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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이예은, "깨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감각’에 대해서"

<처의 감각>
고연옥 작
김 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2018년 4월 13일

친화력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서사로 난해함이 개입될 줄 알았는데 작품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다방면의 친화력을 발산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 공간 속 관객들의 마음이 열릴까 궁금해 하며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합심하여 시종 열심히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더욱 정확히는 ‘생명체’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은 ‘곰’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에 국한되어 민족적인 정서를 그려내지 않고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진정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를 채워낸다. 근원적인 생명성에 대한 명상을 지향하지만 정작 작품의 주된 내용은 각자 다른 곳에 이상을 품은 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 현실을 얼떨결에 (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맞이하게 된 남녀가, 그 이상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차적인 현실을 부단히 열심히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한 부부의 공허와 열심. 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가능한 세계상을 아주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예상된 틀 없이 풀어낸다. 이를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어떠한 삶도 흘려버릴 수 있는 여자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현실도 참아내야만 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지위에서 가족-됨을 풀어내는데, 이러한 시선이 매우 보편적인 서사의 미덕을 획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떠한 순간에도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어떠한 담론으로도 환원하지 않으려는 정성을 보여준다. 비록 엔딩에서 남자는 이상을 향해 떠나가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떠나가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는 뚜렷한 결론을 보여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결말은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서 그다지 확고한 지위를 가지지는 못한다. 작품의 전반은 그럼에도 열심이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이었거나 그 생 안에 들어 차 있던 공허와 어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

남자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되는 정성은 동등하나 이 둘에 부여된 서사의 결은 다르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아 피어오르는 인물은 작품의 제목(‘처’)으로 내세워진 여자가 아닌 남자이다. 마음에 품은 이상은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있으나 구차하고 치열하게 살아내 보려는 남자(백석광 배우 分). 그가 갖지 못한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은 비현실적인 분장과 액팅으로 치장된 코러스 중의 한 명으로 설정되었기에 비록 그것이 진실한 생의 갈망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가 품은 미지의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명하리만치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 생생함은 작품의 결말부에 터져 나오는 그의 독백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동굴에서부터 서서히 세상 밖을 향해 나오는 동선을 보여주듯, 칠흑처럼 까만 조명 에어리어(area)에서 서서히 밝아져 오는 공간으로 진입하며 폭발적으로 “도망 칠거야”라고 외친다. 이 한 마디의 대사에는 그가 상실한 어떤 다른 곳에 있을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살아내 보려 하는 초미시적인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이 모두 한꺼번에 전달된다.
  남자의 생생한 묘사는 최순진 배우 分의 경우에도 돋보였다. 가련하리만큼 끔찍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맹렬한 욕구의 포악함까지, 푸념에서 애원에서 폭력으로 발전, 아니 변질, 아니 폭로되는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진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스펙트럼. 이것 역시 한 절망적인 인간의 생생함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장면을 도사리는 한 인간의 파장은 버릴 것이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생함이란 동물의 생명성과는 달리 이리도 교묘하고 책략적인 잔혹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여자는 살아있는 인물도, 그렇다고 상징화된 어떤 의미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는 경험치인 곰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곰과의 재회를 생의 간절한 열망으로 품은 채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후 남자 인간과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또 다른 남자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큰 흔들림 없이 곰과의 사랑을, 곰과의 사랑에서 얻은 반인반수의 아이를 상실한 기억을 생의 중심에 두며 그 부재감을 대체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남자 인간에게서 낳은 다른 아이이며, 이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일로써 자신의 모든 생 의미를 충족시키려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백석광 배우 分-는 이 여자의 현실화된 버전의 인물이다. 그는 곰과의 사랑이 어떤 다른 인간 여자와의 사랑으로 대치된 이 여자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이 작품은 보다 현실적인 남자의 서사를 통해 여자의 서사를 관객에게 체감될 수 있는 것으로 병행시킨다.)
  여자에게서 감각되는 것을 굳이 단어로 설명하면 희미하지만 인간과 인간 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하고 은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대인 모성일 것이다. (작품에는 이 여자를 모성의 상징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시각들도 존재한다. 여자는 공연 내내 시종 한 명의 딸로서 호명되기를 강요당하는 것, 정작 그녀의 어머니는 초자아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제시되는 것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듬고 있는 모성이란 종국에까지 가서 살아남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능적인 버팀목으로 주제화되지도 않고, 신화적으로 비약되지도 않는다. 단지 동물적인 숨과 피처럼 공연의 전반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정한 주제나 상징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외려 공연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그릇처럼, 하나의 공간처럼, 하나의 숨결처럼. 여자는 물처럼 어떤 공간 속의 공기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마음을, 혹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어떤 갈피를 떠돌며 흘러가듯 존재하여서 극을 보는 내내 잡혀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여자는 관객에게 공감되거나 심지어 낯설어지지도 않는데, 이는 인물의 의도적인 공백화 혹은 부재화라고 감각된다. 여기에는 무용수로서만 무대에 서 온 윤가연 배우의 관습화되지 않은 모든 몸짓과 표현의 몫도 분명히 있었다. 이 배우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몸짓과 발성과 표현들은 ‘연극’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곧잘 설명이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관습적 표현들을 거세시켜버린다. 작품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정작 빼곡하게 들어 차 있던 남자 캐릭터들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어 차 있던 작품의 골격들은 희미해지고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기억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공간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존재 자체이다. 실로 작품에서 ‘처’는 부재하며 오로지 ‘처’를 향하는 모든 뜨거움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하는 ‘처’의 감각이 공연의 전반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공연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도 주제화되거나 신비화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그래서 추앙되지도 강조되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존재했던 것이 조용히 바라다 보인다.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작품 어딘가에 무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을 준다.

공간성

  동굴에서 만나 산장에서 잠자리를 가진 남녀가 이제는 집이라는 현실 공간으로 내려 와 부부 생활을 시작할 때 텅 빈 무대 위에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무대 바닥의 한 가운데가 전체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제 안과 바깥으로 구분된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돈을 벌러 나가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적 현실 무대가 공연의 무대 위에 들어차는 것이다. 경계 없던 땅에 구획선이 생기자 고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전체의 땅은 힘을 잃고 그저 구획선만이 삶의 근거가 되는 이 헛헛한 삶의 사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또 이런 구획선이 생기자 배우들이 객석 안으로 난입하거나 무대 가장자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명확한 도발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처럼 구획선 안에서 벌어졌던 삶을 자연의 힘으로 깔아뭉개듯 다시 무대는 육중하게 하강한다. 흙에서 난 인간이 다시 흙이 되어 돌아가는 순간이다. 재에서 재로. 이 인간 보편의 신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무대의 상승과 하강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열고 닫는 박력 있는 무대 연출이다. 그 거대한 판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 동안의 시간, 그리고 잡음 섞인 움직임의 사운드가 많은 서사를 대신한다.
  장면들을 만들 때 남산예술센터 특유의 공간성이 빛을 발한 대목이 있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성이라 한다면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모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데 쉽게 바라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아무리 객석이 만석이 되어 관객들이 빼곡히 차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몇 초 만에 낱낱이 발견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렇게 객석에서 객석이 잘 들여다보이는 시각성 덕에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객석의 공간으로 진입을 하는 순간에는, 여느 극장에서라면 단지 일차원적인 경계 넘기에 머무를 이 동선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최순진 배우가 객석으로 돌진하여 객석 한 가운데의 열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말 외로워 죽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정말이지 이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멸할 것만 같이 외로운 한 개인의 사투를 보여주는 듯했고(심지어 리어왕의 미친 외로움이 보이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의식하면서 무대의 끝과 끝에서 대화를 나누는 백석광과 그의 옛 여인 장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라는 환상적인 모티프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밖에도 잦은 조명의 변화로 무대와 객석이 율동감 있게 하나가 되었다가 서서히 분리되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의 관극을 하자니 한낮의 운동장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분을 느꼈다. 극장이 지닐 수 있는 공공성, 그 역동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젊음

  작품은 결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두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이지만 끊임없이 쇄도하는 코러스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 배치된 정형화된 극 구조를 구태여 에피소드 식으로 교란시키려 노력한다. 각 챕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시작케 하는 코러스의 재기발랄함과 챕터와 챕터 사이의 입체적인 전환들. 코러스들은 드라마적 구조를 나열적 구조로 해빙시키고 다시 나열적 구조를 드라마적으로 몰입케 하는 흔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인물과 내레이터는 물론이고 한 배우의 몸체들이 되기도 하고, 공간과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 바깥으로 나와 연극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가 연극 자체가 되기도 하는 이 풍부한 코러스들! (17년 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던, 늙지 않는 이수미 배우의 기개에 박수를 보낸다.) 텅 빈 무대 공간을 현란하고 소란하리만치 가득 채운 음악과 조명과 코러스들의 무용적 합(合)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상상력이 낭자함에도 모든 표현들이 닫혀 있지 않고 개방성과 건강함과 귀여움을 내포할 수 있는 힘. 작품을 받아들이기 쉽게, 즐기기 쉽게, 응원하기 쉽게, 신뢰하기 쉽게, 사랑하기 쉽게 만드는 이러한 힘은 많은 부분 코러스들이 만들고 있다.
  실로 이 공연은 무용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이유는 율동감 있게 공간을 연출해서만도 아니고,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해서 윤가연 배우와 백석광 배우가 코러스들과 함께 연극임에도 무용에 더욱 가까울 정도의 완성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용적이라는 인상은 연출자의 열려 있는 상상력 덕분이다. 연극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연극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개방성이 돋보이는 연출. 과도한 연극성을 추구하는 연출자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배타적 숭고함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젊음의 탄력성으로 느껴졌다. 튕겨져 나올 것 같이 기운차고 기분 좋은 표현과 표현력. 그렇다고 빤히 ‘나 젊다’ 식의 선언을 함으로써 자칫 ‘어쩔래’ 식의 도발적 표어를 내거는 것도 아니다. 으스대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으며 숭고한 가름막을 쳐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보지도 않는 이 상큼함. 아니 이 솔직함. 아니 진솔함. 젊은이다운 기상으로 감각되는 이 진솔함.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 들어 차 있는 명랑하고 성긴 기운들. 오색 미러볼이 만드는 바닥의 문양과 예쁘게 반짝거리는 빨간 알전구 등,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듯한 재미있는 음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가는 두 남녀. 사랑도 당위도 책임감도 없이 취해버리는 그 밤의 현실을 이토록 귀여운 환상으로 접근하다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귀엽고 무의미한 순간으로 인해 그토록 녹록치 않은 현실을 길게 길게 살아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한 이러한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럴 법하다. 술이 깨고 바로 다음 날 장면에 객석까지 환하게 들어 온 째한 조명은 정말이지 바로 ‘술 깬 다음 날’ 기분을 이 공간에 들어차게 한다.

‘연극의 감각’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끝이 보이는, 심지어는 이미 끝을 내린 채로 극이 시작되는 숱한 연극 작품들에 지쳐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면에 있어서나 작품을 풀어내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다. 작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에 섣불리 도달해 버린 채로 극을 진행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단단한 틀 안에서 관극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게 하는 숱한 연극 작품들. 그 작품들이 극복하지 못한 성급한 폐쇄성을 이 작품은 차고 넘치는 풍부함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배우가 만들고 또 연출이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을 휘어 감싸는 무용과 젊음이 있었기에, 아니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연극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하는 이토록 소박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낸다.


2014년 7월 30일 수요일

화학작용_선돌편 시리즈와 “일회 공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화학작용’ 선돌편 : 7/9~8/31, 선돌극장> 


 스무 개의 극단(혹은 그룹)이 자생적으로 모여 하나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축제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이 게재가 되는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7/9~8/31, 선돌극장) 이들이 만들고 있는 축제의 이름은 ‘화학작용’이다. 예기치 않은 극단들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기획된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오롯이 우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토너먼트 식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편성된 두 개의 팀이 한 회 차의 공연을 구성하는 식이다. 현재 네 번째의 공연 순서까지 진행이 되어 총 여덟 개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화학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공연들의 프로그래밍은 어쩌면 독립된 기획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획적 컨셉을 축제의 이름으로 내 건 숱한 ‘축제식’ 공연들은 기획이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획이 작품을 압도하여 정작 작품의 색채는 기획의 그늘 아래 퇴색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의 목소리가 기획이라는 테두리선에 부식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비단 축제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의 목소리가 기획의 틀에 의존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숱한 과잉 기획의 공연들 가운데 오히려 기획의 독립성이 부재한 ‘화학작용’ 속 공연들은 솔직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란 조금 우연하고도 계산되지 않은 채로 발생한다. 이것은 으레 축제 혹은 기획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하나로 규정되어 왔던 것들,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전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채 계산되지 않은 스무 개의 공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의 층위가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것은 더욱 축제로 다가온다. 스무 개의 극단이 조금 거칠고 솔직하게 모여 있고, 그럼으로 비로소 ‘모여 있다’라는 느낌,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여 있다’라는 느낌을 실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 축제.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굳이 이 공연의 묶음을 축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공연 전체에 대한 리뷰는 축제가 끝나갈 즈음에 다시 쓸 것을 기약하며,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공연 팀에 속해 있던 구자혜 연출의 <일회 공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회 공연>
일시 : 7/20~7/24, 선돌극장
관극일시 : 7/21, 선돌극장
연출 : 구자혜
작가 : 고연옥, 김민정, 백하룡, 이리, 전소영, 오세혁, 정소정, 구자혜, 윤성호, 미하엘 뮐러
출연 : 이리, 장윤실, 박경구, 전박찬, 최순진, 김석기

공연화된 대본의 조각들 :
2006년   고연옥 작 <칼디의 열매>
2007년   김민정 작 <검은 입들의 집>
2013년   구자혜 작 <침입>
    년    미하엘 뮐러 작
2012년   윤성호 작 <미인> 그리고 <미인> 중 공연되지 않은 <누수공사를 기다리며>
2012년   이리 작 <배우L의 독백 - 훈제란과 자전거 도둑에 대하여>
2012년   전소영 작 <오늘의 날씨>
2010년   정소정 작 <뿔>
2001년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윤성호 작 <당신에게>
흥얼거림 : 미하엘 뮐러 중 마지막 페이지 노래 부분 (미하엘 뮐러 부름)


#
  <일회공연>에서는 발표는 되었으나 무대 위에 상연되지 못한,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못한 문장들”을 모아서 무대 위 장면으로, 혹은 무대 위 장면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그 미완의 생명들을 소생시킨다. 고연옥, 윤성호, 전소영, 정소정, 백하룡, 이리 작가 등의 작품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의 파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 꺼내어 놓는다. 시작부터 날카롭게 집중력을 모으게 했던 것은 바로 작품이 꺼내어 놓은 이 시선 자체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탄생했던 것의 죽음, 죽은 것의 소생, 탄생과 죽음과 소생 그 사이를 둘러싼 것들. 혹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조차 없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그것들의 사이를 오고 갈 시선의 힘이 왠지 몹시 반가웠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무언가를 애써 에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선의 힘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작품이 취하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사이를 떠도는 시선은 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무대의 잠재 혹은 무대의 잔재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게 하는 쾌감을 자극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분장실 속 물건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불가능하고도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다.


# 윤성호 작 <미인>의 한 장면
  한창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까닭모를)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듯한 연인이 등장한다. (사실 이 이별은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이별이지만, 군 입대라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이 장면은 문맥이 생략된 채로 보여지는 만큼 이 둘의 이별은 까닭 모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문맥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연인이 등장한다. 이 둘은 그들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재연한다. 모든 연인에게는 처음이 있다. 그것은 돌이켜 보고 난 후에야 아는 것이지만. 모든 연인에게는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장면으로 존재한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들이 보낸 한 시절은 마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과 기억, 기억과 또 다른 기억, 사실, 사실과 기억된 사실, 망각. 그들은 첫 순간을 복원해내며 이 단어의 사이와 사이를 떠돈다. 이 둘은 그토록 선명했(으리라 믿었)던 첫 순간을 복원하려 들지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 첫 순간이 한없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순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안다한들, 아니 그것이 설령 우리 스스로의 사건이라 한들, 우리는 어느 순간 순간들의 행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생략, 어느 소소한 망각,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과 그것들을 소생시키려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 작품의 초반을 여는 이 장면에서 가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싼 모든 까닭모를 미완성과 그 미완성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느 한 순간의 미완성이 한데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장면 안에서는 어떤 맺혀진 순간의 힘이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존재했던 것, 기억을 초월한 기억. 어쩌면 이 공연은 생략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라졌으나 존재하는 것, 흔들리면서도 고요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이어지는 윤성호 작 <미인> 가운데 “누수 공사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말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말들, 점증되는 짜증과 불신,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헛소리들, 계속해서 지연되는 시간,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그 상태.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배우들이 지면 속의 카툰처럼 벽면에 붙어 서 있다가 차츰 연극 속의 인물로서 호흡을 찾아가며 무대 위로 서는 동작이 흥미로웠다. 텍스트에서 연극으로, 그 테두리를 넘는 행위를 보여주는 움직임. 죽어 있던 것의 호흡, 생략된 것의 복원. 그리고 바짝 무대 앞 선까지 나온 이들이 한 줄로 정렬하여 반복되는 대사를 읊고 그 대사들의 반복은 시간과 정서의 점증을 빚어내는데, 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그토록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서 있으면서도 정서와 시간의 부피를 증폭시켜내는 힘이란!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제시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이것은 마치 소리 없는 텍스트가 빚어내는 감정과 시간의 증폭 같았다. 다시 말해 연극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독서의 행위 같았다. 관객은 무대 위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 장면이 만드는 효과는 독자가 텍스트를 마주할 때의 효과였기 때문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묵독할 때 텍스트 속의 기호는 낱낱한 문자들일 뿐이나, 독자가 그 기호의 결 사이 사이에서 숨을 쉬며 기호라는 질료를 자신의 감정으로 증폭시키는 묵독의 과정, 그 내면의 행위를 무대 위로 뽑아 표현한 듯한.
  이 대목 즘에서 생각했다. 이 연극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 이유는 (그 숱한 메타 연극들이 저지르고 마는 식상한 화법들처럼) 나 이렇게 논다, 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텍스트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다양하게. 반복되고 늘어지고 지연되고 인내하는 언어의 힘으로 장면의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 안에서 다시 언어는 지루하고도 의뭉스럽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텍스트가 연극 안에서 놀고, 그 놀이 안에서 연극은 장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청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 이리 작 <배우 L의 독백>
  정말 잘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잘 해 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파토가 나버린 일처럼.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공연 때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자 했‘는데’, 갑작스럽게 내일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하고.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루라도 해 보려고 훈제란을 샀‘는데’, 그 훈제란을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혹은 너무 쉽게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일처럼.
  세상에 정말 잘 나오려 했‘는데’, 그렇게 잘 나와서 잘 살려 했‘는데’........... 나오자마자 의미를 상실해버린, 혹은 의미를 박탈당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언어. 그래서 ‘그냥’ (별 각인 없이) 죽어버린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곧 연극 자체가 되게 하는 연출의 방향이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전체적인 할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이 공연 전체의 공기를 오롯이 자기의 이야기 속에 실어내었다. 이 연극은 이런 연극입네, 특히나 이 연극은 이런 ‘메타’ 연극입네, 하면서 연출자나 배우가 직접 나서서 서사를 풀어 놓는 그 숱한 연극 놀이들을 만나 왔지만, 이 작품만의 표현 방식은 특별했다. 지극히 재미없을 수도, 복잡하기만 할 수도 있었던 첩첩 쌓인 메타 서사를 특별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귀에 유유히 전달되게 하는, 자연스러움과 집중력. 아 좋은 스토리텔러의 힘이란!
  이 장면의 연기를 한 배우가 사실은 이 장면의 언어들을 만든 작가(이리) 본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난 후,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낸 ‘메타의 메타의 메타 속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의 작가 속 작가’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 공연조차도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드러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이 구태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서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사라질 뻔한 것들의 운명은 어떤 글을 세우고 부수고의 연속선 안에서 때로는 살아남았고, 때로는 사라졌을 어느 창작의 형체를 둘러싼 것들이다. 창작의 입장에서 창작이란 이토록 불명확한 과정임에도, 수용자에게 창작은 마치 그것이 명확한 테두리를 지닌 무언가로 여겨진다. 하여 미완된 작품의 생략을 복원해내고, 완성된 작품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이 공연의 행위는 이토록 불완전한 창작자와 이토록 명백한(듯 보이는) 수용자 사이의 시선과 시차를 희미한 발짓으로 거스르고, 에둘러가는 데에 있다. 이 공연의 엔딩도 (윤성호 작 <당신에게>의 부분) 이러한 작가의 희미한 정체성에 화두를 실고 있다.

#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곧고 차가운 벽.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 너무도 잘 보인다. 서로 자기의 편에서 단 한 발도 저 편으로 섞이려 들지 않는. 아무리 그 방에서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소통을 갈망해도 현실은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다. 그 차가움과 냉담함과 단절이 너무도 안정적이다. 빗금으로 그어진 조명 분리선. 그 선에 대한 인식 하나로 표현된 일련의 움직임들. 단절된 소통을 다급한 분노로 표현해내는 움직임과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소통 같은 것)를 습기 차게 갈망하면서도 몸으로는 다시 단절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자포. 그것의 반복이 너무도 안정적이고 차갑다. 여고생을 상처받은 사슴 같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 것도 이 장면에서 전해지는 그 철저한 단절, 그 꿰뚫을 수 없는 냉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가느다란 빗금 조명등과 가늘게 삽입된 crack 사운드. 단 두 가지의 질료만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장면일 뿐인데, 이 파편의 유희에서 작품의 질긴 공기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건. 이토록 파편의 시가 해 낼 수 있는 것을 미완의 연극으로 그려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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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되었으나 상연되지 못한, 상연되었으나 생략된 장면과 언어들을 ‘일회 공연’으로 올려 낸 이 작품. 이 작품의 소개를 받았을 때에는 그 생략된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연극이려니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조금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이 자꾸만 빚어내는 어떤 사이를 떠돌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생략이 아닌 생략이 되기까지의 것, 그래서 또한 부활이 아닌 그것이 되살아나기까지의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 연극은 순간이 아닌 순간과 순간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 속 장면들은 오롯이 대본과 유희하고 있다. 대본을 연극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대본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대화가 즐겁다. 대본과 연극 사이의 유희의 대화가. 그래서 두텁고, 새롭고, 줄기차다. 기대할 수 있는 연출과 배우와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즐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