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1일 수요일

어떤 자기반영을 읽기

박종주

그런 사람들이 있다. 시인에 관한 시를 쓰고, 영화감독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가수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서투른 상상으로 남의 삶을, 자신이 모르는 삶을 지어내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예술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비평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바른 일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하루를 다룬 창작 집단 뒹굴의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가 그런 작업에 속한다.
배경은 어느 반지하 작업실, 여섯 명의 젊은 예술가 ―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사진가, 연극배우, 웹툰 작가, 그래피티 화가, 개념미술 퍼포머, (のう[能]) 배우 ― 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래피티 화가는 물을 담은 스프레이로 벽화를 그리고 있고 퍼포머는 기이한 체위들로 몸을 풀고 있다. 소파에 가로 누운 배우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래피티 화가의 첫 획이 말라 사라질 즈음, 극이 시작된다.
시작은 역시 가난이다. 사진가가 사들고 온 귤, 모두들 오랜만에 먹는 과일이다. 춤이 나올 만큼 기쁜 일이다. 오천 원짜리를 흥정해 삼천 원에 사온 참이다. 주스로는 비타민 공급이 충분치 않더라며, 이들은 신이 나서 귤을 깐다.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그래피티 화가에게 온 문자 한 통. 멋대로 여섯 명 전원의 이름을 적어 넣은 젊은 예술가 지원 사업의 합격 통보다. 잠시 모두들 들뜨지만, 지원금은 고작 이십만 원. 각자에게 필요한 것 중 최소한 ― 물론 그 최소한이란 각자의 예술가적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최소한이다 ― 만을 구비하려 해도 모자란 액수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요새의 트렌드를 좇아 시행된 사업인 융복합 예술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업을 구상할 것, 그리고 이십만 원이라는 제한 내에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예산을 확보할 것. 이 두 가지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극의 전부를 이룬다. 뒹굴의 이 작업 또한 모 기관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므로, 아마도 익숙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십만 원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 작가들의 크고 작은 소망은 쓴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미치를 설치하는 데에 오만 원이 필요하다.[1] 사진가는 시간의 물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순 장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쓰고 싶다.[2] 무위의 퍼포먼스를 하려는,[3] 예술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퍼포머는 자신의 개념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름값’을 필요로 한다. 수작업한 그림을 스캔해 작품을 만들려는 웹툰 작가는 모나미 리미티드 에디션 볼펜 세트를, 자신의 몸만을 쓰는 연극배우는 자신이 먹을 초밥을 필요로 한다. 평소엔 수돗물로 그림을 그리던 그래피티 화가는 이번만큼은 에비앙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리수와 프랑스제 고급 생수는 느낌이 다르니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소재로 삼는 것을 자기반영이라고 칭한다면, 이 자기반영에서는 두 가지의 거울상이 포함된다. 하나는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작가가 처한 사회적 현실이다.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료들을 얻고자 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업의 최소한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욕심이,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금 없이는 작업을 하기 조차 힘든 ― 결국 지원 제도에 종속되어 가는 예술가들의 현실이 비추어진다. 전자가 강조된다면 자아비판이 될 것이고 후자가 강조된다면 사회비판이 될 것이다. 그 둘이 분리가능하다면 말이다.
뒹굴이 무엇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극은 뜬금없는 춤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유머들로 파편화된다. 작가들의 욕망만큼이나, 그들의 구상만큼이나, 극은 파편적이다. 사회비판을 무거운 일이라고 한다면 ― 꼭 사회비판이 무겁고 자아비판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 이 가벼운 블랙코미디는 아마도 자아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없이 표면만의 존중을 내세우는, 끝없이 싸우면서도 균열을 견디지 못하는,[4]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며 좋아하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마 ‘예술계’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아비판인 동시에 사회비판일 것이다. 굳이 작업실을 공유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조합이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예술계의 축소판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극은 자립적인 생태계를 구성하지도,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하지도 못하는 예술계의 실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5] 이렇게 자기비하적인 에피소드들을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다는, 어떤 자만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가들의 태도와 (예술을 대하는) 사회의 현실 모두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비판하고 있지만 초점을 잡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자기반영이라곤 해도 이것이 구체적인 개인들로서의 자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집단으로서의 예술가들을 반영하는 것인지 관객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균열의 끝에 이 작가들은 허위의 결과 보고서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를 한다. 공간을 갖고 있으니 공간을 보는 일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로 한다. 결단을 내린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의 뒤에 서서, 관객들과 함께 무대를 바라본다. 아니,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틀린 말일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무언가 할지도 모를 배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배우들의 부재라는 무대의 상황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이 두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무대는 어두워진다.



[1]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극중에서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는 가로세로 3미터 가량의 독립된 공간과 그곳으로의 입장로 하나미치(はなみち[花道])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미치는 일본의 또 다른 전통극 가부키(かぶき[歌舞伎])의 무대 요소 중 하나로, 객석 사이로 길게 뻗은 통로를 가리킨다. “꽃길”이라는 뜻 그대로, 처음에는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로 나아가 꽃을 받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뒹굴의 얕은 지식이 드러나는 대목인지 하이개그인지는 불분명하다.
[2] 연습에 열 장, 작업에 쉰 장이 필요하다. 쉰 장 중 일부는 관객에게 배포되고 일부는 전시될 것이다.
[3] 다른 성원들은 이를 무이의 퍼포먼스, 무의의 퍼포먼스 등으로 잘못 알아듣는다. 퍼포머의 설명에 따르면 무위의 퍼포먼스란 부재의 현전을 내어 보이는 퍼포먼스이며, 다른 이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리는 일이다. 무위(無爲)에 대해서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참고하라.
[4] “얘들아,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5] 이는 뒹굴의 전작 〈바로 그 얘기〉가 연극계의 관행을 비판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2017년 1월 1일 일요일

취지와 치료를 넘어: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을 작품으로 보기


성지수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 논하기의 어려움


(1) “세월호 참사를 겪은 단원고 피해(희생, 생존) 학생 엄마들이 세상과 소통의 폭을 넓히고자 극단을 만들어...”
(2) “웃음을 잃었던 엄마들 파안대소...”

위의 두 인용문은 극단 노란리본1)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소개하는 기사들의 표제와 부제다.2) 프로그램 북에도 배우들이 “세월호 가족들”이란 사실이 표지에 명시되어 있으며, 공연 시작 전 무대에 오른 연출은 모든 배우가 ‘연극을 처음 해보는 세월호 엄마들’임을 밝힌다. 공연이 끝나면 “끝까지 밝혀줄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온 배우들이 한 명 한 명 “0반 00엄마”로 자신을 직접 소개한다. 그러니까, 외부의 시선으로 보나 내부의 시선으로 보나 이 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면서 가장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세월호 엄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다’는 것에 있다. 희곡 <그와 그녀의 옷장>은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참사 전에 창작된 작품이지만,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은 반박할 여지없이 ‘세월호 연극’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직접 당사자들인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을 본 후 그 기획 취지나 당사자들에게 미친 긍정적 심리치료 효과 이외의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물론 세월호 사건이 아직 종료(철저한 진상규명부터 책임자 처벌, 적절한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까지)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이 연극을 ‘날카로운 관객의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이념 선전도구나 치료 프로그램 정도에 머무르지 않게 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서, 이 연극을 다른 공연예술과 동등하게 비평하는 것을, 하나의 개별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는 것을 시도하려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연극 작품으로서 극단 노란리본의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 주목할 지점을 정리하였다.


1. 어색함을 스타일화하기


배우들의 연기는 아주 잘 한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어색한 연기가 부족함이 아닌 예술적 선택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은 참고 보아줘야 하는 것이 아닌 즐길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우선 읽기만 해도 재미있는 대본이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에 큰 힘이 되었다.3) 웃음을 주기 위한 대사와 설정이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처음에는 웃지 않았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에는 어이없어서라도 받아들이고 웃게 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호남의 부탁에 순심은 관객 ‘정수기’에게 다가가 물을 뜬다. 이 관객은 극이 끝날 때까지 호남이 출퇴근하면서 수차례 말을 거는 ‘정숙이’로, 집회 현장에 나온 ‘정숙이 위원장’으로 불려 웃음을 자아낸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 방향이 관객을 향하고 사투리 등 특정 억양을 과장하여 살리는 양식적인 연기를 선택한 것도 좋은 지점이었다. 소위 말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하였다면 더 크게 느껴졌을 연기 경험의 부족(대사 전달 실패나 ‘발이 바닥에 붙지 않는 것,’ 즉 부산스러운 몸놀림)이 많은 부분 노출되지 않았다. 배우들은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사 전달을 정확히 했다. 처음 해 보는 분들 치고 잘했다, 보다 더 좋은 찬사를 들을 실력이었고, 이는 적절한 대본과 알맞은 연극적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취지와 표현 양식의 연관성


이 작품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은 배우들의 도전 취지이자 연출의도인 “세월호 엄마들이 배우가 되어 관객 앞에 선다”일 것이다.4) 이것이 실제 연극과 동떨어진 취지가 되었다면 연극은 그 의도와 달리 교조적이고 불편한 자리가 되었을 것이며, 관객은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은 양식화된 연기,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장면, 관객의 직접 호응을 유도하는 장면, 메타극적 대사 등 연극적 표현 양식을 통해 이를 작품 속에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배우들은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배우들이 상대 배우를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에 빠져 익살스러운 장면에 웃을 때는 크게 인식하지 못하다가 배우들이 시종일관 관객들을 마주하고 섰던 것을 상기하면 그들이 ‘세월호 엄마’이며, 정치적 주체로서도 사회가 강요하는 희생자 정체성에 스스로를 묶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주도해 나아왔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남성 배역임에도 여성임을 숨기지 않았던 점, 옷이 중요한 연극에서 팔찌, 손수건, 배지 등으로 세월호 표식을 한 것은 이 상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박수와 함성처럼 관객들의 직접적인 호응을 유도하거나, ‘정수기-정숙이’를 관객으로 설정하여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희곡의 메타극적 대사들도 “관객 앞에 선 세월호 엄마들”을 잘 구현한 장치가 되었다. 순애에게 사랑에 빠져 매일같이 집회에 참석하는 수일을 보여준 후 “5분 만에 노동자 의식이 성장했구나! 이 연극은 뭐 이리 진도가 빨라!” 한다던가, 5번 이상 반복/변주되는 상황이 마무리될 때 “잠깐,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하는 대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주의 연극처럼 관객들에게 극중 상황에 몰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들이 ‘연극’임을 환기하는 효과를 가진다.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는 이것이 모든 연기자가 ‘세월호 엄마들’이라는 사실과 만나면서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배우로서 그 대사를 발화한 세월호 엄마들’의 실존이 부각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3. 시선의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


연극은 불균형한 바라보기가 극대화된 형태의 예술형식이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배우를 훔쳐본다. 관객에게 허용된 극장의 언어는 박수와 환호, 웃음뿐이다. 배우들이 ‘세월호 엄마들’일 때 이 불균형은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낳는다. 세월호 가족들의 다양한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볼 때면 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문구로 약속했던 것을 과연 내가 잘 지키고 있는가,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천일이 가까워지도록 자신의 아픔을 입증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과 재난은 비극적인 일인 동시에 관음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죄책감, 그 어쩔 수 없는 감정이 해소되는 시선의 역전 순간이 있었다. 세 개의 옴니버스 극이 모두 마무리되고 피켓을 든 배우들이 무대 위로 나와 인사를 한 후, 연출까지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였다. 관객에게 함께 부르자고 청하는 노래는 민중가수 윤민석이 작사, 작곡한 <약속해>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띄워주는데, 그 처음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쉽게 부를 수는 없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잊지 않겠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참사를 당한 아이들의 가족이라는 선언(가족이 되겠다, 가 아니라)은 가사를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들었다.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은 순간, 이는 불편함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곧 자발적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준 배우들이 불 켜진 객석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 동안 관객을 즐겁게 해 준 배우들에게 박수나 환호성 이상의 것으로 보답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 그리고 성공적으로 좋은 공연을 보여준 배우들이 커튼콜 후 “0반 00엄마 000”로서 인사를 하고 소감을 밝힘으로서 ‘세월호 엄마들’로 사람들 앞에 선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작은 다짐을 담아 노래한다. ‘세월호 엄마들’이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는 이 바라봄이 역전되는 순간은 또한 연극을 ‘보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시선 불균형의 죄책감까지 덜어주었다.


취지와 치료 너머를 바라보자, 취지와 치료의 성공이 보이다


글의 처음을 열었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1)은 이 연극이 ‘예술의 사회적 소통 기능’에 주안점을 두었음을 보여준다. “집회, 간담회, 단식, 삭발까지 해 봤지만, 한계를 느껴 더 자연스럽고 쉽게 국민에게 다가가 소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창작한 연극이라는 이어진 소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시민들이 재미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에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연극의 주된 취지이다.

이어서 (2)는 (‘배우’가 느낄 수 있는) 연극의 심리치유 효과가 이 연극에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스브스 카드뉴스5)
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연극에도 도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극에 나오는 여러 감정을 표현하면서 내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연출가는 프로그램 북에서 연출의 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피해 가족들이 억눌리고 외면당해왔던 수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상대 배우와, 관객과 나누는 과정에서 예술의 치료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의 큰 의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극단 노란리본의 <그와 그녀의 옷장>의 기획의도이자 가장 큰 의의 앞에서, 세월호 사건의 직접 피해자가 아닌 시민(더 솔직해지자면, 참사 규명을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못했던 나약한 소시민)인 관객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이 연극을 보면서 눈물 끝에 웃음을 보여주시는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용기를 내 준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연극을 본 후에 ‘세월호 엄마들’만이 아니라 공연 전반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가질 수 있을까.

첫 번째 의문점은 관람자가 상연자를 희생자 정체성으로만 규정해버릴 위험에 대한 염려를 담는다. 상연 전 연출가가 직접 관객들에게 곧 무대에 오를 분들 모두가 연극을 처음 해 보시는 분들이다, 작품 연습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코미디 연극이니 많은 웃음을 부탁한다 등(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 주세요.’)의 멘트를 했을 때 이 염려는 증폭된다. 분명 그 분들의 용기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이 그 용기로 들고 나온 것이 연극 작품이라면 이를 관람한 관객이 그들을 배우로 보아야 하고, 용기뿐 아니라 연극 자체에 대해 논해야 한다. 무대에 오를 사람들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 혹은 기특한 마음만을 가지는 관객은 실제 작품의 가치와 상관없이 무대를 학예회로 전락시킨다. 때문에 그들의 용기에만 집중하고 용기만을 평가하는 것은 그 평가가 아무리 긍정적일지라도 명백한 폭력이다. 배우로 선 사람들을 배우로 이야기해야 하지, 불쌍하고 기특한 사람들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의문은 창작자에 대한 선입견에 갇혀 창작물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정의신의 작품을 보며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은 그의 개인적인 아픔만을 느끼고 돌아간다면 이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을 평가 절하하는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애써 차려준 밥상 앞에서도 그 맛과 행복감은 표현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린 이의 정성만을 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정성을 폄하하는 일이 된다. 또한 극장을 넘어서는 특정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연극작품들이 놓치고 있는 것, 즉 취지만 좋다고 좋은 연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미학적 의의가 있어야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원래의 취지 달성도 실패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창작자의 희생자 정체성만을 내세운 엉성한 작품을 통해 교조적으로 관객을 가르치려고 들거나 슬픔, 분노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과 연극의 의도 양쪽을 고립시키는 일이라는 것 역시 지적하고 싶다.

때문에 연극의 사회적 소통 기능이나 심리 치유 효과는 연극의 미적 가치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즉 비-세월호 가족 관객(‘일반’ 관객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 ‘세월호 엄마’를 한 명의 배우로, 이 연극을 개별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을 때, 좀 더 편안하게 소통하고자 했던 시도도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다. 윤리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창작자-수용자 간 관계의 문제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모인 사람들(창작자와 수용자, 직접 피해자와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새로운 담론의 장을 형성하여 사회에 파급효과를 내고자 하는 연극들의 성패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무시되는 문제이기에 주요하게 다뤄야 한다.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은 작품의 의도가 형식으로 잘 녹아들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배우로 선 ‘세월호 엄마들’과 관객으로 찾아 온 사람들이 마주보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낌으로써 평등한 관계가 구축될 수 있고, 때문에 진정한 심리치료가 가능한 장이기도 하다. 공연을 본 후 연극의 부족함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취지나 노력만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연극 작품을 본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떤 사명감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관객들도 마주보고 함께 다짐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2017년 새해에 성미산 마을극장을 시작으로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이 작품이, 배우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수일에게 예쁜 목도리 선물을 받은 순애는 밤에 혼자 찾아 온 용역 깡패에게 밀쳐지고 물도 맞는다. 강한 여자와 심약한 남성의 연애 스토리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따르는 셈인데, (장르를 불사하고 여성은 이전에 강인한 캐릭터가 본격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이 되면 갑자기 다른 남성에게 억울하게 봉변을 당하며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야기가 끝나가는 지점에 뜬금없이 등장해서 조금 황당하게 느껴진다. ‘여성성’의 부각, 맞서 싸우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줘야 할 필요성, 혹은 그저 둘이 한층 가까워질 계기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불필요한 전개다. 극단 노란리본이 현재로서는 세월호 ‘엄마’들의 극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굳이 극의 말미에 와서 그녀들이 ‘관객 앞에 배우로 당당히 선 여성들’이라는 점을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작 오세혁 연출 김태현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
2016년 12월 29일 19시 관람, 서울혁신센터 다목적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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