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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9일 금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이예은

2001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16년이 지났다. 이 공연도 16년을 더 살았고 나도 16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되는 일. 작품과 나 사이에 낀 긴 시간이 어지럽고 부끄럽다. 그 동안 연극의 힘을 부정만 해 왔던 나의 소란스럽고 편협한 관심사가 모조리 부끄러워지던 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편견이 0점이 되어 연극을 ‘구경’하는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있었던 시간.

성씨로 바뀐 가문, 저잣거리 놀이로 바뀐 대결, 잔치로 바뀐 파티, 춤꾼의 흥으로 바뀐 머큐쇼의 활기, 육담으로 바뀐 성적 지향, 그럼에도 끈기 있게 살아 냄으로 바뀐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전환점, 골계미로 바뀐 철학, 재담으로 바뀐 시, 운동으로 바뀐 긴장, 생명으로 바뀐 초월.

특히 긴장감과 화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분화된 갈등 구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시켜 내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관절이 오태석의 공연으로 와서는 시종 끊어지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열기로 승화된다. 오프닝 잔치 씬에서부터 놀이가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놀이인 역동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정서 속에 생존하던 힘이고 오태석이 우리 연극의 정신을 껴안으려 한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문과 가문이 대결하고, 사랑과 고통이 대결하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은 0이다. 대신 긴장감을 대체하는 역동과 힘이 있는데, 바로 그 힘 속에 모든 감정이 한 데 녹아있다. 이분화의 초월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철학이 역동 속에 공존하는 그 모든 삶과 죽음의 힘으로써 새로이 약동한다. 기쁨과 분노도, 슬픔과 환희도, 화해와 대결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탄성 속에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박력 있게 체감케 하는 음악적 리듬감과 움직임의 활력. 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전통의 정신 속에서 바로 이러한 긍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여태, 아니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이 힘을 발견케 한 오태석의 숨소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로미오가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hug)를 주는 장면은 화해와 대결의 구분이 초월적 고뇌로 승화되는 원작의 지점을 넘어 아예 화해와 대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월적 기지가 단지 깊은 아름다움이기보다 자연스러운 정신처럼 작품 속을 파고든다. 하여 장면 장면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질문이 불거져 나오는 고결한 장면들로서가 아니라 작품 너머에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을 한 데 껴안는 정신이 발현되는 장면들로 지속된다.
 
머큐쇼의 죽음 장면에서는 해학과 박력이 넘쳐난다. 이 장면에서 특히 웃음과 고통이 극렬히 공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건으로 희극과 비극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힘과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힘이 뜨겁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이 지점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랑과 고통, 화해와 대결의 이분법이 초월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어 다시 초월의 불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를 주었던 로미오가 머큐쇼가 죽고 허그 대신 칼을 물리는데, 공연의 이 장면에서 탄생한 급박하면서도 어지러운 운동감은 셰익스피어의 초월적 기지를 넘어서는 짠 내 나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만을 믿으며 화해도 쉽게 꿈꾸던 로미오가 고통과 맞물린 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며 기쁨 속에는 고통이, 가능성 속에는 불가능성이 한 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보다 한 차원 깊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뒤따를 사랑을 그럼에도 감행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죽음 같은 이별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하려고 죽음을 모의한다. 그러나 모의된 죽음은 정말로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서 사랑하고 싶었으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미숙한 첫 사랑의 극단화된 비극이자 죽음과 사랑의 선을 초월할 수 있는 첫 사랑의 극단화된 진실성이라는 사실도.

살아있고, 살아있고, 살아있다.
부러 무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현해내는 일, 작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요- 하고 외치는 숨소리.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억지 해석을 하거나 과장 찬미를 할 필요도 없이 공연의 생명 그 자체를 관객의 피부로 흡수하게 하는 힘.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를 오롯이 오태석의 것으로 살아내게 한 힘이 있다.
해석도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살아내게 한 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관절 마디마디에 묻힌 뜻이 오태석의 숨소리로 체감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태석의 것이 된 것, 그 이상이 있다. 원작도 오태석도 그 이상의 것도 공존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7. 6. 7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3월 31일 금요일

두 가지 복수, 다른 모습

산책

  얼마 전 (또) 한 대학의 남학생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성차별과 성희롱에 해당하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중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지 왜 대학에 왔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특히 이 내용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나 역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이제는 대기업의 대리인가 차장이 된 옛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여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어려운데, 입시 경쟁만 더 치열하게 하면서 꼭 대학을 가야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 묻고 기 막혀 했으나, 그 친구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전히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라니, 이렇게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유난히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런 저런 일들에 다 불편해 하는 프로불편러(혹은 불편충)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이런 불평등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연극계에서도.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2월과 3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과 <메디아>(로버트 알폴디 연출)를 연이어 관극했다. <조씨고아>는 원나라 이야기이고, <메디아>는 그리스 신화이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복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복수하는 사람의 성별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

  먼저 <조씨고아> 이야기를 해보자. 도안고의 계략 때문에 조순을 비롯하여 조씨 집안 일족이 몰살당한다. 이때 조삭(조순의 아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도안고는 출산 후 이 아이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삭의 아내를 감금했으나, 그녀는 복수의 씨앗이 될 아이만을 살리기 위해 시골 의원 정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영은 평소 조순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이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이를 숨겨 달아난다. 이때 정영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 분명 후일 복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정영이 아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아의 어머니가 자결하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장군도 정영과 아기를 도망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도안고가 고아를 추적하고, 그를 찾지 못하면 또래인 모든 아기들을 죽이겠다고 하자, 정영은 고아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는다. 공손저구 역시 목숨을 걸고 이 계획에 가담한다.

  아기를 빼앗긴 정영 부인의 애 닳는 울음이 아직도 생각난다. 왜 자기 아들이 죽어야 하냐고 울부짖는 어미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데려가는 정영의 모습도 떠오른다. 죽음을 선택한 공주와 장군, 공손저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고 20년간 고아를 키운 정영의 모습은 분명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졌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아이를 살려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인에게 걸맞는 최후를  위한 고귀한 복수. 조씨고아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 복수의 씨앗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물론 도안고 집안을 멸족함으로써 복수는 성공한다. 20년간 고아를 키우며 복수의 날을 기다려온 정영의 얼굴에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 안도와 허무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어쨌든, <조씨고아>에서 복수는 고귀한 것, 권선징악의 아름다운 결말을 완성하는 것이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더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여자, 그녀가 바로 메디아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메디아의 복수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메디아가 자식들을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들이 많은 것도 이 이야기를 치정극,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타국, 코린토스로 왔으나 남편은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바람이 나고, 곧 결혼을 한단다. 메디아 자신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고, 아이들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이 순간, 메디아는 공주와 왕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다소 길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의 장면을 아래에 인용해보자.


메데이아 나는 내 자식들을 죽일 거예요.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이아손의 집을 송두리째 허물 것이며,
가장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나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인 죄를 피해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친구들이여!
그래야만 해요. 내가 살아서 뭘 해요?
내게는 조국도 집도 불행의 대피처도 없어요.
내가 한 헬라스 남자의 감언이설을 믿고
선조들의 집을 떠났을 때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던 거예요.
그러나 그 자도 이제 신의 도움으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그 자는 앞으로 내가 낳아 준 자식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고, 새 신부도 내 독에 의하여
고약한 여인으로서 고약한 죽음을 당해야 하니
그 자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할 테니까 말예요.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역, 791행 ~ 806행)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메디아의 여러 감정이나 이유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지는 연출의 마음이지만, 알폴디는 메디아를 ‘이기적인 여자’로 그러니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죽어 마땅한 여자’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여자의 선택”이라는 부제를 달고서는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다니. 메디아는 남편을, 이아손은 새 신부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식을 잃었다. 그런데 메디아만이 죽음으로 처벌당한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하는가? 결혼을 앞둔 이아손이 자식들을 본체만체 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는가? 메디아가 어머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환상이거나, 혹은 굴레일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단지 달라진 결말에서만 느껴진 것은 아니다. <메디아>의 코러스들은 모두 여자배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메디아가 등장하기 전, 첫 장면에서 그녀들이 보여준 모습은 메디아에 대한 질투, 그리고 험담이었다. 코러스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끝까지 지속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것일까.) 이혜영 배우가 분한 메디아의 강렬함이 연일 찬사를 받고 있는데, 무대 위의 메디아는 그저 “나쁜 여자” 그래서 “벌 받은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고 후회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알폴디는 메디아에게 속죄할 기회도, 악녀의 이미지도 빼앗아 버렸다. 메디아는 이기적인 여자, 그 이상도 아니기에 자식까지 죽이는 선택을 하고서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속죄할리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마차타고 유유히 떠나는 메디아가 두려웠던 것일까?

  복수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옳고, 메디아의 복수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정영도 메디아처럼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영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상상하고, 헤아려야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택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아름답게 그려졌다. 복수를 완성한 그들은 선을 이루었고, 이제 자신을 위해 목숨 내어 준 사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정영은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내에게 속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아의 복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매력적이지만, 신경질적이고, 악한 여자.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자일 뿐이었다. 결국 메디아는 죽음으로 처벌당해야 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홀로 남은 이아손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이런 끔찍한 결말을 맺게 된 것에 대해 후회할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게 될까? 그렇다면 알폴디는 복수의 (그나마) 고귀한 면을 이아손에게만 준 것이다. 알폴디의 결말은 어쩌면 새로워보이지만, 악녀 메디아를 처벌하는 오래된 남성적 위계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과, 불편함을 남긴다.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이토록 망가진 메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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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메데이아(a.k.a. 메데아, 메디아)가 이아손의 손에 죽는 게 현실적이겠지요. 맞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해요. 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냐고요. 그런데 현실적인 것을 찾으려면 애당초 2500년 전 이야기를 뭐하러 다시 해요? 게다가 요즘 국립극단은 지금 이곳의 현실, 여기 우리 사는 얘기 하는 거 불편해하잖아요? 아리스토파네스로 입장 곤란해진 거 알아요. 그렇다고 에우리피데스를 가져와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요? 쫄아 있는 게 너무 보이잖아요. 아직도 쫄아 있으면 어떡해요. 블랙리스트 다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당신이 마지 못해서 그런 거라 누가 믿겠어요? 정치극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굳이 리얼한 치정극을 할 건 또 뭐에요? 리얼한 거 좋지요. 그런데 현실을 외면하면서 리얼하려니 스텝이 꼬이잖아요. 아무리 한남충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라지만 이아손 같은 찌질남이 메데이아를 죽이는 꼴을 왜 무대에서 봐야할까요? 메데이아가 자기 아이들을 칼로 찌르고 피 흘리며 죽는 건 또 왜 봐야 하나요? 여혐이라 욕먹는 에우리피데스도 그건 안 했다고요.

아녜요. 메데이아가 살아서 떠나는 게 더 슬프잖아요. 그게 진짜 비극이잖아요. 그래야 살아 있는 동안 아이들을 죽인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아이게우스에게서 낳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기가 죽인 아이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메데이아 스스로 그러잖아요. 그날 하루만 잊고 평생 울어야 한다고요. 자기도 감당 못 할 잘못을 저지르고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고요. 해결되면 안 되는 고통이라고요. 살아있는 게 지옥이라고요. 그런데 한 날 한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냐고요. 아무리 황당해도 용수레 타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야 한다고요. 관객들이 좋아서 손뼉 치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투명 실린더는 괜찮고, 용수레는 왜 안되는데요?

이아손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선 안 돼요. 찌질한 놈이라 그럴 자격도 없는 데다가, 눈앞에서 새신부도 장인도 두 아들도 다 잃었잖아요. 그럼 그 모든 걸 복수할 기회도 잃어야죠. 그래야 아찔하잖아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볼 거 아녜요. 이아손에게 허락된 건 통곡이지 메데이아를 죽이는 손쉬운 분풀이가 아니에요. 뭐 잘했다고 이아손의 소망이 이뤄져야 하나요? 메데이아를 이토록 망가뜨리면 어쩌란 말이에요.

2016년 3월 9일 수요일

빛의 제국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는 직사각형의 테이블, 의자 8개, 소파 하나, 여성용 핸드백 하나, 스탠드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다. 커다란 스크린이 정면에 하나, 무대 오른쪽에 하나 설치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마이크가 두 개, 배우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연극의 원작인 <빛의 제국> 소설책이 여러 권, 종이와 연필도 있다. 배우들은 이미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데, 연필로 무언가를 쓰기도 하고, 서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며, 중간 중간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도 한다. 관객을 등지고 앉은 배우는 조용히 기타를 연주하며 흥얼거린다. 일찌감치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웅성거리며 공연에 대한 기대를 나누거나, 인사하는 일도 적었다. 나는 지금 그들이 배우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등장 인물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인물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관람시 유의사항을 안내해준다. 가까운 비상구로 탈출하라는 그 말이 심싱치 않아서 나도 모르게 비상구를 한 번 쳐다 보았다. 같은 옷을 맞추어 입은 두 남자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는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모두 두 남자를 응시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관습적인 연극이 아니라더니, 역시 암전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충돌들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는 140여분의 공연 내내 나는 여러 가지의 충돌들(혹은 혼란들)을 경험했다. 그 중 일부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의도한 것일테고, 어떤 것은 내가(김영하 작가를 좋아하고,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으며, 그래서 어떤 기대 지평을 구축한 내가) 만들어 낸 혼란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관객들도 명쾌하거나, 쉽게 이 작품을 관극하지 못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직후,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서로 작품이 이해되었는지 물었고, 예술가와의 대화(3월 6일 진행)에서도 관객들이 연출가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질문들은 “왜”, 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원작 소설 <빛의 제국>과 연극 <빛의 제국>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은 391페이지의 꽤 두꺼운 볼륨을 자랑한다. 아침 7시, 기영의 집에서 시작되어 다음 날 아침 7시 기영의 집 거실에서 끝이 난다. 10년간 소식이 없던 북에서 갑자기 송환 명령을 보내와 기영은 혼란스러운 24시간을 보내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 실체는 여간해서 포착되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는 더 혼란스러운 진실을 알게 된다. 그의 부인 마리와 딸 현미까지도 어제와는 매우 다른, 이상한 하루를 경험한다.
이상한 하루,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어떤 함정에 빠져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느낌,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똑같아 보이는, 그러나 많은 것이 달라진 새로운 하루가 어이없이 시작되던 아침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2006년 원작 소설을 읽고, 나는 우리 주변에 정말 간첩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물들어 권태를 느끼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신용카드와 전화 사용으로 나의 움직임이 손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렇게 긴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조각내게 되고, 어떤 장면들을 선택하게 된다. 프랑스인인 연출가는 분단 상황,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사랑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상황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신기하다고도 했다. 각색가와 연출, 배우가 읽은 <빛의 제국>은 내가 읽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작품의 흐름이나 의도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분단된 상황이 기영과 마리를 헤어지게 한다고 했지만, 그둘은 헤어질 수도 없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절망, 무력한 인간이 보내는 하루의 인상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사황은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상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장면들은 소설의 내용을 흥미롭게 재현했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촘촘한 맥락이 사라지고 그 일부만 끼어들어 그 재미를 모두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세금 무서운 줄 알라는 마리 아버지의 유언이나, 위 절제 수술을 해서 계속 먹어 줘야 한다는 정팀장의 대사같은 것은 더 웃음을 줄 수 있었을텐데, 서둘러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 의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같다.


여러가지 표현 양식들


이 작품에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극 초반에는 다소 혼란스럽고, 의아했다. 인물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과거를 회상하며 낭독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와 양식적인 연기가 혼재되어 있다. 기영과 마리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의 개인적인 ‘북한에 대한 기억과 체험’이 마이크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 전해지기도 한다. 영상도 빈번하게,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여러 표현 방식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각각의 표현 방식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열심히 메모를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밝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어떤 의도에 따라 분석하기 보다는, 서로 섞여 있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같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하루도, 북한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도, 원하는 대로 삶이 나아갈거라고, 하루 하루 똑같은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확실하지 않다는 것, 어느 순간에는 확실해 보이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너무 낯선 것이 삶이라는 것. 혼재된 표현 양식들의 의도를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런 다양한 층위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이, 우리의 하루도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영상과 무대


그래도 영상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자. <빛의 제국>에는 정말 많은 영상이 사용된다. 이것들은 배경이나 무대를 보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영상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이다. 극 초반 양치하는 김기영(지현준 분), 장마리(문소리 분)의 맨 얼굴, 마리의 담배 피는 모습, 마리와 고성욱 사이의 카톡 대화 장면 등은 마치 영화같다. 반면 무대 위의 연기는 (사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같은 영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주로 마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친구가 죽은 이야기, 자신의 가족 이야기 등을 건네고 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낭독은 영상에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영상 속에서 너무나 사실적으로 샤워를 하던 두 남자가 무대 위에서 양식적으로, 마치 제의에 참여하는 신도처럼 움직이며, 마리와의 쓰리썸 장면을 표현할 때도 어떤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서도) 이러한 느낌은 끝까지 계속된다. 영상 속에서는 그냥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던 선생님 소지현(양영미 분)이 무대 위에서 말을 시작하니, 어딘가 낯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로 보인다. 기영이 그녀의 말을 대신하며 그녀를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낯선 느낌은 마리와 기영의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폭발했다. 영상 속의 두 남녀는 당황하고, 절망하고, 답답해하고, 울고, 체념한다. 그러나 무대 앞쪽에 선 기영와 마리의 대화는 너무 건조하다. 마리는 지난 15년간, 기영이 바뀔 거라 생각하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서야 기영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이다. 영상 속의 그녀는 한숨도 쉬고, 울고 기영을 외면한다. 무대 위의 마리는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기영은 지워진 존재이니, 자신의 비밀도 담담하게 털어 놓을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북으로 가기 직전, 아내를 찾아와 마리가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라면서 목소리에 아무런 욕망을 담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남고 싶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해도, 북으로 가라는 아내의 말에도 그의 목소리는 건조할 뿐이다. 이 순간 기영은 울고 있었지만, 무대 가까이 앉은 관객이 아니고서야 그의 눈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상 속의 기영은 먼산을 바라보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무대 위의 기영와 마리는 가만히 서서, 최대한 건조한 체하며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모를만큼 아쉬운 장면이었다.
예술가와의 대화 때, 어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몰입할 수 없음을 당당히 이야기했고(많은 관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혹시 그렇게 장면을 연출한 이유를 물었다. 연출가는 자신의 의도에 대해 길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클로즈업과 같이 무대 앞쪽에 선 인물의 위치, 마지막 순간까지 담담할 수 밖에 없는 두 인물의 성격, 그래서 소리치고 화내는 식의 감정적 표현을 지양한 이유 등, 말로 들은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으나, 무대 위에서 그것이 정말 표현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연출의 의도를 느꼈을까) 소리치거나 따귀를 때리지 않는다 해도, 감정이 섞인 목소리의 냉담함, 애절함은 느껴질 것이라고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관객의 부질없는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 그 이후


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기영이 집으로 들어가 누운 뒤, 무대와 객석 조명이 모두 꺼졌다. 아연실색하는 마리의 표정을 기대했으나, 그 표정과 감정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졌다. 다른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서 밝힌 것처럼 조금 혼란스러웠고, 당황했다. 프로그램북을 꺼내 뒤적였는데, 어떤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공연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친절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내 선입견때문일지 모른다. “연극은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 사이에 놓여 있는 모호한 공간(프로그램북, 15쪽)”이라고 말한 연출이 모호한 연극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많은 이야기와 질문이 떠오르도록 관객에게 여러 방면으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서로 다른 느낌과 결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충분히 마음을 열고 다른 이야기로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펜을 내려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관극하고 싶다.

2016년 2월 2일 화요일

20주년, 《날 보러와요》

글쓴이_산책

극장 로비는 분주했고,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면인 것처럼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연 시작을 알리고, 객석의 불이 꺼지자마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20주년 <날 보러와요>의 OB 팀 공연 날이었다. 연극 <날 보러와요>의 20주년 공연에는 1996년 초연부터 참여했던 김뢰하, 유연수 배우를 비롯하여 권해효, 이대연, 황석정 배우까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만한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공연이다.

관극도, 글쓰기도 꽤 오래 쉬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변명을 수십 가지 늘어놓고 싶다.) 번뜩임보다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승부하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더니 극장은 너무나 멀고, 글은 그 보다 더 멀리 느껴진다. 더구나 20주년을 맞은 작품을 마주하자니, 20년이라는 그 시간의 두께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530만 관객이 관람했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을 – 자본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 20년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20년이라는 두터운 시간을 살아 내면서, 계속 그리고 또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무대에는 형사들 뿐.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2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범행 장면을 목격할 수 없다. 다만 첫 장면에서 무대 뒤로 움직이던 용의자의 그림자, 여자의 비명, 용의자의 신음 소리 등을 들었을 뿐이다. 무대 위를 가득 채우는 것은 형사들뿐이다. 그들은 고군분투하지만, 수사에는 별 소득이 없다. 용의자와 설전을 벌이고, 전화를 받고, 기자와 싸운다. 미스 김이 배달해주는 커피를 마시며 이따금 실없는 소리를 던지며 쉬기도 하지만, 며칠씩 집에 가지 못한다. 범행 장소의 흙을 몰래 퍼 와 터럭 하나 라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애잔하다. 형사들에게 뾰족한 수가 없는 것처럼 관객들은 용의자에 대한 별다른 힌트를 얻을 수 없다. 여러 힌트를 준다면 나름대로 추리라도 해보겠지만, 그저 형사들이 들려주는 단서를 듣고, 그들의 수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범죄를 다루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사건 장면, 용의자의 실루엣, 형사들의 현장 수사 장면 등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것과 달리 <날 보러와요>는 경찰서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중요한 단서라도 찾아내려면 형사는 무대 밖으로 사라져야 한다. <날 보러와요>의 관객들은 끔찍한 살해 장면들을 피할 수 있지만, 용의자를 적극적으로 추리할 수도 없고, 흥미로울 법한 형사들의 수사 과정도 지켜볼 수 없다. 경찰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연극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관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의 힘은 무엇일까?

여기서 좋은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객석에 앉을 때면, 늘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극장에 올까, 어떻게 극장에 오게 되었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극보다 훨씬 더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연극 <날 보러 와요>에서 형사들은 무대에 매여 있어야 하지만 영화 속 형사들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형사들의 고단한 일상은 효과적으로 그려졌고, 언론이며 검찰의 압박들도 더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전화 한 통, 신문을 보며 터트리는 형사의 분통으로 그러한 것을 모두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연극보다 영화는 훨씬 사실적이며 생생하다. 형사나, 피해자에게 품게 되는 안타까움의 감정도 더 강렬하게 유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남기는 순간순간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무대 위에 내리는 비, 빗소리, 범인이 저벅저벅 걷는 소리, 여자와 범인의 신음 소리는 어떤 것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관객의 귀에 꽂히고 만다. 이 소리들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비, 젖은 길을 걷는 사람의 무게감, 공포의 질감들을 느끼게 한다. 또 김 형사가 사건 장면을 묘사하면서 용의자 정인규를 압박할 때, 용의자 정인규의 점차 일그러지는 표정, 이제 곧 범행을 자백할 것만 같은 용의자의 긴장감, 혐의를 벗었을 때, 소름끼치도록 안도하는 모습도 압권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무대에서 관객에게 직접 전달된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실감나는 장면을 볼 때, 공포감을 느끼지만 영화관을 나서면 이 세계는 영화 속 세계보다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어떤 상황에서 직접 받은 그 인상을 쉽게 가시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기운의 강렬함 때문인 것 같다.

관객들이 자꾸 웃는다.

사건을 목격할 수 없다 해도, 이야기 자체는 끔찍하다. 강간에 연쇄 살인, 그리고 영구 미제 사건이다. 용의자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희생자 가족들은 아직도 원통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날 보러 와요>를 보면서 자주 웃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형사가 시를 읊는 장면이나, 서랍 속에 자작시를 숨겨 두었다가 들키는 것도 웃음을 야기한다. 불쑥 튀어나오는 욕설들, 미스 김의 애절한 사랑 표현(경찰서에 목소리 변조를 해서 전화한다거나, 말없이 끊어 발신지 추적을 당하는 장면 등), 형사들끼리 주고받는 말도 안 되는 대화와 농담 때문에 관객들은 자주 웃는다. 류태호 배우(용의자 역)의 바보 연기, 술 취한 연기들도 웃음을 자아낸다. <날 보러 와요>와 마찬가지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tvN의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도무지 웃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의아한 것이다. 정신 지체인 용의자가 범행 장면을 묘사할 때, 우리는 범행 장면을 들으면서 웃고 있다. 관객들은 웃는 그 순간에, 혹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뿔뿔이 흩어진 형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몬 후에, 자신과 객석의 웃음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사건은 매우 직접적인 자극이고, 그래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TV 드라마는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릴 수 있지만, 극장에서는 그 장면이, 그 이야기가 싫다고 해서 벌떡 일어나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연극은 그 어떤 서사 장르보다 관객과의 밀당에 능해야 하는데, 밀고 당기기의 한 전략으로 웃음은 매우 효과적인 것 같다. 관객들은 웃으면서 긴장을 풀게 된다. 형사들의 고단함, 풀리지 않는 사건의 답답함 속에서 종종 웃음을 터뜨리면서 여유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여유는 작품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한다.

낡은 것들, 그리고 여전한 것들

20년 전 초연 작품이기 때문에 극중 상황은 꽤 낡은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김 형사는 FBI의 과학 수사 기법을 독학해서 가설을 제기하는데, 96년 그때 이 방법은 그 당시로서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초등학생도 프로파일링이라는 단어를 아는 지금, 이러한 과거는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라디오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신청한 용의자의 엽서를 찾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만 하는 장면도 그러하다. 레퀴엠이 흘러나오고 있는 지금, 김 형사의 추론대로라면 곧 살인이 벌어질 터인데, 형사가 경기도 화성에서 서울 방송국까지 가야 한다니. 지금이라면, 범인이 라디오에 사연 같은 걸 보낼 리도 없겠지만, 더 빨리, 더 쉽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날 보러 와요>의 호흡은 꽤 길고 촌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빠른 속도의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장면들을 진행하며, 빈번하게 암전을 끼워 넣는 작품들과 달리, 장면 장면이 느긋하게, 진행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암전이나 무대 전환도 느슨하다. 무대 위에 놓인 성냥, 포터블 카세트, 미스 김의 커피 배달, 과학 수사에 대한 못미더움들 뿐 아니라 극의 진행 속도도 20년이라는 세월을 느끼게 한다.

초연 이후 출연했던 배우, 연출이 같이 한 무대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작품 생활이 20년을 넘어 서고 있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여전함은 아름답고, 또 의지가 되는 무엇인 것 같다. 시간을 잘 살아내고, 견디어 내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같다.

2014년 4월 7일 월요일

4월의 장바구니

by 산책


<히스토리 보이즈>, 3월 14일 ~ 4월 20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히스토리 보이즈>는 영국의 앨런 베냇의 대표작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그들의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영국 초연(2004년) 당시에도 호평을 받고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로도 개봉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3월 연강홀에서 초연되었고, 올해 재공연하게 된 작품입니다. 특별한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많이 알려진 작품인데 저는 이제서야 좀 궁금해져서 뒤늦게 예매했습니다. 벌써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고, 작품이 좋고, 또 멋진 배우들이 많이 출연해서 그런지 여러 번 관극하신 (특히 여성 관객)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3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또 고등학생들의 고민과 토론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데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찾는 데에는 분명 어떤 에너지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열정적으로, 그래서 아름답게 보일 그들의 토론 장면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산책의 <히스토리 보이즈> 리뷰 바로가기



<바후차라마타>, 4월 5일 ~ 4월 20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난 여잔 아니에요. 하지만 여자에 가까워요.”
3월 장바구니에서 소개한 <남산 도큐멘타>와 패키지로 예매한 작품입니다. 예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궁금해서 입니다. 무대에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나를 포함해서 관객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그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분법적인 성(性)의 구분’과 이에 맞서는 ‘대안적 젠더(제3의 성)에 대한 제안’도 좋지만 그저 사람으로서의 그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2부에서 관객들은 연극 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만들어 지는 새로운 이야기와 소통 방식들도 기대해 볼 만 한 것 같습니다.

덧붙임: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좋은 삶이 있을 때 좋은 연극이 있는 것만큼, 좋은 연극이 좋은 삶을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라는 소개가 무척 마음에 드네요.

이예은의 <바후차라마타> 리뷰 바로가기


<노래하는 샤일록>, 4월 5일 ~ 20일, 국립극장 달오름 

이미 드라마인에는 <노래하는 샤일록>에 대한 리뷰가 게재되었습니다(http://www.drama-in.kr/2014/04/shylock.html).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이지요. 첫 번째 작품인 <맥베스>도 즐겁게 관람했기에 사실 별다른 고민 없이 예매한 작품입니다.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 역시 에스티님의 리뷰를 확인하세요). 5월에는 <템페스트>도 예매하려고 합니다(템페스트는 4월 25일까지 예매 시 30% 할인을 받을 수 있답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 연작을 모두 관극하면 이 봄이 다 지나가겠네요. ㉦

2014년 3월 8일 토요일

450년만의 3색 만남 1 - <맥베스>

국립극단 <맥베스>

2014년 3월 8일(토)~23일(일)
명동예술극장
공연문의 1688-5966 (국립극단)

에스티의 첫날밤에 (프레스 리허설)


(재)국립극단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 세 편을 연속해서 무대에 올린다. <맥베스>는 그 선두 주자로 3월 8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병훈 연출은 텍스트에 직접적인 변형이나 가공없이 원작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거짓말 연기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말콤과 맥더프의 대화 장면이 생략된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유혹"을 중심 키워드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혹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세 마녀들은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과 짙은 화장을 한 팜므 파탈 무리로 그려진다. 



물론 맥베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여성은 언제나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이다. 지난 겨울 국립극단에서 해경궁홍씨 역을 맡았던 김소희가 이번에는 사도세자보다 더 무서운 남편을 둔 여성을 연기한다. 사실 이 역할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연출의 말을 통해 이 공연이 어떤 방향을 선택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맥베스 부부는]사랑하는 ... 사이지만 아이가 없음으로 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기 어렵다. 관계 유지를 위해 아이를 대체할 조건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남편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쟁터에 나가있는데다 아이가 없으니 맥베스 부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무기력과 외로움에 젖어있던 맥베스 부인에게 마녀의 유혹은 재밌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일순간 불이 붙을 수밖에 없다. 남편에 대한 맥베스 부인의 사랑은 강력할수록 파괴력도 크다. ...악행을 저지르던 맥베스 부인은 왜 두려워졌을까.  저 깊은 곳에서 왕좌를 얻었으나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이다. 남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철저히 혼자로 남게 되는 그 고적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내 "연출 인터뷰" p.29)

글래머러스한 여인을 마녀로 설정하고, 아이가 없는 무기력한 여인이 왕을 죽이는 모험을 감행한다고 해서 이번 공연이 연출가의 여성혐오가 두드러진다고 말하지는 말자. (작가가 이미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비극은 온전히 맥베스가 책임질 일이지 마녀나 부인 때문에 파멸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혹"이 아니라 "핑계"라 말하고 싶다.) 물론 덩컨 왕을 시해하기까지, 그리고 그 직후까지도 맥베스는 갈등하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맥베스는 아주 능청스러운 연기를 거뜬히 해내고 왕좌에 오른다. 박해수가 연기한 맥베스는 이 장면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이후로 맥베스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누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양심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맥베스는 잠을 대가로 내놓음으로써 범인들의 도덕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까지 등장하던 침대는 이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맥베스의 자리는 이제 침대가 아니라 왕좌로 고정된다.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자리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소품으로 사용되는 검이나 방패, 그리고 타공된 철제 패널로 만든 스크린 등이 관객들에게 무게감을 전달한다.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검이 상당히 무거워 벌써부터 한쪽 팔만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고 한다.) 철제 스크린에는 이미지나 영상이 투사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버남 숲 또한 철제 방패 위에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얼핏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요즘 시대에 영상을 사용하는 게 어느 누군가의 독점적인 아이디어일 수는 없듯이, 그것이 어떤 면에 투사되느냐 또한 누가 먼저인지를 굳이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컴의 병사들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대를 연상하게 한다. 시국에 민감한 관객은 이 장면이나 몇몇 대사들에서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접점을 찾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노골적이지 못한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갑갑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류의 보편적 유산인 셰익스피어를 보러 왔는데, 극장안에서마저 바깥의 지리멸렬을 떠올려야 하는 게 피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정치 싸움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맥베스>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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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4일 화요일

3월 장바구니

by 산책



<유쾌한 하녀 마리사>, 3월 6일 ~  3월 23일, 두산 아트센터 Space 111

이 작품은 “이보다 더 웃길 수 없다! 포복절도할 막강 코미디!”라는 문구에 끌려 예매했습니다. 요새 실컷 웃을 일이 너무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으하하하 웃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예매하고 보니 <은밀한 기쁨>과 같은 극단인 맨씨어터에서 준비한 작품이네요. <은밀한 기쁨>에서 알콜 중독자로 분했던 서정연 배우가 자살하려다 하녀 마리사를 죽이게 되는 요한나를 연기한다고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남편은 바람을 폈고, 부인은 자살하려고 하고,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어떻게 웃음을 만들지 기대됩니다.

이제는 국민 연극이 된 <라이어>를 무려 15년전, 그러니까 1999년에 보았는데, 사실 그 뒤로 코미디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오해와 우연이 만들어 낼 희극적인 상황과 사건들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만의 재기 발랄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매:

산책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리뷰

산책의 <은밀한 기쁨> 리뷰




<맥베스> 3월 8일 ~ 3월 23일, 명동 예술극장 

이병훈 연출, 김소희 배우, 박해수 배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 이름들 앞에서 제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고전은 종종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또는 나의 기대를 뛰어 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고, 재미와 감동을 주는데, 사실 그러한 경험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놓치기에는 아쉬울 작품인 것 같습니다. 혹 <맥베스>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첫 번째 <맥베스>로는 무척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매진임박이라고 하니, 망설이시는 분들은 얼른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매:

에스티의 <맥베스> 리뷰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극장편> , 3월 15일 ~ 3월 30일, 남산 예술 드라마센터 

다음은 <남산 도큐멘타>의 공식적인 작품 소개글입니다.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은 기존의 서사적 구조, 텍스트 재현적인 연극 양식을 벗어나 아카이빙과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토론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 형식으로 극장의 빈 무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극장의 안과 밖을 여는 남산예술센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을 선보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드라마인 독자가 계시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소개가 대체 무슨 말인지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실 이 소개만으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또는 재미가 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 그래서 그것이 사실도, 허구도 아닌,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순간들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상상해 보는 이 작품은 1962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 곳을 지나간 사람들, 그곳에서 올려진 작품들, 출연한 배우들, 그들이 연기한 인물들을 불러낼 것 같습니다. 그 과거들을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기대됩니다.

예매:

서유미님의 <남산 도큐멘타> 리뷰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햄릿>, 사유하지 않는 삶에 대한 공포

by 시뫄

<햄릿>
오경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3/12/11

비극적 영웅은 치명적인 성격의 결함(hamartia)을 가지며 그 결함이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이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의 토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영웅이 자신과 같이 어떠한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 즉 정화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햄릿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영웅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내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뿌리내린 수많은 햄릿과의 대면을 통해 느낀 것은 카타르시스와 비슷하다. 연민과 공포, 즉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한 자기연민과 그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통한 또 한 번의 자기연민으로 늘 어디엔가 호소하고픈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책으로만, 혹은 기타 매체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햄릿>을 드디어 무대에서 만나러 가는 내 기대는 미친 햄릿을 마주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