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사라진 무엇

임승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원작 권여선
각색/연출 박해성
출연 신사랑, 황은후, 노기용, 우정원, 신지우
2017.11.23-12.03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동명 제목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적절한 신체와 음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서술 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서스펜스는 아쉽게도 사라져야 했다. 권여선의 원작은 각 소절이 서로 다른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됨으로 인해 독자가 해당 소절을 읽을 때 이번에는 누가 서술자인지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독자에게 일정한 긴장감과 능동적 참여를 허락한다.

이 두 가지는 두 형식이 가진 특성을 서로 맞바꾼 것이니 얻은 만큼 잃었고, 잃은 만큼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성에 있어서 발생한 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무대 버전에서는 이야기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이야기 하나가 생략되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공연을 보고 난 이후 소설을 통해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이야기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을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할 경우 생략은 불가피하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일야화’처럼 어떤 이야기가 길게 길게 지속되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연극은 한두 시간, 길어도 서너 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도록 신속히 핵심 사건에 접근하고  신속히 결말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소설의 연극화는 기본적으로 압축을 전제하는 작업이므로 단순히 어떤 장면이 생략되는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그냥 서재에 머무르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하지만 이번 각색에서 윤태림의 딸 실종 사건이 원작만큼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것은 소설 각색의 일상 다반사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이 문제가 작품의 제목 혹은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은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에서 왔다.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해언의 동생 다언의 입을 빌어 이 말을 다시 쓴다. 아니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신 당신이라고. 인간들이 도무지 뜻모를 고통 속에서 죽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섭리를 믿을 수 있겠냐고. 오히려 이 모든 게 당신의 무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언과 상희의 대화 속에서 신의 섭리는 부정되는 반면 시에 대한 믿음은 재확인된다. 신은 믿을 수 없지만 시는 믿자는 그들의 대화는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실종된 태림의 딸이 ‘혜은’이 되어 다언의 엄마 품에 있다는 이야기를 포함할 때와 하지 않을 때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섭리를 부정하는 말이 다언의 입에서 나올 때, 독자나 관객은 그녀의 고통을 알기에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절규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가 영아 납치 사건의 주범 혹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같을 수 없다. 이럴 경우 다언과 그녀의 어머니가 벌인 일을 우리가 한편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으로 신의 섭리를 말하는 순간 우리의 도덕 감정은 선뜻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해자가 신의 섭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정의를 실현—그것이 정의 실현이든, 복수이든, 아니면 단순히 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이든—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결정적으로 다언과 독자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신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작가의 결정적 고안인 것이다.

그런데 박해성은 다언의 결정적 행동을 삭제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가족을 잃는 불행 앞에서 한 인물이 신적 섭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만들었다. 원작의 경우 정의에 대한 갈망, 섭리에 대한 회의, 그러면서 동시에 자의적 정의의 실현 또한 대안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각색은 결론에서 온전히 섭리에 대한 불신이 제시되고, 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낭만적 전망을 내어 놓는다. 이 소설에서 섭리에 대한 고민이 영(Wm. Paul Young)의 <오두막>(The Shack)이나, 엔도 슈샤쿠(遠藤 周作)의 <침묵> 만큼 심화되지 않는 만큼 주인공이 섭리를 문제 삼는 것으로 끝맺는 각색은 결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선 공교롭게도 신과 시가 서로 경쟁한다. 주인공은 신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을 고발하면서 그 대안을 시에서 찾는다. 하지만 시를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행동 역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에 작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신적 섭리에 일정부분 의구심을 드러내지만 섭리를 부정하고 신이 아닌 시를 믿는 자(들)의 행동 역시 대안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윤태림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위선이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역겨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위선이란 신을 믿는 자 뿐만 아니라 시를 믿는 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음을 경고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연극에서의 각색은 작가가 취하고자 했던 윤리적 긴장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그로인해 시를 우상의 위치에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연극 태교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예은

  열 달 동안 태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찾다보니 태교에 좋은 예술 작품을 찾는 일이란 무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특히 태교에 좋은 연극을 찾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임신 기간 동안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20세기까지 연극사 강의를 해야 했던 터라 시대별 주요 희곡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씩 통독해야만 했는데, 시대를 불문하고 태교에 좋은 연극 작품을 찾아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복수의 심연을 거슬러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고 그 한계성 속에서 단지 신의 필요를 호소하는 아이스퀼로스, 혹은 그 한계성 속에서 철저히 인간의 파멸을 욕망하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한계성으로부터 신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피는 소포클레스에게서마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생명체와 연결 지어 줄 만한 적당한 지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저열한 욕망이나 교조적인 도덕으로 점철된 로마 비극은 물론이고 와 닿지 않는 관념들의 나열인 중세 종교극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생명체에게 전해 줄 에너지를 찾기는 힘들었고. 진실은 지금-여기의 현실에 있지 않고 인공적으로 구축된 어떠한 숭고한 체계 속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세상을 훈계하려 드는 라신의 고정관념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분법적인 가치들을 혐오하면서도 그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무시할 수 없어 작품의 배경에 넌지시 깔아 놓고는 그 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점점 미쳐가는 햄릿, 맥베스, 리어, 오셀로의 침잠으로부터도 태교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로 다른 이유와 형태로 시종 죽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죽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극복한 대신 세상을 전면적으로 훈계하려 들거나 세상을 불신해버리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들. 무엇이 되었든 그 무언가와 화해하지 못한 수많은 인간들을 창조해내며 존재를 세상과 구분 지으려 하거나 존재를 자체적으로 분열시키려 하는 현대 작가들에게서 태교의 단서를 찾기란 더욱 만무했다. 이 모든 회의감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시력을 가진 체홉에게서도, 현실과 이상 사이의 연결에 고군분투하는 내 사랑 괴테에게서조차도 태교의 수준까지를 바랄 수는 없었다.

  왜? 왜일까? 왜 연극은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들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태교란 당연히 목적성이 뚜렷한 교훈이랄지 환상적인 해피 바이러스를 좇는 동화 속 서사 같은 것으로 충족되는 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다르게 말한다면, 이제 막 탄생기에 접어든 생명체와 예술이 접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순간이란 연극에서 왜 이토록 만들어지기가 어려운가라는 질문 정도가 될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대충 이런 말이다. 연극에서는 왜 그리 ‘기쁨’이라는 걸 만나기가 힘들까? 무턱대고 향해가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 성찰적이면서도 분명하게 맺혀지는 기쁨 같은 것 말이다. 대상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파해내면서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이 따뜻하게 터져 나오거나 흔들림 없이 신뢰를 주는 아주 실제적인 기쁨 같은 것. 복잡하고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것들의 층위가 두텁게 첩첩 쌓인 어떤 고지대 위에서 비로소 터뜨릴 수 있는 희망이나 떨림 같은 것.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존재와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단지 태교의 마음만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을 이어내어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하는 인간 보편의 소망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곧 인간에게 좋은 예술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태교라는 barometer가 들어 선 이후 예술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이 글을 쓰게 된 것인데, 사실 내가 만난 연극 중에서 태교에 좋은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없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베케트와 프리엘의 작품들이 그렇다. 두 작가의 일부 작품들만큼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있다. 더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 본다면 콜린 히긴스의 작품 <해롤드 & 모드>에서 노년의 죽음을 눈앞에 둔 모드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청년 해롤드에게 “그래도 우리에겐 친구가 있잖아”라고 말하자 해롤드가 “누구요?”라고 물으니 다시 모드가 “인.류”라고 분명하게 발음하던 순간 같은 것도 내가 경험한 태교에 좋은 순간이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가 미쳐 만나본 적 없는 태교에 좋은, 아니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연극들이 무궁무진하리라 믿는다. 다만 나의 어마어마한 무지가 문제일 뿐.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우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무수히 존재할 그 작품들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항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고프다. 그 풍성한 세계와 이 빈약한 세계 사이에는 늘 거대한 간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