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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하여 :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2018/02/26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_

이예은

첫 인상 

  17세기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소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서사의 형식이나 키쉬, 까슈, 마들렌 등등 첫 장면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유럽 문화를 환기시키는 단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캬바레 공연의 모티프를 수용한 듯한 무대와 의상은 지극히 유럽적인 것을 판소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접합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접합은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명백한 표현들이 그러하듯 인위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작품의 장면 장면마다에 뚜렷한 기획적인 의도가 서려 있으면서도 매 장면이 기획된 것 이상의 활력으로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기에는 구차한 살아있는 표현들 덕분이다. 이 공연은 그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을 글로써 기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 작품의 재미있음을 글로써 찬미하기 위해 ‘신세계’, ‘일대실험’, ‘성스럽기까지 하다’ 등의 표현을 쓰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 표현들은 과장이거나 억지이다. 이 공연을 포함하여 이자람의 작품들은 ‘신세계’나 ‘일대실험’ 등의 수식으로 표현 받을만한 단서들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수식으로 찬미받기에는 사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이자람의 작품은 늘 예상의 범위 안에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다. 여기에 미덕이 있다. 안전한 기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바로 이 두 영역, 안전한 것과 재미있는 것이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자람의 작은 위대함을 느낀다.
  작품의 내용은 ⟪소녀가⟫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제도적, 관습적 담론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저 아이와 여자가 결합된 상태에서 티끌 하나 자신의 존재를 결박할 수 없게끔 만들고 마는 한 소녀가 ‘소녀’라는 단어에 깃든 소녀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 소녀는 ‘소녀’라는 관습에 대항할 생각도, 그 관습과 경쟁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존 관습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보통의 성장가와는 다르다. 작품 속 소녀에게는 관습마저도 ‘미지의 숲’과 다를 것 없는 미지의 것이다.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작품 속 대사와도 같이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생의 모든 절기에 몰입하는 소녀의 행동은 관습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작품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유럽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접합, 내용적으로는 제도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대비라는 뚜렷한 모티프들로 읽히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은 명확하게 기획된 이 모티프들이 결코 안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된’ 것이라는 말은 미안한 표현일 만큼 이 작품만의 스타일로 명확한 말들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만 안일하지 않은 것.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 대중적이지만 작가적인 것. 몹시 이루기 힘든 그 양자들 간의 공존을 이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계가 견실하게 느껴진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세계를 증발케 하여 그 이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주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매혹적인 꿈을 꾸게 하거나 지독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 

  동그란 무대를 세 명의 악사가 둥글게 에워싸서 앉고 빨간 드레스와 슈즈를 신은 배우가 무대 위에 입장했을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와- 무대 좀 봐!” 했다. 이것이 공연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고체적으로 주름 잡힌 겹겹의 커튼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만든 무대 프레임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이 육중한 커튼이 조명에 닿아 다채로운 세계의 질감을 만들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힘차게 형상화해 낸다. 커튼 왼편에는 불투명한 빨간 전구줄이 야무지게 두 줄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조명과 흰 조명, 그리고 푸른 조명이 닿았을 때 명확하게 변화되던 커튼의 다채로운 질감과 함께 빨간 전구줄의 반짝거리던 빛을 기억한다. 반닥반닥 빛나는 재질로 제작된 아담하고 동그란 무대는 경사가 져 있고 바닥에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 무대 오른편 위에 오뚝 솟아 있는 작은 단상이 있는데, 이 공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경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단호한 공간이다. 그리고 배우가 율동을 만들 때 날 서게 회전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빨간 치맛자락의 곡선은 무대를 보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는 명랑한 이미지들을 돋운다. 이 작품은 눈으로 씹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마치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느낌이다. 눈으로 차곡차곡 소화하는 진귀한 이미지들과 함께 귀를 열게 하는 숱한 소리들,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때 나는 소리 “캉 찰캉 찰캉 차르르”, 철로 만든 드레스를 부술 때 나는 소리 “뿌셔뿌셔”, 미지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두근두근두근두근”하고 “가슴이 쓰르르르”하는 소리는 또한 이 작품의 내용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공연을 보면서 많은 순간 작품에 흡인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각, 청각 이미지들이 축적되면서 정말 똑 소리 나게 터져 나오는 표현! 표현! 덕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노골적이고 요염하기도 하고 천진하며 우매하기도 한, 그래서 엄청 웃기기도 한, 그러나 앙큼하게 감추어진 속내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이질적 느낌들이 놀이를 만들고 있는 표현, 표현들. 아주 놀기 좋은 놀이터를 작품의 테두리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정말로 아주 잘 놀고 있는 표현, 표현들. 이를테면 “찰캉!” 소리가 나는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기 전 자유로운 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무대 오른 편 단상 위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바람으로 불어오듯 자유가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찰캉! 찰캉!”하는 철 드레스가 몸에 입혀지는 순간 커튼에 닿아 반사된 백색 조명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그 순간 고조되는 북소리는 그 공간과 시간에 폐쇄적인 테두리를 재빨리 둘러치는 듯하다. 숲을 발견한 소녀가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사방군데 몸을 비벼댈 때에는 너무도 천진하고 야해서, 동시에 자신이 천진한지도 야한지도 모른 채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소녀가 “무엇인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는” 미지의 숲을 기어코 활보하며 “두근두근”대는 장면은 어떠한 관습적 지(知)도 압도해 버리는 미지의 지적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어 사랑스럽다. 소녀가 늑대에게서 달아나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푸른 조명과 함께 저녁 공기를 머금은 듯한 시원한 숲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기에서도 다시, 자유가 느껴진다. 이렇게 풍성한 이미지들과 함께 구성진 대사 몇 마디가 칼을 꽂듯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어 서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칼을 꽂듯 호소하는 순간들처럼 말이다. 이토록 작가가 자신을 호소하면서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 관객과 동반하면서 작가가 할 말을 하고 마는 기술이 놀랍다.   

서사

  작품이 지닌 몇 몇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징으로만 이어진다. 철로 만든 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미지의 숲이 상징하는 것, 나무의 길과 물의 길이 상징하는 것, 느끼한 목소리의 늑대가 상징하는 것.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명징한 상징들은 온갖 제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 작품의 열망과 대조적이다. 결국 작품의 열망은 제압적인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허물어버리는 것에 있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서사를 볼 때, 왜 이토록 제압적인 틀에 매달려서 자유를 꿈꾸어야만 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제압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을 철저히 이분하다보니 전형적인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서사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상징들 뿐 아니라 서사의 구조 또한 지나친 전형성을 따르고 있다. 보통의 여자 아이로 태어나서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게 되고, 그 드레스를 부수어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숲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에게 희롱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도리어 늑대를 희롱하게 된다는 서사의 얼개는 전형적인 동화 다시 쓰기의 구조이다. 기존의 동화 다시 쓰기 구조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구조에 대하여 이 작품만이 취하는 어떠한 태도가 있었더라면 보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조로부터는 어떠한 재발견도 각성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지독한 수미상관식의 대사가 서둘러 에필로그를 장식했을 때에는 설마 이대로 끝을 맺을까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상

  그 많은 매혹적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장면이 끝나고 ‘서사가 싱겁다’는 인상과 함께 보다 큰 차원에서 작품의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위대한 작업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는 재미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이토록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생각해 본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동시에 대중적이거나 명확한 기획 의도를 확보한 것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단어로도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그저 예술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은 뭘까. 동시에 ‘재미’라는 것은 뭘까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그리고 작품에 고찰이 없다면 재미란 무슨 의미일까? 라고도 질문한다. 여기에서 고찰이란 앞서 말한 이 작품에 부재하는 서사적, 주제적인 고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도 고찰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 속 표현들은 시종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끈끈한 줄로 이어 관객과 함께 가려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모든 표현들을 다 주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는 바람에 어떤 표현에 머물러 관객이 생각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작품이 관객에게 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했던 말 가운데 “관객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작가가 토대를 두고 있는 판소리의 정신에서부터 발로된 것이라 생각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관객 사이의 끈끈한 탄성을 다져가며 철저히 공감의 영역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가니 말이다. 무대와의 끈끈한 탄성 안에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50분의 상연 시간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공연과 관객 사이의 끈끈함을 너무 믿으려 하다 보니 기껏해야 정성 어린 우정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과 귀가 지극히 세심하게 열리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어떠한 세계와 정말이지 열심히 맞닿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서사와 상징들을 매우 안전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로 이끌어낸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이를테면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과연 작품 안에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예술의 가치로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2014년 3월 2일 일요일

[두산아트랩] 몸-주체로서 여성, 소리-주체로서 소리꾼: 판소리 단편선 <추물 / 살인>

by 백인경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 그대의 이름은 ‘배우’!

그러나 ‘체화(embodiment)'라는 개념이 서양 연극사에 등장했던 18세기부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자유란 일종의 속박과도 같았다. 그 체화의 개념이란 한 인간으로서 배우 자신을 비워내고 텍스트가 묘사하는 등장인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도 그도 아닌 그 즈음에서,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대 위의 생명체들; 배역을 창출해내는 정신적 주체이자 그 자체로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에 봉헌되는 배우의 신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자 그만큼 더 가혹하고 냉철한 시선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여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텅 빈 무대 위에서 우뚝 서서 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어떠한가? 심청이도 되었다가 심봉사도 되었다가 돌연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연설명도 곁들이며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판을 끌고가는 소리꾼에게도 철저히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고충들이 있었을까? 이번 두산아트랩에서 진행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은 공연예술의 특정 장르를 떠나 무대 위의 다양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 스스로가 노래하는 소리꾼으로서,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판소리와 연극에 대한 오랜 고민과 실험을 무대화했던 이자람(@jjjjjam)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과 손을 잡고 주요섭의 단편 소설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자람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비슷한듯 또 다른 다양한 소리들을 만날 수 있었던건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진과 이승희는 각각 <추물 / 살인>의 소리를 맡아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끌고 나갔다.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노니 타루: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by 에스티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이자람의 비극하는 마음을 응원하며: 두산아트랩-5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

(질문할 기회를 놓쳐 공개 서신 형식을 빌어 씁니다.)

이자람 예술감독님께,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과연 창작 판소리에서 제대로 된 추임새라는 게 가능할까?사실 저의 질문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떻게 추임새로 반응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지만, 오늘 공연 중 <살인>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얘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의미에서)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판소리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원작을 읽고 가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꽤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 질문을 하는 저에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답이 먼저 설정되어 있었던 것 같네요.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관객들이 에너지를 (소리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판소리가 가진 매력이고 생명이지만, 이 당연한 명제도 질문에 붙여봐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같이 추임새도 하지 못하면서 판소리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들으며, 감독님의 실험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추임새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판소리로 만들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도 ‘벨칸토 판소리’ ‘고수 없는 판소리’ 등 모던 판소리 실험을 계속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적지 않은 관객들이 좀더 밝은 이야기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전통 판소리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걸 보면 이건 꽤 오래된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적 판소리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더 실험이 필요한 장르라 생각됩니다. 사실 감독님의 작품이 이미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그리고 이번에 <살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감독님은 이미 그길에 한참 들어와 계신 거죠.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추물> 역시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열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에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두운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을요. 밝고 경쾌한 이야기는 또 다른 소리꾼들이 만들어가면 되겠지요.



<살인>을 보고나서 한 10년 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주인공으로 나온 <몬스터>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비록 샤를리즈 테론이 그 영화를 위해 살을 찌워야 했던 반면, 이승희님은 얼마 전 <비빙> 공연 때와 비교해도 헤쓱해진 모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왔더니 제 친구가 그런 영화는 왜 만드는 거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 그때, 단지 연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제가 만들지도 않은 그 영화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용없더군요. 설명하고 심지어 수긍시킬 수도 있지만 보러 가게 할 수는 없더라구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이 틀렸나봅니다. 좋은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듣기만 해도 전율하니 보러 가지 않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그저 끌리는 사람이 만들고 또 끌리는 사람이 보러 가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살인> 텍스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냥 부정확한 상태로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전 오늘 <살인>의 음악이 좋았다는 몇몇 분들의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음악 자체나 악사님들의 연주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습니다. 훌륭했고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텍스트, 특히나 텍스트의 문체와 소리가 과연 어울리는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문학 장르와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편소설로 연극도 하고 영화도 만드는데, 판소리라고 안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살인>의 문체는 제게는 상당히 건조하게 들렸습니다. (원작 소설의 텍스트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남윤일PD님께 잠시 여쭤본 바로는 많은 부분이 다시 쓰여졌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텍스트는 이승희님이 아무런 음정을 넣지 않고 평이하게 읽어주시던 부분이 가장 듣기에 편했습니다. 특히나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매우 절제된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 같아서 거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첨가되는 게 제게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텍스트는 의미를, 소리는 감정을 각각의 채널로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와 텍스트가 좀더 긴밀하게 맞붙기 위해선 양자가 서로를 좀더 닮아가야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만들고 더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2014년 2월 21일 밤에

임승태 드림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그래도 키마이라는 불을 뿜는다: 言語, 소리, music의 창극 <서편제>

by 이진주
 
국립극장, 2013년 9월 18일 15시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가 영화와 뮤지컬을 거쳐, 이번에는 국립창극단의 품에서 창극으로 재탄생했다. 공연 시작 전, 국립창극단의 김성녀 단장은 최초의 창극이 공연된 지 110여년이 흘렀으며 파격과 실험을 통해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다. 창극은 백여 년 전 그 탄생 시점부터 현재까지도 실험 중이다.

  사자의 머리에 염소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 서로 다른 형상을 한 존재들의 결합인 키마이라(Chimaira). 창극 <서편제>는 유서 깊은 판소리의 눈대목들로 이루어진 소리와 극작가 김명화가 써낸 탄탄한 대본, 그리고 전체 줄거리의 배경을 이루는 양방언의 아름다운 기악곡들이 각각 머리, 몸통, 꼬리를 이루고 있었다. 극작과 두 종류의 음악은 서로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으면서, 각각이 가진 훌륭한 장점을 순간순간 충실히 드러내었다. 말로 된 대사는 사건을 발생시키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고, 판소리 대목들은 극중에서 음악이 필요한 부분에서 실제 음악으로 쓰였으며, 양방언의 음악은 배경을 이루면서 빈 곳을 메워주었다. 다만 세 요소가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서로가 역할을 넘겨줄 때 충돌을 일으켜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했다. 이 때 생기는 균열들은 창극이 이종 세포들 간의 혼종임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만 놀고 있다고 여겨지던 혹은 서로 불협하고 충돌한다고 여겨지던 각각의 요소가 조화롭게 만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앙상블로 큰 감동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