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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8일 금요일

광기(狂氣)가 물성(物性)을 만났을 때: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2008,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2021)

글: 조혜인 (https://brunch.co.kr/@hichotheatre)

ⓒ Arno Declair, 2008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은 1947년 처음 개최되어 여름이면 인구 약 8만 정도 밖에 안되는 프랑스 남쪽의 조그만 도시 아비뇽에서 열렸다(임혜경, 76). 아비뇽은 변변한 공연시설 하나 없는 지방의 소도시였는데 유명 배우 장 빌라르와 제라르 필립, 몇몇 뜻을 같이하는 연극인들이 내려와 파리 연극과 차별화하면서 일반인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대중을 위한 연극을 선보였다(임혜경, 76). 포스트코로나(post COVID-19)시대를 맞이한 올해, 이러한 아비뇽의 기운을 담아 LG아트센터에서 기획공연으로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를 선보였다.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과 본 기획공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이 코로나로 발이 묶인 한국 관객들을 위해 LG아트센터 무대로 찾아온다. 올해로 75회를 맞이한 아비뇽 페스티벌은 영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양대 공연예술축제로 손꼽히고 있으며, 이 축제로 인해 작은 도시 아비뇽은 해마다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예술가와 관객들로 북적이는 예술도 도시로 변화한다. (...)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와과 함께 한국 관객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공연 5편을 필름으로 준비했다. 독일의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의 파격적인 <햄릿>, 벨기에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안무가 안느 테레사와 로사스 무용단의 <체세나>를 비롯하여 발표하는 창작극마다 몰리에르상을 휩쓰는 극작가이자 대표 연출가인 조엘 폼므라의 <콜드룸>, 프랑스 오데옹 국립극장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아비뇽 페스티벌 총 감독을 맡고 있는 연출가 올리비에 피의 <리어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프랑스 연극계에 떠오르는 신예 연출가 토마스 졸리의 <티에스테스>까지. 이름 하나만으로도 쟁쟁한 세계 공연예술계 대가들의 작품 5편을 5일간 LG아트센터 무대 위 대형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다. (LG아트센터)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는 LG아트센터 대극장 규모의 스크린을 통해 아비뇽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필자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과 조엘 폼므라 <콜드룸> 두 편을 관람했다.   그 중 <햄릿> 을 중심으로 본고의 논의가 펼쳐질 것이다. 한국 관객인 필자는 아비뇽의 공연과 어떻게 관계 맺었을까?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극’을 선보였다. 아비뇽의 무대 위, 지극히 연극적인 인물들을 통해 필자는 무엇을 감각했으며, 쓸 수 있을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 연극 속의 연극을 하였을까? 샤우뷔네(Schaubühne)의 <햄릿>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극중극은 어떠한 만남을 가질까?

우선 <햄릿>의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스터마이어는 “연극은 삶의 방식에 도전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는 곳이다.”라고 언급하며, 선대 연극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아르또(Antonin Artaud), 메이예르홀드(Vsevolod Emiljevitsch Meyerhold)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성장해나갔다. 이는 <햄릿>에 등장하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실현해 내었다. 오스터마이어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는 원작을 투명하리만큼 해석하고, 원작이 가진 이야기를 ‘지금, 이곳(Here and Now)’의 삶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배우에게 연기적 접근에 있어서 심리적 요구를 하기 전에 작품에서 어떤 장면이 매력있는지, 발전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며 세계관을 만들어간다. 연출가로서 배우에게 작품이 어떻게 해석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텍스트의 부분과 만나게끔 지원하며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오스터마이어는 독일의 동시대 연출가연극(Regietheater)을 공고히 하였지만, 연출가의 컨셉이나 지시에 대한 요구가 아닌 배우가 가진 표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어 또다른 의의가 있다. 오스터마이어는 그가 고집하는 미학을 반복하지 않으며, 매번 텍스트마다 발명을 하듯이 작품을 개발한다. 텍스트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텍스트의 내용을 핵심 삼는다. <햄릿>의 ‘햄릿’ 역을 맡은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는 오스터마이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오스터마이어에게는 희곡의 바닥을 헤집는 일종의 편집적 집착이 있다. 투명해지도록 해석을 한다. 배우에게 세밀하게 설명을 하고 배우는 배역의 역할에 대해 안전하게 느낀다. 그 설명은 리듬과 다이나믹한 구조로 된 일종의 악보와 같다. 거기에 희곡이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재료를 강조하고 아로새길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주어진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명료하고 정확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idinger)

또한 오스터마이어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예를 들어,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언급한 바 있다. 

한번은 오스터마이어가 입센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입센은 나에게 잘 만들어진, 플롯으로부터 촉발된 희곡을 제공해주는데, 이것은 나의 목적을 위해 다시 쓰기와 적용을 가능케 한다.”  

Ostermeier once said of Ibsen. “But he provides me with well-made, plot-driven plays, which I can rewrite and adapt for my purposes.” (Crawley)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작품의 본질에 가 닿으려는 오스터마이어의 작품관이 반영된 <햄릿>은 과연 어떤 공연이었을까?

공연은 햄릿의 아버지인 ‘햄릿 왕’의 장례부터 시작한다. 무대의 온 바닥에는 흙들이 충분히 깔려 있고, 장례식에 내리는 비는 스프링쿨러에서 발사된다. 흙 위에는 앞 뒤로 이동할 수 있는 사각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가로로 된 긴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황금색 체인으로 된 투명막이 내려와있다. 장례 중 햄릿은 손으로 흙을 집어본다. 아버지의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장례가 막 끝나자마자 연회가 시작된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의 결혼이다. 햄릿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애도로 침통해야 할 국가와 왕실에 ‘절제된 마음’이라며 그와 상반되는 분위기의 결혼식이 열린다. 흙, 땀, 물에 흠뻑 젖어 구석에 조촐하게 앉아 은박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햄릿만이 상식적인 애도의 과정을 겪는 국가 및 개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머지 인물들은 게걸스레 식사를 한다. 클로디어스는 거트루드와의 결혼을 선언하는데, 햄릿은 말한다. “전 이런 친자관계 필요 없습니다.”

거트루드의 노래가 이어진다. 괴상한 음색을 내는 거트루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투명막에 이미지로 투사된다. 일렉기타 소리가 삽입되며 그 기괴함은 절정에 치닫는다. 거트루드의 음성은 찢어지고, 햄릿은 거트루드의 위선적인 눈물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거트루드는 베일을 벗자 ‘오필리어’로 변신한다(1인 2역).

햄릿의 국가인 덴마크는 감옥과도 같아졌으며, 햄릿은 실성한 듯 절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 곁에서 디제잉을 이어나간다. (실제로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실제로 DJ 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와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은 햄릿의 기이한 행동에 심히 당황한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나간 식탁 위, 햄릿은 올라가 독백을 한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일에서 흔히 살 수 있는 ‘Ja!’(영어 ‘Yes’에 해당) 우유를 마구 흔들어 뿜어내며 광기에 휩싸인 채 햄릿의 명대사를 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햄릿은 그들이 여기로 오게 된 까닭을 말해준다. 오늘 저녁에 연극이 있을 거란 소식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는 다시한번 이어진다. 이번에는 엄숙하게, 비이성적인 햄릿이 아닌 이성적인 햄릿으로 되돌아온 듯 독백을 이어 나간다. 햄릿의 온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으며, 오필리어는 햄릿을 지켜본다.

햄릿은 오필리어와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때, 햄릿의 광기는 또 한번 그 수위가 치솟는다. 필자는 희곡 및 타 <햄릿> 공연으로 오필리어를 접했을 때, 실연으로 인한 오필리어의 자살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둘이 얼마만큼 사랑했기에?’ 라는 물음을 충족시켜주는 공연이 필자에겐 없었다. 그러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고 나니 왜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했을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햄릿은 순백의 옷을 입은 오필리어를 흙 속에 파묻으면서까지 저주하고, 냉대하고, 또 키스하며 자신의 사랑표현을 진심으로 하는 것 같다가도, 또 오필리어를 흙 위로 내동댕이 친다. 흙 위에서 난장을 벌이며 오필리어가 가진 순백의 사랑을 철저하게 더럽히는 장면은 흙이 가진 ‘때묻음’의 속성으로 인해 비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햄릿이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그러한 가학적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가했어야 할 햄릿의 아픔이 진흙처럼 묻어 나온다.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수모를 당했으니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감정적 이해가 되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이기에 여성 필자로서 조금은 불편한 부분도 있었지만, 흙이 가지고 있는 물성(物性, Eigenschaft der Materie)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만나 배우의 몸에 뒤엉켰을 때 폭발적인 광기(狂氣, Wahnsinn)가 발산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햄릿의 광기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임과 동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내적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다”(임승태, i). 

햄릿이 연극배우들과 만나 연습을 한다. 특히 연극에서 죽음 이야기를 할 때 숙부를 잘 관찰하라고 당부한다. 연극의 이름은 <쥐덫>이다. 연극을 보기위해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가 등장하고, 이 때 관객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 투명막에 투사된다. 극장에 앉아있는 관객들 또한 같이 <쥐덫>을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점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창출한다.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거트루드로 상징되는 역할로 등장한다. 두 젖꼭지에는 주스를 흘려 마치 피흘림을 연상시키고, 랩으로 왕 역할의 배우의 몸을 마구 감싼다. 왕비 역은 왕 역의 몸에 우유를 붓는다. 왕 역은 괴로워한다. 이어 붉은 피가 부어진다. <쥐덫>의 모든 이야기는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양심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왕이 곤히 자고 있을 때 독살당하는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 역은 결국 죽고, 그의 왕관은 왕비 역에게 간다. 독살 장면에서 배우와 클로디어스의 눈이 마주친다.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는 도망가고 햄릿은 기쁨의 춤을 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할까?

<햄릿>에서 배우들은 직접 카메라를 잡는다. 이런 카메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덴마크 왕실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장치이자 햄릿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햄릿이 계획한 연극 <쥐덫>이 끝나고 배우 아이딩어가 왕비 역에서 햄릿 역으로 전환할 때 햄릿의 배불뚝이 몸매를 위한 속옷을 착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장실 뒤에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고스란히 인지시킨다. 이러한 극중극에 대해서 심정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연기 스타일에서는 ‘가식과 위장’이라는 기본적 원칙으로 반영된다. 그가 뚱뚱보 의상을 입고 뚱뚱한 왕자로 나왔다가, 극 후반에서 뚱뚱이 의상을 벗어 던지는 것도, 가식과 위장의 세상적 현실을 조롱하는 하나의 오브제적 장치다. (심정순)  

이인순 또한 이러한 전환의 사이를 "‘연극적 행위를 감추려 하지 않기에 오는 행위의 진실’로 다가왔고, 또 소외효과가 가져오는 ‘연극놀이’의 자유로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이인순, 254). 또한 극중극은 “허구와 현실, 과정과 결과, 그리고 내용과 형식의 공존 및 이중성에 대한 연극적 사유인데, 이중성은 햄릿의 광증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이기도 하다”(임승태, 43). 광기는 ‘비규범성’과도 맞닿는다. 햄릿은 엉뚱하게 신부복을 입은 채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때 거트루드 앞에서 폴로니어스를 총살한다. 거트루드는 말한다. “Was habe ich getan?”[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Was ist mit dir?”[너에게 무슨 일이 있니?] 특히 거트루드가 오필리어로 전환되는 과정은 인상적이다. 필름이 곧 끊길 듯한 영상이 앞뒤로 반복되듯 배우 ‘예니 쾨니히(Jenny König)’는 반복동작을 취하며 오필리어로 변한다. 무대 위의 흙을 온 얼굴과 몸에 뭍이는 행위를 하고, 오필리어의 마지막은 ‘몸에 생수를 부어’ 표현한다. 흙과 물, 즉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사의 본질을 통해 오필리어의 죽음이 다가온다. 오필리어는 익사하는 장면에서도 대사를 하는데, 그 대사의 리듬마저도 영상이 끊길 때 나는 소리처럼 들린다. 온전히 익사하자 더 이상 오필리어의 말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CD가 불안정하게 튕겨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햄릿은 덴마크로 돌아온 ‘레어티스’와 결투를 치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햄릿의 광기 때문이다. 이 때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햄릿은 다시한번 소리를 치며 “Musik ausmachen!”[음악 꺼!]를 외친다. 음악이 꺼진다. 햄릿의 적은 그 자신의 광기인 점을 다시한번 주지시킨다. 드디어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레어티스는 검을 뽑아 들고, 햄릿은 식탁 위의 숟가락을 집어 든다. 그 사이에 클로디어스는 잔에 독을 타게 되고, 거트루드는 그것을 마신다. 계획에 의해 레어티스의 검에 독이 묻어 있다. 햄릿은 검에 맞는다. 숟가락을 놓은 햄릿 또한 레어티스를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로디어스를 찌른다. 광기에 어린 햄릿의 복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죽어가는 햄릿과 무대를 채우는 진공소리가 남는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아우성을 친다. 햄릿의 절규는 온 덴마크를 찌르고 마지막까지 광기의 동아줄을 붙잡는다.

필자는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며 햄릿의 ‘광기’에 집중했다. 과연 햄릿이 정신이 멀쩡하지만 끝까지 미친 척을 하는 걸까? 혹은 햄릿이 미친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 정말 미쳐갔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햄릿’만이 그 진실을 안다. 또한 2021 아비뇽 시네마 페스티벌의 <햄릿>은 흙, 물 등 물질이 주는 감각을 스크린을 통해 함께 느끼게 하면서 배우의 감각을 더욱 상상하게 했다. 비록 스크린이라는 겹이 있었지만, 만약 <햄릿>이 공연이 아닌 ‘영화’를 위한 상연이었다면 그만큼 배우의 감각에 대한 상상력에 함께 동참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햄릿이 흙을 먹는 장면이나, 오필리어가 흙을 뒤집어쓰는 장면 등에서, 만약 영화였다면 흙이 주는 냄새나 질감 같은 물성에 대해 간과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물성이 두드러지는 공연일수록 객석에 앉아서 배우와 함께 호흡할 때,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가 물질을 감각하는 것을 함께 더 상상하고 반응하게끔 해주는 것 같다. 만약 실제 아비뇽 객석에 앉아있었다면 그 감각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오스터마이어는 우리들 가까이로 와서 느끼고, 감각하게끔 하는 소통방식을 실천해냈다. <햄릿>의 배우들이 심리적 연기를 지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몸’을 통해 또다른 소통방식을 만들어냈다. 특히 흙, 물질은 이미지라는 정반대의 질감과 충돌한다. <햄릿>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신체와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처럼 <햄릿> 공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물성은 ‘햄릿’이 가진 지독한 광기가 인물들에게 전염되며, 또 다시 공연이 가진 물성이 전염된 광기들과 만나며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경험을 선사해준다. 특히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은 현대인의 고독이 잘 표상화 된 공연으로 아래와 같은 평가는 2021년 현재에도 유효하다. 

객석의 관객은 고통의 열병에 들떠 있는 광기의 청년 햄릿에게 때때로 감정이입이 가능해지고, 햄릿의 동시대적인 거친 언어는 일상에 억압되고 축소된 젊은이들에게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 공연은 포스트모던적인 신체 중심의 감각적 표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적 파스티쉬(pastische) 스타일”(심정순), 그리고 신사실주의가 만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내재된 보편적인 주제 – ‘삶과 죽음’, ‘삶과 연극’, ‘허상과 실제’ – 에 작금의 청년문화가 함께하면서 글로벌한 ‘대중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인순, 264)

이와 더불어 필자는 <햄릿>에서의 극중극은 단순한 복수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고, 감정이입을 통한 보는 이의 양심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검’과 같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관객으로 하여금 선악을 판단하게 하고, 극 속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과 골수를 쪼개는 힘’이 바로 연극에 담겨있다는 반증이다(히브리서 4:12). 이상으로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리뷰를 마무리한다. 두드러지는 광기와 물성으로 인해 2000년대 초반 공연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2021년에 스크린을 통해 만나보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공연예술 관계자들 및 관객들이 아비뇽으로 ‘몸(Körper)’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LG아트센터에 방문해 거리두기를 하며 아비뇽의 옛 공연들을 관람했다. 특히 코로나가 어서 종식되어 <햄릿>과 같은 공연으로 많은 관객들이 배우와 물성을 더욱 가깝게 감각할 수 있는 공연예술계로 나아가길 소망해본다.

참고문헌

심정순.「오스터마이어 <햄릿>: 몸, 감각,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미장센」. 『오늘의 서울연극』제1호, TTIS 편집부, 2020. 10.

“아비뇽 시네마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LG 아트센터, http://www.lgart.com/UIPage/perform/calender_view.aspx?seq=252591

이인순.「공연분석: 오스터마이어의 <햄릿>(프랑스 2008, 한국 2010)」, 『한국연극학』 Vol.1, No.52, 2014, 229-270. 

임승태.「한국 <햄릿> 상연에서의 광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임혜경.「60주년이 된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과 이론』Vol.- No.23, 2006, 78-86.

Crawley, Peter. <Ostermeier’s ‘Hamlet’: what did you expect?>. THE IRISH TIMES. 2014-08-23, https://www.irishtimes.com/culture/stage/ostermeier-s-hamlet-what-did-you-expect-1.1901339.

<햄릿(Hamlet)>.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라르스 아이딩어, 예니 쾨니히 출연. 샤우뷔네 제작.  2008.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LG 아트센터, 2021. 5.

Eidinger, Lars. 인터뷰.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기예술학과 연기양식론 수업자료 (교수자: 최영주),  조혜인 정리, 202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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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월요일

고시원의 햄릿공주

임승태

<햄릿>은 이제 거의 포화상태라고 해도 될만큼 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아직도 해볼만한 게 남아서일까, 아니면 하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만만하고 익숙하기 때문일까. 웬만큼 잘해선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걸 하나라도 가지고 있거나 또 관객이 건질 수 있게만 해도 나름의 성취를 이루는 게 또한 이 <햄릿> 판이다. 올 상반기에도 벌써 여러 <햄릿>이 공연될 예정이고 올 하반기, 그리고 내년 상반기에 공연될 <햄릿> 소식도 들려온다. 모쪼록 각각의 <햄릿>이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고시원의 햄릿공주>(홍승오 작, 이상범 연출)는 햄릿을 제목에서 언급하는 게 적절한가 싶을 정도로 <햄릿> 텍스트의 사용 비율은 낮다. 하지만 원작의 핵심 대사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가 우리시대 청년 예술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함량과 관계 없이 ‘햄릿 맛’이 나는 작품이었다.
2010년대 <햄릿> 들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하는 제4독백을 중심으로 다루더라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후반부의 대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단식농성 중인 임재춘 콜텍 해고노동자가 오필리아로 출연했던 <구일만 햄릿>이 그러했고, 구의역 김군의 죽음을 애도했던 <임영준 햄릿>이 또한 그러했다. <고시원의 햄릿공주> 역시 “(건물) 가진 자의 오만”을 장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같은 노선을 취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햄릿의 제4독백은 삶과 죽음, 잠, 꿈을 언급하는 전반부에 집중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삶을 이어가거나 죽음을 택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외부적인 요인이 있겠으나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할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햄릿> 플롯을 취하는 이상 이 질문에서 극이 끝나는 경우는 드물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고시원의 햄릿공주>는 드문 선택을 한 사례에 해당한다. 초반 두 명의 저승사자(남태관, 김영호 분)가 코믹한 톤을 이끌어가서 그렇지 정소정(이새날 분)이란 인물은 처음부터 이미 사느냐 죽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린 상태다. 청년 자살자가 급증한 바람에 저승의 영혼 수용 능력에 문제가 생겨 자살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승에 내려온 두 저승사자는 정소정의 마지막 순간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개입해 보지만 그의 죽음에의 의지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저승사자(특히 공경)와 더불어 관객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또한 한 인간의 존엄한 결정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공연이 마무리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위험하다. 공공지원금 심사를 받았다면 자살을 미화한다며 우려를 표하는 심사위원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공연을 보는 순간에는 그런 걱정을 설핏했다. 하지만 이날 객석을 채운 20대 관객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청년들에게 헬조선, 지옥고(=‘지’하방 + ‘옥’탑방 + ‘고’시원)가 어느덧 일상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햄릿은 죽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지만, 잠을 자면 꿈을 꿀 텐데 그 꿈이 어떤 꿈일지 알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하길 주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눈 뜨고 있는 현실이 이미 지옥인 상황에서는 현실보다 더 나쁜 꿈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이 작품이 재공연될 수 있었던 것은 정소정의 선택이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8월 9일 목요일

a postscript to “애도의 연극, 연극적 애도”

임승태


사계절 연극제에서 만났던 <임영준 햄릿>을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내 느낌엔 내용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연출의 말에 따르면 2분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이라 한다. 어쩌면 리뷰를 쓴 이후에 다시 보는 것이라 특정 장면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몇 부분이 수정된 것도 발견했다. 그 변화에 내 글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쓰기보다 지난 해 <인디언 밥>에 썼던 글(http://indienbob.tistory.com/1033)을 약간 다듬어 2018년 공연의 리뷰로 대신한다. 다만 한 해가 지나면서 지하철 효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이 파악하는 속도도 느려진 게 아닌가라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욕심 같아서는 임영준이 5년에 한번쯤은 이 연극을 다시 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자칭 ‘대배우’ 임영준이 진정한 대배우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들의 팬들이 함께 보고 축하하며, 또한 우리 사회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대와 객석이 함께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

<햄릿>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는 사실은 그 유명한 극중극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다만 메타극(metatheatre)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라이오넬 에이블(Lionel Abel)이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던 한 가지 내용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햄릿은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극중 인물 스스로 ‘세상은 연극’(theatrum mundi)이라는 인식 하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적극적으로 플롯을 꾸미고 다른 인물을 조종하고 움직인다. 내 생각엔 바로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햄릿>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연극인들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연극적 실험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햄릿>은 극중 인물도, 그것을 공연하는 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극작가 의식에 충만해야 하는 작품인 것이다. 

<임영준 햄릿>은 공연 중 반복되는 여름 노래 메들리만큼이나 밝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과장된 쾌활함 사이에는 데뷔 ‘11년차’ 연극배우 임영준의 자기 연민이 언뜻언뜻 베어난다. 무려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준은 관객이 기대할 법한 연극을 시작하는 대신 자기 얘기, 그중에서도 자기가 해왔던 연극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낸다. 하지만 정작 연습할 때 입었다가 무대 의상이 되었다는,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하기 힘든 쫄 반바지 하나 입고 있는 배우의 행색은 우습고 또 서글프다. 근육과 살이 떨리고, 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를 튀기며 자신의 지난 10년(2017년 기준으로 10년이지만, 지난 1년간의 공연 내역이 추가되지는 않았다)을 되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배역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배우를, 심지어 그의 공연을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몰라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번 각인하면 잊기 어려운 배우가 또한 임영준이라는 것 또한 나는 지난 1년간 경험했다.)

<햄릿>은 지극히 가족극이기도 한만큼 <임영준 햄릿>에 배우의 부모님이 (영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등장은 그토록 당당하던 임영준을 한순간에 조그맣게 만든다. 선왕의 유령이 복수를 재촉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왕자처럼 임영준은 허상에 불과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날 때 욕조 뒤로 숨는다. (2017년 공연에서는 공간소극장의 구조적 이점을 살려 ‘쥐구멍’같은 공간으로 잘도 숨어 들어갔다.) 흥미로운 건 이 상황이 계획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반응을 보며 관객도 적잖이 긴장하게 된다는 점인데, 그건 아마도 관객 다수를 차지한 임영준의 또래들이 비슷한 심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변변한 자리 없이 제 앞가림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머지않아 TV에 나오는 성공한 배우가 되겠다는 임영준의 다짐을 들으며 관객들은 TV라는 말을 대신할 각자의 단어를 속으로 되새긴다. (극장이 넓어져서인지, 관객 구성이 달라져서인지 전년도 만큼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관객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어쩌면 그 원인을 배우에게서 찾을 수도 있다. 마침 오늘 공연에는 그의 부모님이 객석에서 ‘직관’하고 계셨다.)

아무튼 이 연극은 배우 임영준에 대해, 그가 해온 연극에 대해 말하며 <햄릿>의 메타극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적잖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만 80분을 채웠다면 그의 열성 팬이나 친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객이 끝까지 공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라는 희곡에 이런 대사가 있다. “연극에 대한 연극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재미있습니다.” 제작팀의 지인이 아닌 이상 이 소규모 연극을 보러 올 정도의 관객은 이미 연극에 대한 애정 혹은 애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무대에서 되풀이되는 연민의 정서가 특별할 건 없다. 모든 연민이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배우로 살기의 고됨만 있었다면 이 작품은 임영준 본인이 공연 중에 언급하듯 “제목만 햄릿”이라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영준의 다재다능함을 한껏 보여준 다음 하수민, 김정 두 연출가는 애도라는 중요한 주제를 적절히 등장시킨다. 애도에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2014년 이후의 한국 <햄릿>의 주된 흐름이다. 우리는 더 이상 라깡의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 작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이라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 복수를 실행하지 못하고 끝까지 괴로워하는 햄릿의 말과 행동은 비평가들이 오래도록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와 그로인한 막대한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이 인물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 제작된 <햄릿>은, 예컨대 김현탁의 <망루의 햄릿>과 이성열의 <햄릿아비>와 같이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인물의 슬픔을 종종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병치시켰다. 비록 얀 코트(Jan Kott)가 이 말을 하고도 반백년이 넘게 흐르긴 했지만, 세월호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비로소 우리의 “동시대인”이 되었으며, 애도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대상을 향한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유령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기억하고 애도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으라고 요청한다.

무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임영준은 “배고프다”란 말과 함께 컵라면 한 사발을 비운다. 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으나, 앞선 쾌활함이 과장된 것임을 감지했다면 이제 드디어 나올 게 나온다는 느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픈 예술가의 식상한 상징일 수도 있었던 컵라면 장면은 전동차 효과음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십대 정비사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부정적 지표에서는 여전히 OECD 으뜸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이기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1997년생이었던 김 군의 유품 가방에 들어 있었던 컵라면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임영준이 컵라면을 먹는 행위는 자신의 배고픔을 드러내기보다 김 군이 먹지 못한 컵라면을 대신 먹는 하나의 제의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야 말로 배우의 본분이거니와, 그 순간 임영준이 햄릿을 연기하는 목적이 단순히 모든 남자 배우의 로망이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죽음에 있음이 드러난다. 개인적 차원의 살풀이로 시작한 이 연극은 어느덧 사회적 차원의 씻김굿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일까. 임영준, 그리고 김정, 하수민 두 연출가는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이 보기엔 텍스트를 띄엄띄엄 읽고 A급 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저질 B급 코드를 총동원해 공연을 만든 듯 보일지 몰라도 실은 꽤나 성실한 모범생에 더 가깝다. (공연장을 나가며 나는 무대 바닥에 결코 가볍지 않은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의 첫인상은 대사를 이곳저곳에서 마구잡이로 발췌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내 햄릿의 주요 대사가 조목조목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유명한 제4독백이 빠질 수 없다. 임영준은 오디션을 보는 듯 여러 가지로 연기 톤을 바꿔가며 이 독백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낭송한다. 그중에서도 햄릿이 단도를 꺼내들기 직전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왜 <햄릿>이 지금 여기서 공연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별 오디션은 번번이 이 대사 시작 부분에서 멈추는데 이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아래 대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그 누가 견디겠는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폭군의 횡포를, 가진 자의 오만함을,
실연의 아픔을, 법의 더딤을,
관리의 교만을, 유덕한 사람이
무지렁이들에게 받아야 하는 모욕을.
이 단도 한 자루면 자신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부조리는 왕자라는 지위에서 쉽게 되뇔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차라리 백성을 개(돼지)로 여기는 거트루드가 그때나 지금이나 더 현실적이다. 일단 왕자가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면 연극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간접 경험해서라고 해두자. 중요한 건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 당시의 관객도 4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관객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임영준 햄릿>이 공연된 2017년, 그리고 2018년 여름에 이 대사는 구체적으로 구의역 김 군의 이미지로 구체화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갑질, 촛불을 탱크로 막으려 했던 계획, 약자에게만 엄격한 법 따위를 떠올리게 한다.

위 대사는 공연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졸역을 덧붙였으나, 적어도 이 독백의 첫 마디는 <임영준 햄릿> 프로덕션의 것을 직접 인용해야 한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그동안 살펴본 <햄릿> 번역서와 공연에서도 “To be, or not to be” 를 이 만큼 적절하게 옮긴 사례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느냐가 먼저냐 죽느냐가 먼저냐가 문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가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의 일상적 질문이라는 사실이 “왜 햄릿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나머지 부분을 구성한다. 이 질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 임영준의 질문이자 햄릿을 연구하며 비정규직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경력직만 찾는 구인 공고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오르지 않는 급여와 오르기만 하는 전월세금 앞에서 이 질문을 떠올린다. 아프다는데 그러니 청춘이라는 둥 붙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더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둥의 정신승리법을 알려주는 기성세대는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고선 위로하는 척하는 클로디어스를 닮아 있어서 더 밉살스럽다. (물론 임영준 배우가 늘어난 나이와 옆구리 살 때문에 스스로를 햄릿이 아니라 클로디어스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클로디어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다만 그러하더라도 임영준과 함께 햄릿의 질문을 되뇌는 동안 우리 모두는 어찌어찌 여전히 살아남았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존재하는 동안 이 우울한 질문이 계속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이 질문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하지만 <햄릿>은 남아있는 자들이 먼저 가야했던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살아낼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햄릿 왕자도 마지막 순간 호레이쇼에게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호레이쇼에게 맡겨진 임무는 특별히 영웅적이지 못한 우리 대부분의 것이기도 하다.

추신2
지난 1년간 조연출 박정호는 김정 연출의 시그니처 코드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할 수준으로 등장했다. <임영준 햄릿>은 김정 연출의 작품에서 조연출 박정호의 무대 위 역할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바보 햄릿

에스티의 첫날밤에



대학로에 문제적인 포스터가 하나 걸렸다. 공연 포스터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초상화 그 자체이다. 밀집모자를 쓴 한 남자가 웃고 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다. 한국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도상을 그저 한 시골 촌부로 여길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초상화 상단에는 그의 별명 ‘바보’가 쓰여져 있으니 이 그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너무나 명백해진다.

그(의 얼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이나 걸개 그림을 자신의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지내고 있다. 이런 행동이 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이라면, 반대로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소비한다. 이들은 주로 포토샵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를 전혀 새로운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그들은 가라앉는 세월호 유리창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망자를 욕보임으로써 쾌감을 얻는 그들의 심리는 한편으로는 屍姦症(necrophilia)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곳에나 그의 얼굴을 기입하는 충동을 느끼는 그들은 표면적으론 그를 조롱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누구보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말 <변호인>이란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제작사 측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감독이나 주연배우는 가급적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이 특정 정치인과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노력은, 비록 뒤이어 개봉한 <겨울왕국>이 알 수 없는 대흥행을 이루면서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관객수 1100만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지난 5월에 김기덕 감독은 <일대일>이라는 영화를 극장에 걸면서 이 영화가 “[그 분]에게 드리는 고백이자 자백”이라 밝혔다. 이 영화는 그를 직접 언급하거나 그의 일대기를 그린 것도 아니지만 감독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의제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크게 실패했다. 관객수 7000명이라는 초라한 숫자로 개봉 8일차에 영화를 내려야 했다. 실제로 <일대일>은 감독이 말하듯 우리 사회에 결여된 상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록 때로는 영화밖 현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변호인>을 본 1%도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극장을 찾을 7000명이 김기덕의 팬인지 영화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호인의 실명을 직접 거론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김기덕이라는 문턱을 쉽사리 넘어오진 않는다는 점이다.

<바보햄릿>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 있다. 일단 첫날 공연에서는 포스터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적지않은 관객이 그에게 우호적인 그룹에서 단체로 극장을 찾은 것 같았다. 공연 중 객석은 더웠다. 난방도 냉방도 되지 않는 이 무렵 소극장이 늘 그럴 수도 있지만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에 관객들은 열심히 반응했다.

추모의 성격이 강한 공연임에는 분명했다. 극의 말미에는 그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이미 관객들은 전반부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가 언급될 때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데, 마지막에 오리지널 버전이 재생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 바닥에 놓여진 국화는 그를 추모하는 직접적인 제스쳐이기도 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햄릿>의 주제를 애도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결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애도하는 것은 단순히 그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극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그는 햄릿의 아버지 처럼 “나를 기억하라”하지 않고 “나를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버리는 일은 그대신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 바깥 프레임을 이루는 기사 정정 에피소드는 결국 한 소시민의 각성과 변화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실천을 강조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 이 연극은 먼저 간 그들을 남은 자들이 어떻게 기릴 것인지 질문한다.

“햄릿” 그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최근 트렌드에 따라 Shakespeare retold 방식의 설정, 테넌트의 <햄릿>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 CCTV 등이 이 공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이윤택의 <햄릿>과 닮은 점이 많다. 극 초반에 햄릿이 벗은 몸을 보여준다든지, 왕과 오필리어의 관계, 그리고 Closet Scene에서 햄릿이 어머니를 겁탈하려는 모습 및 왕비가 왕자를 달래주는 장면은 이윤택 버전의 되풀이라 할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내는 편지의 문구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연출 자신이 이윤택 <햄릿>의 초대 햄릿이란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런 아이디어들을 단지 이윤택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해아래 새로운 햄릿은 없다. 하지만 꿈이라는 상황 설정이 이 점을 가중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한 장면들의 정당성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

7월 20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070-8776-1356)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극장과 내외하는 사이 1] 극장을 만나다,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

by 서유미


남산도큐멘타: 연극의 연습 - 극장 편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출: 이경성 (크리에이티브VaQi)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

얼마 전 수업 과제로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 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장 자크 루빈, 『연극 이론의 역사』) 글의 필자는 연극의 기저가 되는 텍스트(여기서 텍스트는 연극의 문학적 텍스트, 즉 희곡을 의미함)가 연극에서 가지는 절대적인 권위에 대해 서술하면서, 연출가의 창조적 기량조차도 텍스트의 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출가는 ‘텍스트의 공명상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 연극이 서야 할 자리인 무대 위에서, 종이 위에 있어야 할 텍스트가 그 힘을 휘두른다면 연극은 무대 저편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편한 마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연극은 ‘오로지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들’로 무대를 가득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은, 연극만이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배우들은 “우리 연극은 연출이 중요합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텍스트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능을 연극 내에서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즉, 텍스트에 봉사하기는커녕, 텍스트를 완전, X무시해버린 연극이다.

도큐멘타  (*줄거리 노출*)

이 연극의 주인공은 62년 드라마센터로 개관하여 현재 남산예술센터로 불리는 ‘극장’이라는 공간이다.
드라마센터 개관공연인 <햄리트>의 독백을 하는 배우가 무대 한 가운데 서 있다. 신파조의 독백을 하는 도중, 배우 한 명이 무대 뒤편에서 한 무리의 관객들을 이끌고 오며 그들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이들은 ‘유령산책’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관객들로 사전에 신청을 하면 배우들과 함께 극장 주변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하나씩 방문한다) 독백을 마친 배우 앞에 서서히 조명기가 내려오고 배우는 그 조명기 중 하나를 뺀다. 여섯 명의 배우들은 “우리의 연극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연극을 소개한다. 그 중 핵심은, “우리의 연극의 주인공은 극장입니다” 일 것이다. 다음으로 62년 <햄리트> 장면, 극장이 자금난을 겪었던 당시 설립자인 유치진과 김종필의 대화 장면, 자금난으로 연극이 상연되지 못하고 결혼식, 연주회장, 연희장 등으로 활용되었던 역사적 고증 재현 장면 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빈 무대. 텅 빈 무대에 극장의 이 곳 저 곳을 보여주는 영상이 투사된다. 무대, 객석, 무대 천장의 조명기, 조명기가 내려갈 때 맞물리는 철제 기기들, 바닥, 무대 뒤편 공간, 기계적 무대, 헐벗은 공간, 배우도, 관객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존재하는 극장 그 자체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극장의 ‘독백’. 막간극으로 유치진의 희곡 <대추나무> 한 장면이 끝나면 배우와 연출이 극장 주변을 다니면서 인터뷰 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투사된다. 이어지는 ‘남산 오디션’ 장면에서는 ‘오디션‘이라는 극장과 조우하는 특정 형식을 빌려 극장 주변에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인 중앙정보부의 고문 장면을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다시 한 번 <햄리트>. 마지막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 장면, 모두가 죽어 버리는 그 순간이 펼쳐진다. 무대감독(여자 배우)은 햄릿과 레어티즈가 쓰러져 죽은 곳에 (교통사고 현장에서 그러하듯) 흰색 분필로 마킹한다. 배우들은 “우리의 연극은”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텅 빈 무대, 극장 미니어쳐가 놓여 있다. 무대 조명이 이것을 협소하게 비추고, 조명기가 (마치 인사하듯) 무대 바닥까지 내려오면, 암전. 연극이 끝난다.




극장과의 첫 만남, 감상

프로그램북에서는 이 연극을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
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글만 보더라도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에 제대로 반기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에서 극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텍스트 외부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좋았던 것은 여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깜깜한 극장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던 극장의 독백 장면이다. 극장의 이 곳 저 곳을 조명이 비춘 후, 암전이 되면 극장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떠나는 장소. 그러나 그들과 상관없이 늘 이 곳에 꿋꿋이 존재하는 극장. 이 극장이 그 짧은 순간 동안, 처음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공연에서 공연 그 자체를 위해 숨겨져야 했던 것들이 노출되는 순간들, 예를 들면 조명기가 바닥 끝까지 내려오는 장면은 극장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대 천장에 숨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만을 수행해오던 투박하고 묵직한 조명기들이 처음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순간, “숨겨왔던 나의~” 노래가 떠오르면서(?) 극장과 처음으로 가장 솔직한 상태로 대면하였다. 희한하리만큼, 괜히 통쾌하기도, 후련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조명기가 무대 바닥까지 천천히 내려올 때에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에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듯 했으며, 커튼콜 때 여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에서도 굳이 조명기 뒤에 서서 인사를 하는 것 또한 이 연극의 주인공이 극장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지시적인 장면은 좀더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겼다. 극장 모형이 빈 무대 위 홀로 남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마지막 장면. 모형은 단지 모형일 뿐이고, 극장이라는 진짜 주인공이 그 뒤, 그 앞과 그 옆, 온 곳을 둘러싸고 있는데…… 자신을 그대로 모방한 모형 극장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본 진짜 극장이 조금 섭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우들은 유쾌했다. 완전히 비-재현적인 연극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 방식은 철저히 재현적이라는 점은 또 다른 재미를 낳았다. 중간 중간에 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고 느꼈던 진솔한 이야기들도 들었으며, 배우들의 말로 극장을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극장이 주인공인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단지 극장을 더 드러내고 극장에 의해 소비되는 기호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은 가끔은 웃음을, 때로는 불편함을 낳았지만, 그 장면들이 생산해내는 모든 감정들은 내가 배우의 연기를 보았을 때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과 관계하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여기, 이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새로운 지점에서, 극장과 나는 만났다.


+남산예술센터, 극장을 나오며

프로시니엄무대가 주류인 요즘의 극장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특히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설렌다. 반원형 돌출 무대인 이 극장에서는 어느 자리에서도 무대와의 거리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배우와 무대, 연극에 더욱 쉽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로 이 곳에서 본 연극들은 그 내용과는 상관 없이 왠지 모르게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 샤우뷔네 극단의 <햄릿>은, 안팎으로 제대로 미쳐서 극장 공간을 여기 저기 누비고 다니던 싸이코 햄릿의 정신질환이 내게 옮겨 올 것만 같은 두려움을 남겼었고, <천개의 눈>을 보면서는, 타로의 미궁 속에 나 또한 자로와 함께 갇혀버린 상태에서 깜깜한 극장 안, 마치 천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남산예술센터에서 본 연극의 기운과 그 여운이 나에게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은, 이곳의 특수한 공간적 구조가 연극에게 주는 힘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극장을 나오며 갑자기 체홉의 단막극 <백조의 노래>가 떠오른다. 스베뜰로프는 몇 십 년 동안이나 연기 생활을 했던 그 극장을, 아무도 없는 밤 홀로 남아 처음으로 마주한다. 조명이 꺼지고 모든 소도구들이 제멋대로 놓인 무대는 더 이상 환상을 자아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노출된 채로, 단지 텅 빈 죽은 공간으로 처참히 전락한다. 만약, 스베뜰로프가 극장의 숨소리를 들었더라면, 극장이 건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자신이 이끌어 온 희극 배우로서의 인생이 절대 허황된 시간들의 모음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

(* 사진 및 동영상 출처는 남산예술센터 공식웹사이트(www.nsartscenter.or.kr) 및 남산예술센터 페이스북(www.facebook.com/namsanarts))

2014년 3월 4일 화요일

3월 장바구니

by 산책



<유쾌한 하녀 마리사>, 3월 6일 ~  3월 23일, 두산 아트센터 Space 111

이 작품은 “이보다 더 웃길 수 없다! 포복절도할 막강 코미디!”라는 문구에 끌려 예매했습니다. 요새 실컷 웃을 일이 너무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으하하하 웃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예매하고 보니 <은밀한 기쁨>과 같은 극단인 맨씨어터에서 준비한 작품이네요. <은밀한 기쁨>에서 알콜 중독자로 분했던 서정연 배우가 자살하려다 하녀 마리사를 죽이게 되는 요한나를 연기한다고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남편은 바람을 폈고, 부인은 자살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어떻게 웃음을 만들지 기대됩니다.

이제는 국민 연극이 된 <라이어>를 무려 15년전, 그러니까 1999년에 보았는데, 사실 그 뒤로 코미디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오해와 우연이 만들어 낼 희극적인 상황과 사건들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만의 재기 발랄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매:

산책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리뷰

산책의 <은밀한 기쁨> 리뷰




<맥베스> 3월 8일 ~ 3월 23일, 명동 예술극장 

이병훈 연출, 김소희 배우, 박해수 배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 이름들 앞에서 제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고전은 종종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또는 나의 기대를 뛰어 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데, 사실 그러한 경험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아쉬울 작품인 것 같습니다. 혹 <맥베스>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첫 번째 <맥베스>로는 무척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매진임박이라고 하니, 망설이시는 분들은 얼른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매:

에스티의 <맥베스> 리뷰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극장편> , 3월 15일 ~ 3월 30일, 남산 예술 드라마센터 

다음은 <남산 도큐멘타>의 공식적인 작품 소개글입니다.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은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을 선보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드라마인 독자가 계시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소개가 대체 무슨 말인지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실 이 소개만으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또는 재미가 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 그래서 그것이 사실도, 허구도 아닌,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순간들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상상해 보는 이 작품은 1962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 곳을 지나간 사람들, 그곳에서 올려진 작품들, 출연한 배우들, 그들이 연기한 인물들을 불러낼 것 같습니다. 그 과거들을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기대됩니다.

예매:

서유미님의 <남산 도큐멘타> 리뷰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노니 타루: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by 에스티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3년 11월 2일 토요일

구일만 햄릿

by 에스티

이 글은 첫 인상을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아래 링크의 글에서는 보다 상세한 공연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구일만 햄릿>과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연극의 스펙트럼", <안과밖> 제39호, 2015. 

***


그들이 <햄릿>을 택한 것은 무척이나 잘한 선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 뭔가 어설픈데, 괜찮은걸!' 보는 당시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에 드는 공연을 보았을 때만 얻는 어떤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마음 한켠이 계속 불편하고 무겁다. 

해고된 지 7년. 그날은 정확히 2469일째 날이었다. 아마 내가 그들 주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만 새 일자리를 찾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으리라. 이 순간 나는 이제 그만 상복을 벗어버리라고 말하는 거트루드가 된다. 

"햄릿, 그 어두운 상복을 벗어버리고 폐하께 좀 더 정답고 부드러운 눈길로 대하거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돌아가신 아버님만 흠모할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은 이승에서 영겁의 세계로 떠나는 법이다." (신정옥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