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8일 금요일

<랑랑 라이브 인 런던>: “무엇이 나와 랑랑 사이를 갈라놓는가?”

by 이진주
메가박스-코엑스에서 2014년 3월 26일 저녁 7시 30분 


1. 목적이 서로 다른 관객들

  어찌하다보니 ‘장애인․노인과 함께하는 GV’의 초대권이 아직 장애인도 노인도 아닌 내 손에 들어왔다. 극장 안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회를 공연장이 아닌 영화관에서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에 대해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가진 듯했다. 얼음 섞인 음료수의 남은 양을 용감하게 후루룩 거리거나 랑랑이 잘생겼다고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진짜 콘서트홀에 앉아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을 매섭게 쏘아보면서 곡이 끝날 때마다 뜨겁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어떤 부류였냐 하면…그냥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 관객들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라이브 공연을 녹화해서 영화관에서 다른 관객들과 감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2. 옆 상영관의 포탄소리

  그러던 중에 계속해서 들리는, 피부까지 울리는 초저음. 피아노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고, 연주회 도중에 천둥이 울려서 녹음된 것도 아니다. 돌연 궁금해졌다. 옆방에서 도대체 무슨 흥미진진한 영화가 상영 중일까? 뭔가 ‘구궁’하고 계속 반복되는데… 건물이 무너지거나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는…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었을까?

  실제 공연장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면, 나는 지금 이 공간에서 내가 들을 수 있는(혹은 들을 수밖에 없는) 소리들 중 일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분명 영화관 측의 ‘배려 없음’에 의한 ‘사고’이다. 다른 영화도 아니고 음악 연주회를 상영하는 방에 다른 사운드가 침범하도록 허용하도록 한 것은 어이없는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잊어버릴 만하면 들리는 이 초저음이 나를 자꾸만 랑랑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지구를 구하려면 약간의 소음은 어쩔 수가 ...

3. 화려한 카메라 워크

  피아노 공연을 사랑하는 관객들은 공연장에서 자기 나름의 취향의 각도가 있기 마련이다. 연주자의 표정을 보고 싶다면 오른편을 선호할 것이고, 연주자의 들썩이는 뒷모습이 섹시하다고 생각하거나 손가락과 페달 퍼포먼스를 보고 싶다면 왼편이 유리할 것이다. 또 가운데 좌석에서는 연주자의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을 촬영한 이번 영상에서는 연주 모습을 왼편, 오른편, 가운데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중에서 내려다 본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공연장 내부의 구조도 자세히 볼 수 있고, 다른 관객들의 표정도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다각도로 랑랑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눈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손놀림도 다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정작 그의 음악과 소통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수시로 움직이는 앵글은 분명히 그 이유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콘서트 영화는 모든 각도의 그림을 ‘강제로’ 제공함으로써, 나의 감각이 시각에 더 많이 집중되도록 했다. 청각은 그만큼 주의력을 빼앗겼다. 그리하여 앵글이 이동할 때마다, 즉 화면이 끊어질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소리도 같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4. 쇼맨십의 왕+클로즈업 샷

  랑랑의 쇼맨십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노는 손을 지휘하듯이 살랑거리는 버릇이나 크게 움직이는 몸, 그리고 자신의 연주에 스스로 심취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관객석으로 얼굴을 돌려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치게 자주 비추는 클로즈업 샷이었다.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눈을 뒤집거나 좌우로 굴릴 때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키득거렸다. 설사 랑랑이 아닌 유아인이었다 해도 그렇게 큰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얼굴이 예쁘긴 어려웠을 터. 더구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동안에 드러나는 다른 이의 표정을 클로즈업 화면으로 보는 일은 강하게 부담스러웠다. 이유는 물론 내가 그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지시된 극중 연기가 아닌 실제 행위라고 인식하는 데서 오는, 관음적 상황에 대한 불편함일 수도 있다. 나는 차츰 랑랑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목 위로는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클로즈업은 실제 연주회장에서는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가장 비싼 티켓을 산다고 해도, 혹은 랑랑과 친분이 있어서 피아노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고 해도 그렇게 확대된 랑랑의 얼굴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다른 영화에서 클로즈업 장면과 달리, 이것은 생생하기보다는 내가 실제 연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재생되는 화면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5. 영상과 소리의 미스매치

  클로즈업 샷과 더불어 다소 느끼하고 사색적으로 해석된 듯한 모차르트를 용케 참아내고 드디어 랑랑의 화려한 기교를 볼 수 있는 쇼팽에 이르렀다. 첫 발라드가 끝나고 드디어 나는 한숨을 크게 내뱉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 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두 번째 쇼팽의 중반부 쯤, 화면이 살짝 삐끗하더니 어느새 소리가 랑랑의 연기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다. 그 상태로 1분간은 웃겼지만, 더 이상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영관을 나와서 땀을 삐질 거리고 있는 관계자에게 “저 영상이랑 소리가…”라고 말하고 있는 사이 몇 사람이 더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티켓 값이 무려 2만원이라던데… ㉦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극장과 내외하는 사이 1] 극장을 만나다,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

by 서유미


남산도큐멘타: 연극의 연습 - 극장 편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출: 이경성 (크리에이티브VaQi)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

얼마 전 수업 과제로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 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장 자크 루빈, 『연극 이론의 역사』) 글의 필자는 연극의 기저가 되는 텍스트(여기서 텍스트는 연극의 문학적 텍스트, 즉 희곡을 의미함)가 연극에서 가지는 절대적인 권위에 대해 서술하면서, 연출가의 창조적 기량조차도 텍스트의 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출가는 ‘텍스트의 공명상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 연극이 서야 할 자리인 무대 위에서, 종이 위에 있어야 할 텍스트가 그 힘을 휘두른다면 연극은 무대 저편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편한 마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연극은 ‘오로지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들’로 무대를 가득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은, 연극만이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배우들은 “우리 연극은 연출이 중요합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텍스트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능을 연극 내에서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즉, 텍스트에 봉사하기는커녕, 텍스트를 완전, X무시해버린 연극이다.

도큐멘타  (*줄거리 노출*)

이 연극의 주인공은 62년 드라마센터로 개관하여 현재 남산예술센터로 불리는 ‘극장’이라는 공간이다.
드라마센터 개관공연인 <햄리트>의 독백을 하는 배우가 무대 한 가운데 서 있다. 신파조의 독백을 하는 도중, 배우 한 명이 무대 뒤편에서 한 무리의 관객들을 이끌고 오며 그들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이들은 ‘유령산책’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관객들로 사전에 신청을 하면 배우들과 함께 극장 주변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하나씩 방문한다) 독백을 마친 배우 앞에 서서히 조명기가 내려오고 배우는 그 조명기 중 하나를 뺀다. 여섯 명의 배우들은 “우리의 연극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연극을 소개한다. 그 중 핵심은, “우리의 연극의 주인공은 극장입니다” 일 것이다. 다음으로 62년 <햄리트> 장면, 극장이 자금난을 겪었던 당시 설립자인 유치진과 김종필의 대화 장면, 자금난으로 연극이 상연되지 못하고 결혼식, 연주회장, 연희장 등으로 활용되었던 역사적 고증 재현 장면 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빈 무대. 텅 빈 무대에 극장의 이 곳 저 곳을 보여주는 영상이 투사된다. 무대, 객석, 무대 천장의 조명기, 조명기가 내려갈 때 맞물리는 철제 기기들, 바닥, 무대 뒤편 공간, 기계적 무대, 헐벗은 공간, 배우도, 관객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존재하는 극장 그 자체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극장의 ‘독백’. 막간극으로 유치진의 희곡 <대추나무> 한 장면이 끝나면 배우와 연출이 극장 주변을 다니면서 인터뷰 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투사된다. 이어지는 ‘남산 오디션’ 장면에서는 ‘오디션‘이라는 극장과 조우하는 특정 형식을 빌려 극장 주변에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인 중앙정보부의 고문 장면을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다시 한 번 <햄리트>. 마지막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 장면, 모두가 죽어 버리는 그 순간이 펼쳐진다. 무대감독(여자 배우)은 햄릿과 레어티즈가 쓰러져 죽은 곳에 (교통사고 현장에서 그러하듯) 흰색 분필로 마킹한다. 배우들은 “우리의 연극은”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텅 빈 무대, 극장 미니어쳐가 놓여 있다. 무대 조명이 이것을 협소하게 비추고, 조명기가 (마치 인사하듯) 무대 바닥까지 내려오면, 암전. 연극이 끝난다.




극장과의 첫 만남, 감상

프로그램북에서는 이 연극을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
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글만 보더라도 텍스트에 봉사하는 연극에 제대로 반기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에서 극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텍스트 외부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좋았던 것은 여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깜깜한 극장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던 극장의 독백 장면이다. 극장의 이 곳 저 곳을 조명이 비춘 후, 암전이 되면 극장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떠나는 장소. 그러나 그들과 상관없이 늘 이 곳에 꿋꿋이 존재하는 극장. 이 극장이 그 짧은 순간 동안, 처음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공연에서 공연 그 자체를 위해 숨겨져야 했던 것들이 노출되는 순간들, 예를 들면 조명기가 바닥 끝까지 내려오는 장면은 극장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대 천장에 숨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만을 수행해오던 투박하고 묵직한 조명기들이 처음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순간, “숨겨왔던 나의~” 노래가 떠오르면서(?) 극장과 처음으로 가장 솔직한 상태로 대면하였다. 희한하리만큼, 괜히 통쾌하기도, 후련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조명기가 무대 바닥까지 천천히 내려올 때에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에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듯 했으며, 커튼콜 때 여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에서도 굳이 조명기 뒤에 서서 인사를 하는 것 또한 이 연극의 주인공이 극장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지시적인 장면은 좀더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겼다. 극장 모형이 빈 무대 위 홀로 남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마지막 장면. 모형은 단지 모형일 뿐이고, 극장이라는 진짜 주인공이 그 뒤, 그 앞과 그 옆, 온 곳을 둘러싸고 있는데…… 자신을 그대로 모방한 모형 극장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본 진짜 극장이 조금 섭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우들은 유쾌했다. 완전히 비-재현적인 연극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 방식은 철저히 재현적이라는 점은 또 다른 재미를 낳았다. 중간 중간에 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고 느꼈던 진솔한 이야기들도 들었으며, 배우들의 말로 극장을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극장이 주인공인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단지 극장을 더 드러내고 극장에 의해 소비되는 기호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은 가끔은 웃음을, 때로는 불편함을 낳았지만, 그 장면들이 생산해내는 모든 감정들은 내가 배우의 연기를 보았을 때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과 관계하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여기, 이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새로운 지점에서, 극장과 나는 만났다.


+남산예술센터, 극장을 나오며

프로시니엄무대가 주류인 요즘의 극장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특히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설렌다. 반원형 돌출 무대인 이 극장에서는 어느 자리에서도 무대와의 거리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배우와 무대, 연극에 더욱 쉽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로 이 곳에서 본 연극들은 그 내용과는 상관 없이 왠지 모르게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 샤우뷔네 극단의 <햄릿>은, 안팎으로 제대로 미쳐서 극장 공간을 여기 저기 누비고 다니던 싸이코 햄릿의 정신질환이 내게 옮겨 올 것만 같은 두려움을 남겼었고, <천개의 눈>을 보면서는, 타로의 미궁 속에 나 또한 자로와 함께 갇혀버린 상태에서 깜깜한 극장 안, 마치 천 개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남산예술센터에서 본 연극의 기운과 그 여운이 나에게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은, 이곳의 특수한 공간적 구조가 연극에게 주는 힘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극장을 나오며 갑자기 체홉의 단막극 <백조의 노래>가 떠오른다. 스베뜰로프는 몇 십 년 동안이나 연기 생활을 했던 그 극장을, 아무도 없는 밤 홀로 남아 처음으로 마주한다. 조명이 꺼지고 모든 소도구들이 제멋대로 놓인 무대는 더 이상 환상을 자아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노출된 채로, 단지 텅 빈 죽은 공간으로 처참히 전락한다. 만약, 스베뜰로프가 극장의 숨소리를 들었더라면, 극장이 건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자신이 이끌어 온 희극 배우로서의 인생이 절대 허황된 시간들의 모음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

(* 사진 및 동영상 출처는 남산예술센터 공식웹사이트(www.nsartscenter.or.kr) 및 남산예술센터 페이스북(www.facebook.com/namsanarts))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키스 앤 크라이> -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영화

by 김재영

영화는 ‘과거'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비춰준다. 영화 제작은 영화 상영 이전에 발생한다. 영화관 스크린 속 인물은 지금 내 앞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카메라 앞에서 움직였다. 나는 항상 카메라보다 늦게 영화를 보는 것이다. 설사 그 영화가 미래의 사건을 다룬 SF영화라 할지라도 그 이미지가  ‘과거’에 속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공연예술이 관객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함으로써 현재의 사건을 보여준다는 점과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그리고 ‘상영’된) <키스 앤 크라이 (연출 : 자코 반 도마엘)>에서는, 카메라맨이 무대 위에서 찍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투사함으로써 ‘과거’의 이미지가 아닌,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사건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은 카메라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사진출처 : LG아트센터)

일반적인 영화 상영이 카메라의 녹화, 재생 기술을 이용하여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의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면, <키스 앤 크라이>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보기만 할 뿐, 본 것을 녹화한 후, 재생하지 않는다. 이는 곧, 공연이 매회 반복될 때마다 카메라맨이 매번 같은 움직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번째 씬에서 카메라맨이 트랙 인(track in)하여 피사체에 접근했다가 좌상향으로 움직이고, 다시 우하향한 후, 트랙 아웃(track out)하여 피사체에 멀어졌다면, 카메라맨은 매 공연의 첫번째 씬마다 이러한 움직임을 반복해야 한다. 카메라의 녹화, 재생 기술이 제거됨으로써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화 이미지는 과거에서 현재로 바뀌며, 관객은 스크린의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카메라맨의 디테일한 동작을 공연의 일부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는 비단 카메라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존재하는 영화 스탭들, 이를테면 조명 스탭, 콘솔 컨트롤러, 연출가와 같은 이들의 영화 찍는 행위 자체가 공연의 일부로서 관객에게 보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관객의 눈은, 스크린 상의 영화 이미지와 무대 위  ‘수행자’들의 움직임을 동시에 보게 된다. 무용수들의 손가락 춤은 카메라에 의해 매개되어 스크린 상에 나타나는 동시에, 미디어의 도움 없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무대 위 동작으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소품 담당 스탭이 물 속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동작은 무대 위의 행위로서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동시에, 카메라에 포착되어 스크린에 나타난다. (물론 이 경우에, 소품 담당 스탭의 움직임은 카메라 프레임 바깥으로 숨어버리고, 스크린 상에는 화면을 가득 메운 물 속에 잉크 방울이 떨어져 서서히 섞이는 장면만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무대 위 사물들 역시 공연과 영화의 일부로서 동시에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그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나레이션에 맞추어 장난감 기차가 무대 위에 미리 세팅된 트랙 위를 따라 움직이고, 장난감 기차의 측면에 부착된 초소형 카메라는 트랙을 따라 배치된 여러 오브제들, 조그마한 나무, 가로등, 도로, 동물 등의 모형을 포착하여 스크린 상에 투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 존재함으로써 스크린 상에 등장하지 않았던 스탭들이 이제 자신들이 찍고 있는 영화 이미지와 동일한 무대 공간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롭다. 영화 이론가인 장 루이 보드리가 지적하듯이, 카메라와 영사기라는 기계 장치의 작동 때문에 관객들은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 있는 소재(피사체)로부터 완성된 영화 작품으로의 변형을 볼 수 없다. 관객은 영화관에서 완성된 작품을 볼 뿐이며, 촬영 단계에서의 화면분할과 후반 작업 단계에서의 편집 과정을,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소재(“객관적 실재”)가 완성 작품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진행 과정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키스 앤 크라이>에서 관객은 완성된 작품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 존재하는 재료들이 어떤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겨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으며, 비록 이 경우에 편집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적어도 촬영 단계에서 스탭들이 조명과 소품,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의미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와 달리, <키스 앤 크라이>에서 카메라는 시간뿐만 아니라 관점(피사체를 보는 위치)조차도 독점적으로 점유하지 못한다. 관객은 언제라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무대 위 스탭들과 무용수들, 오브제들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환영적인 이미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제 카메라의 시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무대 위 움직임과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다.

(사진출처 : LG아트센터)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관객들이 스크린과 무대 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더라도, 스크린을 통하지 않고서, 즉 직접 무대 위 공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연이(무용수들의 춤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무용수들의 손가락 춤은 조명, 특수효과와 더불어 스크린 상에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서 그들의 손가락은 매우 작기 때문에 관객이 스크린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들의 손가락 움직임을 보기에는 불편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LG아트센터의 2층과 3층에 앉은 관객이 무용수의 손가락 움직임을 세세히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공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야만 한다. 관객은 영화 이미지가 생산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연 자체의 내용과 무용수의 미세한 동작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스크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이는 스크린에 표현되는 이미지에 매혹되어 공연을 만족스럽게 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움직임들을 영화가 아닌 공연으로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여전히 피사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상의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관객이라도 무용수의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관절의 떨림, 힘을 줄 때마다 변화하는 손등의 핏줄 등을 카메라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무용수의 손가락은 관객을 향해서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카메라 프레임에 갇혀서 움직이는 것이다. 카메라맨이 매 공연마다 같은 카메라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듯이, 무용수의 손가락 역시,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혹은 안으로 혹은 바깥으로 움직이며, 이는 매 공연마다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용수는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각틀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용수의 움직임을 강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마지막에 가서야 없어진다. 영화 속에서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만나게 된 남녀의 손가락으로부터 카메라가 트랙 아웃하면서 배우의 팔과 가슴, 몸통 전체가 드러나며, 별안간 영화 이미지는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이제 카메라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두 남녀 무용수는 더 이상 카메라의 화면을 의식하지 않고, 관객석 쪽으로 시선을 두면서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카메라 화면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무용수의 움직임이 그 프레임을 깨고 나와 관객 앞에 섰을 때, 나의 시선이 꽁꽁 묶여 있던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대 위에 존재하고 있던 배우들이 마지막 순간 영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연극 <홍당무>와 반대되는 움직임이다. http://www.drama-in.kr/2014/02/carotte.html) 그리고 무용수들 역시 자유로워 보인다. 작고 미세한 세계로 한정되었던 사각형의 틀이 무한정 줌 아웃(zoom out)되면서 공연장 전체를 담아낼 수 있는 거대한 틀로 바뀌었다고 할까. 아주 잠깐의 장면이지만, 작고 세밀한 세계를 포착하여 스크린 상에 확대시켜 놓았던 카메라가, 이제 거대한 공연장 전체 뒤로 물러나 무대 위에 작지만 자유롭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세워 놓았다는 점에서 연출가의 영화와 공연의 공존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난다. 혹여나 이 공연이 카메라의 시선 위주로 진행되는 것에 불만을 느꼈을 관객조차도 바로 이 마지막 장면에서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실컷 웃지 못한 나

By 산책

(* 줄거리와 결말이 노출됩니다.)

매표 직원까지도 배우처럼 분장을 하고 관객들을 맞는다. 그러니까 아래 사진처럼 색색의 옷을 입고 배시시 웃으며 “별도 프로그램은 없고요, 휴대 전화는 꺼주세요.”라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이다.


극단의 제안인지, 두산 아트 센터의 시도인지 모를 그 누군가의 세심한 준비에 고마웠다. 극장에 들어 가기 전 배우들의 모습을 미리보기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매표하는 순간까지 공연의 일부로 만들어 준 기분이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기이하게도(?) 한 무리의 남자 관객들이 있었는데, 단체 관람을 온 모양이었다. 극장 안에서 이렇게 많은 한 그룹의 남자 관객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묘하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웃으러 온 관객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 작품을 예매할 때 나는,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속 시원히 웃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삐뚤삐뚤한 벽과 문, 노랑, 보라, 분홍, 연두, 파랑 등 과도한(?) 색을 칠하고 입은 배우들은 마치 미술 작품처럼 “보는” 재미를 주었고, 남편과 몰래 여행을 간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번호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 사람씩 지우거나 (결국 그 여자를 찾아 낸다) 시체를 참치 안에 넣는 (경관도 속일 만큼 그럴 듯 하다) 기상천외한 해결책들도 물론 재미있었다. 시체를 처리하느라 바다에 버린 참치가 발견되면서 참치가 사람을 공격한 것으로 오인되고, 참치주의보가 내렸다는 사실도 우습다. 또한 이 소식을 전해주는 얀커 순경은 극 내내 관객을 웃기기 위해 등장한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말장난이나 그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태도, 아니 무엇보다 기름을 발라 머리를 넘긴 그의 모습 자체가 웃음을 유발한다.

이렇게 재미있고 우스운 점들이 많은데, 나는 왜 실컷 웃지 못했을까. 나는 순수하게 웃음을 터뜨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것은 연극을 좋아하는 내가 연극을 공부하면서 감수해야 하는 십자가일지 모른다. 손뼉까지 치며, 그야말로 포복절도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을 부러워하며, 어떻게 저만큼 웃을 수 있지 궁금했다. 이렇게 생각은 생각을 낳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를 반추하면서 나는 내가 앉은 그 자리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 있었다.



요한나는 남편의 친구로부터 “냉동참치”같다는, “녹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며, 시간을 들여 녹여봐야 맛도 없다”는 자신에 대한 남편의 평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과 여행을 간 여자는 바로 자신의 동생이다.

요한나가 처음부터 남편을 죽이려 했다면 괜찮았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전생 때문이라며, 독을 탄 와인을 마시고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열려 있던 마개를 닫아주고, 차갑게 마실 수 있도록 냉장 보관 해 준 마리사의 배려로 요한나는 살고, 토마스는 죽는다. 이렇게 내가 어쩌지 못하는 삶의 우발성은 때때로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끌어 버린다. 이러한 점에서 삶은 경이롭지만 한편 두려운 것일 테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두려운, 산 사람을 절대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이다. 그러나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죽음은 너무 가볍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고, 속을 파낸 참치 안에 그 시신을 넣어 바다에 버렸다. 남은 참치는 스테이크로 즐겼다. 그녀들은 "유쾌하게 사건을 간단히 요약"했으며, "통쾌하게 고민을 역전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이 잘못을 저지른 토마스를 깔끔히 해결한 것을 보고 통쾌하기 보다는 깔깔 웃으며 참치를 먹으러 포르투갈에 가자는 그녀들의 모습에 끔찍함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웃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다. 이 역시 오로지 내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은 웃음이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웃음이란, 실제적이거나 또는 상상적이거나 같이 웃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 말하자면 공범의식 같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극장에서 관객의 웃음은 장내가 만원일수록 더 커진다는 것은 누누이 이야기된 바가 아닌가? 다른 한편, 희극적 효과를 지닌 많은 것들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질 수 없으며, 결국 일정한 사회의 관습과 관념과 상호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수없이 지적된 것이 아닌가? 베르그손, <웃음>, 김진성 옮김, 종로서적, 1997.

이러한 점에서 나는 극장 안에서 소외된 한 사람이었다. 하필 내 자리는 무대에 걸린 거울에 내 얼굴이 그대로 비치는 자리였는데, 내가 너무 양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신경 쓰였다. 사람들이 깔깔 웃는 재미있는 연극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꾸며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외도, 자살, 살인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이것을 현실적인 사건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 슬프다―비현실적으로 다루고, 해결한다. 이는 관객들에게 ‘일어 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안전감을 준다(비록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런 인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이런 일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깜빡 속인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은 로비에 나와 관객들과 사진을 찍어 주는 배우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처럼 배우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외도도, 살인도 (다행히) 잊게 되는지 모르겠다.

* 김소연, "유쾌, 상쾌, 경쾌, 통쾌", <마음사전> 참조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유미리 작, 성기웅 연출 <정물화>

https://www.fb.com/12thTTS/posts/614370755303375

연극 <정물화>
관극 : 대학로예술극장, 3/14
작 : 유미리
각색/연출 : 성기웅

by 이예은

Prologue
교실 문이 열린다. 녹이 슨 난롯가에는 얼굴이 벌개진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고, 낯선 선생님이 들어온다. 예를 들면 삼월 이일, 한 교실에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 모여 앉은 그 첫날, 교실의 천장은 늘 조금 높았다. 공기의 한 군데는 너무도 뜨거웠고, 나머지 대부분의 공기는 차가웠다. 난롯가에 앉은 몇 몇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춥다며 검정 스타킹의 다리들을 교복 치마 안에서 심하게 흔들어댔다. 시끄럽고도 고요하다. 호기심 가는 아이를 발견하여 쳐다보다가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린다.


+
  초연 때의 선돌극장 무대보다 더욱 단정하고 반듯하게 정돈된 무대였다. 재공연을 보고나서야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들리는 느낌이다. 이것은 장면과 장면 사이 순간들에 대한 것이리라. 이 연극에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사이의 장면들이 많다. 그 장면들은 마치 우리 일상의 틈 사이에 반투명하게 서 있는 시(詩)처럼 어중간하게 서 있다. 인물들의 대화가 오고 가는 그 틈 사이에, 혹은 한 인물이 움직이고 대사를 하는 그 틈 사이에 무언가 불투명한 것이 끼어 있다.

  그것은 이 연극이 다루고 싶어 하는 시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 연극에는 문학이라는 소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연출의 행간에 문학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에 빗대어진 것인지, 아니면 문학과 연극 사이의 것인지, 어쨌거나 이 연극의 행간에 녹아 있는 잘 알 수 없는 것. 나는 그것을 정서라고 느끼고 있었고, 그 정서가 이 작품의 대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언가 잘 알 수 없는 것. 그것은 나나코(전수지 분)가 왜 죽고, 후유미(류혜린 분)의 언니는 왜 죽었는가에 관한 궁금증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궁금증이었다. 이 교실 안에 마치 태초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그저 처음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죽 존재할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연극 속을 떠다니는 이 알 수 없는 힘의 매력은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상세 감각들과 혼재해 있다는 점에 있다.

+
  반장 치하루(박민지 분)와 덤벙대는 카오리(서미영 분), 보이시한 나츠코(김희연 분)를 바라보고 있으면,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그 인물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껴버렸는지, 여기저기에서 ‘나는 너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어’라는 듯 바쁘게 웃음의 리액션을 보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인물들이 어느 여고의 교실에든 있을 법한 ‘바로 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고 시절에 꼭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 모든 제스쳐와 표정과 말투와 웃음 소리들. 예를 들면 반장 치하루가 종이에 코를 박고 엎드려 글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쓰는 포즈며, 시험 용액을 들고 사랑의 주문을 외우듯 과학 공식을 외우는 동작, 카오리가 머리를 반만 땋은 채 헐레벌떡 교실에 들어오는 모습, 그리고 가슴 만지기 놀이. “육이오가 왜 일어났게?”라고 물어보고 “왜?”라고 하면, “방심해서”라면서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던 우리 여고 시절의 가슴 만지기 놀이가 떠오른다. 우리가 아는 유미리 작가의 고독한 정서, 그 이면에는 그녀의 유년 시절에도 분명 이렇게 빼곡하게 들어 찬 어느 상세한 유희의 기억들이 있었으리라.

이런 상세 감각은 성기웅 작/연출의 작품 <삼등병>에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건만, 마치 군대에 가면 정말로 저러할 것 같은 세 명의 남자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 같은 그 느낌. 이 느낌은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클레이메이션의 캐릭터가 인간의 제스쳐, 인간의 말투를 너무도 완벽히 따라해 내어, 오히려 그 캐릭터들이 더 인간 같아 보이는 순간에 느껴지는 궁극의 호감 같은 것이다. 어떤 재현 이상의 재현. 너무도 ‘그’ 인물인 것 같은 것을 넘어설 정도의 ‘그’ 인물 같음. 연극에서 인물 창조란 재현이냐 탈-재현이냐의 문제라기보다 결국 그 인물을 어느 정도 살아있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닐까. 스타일보다는 결국 실제적 전달력이 중요하다.

  <정물화>에서 이러한 상세 감각은 아주 작은 것들의 긴밀한 포착들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포착들은 매우 작고도 다양하다. 이 연극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나의 장면에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은 히라타 오리자 작/성기웅 연출의 <과학 하는 마음>에서처럼 군데군데 따로 모여 앉은 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터뜨려 관객이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를 선택하게 하는 명징한 다발성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하나의 장면에서 모든 것들이 동시에 말을 하는 연출로 녹아 있다. 이 연극에서 관객은 하나의 장면 안에 있는 그 작고 상세한 것들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
  <정물화>에서 치하루, 카오리, 나츠코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상세한 감각들은 이 하나의 교실에서 나나코와 후유미가 만들어내는 망령 같은 비현실적인 기운들과 공존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여고생의 정서 안에서 가장 이상한 두려움 같은 것으로 느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학교의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을 거무튀튀한 변태의 눈빛, 다른 하나는 바로 나츠코와 후유미 사이에서 오고가는 그것. 예를 들어 1분단 맨 뒤에 앉아 있는 조금 낯선 아이가 수업 시간 내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 굳이 단어로 표현하자면 동성애에 대한 이상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사진출처: https://www.fb.com/12thTTS/posts/609395499134234

  예를 들면 이 두 가지의 이상함 같은 것을 둘러싼 알 수 없는 것들이 여고 시절의 교실 안을 군데군데 망령처럼 떠 다녔던 것 같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것을 마다 않을 만큼 현실적으로 떠들어대면서도 한켠으로는 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기묘함에 일제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귀를 기울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단지 동성애 혹은 변태라고 축약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떠한 알 수 없는 기운에 대한 증폭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와 같은 기묘함에 대한 강한 거부와 기대와 두려움과 기다림과 떨림은 늘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러한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나면 아이들은 일제히 “이건 비밀이야.”라고 말하면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 연극 역시나 비밀과 소문에 집중한다. 후유미의 언니가 왜 죽었는지, 나나코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관객은 이 작품만을 봐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은 연극 속에서 철저히 비밀에 묻혀 졌고, 그리하여 소문만 무성한 채로 끝이 났다. 만일 사건에 의한 플롯 진행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어리둥절한 연극일 수 있다. 이 연극은 부러 비밀과 소문으로 사건들을 철저하게 삭제하고 그 자리에 대신 사건들을 둘러싼 기운들을 채워 넣는다. 나나코가 연극 중간 중간 계속해서 귀신들과 교신하는 것, 그리하여 처음부터 이 연극을 채우고 있었던 이유 모를 죽음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은 나나코와 후유미 사이에 오고 가는 이유 모를 설렘과 함께 연극 중간 중간을 떠다니는 초월적인 기운이다.

  <삼등병>과 <정물화>. 군대와 여고. 이 두 세계는 철저히 교차되지 않을 법한 세계이지만, 이 두 세계를 떠올릴 때 공통적으로 환기되는 느낌이 있다. 무언가 정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거대하게 초월적인 느낌. 우리는 매우 상세한 현실을 살아갈 때 어쩌면 가장 거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관계로, 나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 나는 여고 시절에 그러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과 방금 끝난 수업 시간의 선생님 흉을 깨알 같이 보거나 어제 본 TV 프로그램의 남자 주인공 이야기를 피 튀기며 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 가 귀를 막고 시를 쓰기도 했다. 아, 그 폭발적인 잡담과 폭발적인 고요. 돌이켜 보면, 세속과 초월이 어찌 그토록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존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 시절은 그 폭발적인 것들이 너무도 작고 좁은 우리 교실, 내 책상 위에서 모두 공존하던 아주 이상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치하루, 카오리, 나츠코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상세한 감각도, 나나코와 후유미 사이에서 오고 가는 지극히 초월적인 감각도 모두 하나의 교실 풍경 안에서 동등하게 회고된다. 군대에 가보지 않은 내가 <삼등병>을 보고도 마치 그들이 된 듯 아주 좁고도 낱낱한 그들의 상세 감각을 느꼈듯이, 여고를 나오지 않은 남자 어른들도 <정물화>를 보면 이러한 상세 감각들을 느낄 수 있을까?
   
+
  이 연극은 계속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싶다. 마치 어린 시절의 사진첩을 긴 세월이 흘러 다시 꺼내어 보았을 때, 그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제야 기다림에 지친 인물처럼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듯이. 이 연극은 시차를 두고 곱씹고 곱씹어서 계속 그 장면의 틈새에 있는 보이지 않았던 것,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계속 발견해 가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 속에서 새로이 시(詩)가 될 수 있는 순간을 재발견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왔는데 문득 문학이 그립다.

상세감각
예를 들면 허진호 감독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보여준 지독히도 상세한 감각. 수박을 먹을 때에는 씨를 멀리 뱉기 놀이를 한다랄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여러 명이서 먹을 때에는 미리 아이스크림에 금을 그어 놓고 먹기를 시작한다랄지, 증명사진을 찍을 때에는 꼭 앞머리와 옆머리로 얼굴을 최대한 가려 얼굴을 작게 나오려고 한다랄지... 누구나 사소하게 공감할 법한 감각들을 다양하게 포착하여 비주얼라이징함으로써, 사건에 의한 플롯팅이 아닌 그 이면에 흐르는 섬세한 정서로써 플롯팅을 이끌어가는 작업을 본인은 ‘상세 감각’의 연출법이라고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세 감각의 연출법은 특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연출을 할 때에 정밀하게 요구되기도 하는 일반적인 연출법이다. ㉦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정물화>와 <오필리어>

by  에스티
존 애버렛 밀래John Everett Millais, <오필리어>, 런던 테이트 미술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에서 공연한 <정물화>(유미리 작, 성기웅 연출)에는 실제로 등장인물들이 정물화를 그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무대 전면에는 하얀 액자틀이 설치되어 있어서 관객들이 액자 속 움직이는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대 뒷면에는 또다른 '프레임'--창틀--이 삼중, 사중으로 겹쳐져 있다.) 그런데 작품 속 대사들을 듣고 있자니 작가가 생각한 정물화는 위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미리의 희곡은 오필리어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고 하는데, 작품 속에서 나나코가 쓰는 글은 이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이 많고, 또한 극의 마지막 부분에 히가시 수녀가 나나코의 죽음을 전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손에 꽃을 쥔 모습 또한 정확하게 이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유미리의 <정물화>는 이 그림을 극으로 표현한 시도였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근데 이 그림이 정물화인가? 아니다. 그럼 풍경화일까? 모르겠다. 작품 수업 놀이에서 창밖을 보면서 정물화를 그리라고 했던 나츠코가 정물화와 풍경화를 헷갈려했던 것처럼, 이 그림 역시 풍경을 묘사한 듯 하지만 정물화 같은 느낌을 받게한다. 정물화를 영어로는 Still life, 독일어로는 Stilleben이라고 하는데, 17세기에 유행했던 정물화들은 대체로 '꽃과 죽은 생물'로 채워져 있다. 왜 그렇게 랍스터가 자주 등장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물 안에 있어야 할 가제가 식탁 위에 꽃과 함께 놓여진 것처럼, 물 밖에 있어야 할 오필리어가 꽃을 쥐고 물에 떠 있는 이 모습은 둘 다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래서 소리없이 조용한(still) 생명체인 것이다. ㉦

Anne Vallayer Coster, <랍스터가 있는 정물>

2014년 3월 8일 토요일

450년만의 3색 만남 1 - <맥베스>

국립극단 <맥베스>

2014년 3월 8일(토)~23일(일)
명동예술극장
공연문의 1688-5966 (국립극단)

에스티의 첫날밤에 (프레스 리허설)


(재)국립극단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 세 편을 연속해서 무대에 올린다. <맥베스>는 그 선두 주자로 3월 8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병훈 연출은 텍스트에 직접적인 변형이나 가공없이 원작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거짓말 연기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말콤과 맥더프의 대화 장면이 생략된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유혹"을 중심 키워드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혹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세 마녀들은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과 짙은 화장을 한 팜므 파탈 무리로 그려진다. 



물론 맥베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여성은 언제나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이다. 지난 겨울 국립극단에서 해경궁홍씨 역을 맡았던 김소희가 이번에는 사도세자보다 더 무서운 남편을 둔 여성을 연기한다. 사실 이 역할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연출의 말을 통해 이 공연이 어떤 방향을 선택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맥베스 부부는]사랑하는 ... 사이지만 아이가 없음으로 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기 어렵다. 관계 유지를 위해 아이를 대체할 조건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남편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쟁터에 나가있는데다 아이가 없으니 맥베스 부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무기력과 외로움에 젖어있던 맥베스 부인에게 마녀의 유혹은 재밌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일순간 불이 붙을 수밖에 없다. 남편에 대한 맥베스 부인의 사랑은 강력할수록 파괴력도 크다. ...악행을 저지르던 맥베스 부인은 왜 두려워졌을까.  저 깊은 곳에서 왕좌를 얻었으나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이다. 남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철저히 혼자로 남게 되는 그 고적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내 "연출 인터뷰" p.29)

글래머러스한 여인을 마녀로 설정하고, 아이가 없는 무기력한 여인이 왕을 죽이는 모험을 감행한다고 해서 이번 공연이 연출가의 여성혐오가 두드러진다고 말하지는 말자. (작가가 이미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비극은 온전히 맥베스가 책임질 일이지 마녀나 부인 때문에 파멸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혹"이 아니라 "핑계"라 말하고 싶다.) 물론 덩컨 왕을 시해하기까지, 그리고 그 직후까지도 맥베스는 갈등하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맥베스는 아주 능청스러운 연기를 거뜬히 해내고 왕좌에 오른다. 박해수가 연기한 맥베스는 이 장면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이후로 맥베스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누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양심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맥베스는 잠을 대가로 내놓음으로써 범인들의 도덕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까지 등장하던 침대는 이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맥베스의 자리는 이제 침대가 아니라 왕좌로 고정된다.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자리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소품으로 사용되는 검이나 방패, 그리고 타공된 철제 패널로 만든 스크린 등이 관객들에게 무게감을 전달한다.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검이 상당히 무거워 벌써부터 한쪽 팔만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고 한다.) 철제 스크린에는 이미지나 영상이 투사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버남 숲 또한 철제 방패 위에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얼핏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요즘 시대에 영상을 사용하는 게 어느 누군가의 독점적인 아이디어일 수는 없듯이, 그것이 어떤 면에 투사되느냐 또한 누가 먼저인지를 굳이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컴의 병사들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대를 연상하게 한다. 시국에 민감한 관객은 이 장면이나 몇몇 대사들에서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접점을 찾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노골적이지 못한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갑갑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류의 보편적 유산인 셰익스피어를 보러 왔는데, 극장안에서마저 바깥의 지리멸렬을 떠올려야 하는 게 피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정치 싸움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맥베스>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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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5일 수요일

[두산아트랩]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

by 백인경

미래주의의 창시자 필리포 마리네티는 

“The Variety Theatre”(1913)에서 연극이 다양성과 서커스 쇼의 원칙에 따라 “놀라움, 레코드 세팅, 그리고 신체의 광기에 대한 연극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연극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려는 이탈리아 미래파의 이러한 시도는 러시아의 아방가르드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연극에서의 연극성”에 대한 그들의 탐구 또한 서커스 형식에 의지했다. 서커스는 단순히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가 가진 순수한 물질성으로 -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연약한 신체 또는 고도로 훈련된 강인한 신체 - 관객들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문학에 종속되어온 연극을 연극 고유의 매체성에 입각하여 “재연극화” 함으로써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지각방식과 경험방식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커스’라는 단어가 들어있긴 하지만 바바서커스는 실제로 서커스 공연을 하는 극단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향하는 ‘연극’이 무엇인지 그 이름을 통해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바서커스는 다음과 같이 자신들을 소개한다: “드라마를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며, 무대라는 공간 안에서 다양한 형식과 연극성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드라마와 연극성,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는 그들의 야심찬 포부는 고골의 텍스트를 통해 실험된다.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은 

단편소설 <외투>를 원작으로 한다. 텅 빈 무대 위에서 흔들거리는 공중 그네와 다양하게 제작된 가면들의 사용은 새롭고 신선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적절하다거나 자연스러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거센 러시아의 찬바람을 뚫고 등장하는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공연 내내 유일하게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을 사용한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3월 장바구니

by 산책



<유쾌한 하녀 마리사>, 3월 6일 ~  3월 23일, 두산 아트센터 Space 111

이 작품은 “이보다 더 웃길 수 없다! 포복절도할 막강 코미디!”라는 문구에 끌려 예매했습니다. 요새 실컷 웃을 일이 너무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으하하하 웃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예매하고 보니 <은밀한 기쁨>과 같은 극단인 맨씨어터에서 준비한 작품이네요. <은밀한 기쁨>에서 알콜 중독자로 분했던 서정연 배우가 자살하려다 하녀 마리사를 죽이게 되는 요한나를 연기한다고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남편은 바람을 폈고, 부인은 자살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어떻게 웃음을 만들지 기대됩니다.

이제는 국민 연극이 된 <라이어>를 무려 15년전, 그러니까 1999년에 보았는데, 사실 그 뒤로 코미디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오해와 우연이 만들어 낼 희극적인 상황과 사건들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만의 재기 발랄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매:

산책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리뷰

산책의 <은밀한 기쁨> 리뷰




<맥베스> 3월 8일 ~ 3월 23일, 명동 예술극장 

이병훈 연출, 김소희 배우, 박해수 배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 이름들 앞에서 제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고전은 종종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또는 나의 기대를 뛰어 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데, 사실 그러한 경험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아쉬울 작품인 것 같습니다. 혹 <맥베스>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첫 번째 <맥베스>로는 무척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매진임박이라고 하니, 망설이시는 분들은 얼른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매:

에스티의 <맥베스> 리뷰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극장편> , 3월 15일 ~ 3월 30일, 남산 예술 드라마센터 

다음은 <남산 도큐멘타>의 공식적인 작품 소개글입니다.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은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을 선보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드라마인 독자가 계시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소개가 대체 무슨 말인지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실 이 소개만으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또는 재미가 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 그래서 그것이 사실도, 허구도 아닌,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순간들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상상해 보는 이 작품은 1962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 곳을 지나간 사람들, 그곳에서 올려진 작품들, 출연한 배우들, 그들이 연기한 인물들을 불러낼 것 같습니다. 그 과거들을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기대됩니다.

예매:

서유미님의 <남산 도큐멘타> 리뷰




2014 수다연극 - 청춘인터뷰 (함스타)

by 함스타

연극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이 하나 둘 차례로 나와서 자기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누구입니다. 스물 여덟살이고요. 데뷔한지 1년 되었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저는 박누구입니다. 서른 두살이고요. 데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등등. 9명의 배우가 각자의 실명과 나이 그리고 데뷔 연차를 밝히면서, 그렇게 <2014>가 시작되었다.

작: 공동창작
연출: 이영석
단체: 프로젝트 그룹 코라
공연일: 2014.02.12. ~ 02.16.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관람일: 2014.02.13.

배우들 자신의 이야기 — 디바이징 씨어터

프로젝트 그룹 코라의 <수다연극>은 이번 <2014>가 처음은 아니다. 2012년 상반기에 <수다연극>의 모태가 되는 공연이 당시 연출이 출강하던 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서 학생들의 실제 이야기를 담아 학기말 공연으로 올려졌고, 이후 앵콜 공연을 거쳐, 같은 해 10월에는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인 두산 아트랩에서 <수다연극: 청춘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2014년 2월, (무려) 예술의 전당에서, (무려) ‘신진 유망 연출가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또 하나의 <수다연극>이 관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안타깝게도 2012년에 몇 차례 이루어진 공연들을 모두 보지 못했지만, 그 컨셉과 창작 방식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었다. 예컨대 연극이 철저히 공동창작으로 구성되었다든가, 연극에서 배우들이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정도는 말이다. 때문에 공연을 보기 전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기대와 의심이라는 야누스의 얼굴로 떠올랐다.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니 ‘삶의 연극화’니 하는 프로그램북의 문구가 이러한 질문에 더욱 불을 당겼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진짜’ 자신들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연극이라는 거짓말, 혹은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거짓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질문에 대한 작품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배우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의 ‘내용’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을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 대한 내용을) ‘연기하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럽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있는 사람은 연출뿐이었다는 것이 이 연극의 최대 아이러니다.)

물론 그렇다. 연극이란 본디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실제인 양 받아들이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약속이 없다면, 그 어떤 말을 한대도 그것은 ‘연극’일 뿐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연극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다연극>과 같이 (그리고 오늘날 다큐멘터리 연극이나 소위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의 연극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공연자들의 실제 이야기로 이루어진 공연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예컨대 <수다연극>의 청춘 배우들은 자신들의 공연에 대해서 ‘연극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분명히 연극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다연극>에서는,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그 말도 거짓말이다.

<수다연극>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연극’이라는 규정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에 항존하여 그것을 아름답고 흥미롭게 만드는 특별한 긴장들이 만나는 지점. 허구냐 실재냐, 거짓이냐 진실이냐, 재현이냐 현존이냐의 문제들이 부딪치는 지점. 이런 지점들을 보다 과감하게 돌파했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 봄직한 굵직한 문제들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2014>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수다’연극의 말, 말,말

<수다연극>을 보고, 혹은 보기 전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술자리에서 들으면 훨씬 재미있을 이야기를 왜 굳이 연극으로 봐야 해?” 혹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극장까지 와서 내가 이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해?”

가능한 대답들 중 유일하게 정당한 대답이 있다면, ‘그것이 들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는가? 잠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대답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당최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인가? 가치라는 게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가? 잠깐, 질문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어 신과 우주에 대한 논증까지 가기 전에 질문의 방향을 돌려보자. 그 이야기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왜 ‘이야기’인가?

2012년에 연출은 다음과 같이 썼다.

“관객은 허구적 캐릭터의 행동action을 ‘보기’ 보다는 무대 위 사람들 삶의 이야기story를 ‘듣게’ 된다. 일상을 영위하는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서 체험이 무대를 채우게 되며, 말하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통해 공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삶의 연극화’와 ‘연극형식의 확장’ 은 그대로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되는 것이다.” (2012년 두산아트랩 <수다연극: 청춘수업>)

2014년의 공연에서도, ‘말하기’가 공연의 혹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라는 연출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 (관객)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말’로써 전달할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공연 후반에 한 배우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고’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공연 내내 그 사고에 대해 에둘러서 암시만 하다가,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다소간’ 털어놓는다. 그렇게 언급을 피하고 싶고, 그렇게 얕게 밖에는 털어놓을 수 없을만큼 그의 인생에 큰 상처가 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리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저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된 도리로서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다 보여주지 않는 배우를 만나러, 속시원치 못한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배우의 가장 사적인 내면의 처절한 밑바닥을 보러 극장을 찾은 것 또한 아니다. 관객은 그저 배우의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을 뿐이다. 그 속에 삶의 진실한 어떤 한 조각이 흔적이나마 담겨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 공명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차라리 배우가 그 당시 느꼈던 처절한 마음을 괴성을 질러서 표현했다면, 막춤이라도 추고 노래라도 불러서 쏟아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관객은 그 슬픔과 상처의 강렬함,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자 달려온 의지까지도 함께 경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관객으로서 나는 그렇다. 배우들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강렬할 수 있을지, 그래서 나를 어디로/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 — 재현과 현존의 경계에서 

르네 마그리트가 평범하디 평범한 파이프 하나를 그리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듯이, 대상은 재현되는 순간 더이상 원본이 아니다. 경험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더이상 그 실재 혹은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결국 <수다연극>은 재현의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무대 위에서 뱉어지는 모든 말들이 단 한 순간도 재현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재현에 그치지 않는 살아있는 순간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세워보고자 하는.

1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이 영화 촬영 현장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좀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이 장면은 실제 경험을 재연한 것도 아니라, 사실상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 분명히 배우들도 그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계속 자신이라는 가면을 쓰지도 벗지도 못하던 배우들이, 재현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역할’이라는 가면을 제대로 쓰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어정쩡한 연기를 보기가 상당히 거북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연출과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 반원형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가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보다 안정을 찾았을 수도 있고, 이야기의 주제가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이 좀 더 깊숙한 주제로 들어가면서 관객의 공감대가 넓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주요했던 건 공간 배치의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객석 발코니를 포함하여 공간을 다원적으로 활용하던 1부와 달리 모두가 관객을 마주보고 일렬로 앉음으로써,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아, 저 유명한 제 4의 벽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더 이상 관객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시선을 주고받으며, 마치 관객이 없는 듯 떠들 수 있게 되었고, 관객들 또한 무대 위 대화를 마치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듯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재현과 현존 사이를 휘청거리며 위험한 줄을 타던 작품은 비록 재현으로 안착되고 말았지만.

삶의 연극화를 꿈꾸며

짐작해 보건대, 연극이 끝나고 연출이 많이 들은 코멘트 중 하나가 “차라리 아주 다 짜고 쳐 보지 그랬어…”가 아닐까 싶다. 아마 제대로 짜고 쳤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작보다 더 완성도 있는 연극, 보기에 즐겁고 편안한 연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연출이 보여준 말을 가지고 노는 뛰어난 감각과 밀도 있는 연출력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이미 가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혹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어려운 법이니까. 프로젝트 그룹 코라가 <수다연극>을 혹은 디바이징 씨어터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싹을 틔운 ‘연극’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소중히 키워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리뷰는 <오늘의 서울연극> 제 41호에서 재수록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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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끼님의 리뷰도 함께 보아요.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셜리에 관한 모든 것> - 시(詩) 쓰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by 이예은

+

  호퍼의 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호퍼의 회화가 어떠한 느낌이며, 그 느낌이 왜 좋은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시(詩)’를 설명하라 했을 때 결코 그 ‘시’가 다른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년 뉴욕 여행을 하는 기간 동안 휘트니 뮤지엄에서 호퍼의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만져 보고 온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많은 습작들에서 완성작으로 발전되는 호퍼의 빛, 어둠, 색, 구도, 정서의 추이를 보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호퍼의 회화 연출법은 많은 부분이 연극 작업의 연출법과 닮아 있다. 인물들의 블로킹을 구성해 내는 섬세한 표현력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명암으로 프레임의 정서와 상황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표현이 가능한 연극의 장면 연출법 같다. 호퍼의 회화는 운동성이 없어도 이미 연극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짧은 트레일러에서 호퍼식의 구도가 영상 프레임 안에서 정말로 이미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겠나.


트레일러, 혹은 메이킹 필름 


+ 작년 그의 작품들 앞에 서서 썼던 메모들


• Gas, 1940

빛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서 있는 남자가 마치 조각상 같다. 그만큼 빛의 명암이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빛의 과장된 표현이 인물을 실물처럼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곳곳마다에 닿은 빛들이 경건하고, 엄숙하게 느껴져서 그림 전체가 숭고한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는 느낌이다. ‘빛’이 ‘형’의 숭고한 부분(순간)을 빚어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알게 한다. 


• Nighthawks, 1942

빛과 어둠의 영역의 구획이 마치 몬드리안의 도안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 가장 할 말 없는 부분, 가장 불필요한 부분이 가장 환하게 강조되어 있다. 종업원의 신산한 표정-> 신사의 ‘또’다른 고단한 표정 -> 여자의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관객의 시선의 동선을 이끈다. 이 세 명은 마치 한 공간에서 대화를 해야 마땅한 듯한 블로킹을 이루고 있으나 저마다 홀로 있다. 이 세 명의 분열된 정서가 축적되어 있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이 맺히는 곳은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이다. 이들의 분열된 정서는 점차 ‘축적’되어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하필이면) ‘뒷’모습에 맺히는 것이다. 각자 분열되고 따로 노는 표정과 정서들이 이제, 관객을 철저히 외면하기로 한 어느 외딴 남자의 ‘뒷’모습에 맺혀 그 분열감의 정점을 이룬다. 결국 이 그림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가장 할 말 없어 보이는, 가장 흥미 없어 보이는, 가장 이야기(서사) 없어 보이는 벽면이다. 모여는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세 명의 무리와 그들과 동떨어진 한 명의 남자는 저마다 상대에게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분열감의 고조는 가장 할 말 없는 곳이 가장 highlight된 벽면의 ‘공백감의 강조’와 어우러지면서 결국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있는 느낌이다.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농밀하게 축적된 외로운 에너지들의 모임을 그린 것만 같다.

• Manhattan Bridge Loop, 1928

호퍼는 지평선 구도를 좋아한다. 끝나지 않는, 그래서 그것의 한 부분을 표현할 뿐이라는 듯한 구도의 그것. 그 끝나지 않는 수평선 속에서 ‘작게’ 스쳐 지나가는(머물다 가는) 인물을 함께 그린다. 공간 안에 함몰된 인간 생존 조건의 외로움을. 


• New York Movie, 1939

영화관은 암실인데 암실에서도 잔존하는 빛들에 집중하는 아이러니.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빛들-영화관 내부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빛, 단일 광원의 빛과 상충하는 여백의 빛들이 강조된다. 어셔 직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이 가장 강조가 되고, 그 빛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매우 환하게 빛난다. (마치 이 빛은 렘브란트의 빛처럼 어둠 속을 철저히 밝힌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 않은 객석 보조등의 빛이 강조가 되고, 그 빛을 따라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머리가 반사된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 앵글들 또한 세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의 얼굴 앵글과 어셔의 얼굴 앵글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호퍼 속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서로를 마주보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여백’을 차지하는 빛이 가장 전면적으로 강조가 되고, 영화관이라는 군집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홀로’인 사람들이 강조가 되는 쓸쓸한 관찰력


• Room For Tourists, 1945

이방의 빛, 
여행의 순간. 
빛으로 할 말을 다 하는구나. 


+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했다기보다는 호퍼의 회화에 ‘시’를 덧입힌 작업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단편의 ‘시극’들이 모여 회화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회화에 서사를 덧대어 영화화하지 않고, 회화에 시를 덧대어 영화화한 것은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다. 회화와 시가 긴밀하게 공유하는 진공의 순간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섬처럼 떠도는 공백의 순간들이 서사의 자리를 대신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흐름의 지속보다는 정지된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정말로, 영화의 대부분은 ‘정지’되어 있다.
  이 영화가 호퍼를 ‘영화화’했다고 말하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의 대부분이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ause된 한 순간, 그 순간의 포착, 그 포착의 수직성, 수직의 초월성, 초월의 틈입. 사진과 회화에서 추구하는 대상의 표현‘력’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영화라는 형태로 재창조하려 한 노력이 역력하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회화에서 구현해 놓은 수직적 초월의 순간을 굳이 ‘덜’ 완전한 순간으로 지연시킴으로 인해서 이 영화가 이룬 것은? 각색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결절점이, 원작의 생명력을 ‘재’창조해내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를 이루었는가를 질문한다. 원작인 회화에 내재된 호퍼‘적’ 시를 이 영화는 이 영화‘적’ 시로 과연 재창조해내었는가? 영화는 호퍼에서 연상되는 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의 시를 창조했어야 했다.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시여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명히 예상했던 종류의 쾌감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회화’가 단지 영상 이미지로 ‘운동’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설렘이 약동한다. 마치 매우 은밀한 것과 매우 능수능란한 것이 교합된 듯한 느낌. 이것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전문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육화된 목소리로 들었을 때의 설렘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다. 시와 회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의 은밀한 작동은 음악이나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토대로 하는 매체가 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설렘이다. 그 단편적이고도 내면적인 소요. 그것은 ‘단지’ 그것이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면적인 소요가 실제로 입 밖의 소란스러운 육성으로 터져 나오고 말 때에 우리는 이상한 쾌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은밀한 이름이 물질로 체현된 것을 본 것만 같은 화끈거림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는 일, 회화를 영화로 풀어내는 일. 그것은 왜 ‘부끄러운’ 일일까? 십 이 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추억의 장소에 십 이 년 만에 찾아 가 ‘그것’으로 그리워하던 것이 정말로 ‘그것’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 ‘그것’의 실재는 기이한 반가움이면서 동시에 맹렬하고도 선정적인 폭력이었다. 그토록 향수하고 꿈꾸어 온 ‘그것’은 어쩌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문학을, 그래서 연극을, 그래서 예술을 갈망하는 만큼 ‘그것’을 이야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희미하고도 긴 강박관념은 아직까지도 날 에워싸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상처받기 때문이다. 대학교 국문학과에만 진학하면 문학도, 예술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열망만을 가지고 살아 온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열망하던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누구도 문학‘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문학‘을’ 강간하는 법만 알려주더라. 하며 동기들과 소주잔을 붙들고 울던 때가 생각난다. 예술과 ‘첫’사랑하고, 제도에 ‘첫’상처를 받았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린 시절의 진지함.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시 쓰기’는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한다는 그 매혹적인 기획은 좋았으나 그 기획이 꼭 넘고 가야만 했던 연출법, 영화의 방법으로 ‘호퍼라는 시’를 쓰는 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호퍼를 영화화함으로써 내면적 은밀함을 육화시키는 묘한 쾌감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사실 기획이 과하게 매혹적일 때에는 실제 작업이 그 기획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기획의 단계에 머물렀을 때에만 유효한 매력‘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기획의 콘셉트를 체화해내야만 하는 창작의 몸체는 우리의 몸과 같이 연약하고 유동적이다. 그래서 늘 기획 작업을 할 때에는 머리와 입술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꾸만 연역하려들지 말고 귀납해서 아래로부터 올리고, 올려서 기획을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기획자는 연출자보다 더 연출자여야 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 시를 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순간을 순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호퍼를 영화로 보고 싶어 했을까. 이 영화의 연출력에 실망을 하면서도 호퍼의 잔상에 집중했던 그 시간은. 무언가 너머의 것을 창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함께 알고 있기에 호퍼를 이미 영화로 만든 이 작업 앞에서 또 다른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시를 쓰는 이에게 시를 타박하는 말들을 덧붙여 시 ‘쓰기’의 작업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탓이다. ㉦

 

2014년 3월 2일 일요일

[두산아트랩] 몸-주체로서 여성, 소리-주체로서 소리꾼: 판소리 단편선 <추물 / 살인>

by 백인경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 그대의 이름은 ‘배우’!

그러나 ‘체화(embodiment)'라는 개념이 서양 연극사에 등장했던 18세기부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자유란 일종의 속박과도 같았다. 그 체화의 개념이란 한 인간으로서 배우 자신을 비워내고 텍스트가 묘사하는 등장인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도 그도 아닌 그 즈음에서,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대 위의 생명체들; 배역을 창출해내는 정신적 주체이자 그 자체로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에 봉헌되는 배우의 신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자 그만큼 더 가혹하고 냉철한 시선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여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텅 빈 무대 위에서 우뚝 서서 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어떠한가? 심청이도 되었다가 심봉사도 되었다가 돌연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연설명도 곁들이며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판을 끌고가는 소리꾼에게도 철저히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고충들이 있었을까? 이번 두산아트랩에서 진행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은 공연예술의 특정 장르를 떠나 무대 위의 다양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 스스로가 노래하는 소리꾼으로서,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판소리와 연극에 대한 오랜 고민과 실험을 무대화했던 이자람(@jjjjjam)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과 손을 잡고 주요섭의 단편 소설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자람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비슷한듯 또 다른 다양한 소리들을 만날 수 있었던건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진과 이승희는 각각 <추물 / 살인>의 소리를 맡아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끌고 나갔다.


2014년 3월 1일 토요일

"난해한 예술을 위한 변명" : 박종빈, 박재평(DVOXAC) <전야> — 아르코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2014/02/20. 8 pm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록스

by 함스타

공연사진 http://dvoxac.blog.me/50189822185

독일의 문예학자 페터 뷔츠는 드라마 속 시간의 핵심을 ‘긴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영화나 연극에서 느끼는 이러한 긴장을 흔히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이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지를 기다릴 때 생기는 ‘기대’나 ‘예감’에 가깝다.


태풍이 오기 전날 저녁, 어디 나갈 수도 없이 집 안에만 머무르는 시간, 사람들은 태풍을 기다린다.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맞닥뜨리는 장면을 마음 졸여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모든 것들이 그 흔들림만으로 위태로운 시간. 그 흔한 새 한마리, 굉이 한 마리도 뵈지 않는 주택가의 거리. 풍경들의 쓸쓸함과,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대상을 기다리는 긴 지루함, 그리고 마음 속에 또아리 트는 불안을 박종빈, 박재평(DVOXAC)의 <전야>는 그려낸다.





공연은 화이트 큐브에서 이루어졌다. 아르코 미술관 스페이스 필록스에 들어가면, 비닐로 만든 천막 같은 공간 안에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있고, 그 테이블의 삼면에 관객들이 앉는다. 테이블 위에는 부러진 선풍기, 쟁반 위의 수많은 와인 병들, 널브러져 있는 형광등, 꽃과 화분 등 집안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다. 막 늘어놓은 것 같지만 결코 막 늘어놓지 않은 정제된 모습으로.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사람도 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한 여자. 공연과 전시의 경계에 선 작품인 만큼 시각적인 요소들만으로도 눈을 끄는 ‘무대’였다.

두 개의 프로젝터가 관객들이 마주하는 벽에 두 개의 스크린을 쏘아서 영상을 보여준다. 남산이 보이는 서울의 어느 주택가. 그곳에 사는 한 커플. 왜 그랬을까, 흑백으로 촬영된 이 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왕자웨이 감독의 <중경삼림>을 떠올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보이고, 날이 맑았더라면 길거리를 배회했을 작은 고양이들도 보인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커플의 모습도 보인다.



스틸 컷을 나열하듯, 언뜻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장면들이 나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다 공연의 어느 한 시점에서, 테이블 위에 누워있던 여자의 숨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물이 떨어지고 조명이 어지럽게 명멸하면서, 여자가 일어난다. 일어나서, 걸어 나간다. 여자가 나간 뒤 얼마간 영상은 계속된다. 뒤집어진 새가 심장을 펄떡거리는 장면, 누군가의 맨발이 숲속을 헤치고 달려가는 장면 등이 보인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공연은 끝난다.

공연의 끝을 알리는 조명의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박수를 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그냥’ 공연이 끝난다. 관객들 중 일부는 끝의 순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는 박수를 치려다가 주변의 반응을 살피고, 일부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거나, 일어나려고 채비를 하는 옆 사람에게 의문스러운 눈빛을 던진다. 그렇다.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고, (물론 아주 희박한 확률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태풍은 무사히 지나갈 것이고, 그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거대한 운명의 물줄기가 아닌,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거기 흘러가는 일상일 테다.

주섬주섬 내려놓았던 가방과 코트를 챙겨서 미술관을 나서면서 뒷맛이 씁쓸하다. 무대 미술이나 영상 모두 감각적이라고 느껴졌고,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30분이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명석하지 않았다. 내러티브가 없어서, 혹은 장면들의 개연성이 없어서 명석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작품으로써’ 대답되지 않았다. 작가는 왜 태풍 전야의 분위기를 그리고 싶었는가? 왜 영상도, 전시도, 연극도, 무용도 아닌 일종의 ‘해프닝’이어야 했나?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이 관(람)객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는가? 즉, 관(람)객들은 왜 30분의 시간을 내서 태풍 전야의 분위기와 불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 어떤 ‘왜’에 대해서도 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나쁜’ 의심이 들었다.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혹시 창작자에게 ‘현대 예술의 난해함’이라는 안전한 도피처가 있기 때문은 아닌가?

‘난해한’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나는 관(람)객이 자신의 ‘무지’를 탓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지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의 생각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관(람)객은 작품을, 공연자를, 창작자를 사랑하고 싶어서 시간을 내어 전시장이나 공연장을 찾는다. 작품으로부터 충분히 보고 듣고 느끼지 못했다면, 그래서 마음 속에 준비해 간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결코 관객의 책임일 수 없다.

물론 예술 작품은 얼마든지 난해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언제나 모두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다만 ‘이런 예술은 원래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퉁치고’ 지나가는 순간은, (그래서 관객을 자신의 무지에 대한 회의로  몰아넣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난해한 예술’을 애호하는 관(람)객들이 원하는 것은 말끔하게 마감된 그럴듯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고유한 문제 의식이며, 그것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 창조적 힘이다. 겉보기에 조금 울퉁불퉁하더라도, 혹은 다소 엉성하더라도, 그런 작품들이 폭넓은 울림을 남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착한’ 관(람)객이 되기로 한다. 마음 속의 질문에 대해 작품으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나의 오감과 정신이 온전히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전야>에서 나는 작가가 세계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내는 예민한 감수성을 보았고, 영상과 무대를 다루는 세련된 감각도 보았다. 다음 번에 또 다른 작품이 나온다면, 혹은 이 작품이 더욱 발전되어서 나온다면, 분명히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서 볼 것이다. 이번에는 단지 ‘전야’일 뿐이었지만, 다음번에는 ‘태풍’이길 기대하면서. ㉦


사진 출처 DVOXAC의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dvox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