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5일 화요일

'경계'에 대하여: 2020 SPAF <보더라인>,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 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갈라>

조혜인, 퍼포먼스 매거진 <PERSIM> 작가

[알림]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 매거진<PERSIM>에 선 수록된 글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공연 사진 및 부가 설명은 필자의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hichotheatre/31 - 편집부

 



올해 2020년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이하: SPAF)가 2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올해 라인업은 SPAF 20주년을 맞이한만큼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의 여파로 해외초청작은 단 한 작품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예술제 최초로 비대면 생중계를 시작했다. 극장 안에서 발생하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물리적 현존이 비대면이라는 경계로 해체된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TV와 후원제도를 통해 아티스트를 응원하며 집에서 편안히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어 SPAF에 대한 접근장벽이 낮아졌다. 후원을 통해 집으로 배송된 리워드를 받고 공연을 기념할 수도 있었다. 필자가 본 작품은 아래와 같다. 상영일 순서대로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연극), 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무용), 쇼빌컴퍼니 <딸에 대하여>(연극), 안은미컴퍼니 <나는 스무살입니다>(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한 해외초청작인 제롬 벨 <갈라>(무용)이다. 본 리뷰에서는 '경계'라는 키워드로 이 작품들을 읽어보고자 한다.

 

1. NN들을 위하여 -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

 

<보더라인>은 한국의 공동창작 실험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와 독일의 레지덴츠테아터가 협력하여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공연이었지만 코로나의 위험성 앞에 서울-뮌헨 8,000km를 아우르는 기술 도전이 되어버렸다.
 
레지덴츠테아터(Residenztheater)는 뮌헨을 기반으로 하여 현지인들에게는 'The Resi'라고 불리기도 하는 바이에른 지역의 주립극단이며, 이 극단이 상주하는 극장의 이름이기도 하다. 레지덴츠테아터는 국장 Andreas Beck부터 장애인 대표 Claus Baier 까지 극장 내 다양한 협력 앙상블을 이루며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보더라인>에는 레지덴츠테아터 소속 배우이자 동베를린 출신인 '플로리안 야르(Florian Jahr)'가 출연하여 크리에이티브 VaQi의  배소현, 장성익, 나경민, 우범진 배우와 함께 한국-독일 양국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공연은 '탈북인 인터뷰'로 시작된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할 때 비행기값이 15,000$라는 이야기, 통일은 이념싸움이란 이야기, 문제나 비용만 따진다면 통일 할 수 없다는 이야기, 여성 탈북자 '그레이스'의 등장을 거치며 야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순간을 회상한다. 공연은 또한 비대면 형식을 적극 활용해 연극무대와 영상매체를 유연하게 연결시킨다. '김현석(가명) 목사 인터뷰' 장면에서는 화면을 분할하여 왼편에는 뮌헨의 실제 무대를 보여주고, 오른편에는 영상을 송출한다. 이때, 목사를 통해 우리는 상기된다.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탈북을 선택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한편으론 학업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임을. 
 
그렇게 인트로에 삽입된 인터뷰가 끝나면 무대 위에 텐트가 나타나며 난민 이슈로 이어진다. 야르는 난민을 바라보는 독일 현지인들의 의식수준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나 서독이 흡수통일을 이루면서 많은 서독인들은 자신이 동독인들 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조상들도 경계를 너머온 난민이었단걸 모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동시대에 경계를 가로질러온 사람도 꿈이 있는 사람이란 걸 자각조차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영상 속에 등장한 히잡 쓴 여성은 말한다.  "Ich möchte Ärztin werden(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다시 공연은 영상화되며 철조망(Border line)을 따라 걷는 인물의 뒷모습이 잡힌다. 이어 화면이 두 개로 분할되어 오른쪽 화면에는 독일 극장상황이 보여진다. 텐트 앞 바닥에 놓인 한국의 산 그림이 영상에 담긴다. 그 위에 철조망 파편들이 놓여진다. 이어서 DMZ 티셔츠, 코로나 검역 확인증, 접근금지 푯말, Ankunft(도착) 서류가 보인다. 이어서 오스트리아를 볼 수 있는 '베그샤이드(Wegscheid)'가 소개된다. 바이에른 남동부에 위치한 베그샤이드를 통해 "우리는 유럽에 경계가 있다는 걸 잊었다"까지 그 사유가 확장된다.
 
경계를 따라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탈북인들의 모습이 쇼트에 잡히고, 어린시절 야르의 사진들이 나열되며 다시 독일 극장으로 돌아온다. 야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점을 회상한다. 기뻐 경직된 할머니의 몸, 처음으로 서독에 간 날, 아버지와 함께 동/서독 경계를 넘나들던 기억, 경계를 사이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뜀뛰던 기억, 성 니콜라우스 축일 등 그날 이후의 생생한 감각들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보더라인>에서는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객석을 위치시키고 한가운데 펼쳐놓은 텐트가 마치 우리나라의 판문점을 상기시킨다. 마주보던 건너편의 관객들이 언제든 텐트로 난입해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공연이라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무대를 경계로 서로를 마주 할 수밖에 없다. 공연은 계속 이어진다. 여성 탈북인 '그레이스'에 대한 인터뷰가 펼져진다. 남자친구와 솔직한 대화가 불가능하고, 탈북인이란 걸 감추고 거짓말 하고 살아야 하는 삶과, 동시에 두 개의 삶(탈북인으로서의 정체성, 남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아야하는 것,  남자친구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생각하며 관계에 대해 갈등을 이야기한다. 
 
영상은 다시 대한민국 국경의 바닷가로 이동되고, 철조망을 따라 걷는 야르의 모습이 잡힌다. 그는 철조망을 만져보기도 하며 길을 따라 유유히 걷는다. 자가격리에 대한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 코로나를 무릅쓰고 한국에 공연 스케줄차 왔지만 편의점 도시락과 생수로 끼니를 이어가는 야르의 셀프 영상이 큰 리얼리티를 창출한다. 코로나로 인한 세상과 세상 간의 경계(Border)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Hostility / Worriness)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야르는 말한다. "난 이미 이곳에 왔는데 도착하지 않은 기분이다."
 
이어서 '리허설 Probe' 장면에서는 나경민 배우와 야르가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더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8,000km씩 떨어진 삶에서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그들은 '배우'라는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에 대해 공감 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흉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디션 볼 때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도 공유한다. 그러나 총을 쏴본 경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극명히 다른 입장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이 장면에서 나경민 배우의 의상이 인상적이다. 그는 평범한 옷을 입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티셔츠를 입었다. Seoul marginal theatre festival, 그곳은 경계와 변두리를 사유하는 실험적인 공연작업의 장이다. 초록의 추상경계가 프린트된 의상을 입음으로써 <보더라인>의 감각이 더욱더 살아났다. 또한 "고성 갔을 때 남북한의 휴전선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어?"라는 질문에 이어 나경민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낯선 사람에 대해 환대와 경계를 동시에 가진다는 그는 타자, 이방인, 탈북민들을 환대해야겠다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멀어진 가족과 전화 한통화 망설이는 자신을 자각한다고 담담히 말한다. "지금은 남북한의 경계보다 그게 더 높은 경계같아." 국가적 차원까지 생각하기 이전에 누구나 마음과 관계 속의 경계가 있다. 필자는 나경민 배우의 이 대사에 크게 공감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 많은 경계들이 있다. 그 경계는 각자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가족, 누구는 학업, 누구는 직장 등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경계 즉, 삶에서는 결코 내 노력만으로 극복 할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이처럼 국가적 차원의 경계(Border)에 대한 이야기에서 개인적 차원의 경계까지 관객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지점이 <보더라인>의 묘미다.
 
현철(탈북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동사 '그리워하다=그리다'가 같은 어원임을 알려준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는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림으로써 그리워했다고 한다. 야르는 '안전한 공간'에 대해 질문한다. 현철은 안정감을 느낄 때마다 괴롭다는 양가감정을 느낀다고 대답한다.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들을 바르고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하는 환경 즉, 대한민국 사회 저변에 깔린 환경에 대해 말하며 "이런 환경이 나를 떠나고 싶게 해요."라고 한다. 떠나고 싶은 환경에서 떠나왔더니 또 떠나고 싶게 만드는 환경이 기다리는 난민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변해주는 장면이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탈북인의 심리에 대해서도 고백한다. 그는 "행복하신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Sometimes happy, usually unhappy."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갑자기 장면이 중단되고  탈북인을 연기한 배우 우범진으로 돌아온다. 그는 탈북인 연기를 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에 대해 '우리가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데 전념했음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은 소수자, 난민, 탈북인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강조하지만 우범진은 배우로서 그 반대의 전략을 취하면서 그들만이 가진 고유한 서사를 드러내기에 힘썼다. 이는 여성이 가진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평등에 가닿으려하는 페미니즘의 한 전략과도 흡사하다. 
 
<보더라인>에서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국경에 대해 독일과 한국의 큰 차이가 무엇일까? 바로 한국인들은 '합법적'으로 국경을 걸어서 넘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박탈된 가능성, 넘을 수 있다는 의지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불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NN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장면이 영상으로 전환되며 탈북인 출신 박사(장성익 배우)가 등장한다. 그는 기계로 돌 표면을 갈고 있다. 한편 뮌헨의 무대에는 야르가 큰 베낭을 매고 등장한다. 그는 베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맞은편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상을 응시한다. 돌에는 NN이라고 새겨져있다. "아메그 하산, 아메그 오스만 ..." 박사는 중동의 이름들을 부르고, 야르는 가방에서 돌을 하나씩 꺼낸다.
 
2020년 9월 26일 서울로 영상은 바뀐다. 화면 안에는 배우 배소현이 있다. 그녀는 독일어 기초반에 들어간다. 독일어 발음을 연습한다. 난민 현장의 Freiheit(자유)를 외치는 독일어에는 이동의 자유, 평등, 불평등, 동등한 권리가 있지만 그 언어는 난민 활동가들의 언어와 부딪힘을 일깨워준다. 말은 자유롭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Doch, ich bin illegal(그렇지만, 나는 불법입니다)." 배소현은 난민 당사자 활동가인 'Mimi'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Mimi는 케냐 출신이며 2014년 36살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배소현은 2020년 현재 36살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았을 배소현의 내면이 36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난다. Mimi는 활동가이기 이전에 그저 음향엔지니어라는 꿈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또한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이곳은 하나의 행성, 하나의 세계, 하나의 사랑, 하나의 혈육, 차별의 근거는 찾을 수 없네요."
 
극장 무대 위의 스크린에는 배소현의 모습이 영사되고, 바닥에는 돌더미들이 쌓인 채 가녀린 스팟 조명을 받고있다. 언제쯤 우리는 다 같이 어우러져 살 수 있을까? 영상이 전환된다. 한국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텐트 앞에서 우쿨렐레를 치며 모닥불도 피어오르니 캠프파이어 분위기가 난다. 박사는 돌덩이에 계속해서 NN을 새긴다. No Name, 지중해에 빠져죽은 이들의 이름이다.
 
"넌 어디서 태어났니?" "넌 무엇을 두려워하니?" "경계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니?" 나경민은 어머니께 쓴 편지를 읽는다. 이것은 바로 삶이라는 세월 가운데 만들어진 경계를 넘기 위한 용기다. 제 4의 벽을 사이에 두고 배우와 관객으로 만났던 모자 관계를 허물고 비대면의 시대에서 어떻게 아들을 만나고 계실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경민은 작은 용기를 낸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비록 자기 이야기이며 공연이란 허구일지라도 라이브 스트리밍의 시대에서 얼굴도 모를 관객들에게 어머니를 위한 편지를 읽는 행위는 결코 작은 용기가 아니다.
 
다시 질문한다. 점점 질문들의 범위가 국가적 차원이라기보다는 보다 사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고향이라는 단어의 의미?" "너를 다른 사람과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오롯이 너로서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질문 후 우쿨렐레 연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어두운 밤 아래의 호박색 빛 터널이 등장하고, 터널 안을 걷는 인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보더라인>의 경계선 걷기에서는 뒷모습이 자주 연출되었다. 쓸쓸하게 긴 길을 얼굴 없이 걷는 그 모습들, 동그란 지구에서 지중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NN들을 상기시킨다. No Name, 이름 없는 그들은 사뭇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해방된 관객』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서술과 맞닿는다.
 
우리가 화면에서 고통 받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보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름 없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우리가 그것들에 보낸 시선을 우리에게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말의 대상이 될 뿐 스스로는 말을 갖지 않은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중략) 이 이미지들에 고유한 정치는 아무나 보고 말할 수는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해방된 관객』, 137~138 면.

 
이름없는 신체들 요컨대, 용납 될 수 없는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말 할 수 없는 NN들에 대하여 <보더라인>은 그 말 할 수 없음의 위치를 전복시키고자 한다. 끊임없이 거부되고 그저 말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돌에 새김으로써 그 존재가 다시금 각인된다.
 
다시 서울의 어느 카페, 그레이스가 등장한다. "내가 그냥 나라고 말하는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이것은 인터뷰어에게 하는 질문같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유학 생활 때 지은 이름인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레이스일 때 좀 더 외향적이고, 쿨하고, 시크한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태어난게 죄도 아니고 나는 '나'라기보다는 언제나 남들에게는 '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보더라인, 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왔음에도 결코 넘지 못하는 또 다른 편견이라는 보더라인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곧이어 환대(Hospitality)에 대한 사유가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저도 누군가를 환영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환대란 주인이 손님에게 행하는 일종의 권력구조가 작용하는 행위라는 점을 그레이스는 꼬집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은 언제나 '탈북인'으로서 한국에서 환대받고 베품받는 존재였지 누군가를 진정으로 환대할 수 있는 환대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보더라인>에서 가장 눈 여겨보아야 할 점은 국가, 분단, 난민 등의 사회적 차원부터 개인적 차원으로 질문이 이동성한다는 점이다. "하루의 몇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가?" "동독 출신인게 자랑스럽니?" "그 어떤 곳도 내 고향이 되어주지 못했어." 그러면서 야르가 베그샤이드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뜀뛰기 했던 날을 현재로 복귀시킨다. 한국 배우들 또한 경계 뜀뛰기를 한다. 한국-뮌헨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유롭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넘고 야르는 잠시 멈춰서 한국의 영상을 바라보며 퇴장한다. 영상 속에서 야르가 등장한다. 영상 속 공간은 청계광장으로 확장된다. 시민들이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잠수교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배우들은 뜀뛰기를 해보고, 북한과의 경계가 합성되어 뜀뛰기 해보고, 다시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한강다리 위에서도 뛰어본다.  뜀을 멈추며 모든 배우들은 제자리에 선다. 거친 심호흡이 전달된다. 그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보더라인>은 막을 내린다. 마치 이 공연과 함께한 모든 NN들을 응시하는 듯하다. 

 

2. 비대면 시대에서 신체를 감각하기 - 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제19회 서울변방연극제(2019)의 참가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흰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있고 퍼포머들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려놓은 채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다. ‘음- 음- 음- 음-' 반복되는 소리에 맞춰 발로 그 리듬을 감각하며 공연은 시작된다. 그들은 코를 내민 채 킁킁거리며 냄새를 감각하기도 하고, 자신의 귓볼을 건드리며 귀의 라인을 감각하기도하며, '휘이- 휘이 휘이 휘익' 하는 소리 등에 맞춰 신체를 변화시킨다. 공연의 끝자락에서는 퍼포머들이 웃으며 퇴장하고 빈 의자들만이 남는다. 퍼포머들의 느낌을 생각해줄 수많은 빈자리들이 가상 너머로 채워지며 블랙미러 앞에 남아있는 '나'라는 감각의 전염체를 마주한다. 이러한 신체감각적 실험은 올해 SPAF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작년에 선보였던 것과 어떤 지점이 달라졌을까?
 
원형으로 빙 둘러진 접이의자에 퍼포머와 관객이 뒤섞여 앉아있었던 변방연극제와 달리, 이번 2020 SPAF에서는 관객과의 공동현존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되었다. 과연 비대면을 통해 관객이 실재하는 퍼포머의 몸을 느낄 수 있을까? 역으로 퍼포머가 실재하는 관객의 몸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비대면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을까? 비대면으로 인해 이번 SPAF에서 가장 아쉬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공연은 진행되어야 한다. 비대면의 겹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느꼈는가를 소통하는 것이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피드백이 될 것 같다. 또한 관객과의 신체적 공동현존이 없이 세 퍼포머들의 상호작용과 미니멀한 무대가 주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겠다. 관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아래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관객은 객석의 안전지대 속에서 관찰자의 역할만을 수행할 듯하지만, 퍼포먼스의 직간접적 자극의 대상이 됨에 따라 그들 역시 감각적, 심리적, 신체적 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비록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지 않지만,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에서 관객은 객석과 무대가 구분되지 않는 원형의 공간에서 퍼포머를 포함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시선을 교환하고 때마다 반응하고 그래서 다른 반응을 유발하는 유동적 존재로서 공연의 또 다른 동력의 지점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퍼포머에게나 관객에게나 수행성은 익숙하고 낯선 몸의 교차점이 된다." 출처: https://indienbob.tistory.com/1141?category=226688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유동적 존재로서의 관객은 퍼포먼스라는 사건 속에서 참여―비록 그 참여의 정도에 상관없이―에 가담하고 감응함으로써 또다른 수행적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공동의 신체감각을 형성하려는 실험에 비대면이라는 장벽이 생김으로써 실험의 포커스가 어디로 향해야할지 거대한 물음을 남기게 된다. 비록 물리적 공동현존이 배제되었지만 펜데믹 시대에서 스마트폰, PC, 태블릿 기기가 발생시키는 전자의 향연을 통해 어떻게 퍼포머의 신체를 감각해야하는지 또한 공동현존의 개념을 미디어의 영역까지 확장할 이론의 필요성을 제고하고, 그 감상 방식―극장이라는 같은 세계가 아닌 전자세계라는 경계를 거친 신체를 감각하기―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예견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지금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고, 답을 찾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퍼포먼스의 지평이 변화될지 미지수지만 말이다.

 

3. 세대간의 이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 - 쇼빌컴퍼니 <딸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는 기성세대로 대변되는 '엄마'가 딸 '그린'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엄마는 부디 딸이 평범하게,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린은 엄마의 바람을 쉬이 수용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평범하게 보일 수 없는 성적지향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아닌 소중한 엄마(가족)에게 만큼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린, 그리고 엄마의 집에 돈을 내며 동거를 하기 시작한 그린의 동성연인 '레인'은 엄마에게 존재를 거부당할지라도 자신이 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타인의 정죄어린 잣대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 만큼은 해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시간강사로 근무하는 그린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내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해고까지 당한다. 그녀는 레인과 함께 불의한 세상 속에서 꿋꿋하게 부당함을 외치고 자신의 일과 삶을 지키려고 시위까지한다. 그러나 우연히 그 모습을 엄마가 보게되고, 엄마는 조용하게 넘어가는 삶,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라며 절절하게 딸을 위한 마음으로 애원해보지만 서로의 인생에서 절대 이해 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또 한명의 이해 되기 힘든 삶의 방식을 가진 인물이 극 중에 존재한다. 바로 치매로 인해 노인요양병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 '젠'이다. 한때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였던 ‘젠’은 이제 치매로인해 자신이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에게 젊은 남성이 와서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그는 결국 극복 될 수 없는 불통으로 인해 인터뷰를 포기한다. 여기서 남성 인터뷰어는 '일반인'으로 대변된다. 성인, 남성, 직장인은 인간 중 가장 '보편'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가? 보편으로서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고 살아가는 그와는 달리 '젠'은 죽음을 앞둔 여성으로서 잊혀지고, 지워지기 쉬운 누군가에겐 '불편'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다.
 
'젠'을 통해 떠오르는 필자의 사담을 나누고싶다. 누구나 길거리를 걷다가 요양병원 근처를 지나가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요양병원 안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모습은 다른 건물과 다름없지만, 그 안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내 세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없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들은 노년이든 청년이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고, 인식되었고, 또는 가정과 직장이 있었고 분명 자기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 나이가 들고 병이 들수록 가정이 아닌 다른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야되고 병원이라는 다른 공간으로 가서 '생명력 있는' 사람들과 격리되게끔 한다. 사라지게 한다. 오로지 그들에 대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늙음, 병 그리고 병상에 붙여진 이름 세 글자 뿐일 수도 있다. 필자는 외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고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죽음의 순간조차도 가족과 격리되어서 맞이해야 하고 오로지 마지막으로 고인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입관식 때였다. 필자의 경험상 요양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폴리글로브와 비닐 앞치마를 끼고 들어가 누워계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기도해드리는 일 밖에 없었다. 모르는 분이지만 인사를 건네면 그것을 인지하고 인사를 받아주는 분도 계셨다. 현실은 가족조차 매순간 곁을 지킬 수 없어 요양보호사를 고용해야하고,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병원비를 마련하기위해 밤낮으로 일 해야하는 가족 구성원이 존재함에 분명하고, 장례의 순간조차 산사람들을 위해 편리하게 요양병원 한 귀퉁이에는 장례식장까지 마련되어있는 현실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분명 죽음은 멀리 존재하는게 아니구나." "아, 결코 죽음을 지워내지 말리라."
 
세대간에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만, <딸에 대하여>에서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특정 주인공이 한 명 있는 것처럼 인물들이 그려지는 게 아니라 각자가 마치 주인공인것처럼 캐릭터들의 생명력이 두드러진다.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 삶에서 만큼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 입장이 있고 갈등 가운데 그런 입장차들을 멀리 벌려놓기도 하고 좁혀가기도 하며 이해받고싶은 욕구들이 분명 존재하는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네 명의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 상기시킨다.

 

4. 덧없는 몸짓을 덧있는 현재(現在)로  - 안은미컴퍼니 <나는 스무살입니다>

 
<나는 스무살입니다>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색채 그리고 한국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무용 퍼포먼스다. 신명나는 안은미컴퍼니만의 개성이 돋보인다. '신명'은 다른 서구의 퍼포먼스에서 발견되지 않는 한국적 정서와 매우 밀접한 감흥의 표현이다. 동시대 연극학자들은 동양연극과 특히 우리나라의 '굿'에 주목하여 '신명'과 같은 특성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한다. 신명에는 정형화되지 않고, 특정한 서사가 있다기보다는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어떠한 기(氣)가 느껴진다. 이런 신명적 특성을 가진 <나는 스무살입니다>에서는 비록 명확한 의미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SPAF 20주년을 축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SPAF의 시작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덧 없이 흘러갔을지라도 지금 여기(Here and Now) 우리의 몸짓은 덧있다. 우리의 삶은 덧있다. '덧'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 공연에서의 40분은 꽤 덧스럽게 흘러간다. <나는 스무살입니다>를 통해 SPAF의 역사를 되짚으며 현재를 소환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장면은 무대를 떠나 객석에 퍼포머들이 앉아서 마스크를 쓴 채 영상을 보고 있을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퍼포머들 마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공연에 삽입되면서 관객들은 현재에 대해 순간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극장에 가는 게 위험하므로 방에 앉아 공연을 관람해야하는 현실, 마스크의 일상화, 그럼에도 진행되는 2020 SPAF, 어떤 형식으로든 관객과 만나고 싶어하는 퍼포머들의 의지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쉴새없이 펼쳐지는 역동적인 몸짓 중간에 객석에 앉아 건네는 인사 그 '덧'같은 장면을 통해 퍼포먼스의 미래가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희망마저 들게한다. 퍼포머와 관객이 계속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소멸되지 않는 한.

 

5. 무대 위 춤추기의 조건 허물기 -  제롬 벨 <갈라>

 
<갈라>에서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위해 전문가/비전문가의 조건을 과감히 허문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갈라>  공연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내용이 중요하기보다는 무대 위에 등장한 퍼포머들의 현존으로 가득 찬 공연이기때문이다. 총 20명으로 구성된 퍼포머들은 어떤 이는 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무용수 같고, 어떤 이는 다른 영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 온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즉, '일상의 전문가'들이 퍼포머로 등장한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일상의 전문가란 전문 퍼포머가 아닌 개인의 일상을 살아온 자기 일상의 전문가를 일컫는다. 각자의 삶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살다 온 자기 인생의 퍼포머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대변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몸이 무대 위에 서게 되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표현하는 퍼포머로 거듭난다. 또한 팔, 다리를 자유롭게 가눌 수 없는 아기가 아닌 이상 의식적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 할 수 있고 스스로 사고 할 수 있는 어린이 퍼포머들의 존재 또한 돋보인다. 장애로 인해 휠체어를 운전하며 동작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단체단체' 장면에서 '나 가거든'을 선곡하며 무대 한 곳에 멈춰 세워놓은 휠체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휠체어를 벗어나 바닥을 구르기도 하며 어떠한 슬픔과 한을 창출해냈다. 또한 다른 외형으로 드러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피부색이 다른 백인과 흑인도 있고, 어쩌면, 필자와 같은 동양인이라 겉모습만으로는 국적은 구분 할 수 없지만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도 존재 할 수도 있다. 또한 육안으로는 포착 될 수 없는 개인이 가진 고유한 성적지향,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존재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갈라>에서는 개인의 고유한 몸과 그들의 기호가 드러나는 것 같은 선곡이 도드라진다. 전문가/비전문가의 영역을 해체하면서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 개인이 존재하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면서 삶/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삶과 예술의 붕괴되는 경계, 이를 감각하는 퍼포머와 관객이 함께 문지방과 같은 사이에 위치하기는 포스트모더니즘 공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바이다. <갈라>에서 가장 눈여겨본 점은 '단체단체'에서 각자 한 명씩 무대 중앙으로 나오고, 동작을 이끌며 나머지 19명의 퍼포머들이 리드 퍼포머의 동작을 따라하며 그의 동작 혹은 삶에 동화되고 가닿으려고 하는 노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문가/비전문가의 경계 뛰어넘기와 더불어 개인/개인의 삶의 경계 뛰어넘기로 나아간다.
 

이상으로 2020 SPAF 참가작 <보더라인>, <나는 당신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그리고 <갈라>에 대한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때야말로 퍼포먼스 예술을 통해 인류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겠고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극장 가기'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앞으로 어쩌면 '극장 가기'마저 하나의 사건이 되고 퍼포먼스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포먼스는 계속되어야 한다. 퍼포먼스는 작업이기 전에 사람들의 모임이다. 모임으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는 진정한 인류의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