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1일 일요일

모호, 이런 꿈을 꾸었다.

by 에스티

"몽유병환자처럼 잠시 동안 걷는 작가의 경로를 따라온다면 아마도 꿈의 뚜렷한 혼잡함과 삶의 환경들의 다루기 불가능한 뒤섞임의 유사점을 발견할 것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꿈 연극> 작가의 말에서 (조성관, 홍재범 역, 연극과인간, p.7)

조명기, 사다리, 청소기. 본 공연이 시작되기전 오프닝 매치가 한 차례 있었다. 공연 시작 전 갑자기 뻥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기 하나가 터졌고, 램프 파편이 무대에 흩어졌다. 관객들은 깜짝 놀랐고 무대 위에서 졸면서 꿈을 이야기해주려고 기다리던 배우도 하마터면 부상을 입을 뻔 했다. 잠시 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배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남윤일 PD가 곧 설명한 것처럼, 공연이 아니라 사고였다. 공연 시작은 잠시 지연되고 무대 위엔 커다란 사다리와 청소기가 나타났다. 이런 돌발 상황이 배우나 관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측면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극장의 생얼을 구경하는 것도 관객으로선 색다른 재미다. 다들 무대의 fantasy를 기대하면서도, 환상이 제거된 민낯을 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원작인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도, 윤성호 전진모 두 작/연출가의 이전 작품도 접해본 적없고, 심지어 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부분 낯설다. 나는 첫대면에서 말을 잘하는 편은 못된다. 그럼에도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심지어 <몽십야>도 인터넷에서 찾아 급하게 읽었다. 이 공연의 제목이자 첫 대사이기도 한 "이런 꿈을 꾸었다."는 소설을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거칠게 나마 낭독 공연의 형식과 장면의 극화가 접목된 형식으로 난 받아들였는데, 솔직히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우선 이 공연은 나보다 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모델 관객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원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제인 "꿈"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졸립다면' 그건 그만큼 꿈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객석에 앉아서 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꿈 이야기인데 너무 말똥말똥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짜 꿈 같은 연극이라면 일단 졸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공연이 관객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걸 무의식이 활동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지금 내 기분은 어제밤 어떤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 갑갑해 하는 그런 심정과도 닮아 있다. 어쩌면 다가가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른지도 모르겠다. 소설 원작의 에피소드나 그걸 가져온 공연에서 서술되는 꿈들은 흥미로운 게 많았다. 다만 무대에서 서술자를 통해 꿈이 이야기될 때 그 이야기는 관객을 직접 청자로 놓고 이야기 되기 보다는 어딘가 비껴 있다. (배우가 앉아 있는 의자의 각도가 이미 45도로 틀어져 있다.) 객석에 앉은 나는 그 이야기를 훔쳐 듣게 된다. 스토리텔링을 훔쳐 듣고 있는 느낌이랄까. 화자는 육신을 입었으되 청자는 명확하지 않다. 1인칭 화자와 eye contact이 되지 않으니 (소설에서는 독자가 문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우둔한 내 머리는 이내 집중을 놓쳐 버린다. 연출이 이번 공연에서 의도한 것은 생생한 꿈이 아니라 '아스라한' 꿈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느낀 것도 이 아스라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별일없이 화려했던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에스티의 첫날밤에

약 4개월 간의 휴식이 끝나고 아트랩 공연이 재개되었다. 그 4개월 동안 대한민국은 밑바닥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다. 애써 감춰왔던 우리의 밑낯이 그야말로 낱낱이 드러난 것만 같다. 40일간 단식을 하는 사람, 그와 함께 단식을 하는 사람, 그를 대신해서 단식을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시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 이제 그만 지겹다고 하는 사람도 목소리를 높인다. 온 나라가 짜증과 분노와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다.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아니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도 미안한 상황이다보니, 주변 사람에게 연극 보러 간다고 말하기 민망할 뿐더러 나 자신도 마음이 흥하지 않는다. 관객들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영화인들에 이어 연극인들마저 광화문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영화 <명량>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속에서나마 현실의 리더쉽 부재를 보고 싶어서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단 한순간의 희극적 이완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엄숙하기에 이 상황에서 영화를 보며 즐긴다는 게 그나마 덜 미안하게 느껴져서이리라.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내 또래의 두 남자가 살아온 10여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소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친숙하다. 오늘 극장을 찾은 관객의 절반 정도는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장면 마다 최소 한번 쯤은 공감의 웃음을 이끌어 낸다. 그야말로 별일 없지만 80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대 위에서 특별한 '극적'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11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조금씩 벌어져 있다. 원하는 것을 하고 살지만 뜻한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은 기현과, 인생 재미로 사는 게 아니라며 순응하되 열심히 살고 번듯한 직장을 얻은 성우. 이 둘은 매 장면마다 옷을 바꿔 입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상대에게도 관객에게도 속내를 직접 털어놓지는 않는다. 관객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기현에게서 좋은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성우를 부러워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고, 직장도 있고 이제 가장이 되는 남부럽잖은 성우가 청춘이 마감됨을 안타까워 하는 것도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보편적 정서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줄거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텅빈 무대에서 장면마다 큐브를 통해 장소를 암시한다. 연출은 "지극히 일상적인 극을 몇 가지 큐브로만 표현한다는 것이 자칫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했는데, 기타, 노트북에 서류 더미들을 비롯하여 카스 맥주, 맛동산, 신라면과 같은 세세하고 리얼한 소품이 위험성을 다 덮어 버린다. 그러한 소품들이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데 효과적인 건 사실이지만, 한입 먹고 남겨진 신라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된다면 큐브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는 2010년에 시작해서 1999년으로 갔다가 다시 2010년에 끝을 맺는다. 각 에피소드에서는 그 해를 기억하게 하는 인물들, 물건들이 언급된다. 몇년 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되면서 2014년, 그들이 서른 넷이된 해가 덧붙여지면 어떨까?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로 그려질까? 그때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2014년 8월 5일 화요일

트리스탄 샵스 (Tristan Sharps) <공간을 깨우다: Face to Face>

이흔정의 DRAMATIC.CITY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공연(사실 워크숍 발표라고 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7월 19일 단 하루, 2회에 걸쳐 진행된 이 공연은 무료였지만 한 회에 단 40명의 관객만이 허용되었다. 주최측에 따르면 티켓 오픈 후 불과 5분 만에 신청이 마감되었고, 이번 공연을 본 사람들은 소위 ‘광클’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장소 특정적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 이라 이름 붙인 공연은 대부분 관객들이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관람하도록 되어있어 이는 불가피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다 보니 여기에는 마치 ‘한정판’이 비싼 것을 이해하라고 하듯, 애초부터 관객을 묘하게 낮은 위치(?)에 놓이게 하는 힘의 작용이 있었다.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내가 초대해줬으니까 음식이 혹시 별로라도 맛있게 먹어”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이 공연을 본 사람은 겨우 80명에 불과하다. 그 중 한 명으로서, 부족하더라도 글을 남기고 공유해야 할 책임감과 익명의 누군가가 이 글을 참조하게 될 상황에 대한 부담을 느끼며 글을 시작한다.


구서울역 로비, 사진출처 서울역284 http://seoul284.org/ 

공연의 제목처럼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와 연행자들은 ‘문화역서울284’라 개명한 구 서울역을 깨웠다. 그리고 관객 역시 이 공간을 깨우는 것에 동원되었다. 불과 5일 동안 진행된 워크숍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트리스탄 샵스가 서울역에서 발견해낸 ‘감시(surveillance)’라는 주제와 그것을 풀어낸 방식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다. 관객들은 먼저 구 서울역의 중앙홀에 모여 안내를 기다린다. 12개의 거대한 석재기둥과 돔 형식의 높은 천장을 지닌,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 안에서 관객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오래된 건물에 들어서면 새롭고 깨끗한 공간에서 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신경이 날카롭게 긴장된 이유는 곳곳에 배치된 정장차림의 요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국가정보기관이라는 명찰을 목에 건 흰 셔츠와 검정 바지의 요원들이 무작위로 관객 두 명씩을 각기 다른 방으로 안내한다.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고 인적 사항을 조사하는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직업, 나이, 시민단체 가입여부 등을 묻고 사진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관객은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과연 몇 명이 성실한 답변을 하고 몇 명이 답변을 거부했을까, 혹은 거짓말을 했을까. 누군가는 이 인터뷰를 다소 신기한 퍼포먼스의 일부로 즐겼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연이라는 거리감을 깰 정도의 불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도록 강요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감시’ 라는 주제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관객들의 공연 해석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관객들은 자유롭게(그리고 동시에 사뭇 경쟁적으로) 구서울역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왜 경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먼저 말하자면, 공연을 안내하는 주최측이 관객의 적극성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고 끊임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출가 샵스가 발견했듯이 서울역에 유난히 많은 ‘유리창’ 때문에 관객들이 서로를 계속해서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리창 밖에서, 때로는 유리로 된 천장 위에서까지 요원들이 관객을 계속 감시 혹은 관찰하고 있었다. 감시라는 주제는 사뭇 단편적이었지만, 실제로 자유롭게 관람하도록 안내 받은 후에 감시를 당하고 감시 당하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깨어나는 감각과 감정은 퍼포먼스에 직접 속해있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관객은 구서울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 초반에 인터뷰한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녹화되어 재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동시에 떨어져 있는 방이라 할지라도 이쪽 방의 모습이 카메라로 녹화되어 저쪽 방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재생되고, 공연 내내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지만 서울역 외부의 현재 상황도 모니터에 재생된다. 4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동안 모든 것이 감시되고, 기록되고, 매개되고, 재생된다.



이 같은 전체적인 주제 및 콘셉트는 흥미로웠지만 이번 공연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연행자들의 퍼포먼스가 다양하지 못했고 연행자들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층 홀에서 연행자들은 굳어버린 조각상처럼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주제나 의도와 상관없이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다소 약한 느낌이었다. 관객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조각상이 있어야 할 곳에 살아있는 사람이 올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각상보다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그리고 비슷한 동작이 지하에서 반복되고 마지막에 1층 중앙홀에서도 다시 반복되면서 긴장의 정도가 더욱 떨어졌던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어느 곳보다 정치적인 기운이 역력한 그 곳에서 연행자들의 동작은 ‘억압, 고통, 죽음’과 같은 것을 연상케 했는데, 몸의 에너지보다 그것에 부과된 의미가 강한 느낌이어서 조금은 인위적이었던 것도 같다. 아마 연행자들의 몸과 동작이 건축물에 녹아 들지 못한 것은 그 공간과 교류한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식 공연을 위한 예비적인 쇼케이스라고 하니, 정식 공연으로 발전시켰을 때에는 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서울역을 ‘깨우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 구서울역 바로 앞에는 그 날도 집회가 한창이었다. 여느 때처럼 경찰도 보였고, 노숙자는 여기 저기에 앉아있었고, 여행객과 비즈니스맨들은 바삐 움직였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0분 간 구서울역에서의 경험은 2014년의 서울역과 어딘가 모르게 매우 단절된 느낌이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공연은 구서울역을 깨워야 했다면 “왜” 깨워야 하는지를 더욱 고민했어야 되지 않을까? 또한 지금의 관객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할 것인지 조금 더 깊은 고민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장소의 역사와 기억을 깨웠다면 그것을 ‘현재’에 연결해 주어야 동시대에 그 공간을 깨운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연출가 스스로 밝혔듯이 연출가가 스스로 장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서울역이 ‘장소 특정적 공연의 거장’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번 공연의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는 구서울역을 하나의 일상적인 ‘기차역’이라기 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건물로 받아들인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연출가는 그가 주로 작업했던 백화점, 공원, 지하철역 등과 같은 일상적 장소 중 하나로, 단지 아티스트에게 창작의 영감과 즐거움을 주는 독특한 건축물로 구서울역에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샵스는 연행자들의 동작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밝혔는데,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의문이 든다. 건축물의 물리적인 속성과 그것에 반응하는 퍼포먼스를 탐구할 것인지, 건축물의 사회적, 역사적 장소성을 탐구할 것인지는 연출가의 선택인데, 후자를 선택한 경우에 보다 조심스럽고 진지한 태도가 요구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관객이 어떤 태도로 공연에 접근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연출가의 접근방향이 어찌되었건, 앞서 말했듯 아주 제한된 인원이 참여했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공연 후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오갔던 질문들로 추측해 보건대) 관객 중에는 일반 대중보다는 관련 전공자로 서울역이라는 장소보다는 ‘장소 특정적 공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관객들이 이번 공연에서 느꼈을 경험과 감정의 편차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발하기 위해서는 “그 장소에서 생활한, 그 장소를 처음 방문한, 그 장소를 소유한, 그 장소에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장소가 불쾌한, 그 장소가 애틋한(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관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간’이라 부르지 않고 ‘장소’라 부르는 것은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시간, 사건, 감정, 기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선택된 장소가 관객에게 일관된 의미와 경험을 전달할 뿐이라면, 그것이 블랙박스씨어터나 화이트큐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관객이 다소 편향된다는 것, 공간에 대한 탐구와 장소에 대한 탐구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장소 특정적 공연(이라고 칭하는 공연)에서 아쉬운 지점이다. 하지만 역으로 개념이 실천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 진행 중인 장소 특정적 공연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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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일 토요일

뒤늦게 스텔라의 "마리오네트" 뮤비를 보다

에스티

1.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별star과 별자리constellation의 어원적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어원 stella를 얘기하던 중이었다. 나는 스텔라 얘기를 하면서 그 아이들은 소문으로만 들어 겨우 알고 있는 현대 스텔라를 예로 들고 싶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내가 스텔라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자 마자 자동적으로 미묘한 탄식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다른 아이들도 뭔가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7세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런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건 단 한가지 밖에 없는데, 불행히도 나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스텔라를 알려주려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택시로 쓰이던 차를 예로 들려고 했던 나의 불찰이 컸다.

이제 내가 학생들에게 배워야 하는 상황이 왔고, 학생들은 기꺼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스텔라—공식 스펠링은 Stellar인 듯한데, 통상 Stella라고 쓰이고 있다—는 걸그룹의 이름이며, 그 이름은 무척이나 선정적인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얼마나 야하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져서 오늘 집에 돌아가서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나에게 세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는 부인 몰래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소리를 죽이고 엄마 몰래 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심어린 충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 조언은 다름 아니라 “성인 인증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2.
“참혹하다. 한국 대중음악은 외형적으로는 'K-pop 한류'라고 해서 대중음악 산업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음악을 학살하고 난 뒤 얻은 대가다. 링컨이 그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순간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라고. 한국의 음반 산업은 IMF를 지나면서 한번 몰락했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극적 도약에 성공했지만,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이런 것은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한순간 존재하는 페이크(fake)일 뿐이다. 이제 음악은 휴대전화 컬러링처럼 아무 때나 바꾸는 배경음악을 만드는 자나 소비자에게나 그냥 1회성 소비재일 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나 스스로 대한민국의 몇 안되는 1급 문화예술 비평가라 평가하는 강헌 선생이 한 인터뷰에서 2014년 현재 우리 대중음악에 대해 한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복근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걸신”이라 부를만큼 미식가, 혹은 음식 애호가인 강헌 선생이 남자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의 대목에서는 일차적으로 소녀란 말에서 소녀시대가 떠올랐지만, 그와 함께 그제서야 스텔라가 떠올랐다.

3.
이 뮤비가 공개된 지 거의 반년이 지나고서야 나에게 소식이 들려왔다는 건 이 프로모션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유튜브의 조회수가 470만을 넘겼다는 것보다 시청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에 있다. 이 뮤비에 대해 시청자 중 3만 2천여명이 '좋아요'를 클릭했는데, 그에 못지 않게 2만 9천여명이 이 뮤비가 싫다고 표하고 있다. 이 수치는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뮤비나 가인의 “피어나” 뮤비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 두 뮤비에도 '싫어요'가 없지 않지만 '좋아요'에 비해 지극히 작은 수에 불과하다. 보통 정치적으로 논쟁 거리가 있을 때에나 찬반이 비슷한 숫자로 표시되기 마련인데, 도대체 이 뮤비는 뭐가 문제였길래 시청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안좋았음’을 표하게 만들었을까?

가사를 대충 살펴보면, 화자는 헤어진 연인에 대해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그 연인은 다시 돌아올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연락을 한다. 옛 연인에게 놀이감 밖에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화자는 자신을 “너에게 찢기고 아프고 아픈 인형” 마리오네트에 비유한다. 실연의 아픔과 자기 연민을 노래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안무 또한 제목과 가사 내용에 호응하여 끈에 메달린 인형을 재현하는 동작이 적지 않게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멤버들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나머지 동작들이다. 무엇보다 “지울 수가 없는 너니” 부분에서 반복되는 움직임, 즉 두 팔을 등 뒤로 뻗어 잡고, 오른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 딛은 다음 엉덩이를 반시계방향으로 느리게 3회전 하는 대목과, 뒤로 돌아 자기 엉덩이를 손으로 밀어 올리는 동작은 요즘 언론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충격적”이다. 게다가 카라가 “미스터”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펑퍼짐한 의상을 입고 이루어진 반면, 스텔라는 이 춤을 레오타드를 입고 추고 있으니 이 정도면 국내 심의가 허용하는 최대치라 할 수 있다. 이 영상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언론 반응을 보면 이 정도면 19금이 아니라 “29금”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련된 대부분의 기사는 노이즈 마케팅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텔라 멤버들이 이 뮤비에서 마리오네트를 재현하는 것은 텍스트의 요구로 보인다. 노래 가사를 대충이나마인지한 시청자들은 미련 때문에 여전히 끌려다니는 (아마도) 여성 화자에게 감정 이입을 시도하게 되고, 그리고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멤버들의 몸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그들의 춤은 그 자체로 상품화된 인형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몸의 관능성이 텍스트와 충돌을 일으킨다. 마리오네트 같은 처지의 화자의 마음에 공감하기는 커녕 기획사 사장님이 내건 줄에 자기 몸을 맡긴 네 명의 인간 인형을 보게 되니, 이 모순은 결코 즐거운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리오네트”라는 제목은 역설적이지만 이 뮤비의 핵심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4.
순전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눈높이에 다가가고자 “마리오네트” 뮤비를 찾아보았으며, 순전히 이 글을 쓰기 위해 반복해서 보았음을 힘주어 밝힌다. 나는 무려 데뷔한 지 3년이나 된 스텔라를 오늘에야 알게 된 문외한이다. 혹 스텔라의 팬들이 이 글을 읽고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싶고, 어떤 점이 좋은건지 알려주길 희망한다.

참고자료

마리오네트 공식 뮤비
http://www.youtube.com/watch?v=NCQpzHPYRUc

No Cut Version
http://www.youtube.com/watch?v=ObmOW5GZRP8

http://heungseon.com/5704 (가사 참고)

강헌 인터뷰 전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