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31일 수요일

‘외로운 피’를 위한 축제: 2013 한․일 공동제작 연극 <아시아온천>

‘외로운 피’를 위한 축제: 2013 한․일 공동제작 연극 <아시아온천>

6월 11일(화)~6월 16일(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정의신 작, 손진책 연출

by 이흔정

‘어제도’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아시아의 작은 섬. 이 작은 섬 마을사람들은 언제 시작됐는지 모를 나름의 전통과 규율을 따르며 더불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평화롭고 조용한 섬에 느닷없이 외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온천수가 솟는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이다. 이로써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욕망과 가치로 부딪히고 어제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섬에 리조트 사업을 시작하려는 외지인 아유무와 카케루는 이 마을의 중심인물 대지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척박한 황무지에 사탕수수를 기르며 땅과 함께 자라난 대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대지네를 비롯한 토착민들에게 어제도는 단순한 ‘토지’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연극 아시아온천은 이런 토착민과 외지인 사이의 갈등, 전통과 돈이라는 가치의 대립구도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나 메시지자체는 그다지 신선하지도 않고, 어떤 결말을 맞을지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시아온천>을 스토리의 측면에서만 감상하는 것은 공연을 반도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 글에서 다 풀어내지 못할 많은 얘기 거리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 먼저 정의신이라는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신은 1986년, 그가 29살 청년이었을 때 <사랑스런 미디어>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중견극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희곡집은 2007년에 겨우 한국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리 익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의신의 희곡들에는 대부분 신체장애자, 게이 등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등장하고, 그는 섬세하고 따스한 필체와 유머로 그들의 삶에 격려를 보낸다. 그가 마이너리티의 삶에 초점을 두는 것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작가의 배경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배경이 그의 작품세계를 일면 편협하게 만드는 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그런 배경 때문에 그가 마이너리티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그들에게 보내는 격려가 더욱 설득력을 갖고 관객의 가슴을 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흑백영화에서 과부의 피를 만나다: 영화 <열녀문 Bound By Chastity Rule, 1962>

by 김재영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은희 특별전(2013년 6월 13일 ~ 30일, 시네마테크 KOFA 1관)’을 통해 영화배우 최은희의 영화 25편을 상영하였다. 그녀는 1947년 <새로운 맹서>라는 영화로 데뷔하여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1978년 북한으로 납치되어 남편인 영화감독 신상옥과 북한에서 <불가사리>, <소금> 등의 영화를 제작한 후, 198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녀의 굴곡 많은 삶의 흔적은, 마치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영화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시대까지 격변하는 시대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그 속에서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2년 개봉하여 제2회 대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열녀문(감독 신상옥)> 역시 과부의 정절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과 여성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을 통해 여성의 행복한 삶은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작품은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도시에서부터 농촌으로 빠르게 개화가 진행되고 있던 1920년 무렵, 어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평생 과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양반집 아씨(최은희 역)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아씨의 시할머니(한은진 역)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는다. 시할머니는 아씨에게 ‘신불사이군 여불사이부(臣不事二君 女不事二夫) 즉,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며, 외부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를 은장도로 찌르며 마음을 다스리라고 가르치는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이 집안의 머슴인 성칠(신영균 역)은 아씨를 연모하고 있는데, 그는 여성이 자신의 사랑과 욕망에 충실해야 하고,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결국 아씨는 성칠과의 동침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지만,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시아버지의 반대에 막혀 재가하지 못하고 성칠과 아이를 다른 마을로 떠나보낸다.

이 영화에서 아씨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그녀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속하고, 대상화한다.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등 양반 가문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아씨의 고독한 인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녀의 고통과 희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을의 남성들은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새참을 이고 논을 걸어가는 아씨에게 홀아비인 남성이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알고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지’라는 노래를 읊조리며 수작을 부린다. 아씨가 새참을 성칠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숲길에서 다른 남성은 아씨를 강간하려고 하다가 성칠에게 맞고 도망간다. 시동생은 비교적 아씨를 잘 따르고 위하지만, 상사병에 걸린 소년처럼 형수를 사모하는데, 형수가 성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배신감에 그녀를 괴롭히고, 모욕하려고 든다. 성칠은 그녀를 가장 아끼고 그녀의 삶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이지만, 그 역시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나긴 가뭄으로 논이 바짝바짝 말라가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환희에 젖은 채 아씨를 부둥켜 안게 되고, 이를 거부하며 뿌리치는 아씨를 쫓아가 반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는다.


2013년 7월 9일 화요일

‘문명’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노다 히데키의 “THE BEE"

by 시뫄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1)

보통의 도덕관념을 가진 인간은 죄의식, 혹은 양심의 가책을 갖게 마련이다. 그 양심의 가책은 우리로 하여금 소위 비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를 억제하게 한다. 우리가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문명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은 인간이 결국 사회와 평화의 구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압력 때문에 빠져드는 심각한 병이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적인 과거를 강제로 떼어놓은 결과이며,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나 생존조건으로 뛰어들어 추락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한 희생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2)는 다시 말하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해낸 우리의 문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노다 히데키 작, 연출의 <THE BEE>3)에서는 종잇장처럼 구겨져버린다. 잔인함과 폭력성만 남은 이 폐허에서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문명이란 것은 새빨간 거짓말과 같다.

일본의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극에서, 평범한 회사원인 이도는 귀갓길에 경찰들과 기자들이 자신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탈옥범인 오고로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건의 내막을 알아보니 스트리퍼로 일하는 오고로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는 것에 분노한 오고로는 탈옥 후 아내를 만나려 하지만 거부당하고, 무고한 이도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자신의 가족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도는 오고로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오고로와 만나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찰과 자극적인 스토리에 몰려드는 언론에 분노하여 자신도 오고로의 가족을 인질로 잡게 된다. 시종일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예의 바르고 신중한 모습이던 이도는 순식간에 단호한 인질범의 모습을 나타내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어린아이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리로 시작되었던 이도의 폭력은 어느새 그 순환에 선행하게 되고 스스로의 악순환을 만든다. 결국 서로의 가족을 먼저 풀어줄 것을 두고 오고로와 대치중이던 이도가 먼저 상대의 아이를 해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발화시킨다. 즉 이도의 폭력은 더 이상 자신에게 소중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게 되며, 결국에는 길 잃은 그의 폭력성이 이도 바로 자신까지도 대상으로 삼게 된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홍어와 <짬뽕>

by 에스티

2001년 9월 11일 CNN을 통해 중계된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 장면은 이후 미국 거대 자본 영화에서 반복되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탑이 무너질 때나 <아바타>에서 판도라의 홈트리가 미사일 공격으로 쓰러질 때 우리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저택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스타트랙 다크니스>에서 거대한 우주비행선이 맨하탄에 불시착하면서 고층 건물들을 무참히 파괴할 때 이 장면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앵글을 통해 상호 유사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 상업 영화들에서 이 장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리셰일지언정,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환기됨으로써 악당에 대한 반감과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 일치감이 쉽게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예리한 독자의 눈에는 이 글이 현란한 시각 효과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음이 발각되었으리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문학이나 영상으로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9‧11에 버금가는 사건은 아마도 5‧18일 것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만 하더라도 <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 <화려한 휴가> 등의 작품들이 오월의 광주를 그렸고, 이런 시도는 2000년 후반에 들어 <스카우트>나 <수퍼맨이었던 사나이>, 그리고 <26년>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판에서는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윤정환 작/연출의 <짬뽕>이 지난 10년간 공연되어 왔고, 정경진이 쓰고 고선웅이 연출한 <푸르른 날에>도 세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여기서 이들 작품을 따로 검토하거나 그 우열을 가릴 마음은 없다. 이 작품들 모두 국가에 의해 희생된 젊은 청춘을 애도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에 주목하면서도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연극적 재미를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나 간접적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광주는 결코 단순한 볼거리에 머물지 않는 무게로 다가온다. 이 두 작품의 미덕이기도 한 웃음은 이내 감정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갈 준비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독한 면이 있다. 또한, 장신부, 신작로, 그리고 오민호/여산 같은 피해자들이,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나옴으로써 영혼은 죽어버린”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그후로도 고통과 자기 학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관객들의 양심의 문을 자꾸만 불편하게 두드린다. 물론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그날의 기억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면 그 또한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빨강’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이 작품들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카르멘

by 산책

포스터이미지


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지, 알려주세요. 

음악극 <카르멘>을 보고 왔다. <카르멘>은 극단 벼랑끝날다의 작품으로 2010년 초연된 이후 상도 받고, 평이 꽤 좋은 작품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연주자들이 먼저 입장해서 <하바네라>를 연주하면서 기대감을 높였고, 공연 직전에 이벤트를 해서 관객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퀴즈를 내고 선물을 주는 이벤트는 소극장 공연에서 많이 봐 오던 것이지만, 의자 아래 장미꽃을 숨겨 놓고 그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카르멘 와인을 주는 이벤트는 꽤 신선했던 것 같다.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은 나는 집에 가다가 저 와인을 사 가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공연은 극중극중극의 다소 복잡한 구조이다. 카페 주인이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읽어 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카페주인은 『카르멘』의 극중 화자, 죠반니가 된다. 돈 호세와 카르멘의 이야기는 죠반니가 돈 호세를 만나 듣게 된 이야기인 것이다. 카페 주인 박준석이 책을 펴 읽어 내려 가다가 옷을 바꾸어 입고, 안경을 쓰고, 모든 준비를 마치면, 또박또박 읽어 주던 글은 이제 죠반니의 말이 된다. 글에서 말로, 카페 주인에서 극중 화자로 변모하는 장면은 매우 신선했다. 박준석이 읽던 책은 나비처럼 날아가고, 카페는 스페인의 한 도시가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관객들은 죠반니의 안내에 따라 돈 호세와 카르멘을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돈 호세와 카르멘이 처음 등장할 때,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에게 마치 네 마음 속의 돈 호세와 카르멘을 불러 내라는 것처럼, 결국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은 관객 자신의 눈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나의 경우 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드러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