다른 형사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형사의 욕망이 교차하며 사건의 발단이 된다.
심문은 평범하게 소지품 검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훔친 지갑도 그 속의 돈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형사의 요구는 몸 수색으로, 이어서 알몸 수색으로, 조금씩 과감해 진다. 삼계탕을 파는 이 식당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복날, 손님들도 다른 직원들도 모르는 가운데, 직원 대기실에서는 이런 사건이 펼쳐진다.
형사는 종종 언성을 높인다. 매니저가, 혹은 매니저를 대신해 심문을 이어가는 다른 직원이 종종 협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성이 높아지기만 하면 협조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매니저의 남편이 심문을 이어가면서 그 수위는 극에 다다른다. 바닥을 개처럼 기게 하기, 질 속을 검사하기, 구강 성교 강요하기 — 어느새 심문의 목표는 용의자에게 수치심을 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매니저의 남편은 시킨 것 이상을 해 내고, 형사는 기분이 좋아진다.
90분간 작은 방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을 통해 〈말 잘 듣는 사람들〉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 권력의 요구에 부응해 불의마저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가를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어떤 조건들이 맞아떨어졌을 때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를 — 얼마나 말을 잘 듣게 되고 마는지를 가늠하는 사고 실험 말이다.

게으른 실험

84분. 이것은 내가 연극을 관람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짧으면 2, 3분, 길면 8, 9분쯤 되었을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말은 대강 이렇다. 저녁 시간이 되어 손님이 빠져 나가고 조금 한가해 진 주방장이 이 밀실에서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자조치종을 들은 그는 대노한다. 수사는 형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전화 너머 목소리의 주인이 형사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필 형사의 명령을 조금이나마 거부했던 한 사람이, 그리고 형사를 믿지 않은 또 한 사람이, 둘 다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이라고 해 두자.)
그제야 상황을 의심하게 된,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 그의 정체를 확인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의문의 주인공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전까지는 매직 미러 너머로 희미하게 상반신만을 내어 보이고 있던 그는) 와이셔츠에 팬티바람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극단적으로 통제된 변수들 — 바쁜 하루, 폐쇄된 방, 위압적인 공권력, 임금노동자라는 위치 등의 ― 속에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내어 보일 수 있는지를, 평소에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2004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만큼이 실제 사건을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브라와 팬티만 입은 채 방치되는 용의자, 팬티 속에 손을 넣어 확인하는 부매니저, 속옷마저 벗기고 질 속을 확인하는 매니저의 남편, 수 시간째 갇혀 있다 결국 오줌을 싸고 마는 용의자, 이 모든 것이 이미 현실에서 실험된 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17년 어느 낮에 극장에서 감행하기에, 이는 너무나도 게으른 실험이다. 원하는 결과가 이미 나온 바 있는 어느 실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변수들이 너무도 통제되어 있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는 실험, 그러나 자극적인 어느 실험의 재현일 뿐이기에 말이다.
가벽을 세우고 온갖 상자들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모자라 거울에 “증” 마크까지 새겨 놓은, 식당의 직원 대기실을 성실하게 재현한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극적 실험은 없을 것임을, 오줌을 싸는 장면에서는 무대에 정말로 물이 흐르게 하는 것 이외의 연출을 알지 못하는 연극임을 알리는 복선 말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오히려 질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하며 극장에 모인 이들에게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은 아닌가를 물을 절호의 기회를 말이다. 끔찍한 장면에서 탄식을 내뱉던 관객들은 우스운 장면에서 금세 폭소를 터뜨린다.

말 잘 듣는 관객들

이 연극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어느 관객의 리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보다는 이 연극이 덜 게으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보지 않은 6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극장에 앉아 있었던 84분 내내 여기저기서 괴로움의 탄식이 들렸지만, 관객들이 줄이어 자리를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두 명쯤 조용히 나갔을는지는 모르지만.) 84분 째에 내가 자리를 뜨자 그 뒤로 두어 명이 따라 나왔다. 나머지는 아마도 끝까지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웃으며 커튼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관객됨’에 대해 생각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이 보기 싫어도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은 돈을 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끝까지 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돈을 냈기 때문, 이라면 슬픈 일이다. 자신의 시간보다, 자신의 정신보다, 돈을 더 아까워 해야 한다는 상황이 말이다. 혹은 관객으로서의 권리가 소비자로서의 권리로 축소되는 상황이 말이다.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대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기껏 관객‘들’이 모이는 극장이란 장소에서, 관객으로서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라면 말이다.
말 걸어 오는 사람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미 탓에 나도 84분을 버티고야 말았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끝까지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연극을 준비하며 이 사건을 계속해서 생각했을 제작진과 출연진에게서, 우리는 어떤 성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어도 좋았던 것일까?
‘연극됨’에 대해 생각한다. 연극과 관객이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뿐이다. 텅 빈 도화지 같은 관객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연극과 연극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할 일은 얌전히 앉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 관객이 만날 때 말이다.

〈말 잘 듣는 사람들〉
김수정 연출, 극단 신세계 제작.
2017.05.18-05.28. 알과핵 소극장.
5월 20일 관람.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하극상 없는 상황실, 반전 없는 인생 ― 새 세계를 위하여


박종주

1.
등장인물은 셋이다. 대장과 부관과 연락병. 아니, 인물이라고 하기는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뇌의 각 기능을 의인화한 것이니 말이다. 대장은 이성적 판단을, 부관은 기억을, 연락병은 ‘마음부’ 및 ‘신체부’와의 연락을 담당한다. 이들은 무대엔 등장하지 않는 ‘나’의 뇌 속에서 작동하는 기능들이다. 그렇다. 무대는 바로 ‘나’의 뇌 속이다. 이들은 결국 ‘나’들이다. 서로 반목하는, ‘나’들 말이다.
대장은 기억들을 자료 삼아, 그러니까 부관과의 논의를 통해 ‘나’의 할 일을 결정하고 연락병이 이를 마음과 신체에 전달한다. 대장은 요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나’를  취업 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 영단어를 외울 용량이 부족하므로 ― 좋은 기억을 지우고 때로는 ― 지난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은 사치일 뿐이므로 ― 뛰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대장이 잠깐 쉬고 있는 사이, 그러니까 지친 이성의 끈을 잠시 내려 놓은 사이 ‘나’가 자위를 하는 장면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옛 연인을 생각하며 욕망을 해소하는 ‘나’의 모습에 대장은 분노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므로. 대장의 휴식은 이것으로 끝이다. ‘나’를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대장은 이제 바삐 움직이며 명령을 내린다. 우리가 이 연극을 보는 것은 그 명령들이 종종 거부 당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통제에 성공했더라면 ‘나'에게는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은 ‘나’ 하나이므로 이렇다 할 갈등은 없다. 대장과 부관이 이따금 다투지만,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뇌부의 통제를 받는 동안 ‘나’는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때로 손발이 절로 떨리기도 하고 때로 맘이 절로 울적해지기도 한다.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날 때가 있는 것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두뇌부와 마음부 사이에 있다. 두뇌부가 어떻게든 미루고자 하는 갈등이 말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나’가 평면적으로 묘사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작금의 청년들이 모든 내적 갈등을 억압하고 보류하며 ‘평평한 사람’이 되어 생존 투쟁에만 집중해야 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기엔 ‘나’의 삶을 표현하는 키워드들 ― 무급 인턴에서부터 ‘혼밥’까지 ― 도 다소 진부하다. 스토리를 생각하자면, ‘요즘 청년들 삶이 참 팍팍하다더라’ 하는 수준의 무심한 공감 이상을 끌어내기 어렵다.

2.
대신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연극의 요소들이다. 〈브레인 컨트롤〉은 관객들을 무대 곁으로 불러들인다. 흰 선으로 표시된 무대의 삼 면을 스물 몇 개의 의자가 둘러 싼다. 극장에 일찍 온 관객들은 객석 대신 이 의자에 앉아 보다 가까이서 무대를 지켜본다. 배우와의 소통이라든가 하는 참여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가까이서 지켜볼 뿐이다.
의자는 흰 선 바깥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이 있는 곳은 여전히 무대 밖인 셈이다. 관객들은 왜 이리로 불려 온 것일까? ‘나’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마도 관객의 뇌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을, 일들을 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라는 연출의 배려 정도로 생각하자. 어쩌면 정말로 좋은 자리는 그 의자들 뒤에 있는 원래의 객석일지도 모른다. ‘나’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는 스물 몇 명의 ‘나’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자리 말이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는 이따금 관객들을 위한 정보들이 표시된다. 두뇌부의 요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안내가 나오거나 ‘나’가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식이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극”이라는 단어다. 스크린은 연극을 “가상 시뮬레이션”의 동의어로 정의한다.
극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힘든 현실에 지친 ‘나’가 ― 정확히는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난 ‘나’의 마음이 ― 죽음을 향해 달려 갈 때 연락병은 묻는다. “이거 다 연극이죠?” 따라 붙는 대답은 “이건 실제상황이야!”이지만, 우리 관객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연극임을 말이다.
이것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그리고 극의 정조대로 지친 죽음이 피해야 할 결말이라 할 때, 이것은 관객들이 그러한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사고실험일 것이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것인지, ‘나’처럼 살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인지를, 혹은 그렇게 살지 않거나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3.
또한 몇 가지 균열들이, 운이 좋다면, 관객들을 사유의 확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남성이다. 그리고 대장, 부관, 연락병은 아마도 여성이다. (지난 시즌까지는 남성 배우들이 연기했다.)  ‘청년’이 대개 ‘남성청년’과 동치되는 한국사회에서, 이 크로스젠더 캐스팅이 관객들에게 청년층 여성의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70분 남짓의 짧고 급박한 공연에서 충분한 맥락을 갖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대장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하는 ‘어린 여성에 대한 혐오’라는 전략 또한 같이 생각되면 좋겠다.
두뇌부는 쉼없이 마음부를 다잡고 억누르지만, 그리고 그 끝에서 파국에 이르지만, 〈브레인 컨트롤〉은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두뇌부의 대장은, 후손을 낳아 번성하라는 ‘생의 목적’을 알면서도 DNA에 각인된 정보에 의지해 살아남기를 저어한다. 이 두 방향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브레인 컨트롤〉이 모종의 문명을, 그러나 지금의 것과는 다른 어떤 문명을 요구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 상황실에는, 자신의 직분을 벗어나려 드는 인물들이 있다. 대장에게 반말로 반대 의견을 말하는 부관, “외람되지만” 끊임 없이 무언가를 묻는 연락병. 이들은 끝내 대장을 이기지 못해 ‘나’의 파국을 막지 못한다. 마지막에는 대장과 합심해 ‘나’를 살리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인 컨트롤〉이 연극이라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이들의 출연을 통해 무언가를 관객은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반기를 드는 법을 말이다.

4.
나는 돌이다.
더이상 떨지 않는다.
돌은 물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물에서 나는 영원토록 숨을 죽인다.

‘나’는 연극의 처음과 끝에 이런 시를 읊는다. 대장과 부관에 따르면, 인생의 시가 완성될 때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 이 시를 완성한 후 ‘나’는 죽음을 택한다.) 삶이 그 시를 위한 시어를 찾는 과정이라면, 무대 밖 ‘나’들의 삶에는 조금은 다른 시어들이 나올,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를.



〈브레인 컨트롤(Brain Control)〉
정진새 작/연출
극단 문 제작
2017.05.09 ~ 2017.05.14 CKL 스테이지
2017.05.14. 관람

2017년 5월 2일 화요일

세 시간, 나는 왜 그곳에 있었나

박종주

0.
티켓박스에서 표를 찾는데, 매표원이 물어 왔다. “무대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서 보실 수 있는 자리가 있는데, 그리로 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무대가 비어서야 곤란하므로, 네, 하고 답했다. 이쯤에서 나는 약간의 긴장을 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 옆에 앉는다는 것, 그것은 배우들이 말을 걸어오는 일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시작 시각은 여덟 시였다. 그러나 일곱 시 사십 분이 되고 오십 분이 되도록 극장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로비에서, 분장을 한 누군가가, 여기저기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문에 붙어서는 입김으로 이것저것을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리면 문을 두드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극장 입구는 여덟 시가 되어서야 열렸다. 무대 위에 놓인 한 의자로 안내 받았다. 무대에는 디귿 자 모양으로 개인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뚫린 한 변에는 의자만이 놓여 있었고 그 의자에 배우들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무대에는 미음 자로 사람들이 가득 앉았다. 배우들이 앉은 맞은편 변 뒤로는, 또 다른 배우 하나가 벽을 보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연극 〈2017 애국가〉(즉각반응 제작)는 이렇게 시작한다. 마이클 마르마리노스(Michael Marmarinos)의 구상을 토대로 스물한 명의 배우와 스태프가 공동창작한 작품이다. “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이라는 슬로건이 붙은 연극이다.

1.
이런저런 안내방송이 나오고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런웨이 모양의 조명이 들어온다. 배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따라 걷고 그 끝에서 각자의 포즈를 취한다. 그 다음에는 무대 외곽을 따라 돈다. 차례로 일어선 배우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 즈음이면 대사가 시작된다. 한쪽에서 연도를 외친다. 예컨대 1997년,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해다. 혹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해.
시작은 2017년이었던 것 같다. 배우들은 박근혜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주문을 외친다. 해가 바뀔 때마다 굵직한 사건들, 그러니까 성수대교 붕괴라든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같은 것들이 호명된다. 중간중간 인물들 각각의 개인적인 사건들이 함께 이야기된다. 세월호에 대해서는 외치는 대신 입을 막았다 ― 이것이 세월호 사건의 재현불가능성에 관한 것인지 검열에 관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역사는 일어난다, 여기저기서”라고 배우들은 외친다. 그들이 외치는 ‘역사’는 모두 대한민국의 사건들이다. 개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배경으로서 국가는 호명된다. 한참을 외친 후 배우들은 의자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먼저 앉아 있던 관객들의 사이사이다. 빠짐 없이 사람이 앉은, 디귿 자로 배열된 테이블과 의자들은 이제 토론장이 된다.
테이블들 위에는 물컵과 와인잔, 그리고 빈 접시가 놓여 있다. 잠시 후면 와인잔에 와인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또 잠시 후면 접시 위에 빵이며 과일이며가 놓일 것이다. 모두 같은 구성의 테이블들 사이에 하나 눈에 띄는 테이블이 있다. 마이크가 놓인 테이블이다. 이 자리에 앉는 배우는 이 토론장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2.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질문은 이런 식이다. “당신에게 국가國家란 무엇입니까?” 배우들은, 혹은 인물들은, 제각기의 생각을 말한다. “질문하는 것도 하나의 권력이네요”, 대답을 거부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에 대한 대답들이 이어진다. 국가란 삶의 배경, 권력의 장치, 어떤 장벽 ― 모두에게 다른 의미다.
그러고보니 연극 제목에 등장하는 ‘애국가’도 국가國歌다. “당신은 애국가를 적절하게 부를 수 있습니까?” 적절하다는 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또 토론한다. 누군가는 한 소절을 몇 번이고 불러보기도 한다. 국가가 어떤 분위기여야 하는지, 새로운 국가가 필요한 시점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질문들은 여러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토론은 때로 열기를 띠고 때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소재가 변하고 분위기가 변하는 가운데 변함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무대 위의 자리로 안내 받은 관객들이다. 약간의 긴장감과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토론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나는 왜 여기 앉아 있을까, 내게 질문하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3.
십오 분의 인터미션이 끝나면 제 2막이 시작된다. 1막이 진행되는 동안 물컵이며 와인잔이며가 바닥을 드러낸 것, 그리고 테이블 몇 개가 치워진 것을 빼면 무대에는 큰 변화가 없다. 배우들은 테이블 위의 접시들에 먹을 것을 서빙한다. 그 다음에 배우들은 제자리에 앉기도 하고 자리 앞에 눕기도 한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온다. 그는 다른 이들을 차례로 불러내 역할을 맡긴다. 누군가는 1인 시위를 하고 누군가는 구걸을 한다. “공이 굴러가면” 이들은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박근혜의 얼굴이 그려진 공이다. 일곱 살 아이가 도로변에서 갖고 놀던 공이다. “공이 굴러간다.” 사람들이 자신의 배역을 펼칠 틈도 없이 장면이 전환된다.
공이 차도로 굴러가고, 아이는 달리는 차 앞으로 나오려 한다. 예의 그 한 사람은 아이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실은 아직인, 결혼식을 떠올린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다. 전애인에서부터 시부모까지, 사람들은 하객들이 된다.
제 1막이 진지한 토론이었다면 제 2막은 어째선지 가벼운 희극 같은 분위기다. 결혼식 이후에도 제 1막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 각각이 자신에 대해, 자신의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긴 하지만 말이다. 결혼식, 근대식으로 말하자면 최소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의 구성을 알리는 행사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몇 가지 억지스런 유머를 짜내기 위한 도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 듯해 보였다.

4.
〈2017 애국가〉는 국가란 무엇인지, 공동체란 무엇인지, 개인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자폐 노총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어느 노숙인의 하지마비를 웃음을 위해 소비하기도 한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여러가지 대답들을 끊임 없이 내어 놓으며 〈2017 애국가〉는 이 소극장 속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듯 보인다.
제 2막을 이끌던 예의 그 한 사람은 연극의 마무리까지도 맡는다. 건배사다. 이야기하고 이야기했지만 국가가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거창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는 되묻는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한 가지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래서 인물들은 무수한 이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건배에서부터 옆집의 아무개를 위한 건배까지가 이어진다. 각자의 자리에 살아 있는, 죽음을 향해 감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그렇게 함께 하자는 메시지쯤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은 없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있을 뿐이다. 미지수에 상수를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그런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공동체란 것은 말이다. 조사도 술어도 없이 단속적으로 이어진 고유명사들, 그렇게 제시된 완성되지 않은 문장, 그것이 이들이 알아낸 공동체인 모양이다.

5.
다른 배우 한 사람이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연극은 끝을 향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는 외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웃통을 벗고,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는다. “나는 더, 더, 더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연극의 마지막은 연극이라는 장소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거나 혹은 선언인 듯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연극밖에 없어 연극으로 소통하고자 한다는 겸허한 제스쳐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오히려 헛된 자기 도취로 보였다. 세 시간, 나를 무대에 앉혀 놓은 그 시간동안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공동체에 대해 묻고자 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 사람은 다 다른 거야, 술자리에서 흔히 들리는 말 이상을 그들은 하지 못했다. 관객의 위치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했지만 그들은 관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관객에게 말을 거는 법을 몰랐다. (관객들과 함께 춤추는 대목이 한 번 있긴 했지만.)
실패한 실험이길 바란다. 실패한 실험은 다음 번의 실험을 요구한다. 다음 번의 실험이 또한 있기를 바란다. 토론장의 모습을 갖춘 무대를, 토론장의 내용을 갖춘 곳으로 또 한 번 변화시킬 다음이. 무대에 불려 온 관객들이 세 시간 내내 그저 관객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또 한 번 변화시킬 다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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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애국가〉
즉각반응 제작, 마이클 마르마리노스 구상, 공동창작.
2017.4.27.-5.7.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4월 27일 관람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어떤 자기반영을 읽기

박종주

그런 사람들이 있다. 시인에 관한 시를 쓰고, 영화감독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가수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서투른 상상으로 남의 삶을, 자신이 모르는 삶을 지어내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예술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비평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바른 일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하루를 다룬 창작 집단 뒹굴의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가 그런 작업에 속한다.
배경은 어느 반지하 작업실, 여섯 명의 젊은 예술가 ―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사진가, 연극배우, 웹툰 작가, 그래피티 화가, 개념미술 퍼포머, (のう[能]) 배우 ― 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래피티 화가는 물을 담은 스프레이로 벽화를 그리고 있고 퍼포머는 기이한 체위들로 몸을 풀고 있다. 소파에 가로 누운 배우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래피티 화가의 첫 획이 말라 사라질 즈음, 극이 시작된다.
시작은 역시 가난이다. 사진가가 사들고 온 귤, 모두들 오랜만에 먹는 과일이다. 춤이 나올 만큼 기쁜 일이다. 오천 원짜리를 흥정해 삼천 원에 사온 참이다. 주스로는 비타민 공급이 충분치 않더라며, 이들은 신이 나서 귤을 깐다.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그래피티 화가에게 온 문자 한 통. 멋대로 여섯 명 전원의 이름을 적어 넣은 젊은 예술가 지원 사업의 합격 통보다. 잠시 모두들 들뜨지만, 지원금은 고작 이십만 원. 각자에게 필요한 것 중 최소한 ― 물론 그 최소한이란 각자의 예술가적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최소한이다 ― 만을 구비하려 해도 모자란 액수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요새의 트렌드를 좇아 시행된 사업인 융복합 예술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업을 구상할 것, 그리고 이십만 원이라는 제한 내에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예산을 확보할 것. 이 두 가지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극의 전부를 이룬다. 뒹굴의 이 작업 또한 모 기관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므로, 아마도 익숙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십만 원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 작가들의 크고 작은 소망은 쓴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미치를 설치하는 데에 오만 원이 필요하다.[1] 사진가는 시간의 물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순 장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쓰고 싶다.[2] 무위의 퍼포먼스를 하려는,[3] 예술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퍼포머는 자신의 개념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름값’을 필요로 한다. 수작업한 그림을 스캔해 작품을 만들려는 웹툰 작가는 모나미 리미티드 에디션 볼펜 세트를, 자신의 몸만을 쓰는 연극배우는 자신이 먹을 초밥을 필요로 한다. 평소엔 수돗물로 그림을 그리던 그래피티 화가는 이번만큼은 에비앙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리수와 프랑스제 고급 생수는 느낌이 다르니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소재로 삼는 것을 자기반영이라고 칭한다면, 이 자기반영에서는 두 가지의 거울상이 포함된다. 하나는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작가가 처한 사회적 현실이다.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료들을 얻고자 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업의 최소한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욕심이,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금 없이는 작업을 하기 조차 힘든 ― 결국 지원 제도에 종속되어 가는 예술가들의 현실이 비추어진다. 전자가 강조된다면 자아비판이 될 것이고 후자가 강조된다면 사회비판이 될 것이다. 그 둘이 분리가능하다면 말이다.
뒹굴이 무엇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극은 뜬금없는 춤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유머들로 파편화된다. 작가들의 욕망만큼이나, 그들의 구상만큼이나, 극은 파편적이다. 사회비판을 무거운 일이라고 한다면 ― 꼭 사회비판이 무겁고 자아비판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 이 가벼운 블랙코미디는 아마도 자아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없이 표면만의 존중을 내세우는, 끝없이 싸우면서도 균열을 견디지 못하는,[4]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며 좋아하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마 ‘예술계’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아비판인 동시에 사회비판일 것이다. 굳이 작업실을 공유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조합이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예술계의 축소판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극은 자립적인 생태계를 구성하지도,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하지도 못하는 예술계의 실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5] 이렇게 자기비하적인 에피소드들을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다는, 어떤 자만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가들의 태도와 (예술을 대하는) 사회의 현실 모두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비판하고 있지만 초점을 잡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자기반영이라곤 해도 이것이 구체적인 개인들로서의 자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집단으로서의 예술가들을 반영하는 것인지 관객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균열의 끝에 이 작가들은 허위의 결과 보고서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를 한다. 공간을 갖고 있으니 공간을 보는 일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로 한다. 결단을 내린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의 뒤에 서서, 관객들과 함께 무대를 바라본다. 아니,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틀린 말일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무언가 할지도 모를 배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배우들의 부재라는 무대의 상황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이 두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무대는 어두워진다.



[1]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극중에서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는 가로세로 3미터 가량의 독립된 공간과 그곳으로의 입장로 하나미치(はなみち[花道])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미치는 일본의 또 다른 전통극 가부키(かぶき[歌舞伎])의 무대 요소 중 하나로, 객석 사이로 길게 뻗은 통로를 가리킨다. “꽃길”이라는 뜻 그대로, 처음에는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로 나아가 꽃을 받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뒹굴의 얕은 지식이 드러나는 대목인지 하이개그인지는 불분명하다.
[2] 연습에 열 장, 작업에 쉰 장이 필요하다. 쉰 장 중 일부는 관객에게 배포되고 일부는 전시될 것이다.
[3] 다른 성원들은 이를 무이의 퍼포먼스, 무의의 퍼포먼스 등으로 잘못 알아듣는다. 퍼포머의 설명에 따르면 무위의 퍼포먼스란 부재의 현전을 내어 보이는 퍼포먼스이며, 다른 이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리는 일이다. 무위(無爲)에 대해서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참고하라.
[4] “얘들아,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5] 이는 뒹굴의 전작 〈바로 그 얘기〉가 연극계의 관행을 비판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2016년 12월 31일 토요일

실패한 어떤 재현에 관하여: 《탈출 ― 날숨의 시간》

글_박종주

0.
의아했다. 이런 주제로 무슨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뻔한 고통의 나열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연극의 1부는 참신했다. 1부 내내 배우들이 하는 일이라곤 무대를 이리 저리 뛰고 걷고 기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국경을 넘고 중국과 베트남과 태국을 거쳐,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기까지, 배우들은 움직이다가, 숨었다가, 또 움직였다. 무리를 이끄는 이는 이따금 외국어로 협상을 했다. 그 동안 무리는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움직이기만 할 것인가 싶을 때까지,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1.
극장 입구를 통과하자 무대의 뒤가 나왔다. 덧마루를 쌓아 만든 더미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돌 더미 같기도 했고 참호 같기도 했고 끊어진 도로 같기도 했다. 무대를 가로질러 객석을 향했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어슴푸레한 무대 뒤편의 높은 곳에서 수상스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허리를 숙인 채 걷거나 뛰는 배우들, 계단인지 비탈인지를 내려와 무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배우들. 무대가 밝아지고, 누군가 허공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무리는 따라서 허우적허우적,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소리는 뒤늦게 흘러 나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
몇 번인가 총소리가 울렸다. 총소리가 울리면 무리는 몸을 낮추었지만, 결국 누군가는 총에 맞고 말았다. 팔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는, 여러 개의 국경을 넘었다. 끊임 없이 숨고 도망치는 여정이지만, 사람들은 할 일이 많았다. 몰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었다. 짐을 버릴 수도 없었다. 총에 맞은 팔을, 결국 도끼로 잘라내는 순간에, 누군가는 똥을 누었다. 그렇게 살아 남은 이들이, 마지막 국경을 넘었다.
누군가는 만둣집을 차릴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노래를 할 것이라고, 누군가는 춤을 출 것이라고 했다. 꿈을 안고, 국경을 넘었다. 가족을 두고, 고향을 벗어났다. 팔을 잃고, 희망을 구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다. 남한이라는 땅은.

2.
2부가 시작되고, 드디어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뻔한 고통의 나열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까. 작가에게도 연출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얽혔다. 만둣집을 열어 자리를 잡은 부부의 이야기와, 그 만둣집에서 서빙을 하며 쌍꺼풀 수술비를 모으는 이의 이야기와, 밤무대에서 돈을 벌어 북에 남은 가족의 치료비를 대고 학비를 저축하는 자매의 이야기와, 그 중 하나를 좋아하는 택시기사의 이야기와, 북한에서 전사를 했던 총잡이 실력으로 주유기를 잡고 싶었지만 일을 구하지 못한 이의 이야기가 얽혔다. 만둣집 주인 쯤의 삶은 넉넉했던 모양이지만, 다른 삶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하고, 남한 물정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사기를 당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삭감 당하고, 남한에서 달리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장의 폭언을 듣고, 이런 이야기들이 얽혔다. 산만하다는 점만이 참신했을 뿐, 상상했던 그대로의, 우려했던 그대로의 고통의 나열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그들은 말했다. 남한에서 쉬운 일이라곤 숨쉬기 뿐이라고. 뿌연 서울 하늘을 생각하면 숨쉬기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딱 그 정도였다.
“사선을 넘어 우리나라에 새로 터잡은 북한이탈주민. 생존을 위해 넘어왔지만 또 다른 생존과 싸워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라는 공연 소개를 읽었다면, 그리고 티비에서 한 번쯤 탈북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면, 2부는, 산만하다는 점을 빼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3.
나는 중국어도, 베트남어도, 태국어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 있다면, 무리들이 국경들을 넘는 동안 등장했던 중국인과 베트남인과 태국인의 입에서 나온 그들의 언어가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 정도다. 중국인들은 청대의 모자 같은 것을 쓰고 판관 포청천 주제가를 불렀다. 베트남인은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을 반복했고, 태국인은 코꾼 깝 똠얌꿍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탈북 주민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연출은 중국인과 베트남인과 태국인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던가, 얼마나 두려웠던가, 얼마나 급박했던가 ― 무대에서 이루 재현하기 힘든 격렬한 정동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이유로 일부로 삐걱거리고 산만한 서사를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이 연극을 관람한 후에도 당사자의 감정은 여전히 알 수 없도록, 알량한 간접 체험 같은 것은 할 수 없도록,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들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조각난 서사들 사이사이에는 쉽사리 하나로 이어지는 뻔한 고통의 서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맥락 없는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었을 리는 없다는 점이다.

4.
뻔하게도, 재앙은 여성들에게 돌아간다. 만둣집을 운영하는 부부, 남편은 함께 사선을 넘은 동료들을 믿고 돈을 척척 빌려주는 호인이다. 종업원으로 일하는 이들의 임금을 올려주마는 약속도 한다. 가계를 걱정하는 것은 부인의 일이다. 악역을 자처하며, 삶을 견디는 것이 그의 업이다. 팔을 잃은 남편을 위해 성매매를 하던 이는 임신을 하고 만다. 사기를 당하는 것은 꿈을 품었던 자매 중의 한 명이다. 이 사기는, 자신의 자매를 배신하는 일과 동시에 벌어진다. 뻔하게도, 그들은 밤무대 가수 일을 잃고서 ‘2차’를 하는 가게로 넘어간다. 가장 비참할 수 있도록, 옷을 갈아 입는 것은 텅 빈 무대 위에서다. 이들은 표현할 틈조차 없었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자매 중 한 명을 사랑했던 택시 기사다.
극이 끝나갈 무렵, 자매는 서로에게 묻는다. 괜찮으냐고. 자매는 서로에게 답한다. 괜찮다고. 택시 기사는 마음에 없던 다른 이와 결혼한 후다. 그가 맡는 일은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걱정하는 정도다. 괜찮은, 괜찮아야만 하는, 그래야 슬픈 자매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관객들의 감정을, 뻔하게나마, 움직이는 일은 그들에게 맡겨진다. 풍금을 치던 이는 손을 떨게 된다. 포주는 새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말한다. 무대는 텅 비고 만다.
이 삶들이 바닥에 가까운 곳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 또한 고르지는 않다. 팔을 잃은 전사가 의수를 얻는 동안, 전사의 친구가 그 의수를 선물할 만큼의 돈을 버는 동안,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기로 잃었던 돈을 메우는 정도다. 그 돈으로 데려 오고 싶었던 아비는 이미 죽은 뒤다. 쌍꺼풀 수술만 하면 정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믿었던 이는,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택시 기사의 아내가 되었다.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키우는 일이 누구의 몫이 될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5.
의아했다. 어디가 파격적이고 어디가 실험적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려웠다. 1부는 연극에 서사를 가진 재현적 연극에 익숙한 내겐 참신했지만, 어떤 이들에겐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지난한 탈주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 지난함이 와 닿은 것은 아니었다. 재현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면 받아 칠 말은 따로 없지만, 재현불가능성을 잘 지시하고 있지조차 않았다. 적어도 하나의 실험인 1부와, 단순하고 뻔한 고통의 나열인 2부가, 어떻게 하나로 묶여있는지,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들만 보고서는, 알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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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날숨의 시간〉
박찬규 작, 고선웅 연출
2016.12.09. ~ 12.25. 국립극장 KB청소년극장
2016.12.18. 15시 공연 관람.


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어느 재판의 기록: 뒹굴, 《바로 그 얘기》

글_박종주

1621번째 재판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 뒹굴’의 〈바로 그 얘기〉는 지구 멸망 후 새 행성에 터를 잡은 ‘신인류’들의 재판을 다룬다. 이들은 이를 테면 ‘구인류’가 지구 멸망을 막을 수는 있지 않았을지를, 그 개개인들이 무언가 할 수 있지는 않았을지를 고민한다. 오늘의 피고는 바로 창작에 몰두했던 ― 그러나 지구 멸망의 전조가 된 사건을 주제로 삼았던 ― 한 예술가, 그것도 공연예술가이다. 그리 급한 재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재판은 상아탑 속에서 현실을 방관했던 대학원생 신 모씨의 재판에 이어, 1621번째로 열리는 재판이다.

지구의 위기를 마주한 시점, 작가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작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바로 그 얘기〉는 묻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의재판’임을 유의해야 한다. 피고 ― 어쩌면 예술가답게,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바로 그 예술가 ― 와 판사, 검사는 역할을 바꾸어 가며 서로를 비난하고 또 옹호한다. 연극적으로 진행되는 재판,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 또한 연극의 일부일 뿐이다. 판결을 판결답게 만들고자 한다면, 연극을 현실과 뒤섞어야 하리라.

뒤섞기 위해, 〈그때 그 얘기〉는 아우구스투 보아우(Augusto Boal)가 제한한 ‘포럼 연극’의 형식을 취한다. 관객들은 배심원이 된다. 각자는 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한편 ‘평결 양식’이라는 제목의 설문지를 작성하고 유죄 혹은 무죄에 투표한다. 지금 현실 어딘가에서 또한 위기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면, 배심원들을 설득하려 애쓰는 피고(들)과 검사(들)은 객석을 떠난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가를, 적어도 공연예술가를 심판할 수 있을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피고, 밍기적


피고는 밍 씨 성을 가진 ― 듣기에 따라 민 씨로도 들리는 ― 기적이라는 이름의 인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으키는 작은 기적”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 자리가 작업실인지 극장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검사에 따르면 그는 지구를 멸망으로 이끈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는 시점,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겨우 멸망 직전에야, 이 주에 걸쳐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올렸을 뿐이다.

그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비추는 횃불이자 희망”이며, 그런 예술을 다루는 예술가가 작업실에 틀어박힌 것은 현실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예술가의 역할, 예술가의 임무, 예술가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침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창작”한 작품으로 그는 두 주 동안 사백 명의 관객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관객들이 눈물 흘리게 했다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검사는 묻는다. 눈물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새로운 관점을 열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를. 예술가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공연 예술의 특성상 그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고 둘러 댈 뿐이다. “잘 봤다”, “이런 시기에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루어 주어 고맙다”는 말들을 들었다고 답해 보지만 검사는 믿지 않는다. 인사치레일 뿐은 아니냐고 되묻는다. 연극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이 예술가는 법정에서 갈수록 작아진다. 예술이 어떤 가상인 한, 그러니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도 직접 행동은 아닌 한, 검사가 요구하는 현실적인 효과를 증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극이라는 닫힌 세계


예술가가 겨우 생각해 내는 항변 하나는 자신의 작업이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마뜩찮은 대답인 모양이다. 기록 자체라면 영상이나 사진이 더 잘 해낸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일이라면 대규모 관객을 대하는 영화가 더 용이해 보인다. 정말로 어떤 효과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연극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윤동주의 시집처럼 다시 읽히지 못한다. 영상을 통해 남긴다고는 해도 이는 더 이상 연극이 아니다. 연극이란 그저 찰나의 가상일뿐이다.

그 가상이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관객을 그 세계에 들임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을 ‘연습’할 수 있게 한다면, 아무리 찰나의 가상이라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공연이 끝나면 관객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작가가 관객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 연극의 특성상 그런 효과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확인할 수 없는 이 희망이, 연극을 부여잡을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이다. 연극은 정말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말이다. 피고의 말대로 작가는 등장인물의 세세한 습관 하나하나까지도 창조해 낸다. 한 인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독립적인 어떤 세계인가, 단순히 이 세계의 보잘것없는 한 구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아닌가를 여전히 물을 수 있다. 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고 할 때조차, 그것이 망각되지 않는,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그저 그것을 소비하는, 현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관객들


12월 11일 오후 두 시, 인천의 한 공가(空家)에 모인 배심원들은 호의적이었다. 재생산이 용이한 영화를 연극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복되어 피로감을 주는 뉴스와 달리 공연을 통해 와 닿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 배심원은 주장한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 또 다른 배심원 또한 호의적이다. 개인이 가지는 파급력 자체에 이미 한계가 있기에, ‘의도’를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너무 큰 파장을, 한 예술가에게 직접 세계의 파국을 막기를 바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그는 말한다. 스스로를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세 번째 배심원은 더더욱 적극적이다. 예술가가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예술가가 누구보다도 더 그 사건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예술가의 존재, 그의 작업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고 그는 평한다.

첫 번째 배심원은 덧붙였다. 파급력이 작지조차 않은 것이라고. 마음을 움직이는 연극을 사람은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주변인을 동반해 몇 번이고 보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연극을 보고서 움직인 마음이 겨우 다시 극장을 찾는 데에 쓰일 뿐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지를 묻는 이는 없었다. 극장 밖에서 관객이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배심원들은 아무래도, 닫힌 세계로서의 연극을 그 자체로 지지하고 있는 듯했다. 피고는 맞장구치며 반기지 않았다. 검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관객들 ― 네 명이었다 ― 은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고,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재판정에 따르면 온라인 투표가 또한 이어질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과 온라인 투표 결과를 합산해 최종적인 평이 내려진다. 1622번째 재판에서, 그 결과는 발표될 것이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나고, 이제 다시 물을 차례가 왔다. 연극에 대한 재판이라는 이 연극이 하나의 세계로서 무엇을 창조해 냈는지, 관객들에게 무엇을 제시해 냈는지를 말이다. “시간 예술”인 연극의 특성상, 이 연극 또한 정해진 시간에 끝나야 했고, 그래서(인지) 배심원들과 검사는 추가적인 토론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예술가의 편이라는 것 이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다음번의 재판은 어쩌면, 이 ‘뒹굴’이라는 집단을 피고로 삼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연극계라는 닫힌 세계


이 날 채택되지 않은 증거, 토의되지 않은 주제가 한 가지 있다. 피고는 자신의 공연이 세계에 미친 영향의 증거로 두 편의 평론을 제시한다. 검사는 그것이 피고의 지인들이 쓴 것임을 지적한다. 피고는 좁고 좁은 연극계의 특성상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검사는 그렇다면 그것이 연극계의 구조적인 문제는 아니냐고 문제 삼는다. 판사는 연극계의 구조에 대해 논하려면 별도의 재판을 청구하라고 지시한다.

어쩌면 판사가 다른 재판으로 미루었으므로, 검사도 배심원도 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배심원들에게 주어진 숙제가 하나 있다면, 어쩌면 1622번째 재판의 주제가 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일 것이다. 객석의 반나마를 채우는 지인 관객들, 동문수학한 평론가들, 이렇게 서로 아는 사이에 주고받는 호평들 속에서 어떻게 한 공연의 핵심을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텅 빈 호평들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재생산되는 연극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나 또한 피고를 옹호했던 한 명의 배심원으로서 여기에 덧붙여 본다.

거리시위에서 행인을 설득하는 일과 극장에서 관객을 설득하는 일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점에서 거리시위에 나가지 않은 예술가는 무죄다. 그러나 그가 눈물 이상의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정말로 설득을 시도한 것인가 하는, 지금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남는다. 그가 어딘가로 숨어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작업실이라는 골방이 아니라 연극계라는 골방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유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하 공연장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과 자신을 가르고 있던 벽을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세계의 비극을, 한낱 소재로 전락시켜도 아무 비난 않을 사람들 앞에서만, 자신의 공연을 선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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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연극 <바로 그 얘기>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 ‘뒹굴’ (성지수, 김정은, 심하경, 진영화, 최희범)
인천문화재단, 바로 그 지원 주최 “바로 그 시장” 참가작
2016.12.11. 오후3시
인천 중구 신포로 15번길 22-1 임대 중인 건물 2층 한켠에서

2016년 8월 10일 수요일

그래, 어떤, 평화

박종주

일상의 풍경風景들

불이 켜지면, 연극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시작한다. 평범한 작은 사무실. 네 명의 직원이 등장한다. 대리가 두 명, 과장이 한 명, 그리고 인턴이 한 명.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맡은 일을 한다. 대리들은 업무를 진행하고 과장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인턴은 커피를 탄다.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들을 하고 있으므로,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래 명세서에 숫자를 잘못 써 넣거나 커피를 탈 때 물 양을 맞추지 못하는 실수조차 없다. 짜증을 내는 사람조차 없이 즐겁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퇴근을 하고 누군가는 야근을 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시 출근할 것이다. 숫자를 틀리거나 물을 쏟지 않는다면, 내일 하루도 즐거울 것이다.

일상에 풍경風磬 달기

도시 사람들은 바람에 둔하다. 뱃사람들은, 그리고 농부들은 바람에 예민하다. 도시 사람에게 바람은 잠깐의 시원함 혹은 추위일 뿐이지만, 뱃사람들에게 바람은 배를 뒤집는 힘이고 농부들에게 바람은 작물을 쓰러뜨리는 힘이다. 창문을 열어두고 나온 날, 혹은 베란다에서나마 여린 풀잎이 자라는 어느 날, 그런데 강한 바람이 부는 날, 그제야 도시 사람은 바람에 예민해진다. 바람이 자신의 일상을 흔들기 시작하므로.
장면이 바뀌면 네 명의 배우들은 아이들이 되고 사무실은 놀이터가, 집기들은 장난감이 된다. 시장놀이부터 병원놀이까지, 또 한 번 평범한 풍경들이 이어진다. 평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 어떤 삶에서는 이 또한 평범하지만 ― 아이들이 뱉는 모든 문장 뒤에 욕설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바람에 예민해지는 방법이 하나 있다. 풍경風磬을 다는 것이다. 창문가의 무언가가 쓰러지지 않아도, 베란다의 꽃잎이 떨어지지 않아도, 바람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풍경風景에 누가 풍경風磬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종이 울린다. 어떤 욕들 뒤에는 종소리가 따라 붙는다. 여성혐오적인 욕설들에 말이다.
하지만 종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종소리에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자연히 그는 놀이에 섞여 들지 못하고, 아이들 사이에는 분란이 인다. 평범한 일상을 위해 사건은 봉합되어야 한다. 싸움을 벌이는 두 아이 사이에서 나머지 두 아이는 노래를 부르고 화해를 주선한다. 누가 왜 화났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색한 미소, 엉거주춤한 악수라도 좋다. 화해는 화해이므로.
다시 사무실, 일상은 반복된다. 다행히 종은 아직 매달려 있다. 여전히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그러나 그때마다 종이 울린다. 사람들은 조금씩 날카로워 진다. 한 번 알게 된 것을 다시 모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눈에 띈 얼룩이 계속 보이고 한 번 눈치 챈 생채기가 계속 아려 오듯 말이다. 다시 사무실, 일상은 변할 것이다. 머리를 울리는 종소리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해.

누가 병신을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런 극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극의 주제인 여성혐오, 혹은 이른바 남성혐오와 관련된 발화들은 종을 울렸지만 “병신”이라는 말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종은 내 머리 속에서만 울리고 있었고, 나는 머리가 아팠다.
또 하나 신경이 쓰인 것은 ‘아이들’이 재현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동물 모양 모자를 쓰고 나왔다. 배우들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사무실 직원들을 연기할 때와는 다른 발성을 했다. 리플렛에는 “어린이, 상스러운 욕설, 밝고 맑은 종소리 등의 장치를 소재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 하나 가능한 추측이 있다면 욕설과 혐오를 아이들의 순수성과 대비시키는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동물 모자를 씌우는 것이 ― 그리고 나의 추측이 맞다면 또한 아이들의 속성을 순수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긴 머리 가발을 씌우고 치마를 입히는 것과 무엇이 다를지 알 수 없었다.
여성혐오를 다루는 극에 어린이나 장애인의 재현에 관한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 여성, 장애 여성을 생각하면 여성혐오를 생각하면서도 이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어떤평화>
연출 성지수
조연출 심하경
드라마터그 백수향, 이준영
출연 김정은, 조민광, 진영화, 최희범
2016년 7월 7-9일, 연세대학교 푸른샘,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