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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3일 일요일

불안한 춤

임승태

인간이 사라진 무대에 로봇이 서 있다. 그리고 움직인다. (하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 말이 좀 어색하지만 작가가 그것을 '춤'이라고 부른 것은 정당한 것 같다. 춤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춤추는 풍선 인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형상을 하지 않은 로봇의 움직임을 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쉽지 않지만 받아들여 보겠다.  

나는 고든 크레이그가 이 광경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래, 21세기에는 내가 꿈꿨던 위버마리오네트가 마침내 인간 배우를 대체하는구나, 라며 무릎을 탁 쳤을까. 아니면 이마를 치면서, 아, 로봇도 인간 배우 만큼이나 통제가 안 되는구나, 라며 탄식했을까. 

관객과의 대화(관대) 시간에 작가의 말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로봇이 인간 배우를 대체하더라도 완전한 제어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로봇은 인간 배우와 달리 제어가 되지 않더라도 연출가가 로봇을 향해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거기서 질문이 생긴다. 제어되지 않는 로봇의 의외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인간 배우의 의외성 역시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술관 '전시'에 더 적합한 퍼포먼스라고 느꼈다. 관람객이 자신이 보고 싶은 시간 만큼만 보고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연 시간 포함) 한 시간 가까이 객석에서 꼼짝 않고 봐야 할 공연이었는지, 끝까지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는 불멍, 물멍하듯이 나는 로봇의 회전 운동을 마치 해파리의 춤을 보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고, 로봇을 움직이는 데 사용했을 법한 프로그래밍 언어, 혹은 수식이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것을 단 한 줄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음악은 공연장에서 듣기에 괜찮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바, 그 음악은 공연 중 연출가가 직접 라이브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비인간을 내세운 공연에서 인간의 직접적 개입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가장 좋았다니, 내가 너무 낡은 '공연성'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관대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얘기가 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공연 도중 있었던 오작동, 걸려 넘어짐 등의 오류에 대한 해명이었다. 공연장에 불러 놓고 할 얘기인가 싶었다. 중간시연회도 아니고 그것도 무려 SPAF에서 말이다. 나중에 다시 보니 이 공연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아트랩코리아의 중장기 협력 프로젝트인 <예술 X 기술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는 사전 고지도 있었다. 그러니 미리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내 탓이지 미완의 공연을 나무랄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 공연도 언제나 수정과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로봇이 하든 인간이 하든 공연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아직 인간이 무대에 있는 공연을 더 보고 싶다. 무서운 속도로 무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에서 '공연예술제' 만큼은 대세를 거슬렀으면 좋겠다. 





2023년 1월 7일 토요일

빛: 육체를 과묵히 관통하는 처음과 나중

조혜인


에릭 아르날 부르취(Eric Arnal-Burtschy)는 빛이 수행자로서 무한함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빛 퍼포먼스: 심연의 숲>을 고안하였다. 그리하여, 무한으로부터 상기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관객은 자기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입구 바닥 정사각형들이 분할된 형태로 구역을 이루고 있는 곳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는 마치 무덤 혹은 납골당을 환기하며 신발이 벗겨진 상태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즉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때로 상정할 수 있다. 관객이 벗어놓고 간 신발로부터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론적 관점이 떠오른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구두>(1886)를 분석하며, 낡은 구두를 통해 농촌 여인의 고단한 삶이 탈은폐(Aletheia)되고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본 공연에서 벗어놓은 관객의 신발 또한 마찬가지다. 신발은 무(無)가 아닌 ‘존재’이며, 신발 주인의 인생을 함축한다. 관객의 신발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상징’이다.


이러한 신발 벗기 행위와 공연장으로의 입장은 장례 절차를 상기시킨다. 신발을 벗고 공연장에 들어감으로써 관객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고, 바닥에 누워 고요 속에서 자기 몸을 관통하는 빛을 경험한다. 공간은 온전히 빛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사면이 막혀 있는 블랙박스가 아닌 영원히 확장되는 우주와도 같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빛줄기는 마치 이승 저편에 있는 어떠한 세계처럼 감각된다. 빛 줄기는 제리 주커(Jerry Zucker) 감독의 영화 <사랑과 영혼>(Ghost, 1990) 엔딩에서 등장하는 저승으로 가는 찬란하고도 밝은 입구처럼, 쉽사리 가 닿을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낯선 초대 앞에서 이승에 대한 미련이 소멸하는 것 같이, 관객들은 그 빛에 손을 뻗어 보기도 하고, 소실점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한다. 촉각으로 결코 감각될 수 없는 빛에 대한 육체적 갈망은 커져만 간다. 빛은 과묵하게 관객의 몸을 관통할 뿐이다. 반면에, 편안과 평온의 한 지점에서 관객은 계속 누워있는 행위를 선택하기도 한다. 관객마다 빛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빛에 자기 육체를 기꺼이 내어준다는 점에서 빛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2020년 12월 15일 화요일

'경계'에 대하여: 2020 SPAF <보더라인>,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 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갈라>

조혜인, 퍼포먼스 매거진 <PERSIM> 작가

[알림]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 매거진<PERSIM>에 선 수록된 글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공연 사진 및 부가 설명은 필자의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hichotheatre/31 - 편집부

 



올해 2020년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이하: SPAF)가 2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올해 라인업은 SPAF 20주년을 맞이한만큼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의 여파로 해외초청작은 단 한 작품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예술제 최초로 비대면 생중계를 시작했다. 극장 안에서 발생하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물리적 현존이 비대면이라는 경계로 해체된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TV와 후원제도를 통해 아티스트를 응원하며 집에서 편안히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어 SPAF에 대한 접근장벽이 낮아졌다. 후원을 통해 집으로 배송된 리워드를 받고 공연을 기념할 수도 있었다. 필자가 본 작품은 아래와 같다. 상영일 순서대로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연극), 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무용), 쇼빌컴퍼니 <딸에 대하여>(연극), 안은미컴퍼니 <나는 스무살입니다>(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한 해외초청작인 제롬 벨 <갈라>(무용)이다. 본 리뷰에서는 '경계'라는 키워드로 이 작품들을 읽어보고자 한다.

 

1. NN들을 위하여 -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

 

<보더라인>은 한국의 공동창작 실험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와 독일의 레지덴츠테아터가 협력하여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공연이었지만 코로나의 위험성 앞에 서울-뮌헨 8,000km를 아우르는 기술 도전이 되어버렸다.
 
레지덴츠테아터(Residenztheater)는 뮌헨을 기반으로 하여 현지인들에게는 'The Resi'라고 불리기도 하는 바이에른 지역의 주립극단이며, 이 극단이 상주하는 극장의 이름이기도 하다. 레지덴츠테아터는 국장 Andreas Beck부터 장애인 대표 Claus Baier 까지 극장 내 다양한 협력 앙상블을 이루며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보더라인>에는 레지덴츠테아터 소속 배우이자 동베를린 출신인 '플로리안 야르(Florian Jahr)'가 출연하여 크리에이티브 VaQi의  배소현, 장성익, 나경민, 우범진 배우와 함께 한국-독일 양국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공연은 '탈북인 인터뷰'로 시작된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할 때 비행기값이 15,000$라는 이야기, 통일은 이념싸움이란 이야기, 문제나 비용만 따진다면 통일 할 수 없다는 이야기, 여성 탈북자 '그레이스'의 등장을 거치며 야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순간을 회상한다. 공연은 또한 비대면 형식을 적극 활용해 연극무대와 영상매체를 유연하게 연결시킨다. '김현석(가명) 목사 인터뷰' 장면에서는 화면을 분할하여 왼편에는 뮌헨의 실제 무대를 보여주고, 오른편에는 영상을 송출한다. 이때, 목사를 통해 우리는 상기된다.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탈북을 선택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한편으론 학업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임을. 
 
그렇게 인트로에 삽입된 인터뷰가 끝나면 무대 위에 텐트가 나타나며 난민 이슈로 이어진다. 야르는 난민을 바라보는 독일 현지인들의 의식수준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나 서독이 흡수통일을 이루면서 많은 서독인들은 자신이 동독인들 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조상들도 경계를 너머온 난민이었단걸 모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동시대에 경계를 가로질러온 사람도 꿈이 있는 사람이란 걸 자각조차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영상 속에 등장한 히잡 쓴 여성은 말한다.  "Ich möchte Ärztin werden(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다시 공연은 영상화되며 철조망(Border line)을 따라 걷는 인물의 뒷모습이 잡힌다. 이어 화면이 두 개로 분할되어 오른쪽 화면에는 독일 극장상황이 보여진다. 텐트 앞 바닥에 놓인 한국의 산 그림이 영상에 담긴다. 그 위에 철조망 파편들이 놓여진다. 이어서 DMZ 티셔츠, 코로나 검역 확인증, 접근금지 푯말, Ankunft(도착) 서류가 보인다. 이어서 오스트리아를 볼 수 있는 '베그샤이드(Wegscheid)'가 소개된다. 바이에른 남동부에 위치한 베그샤이드를 통해 "우리는 유럽에 경계가 있다는 걸 잊었다"까지 그 사유가 확장된다.
 
경계를 따라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탈북인들의 모습이 쇼트에 잡히고, 어린시절 야르의 사진들이 나열되며 다시 독일 극장으로 돌아온다. 야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점을 회상한다. 기뻐 경직된 할머니의 몸, 처음으로 서독에 간 날, 아버지와 함께 동/서독 경계를 넘나들던 기억, 경계를 사이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뜀뛰던 기억, 성 니콜라우스 축일 등 그날 이후의 생생한 감각들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보더라인>에서는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객석을 위치시키고 한가운데 펼쳐놓은 텐트가 마치 우리나라의 판문점을 상기시킨다. 마주보던 건너편의 관객들이 언제든 텐트로 난입해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공연이라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무대를 경계로 서로를 마주 할 수밖에 없다. 공연은 계속 이어진다. 여성 탈북인 '그레이스'에 대한 인터뷰가 펼져진다. 남자친구와 솔직한 대화가 불가능하고, 탈북인이란 걸 감추고 거짓말 하고 살아야 하는 삶과, 동시에 두 개의 삶(탈북인으로서의 정체성, 남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아야하는 것,  남자친구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생각하며 관계에 대해 갈등을 이야기한다. 
 
영상은 다시 대한민국 국경의 바닷가로 이동되고, 철조망을 따라 걷는 야르의 모습이 잡힌다. 그는 철조망을 만져보기도 하며 길을 따라 유유히 걷는다. 자가격리에 대한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 코로나를 무릅쓰고 한국에 공연 스케줄차 왔지만 편의점 도시락과 생수로 끼니를 이어가는 야르의 셀프 영상이 큰 리얼리티를 창출한다. 코로나로 인한 세상과 세상 간의 경계(Border)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Hostility / Worriness)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야르는 말한다. "난 이미 이곳에 왔는데 도착하지 않은 기분이다."
 
이어서 '리허설 Probe' 장면에서는 나경민 배우와 야르가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더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8,000km씩 떨어진 삶에서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그들은 '배우'라는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에 대해 공감 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흉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디션 볼 때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도 공유한다. 그러나 총을 쏴본 경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극명히 다른 입장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이 장면에서 나경민 배우의 의상이 인상적이다. 그는 평범한 옷을 입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티셔츠를 입었다. Seoul marginal theatre festival, 그곳은 경계와 변두리를 사유하는 실험적인 공연작업의 장이다. 초록의 추상경계가 프린트된 의상을 입음으로써 <보더라인>의 감각이 더욱더 살아났다. 또한 "고성 갔을 때 남북한의 휴전선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어?"라는 질문에 이어 나경민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낯선 사람에 대해 환대와 경계를 동시에 가진다는 그는 타자, 이방인, 탈북민들을 환대해야겠다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멀어진 가족과 전화 한통화 망설이는 자신을 자각한다고 담담히 말한다. "지금은 남북한의 경계보다 그게 더 높은 경계같아." 국가적 차원까지 생각하기 이전에 누구나 마음과 관계 속의 경계가 있다. 필자는 나경민 배우의 이 대사에 크게 공감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 많은 경계들이 있다. 그 경계는 각자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가족, 누구는 학업, 누구는 직장 등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경계 즉, 삶에서는 결코 내 노력만으로 극복 할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이처럼 국가적 차원의 경계(Border)에 대한 이야기에서 개인적 차원의 경계까지 관객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지점이 <보더라인>의 묘미다.
 
현철(탈북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동사 '그리워하다=그리다'가 같은 어원임을 알려준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는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림으로써 그리워했다고 한다. 야르는 '안전한 공간'에 대해 질문한다. 현철은 안정감을 느낄 때마다 괴롭다는 양가감정을 느낀다고 대답한다.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들을 바르고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하는 환경 즉, 대한민국 사회 저변에 깔린 환경에 대해 말하며 "이런 환경이 나를 떠나고 싶게 해요."라고 한다. 떠나고 싶은 환경에서 떠나왔더니 또 떠나고 싶게 만드는 환경이 기다리는 난민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변해주는 장면이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탈북인의 심리에 대해서도 고백한다. 그는 "행복하신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Sometimes happy, usually unhappy."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갑자기 장면이 중단되고  탈북인을 연기한 배우 우범진으로 돌아온다. 그는 탈북인 연기를 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에 대해 '우리가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데 전념했음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은 소수자, 난민, 탈북인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강조하지만 우범진은 배우로서 그 반대의 전략을 취하면서 그들만이 가진 고유한 서사를 드러내기에 힘썼다. 이는 여성이 가진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평등에 가닿으려하는 페미니즘의 한 전략과도 흡사하다. 
 
<보더라인>에서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국경에 대해 독일과 한국의 큰 차이가 무엇일까? 바로 한국인들은 '합법적'으로 국경을 걸어서 넘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박탈된 가능성, 넘을 수 있다는 의지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불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NN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장면이 영상으로 전환되며 탈북인 출신 박사(장성익 배우)가 등장한다. 그는 기계로 돌 표면을 갈고 있다. 한편 뮌헨의 무대에는 야르가 큰 베낭을 매고 등장한다. 그는 베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맞은편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상을 응시한다. 돌에는 NN이라고 새겨져있다. "아메그 하산, 아메그 오스만 ..." 박사는 중동의 이름들을 부르고, 야르는 가방에서 돌을 하나씩 꺼낸다.
 
2020년 9월 26일 서울로 영상은 바뀐다. 화면 안에는 배우 배소현이 있다. 그녀는 독일어 기초반에 들어간다. 독일어 발음을 연습한다. 난민 현장의 Freiheit(자유)를 외치는 독일어에는 이동의 자유, 평등, 불평등, 동등한 권리가 있지만 그 언어는 난민 활동가들의 언어와 부딪힘을 일깨워준다. 말은 자유롭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Doch, ich bin illegal(그렇지만, 나는 불법입니다)." 배소현은 난민 당사자 활동가인 'Mimi'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Mimi는 케냐 출신이며 2014년 36살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배소현은 2020년 현재 36살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았을 배소현의 내면이 36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난다. Mimi는 활동가이기 이전에 그저 음향엔지니어라는 꿈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또한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이곳은 하나의 행성, 하나의 세계, 하나의 사랑, 하나의 혈육, 차별의 근거는 찾을 수 없네요."
 
극장 무대 위의 스크린에는 배소현의 모습이 영사되고, 바닥에는 돌더미들이 쌓인 채 가녀린 스팟 조명을 받고있다. 언제쯤 우리는 다 같이 어우러져 살 수 있을까? 영상이 전환된다. 한국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텐트 앞에서 우쿨렐레를 치며 모닥불도 피어오르니 캠프파이어 분위기가 난다. 박사는 돌덩이에 계속해서 NN을 새긴다. No Name, 지중해에 빠져죽은 이들의 이름이다.
 
"넌 어디서 태어났니?" "넌 무엇을 두려워하니?" "경계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니?" 나경민은 어머니께 쓴 편지를 읽는다. 이것은 바로 삶이라는 세월 가운데 만들어진 경계를 넘기 위한 용기다. 제 4의 벽을 사이에 두고 배우와 관객으로 만났던 모자 관계를 허물고 비대면의 시대에서 어떻게 아들을 만나고 계실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경민은 작은 용기를 낸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비록 자기 이야기이며 공연이란 허구일지라도 라이브 스트리밍의 시대에서 얼굴도 모를 관객들에게 어머니를 위한 편지를 읽는 행위는 결코 작은 용기가 아니다.
 
다시 질문한다. 점점 질문들의 범위가 국가적 차원이라기보다는 보다 사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고향이라는 단어의 의미?" "너를 다른 사람과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오롯이 너로서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질문 후 우쿨렐레 연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어두운 밤 아래의 호박색 빛 터널이 등장하고, 터널 안을 걷는 인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보더라인>의 경계선 걷기에서는 뒷모습이 자주 연출되었다. 쓸쓸하게 긴 길을 얼굴 없이 걷는 그 모습들, 동그란 지구에서 지중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NN들을 상기시킨다. No Name, 이름 없는 그들은 사뭇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해방된 관객』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서술과 맞닿는다.
 
우리가 화면에서 고통 받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보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름 없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우리가 그것들에 보낸 시선을 우리에게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말의 대상이 될 뿐 스스로는 말을 갖지 않은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중략) 이 이미지들에 고유한 정치는 아무나 보고 말할 수는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해방된 관객』, 137~138 면.

 
이름없는 신체들 요컨대, 용납 될 수 없는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말 할 수 없는 NN들에 대하여 <보더라인>은 그 말 할 수 없음의 위치를 전복시키고자 한다. 끊임없이 거부되고 그저 말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돌에 새김으로써 그 존재가 다시금 각인된다.
 
다시 서울의 어느 카페, 그레이스가 등장한다. "내가 그냥 나라고 말하는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이것은 인터뷰어에게 하는 질문같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유학 생활 때 지은 이름인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레이스일 때 좀 더 외향적이고, 쿨하고, 시크한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태어난게 죄도 아니고 나는 '나'라기보다는 언제나 남들에게는 '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보더라인, 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왔음에도 결코 넘지 못하는 또 다른 편견이라는 보더라인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곧이어 환대(Hospitality)에 대한 사유가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저도 누군가를 환영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환대란 주인이 손님에게 행하는 일종의 권력구조가 작용하는 행위라는 점을 그레이스는 꼬집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은 언제나 '탈북인'으로서 한국에서 환대받고 베품받는 존재였지 누군가를 진정으로 환대할 수 있는 환대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보더라인>에서 가장 눈 여겨보아야 할 점은 국가, 분단, 난민 등의 사회적 차원부터 개인적 차원으로 질문이 이동성한다는 점이다. "하루의 몇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가?" "동독 출신인게 자랑스럽니?" "그 어떤 곳도 내 고향이 되어주지 못했어." 그러면서 야르가 베그샤이드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뜀뛰기 했던 날을 현재로 복귀시킨다. 한국 배우들 또한 경계 뜀뛰기를 한다. 한국-뮌헨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유롭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넘고 야르는 잠시 멈춰서 한국의 영상을 바라보며 퇴장한다. 영상 속에서 야르가 등장한다. 영상 속 공간은 청계광장으로 확장된다. 시민들이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잠수교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배우들은 뜀뛰기를 해보고, 북한과의 경계가 합성되어 뜀뛰기 해보고, 다시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한강다리 위에서도 뛰어본다.  뜀을 멈추며 모든 배우들은 제자리에 선다. 거친 심호흡이 전달된다. 그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보더라인>은 막을 내린다. 마치 이 공연과 함께한 모든 NN들을 응시하는 듯하다. 

 

2. 비대면 시대에서 신체를 감각하기 - 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제19회 서울변방연극제(2019)의 참가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흰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있고 퍼포머들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려놓은 채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다. ‘음- 음- 음- 음-' 반복되는 소리에 맞춰 발로 그 리듬을 감각하며 공연은 시작된다. 그들은 코를 내민 채 킁킁거리며 냄새를 감각하기도 하고, 자신의 귓볼을 건드리며 귀의 라인을 감각하기도하며, '휘이- 휘이 휘이 휘익' 하는 소리 등에 맞춰 신체를 변화시킨다. 공연의 끝자락에서는 퍼포머들이 웃으며 퇴장하고 빈 의자들만이 남는다. 퍼포머들의 느낌을 생각해줄 수많은 빈자리들이 가상 너머로 채워지며 블랙미러 앞에 남아있는 '나'라는 감각의 전염체를 마주한다. 이러한 신체감각적 실험은 올해 SPAF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작년에 선보였던 것과 어떤 지점이 달라졌을까?
 
원형으로 빙 둘러진 접이의자에 퍼포머와 관객이 뒤섞여 앉아있었던 변방연극제와 달리, 이번 2020 SPAF에서는 관객과의 공동현존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되었다. 과연 비대면을 통해 관객이 실재하는 퍼포머의 몸을 느낄 수 있을까? 역으로 퍼포머가 실재하는 관객의 몸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비대면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을까? 비대면으로 인해 이번 SPAF에서 가장 아쉬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공연은 진행되어야 한다. 비대면의 겹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느꼈는가를 소통하는 것이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피드백이 될 것 같다. 또한 관객과의 신체적 공동현존이 없이 세 퍼포머들의 상호작용과 미니멀한 무대가 주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겠다. 관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아래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관객은 객석의 안전지대 속에서 관찰자의 역할만을 수행할 듯하지만, 퍼포먼스의 직간접적 자극의 대상이 됨에 따라 그들 역시 감각적, 심리적, 신체적 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비록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지 않지만,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에서 관객은 객석과 무대가 구분되지 않는 원형의 공간에서 퍼포머를 포함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시선을 교환하고 때마다 반응하고 그래서 다른 반응을 유발하는 유동적 존재로서 공연의 또 다른 동력의 지점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퍼포머에게나 관객에게나 수행성은 익숙하고 낯선 몸의 교차점이 된다." 출처: https://indienbob.tistory.com/1141?category=226688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유동적 존재로서의 관객은 퍼포먼스라는 사건 속에서 참여―비록 그 참여의 정도에 상관없이―에 가담하고 감응함으로써 또다른 수행적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공동의 신체감각을 형성하려는 실험에 비대면이라는 장벽이 생김으로써 실험의 포커스가 어디로 향해야할지 거대한 물음을 남기게 된다. 비록 물리적 공동현존이 배제되었지만 펜데믹 시대에서 스마트폰, PC, 태블릿 기기가 발생시키는 전자의 향연을 통해 어떻게 퍼포머의 신체를 감각해야하는지 또한 공동현존의 개념을 미디어의 영역까지 확장할 이론의 필요성을 제고하고, 그 감상 방식―극장이라는 같은 세계가 아닌 전자세계라는 경계를 거친 신체를 감각하기―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예견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지금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고, 답을 찾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퍼포먼스의 지평이 변화될지 미지수지만 말이다.

 

3. 세대간의 이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 - 쇼빌컴퍼니 <딸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는 기성세대로 대변되는 '엄마'가 딸 '그린'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엄마는 부디 딸이 평범하게,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린은 엄마의 바람을 쉬이 수용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평범하게 보일 수 없는 성적지향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아닌 소중한 엄마(가족)에게 만큼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린, 그리고 엄마의 집에 돈을 내며 동거를 하기 시작한 그린의 동성연인 '레인'은 엄마에게 존재를 거부당할지라도 자신이 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타인의 정죄어린 잣대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 만큼은 해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시간강사로 근무하는 그린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내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해고까지 당한다. 그녀는 레인과 함께 불의한 세상 속에서 꿋꿋하게 부당함을 외치고 자신의 일과 삶을 지키려고 시위까지한다. 그러나 우연히 그 모습을 엄마가 보게되고, 엄마는 조용하게 넘어가는 삶,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라며 절절하게 딸을 위한 마음으로 애원해보지만 서로의 인생에서 절대 이해 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또 한명의 이해 되기 힘든 삶의 방식을 가진 인물이 극 중에 존재한다. 바로 치매로 인해 노인요양병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 '젠'이다. 한때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였던 ‘젠’은 이제 치매로인해 자신이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에게 젊은 남성이 와서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그는 결국 극복 될 수 없는 불통으로 인해 인터뷰를 포기한다. 여기서 남성 인터뷰어는 '일반인'으로 대변된다. 성인, 남성, 직장인은 인간 중 가장 '보편'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가? 보편으로서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고 살아가는 그와는 달리 '젠'은 죽음을 앞둔 여성으로서 잊혀지고, 지워지기 쉬운 누군가에겐 '불편'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다.
 
'젠'을 통해 떠오르는 필자의 사담을 나누고싶다. 누구나 길거리를 걷다가 요양병원 근처를 지나가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요양병원 안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모습은 다른 건물과 다름없지만, 그 안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내 세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없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들은 노년이든 청년이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고, 인식되었고, 또는 가정과 직장이 있었고 분명 자기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 나이가 들고 병이 들수록 가정이 아닌 다른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야되고 병원이라는 다른 공간으로 가서 '생명력 있는' 사람들과 격리되게끔 한다. 사라지게 한다. 오로지 그들에 대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늙음, 병 그리고 병상에 붙여진 이름 세 글자 뿐일 수도 있다. 필자는 외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고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죽음의 순간조차도 가족과 격리되어서 맞이해야 하고 오로지 마지막으로 고인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입관식 때였다. 필자의 경험상 요양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폴리글로브와 비닐 앞치마를 끼고 들어가 누워계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기도해드리는 일 밖에 없었다. 모르는 분이지만 인사를 건네면 그것을 인지하고 인사를 받아주는 분도 계셨다. 현실은 가족조차 매순간 곁을 지킬 수 없어 요양보호사를 고용해야하고,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병원비를 마련하기위해 밤낮으로 일 해야하는 가족 구성원이 존재함에 분명하고, 장례의 순간조차 산사람들을 위해 편리하게 요양병원 한 귀퉁이에는 장례식장까지 마련되어있는 현실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분명 죽음은 멀리 존재하는게 아니구나." "아, 결코 죽음을 지워내지 말리라."
 
세대간에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만, <딸에 대하여>에서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특정 주인공이 한 명 있는 것처럼 인물들이 그려지는 게 아니라 각자가 마치 주인공인것처럼 캐릭터들의 생명력이 두드러진다.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 삶에서 만큼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 입장이 있고 갈등 가운데 그런 입장차들을 멀리 벌려놓기도 하고 좁혀가기도 하며 이해받고싶은 욕구들이 분명 존재하는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네 명의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 상기시킨다.

 

4. 덧없는 몸짓을 덧있는 현재(現在)로  - 안은미컴퍼니 <나는 스무살입니다>

 
<나는 스무살입니다>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색채 그리고 한국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무용 퍼포먼스다. 신명나는 안은미컴퍼니만의 개성이 돋보인다. '신명'은 다른 서구의 퍼포먼스에서 발견되지 않는 한국적 정서와 매우 밀접한 감흥의 표현이다. 동시대 연극학자들은 동양연극과 특히 우리나라의 '굿'에 주목하여 '신명'과 같은 특성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한다. 신명에는 정형화되지 않고, 특정한 서사가 있다기보다는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어떠한 기(氣)가 느껴진다. 이런 신명적 특성을 가진 <나는 스무살입니다>에서는 비록 명확한 의미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SPAF 20주년을 축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SPAF의 시작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덧 없이 흘러갔을지라도 지금 여기(Here and Now) 우리의 몸짓은 덧있다. 우리의 삶은 덧있다. '덧'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 공연에서의 40분은 꽤 덧스럽게 흘러간다. <나는 스무살입니다>를 통해 SPAF의 역사를 되짚으며 현재를 소환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장면은 무대를 떠나 객석에 퍼포머들이 앉아서 마스크를 쓴 채 영상을 보고 있을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퍼포머들 마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공연에 삽입되면서 관객들은 현재에 대해 순간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극장에 가는 게 위험하므로 방에 앉아 공연을 관람해야하는 현실, 마스크의 일상화, 그럼에도 진행되는 2020 SPAF, 어떤 형식으로든 관객과 만나고 싶어하는 퍼포머들의 의지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쉴새없이 펼쳐지는 역동적인 몸짓 중간에 객석에 앉아 건네는 인사 그 '덧'같은 장면을 통해 퍼포먼스의 미래가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희망마저 들게한다. 퍼포머와 관객이 계속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소멸되지 않는 한.

 

5. 무대 위 춤추기의 조건 허물기 -  제롬 벨 <갈라>

 
<갈라>에서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위해 전문가/비전문가의 조건을 과감히 허문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갈라>  공연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내용이 중요하기보다는 무대 위에 등장한 퍼포머들의 현존으로 가득 찬 공연이기때문이다. 총 20명으로 구성된 퍼포머들은 어떤 이는 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무용수 같고, 어떤 이는 다른 영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 온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즉, '일상의 전문가'들이 퍼포머로 등장한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일상의 전문가란 전문 퍼포머가 아닌 개인의 일상을 살아온 자기 일상의 전문가를 일컫는다. 각자의 삶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살다 온 자기 인생의 퍼포머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대변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몸이 무대 위에 서게 되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표현하는 퍼포머로 거듭난다. 또한 팔, 다리를 자유롭게 가눌 수 없는 아기가 아닌 이상 의식적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 할 수 있고 스스로 사고 할 수 있는 어린이 퍼포머들의 존재 또한 돋보인다. 장애로 인해 휠체어를 운전하며 동작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단체단체' 장면에서 '나 가거든'을 선곡하며 무대 한 곳에 멈춰 세워놓은 휠체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휠체어를 벗어나 바닥을 구르기도 하며 어떠한 슬픔과 한을 창출해냈다. 또한 다른 외형으로 드러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피부색이 다른 백인과 흑인도 있고, 어쩌면, 필자와 같은 동양인이라 겉모습만으로는 국적은 구분 할 수 없지만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도 존재 할 수도 있다. 또한 육안으로는 포착 될 수 없는 개인이 가진 고유한 성적지향,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존재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갈라>에서는 개인의 고유한 몸과 그들의 기호가 드러나는 것 같은 선곡이 도드라진다. 전문가/비전문가의 영역을 해체하면서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 개인이 존재하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면서 삶/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삶과 예술의 붕괴되는 경계, 이를 감각하는 퍼포머와 관객이 함께 문지방과 같은 사이에 위치하기는 포스트모더니즘 공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바이다. <갈라>에서 가장 눈여겨본 점은 '단체단체'에서 각자 한 명씩 무대 중앙으로 나오고, 동작을 이끌며 나머지 19명의 퍼포머들이 리드 퍼포머의 동작을 따라하며 그의 동작 혹은 삶에 동화되고 가닿으려고 하는 노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문가/비전문가의 경계 뛰어넘기와 더불어 개인/개인의 삶의 경계 뛰어넘기로 나아간다.
 

이상으로 2020 SPAF 참가작 <보더라인>, <나는 당신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그리고 <갈라>에 대한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때야말로 퍼포먼스 예술을 통해 인류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겠고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극장 가기'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앞으로 어쩌면 '극장 가기'마저 하나의 사건이 되고 퍼포먼스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포먼스는 계속되어야 한다. 퍼포먼스는 작업이기 전에 사람들의 모임이다. 모임으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는 진정한 인류의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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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일 일요일

2015 SPAF 폐막작 <폭주 기관차> - “우리는 폭주하고 있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글쓴이_최희범



2015년 10월 30일, 그러니까 어제 저녁에 스파프(SPAF) 폐막작인 <폭주 기관차>를 보고 왔다. 시작 15분 전 쯤 도착한 공연장 앞에는 2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각각 손에 피켓을 들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한 팝업 씨어터 공연의 검열 및 공연 방해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관계자가 관객 한 무리를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3층으로 올려보냈다. 스파프 공연에서 처음 받아보는 마중 서비스였다. 공연장 로비 분위기는 이전 스파프 공연들에서와 사뭇 다르게 어수선했다. 객석에서는 시위 내용이 적힌 종이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오가고, 웅성거리는 소음 가운데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반쯤 정신 나간 듯한, 자신이 희대의 범죄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기관사와 화부가 열차 전체를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 기관차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스파프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두 대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연기하는 두 명의 범죄자는 음악과 긴박한 리듬으로 그들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기관차의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가속되는 극의 리듬, 그리고 그 안에서 얽히는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모순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말로 이 공연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미안하게도) 앞에 적은 간략한 줄거리 및 배우들이 피아노 연주를 통해 굉장히 시끄럽고 히스테리컬하게 광기를 표현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는 점 외에는 공연에 대해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다. 미숙한 한국어 자막 플레이가 이 공연이 과연 그런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인물들의 심리상태가 “탁월하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하기 힘들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담당자가 졸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을 정도로 미숙했던 자막 플레이는, 얼마 전 본 로버트 윌슨의 <소네트> 공연보다 한층 심각한 수준이었다.

<폭주 기관차>는 대사의 내용과 발화의 리듬이 매우 중요한 연극이었다. 일단 대사가 굉장히 길고 많았다. 또한 작품의 서사 전달과 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주로 대사 내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더욱이 주최측이 강조하는 “긴박한 리듬”은 연주되는 음악의 리듬 뿐 아니라 배우들의 발화의 리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즉 인물들의 말과 연주되는 음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작품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국어 자막 플레이와 배우 발화 간에 긴밀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연에서 자막 플레이와 공연 진행 싱크로가 계속 어긋나는데, 어찌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자막으로 인해 짜증이 치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관극은 흥미롭기도 했다. 반쯤 맛이 간 기관사와 화부가 자기들 멋대로 열차 전체를 폭주하게 만든다는 내용은 묘하게 현재의 시국을 연상시켰다. 이러한 연상은 공연장 바로 밖에서 벌어지는 시위로 인해 훨씬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검열 반대 시위 덕분에 이 공연은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공연은 시위 덕분에 연행을 에워싸는 “축제다운”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위대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앞에 진을 쳤다. 이로 인해 공연장에 들어와서 밖의 상황을 떠올릴 때 이 건물을 시위대가 공간적으로 에워싸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또한 공연 시작 전과 종료 후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시위함으로써, 관객들이 공연장에 들어와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전체 과정이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문화 인류학자로서 제의 및 축제성을 연구한 빅터 터너는 이 같은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통해 ‘리미널(liminal)’한 영역이 형성되며,1) 이 영역은 문화적으로 고정된 형상들이 새로운 것과 결합될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그 영역에 속한 사람은 구별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을 일상과 다른 맥락에서 읽게 된다. 터너는 이러한 특성을 ‘리미널리티(liminality)’라고 부르며, 이는 ‘축제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어제의 공연장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규범들로부터 일시적 해방을 누리는 축제의 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공연장 전체를 감싸는 긴장감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통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왠지 모를 동요가 많은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객들의 관극 경험에 부여된 새로운 맥락은 연극 작품을, 공연장의 분위기를, 다른 관객들의 태도 등을 비일상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구조적 상태를 전복하고 반구조의 상황을 만드는 가운데 상하, 우열, 대립의 장벽을 무너뜨리” 는 것으로서의 ‘축제성’을 경험한 것이다.2)

스파프 공연에서 이 같은 ‘축제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인즉, 스파프는 해마다 나름의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테마가 무엇인지, 그래서 각 프로그램들이 축제 전체의 어떤 맥락에서 기획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공연 관람을 통해서 이러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파프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이 테마라는 게 주최측에게도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각각의 공연 단체, 혹은 작품이 얼마나 유명한지, 유서 깊은지, 혹은 “핫”한지 등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스파프라는 축제에서는 10월 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해외 유명한 작품 및 극단들의 공연을 대학로에서 볼 수 있는 기회로서의 “축제”성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최측의 기획 의도와는 무관할지언정, 시위대가 이 공연에 끌어온 정치적 맥락은 공연 감상의 경험을 보다 ‘축제’답게 만들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스파프는 하지 못하는 것을 혹은 하지 않는 것을 해낸 것이다.

이 작품을 만약 국내 극단이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노스페이스 잠바와 수학여행이 무엇인가를 연상시킨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연 금지되거나 방해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연에서 대사를 다 빼고 배우들 피아노 연주로만 공연을 하라는 식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무대를 노래하다”라는 테마를 가지고 이 축제를 기획했고, 그래서 폐막작에서는 “노래”만 나오고 쓸데없는 “말”은 안 나오는 것으로 기획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 이 극단이 외국 단체였던지라 다행히도(?) 이런 혐의를 받지 않고, 무사히 그들이 기획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어제 자막 플레이의 어설픔으로 관객들의 인내심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것은 적어도 고의적 방해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아무쪼록 오늘 폐막작은 보다 나은 자막 플레이와 함께 무사히 마쳤기를, 또한 보다 대규모 진행된 예술 검열 반대 시위가 작품과 또 한 번 멋지게 협업할 수 있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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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놀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으로부터 빌려온 이 개념은 문지방이라는 의미의 ‘limen’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반 게넵은 전이 의례의 세 국면을 분리-전이-통합으로써 설명하며, 여기서 ‘분리’의 국면은 일상으로부터의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의미한다.

2) Victor Turner, Myth and symbol. Crowell Collier and Macmillan, 1968, p. 277.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가려진 것을 보기: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

임승태

죽음의 시선

연극 <노란 벽지>에는 샬롯 퍼킨스 길만의 원작 소설에 본래 없던 시 한편이 삽입되어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방식은 다분히 극적이고 징후적이다. 시를 기억하지 못하던 주인공이 점차 기억을 회복함으로써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2a 30),  이 발견(아나그노리시스)은 안나의 운명을 바꾸는 급전(페리페테이아)을 동반하고 있다. 안나가 처한 상태(신경쇠약)와 원작으로부터 달라진 이 연극만의 결말(안나의 자살)을 놓고 보면, 시에 대한 망각이 중요한 징후이자 복선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사건의 결과를 놓고 보면 “죽음death”이란 마지막 시어는 신경쇠약을 앓는 안나가 이 시를 망각했던 그리고 애써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고자 했던 이유가 된다. 원작 소설에서 ‘나’가 벽지 뒤의 여인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종국에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준다면, 연출가는 여기에 시를 망각했다가 다시 발견하는 흐름을 겹쳐 놓음으로써 그 여인이 주인공 자신의 죽음 충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안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극적 아이러니를 확보하고, 이후 그것을 애써 기억하려는 안나의 모습에서 불길한 결말이 다가오는 서스펜스를 경험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소설이 연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제목을 대신하는 첫 행을 의식한 듯, “한줄기 빛”을 제공한다.

한편 시의 마지막 행에는 원작 소설과 이 연극을 매개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시어가 자리하고 있다. 안나가 망각하고 있던 “시선 (the) look”이라는 단어는 시를 다시 기억해내기 전에 이미 벽지 뒤의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혹은 벽지의 문양으로부터 그 죽음의 사자를 읽어내는 망상의 형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초점을 잃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망자의 시선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 마지막 구절로부터 이 연극이 라이브 카메라, 즉 시선을 조작하고 조정하는 행위를 이끌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수의 역설

2년 전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에서 케이티 미첼의 <줄리 아씨>를 보고 나서 나는 블로그에다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연된다면 큰 호응이 기대”된다고 감상을 남겼었다.  케이티 미첼의 또 다른 작품이 올 해 SPAF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예매를 서둘렀지만, 티켓을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한편에 자리한 걱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가 다시 봐도 흥미로울까? <줄리 아씨>를 보고 나올 때 옆에 있던 한 관객이 했던 말—“이런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 I’ve never seen this before.”—이 나에게도 적절한 반응이었다면, 이제 이런 걸 ‘다시’ 보게 되는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제목과 이야기가 바뀌었을 뿐 같은 형식이 되풀이될 위험성이 농후한 연극을 기다리던 나에겐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극장이란 우리말 단어가 여전히 연극 공연장과 영화관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이 둘의 병존과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줄리 아씨>도 <노란 벽지>도 무대가 크게 상하로 구분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매우 사실적인 세트가 펼쳐지는 아래쪽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 공간이자 촬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크린은 바로 그 무대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복수의 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무대에서 장면을 촬영하면 무대 밖 어디에선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이어 붙여 스크린에 영사함으로써 관객들은 한 편의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촬영 현장과 그 결과물을 위 아래로 동시에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TV 화면 한 켠에서 자주 목격하는 “LIVE” 표식 같은 역할을 하며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더불어 음향 기사는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지도록 필요한 소리를 만들어 덧입힌다. 영화의 효과음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러한 작업이 관객의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흥미가 더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것과 매개화된 것들이 경합을 벌인다. 이 광경은 그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관객은 마치 대위법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이, 아니면 피카소의 입체적 초상화를 볼 때와 같이, 복수의 채널로부터 전달되는 시청각의 자극에 대해 시종일관 선택하고 종합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공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기 위해서는 무대를 편안하게 관조하는 대신 순간순간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눈과 머리를 분주히 굴려야 한다.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 그리고 그것을 교차 편집하는 조정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그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경거리(show)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케이티 미첼이 라이브 시네마 쇼를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연극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구성원의 실수나 기계 오작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라이브 카메라가 사용되는 많은 공연에서 기계 오작동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미스터리는 학교나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빈번히 발생하는 일종의 도시 괴담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 위의 실수에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투사하게 되면서 긴장이 증폭된다. 그런데 이러한 결함들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 이외의 스태프들과 더불어,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물론 촬영상의 실수나 오작동이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그 실수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결점 같은 것이었다면,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마치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큰 가산점을 얻는 트리플 악셀로 승부하려는 어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첫날 공연에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찰나였지만 카메라 스태프 한 사람이 맞은편 카메라의 앵글 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순간 관객들은 마치 안나가 벽지 뒤에서 여자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한 남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공연을 곱씹을수록 이 순간이 하나의 망상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하는 스태프들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 생각하여 지각을 거슬러 ‘없는 것처럼’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에서는 마치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이 물화된 것인 양 그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얻기 위해선 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스크린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가부키의 구로코(黑子)처럼 그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배우와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우리의 습관같이 스크린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돌발 상황이 폭로하는 것은 연극과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관습이라는 필터를 거쳐 여과된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카메라 스태프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은 앞서 그 스케이트 선수가 점프에서 실패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훈련된, 혹은 관습에 무뎌진, 관객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이런 실수를 그저 없는 것처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물론 제작진의 연습 부족을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탈은폐된 이 연극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설령 공연 중에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연을 보는 것이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실수를 기다리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줄리 아씨>를 볼 때, 나는 더 이상 발표 당시의 긴장감을 기대할 수 없는 스트린드베리의 텍스트에서보다 무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영상의 매끄러운 흐름이 혹여 실수나 돌발 사고로 끊어지진 않을까를 긴장하며 보아야 했다. 드라마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이 서스펜스에 주목함으로써 나는 연극을 보는 습관적 태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케이티 미첼의 카메라는 무대 위에 분명히 있거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습적으로 없거나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도 우발적으로도 드러낸다. 프로이트를 따라 사소한 말 실수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을 찾아낼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연극의 공연에서 발생하는 실수로부터 그 저변에 놓여 있는 문제적 연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려서 보여줌: 스크린의 이중성

<노란 벽지>는 분명 <줄리 아씨>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노란 벽지>에서 카메라와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전작에 비해 더욱 진전된 연출가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줄리 아씨>에서는 다섯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배우의 앞, 뒤, 옆, 위 등 배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여러 대의 카메라가 배우를 둘러싸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역 배우와 둘 이상의 부분—뒷 모습이나 손만 비치는 식의—대역이 순차적으로 촬영되고 몽타주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케이티 미첼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매끄러운 영상이 사실은 몸을 조각조각 분할하고 다시 재조합한 분절의 결과임을 폭로함으로써 미디어가 사실임직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하는 조작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노란 벽지>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기에 초점거리를 달리한 두 대의 카메라가 나란히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하여 서로 다른 화각의 영상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 추가된다. 카메라 사이의 각도가 좁혀짐으로써 마치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더 많은 분절이 일어나고, 그만큼 인물의 모습은 더 섬세하게 포착된다. 카메라의 병치는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운동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에 대한 유비를 심화시킨다.

공연 중 간헐적으로 무대 전면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은 <줄리 아씨>에선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전술이다. 이 기간 동안 관객은 가려진 무대를 오직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연극사를 통틀어 이토록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제4의 벽을 관객 앞에 노출시킨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고지식한 제4의 벽은 카메라가 객석 방향을 촬영하기 위함과 같은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욕실이나 계단과 같이 처음부터 오직 스크린을 통해서만 확인해야 하는 공간도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관객을 문자 그대로 벽 뒤에 배치함으로써 벽지 속 그녀가 관객에 대한 은유임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이라면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할 장난을 연출가는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까? 관객을 적잖이 성가시게 만드는 이 장치가 노리는 것은 관객이 시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이화(異化) 효과임이 분명하다. 물론 관객 앞에 벽이 가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조금만 들면 그 벽 바로 위에 걸려 있는 스크린을 통해 벽 뒤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벽은 여전히 있지만 없는 듯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이중성은 스크린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즉 무언가를 보여주는 막이면서 동시에 가리기 위한 막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스크린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이 간편함 때문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촬영자가 프레임에 담고 편집자가 취사선택한 욕망의 몽타주란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선 만들어진 영상을 사실로 곧잘 믿어버린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객의 시선이 미디어를 지배하는 권력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케이티 미첼은 일시적으로 무대를 가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의 불편과 답답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그 잠깐이 불편하다면 미디어에 완전히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의 삶 또한 진실로부터 얼마나 차단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닫힌 본무대가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으로 유도한다고 해서 관객의 시선이 그곳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일방성에 저항하고자 그 동안 열려 있던 본무대 때문에 충분히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주변의 작은 부스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의 작은 부스에서는 한 여성 배우가 내레이터로서 목소리 연기를 펼치고 있고, 우측에는 음향 효과를 만들기 위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음향 장치가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 있었던 <줄리 아씨>에서 음향 담당자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제공했는데, 그에 비해 <노란 벽지>에서는 부스가 이러한 기회를 차단시킨다. 이런 점에선 부스 또한 음향 기사와 관객 사이에 둘러쳐진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보다 정밀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부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내레이터나 음향 기사가 부스 안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공연을 그 출발선에서부터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음향 기사가 라이브로 소리를 만들고 있긴 한 걸까? 그냥 소리를 만드는 시늉만 하고, 실제 소리는 이미 녹음된 것을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현장에서 만드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저 소리가 사실은 그렇게 믿도록 조작된 소리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이 연극은 라이브 공연과 그것을 녹화하고 편집한 영상을 동시에 보게 함으로써 관극 행위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인 동시성과 현장성이 주는 쾌감이 점차 사라질 때, 그 쾌감을 이어가는 동력이 불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의 의지였음 또한 분명해 진다.

스크린 너머로

나는 위에서 일부러 ‘연극’이란 말을 골라 썼다. 왜냐하면 이 공연을 연극이라 부르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이브) 카메라의 은유는 그 비판의 대상과 수위가 더욱 강력하고 통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러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메시지는 현란한 장치 없이 그저 “가난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내용은 없이 형식에만 집착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형식이 돋보이면 내용을 문제삼고 내용이 뛰어날 땐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비평가가 갖춰야 할 객관적 시각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반연극적 편견에 맞서 연극을 옹호하면서도,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내용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1450b 17-8).  케이티 미첼의 연극은 분명히 공연이나 배우 없이는 산출될 수 없는 어떤 효과에 대한 실험이다. 만약 <노란 벽지>의 문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간단히 “스파크 노트”의 친절한 해설을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의 연극화는 그 자체가 형식의 실험이며, 연극에서 소설을 이용하는 것은 내용을 빌어 형식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적어도 소설을 전유하는 연극에서 형식에 매료되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선에서도 불만이 들려온다. 이 또한 연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조롱하는 듯한 모습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작품이 다루는 많은 문제들이 연극성에 대해 더욱 깊은 성찰로 이끌지 연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케이티 미첼의 잡종적 시도로부터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 그 어디에도 결코 침해 받아선 안 되는 경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적 연극이 혹시라도 불쾌했다면 그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연극적 영화 <도그 빌>을 보면서 느낀 쾌감과 한 쌍을 이루는 것 아닐까. 물론 기술이란 언제나 자본의 손을 놓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세한 연극이 거대한 영화와 접목되는 것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하지만 연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연극의 잠재력과 범위를 축소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벽지의 색이 하필 노란색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선 몰라도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것은 작가나 연출가 또는 축제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노란 벽지>가 2014년의 대한민국에 초대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돌발적인, 그렇지만 강력한, 의미이다. 전국이 노란 색으로 도배된 세 계절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안나에게 처방된 휴식 요법, 즉 “가만히 있기”가 결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치명적 망상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일으킨 이 19세기 처방을 고집하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찾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방법이 그 옛날 전쟁 통에 서울을 몰래 벗어난 대통령에 의해, 그리고 가라앉는 배를 빠져나가는 선장과 선원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숙청당했고, 세월호에 남아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과 학생들은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현실의 카메라와 스크린이 얼마나 투명하게 가려진 무대를 중계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60년 전에 라디오는 서울을 빠져나간 대통령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시민들의 지식과 의식이 성숙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미디어가 권력자의 욕망을 몽타주하는 기술도 교묘해졌다. 기성 매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SNS나 외신을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권력자들의 욕망이 경합하는 모습을 더 자주 만날 뿐이다. 이 연극에서 무대 전면이 통째로 덮이고 스크린만 쳐다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을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 나 혼자만의 지나친 상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SPAF에서 초청한 해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작품들을 통해 오늘 이 시점의 한국연극이 나가야 할 바를 점검하고 반성하기 위함에 있다. 지난 여름 적지 않은 연극인들도 시민의 일원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했었다. 연극인들의 참여가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 극장 밖으로 나왔던 연극인들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연극제가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극장 앞에 가로 놓인 거대한 가림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 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옳다면, 지금 스크린으로 가린 그 어떤 것도 결국은 다른 스크린을 찾아 나타나게 되어 있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한 때이다. 애도를 충분히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오백여 명의 학부모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햄릿>이라도 하고, 스크린 뒤에서 곪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이 혁명적이라면 그것은 나라를 뒤집어 엎기를 기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한 인간이 바라보는 방식과 그리하여 사유하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는 <노란 벽지>라는 밖에서 온 연극 하나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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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회 젊은비평가상 공모 관계로 게재가 늦어졌습니다. 후보작으로 거론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를 드립니다.
** 드라마인으로 젊은비평가상 공모 지원작을 보내주시면 게재해드립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이용해주세요.

2014년 9월 6일 토요일

9월의 장바구니

산책

독자 여러분 안녕하셨나요? 모니터를 앞에 두고 인사를 건네자니, 무척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7월, 8월 연재를 쉬었기 때문에 혹,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몰라(정말 아름다운 상상이군요) 인사로 시작합니다. 답답한 세상 일들은 여전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고 하늘이 높아지니 조금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공연을 검색하고 예매를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복희>, 8월 26일 ~ 9월 21일, 남산 예술 센터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복희에게 슬픔이 강요됩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펴보니, 그녀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제목처럼 복희는 슬픔을 벗어내고 즐거움을 느끼며 홀로 설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호숫가 펜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밝힐 때, 혹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탐닉하고, 소비합니다. 교통사고도, 화재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도 이야기가 자꾸만 덧입혀집니다. 사람들은 인물과 성격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강요되고, 누군가에게는 우울감, 또는 넘치는 희망이 강요됩니다. 보고 나와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산 예술 센터의 원형 무대에 구현될 호수, 복희 이야기를 넘어서서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을 기대하고 극장에 갑니다.

<위키드>, ~ 10월 5일, 샤롯데씨어터 

 

영국 여행에서 뮤지컬 관람을 빠뜨릴 수 없지요. 가난한 여행자였지만 당일 할인 찬스를 이용해서 <위키드>를 보았습니다. 극장 내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주는 것에 즐거워하고, 작품에 감동해서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위키드>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 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는 다른 작품을 보러 갔었는데, 다음 날 친구를 데리고 가서 한 번 더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한참 동안 뮤지컬 넘버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아시아 팀이 대한했을 때 한 번 더 작품을 보았는데, 그때는 처음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캐스팅으로 진행될 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 시작된 작품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꽤 놀라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작품을 찾아주나 봅니다. 추석 연휴에 제공되는 할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매했습니다.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들이 어떨지(번역은 어떨지),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은 원작과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합니다.

<노란 벽지> 9월 25일 ~ 9월 27일,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국제 공연예술제(SPAF)가 9월 25일 시작됩니다. 총 21편의 작품이 공연되는데, 다양한 해외 초청 작품 뿐 아니라 극단 목화와 연희단거리패의 작품 등 국내 초청 작품들도 기대해 볼 만 합니다. 각 작품의 공연 기간이 매우 짧고 이미 조기 예매 등이 진행된 터라 티켓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심 있는 작품에 좌석이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예매하세요! <노란 벽지>는 SPAF의 첫 작품으로, 동시대 최고 연출가로 평가되는 독일의 케이티 미첼의 연출작입니다. 벽지 속에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믿는 주인공은 어떻게 될까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 분)같군요!)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방식이 그녀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범죄 이후에 오는 것들, <크라임(Zbrodnia)>

by 서유미

크라임 Zbrodnia (The Crime)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 이벨리나 마르치니약  Ewelina Marciniak
단체 / 떼아트르 폴스키 비엘스코-비야와 Teatr Polski Bielsko-Biała

“입장은 공연 시작 5분 전부터 가능합니다”

폴란드 연극 단체 떼아트르 폴스키의 <크라임>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해외 초청작들 중 유일하게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객석이 여러 층으로 분리되어 있고 무대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아 배우와 관객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대형 극장과는 달리, 소극장은, 특히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은 무대와 객석 사이 경계가 거의 불분명하고 객석의 높이가 비교적 고른 편이라 마치 큰 방 안에 연극을 구성하는 사람들, 즉 배우들과 관객들이 뒤섞여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적 특징을 선호했던, 이 극단의 <크라임>이라는 연극이 분명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8시 시작인 공연의 입장이 5분 전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공연 준비가 덜 되었겠거니, 했던 것은 나의 착각. 연극은 5분 전부터, 즉 관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무대의 가운데에는 마루 바닥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커다란 칠판이 걸린 벽, 오른 쪽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걸린 벽과 그 아래 황금색 해골들이 쌓여 있다. 중년의 여성과 그의 딸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마루 바닥 위를 배회한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그들은, 차례로 입장하는 관객들을 불안한 시선과 몸짓으로 마주한다. 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관객들에게 때로는 자리 안내를 하기도 하고, 빨리 착석하도록 재촉하기도 한다. 왼쪽에는 부동 자세의 한 남성이 서 있고, 오른 쪽에는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남성이 관객인 마냥 앉아 있다. 무대 위에 이미 현존하는 배우들, 그리고 불안하고 그로테스크한 음악과 조명은 관객들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면서, 연극 <크라임>은 공연 시작 5분 전, 이미 시작되었다.

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Sfumato: Blurring of Borders

by Hakyung Sim


          The month of October was full of treats for theatergoers in Seoul. Along with the usual domestic performances, works of foreign directors and companies were brought to local stages by festivals such as SPAF (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and SIDance (Seoul International Dance Festival). Though I’m not dance-savvy at all, the array of Western contemporary dance performances interested me.

          Above all, Sfumato, a work presented at SPAF by French choreographer Rachid Ouramdane and his company L’A, appealed with its slogan: “a sociopolitical dance-documentary about climate refugees”. It was introduced that Ouramdane's trip to Vietnam, where he witnessed refugees from a tornado, had inspired him. Sure, the widely anticipated use of water on stage was another appealing point. Seeing several productions recently with water on stage, however, had made “water” less sensational for me; I rather focused on how it was used, or what effects it gave on the overall experience.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스즈키 다다시 <리어왕>

by 최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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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스즈키 메소드 워크샵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무엇을 위함인지도 잘 모르면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아래로 이동시키는(grounding) 낮은 자세, 상하좌우 흔들림 없이 걷는 연습 등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이런 훈련이 실제 공연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었고, 워크샵 진행자들의 스즈키 메소드와 공연에 대한 열광어린 찬사를 보며 호기심이 더욱 커졌었다. 그 후 이번에 처음으로 스즈키 다다시 연출의 공연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오래 마음에 담아둔 호기심에 기대가 컸는데 나와 비슷한 기대를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는지, 공연 시작 전부터 객석의 분위기는 조용히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공연 시작 전 암전 상황에서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는 해프닝(!? 이전에는 공연 시작 할 때부터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까지 벌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흔들림 없었고,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하기 위해 몸 전체를 의식하고 통제하고 있을 배우들을 보며 그들이 자신의 몸 전체로 뻗치고 있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