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혜경궁 홍씨>

by 서유미

<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변호인》이 개봉합니다.

by 에스티


여기 저기서 많은 리뷰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을 아끼고 감상을 대신하여 리어가 죽은 셋째 딸 코딜리어를 안고 외치는 마지막 대사를 옮깁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나서도 이 대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변호인> 예매를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 불쌍한 바보가 목매달려 죽었다.
아냐,
안 돼,
생명이 없어!
어찌하여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
너는 다시 못 오는구나.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제발 이 단추 좀 풀어주게.
고맙네.
이것이 보이는가?
이 애를 봐!
봐, 이 애 입술을!
여기를 봐!
여기를 보라고!
(죽는다.)

- <리어 왕> 5막 2장 (김태원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301-2면)
*산문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인용자가 줄바꿈하였습니다.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햄릿>, 사유하지 않는 삶에 대한 공포

by 시뫄

<햄릿>
오경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3/12/11

비극적 영웅은 치명적인 성격의 결함(hamartia)을 가지며 그 결함이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이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의 토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영웅이 자신과 같이 어떠한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 즉 정화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햄릿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영웅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내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뿌리내린 수많은 햄릿과의 대면을 통해 느낀 것은 카타르시스와 비슷하다. 연민과 공포, 즉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한 자기연민과 그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통한 또 한 번의 자기연민으로 늘 어디엔가 호소하고픈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책으로만, 혹은 기타 매체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햄릿>을 드디어 무대에서 만나러 가는 내 기대는 미친 햄릿을 마주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그것이었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프리뷰: 이윤택의 《혜경궁 홍씨》

by 에스티

이윤택 연출이 직접 쓰고 연출한 <혜경궁 홍씨>가 12월 14일부터 29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됩니다.

이윤택 연출과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김소희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 60대 노인에서 10세 소녀까지 다양한 모습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영조,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는 이 시기 는 TV 드라마 소재로도 많이 사용될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토대로 했다고 하며, 한 여인의 관점에서 궁중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윤택의 팬이라면 기대해도 좋은 부분은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대사에서부터 인물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극작 방식은 <문제적 인간, 연산>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만합니다. 더불어 첫 장면에서 아들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서로의 입장 차이를 팽팽한 대화를 통해 주고받는 방식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만, 같이 본 다른 기자들은 좀 지루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옥집의 내실 삼면으로 된 무대는 회전무대 위에 올려져 원활한 장면 전환을 돕고 있습니다. 작고 좁은 극장에서 수동으로 돌아가는 회전 무대는 그것만으로도 보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나무와 창호지로 된 무대는 한옥의 느낌이 물씬 나는데, 문득 이 나무는 어느 나라 나무를 사용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극에 등장하는 영조의 모습은 매우 독단적인 데가 없지 않은데 그 모습이 최근 북한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극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몇몇 대사들이 요즘 시국에 맞닿아 공명하는 지점도 보입니다.

우리 전통의 소리와 몸짓 또한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로 적절해 보입니다. 무대 공간 위에 악사들의 연주 공간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백장 극장의 적은 객석으로 인해 표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무엇보다 아쉽습니다.

공연문의 국립극단 1688-5966 / www.ntck.or.kr

드라마인 <혜경궁 홍씨> 리뷰 바로가기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15년을 살아 낸 <휴먼코메디>

by 산책


휴먼코메디 (c)사다리움직임연구소 2013.
출처: 코르코르디움 블로그 http://corcordium.tistory.com/

  한 해 동안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극장에 갔다. 신선하고 기지가 넘치는 공연에 감탄하고, 조금은 질투심을 느끼며 넉넉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온 적도 있고, 희곡에 감동받은 적도 있고,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있다. 괜히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가 무척 미안한 적도 있었고, (본인은 한 번 해 본적도 없으면서) 연출을 욕하고 싶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연도 물론 있었다. 모아 둔 표와 프로그램을 꺼내 보고, 깜깜한 공연장에서 뭐라도 써 보려고 끄적거렸던 노트의 기이한 문자들을 해독하면서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나름 재미있다. 연극은 책이나 영화처럼 돌려 볼 수 없고,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두 눈과 두 귀로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움직임을 다 보고 들을 수 없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순간적으로 한 장면이, 그 공연이 지나가버린다. 어떤 인상만을 남기고.

   올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연극은 지난 7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휴먼코메디>이다. 정말 신나게 웃었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다.  <휴먼코메디>는 <가족>, <냉면>, <추적> 이렇게 세 가지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은 하나 남은 아들이 배 타러 가는 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아들이 죽을 것을 예상하기나 한 듯이 갑자기 가족 사진을 찍고, 아들이 떠나는 시간을 자꾸 미루기 위해서 밥을 먹이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 중에 소소한 웃음이 만들어 진다. 두 번째 이야기인 <냉면>은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한 한 팀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노래와 안무를 외우지 못한 소위 ‘구멍’멤버가 계속해서 동작을 놓치는 모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조금 더럽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다). 마지막 <추적>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경찰청 사람들을 패러디하며 모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과 스캔들 등이 얽히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세상의 모든 그저 그런 생에게 - 문삼화 연출, <세 자매>


by 함스타


<세 자매>
연출 문삼화
공상집단 뚱딴지
2013/11/21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소극장


어느날 누군가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많이 속상한 나는 집에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심각하게 생각을 시작한다. 편견없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편견없는 세상을 위해 난 뭘 할 수 있을까 …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나 또한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마침내 생각한다. 아마 그런 세상은 오지 않겠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하고 노래하지 않고,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이 다소 불순하고 허무주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허무의 발바닥 밑에, 밟혀서 단단해져버린 희망이 있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도 없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괴로운 것은 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할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깊이 절망함에도 불구하고 깊이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체홉에서 허무주의를 읽지만, 그렇기에 나는 체홉에서 희망을 읽는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



by 최희범

2013년 11월 29일(금) 저녁 8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김현탁

무대는 도로처럼 가로가 긴 장방형에 가운데 노란 중앙선이 표시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에 약간은 흉물스럽기도 한 러닝머신이, 좌우 양 끝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중년의 남자배우가 뭐라 중얼거리며 걸어 나와 러닝머신에 주목한다(정확히는 손전등으로 러닝머신을 비추며 한 참을 갈등하는 듯하다). 이내 러닝머신에 올라 뛰기 시작한다. 그의 ‘달리기’는 극의 중반부에 한 번 중단되고, 마지막에 그의 죽음과 함께 정지된다.

사실 윌리가 공연 내내 뛰는 것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이미 입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공연을 보러 간 것은 당연히 “뛴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뛸까?”가 궁금해서였다. 심지어 공연장 로비에 비치된 리플릿도 친절하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었다. “본 공연은 윌리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치 플래시백처럼 지나간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윌리는 무대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러닝타임 내내 달리기를 하고, 그의 주위에서 가족들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등장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른 공연에서는 몇 천 원씩 주고 사서 봐야 하는 프로그램북 대신 무료 리플릿을 배치한 것은 원작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배려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리플릿에 적힌 말대로 ‘감각적 체험’을 기대하며 공연을 지켜보았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극단 애인, 《손님》

by 에스티

<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