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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4일 화요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집이다: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 리뷰

양근애 (r......@hanmail.net)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손꼽아 기다렸어요. ‘미친존재감’이라는 센스있는 이름을 붙인 기획자는 누굴까 기대했고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이야기도 궁금했습니다. 하루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 남짓이라고 했을 때는 살짝 긴장도 했습니다. 다행히 제게도 기회가 있었어요. 그날 저는 동행인과 대흥역에서 내려 저녁을 먹고 토정로라고 적힌 골목을 걸어 어느 주택 앞에 도착했습니다. 화요일 저녁이었고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골목의 적요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골목을 걸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그때 누군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극장이나 문화시설, 거리처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 공연을 보러 가는 일도 처음이었습니다. 어느새 대문에 붙은 ‘ㅁㅊㅈ’이라는 초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어느 평범한 주택 앞에 도착했어요. 

흰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벗겨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친집은 끝이 없어요. 미친집은 완벽하지 않아요. 미친건 특별하지 않아요. 미친집은 독특하지 않아요. 미친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미쳤다”이거 삶이거든요.”라는 손글씨가 보였어요. 어쩌면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라는 공연에 대한 설명은 이 글귀로 충분한지도 모르겠어요. 사회는 누군가를 ‘미쳤다’고 하지만 정신장애인에게 미쳤다는 건 극복할 수도, 완전히 치료될 수도 없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공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있는 몇 개의 방에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면이 전환되고 시점이 바뀌듯,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면서 정신장애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었어요. 첫 번째 방에서는 왈왈님의 노래 두 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춤추는 걸 좋아하고 교회를 좋아하고 하루에 이만 보씩 걷는 왈왈님의 이야기 속에는 투쟁도 있고 편지도 있고 병원도 있었습니다. 그 방에는 식물이 많았고 왈왈님이 모아둔 편지도 많았습니다. 거기엔 제가 미처 모르는 시간이 들어있었겠지요. 

연화님의 방에서는 작은 공연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본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오다 노부나가와 알렉산드라와 카산드라를 말하는 연화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고 책이 아주 많았어요. 책을 쌓아 만든 그림자와 붉은 조명 아래서 우리는 차를 나누어 마셨습니다. 고유한 선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연화님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 대였고 연화님의 이야기 속에는 저 먼 나라의 전설 같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시간은 직선이 아니었고 엉킨 실타래를 풀려고 할 때 도리어 달아나는 모양이 어지럽게 떠올랐습니다. 

연화님은 카산드라를 통해 미쳤다는 말을 전유했습니다. 확실하지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불린 카산드라. 연화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떠들었어도 아무도 안 믿잖아.”라는 일갈로 끝을 맺었습니다. 정신장애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 발화되는 순간 사회는 그것을 못 들은 척하거나 없는 일로 만들거나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였습니다. 2021년 공연한 연극 <우리는 미쳤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런 저를 부르는 호칭은 참 많습니다. 사이코, 정신병자, 미친새끼, 또라이, 정신질환자, 사회공포증, 엉망진창, 주의력결핍장애, 범불안장애, 분노조절장애……. 저는 유소한을 혐오합니다. 저는 유소한을 사랑합니다. 혐오했다가 사랑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합니다. 이런 제가 매드 프라이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진요. 저는 계속 외치겠습니다. (쇳소리가 나도록 크게) “우리는 미쳤다.”*

실은 정신장애라는 말을 쓰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당사자의 ‘미쳤다’는 발화가 주는 해방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미친존재감의 지난 공연에 관한 정보와 몇 개의 논문을 찾아 읽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정신장애나 정신질환은 당사자의 삶을 배제한 의료적인 관점이며, 매드(Mad)는 퀴어(Queer)나 크립(Crip)처럼 차별과 낙인을 위해 만들어진 부정적인 용어를 전유하는 전복적인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는 매드(Mad) 정체성을 드러내는 연극이고 그런 의미에서 당사자의 다양한 경험을 정신의학의 담론에 밀어 넣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하나의 운동이기도 하겠지요. 

거실로 나와 고유한 선님의 이야기를 듣기 전 잠깐의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색함도 조금 가신 터라 두리번거리며 집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친척 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어요.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던 나무 계단을 통해 이층 다락방으로 갈 수 있었던 집이었고 어린아이였던 나와 사촌들은 그 계단을 올라가 어른들과 상관없이 우리끼리 속닥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잊은 줄 알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많은 일들은 사라지지 않고 나라는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는 것만 같아요. 그 얼룩이 없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는 걸 알 것 같습니다. 

고유한 선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이제 세상에 없는 도마라는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도마가 고유한 선님의 친구 수아라는 걸 알았을 때 조금 놀랐어요.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지만 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황망하고 슬펐거든요. 고유한 선님이 준비한 이야기 속에서 도마의 노래를 듣고 또 부르는 동안 생각지 못한 어떤 연결이 틈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 틈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목소리로만 알고 있었던 한 사람의 생을 조금 엿본 느낌도 들었어요. 고유한 선님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감지하는 일을 환시나 환청, 망상과 같은 양성증상이라고 치부하고 그것을 치료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은 얼마나 간단한지요. 고유한 선님의 이야기를 통해 증상 자체보다 그것을 가짜라고 하거나 떨쳐내야 할 일로 취급하는 일이 더 속상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유한 님의 등을 어루만지던 온기는 진짜였을 테니까요.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가까운 이의 집에 방문했을 때처럼 적당한 침묵이 드나들 거리가 있어 편안했어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집 안에 놓인 고유한 선님이 그린 그림들이 우리는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유튜브에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었어요. 왈왈님과 연화님의 브이로그도 보았습니다. 미친집으로의 초대는 완벽하지도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우리가 만난 것은 스스로를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매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의 일상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병원에 가고 일자리를 구하고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하고 학교에 가고 그림을 그리는 하루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특정 질환이나 장애 여부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기도 하고 동시에 혐오하기도 하는 자기만의 고유성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이 오롯했습니다. 

사실 저는 장애를 잘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장애예술을 자주 만나고 장애학 관련 책을 읽고 몇 편의 글을 쓰기도 했지만 장애에 관해 말하는 건 여전히,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건 그저 작은 이유였을 거예요. 저는 글쓰기라는 것을 한 이후로 줄곧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이야기에 대해 말해왔으니까요. 그러나 장애연극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겁이 많은 저는 어떤 날은 내가 쓴 어떤 문장이 차별과 배제의 문법을 반복하거나 그것을 묵인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고 또 어떤 날은 당연한 이야기를 이제야 깨달은 무지를 자랑하는 것은 아닐까 부끄러웠습니다. 장애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그렇다고 말하는 일이 장애라는 사실을 도리어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들까봐 무서웠습니다. 급기야 모든 글쓰기가 다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글을 쓴다는 일이 사실은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고쳐 쓰는 이 글이 어떻게 당도할지도 겁이 납니다. 그렇지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날 제가 느낀 환대가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을 꺼내는 용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날 초대한 사람과 초대받은 사람이 마주 앉아 어색함과 공감과 다정함을 나누는 동안 저는 장애나 질병, 질환, 통증, 아픔 같은 말들이 일상에 내려앉는 모습을 본 것 같아요. 그것은 한편으로 저에게 이미 있거나 도래할 그 말들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과일과 시나몬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뱅쇼와 따듯한 차, 비건 쿠키와 케익과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이웃이라는 낱말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이라고 해도 가족이라고 해도 아주 친한 친구라고 해도 당사자의 고통과 곤혹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옆에 앉아서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지도 모르겠어요. 때로 마음은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 무심한 동행으로 전달되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너무 조심해서 외롭게 하기보다 민폐를 끼치더라도 묻고 듣고 답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모두 조금씩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골목길을 돌아 나와 달라진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서울이 점점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는데 쾌적하지도 편리하지도 않은, 사람이 살다간 흔적으로 얼룩진 소담한 주택들이 아직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세상엔 참 많은 집이 있고 집마다 다 다른 사연을 품고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 다름이 이 세계를 알록달록하게 만들어주는 거겠지요. 

미친집에 다녀왔습니다. 아름답지도 신기하지도 이상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진짜가 있었습니다. 

*송승연, 「정신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당사자가 주도하는 연극 참여자들의 경험 및 인식에 관한 연구: 미친존재감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비판사회정책』 제75호, 비판과 대안을 위한 사회복지학회/건강정책학회, 2022. 279쪽에서 재인용.

사진: 김원만


2023년 1월 19일 목요일

기능 없는 글쓰기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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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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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침투하는 비체들 

2부. 기능 없는 글쓰기


6. 글쓰기, 기능, 미로

민조

이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일단 두 분께서는 전통적인 희곡 장르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계신데요, 연재님께서는 2019년에 저랑 인터뷰하셨을 때 희곡이라는 장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말씀해 주신 적도 있었죠.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났고요.  

2023년 1월 18일 수요일

침투하는 비체들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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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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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침투하는 비체들 


1. 팬데믹 이후 혹은 이전

민조

2022년 9월 《한국극예술연구》에 「이후의 신체를 조형하는 포스트휴먼 극작술-신효진 희곡 <머핀과 치와와>(2021), 김연재 희곡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2021)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실었는데요. 논문을 구상할 때 당연히 ‘비인간’, ‘동물-되기’ 이런 화두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작품들 내에서 소위 ‘서사적 종말’이나 인간 사회 내부의 어떤 거대한 ‘공동(空洞)’이 엿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장르상의 차이가 조금 있는데도요. 비인간 개념을 넘어서 우리의 현실, 관계, 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포스트휴머니즘이 사이버네틱스 기술을 통한 인간의 보완이나 향상 프로젝트로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팬데믹 위기 이후에는 정반대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고 봐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봤던 작품들 중에는 인간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안의 어둠이나 구멍으로 더 들어가려 하고, 그 구멍을 통해서 비인간 존재자들과 만나려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두 분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많이 했고요. 

신효진 작가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머핀과 치와와>가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던 2021년에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요.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괄괄×괄괄 인터뷰 ②] 도은×신효진 - 극작가 동인 ‘괄호’와 창단 공연에 대한 수다

※ [괄괄×괄괄 인터뷰]는 극작가 동인 ‘괄호’ 멤버들 간의 내부 인터뷰를 기록한 시리즈입니다. ①편에는 김진희 작가와 이소연 작가의 이야기를, ②편에는 도은 작가와 신효진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인터뷰의 기획 및 진행은 ‘괄호’의 드라마투르그 김민조가 맡았습니다. 

<괄괄괄괄>을 올리기까지 


민조: 이번 ‘괄호’ 창단 공연에 도은 작가님은 <프란시스 맥도먼드에게 전화걸기 위해서는>라는 작품으로 참여하시고, 효진 작가님은 <송>이라는 작품으로 참여하시죠. 저희가 처음에 창단 공연의 콘셉트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을 많이 했잖아요. 그러다가 글쓰기 규칙을 정해서 네 개의 작품을 하나의 공연으로 엮어내자는 결론을 냈고요. 그 이후에 작가님들이 글쓰기 규칙에 맞는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낼 것인지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그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도은: 제가 가진 현재진행형의 고민과 엮어서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극작가가 나오는 작품을 써본 적이 없어서, 극작가인 나의 고민과 맞물려 있는 이야기를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원래는 남자가 나오는 연극을 쓰려 했어요. 제가 전에 쓴 작품들 중에는 남자가 죽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남혐 작가 아니면 메갈이다’ 라는 소리까지 들었거든요. (웃음) 그래서 이번에는 죽임을 당한 남자가 작가를 찾아오는 얘기를 쓸까 했는데, 쓰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안 써져요. 남성 인물이 찾아와서 작가에게 말을 건다면 결국에는 그걸 쓰는 제가 그 남성 인물의 말을 듣고 싶거나 그 사람이 무슨 논리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야 하는데…

민조: 궁금하지가 않으셨군요. (모두 웃음)

도은: 네, 쥐어짜도 나오지가 않고, 관객들도 보면서 괴로울 거라는 감각이 있어서 그런지 이야기가 더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남성 인물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남자 인물을 죽이는 여성 인물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저의 본질적인 고민에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여성 인물 두 명이 나오는 작품으로 안착된 것 같아요. 

효진: 저는 2월에 올렸던 <글쎄 어찌나 사소하고 어찌나 안 궁금한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공연에서 제가 극작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얘기를 다 했거든요. (웃음) 억울함도 표시를 했고, 소외당한다는 얘기도 했고, 제가 당한 실제 사례들도 다 보여줬고, 어쩌다 희곡을 쓰게 됐는지도 얘기했고요. 그래서 솔직히 처음에는 ‘아, 극작가 얘기 또 해야 돼?’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데… 그러다가 어떻게 하면 등장인물을 만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어렵지 않게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극작가의 이야기가 극작가에만 머물지 않고 확장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소망도 있었고요. 
그러기 위해서 ‘친구’라는 친밀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불러내는 방식을 떠올리게 됐어요. 예전에는 제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납득한 것만 글감으로 채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해한 걸 쓰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써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제게도 이해할 수 없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를 극작가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만나 이해해보려 하는 이야기를 쓰면 좀 더 쉽게 전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민조: 효진님이 맨 처음에 가져오신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잖아요. 정신분석의와 내담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인물 관계였던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이야기를 교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효진: 그 이야기도 골자는 결국 ‘이해해보려’ 하는 것이었어요. 그와 함께 등장인물을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대상화가 아닐까 하는 저의 고민이 들어갔던 작품이었는데, 왜 교체하게 됐냐면 일단 글에 너무 허세가 많았고 (웃음) 승모근에 힘주고 쓴 것 같다는 스스로의 판단이 있었거든요. 보다 친밀하고 확장성 있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송>으로 전환하게 된 것 같아요.

민조: 확실히 관객들 중에서도 <송>을 보며 자신의 친구나 주변인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도은님의 <프란시스>를 보며 자신이 동경하거나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을 것 같고요.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가 인물을 만나는 과정 


민조: 저는 개인적으로 극작가들이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궁금했거든요. 인물의 이름이 어느 순간 벼락처럼 오는 것인지, 사흘밤낮을 고민해서 지어내는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효진님이 쓰신 <밤에 먹는 무화과>의 주인공 ‘윤숙’의 경우에도 작품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다들 어떻게 그런 이름을 지으시는 건가요.       

효진: 이름 지을 때가 항상 머리가 터지더라고요. 저는 이름보다는 이야기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그 속에서 의미를 조합해 이름을 짓는 편이에요. <밤에 먹는 무화과>의 경우에도 주인공 ‘윤숙’을 제외하면 모두 이름이 없는 인물로 채워져 있거든요. 지나가는 인물들이 특별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거죠. 

도은: 저도 이야기가 먼저 나오긴 하는데, 모든 인물의 이름이 특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있어요. 아니면 아예 익명성이 확 느껴지게 짓거나.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톤으로 갈 지 빨리 결정되는 편인 것 같아요. 톤이 먼저 결정되면 그걸 의식하면서 의미와 맞는 인물의 이름을 찾아가게 돼요.

민조: 도은님의 <냉장고로 들어온 아이>에 나오는 ‘모’라는 주인공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를 상기시키는 이름인데 17세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재미있고요. 

도은: 그 작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 이름이 모두 한 글자로 되어 있어요. 작품을 구상할 때 이름이 한 글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라는 인물은 냉장고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엄마 같은 역할을 하는 순간들도 있는데, 익숙한 모습의 엄마는 또 아닌 인물이에요. 그래서 그 이름이 빨리 떠오른 것 같아요.

효진: 가끔 인물이 먼저 오고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아, 이런 인물을 써야겠다’, ‘얘 이름은 이런 느낌이겠다’가 먼저 오고, 그 인물을 어떤 이야기 속에 넣을지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죠. 

민조: 인물의 캐릭터성을 어떻게 구축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타인의 말투나 문체상의 특징을 포착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인물을 만드실 때 실제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가 반영되는 경우도 있나요? 

도은: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꽂히는 편이에요. 현실에서는 ‘저 사람은 왜 저러지?’ 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집에 가서는 계속 생각해보는 거죠.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현실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효진: 저는 사람을 나노 단위로 잘 보거든요. 주변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덕질을 하는 스타일인데, 그 사람만의 귀여운 순간들이 있어요. 그 순간들을 잘 기억하려 노력하고 그게 왜 귀여웠는지 생각해보는 편이에요. 도은님이 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꽂힌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래요. 어딜 갈 때도 귀가 항상 열려 있어서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귀에 잘 들어오고,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이야기를 할까 항상 궁금해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저는 택시기사님께도 말을 많이 거는데요, 그분들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TMI를 털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아, 인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런 사람이 희곡에 나오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궁금해지고요. 그런데 오히려 주변 인물이 이야기의 재료가 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저는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는 편인데, 거기에 나오는 특이한 심리나 철학 사상 같은 것들이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요. 그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볼  때도 있고요.  


그간의 작품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민조: 작가님들이 그간에 쓰신 작품들을 읽어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물형이나 모티브가 있더라고요. 효진님의 경우에는 역시 인간이 아닌 존재들, ‘비인간’으로 통칭할 수 있는 존재들이 나타난다는 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탈피>에서도 ‘뱀’이 아주 멋있게 긴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2월에 하셨던 <글쎄 어찌나 사소하고 어찌나 안 궁금한지> 공연에서도 이 ‘뱀’이라는 인물을 구현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는 연출이 모습이 나왔던 것 같고요. 다른 한편으로 이번 <송>은 내 곁을 떠난 친구를 다시 불러내는 이야기이고, <밤에 먹는 무화과>도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인데요. 죽음이라는 테마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계신 건가요?

효진: 음… 중2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건가. (웃음) 우리 모두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는 ‘끝’에 대한 직감을 갖고 있잖아요. 죽음이 커 보이지만, 실은 내가 싸우고 영영 보지 않게 되는 친구도 제게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관계의 끝이랄까요? 그게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고유한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게 무섭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런 게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해요.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영원하다면 기록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특히 희곡을 쓰는 행위에 중요한 것은 순간을 잡아두는 것이고, 연극 자체도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가는 이야기이죠. 그런 게 죽음의 이미지와 잘 연결이 되는 듯 해요. 그렇지만 죽음을 단지 두려운 것으로만 묘사하고 싶지는 않은 것도 있고요. 

민조: 효진님이 ‘사라짐’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도은님 작품에서도 유사한 테마가 보이는 것 같아요. <사라져, 사라지지마>에 나오는 사라진 아이, <냉장고로 들어간 아이>에 나오는 사라진 여자들이 그렇죠. 도은님에게는 사라짐에 대한 테마가 어떤 것인지 여쭤보고 싶어요.

도은: 저는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지’가 궁금해요. 누구에게나 자기 곁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있잖아요. 희곡에서는 그 사람들을 무대 위에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자꾸 불러내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불러낸다면 어떻게 불러내야 하고, 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지가 항상 궁금해요.  

민조: <프란시스>의 경우 작품 뒷부분에 작가와 인물이 ‘그 여자는 어떤 여자여야 하나’에 대한 대화를 나누잖아요. 최종고에서 “여자는 그 여자가 그립다. / 왜 그립지? / 떠났으니까.” 라는 대사로 확정되는 걸 보고 개인적으로 좀 먹먹한 느낌이 있었데, 방금 해주신 말씀을 듣고 보니 어떻게 보면 도은님의 오래된 테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가 작가님들 각각의 연습실을 부엉이처럼 날아다니다 보면 기분이 이상할 때가 있는데요.

효진: 부엉이 잘 어울려요. (웃음)

민조: 뭐라고요? (웃음) <프란시스>에 ‘두 여자가 아주 친했는데 멀어졌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게 <송>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거든요. 진희님과 소연님 작품 도 대사를 통해 서로 링크되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님들이 공간을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도은님의 경우 전작들을 보면 일상적인 공간들이 나오는 것 같고 인물들도 구어체의 통통 튀는 대사들을 많이 구사하고 있는데, 무대지시문들을 보면 오브제만 몇 개 놓여 있는 빈 무대를 쓰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전환이 자유로운 세팅을 선호하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도은: 아무것도 없는데, 약속을 해서 공간이 성립되는 순간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서 진짜 같은 세트를 만들기 보다는 최대한 무대를 상상으로 채워넣을 수 있기를 바라곤 해요. 그리고 제가 희곡을 쓰다 보면 공간 자체가 많아지더라고요. 그 공간들을 실질적으로 구현하지 않고 오브제만 딱딱 넣어놓으면 무대화하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낼 거 아니에요. 저는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민조: 그래서 도은님 희곡을 읽으면 기본적으로 ‘시원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공간이 시원하게 열려 있는 느낌이고, <프란시스>에서 그런 점이 트램펄린의 활용으로 집약되지 않았나… (웃음) 저는 효진님의 <밤에 먹는 무화과>를 희곡집 『여자는 울지 않는다』(제철소, 2019)에서 처음으로 읽었는데요, 그때 ‘호텔 뤽상부르’라는 공간의 강렬하고 구체적인 질감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불어 이국적인 느낌도 많이 받았는데, <탈피>의 경우에도 배경이 파충류 동물원이잖아요. 주제적인 면과 공간 활용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효진: 제가 비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기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데, 저는 최근에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구체적인 공간을 소환하려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밤에 먹는 무화과>의 경우 ‘이윤숙’이라는 인물이 곧 호텔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저는 어느 순간 무대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타협적으로 쓰는 게 싫어졌어요. 예를 들어 호텔이나 동물원 공간에 대한 지시문을 구체적으로 쓰면 쓸수록 제 안에서도 ‘이게 될까?’, ‘이걸 누가 구현하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럴 때 타협을 좀 안 해봐야겠다,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읽을 때 재미가 있고 이 이야기에 의미를 주는 공간이라면 쓰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민조; 학교에서 맨날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는 글이라고 가르치죠. 저도 예전에는 연극을 위한 스크립트로서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요새는 희곡과 무대 사이의 긴장과 간극이 있는 작품이 더 즐겁게 읽힐 때가 있어요.


‘괄호’다운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


민조: 두 분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제는 <괄괄괄괄>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볼게요. 이번 프로덕션이 연출가를 거치지 않고 작가님들이 배우님들과 직접 접촉해서 공연을 만들어나가는 형태잖아요. 이런 형태의 프로덕션을 경험해보신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해요.

효진: 저는 되게 좋았어요. 제가 원하는 이미지를 바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요. 물론 연출적인 테크닉이 부족하고, 배우의 언어를 잘 모르다보니 기술적으로 조금 딸리는 면이 있긴 했죠. 그렇지만 제 텍스트를 육화시키는 과정에 배우님들과 함께 참여하다 보니 인물을 이해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를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거든요. 대부분 연출님들이 해석해서 전달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2인극의 형식이라서 더 그런 측면이 있겠지만 인물 자체에 집중하는 작업을 해보게 된 것 같아요. 이번 <괄괄괄괄>의 콘셉트도 작가가 인물을 만난다는 것인데, 뭔가 메타의 메타를 경험했달까… (웃음)

도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괄괄괄괄>이 연출 위주의 작업 환경에 대한 항의 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고요. (웃음) 연출의 역할을 겸하는 것인지, 그냥 작가로서 과정 안에 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프로덕션을 진행하면서도 내가 어떤 상태로 들어와 있는 걸까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작/연출을 해본 적은 없고, 이번에는 연출도 아니고 작가긴 한데 완전히 작가만 하는 건 아닌… 중간적인 무언가였던 것 같아요. 이런 작업이 많이 반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아무래도 저희가 극작가 동인이라는 것을 배우님들이 의식하셔서 그런지 대사에 신경을 많이 쓰신다는 감각도 있었어요. 

효진: 맞아요. 대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하세요. 그런 걸로 뭐라고 안 하는데 틀리면 괜히 눈치 보시고… (모두 웃음)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편하게 하시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아예 대사 순서를 바꿔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또 이 대본을 인터넷에 올릴 거다, 그러니 조금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웃음) 

민조: 말이 나온 김에 연습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해서 좀 더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곤란했던 순간, 재미있던 순간, 신기했던 순간 등등이 있으셨나요?

도은: 저는 연습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무엇을 할지 알고 오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일계획표를 세우고 첫 연습 때 전부 공유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 <프란시스> 팀은 인원이 적고 작가랑 배우들이랑 나이대도 전부 비슷해요. 그러다보니 수다를 정말 많이 떨게 되는 거예요. 다섯 시간 연습이면 두 시간 수다를 떨고 세 시간 바짝 하자, 는 식이 되기도 하고요. 작품과 아무 상관없는 연애 이야기를 꽃피우기도 하고. 그게 가능한 환경이 신기했어요. 

효진: 저희도 그래요. 네 시간 연습인데 한 시간 떠들고 한 시간 근황토크하고… (웃음) 보통 연출 역할을 맡은 사람이 조바심을 내게 되잖아요. 저는 연출님들이 공연이 임박해오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하호호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도 제가 되게 태평하더라고요? 저는 도은님처럼 계획을 짜서 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오늘은 뭐 할까요?’ 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그러니까 배우님들이 오히려 불안해서 추가 연습을 하자고 하시고, 저는 ‘저희 다 됐는데 왜 그러세요’ 그러고. (웃음) 저도 동년배 세 명이서 연습을 하니까 너무 돈독해지고 좋더라고요. <송>은 90년대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이라 그 시절 얘기로 또 꽃피우고, 그런 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 에피소드라면 ‘햄스터 난입 사건’도 있었잖아요?

민조: 햄스터 난입 사건*은 제가 각주를 통해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웃음) 이번 창단 공연은 네 명의 동인이 독립적인 단막극을 연달아서 올린다는 특징도 갖고 있잖아요. ‘괄호’ 동인의 이름으로 처음 시도해본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어떠셨나요? 그리고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지도 궁금해요. 

효진: 이번 공연도 매우 의미 깊고 좋은 시도였지만, 개별적으로 연습이 돌아가다 보니 극작가들끼리 뭔가를 한다는 느낌은 조금 부족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극작가 네 명이 복작복작 벌이는 어떤 일을 해보고 싶어요. 스터디도 하고 싶고요. 서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걸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꾸준하게 스터디를 했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 바람이에요. 두 번째 바람은 극작가로서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저희 공연 풀네임이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잖아요. 정말 그 제목에 어울리는 모색을 해보고 싶은 거죠. 세 번째로는 동인들이 서로의 희곡을 봐주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으면 좋겠어요. 내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괄호’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지지해주는 동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도은: 지원 사업 되고 나서 저희들이 같이 희곡을 쓰기 시작했잖아요. 저는 그런 경험이 흔치 않거든요. 내 희곡이 언제 공연될지 모르는 상태로 쓰지, 공연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쓴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동인들이 동시에 희곡을 쓰기 시작하고 회의 자리에 모여서 그 희곡에 대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감각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프로덕션 내에 글을 쓰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좋았고, 연출이나 배우의 피드백과 다른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피드백을 준다는 것도 좋았어요. 그게 초반에 작품을 다듬을 때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고요. 앞으로도 그런 작업을 팀 내에서 꾸준히 잘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저는 공동창작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요. 저희들처럼 여성 극작가들이 모인 ‘글과 무대’ 팀의 공연을 봤는데, 그 공연은 아마도 작가들이 함께 스토리라인을 짜고 인물을 만든 것 같았어요. 저희도 그렇게 하나의 주요 스토리를 만들고 동인들이 공동 작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작업이겠지만요. 마지막으로 ‘과정 안에서 극작가가 뭘까’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무 소외되어 있다는 결론 말고, 앞으로 우리가 과정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효진: ‘괄호’ 희곡집도 내고 싶어요. 저는 제 희곡을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줄 지가 항상 어려웠거든요. 공연화되지 않더라도 희곡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뭔가를 해보면 좋겠어요. 희곡만 있는 게 아니라 일러스트 작가를 섭외해서 희곡의 장면을 삽화로 넣어볼 수도 있고요. 좀 더 가독성 있고 독자가 상상을 하기 편한 희곡집을 만들면 누군가에게는 읽히지 않을까요? 

민조: 돌이켜보면 저희가 창단하자마자 공연을 올리는 무모한(?) 시도를 한 것인데요, 오히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극작가 중심 프로덕션을 굴려보는 소중한 경험을 얻은 것 같기도 해요. 그 경험을 가지고 다시 ‘괄호’로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다음 스텝을 구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

* 수유동 연습실 햄스터 난입 사건: 2020년 5월 22일 수유동에 소재한 쿵짝프로젝트 연습실에 햄스터 한 마리가 난입한 사건. 1층에서 연습실 현관으로 난데없이 떨어진 햄스터를 작가 도은이 최초 목격하였고, 곧장 연습실 난입을 감행한 햄스터를 드라마투르그 김민조 등이 저지하였다. 햄스터는 쿵짝프로젝트 연습실에서 1박 2일을 보낸 뒤 입양 의사를 밝혀온 연극인의 품에 안겨 유유히 사라졌다. 
  

도은
2018 <사라져, 사라지지마>
2019 <냉장고로 들어온 아이>
2019 <아무튼 살아남기>
2019 <아빠 안영호 죽이기>
2020 <프란시스 맥도먼드에게 전화걸기 위해서는>

신효진
2018 <아웃스포큰>
2018 <삼일로창고극장 봉헌예배>
2019 <탈피>
2019 <디디의 우산>
2019 <밤에 먹는 무화과>
2020 <글쎄 어찌나 사소하고 어찌나 안 궁금한지>
2020 <송>


 

2020년 6월 9일 화요일

[괄괄×괄괄 인터뷰 ①] 김진희×이소연 - 극작가 동인 ‘괄호’와 창단 공연에 대한 수다


※ [괄괄×괄괄 인터뷰]는 극작가 동인 ‘괄호’ 멤버들 간의 내부 인터뷰를 기록한 시리즈입니다. ①편에는 김진희 작가와 이소연 작가의 이야기를, ②편에는 도은 작가와 신효진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인터뷰의 기획 및 진행은 ‘괄호’의 드라마투르그 김민조가 맡았습니다. 


<괄괄괄괄>을 올리기까지 


민조: ‘괄호’ 창단 공연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이하 <괄괄괄괄>)에서 진희 작가님은 <DELETE>라는 작품을, 소연 작가님은 <조약돌은 상상한다>라는 작품을 각각 올리시잖아요. 처음에 네 개의 작품을 어떻게 하나의 공연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저희가 글쓰기 규칙이라는 것을 정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작가님들이 이 규칙에 맞는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낼 것인지 각자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그 과정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진희: 제가 극작을 할 때 책상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못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착착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진도가 못 나가고 있는 것 같고, 쉽게 쓰면 되는데 왜 쓰지 못할까 스스로를 비난하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작가 역’과 ‘인물 역’이 등장한다는 글쓰기 규칙이 정해졌을 때 자연스럽게 제가 자기검열을 통해서 지워버렸던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과 만나는 순간을 이야기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워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민조: <DELETE>에 ‘영기 할매’를 비롯해서 지워진 인물들이 여러 명 거론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쓰셨던 인물들의 이름인가요?

진희: 완전히 똑같은 이름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휴지통에 모여 있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실제로 ‘성진’ 역의 정대경 배우님이 휴지통 안에 모여 있는 친구들을 가지고 <DELETE 2>를 만들어도 재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태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이야기로 확장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민조: 소연님이 올해 2월달에 올린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공연에서도 극작가가 타이핑한 글자들을 모두 선택 > 삭제해버리는 퍼포먼스가 있었잖아요. 글을 쓰다가 지워버리는 작가적 노동의 피곤함이 <DELETE>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요. 

소연: 저는 제가 글을 왜 쓸까, 생각해보면 결국 ‘이상형’을 만나기 위해서 쓰는 것 같아요. 저는 글을 쓸 때 출발하는 지점이 늘 인물이거든요.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부딪힘이 생길 때 제가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많이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조약돌은 상상한다>도 거기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민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면서 부딪혔던 암초 같은 게 있을까요? 작가님들이 초고, 수정본, 최종본, 최최최종본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웃음) 그 과정에서 경로 변경이 조금 있었죠?  

진희: 초고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인물 역의 ‘성진’ 캐릭터예요. 초고의 ‘성진’은 신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작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었어요. 수정 과정에서 보다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아요. 작가 역과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바뀐 거죠. 이 이야기가 나 혼자만의 징징거림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 작품이 과연 객관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우려가 들기도 해서 배우님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초반에 동인 기획회의를 할 때도 극작가의 이야기를 하되 극작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는 말자고 했잖아요. 그 고민이 제일 컸어요. 

민조: 네, 저희가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죠. 연극계에서 극작가가 얼마나 왕따인지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웃음) 한편으로는 관객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이길 바란다는 결론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소연님도 비슷한 고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연: 네. 저도 초고 때는 좀 더 극작가 이소연에 집중하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 했어요. 이상형이라는 존재가 출현하게 되는 계기 자체가 ‘나랑 맞는 연출이 없어서’였던 거죠. 내 작품을 제일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연출해줄 파트너를 찾는 과정에서 이상형이 만들어지는 얘기였는데, 진희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나라는 존재가 극작가 정체성만으로 이루진 것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가야 극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동시대적 고민들을 조금 더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은 연출이 아니라 나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내 삶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상형을 찾는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진희님과 정반대일 수도 있는데, 초고 때는 ‘이상형’이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로 쓰여 있지 않았어요. 수정 과정에서 ‘이상형’이 보다 주체적으로 ‘이소연’과 상호작용을 주고받게 되었죠. 그래놓고 보니 ‘이상형’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상형’ 역을 맡은 배우가 과연 어떤 상태로 과연 무대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어떤 상태로 이 극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하고 있어요. 

민조: 두 분 다 상호작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셔서 흥미롭네요. 작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인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 어쩌면 이번 <괄괄괄괄> 작품들은 모두 ‘주고받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네요.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포스터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가 인물을 만나는 과정 


민조: 자연스럽게 인물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극작가는 인물을 계속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늘 궁금했던 점이 있었어요. ‘극작가는 이름을 어떻게 짓지?’ (웃음) 인물 이름이 불현듯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사흘밤낮을 고민해서 지어내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진희: 개인적으로 소연님이 이름을 정말 잘 짓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이름 짓는 걸 되게 좋아하고… 

소연: 맞아요. 좋아해요. (웃음) 

진희: 반대로 저는 이름 짓는 걸 힘들어하는 타입이에요. 이름에는 나름대로 인물의 성격이나 특성이 반영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는 과정이 어려워서 보통은 이름 없는 역할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예전에 효진님, 소연님과 학교에서 같이 공연을 올렸던 적이 있었는데, 저는 남자 두 명이 나오는 2인극을 썼고 거기에 이번 공연의 ‘성진’과 비슷한 인물이 있었어요. 이름은 따로 짓지 않고 배우의 성씨로 대체했었죠. 설명충에다가 오타쿠 기질이 있고 혼자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캐릭터. 그런데 제가 써온 작품들을 생각해봤을 때, 그런 캐릭터가 꼭 한 명씩 있었던 것 같아요. 성진이라는 인물이 그들의 결정체가 아닐까 해요. 

민조: 저는 진희님이 쓰셨던 <그 어딘가의 영주>에서 주인공 ‘영주’의 이름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라진 딸을 찾아 도시의 공장, 마트, 원형의 도로 등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인물인데 이름이 ‘영주권’ 할 때의 영주잖아요. 아이러니한 작명이라 생각했어요. 

진희; 그런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웃음) 그 나이대의 여성에 대해 생각했을 때 ‘영주’라는 이름이 떠올라서 그렇게 지었던 것 같아요.

민조: 사람의 이름이라는 게, 이름에 담긴 의미보다 글자 자체가 갖고 있는 느낌이나 뉘앙스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최근의 예술작품에서 ‘영지’라는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한 시대의 언어망 속에서 각각의 글자가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영주’의 경우에도 그런 위치성이 확 다가오는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소연님은 아까 이름 짓기를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이름이 빨리 떠오르는 편이신가요?

소연: 그런 편이에요. 인물을 생각하면 무조건 이름부터 짓고 시작해요. (웃음) 보통은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거나 내용과 의미적으로 연결되는 이름을 짓게 돼요. 나만 알 수 있는 의미라 할지라도 그걸 이름에 심어놓는 것도 좋아하고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무래도 등단작이었던 <마트료시카>의 ‘윤경’이에요. 캐릭터 자체도 저희 엄마한테서 영감을 받았고 이름도 엄마의 성함에서 성만 바꿔서 그대로 갖다 썼어요. 2018년도에는 ‘상아’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43kg만큼의 상아>라는 작품을 공연했는데, 작중에 코끼리와 이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상아’라는 이름을 짓고 나서 코끼리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거든요. 저는 그런 식으로 인물과 이름이 딱 매치되는 걸 좋아해요. 

민조: 제가 이번에 4개 팀 연습실 사이를 날아다니는 호그와트 부엉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잖아요. (웃음) 도은님 연습에 가보니 ‘배우는 인물과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 작업을 지켜보다가 극작가에게는 인물이 어떻게 오는지가 거꾸로 궁금해졌어요. 

진희: 극작과 수업에 들어가보면 정말 인물의 전사(前史)를 A4 몇 장에 걸쳐서 세세하게 짜는 분들이 계세요. 저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일단 작품 내에 인물을 등장시키면 어떻게든 성격이 구체화된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인물들이 알아서 반응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소연: 저는 정해놓고 쓰는 편이거든요. 대부분 인물을 먼저 정한 다음에 인물이 겪게 될 주요 사건을 짜놓고 시작해요.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상 깊게 느꼈던 면을 많이 가져오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혼자 생각해보는 걸 좋아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인물을 만드는 방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를 먼저 정한 뒤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하고 반추하며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 같아요.

민조: 관찰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작가님들은 평소에 사람들을 관찰할 때 유심히 보시는 포인트가 있나요? 

진희: 저는 행동이나 습관 같은 걸 보게 돼요. 눈을 자꾸 깜빡거리면서 얘기를 한다거나, 말 사이에 자꾸 기침을 자주 한다거나. 

민조: 진희님 전작인 <EXIT>나 <그 어딘가의 영주>를 보면서도 느낀 건데, 진희님 작품에는 ‘손사래 치며’라는 지시문이 유독 자주 나오더라고요? 이번 <DELETE>에서도 나왔던 것 같은데… (웃음) 소연님은 어떠세요?

소연: 저는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좀 변태 같지만… (웃음) 보통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거나 다른 일을 하잖아요. 그럴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왜일까 생각해보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는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날 때라 그런 것 같더라고요. 관심을 안 가지면서 가지는 척을 하고 있다거나, 말로는 리액션을 하면서 딴짓을 하고 있다거나. 또 저하고 얘기할 때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어떤 모습인지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제게 가장 큰 원천이 되는 건 연애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연애 이야기를 늘 예민하게 듣게 되는 것 같아요. 연애하는 스타일이 각자 너무 다르잖아요. 연애에 대한 사소한 말 한 마디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싸울 때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 등등. 사람들이 열렬한 감정으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거기에 영감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간의 작품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민조: 자연스럽게 인물형(形)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네요. 소연님 작품을 보면 사랑이나 소유의 문제, 관계의 딜레마로 인해 시달리는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나 <라고, 누가, 말을, 했던가>의 경우에도 그렇고요. <조약돌은 상상한다>에 나오는 대사이지만 “짜장 맛이 나는 짬뽕”을 동시에 원하기에 번민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 인물형을 만들어 낼 때 에너지가 소모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은 없나요? 

소연: 그런 이야기를 많이 쓰는 건 저 또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 거잖아요. 저랑 가까이 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고 나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거나 해소감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민조: 제가 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생각했냐면, 소연님 작품에서는 연애 관계에 있는 두 인물 중 어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았거든요. 누가 상처 입히고 누가 상처받는 식으로 원사이드하게 전개하기보다는 ‘사랑의 회전문’ 같은  관계의 구조 전체를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양쪽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니까요. 그런데 도리어 후련하다고 하시니… (웃음) 
한편 진희님 작품을 보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좁은 공간에 혼자 있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느낌이었어요. <EXIT>는 전면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 어딘가의 영주>도 기본적으로는 영주가 여러 공간을 돌아다니지만, 외롭게 외따로 있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잖아요. ‘작가의 방’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이번 <DELETE>도 마찬가지고요. 

진희: 저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혼자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희곡을 썼던 적도 있어요. 사람들은 왜 혼자 있기를 싫어하면서 자꾸 고독을 즐긴다는 말을 할까.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싫어하는데 왜 그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낄까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한적인 공간에 대해 쓰게 되고, 전부 다른 공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공간으로 연결되는 이미지가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민조: 개인적으로는 진희님의 <EXIT>를 읽다가 “문이 안에서 안으로 통한다” 라는 대사에 꽂혔던 적이 있어요. 문은 당연히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매개라고 생각해왔는데, 안에서 안으로 통한다는 대사 때문에 문 밖으로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하는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는 인물들의 모습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진희님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으니 말인데, 소연님 작품에는 ‘바다’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하잖아요. 비 오고 번개 치고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웃음)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는 배경 자체가 한적한 바닷가로 설정되어 있었고, 이번 <조약돌은 상상한다>도 바다와 조약돌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했죠. 

소연: 바다도 있지만, 요즘에 많이 꽂혀 있는 공간은 황야예요. 인간을 압도시키는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제가 느끼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아득한 공간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사색하게 되잖아요. 작품 속에 그런 공간들을 넣어놓으면 제 머릿속에서 이미지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인물의 경우에도 저는 대부분 바다나 황야, 공터, 들판 같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이미지로 많이 다가오곤 하고요. 



‘괄호’다운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


민조: 이제 <괄괄괄괄> 프로덕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이번에 극작가가 배우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프로덕션을 경험하게 되셨는데, 어떠셨어요? 

진희: 저는 예전에 스탭으로 공연에 참여했을 때나 작가로서 참여했을 때나 연습실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제가 연습실에 가서 할 수 있는 건 주로 연습을 보거나, 제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하는 것뿐이었어요. 제 의견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에 작/연출을 해보면서는 제가 생각했던 그림을 배우들에게 바로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물론 배우님들은 보통 연출의 언어를 들으면서 작업을 해오셨으니까 제 말이 바로 전달되기가 힘든 것도 있었죠. 저는 연출의 언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이런 느낌으로 해주세요’, ‘여기서는 이런 감정이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요. 그런 과정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배우님들이 제가 의견을 드리면 바로 시도를 해주셨기 때문에  ‘아, 내가 생각했던 게 이런 거였지’, ‘이 그림으로 갑시다’ 하고 픽스를 할 수 있었어요. 이래서 많은 극작가들이 작/연출을 하는 거구나… (웃음)

소연: 저는 반대인 것 같아요. (웃음) 일단 저는 원래 연습실에 잘 안 가는 작가였고, 이번 연습 과정에서는 종종 제가 쓴 텍스트라서 오히려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요. 아마 저는 명확하게 그림을 상상을 하면서 쓰는 편이 아닌가 봐요. 제게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글로 쓴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텍스트를 제가 장면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누군가를 설득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제게는 꽤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배우님들에게 명확하게 요구하거나 결정하기가 어려운 지점도 있었고요. 오히려 저는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연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민조: 연출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시는 건가요? (모두 웃음) 

소연: 아, 저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어요. 저희 연극이 한 명은 상상을 하고 한 명은 그 상상 속의 인물로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얼마 전에 연습실에서 얘네가 어떤 식으로 상상을 하느냐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지켜보시던 무대감독님께서 웃으시더니 작품 속에 나오는 두 인물의 관계가 저와 배우님들의 관계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랑 배우님들도 그 말을 듣고 순간 ‘그러네?’ 싶었어요.  

민조: 저도 사실 옆에서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웃음) 글쓰기 규칙이 그렇다 보니 작품과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메타적으로 겹쳐지더라고요. 아까 이야기했던 작가와 인물 사이의 ‘양방향적인 상호작용’이라는 것도 연습실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는 거잖아요. 진희님도 기억에 남는 연습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진희: 이게 작가의 이야기이다 보니, 배우님들이 이 작품 속에 제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갔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가끔씩 연습을 하다가 ‘진희야, 괜찮지?’ 하고 물어보세요. (웃음) 아니, 이거 전혀 제 이야기 아니고 상상해서 지은 거다, 라고 말씀드리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어요. 배우님들은 조심스러워하시는데 저는 그 상황이 재미있는 거죠. 

소연: 신기한 순간은 그런 거예요. 제가 쓸 때는 몰랐던 것을 배우님들이 먼저 발견하는 경우. 제가 잊어버렸거나 놓치고 지나갔는데 배우님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는 순간 갑자기 ‘맞아, 나 이래서 이렇게 쓴 거였지’ 하고 떠오를 때가 있더라고요. 분명 제가 쓴 텍스트이지만 배우님들과 소통을 하다 보면 텍스트를 쓸 때와는 다른 플러스 알파가 발견될 때가 있어서 그게 가장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진희: <DELETE>에 나오는 작가의 마지막 대사가 원래는 이 작품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 번 더 짚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쓴 대사였어요. 그런데 ‘성진’ 역할의 정대경 배우가 이걸 다시 한 번 말해주는 게 설명적이지 않느냐고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희가 다 웃었어요. 왜냐하면 이 작품은 ‘설명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지워져버린 ‘성진’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성진’ 역의 배우가 이 부분은 설명적이니까 끊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안하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던 거예요. 결론적으로 그 대사는 빠지게 되었지만, 제게는 뭔가 여러 차원의 인물이 오는 느낌이었어요. (웃음)

민조: 이번 공연은 동인 4명의 작품을 연달아서 올리는 준(準) 페스티벌의 형태를 띠고 있잖아요. 이번 창단 공연의 형태 자체에 대한 생각, 그리고 창단 공연 이후 ‘괄호’라는 플랫폼을 통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진희: ‘괄호’의 이름으로 다시 공연을 올리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4명이 모두 대본을 써야 할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가 장기적으로 갈 수 있다면 동인 한 명이 대본을 쓰고 다른 동인들은 극작가의 역할을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요. 함께 공연을 올리는 것에 의의를 두고, 다른 역할을 서로 해보는 거죠. 오히려 극작가 동인이라는 팀 안에 있으니까 조명이나 연출 같은 극작 이외의 요소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할 수 있더라고요. 

민조: 인상적이네요. 극작가들이 모인 팀이니까, 오히려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다른 역할을 맡아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보게 된다는 거군요. 

소연: 제가 하고 싶은 건 일종의 극작 워크숍이에요. 배우님들은 워크숍을 많이 하잖아요. 여러 명의 극작가들을 모아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저는 오히려 연출이나 배우 친구들이 더 많고, 동료 극작가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이왕 극작가 팀을 만들었으니 이 팀을 통해 연극계에 별로 많지 않은 극작가들의 커뮤니티를 모색하거나 개발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민조: 저희가 ‘극작가들이 소외되지 않는 프로덕션’이라는 말을 창단 공연의 소개글에 내걸고 있잖아요. 진희님과 소연님 말씀을 들으니 생각보다 이 프로덕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팀이 극작가가 다른 일에 도전해볼 수 있는 안전한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고, 외부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번 공연 과정을 거치면서 창단 당시에는 다소 막연하게 느껴졌던 ‘괄호’의 가능성 자체가 좀 더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인터뷰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진희
2019 <EXIT: 탈출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2019 <그 어딘가의 영주>
2020 <DELETE>

이소연
2017 <마트료시카> 
2018 <43kg만큼의 상아> 
2018 <어제의 당신이 나를 가로지를 때> 
2019 <최후의 마녀가 우리의 생을 먹고 자라날 것이며> 
2019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 
2020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2020 <조약돌은 상상한다> 
   

2019년 7월 8일 월요일

“~없이 연극하기”: 대안적 작업환경을 위한 성찰 - 콜렉티브 뒹굴과 화학작용4의 커뮤니타스를 중심으로

작성: 배서현, 손연수, 이담, 조준하
정리: 김민조 (화학작용 4 사무국)

* 이 글은 2019-1학기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전공 수업 <공연예술의 인류학>에 제출된 보고서를 [화학작용 4] 사무국이 간추린 소개글입니다. 보고서 전문은 아래 전문 보기 링크에서 pdf 파일을 내려 받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문 보기 링크:
https://drive.google.com/file/d/1ljifCdEyIukJcFHTx_txtao3I_kttTzZ/view?usp=sharing 

이 글은 젊은 연극인들의 자발적, 수평적 네트워크를 표방한 연극 축제 [화학작용 4]의 성격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시도한 글이다. 작성자들은 축제 프로그램 및 개별적인 연습 과정에 대해 참여관찰을 수행했고, 축제에 참여한 6개 팀 중 ‘콜렉티브 뒹굴’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화학작용 4] 축제 전반의 특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취했다.

[화학작용 4]는 “~없이 연극하기” 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 연극계의 규범을 성찰하고 대안적인 작업환경을 모색한 축제이다. 이 글은 [화학작용 4] 축제의 형태적 측면을 분석하기 위해 상징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제안한 “리미널리티” 및 “자발적 커뮤니타스” 개념을 원용한다. 리미널리티란 잠재성과 가능성을 내포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자발적 커뮤니타스란 다양한 사람들이 개별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직접적, 즉각적, 총체적으로 상호 대면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두 개념은 “~없이 연극하기” 라는 축제 방법론에서 발생하는 규범 부재의 상황, 아울러 그러한 기반 위에서 새로운 공동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화학작용 4]는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 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거치며 젊은 연극인들은 그동안 ‘연극’이라고 불려왔던 틀에 권력적인 언어와 규범이 스며들어 있음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화학작용 4]는 “~없이 연극하기” 라는 형식을 부여해 기존의 언어와 규범을 의도적으로 박탈했고, 개별적인 창작언어를 지닌 팀들 간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규범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 과정은 새롭게 형성된 커뮤니타스 안에서 대안의 문화를 만들되 그 안에서 개별성을 보존하는 시도로 설명된다.

콜렉티브 뒹굴은 기존의 권력적인 작업환경에 대해 성찰하고 팀원 각자의 개별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활동해온 팀이다. 이 글에서 콜렉티브 뒹굴은 자발적 커뮤니타스의 장점을 드러내고 있는 팀이자 [화학작용 4]의 축제 기조와 맞닿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분석되고 있다. “뒹굴리안”들은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현실 세계의 지위에서 분리되는 대안적 정체성을 만든다. 또한 뒹굴리안들은 연습에 들어가기 전 “체크인”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또 다른 나’ 라는 가상의 정체성으로 전이되며, 연습이 끝난 후에는 “체크아웃”을 통해 현실로 돌아온다. 이러한 연습 과정은 종전의 사회구조나 문화적 조건으로 이루어진 “직설법적 세계”와 그러한 구조가 무화되는 “가정법적 세계” 사이의 전이 과정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자발적 커뮤니타스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성격을 갖고 있기에 지속적으로 재통합의 요구를 받게 된다. 콜렉티브 뒹굴의 경우에도 개별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성과 공식적인 연출의 권위가 혼합되어 있는 양상이 관측된다. [화학작용 4] 역시 창작팀들의 교류 과정에서 기존의 규범적 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규범적 언어를 찾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예컨대 “열정 없이 연극하기”를 주제로 한 ‘극단 배우들’의 워크숍에 참여한 ‘프로젝트 하자’는 열정이라는 개념을 박탈한다면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냉정을 정의해야 하지 않을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이 글은 리미널리티 안에서 새로운 규범이 모색되고 있는 상태를 “규범적 커뮤니타스”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와 구별 짓고 있다. 규범적 커뮤니타스는 영속적인 규범을 중시하며 개인의 자발성을 그 규범 안에 포함시킨다. [화학작용 4]에 참여한 팀들의 경우에는 서로의 연습실을 공개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대안적 규범을 만들어나가지만, 그러한 규범을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발적 커뮤니타스 특유의 리미널리티는 새로운 규범에 의해 곧바로 해소되지 않고 연습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형성된다.

[화학작용 4] 축제의 최종 행사에 해당하는 ‘과정공유 시연회’는 완성된 연극이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시연회는 관객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형식으로 미완과 완성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관객이 시연회에 참여함으로써 작업환경의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며, 시연회를 통해 개별성과 수평성을 중시하는 [화학작용 4]의 커뮤니타스가 젊은 연극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의 층위로까지 확장된다고 보고 있다.

[화학작용 4] 과정공유 시연회 리뷰 (1): 과정을 만드는 과정, 그 나선형의 시간들

김민조 (화학작용 4 사무국)

과정, 우리 안의 소수적인 기억들

타인에게 과정을 노출한다는 것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꺼려할 만한 일이다. 필자 역시 작성 중인 글을 누군가가 들여다보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문장과 지워내야 할 사고의 흔적들을 들키는 일만큼 낯부끄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과 ‘과정’을 ‘공유’한다는 말이 모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노출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관객은 왜 그것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해야 하는 것일까.

연극 생산의 과정은 무수히 많은 다발로 엮여 있다. 정치적 층위의 결정에서 미학적 층위의 결정까지, 참여자 개인만 감각할 수 있는 사적 레벨의 층위부터 공개적인 장에서 교환되는 공적 레벨의 층위까지, 인간적 소통의 층위에서 시스템의 층위까지. 이 모든 과정들의 총합은 그저 ‘삶’이라고 칭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넓고 무한하다. 그래서 과정은 ‘결과’를 무엇으로 놓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정식 공연을 결과로 놓는다면 공연을 만들기 위해 밟아온 모든 절차가 과정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인식소(素)를 세분화하는 정도에 따라 하루 6시간 단위의 연습을 독립적인 과정으로 떼어낼 수도 있고,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수행된 에튀드 연습도 과정으로 칭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과정은 그저 중립적으로 거기 주어져 있는 실재적 시(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은 어떤 단계를 ‘결과’로 인식하는 순간에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것, 일종의 비판적 인식을 통해 정립되는 관념적 단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사건화되지 않은 위기(crisis)들에 대한 성찰을 동반한다. 발화되지 않은 위기 혹은 소통되지 않은 채 내속되고 있는 결함에 대한 재인식이 과정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 그래서 과정을 드러내는 행위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었던 내부의 잔여들을 다시 감각하고자 하는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처럼 과정의 재발견이 우리 안의 ‘소수적인 것’을 구제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정에 대한 숙의가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의 자장 내에서 출현한 맥락을 새롭게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권위주의적인 성장 모델은 많이 흔들렸다. 연극계 미투 운동이라는 혁명적 사건을 통과하며 의도적인 무지의 장막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어두운 현장들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폐되거나 망각되어 온 수많은 과정들의 귀환이기도 했다. 증언과 고백의 릴레이 속에서 수많은 연극인들이 자신의 기억 속에 침전되어 있던 과정들의 대륙을 떠올려냈다. 최근의 지각변동을 통해 우리가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이 매순간 우리 자신의 몸과 정신에 선연한 영향을 남기는 ‘현재들’이라는 점이다. 미투 운동은 그러한 현재적 기억들에 정당한 발언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기성 연극계가 그러한 발언을 허용치 않는 구조로 위계화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촉발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다 관심 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소수의 연극인이 제도적·물질적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의 문제보다 그것을 하부에서 떠받치고 있는 우리 안의 권위주의, 즉 내면화된 기율(紀律)의 문제이다. 대안적인 창작환경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젊은 연극인들조차도 권위주의적 성장 모델과 내적으로 결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프로 연극인’으로 성장하는 직업적 루틴을 자연화하는 기율과 관련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프로’란 과정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성년 주체로 상상된다.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상품을 내놓는다는 목적을 위해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고 제작 공정을 빈틈없이 컨트롤할 수 있는 생산 주체가 되어가는 것. 선배들이 축적해놓은 자산 위에 자신의 창조력을 덧쌓으며 한 명의 프로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비전. 조금 더 개인주의화된 버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흠잡을 데 없는 직능을 구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꿈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 이데올로기, 그 중에서도 ‘돈 안 되는 예술’의 생존을 정당화하는 특정한 논리 회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한다.)

명목상으로 이러한 모델은 개인의 실현을 보장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화’ 모델은 그들을 훈련시키는 구조의 문제점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그들에게 붙여지는 죄목은 다양하다. 이 바닥의 관습과 생리를 잘못 학습한 죄, 선생님의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죄, 혹은 구조상의 문제점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유연하게 해결하지 못한 죄 등등. 경직된 위계 구조 내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로 성장하겠다는 모순된 비전을 품은 사람들은 구조의 결함을 벌충하는 것을 다시 개인의 품성과 능력의 문제로 회수하고, 자신이 습득한 ‘생존 기술’을 후배들에게 교육시키며 엇비슷한 표정과 자세를 지닌 프로 연극인으로 성장하곤 한다.

물론 권위주의적 성장 모델 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성과들을 도매금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또한 그러한 모델 내부에서 폭력성을 견제해 온 개인들을 손쉽게 낡은 예술가로 치부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간직해온 혼종적인 경험과 기억들, 사건화되지 않은 위기들에 대한 감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과정 중심주의’의 역할이자 효능일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우리 안의 소수적인 기억을 억압하는 기율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프로화 모델 내에서 과정은 단지 밟고 올라가야 할 사다리 정도로밖에 이해될 수 없다. 극복했거나 앞으로 극복해야 할 미완성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경우에 과정은 종종 과거 시제 내지는 가정법 미래 시제로 이야기되곤 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즐겁게 반추하는 시행착오의 추억, 미숙했던 시절에 관한 후일담, 혹은 해결해야 할 부끄러운 방황 상태로서.

그러므로 과정 공유라는 형식에 대해 급진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한국 연극계의 상부와 하부를 순환하고 있는 보수적 기율의 문제를 가지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과정이란 무엇인가, 과정은 왜/어떻게 노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은 결코 추상적인 지대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이 글은 과정 공유라는 형식이 최근 연극계에 현안으로 떠오른 구조, 기율, 이념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목표에 의해 입안된 것으로 간주하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목표에 입각하여 [화학작용 4] 과정공유 시연회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비평의 준거들




[화학작용 4] 축제의 최종 발표 행사로 기획된 과정공유 시연회(이하 ‘시연회’)는 5월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개최되었다. 기존 [화학작용] 시리즈와 달리 이번 시연회는 공연이 아닌 전시 및 퍼포먼스의 형태로 준비되었다. 축제에 참여한 극단 배우들, 극단 Y, 丙 소사이어티,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 프로젝트 하자 6개 팀이 무악파출소 2~4층에 걸쳐 전시 공간을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시연회는 관객들이 1층에서 체크인을 하고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순차적으로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오프스테이지 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화학작용 4]는 공연을 만들어가는 연습실 현장에서 팀들 간의 양방향 교류를 일으키는 데 주력한 축제이다. 연습실에서 이루어진 실험팀과 관찰팀의 교류 현황은 드라마인(drama-in.kr)에 게재된 실험관찰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화학작용 4]가 창작의 산물이 아닌 창작의 과정에 초점을 둔 축제인 만큼, 그 과정을 외부에 발표하는 시연회 행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과정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과정을 결과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과정에 대한 실험이 특정한 결과물로 산출된다면, 그 결과물을 보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관람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다시 말해 [화학작용 4] 축제 측의 입장에서 시연회는 ‘과정’에 대한 숙의를 넘어 ‘공유’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실 ‘과정 공유’는 예술지원기관이나 프로그램 기획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창작 과정을 외부에 공개하는 행사 내지 프로그램들의 연원을 따져보면 2000년대 초반의 벤처 붐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적 지원책들이 뒤늦게 공연예술계로 유입되면서 창작 보육(incubating) 시스템이 하나둘씩 출현하던 20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진예술가 양성이라는 취지를 내걸고 시작된 창작 보육 시스템은 예술가가 창작 단계별로 결과물을 제출해 피드백을 받는 관리 체제를 정착시켰다. 소수의 심사위원이 창작자를 단계별로 심사, 관리하는 지원 체제는 이후 창작자가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예비 상태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과정발표회’로 진화하게 된다. 이러한 지원책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점은 2017년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 ‘과정과 공유’, 남산예술센터의 ‘서치라이트’, 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 창작준비형’ 등 과정 공유를 표방한 굵직한 기획 프로그램들은 공교롭게도 전부 2017년경에 출범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쇼케이스, 워크숍, 리서치, 낭독공연, 프레젠테이션 등등 창작자가 자신의 예술적 구상을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발표 형식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은 과정을 공유한다는 워딩을 사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외부에 선보일 수 있도록 잘 갈무리된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에 잘 알려진 과정발표회들은 대체로 극장 비수기 시즌에 편성되어 있거나 거대한 공연 프로그램의 부대 행사로 편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내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입장에서 과정발표회가 일반적인 공연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구별해내기란 모호해진다. 보육 내지 관리 체제의 문법 내에서 과정은 결과에 가깝게, 공유는 상연에 가깝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편의상 이러한 성격의 과정발표회를 ‘쇼케이스 유형’으로 분류하도록 하자. 쇼케이스 유형이 창작 생태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공과를 일일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화학작용 4]가 지향하는 ‘과정 공유’가 쇼케이스 유형의 그것과 차별성을 두려 했던 점은 명백하다. 초창기 단계부터 각 팀의 실험계획서를 공유하고, 연습 현장을 직접 참여/참관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실제 창작 과정 내에서 팀들 간의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연회라는 최종 발표 행사는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쇼케이스가 아니라 축제 기간 내 수행해온 과정 실험의 경로를 정직하게 전시하는 자리가 되어야 했다. 동시에 그러한 과정 실험의 경로가 관객에게 유의미하게 ‘공유’될 수 있는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시연회에 참여한 팀들의 과제였을 것이다.

이 글은 일차적으로 [화학작용 4]에 대한 비평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학작용 4]를 시금석 삼아 과정 공유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을 제안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공연 작품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은 이론으로 구축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과정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과정은 판단이 개시되는 장소일 뿐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과정 공유라는 공적 체험에 관해서는 그 체험의 질적 성과를 따질 수 있는 비평의 준거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과정 공유’를 연극 제작에 있어서 억압, 망각, 은폐되었던 기억을 성찰적으로 발굴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목적성은 각 팀의 개별적인 공유 실천을 비평하는 데 있어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 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축제인 만큼 “그렇지 않음”의 대안적 체험을 제시하는 파상력(破像力) 또한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공연이나 쇼케이스 유형과 달리 각 팀에서 준비한 시연회가 과정을 과정 그 자체로 음미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시의적이리라 판단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러한 준거들을 바탕으로 [화학작용 4] 시연회에 참여한 극단 배우들, 극단 Y, 丙 소사이어티,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 프로젝트 하자 6개 팀의 전시 및 퍼포먼스를 비평할 것이다.

2019년 5월 23일 목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2탄 : 丙 소사이어티, 극단 배우들, 극단 Y


진정성은 어디에 있고,
열정은 어디에서 오나?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와 극단 배우들(이하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을 종종, 아니 꽤 자주 후려치곤 하는 어떤 언어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팀들이다. 현재 호명되고 있는 청년 세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청년연극인들은 착취적인 환경에 대해 점점 예민해지는 감각과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사회에 진입한 청년들에 대한 착취는 비단 임금 체불이나 신체적 폭력 같은 물리적인 측면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어떤 기만적인 논리가 위아래를 순환하며 작동하고 있다. 기성이 되어가는 연극인들은 자기들도 가진 게 없다고 주장하며, 연극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들도 무언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일까?   

  병소는 그 물음의 진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다고 본다. 진정성은 정의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병소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성인지는 몰라도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까 뭔지는 몰라도 요구할 수는 있는 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한 대답도, 그것이 대체 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이 늘 열정을 내보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연극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배우들끼리 모여든 팀이라 오히려 그런 문제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우들의 멤버들은 극단에 들어가거나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바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팀을 만들었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배우들 역시 초창기에 프린지 페스티벌을 거쳐 갔다. 2017년에 프린지에서 <죽음과 소녀>의 일부를 발췌해서 용서와 죄책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공연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생 청년팀이 지속적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열심히 고민해서 지원서를 내도 듣보잡은 쳐주지 않는 현실, 연극을 자꾸 멈춰야 하는 현실 앞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연극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들의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마음은 양날의 검이 되기 마련이다. 어쨌든 계속 연극을 해야겠다는 열정은 스스로를 인질화한다. 임금이 무이자 할부마냥 찔끔찔끔 지불되어도, 이름 있는 연출이 연습실에서 재떨이를 집어던지려 들어도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최후의 질문은 “너 열정이 부족한 거 아니야?”일 뿐. 우리가 이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열정이든 진정성이든 그것을 내보이라고 요구받는 것은 언제나 권력 관계의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병소는 2014년 아오병잉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 아오병잉은 아시아+오프+병맛+잉여를 줄인 말로, 병맛 감수성이 인터넷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고 있던 시점에 연극도 잉여성이나 무용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열린 축제였다. 병소는 적절한 판이 깔린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한 마디로 진정성이란 걸 갖추지 않은 연극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한테 왜 그러세요>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3부작 꽁트였다.

  1부에서는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일체형 책상의 앞뒤를 돌려 뒷사람이 앞사람의 책상을 써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앞사람이 움직이면 뒷사람이 글씨가 자꾸 삐뚤어지는 식이었다. 2부에서는 차분한 요가 교실에 뽁뽁이를 깔아놓은 상황을, 3부에서는 좁디좁은 입시 무용학원에서 아이들이 발레 연습을 하는 상황을 보여줬다. 한 마디로 주어진 시추에이션 탓에 자꾸 억울해지는 사람들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메시지를 주려는 강박 없이, 자꾸 망하고 어긋나는 병맛스러운 상황만을 보여주고 거기에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 병소는 그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 없이 연극을 만들어보았던 초기의 시도 중 하나라고 회상한다. 이때 진정성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태도로서의 진지함, 또는 심각함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정과 진정성은 예술가에게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상상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병소는 한국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진실된 마음을 뜻하는 Sincerity와 진품인 것을 뜻하는 Authenticity가 결합된 상태로 통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한테 너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텅 빈 가짜일 것이다, 라는 논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말하는 열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열정과 진정성은 평가 권력을 지닌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할 자기증명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서 내가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를 지켜보고 평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면, 열정과 진정성은 처음부터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또 저기에 있음을, 혹은 잠시나마 여기를 저기로서 경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게 이 연극이라는 가상이 아닐까?”
- 2018년〈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공연 대사 중
  그러면 이 익숙하고 기묘한 단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병소는 진정성이 구성되거나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생기는 어떤  가상적 효과로서 진정성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책상을 무대로 썼던 <꼬마 짱꼴라>(2015)에서 인간을 말로 다룬 <노동집약적 유희>,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에 나오는 빈 의자들의 사물성을 차용한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사물과 신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들을 탐구해온 병소는, 이제 진정성 또한 그러한 효과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듯하다.


   

우리가 가부장 없이
협력하려면

- 극단 배우들 × 극단 Y


  극단 배우들과 극단 Y(이하 Y)는 작업 환경 내에 존재해온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위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 중인 팀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얼핏 보면 연습실은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집단으로 분류되는 팀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계와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할과 보직에 따라, 나이와 서열에 따라, 소속과 성별에 따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작업 환경 내의 위계와 불평등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를 인간적으로 쇼부 쳐서 해결하는 식 말고, 구조적 대안을 고민하는 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은 말 그대로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2017~2018년경에는 ‘창작집단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팀이지만 2019년에 이르러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극단 배우들’로 개칭했다. 연출이나 기술 스탭 등의 보직을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맡지 않고 매 공연마다 상의를 통해 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화를 통한 공동창작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는 점도 이 팀이 멤버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집마차>(2018)는 멤버들 각자의 에피소드를 모아 풀어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배우들은 연출자나 대표자에게 위계적인 중심을 부여하는 대신 배우 간의 평등한 소통을 중시하며 작업을 해온 것처럼 보인다.
  강윤지 연출의 1인 극단인 Y는 매 작업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러브콜을 보내 팀을 꾸리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Y는 수직적인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가부장을 지목한다. 가부장은 기본적으로 한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의미를 확장하여 어떤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Y는 연극계가 가부장에 의한 규율과 관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측면들을 들여다본다. 페미니즘과 젠더감수성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가져가고 있는 Y는 가부장에 의한 통치의 문제를 폭력적인 기율紀律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백스테이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위계 폭력들은 선배님이니까, 연출이니까, 어디 학과 교수니까, 연극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하는 이유 등등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가부장은 가해행위를 정당화하고 피해호소를 억압하는 바로 그 힘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Y가 이야기하는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성의 문제는 연출 중심주의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 하나의 팀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대부분 연출이다. 연출은 공연의 미학적 완성도를 책임지고 감독할 뿐만 아니라 작업에 있어서의 의사결정과정을 이끄는 직책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모든 결정권은 연출에게로 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권한이 막대한 만큼 책임도 막대하다. 마치 가장이라 불리는 존재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가부장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는 연극 사회 내에서 연출직을 맡는 사람은 한 팀을 책임질 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강윤지 연출은 나이가 어린 + 여성 연출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습실에서 엄격하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디렉션을 하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고정적으로 연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는 배우들의 경우에는 팀의 수평적인 관계성 자체가 가부장성을 중화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디렉션을 담당한 멤버와 디렉션을 받는 멤버 사이의 소통이 즉각적으로 솔직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이 팀이 기본적으로 배우라는 존재를 연출이 조종하는 인형이나 표현 도구가 아니라 독립적인 크리에이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만드는 작업은 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미리 결정된 사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는 크리에이터들이 매번 새롭게 부딪혀가며 바꿔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우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즉흥적인 에뛰드 연습을 통해 대본상에 없었던 장면들을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저희끼리 있으면 기본적으로 즐겁긴 해요. 포지션 상 동등하고, 서로의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어요. 다른 팀에서 할 때에는 연출부와 배우진 사이의 마찰이 있거나 선이 있게 마련인데, 저희 팀에서는 그 선 자체가 둥글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관계성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요.” 
- 사무국 × 극단 배우들 인터뷰 중
  Y는 2018년 11월 평등한 제작환경을 위해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을 작성한 바 있다. 가부장성으로 대표되는 작업 내 위계폭력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구성원들 각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들의 세목을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세상에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 서열, 권위의식이 거의 자연화되어 있는 이 연극판에서 대안적인 모델을 찾고자 하는 두 팀의 시도는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 없이도 되던데? 라고 쿨하게 대꾸할 수 있는 팀들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화학작용4] 함께-인터뷰 1탄: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丙 소사이어티


모든 ‘각자들’의 연극,
너와 나의 관계성

- 콜렉티브 뒹굴 ×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과 프로젝트 하자(이하 하자)의 출발점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정극 중심으로 공연을 올리는 대학 극회에서 떨어져나온 이른바 부스러기들이 헤쳐 모여 만들어낸 집단이라는 점이다. 뒹굴은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정극이 정말 재미있는지, 이 시대에 맞는 연극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든 팀이라고 한다. 하자 역시 비슷했다. 정극을 만드는 과정이 성향상 맞지 않는 데다 단체 생활마저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야합했다. 연극다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두 팀의 결성, 때는 2012년이었다.

  대학 극회를 발판으로 삼아 연극계에 진출하는 청년들은 많다. 이 과정은 흔히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장하는 서사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뒹굴과 하자는 세미-프로 양성소에서 착실히 연극수업을 받으며 성장한다는 줄거리를 조기에 절단했다. 그럼, 이 절단된 단면에서는 과연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생장점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뒹굴과 하자가 삐뚤빼뚤하게 걸어온 길은 그런 질문들과 씨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왜 항상 내 삶을 버려두고 예술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혹은 예술을 잘 하는 식으로, 혹은 잘 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너무나 큰 압박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모이게 되었습니다.”
- 2012년 〈니나노 뒹굴〉공연 당시, 성지수 대표의 발언
  뒹굴과 하자의 다른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길 거부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무릇 연극이라 하면 텍스트든, 연출의도든, 극단 기조든 간에 구성원들의 신체로 하나로 끌어당기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뒹굴리안들은 초창기 〈니나노 뒹굴〉 때부터 이미 팀원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 기-승-전-결을 거쳐 가는 작업 방식을 지양했다고 회고한다. 연극이 덩어리로 굴러가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상실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뒹굴이 예술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로부터 꺼내오고 싶었던 것은 각자의 것이었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가져와서 좋은 점을 찾아보고, 그것을 재료 삼아 놀아보면서 발전을 이루는 형태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2016년에 뒹굴은 그렇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갖고 드나들 수 있는 팀, 혹은 어떤 움직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콜렉티브collective를 달게 된다.

  덩어리 상태로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포부는 하자에게도 중요했다. 단체를 만들지 않고서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2~2014년 대학 동아리로 활동하던 시절 하자가 도전한 것은 위계 서열 없는 수평적 상태였다. 무조건 창작극을 하고, 작업을 위해 모이면 먼저 서로를 인터뷰한 다음 맞물리는 부분을 가지고 주제를 도출한다. 이슈나 주제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만나서 정해가는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하자가 방법론적으로 중구난방을 취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많은 공연팀에서 연출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듯이, 이슈 셋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상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목소리 비중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생팀들이 자신들만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어떤 의식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과 달리, 하자는 목소리의 다양성을 향해 팀원들의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서 넓히는 방향을 취했던 것 같다.
  이른바 연극다운 연극들의 성소가 극장이라면, 뒹굴과 하자는 우선 극장을 놓아두고 밖으로 떠나는 방법을 취했다. 뒹굴의 첫 공연은 포이동 화재 재건 1주년을 기념하는 ‘벽돌문화제’(2012)에서 트럭 두 대를 놓고 짧은 퍼포먼스를 가진 것이었다. 초창기에 뒹굴은 관객이 어둠 속의 눈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권위적인 극장 공간을 벗어나 관객들과 가깝게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장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같은 해 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열린 〈니나노 뒹굴〉의 경우에는 관객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체조를 같이 하는 참여 코너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게 연극인지 사회적 프로젝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논다면 관객과 함께 놀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그 이후로도 죽 이어져온 듯하다. 관객에게 배심원을 시켰던 〈바로 그 얘기〉(2016), 관객에게 요정을 돕는 베타테스터 역할을 시켰던 〈조커카드 베타테스터 파- 티〉(2017), 관객에게 흡연자 노릇을 시켰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2019) 등등.
  관객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공터로 나갔던 하자는 이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거리극을 하기도 하고, 대안학교나 난곡동 태권도 학원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고 한다. 하자는 관객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대신 1대1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대1의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태로. 뒹굴이나 하자나 그들의 팀을 구성하는 원리를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해보려 노력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라는 덩어리로 보는 대신 너와 내가 가진 각자의 것들을 보고자 하는 노력, 혹은 관계성의 실험. 2012년으로부터 7년 간 지속하고 있는 두 팀은 여전히 초창기에 발견했던 생장점을 구불구불 옮기며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의 몸이
무대 위를 서성일 때

- 프로젝트 하자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하자와 丙 소사이어티(이하 병소)는 팀 이름에 이미 자기정체성이 투사되어 있는 팀들이다. ‘하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왜 못 하지, 하는 푸념만 나누다가 ‘하자!’ 라고 결의했을 때의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딘가 조금씩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하자瑕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자의 전서아 연출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비주류의 정체성과 감성을 지닌 팀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병소의 이름에도 그러한 비주류 정체성과 감성이 투사되어 이다. 병소 역시 2012년에 결성되었는데(2012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는 한창 병맛이라는 유행어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술병을 굴리며 지병持病을 앓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하하하 우습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병맛 감성. 최종적으로는 갑과 을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아예 병이 되겠다는 선언으로서 丙 소사이어티는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계적 중심을 배제하고 천천히 지속하는 팀들은 구성원들에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자와 병소 역시 고정적인 멤버를 거의 두지 않고 그때그때 공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체 상태의 집합체가 아니라 느슨하고 액체적인 풀pool의 상태로 놓아두었던 셈이다. 멤버들은 각기 자신의 삶을 살다가 그 시간만큼의 고민을 안고 돌아온다. 병소의 경우에는 6년 만에 돌아와 작업을 하게 된 멤버도 있었고, 하자의 경우에는 멤버들이 각각 졸업과 취직의 관문을 넘은 뒤 2년 만에 다시 만나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2016년에 다시 모인 하자는 창작극에 공을 들이다가 2017년 밴드 GRiN과 콜라보한 음악극 〈안녕〉을 선보이게 된다.
  하자의 성격이 다소 변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이라는 공연이었다. 이사를 돕느라 해후하게 된 바이섹슈얼 여성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다. 전서아 연출은 하고 싶은 얘기가 정확히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하자라는 팀에 처음부터 비주류 의식이라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주류 의식이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자면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 딱 들어맞는 퍼즐을 이룰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끼리의 공존이 아닐까.

하나: 망가진 인간들끼리 위로가 되나.
유진: 망가진 인간들끼리는 위로가 된다. 난 아직 믿어.
-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대본 중 

  갑도 을도 아닌 병들의 소사이어티를 자처한 병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비주류의 모습에 주목했다. 〈노동집약적 유희〉 시리즈는 편의점, 식당, 서점 등의 알바 자리들이 늘어서 있는 커다란 부루마블 말판 위를 움직이며 생존을 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의 역할을 하게 되는 참여관객들은 최저임금만큼의 자본과 일정한 체력 수치를 갖고 이 비정규직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남기를 도모하게 된다. 한시적으로 어떤 공간에 머무르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자신이 머무를 공간을 사야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극장들 사이를 전전하며 무대 위에서 잠시잠깐 현존했다가, 다시 도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청년연극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집약적 유희〉는 애초에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했던 사업이 지원금에서 떨어진다든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다든가 하는 우연한 계기들이 겹쳐 이 공연은 2015년~2017년에 걸쳐 총 네 번이나 상연되었다. 물론 모두 다른 극장, 다른 장소에서였다. 병소는 매번 새로운 무대를 만날 때마다 그 공간성에 맞게 공연성을 개조해나갔다. 가령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단정한 블랙박스 무대를 만나면 방송 중계 현장처럼 만들었고, 연습실 공간을 만나면 관객과 함께 하는 레크리에이션을 삽입했고, 인터넷 공간에 Rodong.zip 파일을 흩뿌리거나 집회 신고를 넣고 보신각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현시하기 위해 절룩거리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비주류 청년연극인들의 몸. 그것은 칸으로 나뉜 부루마블의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말들의 모습과도 같다.
  2018년을 기점으로 하자는 그들의 창작 원천이었던 비주류 의식을 소수성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놓게 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소수의 소수의 소수이다. 다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는 일인칭적 감각에 대해 사고하기. 그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인식의 레벨을 옮겨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공연을 치르면서 하자는 소수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관객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호출한 관객들이 무대 위에 앉아 있을 때, 어떻게 소수적인 것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하자 역시 비주류의 몸을 어떻게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자가 있는 사람들의 소사이어티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8년 6월 9일 토요일

한국 공연예술계 엥떼르미땅들과 사회적 권리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주형일 역, 『정치 실험』 (갈무리, 2018) 서평[1]

김민조
“부자가 되세요!”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 옆에 “자신을 표현하세요!”, “창조적이 되세요!”라는 신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은 장려될 뿐만 아니라 고용적격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창조에 대한 독려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정치 실험』 226~227면.

『정치 실험』에 묘사된 2003년 경 프랑스의 상황과 2018년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온도차는 현저하다. 약 15년 전 프랑스에서는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실업보험의 수혜 조건을 강화하고, 소득재분배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재건"이라는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엥떼르미땅[2]들의 투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공연예술계의 경우에는 아직도 실업보험은커녕 예술인복지의 개념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워크페어의 통치성과 권력효과를 운위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 내에 진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기화로 하여 국회에서 예술인복지법 개정 및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예술인 사회보장제도는 일반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정부가 추산한 한국의 문화예술인 규모는 약 54만 명에 달하지만 예술인복지법에 의해 수혜를 받은 예술인은 약 3만 4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2016년 기준)은 그 증거들 중 하나이다.[3]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는 연습비와 공연비를 온전히 자비로 충당한다거나 공연에 참여하고도 개런티를 지급받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특히 5년차 이하의 엥떼르미땅들에게는 창작활동을 통해 먹고 사는 모델보다는 창작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충하며 살아가는 모델이 더 일반화되어 있다. 젊은 창작자들은 대체로 이름 있는 팀에 들어가거나 노 개런티 공연을 전전하면서 ‘이 바닥의 생리’에 적응하고 버티며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커리어를 쌓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정부가 제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은 대부분 예술인 개개인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사업이 아니라 ‘유망한’ 극단이나 연출가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이기 때문이다. 지원사업에 선정될 수 있는 팀, 그래서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팀에 팔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게임”은 더욱 심화된다.

랏자라또는 이른바 복지국가의 “서비스”는 투쟁에 의해 획득된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체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부여한 “신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재건”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엥떼르미땅들은 국가가 식별할 수 있는 ‘좋은 예술’의 기준에 부합하는 창작물들을 더 많이, 더 쉼없이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신용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지원사업은 복지사업보다 더 문이 좁고 까다로우며, 더 시혜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국에서 시행되어 온 예술지원사업은 고용적격성을 기준으로 한 “불평등의 미분적 관리에 의한 통치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큐베이팅 사업과 같은 지원사업들은 표면적으로 창작예술인의 ‘육성’을 내세우지만, 이는 예술인들을 보편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추적조사”(신청서류, 면접심사, 교육이수 여부 등)를 바탕으로 걸러낸 소수의 적격자들만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원사업은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는 대신 돈을 내어주는 정부 부처나 정부 출연 재단의 시혜적 태도에 “의존”하게 만든다.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이러한 위계적 관계가 고착화되는 것에 비례해 정치적 타락의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사례는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length principle)에 의거해 2005년 수립된 예술분야 전문 협의체이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 청와대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배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검열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4]

그러나 최근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도 랏자라또가 말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이후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맞선 투쟁, 그리고 2018년 공연예술계 미투·위드유 운동은 ‘경제적인 것’의 프레임 너머에서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존재론을 문제 삼는 새로운 벡터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자신이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전성과 예속성의 감각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의 관리정치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각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기각하고 ‘살아남기 위해 동의할 것’을 강요하는 공연예술계 내부의 “품행 정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을 바탕으로 국가의 복지·지원 사업들을 모니터링하고 그 계획의 수립과 시행 과정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2017년부터 새로운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지원사업의 울타리에서조차 배제되어 있었던 청년·신진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최초예술지원, 서울시청년예술단, 유망예술지원, 민간청년예술공간지원 등이 그것이다. 청년예술단의 경우 사업액이 총 54억 원(2017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지원사업의 파이가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선정된 예술인들에게 사업비와 별도로 월 70만원 수준의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복지사업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예술창작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기초적인 생계를 위한 수급비를 지급하는 사업을 도입했다는 것은 분명 진일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랏자라또가 『정치 실험』에서 경고하고 있는 일들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평론가는 2017년 청년예술단이 연간 80회의 활동 증명을 요구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여전히 정부가 예술가를 ‘주체’로 보지 않고 지원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5] 달리 말해 창조에 대한 독려가 여전히 사회적 권리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작동하지 않고 고용 유인이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원사업이 되면 적절한 예술가가 된다”라는 한 청년연극인의 자조적인 표현처럼,[6]지원적격한 예술가로 인증받기 위해 수백 장의 기획서를 쓰고 활동증명서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 자체가 공연예술계 내부의 경쟁 게임을 부추기고 있다. 예컨대 ‘대학로 인력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인들의 소통은 외견상으로 매우 활발하지만, 필자가 경험하기로 각자의 예술관이나 지향성에 대해서 진지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현재 누구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업에 지원할 예정이며 다음번에는 어떤 ‘판’에서 작업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보통 노 개런티에 가까운 공연을 전전하는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경우에는 거리극, 단막극, 영세한 페스티벌 등에서 경력을 쌓아 이름 있는 중·대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장기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프로젝트 극단 중심의 자율적인 협업 체제가 점점 더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사업’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유지되는 한 결국 기존의 경쟁 구도 속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유력한 서울 시내의 극장, 명망가에 의해 지휘되는 극단, 거대 협회 주도의 페스티벌 등에 지원사업이 쏠려 있는 한 엥떼르미땅들이 다양한 삶의 형태들, 전략들, 기술들을 통해 “대항품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난망해진다. 랏자라또는 신자유주의야말로 “다문화주의”의 옹호자라고 말한다. 주체들의 실천을 겉보기에는 다양해보이는 수준으로 관리하는 기술, 그러나 각 계층들과 실천들 사이의 미분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조장하는 기술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혁명”의 위험을 저지하고 경쟁의 원리를 보존한다.

엥떼르미땅의 연대체가 감시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좀 더 나은 지원사업으로 무마하는 것, 새로운 복지사업으로 눈을 가리는 것, 그리하여 국가는 역할을 다했고 문제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자신을 경영하지 못하는 엥떼르미땅들에게 있다는 인식을 시민사회에 유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은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에 가로놓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진단서 내지 경고장이 될 수 있다. 공연예술은 끊임없이 공간 속에 실현되고 또 사라진다는 물질적 기호성을 갖는 장르이다.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빈 시간들”에 충분한 경의를 갖는 것, 비록 그 시간들을 무(無)로 환원시키는 자본의 논리에 고통받을지라도 그것이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전략”[7]에 불과함을 잊지 않는 것,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더 많은 연대체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 이 글은 필자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8년 5월 26일 개최한 『정치 실험』 서평회에서 발제한 서평입니다.
[2] 랏자라또는 엥떼르미땅(intermittent)을 “불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며 특히 공연,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고 밝혔다. 『정치실험』 9면.  
[3] 이종승, 「예술인 복지 정책, 당연권리인 사회보장제도에 진입하기 위하여」,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4] 노이정, 「연극 예술 지원 정책의 개혁 방향」, 《연극평론》 87호, 2017 참조.
[5] 김태희, 「확대되는 청년예술가 지원사업, 서울시와 예술가의 동상이몽」,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6] 김기일 작가·연출가의 발언. 송경화, 「우리는, 사람을, 만났다」, 《웹진 연극in》, 2017. 5. 11에서 인용.
[7] 류주연 연출가의 발언.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경남 창녕군 길곡면> 월례비평」, 《공연과 이론》 69호, 2018.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