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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8일 화요일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실컷 웃지 못한 나

By 산책

(* 줄거리와 결말이 노출됩니다.)

매표 직원까지도 배우처럼 분장을 하고 관객들을 맞는다. 그러니까 아래 사진처럼 색색의 옷을 입고 배시시 웃으며 “별도 프로그램은 없고요, 휴대 전화는 꺼주세요.”라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이다.


극단의 제안인지, 두산 아트 센터의 시도인지 모를 그 누군가의 세심한 준비에 고마웠다. 극장에 들어 가기 전 배우들의 모습을 미리보기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매표하는 순간까지 공연의 일부로 만들어 준 기분이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기이하게도(?) 한 무리의 남자 관객들이 있었는데, 단체 관람을 온 모양이었다. 극장 안에서 이렇게 많은 한 그룹의 남자 관객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묘하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웃으러 온 관객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 작품을 예매할 때 나는,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속 시원히 웃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삐뚤삐뚤한 벽과 문, 노랑, 보라, 분홍, 연두, 파랑 등 과도한(?) 색을 칠하고 입은 배우들은 마치 미술 작품처럼 “보는” 재미를 주었고, 남편과 몰래 여행을 간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번호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 사람씩 지우거나 (결국 그 여자를 찾아 낸다) 시체를 참치 안에 넣는 (경관도 속일 만큼 그럴 듯 하다) 기상천외한 해결책들도 물론 재미있었다. 시체를 처리하느라 바다에 버린 참치가 발견되면서 참치가 사람을 공격한 것으로 오인되고, 참치주의보가 내렸다는 사실도 우습다. 또한 이 소식을 전해주는 얀커 순경은 극 내내 관객을 웃기기 위해 등장한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말장난이나 그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태도, 아니 무엇보다 기름을 발라 머리를 넘긴 그의 모습 자체가 웃음을 유발한다.

이렇게 재미있고 우스운 점들이 많은데, 나는 왜 실컷 웃지 못했을까. 나는 순수하게 웃음을 터뜨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것은 연극을 좋아하는 내가 연극을 공부하면서 감수해야 하는 십자가일지 모른다. 손뼉까지 치며, 그야말로 포복절도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을 부러워하며, 어떻게 저만큼 웃을 수 있지 궁금했다. 이렇게 생각은 생각을 낳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를 반추하면서 나는 내가 앉은 그 자리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 있었다.



요한나는 남편의 친구로부터 “냉동참치”같다는, “녹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며, 시간을 들여 녹여봐야 맛도 없다”는 자신에 대한 남편의 평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과 여행을 간 여자는 바로 자신의 동생이다.

요한나가 처음부터 남편을 죽이려 했다면 괜찮았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전생 때문이라며, 독을 탄 와인을 마시고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열려 있던 마개를 닫아주고, 차갑게 마실 수 있도록 냉장 보관 해 준 마리사의 배려로 요한나는 살고, 토마스는 죽는다. 이렇게 내가 어쩌지 못하는 삶의 우발성은 때때로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끌어 버린다. 이러한 점에서 삶은 경이롭지만 한편 두려운 것일 테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두려운, 산 사람을 절대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이다. 그러나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죽음은 너무 가볍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고, 속을 파낸 참치 안에 그 시신을 넣어 바다에 버렸다. 남은 참치는 스테이크로 즐겼다. 그녀들은 "유쾌하게 사건을 간단히 요약"했으며, "통쾌하게 고민을 역전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이 잘못을 저지른 토마스를 깔끔히 해결한 것을 보고 통쾌하기 보다는 깔깔 웃으며 참치를 먹으러 포르투갈에 가자는 그녀들의 모습에 끔찍함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웃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다. 이 역시 오로지 내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은 웃음이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웃음이란, 실제적이거나 또는 상상적이거나 같이 웃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 말하자면 공범의식 같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극장에서 관객의 웃음은 장내가 만원일수록 더 커진다는 것은 누누이 이야기된 바가 아닌가? 다른 한편, 희극적 효과를 지닌 많은 것들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질 수 없으며, 결국 일정한 사회의 관습과 관념과 상호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수없이 지적된 것이 아닌가? 베르그손, <웃음>, 김진성 옮김, 종로서적, 1997.

이러한 점에서 나는 극장 안에서 소외된 한 사람이었다. 하필 내 자리는 무대에 걸린 거울에 내 얼굴이 그대로 비치는 자리였는데, 내가 너무 양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신경 쓰였다. 사람들이 깔깔 웃는 재미있는 연극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꾸며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외도, 자살, 살인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이것을 현실적인 사건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 슬프다―비현실적으로 다루고, 해결한다. 이는 관객들에게 ‘일어 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안전감을 준다(비록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런 인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이런 일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깜빡 속인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은 로비에 나와 관객들과 사진을 찍어 주는 배우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처럼 배우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외도도, 살인도 (다행히) 잊게 되는지 모르겠다.

* 김소연, "유쾌, 상쾌, 경쾌, 통쾌", <마음사전> 참조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15년을 살아 낸 <휴먼코메디>

by 산책


휴먼코메디 (c)사다리움직임연구소 2013.
출처: 코르코르디움 블로그 http://corcordium.tistory.com/

  한 해 동안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극장에 갔다. 신선하고 기지가 넘치는 공연에 감탄하고, 조금은 질투심을 느끼며 넉넉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온 적도 있고, 희곡에 감동받은 적도 있고,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있다. 괜히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가 무척 미안한 적도 있었고, (본인은 한 번 해 본적도 없으면서) 연출을 욕하고 싶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연도 물론 있었다. 모아 둔 표와 프로그램을 꺼내 보고, 깜깜한 공연장에서 뭐라도 써 보려고 끄적거렸던 노트의 기이한 문자들을 해독하면서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나름 재미있다. 연극은 책이나 영화처럼 돌려 볼 수 없고,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두 눈과 두 귀로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움직임을 다 보고 들을 수 없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순간적으로 한 장면이, 그 공연이 지나가버린다. 어떤 인상만을 남기고.

   올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연극은 지난 7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휴먼코메디>이다. 정말 신나게 웃었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다.  <휴먼코메디>는 <가족>, <냉면>, <추적> 이렇게 세 가지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은 하나 남은 아들이 배 타러 가는 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아들이 죽을 것을 예상하기나 한 듯이 갑자기 가족 사진을 찍고, 아들이 떠나는 시간을 자꾸 미루기 위해서 밥을 먹이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 중에 소소한 웃음이 만들어 진다. 두 번째 이야기인 <냉면>은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한 한 팀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노래와 안무를 외우지 못한 소위 ‘구멍’멤버가 계속해서 동작을 놓치는 모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조금 더럽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다). 마지막 <추적>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경찰청 사람들을 패러디하며 모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과 스캔들 등이 얽히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세상의 모든 그저 그런 생에게 - 문삼화 연출, <세 자매>


by 함스타


<세 자매>
연출 문삼화
공상집단 뚱딴지
2013/11/21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소극장


어느날 누군가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많이 속상한 나는 집에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심각하게 생각을 시작한다. 편견없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편견없는 세상을 위해 난 뭘 할 수 있을까 …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나 또한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마침내 생각한다. 아마 그런 세상은 오지 않겠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하고 노래하지 않고,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이 다소 불순하고 허무주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허무의 발바닥 밑에, 밟혀서 단단해져버린 희망이 있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도 없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괴로운 것은 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할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깊이 절망함에도 불구하고 깊이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체홉에서 허무주의를 읽지만, 그렇기에 나는 체홉에서 희망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