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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9일 일요일

가공되지 않은 드라마를 꾸려가는 힘의 진실함

<말뫼의 눈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수희 작/연출 
2017/04/06

시작은 오해 

  두 여배우가 억지스러운 고등학생 분장을 하고 등장하여 둘만이 아는 암호 동작을 과장되게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대사로 나누는 첫 장면을 대했을 때 작위적인 드라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조선소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 다음 버스 정류장 앞에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제시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 명 씩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 쉴 틈이 없었다. 첫 공연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미리 계산된 분주함으로 이곳저곳에 배치된 설정들을 정신없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떠들썩함은 조금의 침묵도 어색해서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상으로 다가왔다. 많은 정보들을 인물들의 대사와 행위 곳곳에 알차게 설정시켜 놓고 가는 작품의 시작부는 전체적으로 차분하지 못했고, 꽤나 계산된 드라마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신뢰의 끈   

  그러나 간이식당에서 룸펜으로 나왔던 여자가 맨 앞 장면에 등장했던 수현이었음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 2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수현과 미숙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두 인물의 달콤하지만은 않은 우정이 감지되면서 일단 이 드라마에 몰입하기로 한다. 이 장면에서 작품을 달리 볼 수 있는 것은, 수현과 미숙이 오프닝에서 설정되었던 느낌으로 성장하기는 하였으나 어떠한 전형성도 탈피한 인물로 컸다는 사실이다. 시골 마을에 들어 선 조선소 따위에는 세상 관심이 없다는 듯 현실에 냉소적이고, 아니 세상살이에 냉소적이며,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수현은 어정쩡한 조건부를 단 성인으로 크고 있었고, 어린 시절 크레인 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 보겠다던 미숙은 돈 잘 버는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이 되어 (기껏해야 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자신의 포부를 (이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세파를 끌어안는 힘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 대목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마음이 열린 이유를 말하자면 이 두 인물이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들일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도 작품이 이 두 인물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질타를 하거나 편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면서도 이 두 인물을 나란히 애착 어린 시선으로 추적해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은 점점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커다란 신뢰로 바뀌었고 극은 결국 나의 깊은 내면과 손을 맞잡았다. 알고 보니 작품은 이 두 여자만의 드라마가 아니었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아버지 빽으로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으로 취업한 진수, 그리고 시종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 크레인이 들어 온 후 마을을 드나드는 사모님들을 보고 인생의 비애를 느낀 은옥, 마을에 돈이 돌자 어떻게든 기회 삼아 돈을 벌어보려는 은옥의 남편 등-의 동등한 드라마를 두루 살피며 참 착하게도 여러 고통과 여러 열망, 아니 고통과 열망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여러 당연함들-녹록치 않은 삶에서 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함-을 어떠한 폐쇄적인 주장 없이 평등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시종 작품 속 그 어느 인물의 드라마에도 작가는 편을 들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이의 드라마에 정성을 쏟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어려운 삶의 몫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작품을 만나가는 과정 안에서 흔쾌히 체감된다. 명백한 드라마를 구축하면서도 관객에게 어떠한 드라마도 주입시키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산뜻함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태도는 외면할 수 없는 세계이기는 하나 검은 먹물 같은 인물과 사건, 드라마, 작가의 할 말에 관객을 전부 가두어 놓고 질식케 하는 기존 드라마 연극의 태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이렇게 산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일인이기는 하지만) 작가와 연출자가 연극을 넘어 삶을 응시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즐겁다    

  그리고 즐겁다. 우선 작품은 탄력적인 연극성을 구사하며 즐거움을 자극한다. 작품 초반에 옆에 앉은 관객과 손을 잡으라고 했던 과감한(!) 제안, 은옥의 스토리텔링-은옥은 그 추레한 얼굴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핀 조명을 받으며 자기 고백을 하는데, 이 장면은 그 어느 장면보다 호소력이 짙다. 그 이유는 점층적으로 강렬해지는 핀 조명과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이 가진 고백적 권위도 있겠지만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지닌 생생함의 파장 덕분이다. 호미로 밭을 매다가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타게 된 경위를 서술하는 이 장면에는 한 개인이 바라 본 한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 명시된 뮤지컬적인 장면 연출-이 작품에는 은옥이 댄스홀에서 남편을 마주쳤을 때와 할매가 죽었을 때 뮤지컬적인 장면이 개입되는데 이 두 장면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처럼 가장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살맛나는 상상으로 제시된다.-, 버스 씬-은옥, 할매, 수현과 미숙이 하나의 프레임에 잡히는 버스 씬. 버스 씬에서 조각된 여자들의 풍경을 보며 이 연극은 진정 아무럴 것 없는 남루한 여자 인물들의 돋보임이라고 생각한다.-이 연극적인 의미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연극적 즐거움은 정형화된 드라마를 따르는 척하면서 결코 정형화되지 못하는 생의 균열들에 힘을 모으고 있는 지점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사의 점핑-미숙의 남편이 죽었다는 대사와 함께 붙는 다음 장면은 그 말을 한 할머니의 장례 장면이었던 것-, 구조의 컨트라스트-미숙과 수현의 관계는 기승전결로 완결되지만 작품의 전체 드라마는 결코 정박자로 굴러가지 않는 것-, 작품의 결말까지 발설되지 않는 비밀을 하나쯤 품고 있는 것-은옥의 행방-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인공 같은 인물을 가장 설득력 없는 인물로 설정한 것이 작품 속의 드라마에 균열을 가한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은 수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가장 잘 모르는 불투명한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지 않으며 극의 처음에서 끝까지 가장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제시된다. 얼핏 보면 작품의 서사적 화자 기능을 하는 듯한,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 인물이 전체 극에서 가장 희미한 아웃사이더로 밀려 나 있는 설정은 작품을 구태여 만들어진 극에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비쳐진다. 
  이토록 뚜렷한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만들어내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천착하는 힘으로부터 신중함과 따뜻함을 넘어서 절실함 마저 느낀다. 탄력적인 연극성으로 즐거움을 주는 노력 너머에는 오롯이 사람,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내려 하는 마음이 만져진다. 특히 남미정 배우가 연기한 할매의 모든 순간들이 그렇다. 버스 정류장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할매는 이곳에서 스치듯 만나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소소하고 거대한 싸움들, 저마다 절실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빚어내는 그 숱한 싸움의 순간들마다 막간처럼 개입한다. 드라마가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우물에 함몰되려 할 때마다 빠짐없이 개입되어 허투루 내뱉는 듯 하는 할매의 대사는 매 번 웃기지만 그 어느 정식 대사들보다도 진실하고 진지하다.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누구의 곁에도 에둘러 가 앉아 주고, 그러면서 또 이기적인 그녀는 결코 추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작품 전체를 떠받든다. 

작품의 선함에 대하여

  악인은 아무도 없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모든 삶의 선함을 믿는다. 작품이 직시하는 것은 오로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라는 악한일 뿐이다. 무대 위에는 제각기 이질적인 인물 군상이 한 데 공존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결국 삶을 잘 살아내 보려 하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이기적인 계산도 아니고 현실적인 치열함도 아닌 공동의 선함으로 비쳐진다. 모든 진정한 것들은 보편적이고 순수하다. 이를테면 사랑이나 잘 살아보려는 마음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며 순수한 감각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의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질적인 사람들이 지닌 개개의 선함에 대해서. 커튼콜을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을 잘 살아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삶과 연극의 경계 위에 서서 박수를 쳐 본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용비어천가

이예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영진 리의 <We're gonna die>를 미국 관객들과 함께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미국이었고, 미국 관객들이 있었고, 미국에서 살아내고 있는 영진 리가 무대 위에 있었다. 2017년도 국립극단 제작 <용비어천가>는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한국에서, 한국 관객들 앞에서, 한국 배우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영진 리의 오리지널 버전 공연과 국립극단 제작 버전 공연 사이에 낀 애매함은 단지 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지역성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애매함의 전부였을까?
     
사소한 외로움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늘 비극적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비극이 된 모든 사건이 응원 받는 이야기. 아프고도 즐거운 이야기, 신이 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그녀 스스로에게서 모두 응원 받는다. 영진 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양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위로한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을 들으면서 ‘참 강건하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나와 너를 깊은 곳까지 끌고 가서 기어이 나의 깊이와 너의 깊이를 만나게 한다. 그래서 특정한 인간의 특수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보편의 만연한 애잔함으로 만든다. 나와 너를 연결하고 고통과 응원을 연결하는 이러한 시선은 내게 강건함으로 와 닿았다. 이것은 또한 그녀가 살아 온 인생에서 빚어진 힘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구별과 차별, 다름과 억압, 분노와 부당함을 온 몸으로 껴안고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 가능성과 상상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보다 깊은 차원의 힘. 흔히 ‘히스테릭’이라는 단어와 ‘코미디’라는 단어를 합쳐서 ‘히스테릭 코미디’라는 단어로 그녀의 작품을 수식하고는 하는데, 사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히스테릭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고 히스테릭과 코미디를 단지 결합한 무엇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히스테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씁쓸함만 있는 것도,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출되고 다듬어진 공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살아내고 있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삶을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내고 있음이 느껴졌기에, 그래서 강건했다. 비록 미국인 관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인 내가 영진 리의 공연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미국인 관객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공간에는 미국인과 한국인을 넘어선 ‘살아남은 인간’의 온기가 있었고 우리 모두가 울고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팔목이 떨어져라 박수를 보낸 이유는, 미국계 한국인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을 응원하는 열렬함 때문이었다.    

<We're gonna die>에서도 일부분은 인종 차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종 차별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각자가 삶을 살고 있지만 사는 동안에는 ‘삶’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그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하여 그녀는 결코 현실을 고발하지도 토해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며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의 전체에 'We're gonna die'라는 제목을 붙인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순간의 살아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죽을 것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몫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올해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이라는 기획 타이틀의 한 프로그램으로 섭외된 순간부터 영진 리의 공연은 ‘미국계 한국인’의 공연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온몸에 걸쳐 입게 되었다. 비한국과 한국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취지로 붙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정의내릴 수 없는 내면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선 보이겠노라는 다소 민망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온전히 영진 리의 것은 아닐지라도 공연의 어느 틈새에는 영진 리의 강건함이 있겠지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신록 배우가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모습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공연은 시종 ‘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 그리고 그 시선에 대해 ‘한국’인이 가지는 감정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한국인과 미국인, 그 사이의 균열에 집중하는 이 공연은 급기야 그 많은 한국인 관객들로 하여금 짠 내 나는 눈물을 몇 번씩 뽑아내고 말았다. 사실 나도 몇 차례 울었다. 울면서도 궁금했다. 영진 리의 강건함을 한국인의 아픔으로 만든 이유는 무얼까?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연출자에게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지만, 대화가 시작되고 연출자가 한 말을 듣고는 그냥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연출자는 원작을 해석하지 않고 오로지 ‘재연’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해석이 없었다는 공표에 할 말이 없어진 것도 잠시, 그가 말한 재연의 대상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영진 리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사건, 공기의 겉면을 재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과연 이 공연은 원작 공연을 재연한 것일까? 어떠한 삶이 몇 몇의 코드가 될 때, 삶의 진행이 무언가의 고발로 치환되고 전시될 때 실체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껍데기로 왜곡된다.  

지금 여기의 이들의 공연이 아닌 누군가(영진 리)의 이름을 빌린 공연. 창작자들이 작품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지는 기획‘된’ 공연. 나 역시 기획자로서나 드라마투르그로서 그러한 상황에 끼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이 있으니… 아쉬움을 느끼기에 앞서 지금 이곳 내가 속한 곳에서 연극‘함’의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타이틀 그 이상이 되지 못한 기획의 폭과 질문이 부재한 연출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선 배우, 배우들의 사투는 눈물을 쏙 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진실했다.

***
국립극단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 중(中) <용비어천가>,
영진 리 작, 오동식 연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2016. 6. 3.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3월 31일 금요일

두 가지 복수, 다른 모습

산책

  얼마 전 (또) 한 대학의 남학생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성차별과 성희롱에 해당하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중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지 왜 대학에 왔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특히 이 내용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나 역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이제는 대기업의 대리인가 차장이 된 옛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여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어려운데, 입시 경쟁만 더 치열하게 하면서 꼭 대학을 가야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 묻고 기 막혀 했으나, 그 친구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전히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라니, 이렇게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유난히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런 저런 일들에 다 불편해 하는 프로불편러(혹은 불편충)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이런 불평등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연극계에서도.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2월과 3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과 <메디아>(로버트 알폴디 연출)를 연이어 관극했다. <조씨고아>는 원나라 이야기이고, <메디아>는 그리스 신화이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복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복수하는 사람의 성별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

  먼저 <조씨고아> 이야기를 해보자. 도안고의 계략 때문에 조순을 비롯하여 조씨 집안 일족이 몰살당한다. 이때 조삭(조순의 아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도안고는 출산 후 이 아이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삭의 아내를 감금했으나, 그녀는 복수의 씨앗이 될 아이만을 살리기 위해 시골 의원 정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영은 평소 조순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이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이를 숨겨 달아난다. 이때 정영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 분명 후일 복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정영이 아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아의 어머니가 자결하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장군도 정영과 아기를 도망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도안고가 고아를 추적하고, 그를 찾지 못하면 또래인 모든 아기들을 죽이겠다고 하자, 정영은 고아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는다. 공손저구 역시 목숨을 걸고 이 계획에 가담한다.

  아기를 빼앗긴 정영 부인의 애 닳는 울음이 아직도 생각난다. 왜 자기 아들이 죽어야 하냐고 울부짖는 어미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데려가는 정영의 모습도 떠오른다. 죽음을 선택한 공주와 장군, 공손저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고 20년간 고아를 키운 정영의 모습은 분명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졌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아이를 살려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인에게 걸맞는 최후를  위한 고귀한 복수. 조씨고아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 복수의 씨앗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물론 도안고 집안을 멸족함으로써 복수는 성공한다. 20년간 고아를 키우며 복수의 날을 기다려온 정영의 얼굴에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 안도와 허무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어쨌든, <조씨고아>에서 복수는 고귀한 것, 권선징악의 아름다운 결말을 완성하는 것이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더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여자, 그녀가 바로 메디아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메디아의 복수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메디아가 자식들을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들이 많은 것도 이 이야기를 치정극,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타국, 코린토스로 왔으나 남편은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바람이 나고, 곧 결혼을 한단다. 메디아 자신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고, 아이들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이 순간, 메디아는 공주와 왕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다소 길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의 장면을 아래에 인용해보자.


메데이아 나는 내 자식들을 죽일 거예요.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이아손의 집을 송두리째 허물 것이며,
가장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나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인 죄를 피해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친구들이여!
그래야만 해요. 내가 살아서 뭘 해요?
내게는 조국도 집도 불행의 대피처도 없어요.
내가 한 헬라스 남자의 감언이설을 믿고
선조들의 집을 떠났을 때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던 거예요.
그러나 그 자도 이제 신의 도움으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그 자는 앞으로 내가 낳아 준 자식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고, 새 신부도 내 독에 의하여
고약한 여인으로서 고약한 죽음을 당해야 하니
그 자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할 테니까 말예요.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역, 791행 ~ 806행)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메디아의 여러 감정이나 이유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지는 연출의 마음이지만, 알폴디는 메디아를 ‘이기적인 여자’로 그러니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죽어 마땅한 여자’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여자의 선택”이라는 부제를 달고서는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다니. 메디아는 남편을, 이아손은 새 신부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식을 잃었다. 그런데 메디아만이 죽음으로 처벌당한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하는가? 결혼을 앞둔 이아손이 자식들을 본체만체 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는가? 메디아가 어머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환상이거나, 혹은 굴레일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단지 달라진 결말에서만 느껴진 것은 아니다. <메디아>의 코러스들은 모두 여자배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메디아가 등장하기 전, 첫 장면에서 그녀들이 보여준 모습은 메디아에 대한 질투, 그리고 험담이었다. 코러스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끝까지 지속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것일까.) 이혜영 배우가 분한 메디아의 강렬함이 연일 찬사를 받고 있는데, 무대 위의 메디아는 그저 “나쁜 여자” 그래서 “벌 받은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고 후회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알폴디는 메디아에게 속죄할 기회도, 악녀의 이미지도 빼앗아 버렸다. 메디아는 이기적인 여자, 그 이상도 아니기에 자식까지 죽이는 선택을 하고서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속죄할리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마차타고 유유히 떠나는 메디아가 두려웠던 것일까?

  복수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옳고, 메디아의 복수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정영도 메디아처럼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영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상상하고, 헤아려야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택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아름답게 그려졌다. 복수를 완성한 그들은 선을 이루었고, 이제 자신을 위해 목숨 내어 준 사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정영은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내에게 속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아의 복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매력적이지만, 신경질적이고, 악한 여자.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자일 뿐이었다. 결국 메디아는 죽음으로 처벌당해야 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홀로 남은 이아손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이런 끔찍한 결말을 맺게 된 것에 대해 후회할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게 될까? 그렇다면 알폴디는 복수의 (그나마) 고귀한 면을 이아손에게만 준 것이다. 알폴디의 결말은 어쩌면 새로워보이지만, 악녀 메디아를 처벌하는 오래된 남성적 위계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과, 불편함을 남긴다.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이토록 망가진 메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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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메데이아(a.k.a. 메데아, 메디아)가 이아손의 손에 죽는 게 현실적이겠지요. 맞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해요. 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냐고요. 그런데 현실적인 것을 찾으려면 애당초 2500년 전 이야기를 뭐하러 다시 해요? 게다가 요즘 국립극단은 지금 이곳의 현실, 여기 우리 사는 얘기 하는 거 불편해하잖아요? 아리스토파네스로 입장 곤란해진 거 알아요. 그렇다고 에우리피데스를 가져와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요? 쫄아 있는 게 너무 보이잖아요. 아직도 쫄아 있으면 어떡해요. 블랙리스트 다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당신이 마지 못해서 그런 거라 누가 믿겠어요? 정치극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굳이 리얼한 치정극을 할 건 또 뭐에요? 리얼한 거 좋지요. 그런데 현실을 외면하면서 리얼하려니 스텝이 꼬이잖아요. 아무리 한남충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라지만 이아손 같은 찌질남이 메데이아를 죽이는 꼴을 왜 무대에서 봐야할까요? 메데이아가 자기 아이들을 칼로 찌르고 피 흘리며 죽는 건 또 왜 봐야 하나요? 여혐이라 욕먹는 에우리피데스도 그건 안 했다고요.

아녜요. 메데이아가 살아서 떠나는 게 더 슬프잖아요. 그게 진짜 비극이잖아요. 그래야 살아 있는 동안 아이들을 죽인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아이게우스에게서 낳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기가 죽인 아이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메데이아 스스로 그러잖아요. 그날 하루만 잊고 평생 울어야 한다고요. 자기도 감당 못 할 잘못을 저지르고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고요. 해결되면 안 되는 고통이라고요. 살아있는 게 지옥이라고요. 그런데 한 날 한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냐고요. 아무리 황당해도 용수레 타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야 한다고요. 관객들이 좋아서 손뼉 치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투명 실린더는 괜찮고, 용수레는 왜 안되는데요?

이아손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선 안 돼요. 찌질한 놈이라 그럴 자격도 없는 데다가, 눈앞에서 새신부도 장인도 두 아들도 다 잃었잖아요. 그럼 그 모든 걸 복수할 기회도 잃어야죠. 그래야 아찔하잖아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볼 거 아녜요. 이아손에게 허락된 건 통곡이지 메데이아를 죽이는 손쉬운 분풀이가 아니에요. 뭐 잘했다고 이아손의 소망이 이뤄져야 하나요? 메데이아를 이토록 망가뜨리면 어쩌란 말이에요.

2016년 9월 14일 수요일

《2016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에 다녀와서

성지수


여름밤의 연극 잔치를 만나다

‘빨간 건물’을 찾아가는 길. 예매했던 공연의 시작은 30분이나 남았는데, 길을 건너기도 전에 음악과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급한 마음에 괜스레 신호등을 노려보다가 파란 불이 들어오자마자 뛰어가 ‘빨간 담벼락’의 구멍에 눈을 대 본다. 가야금 옆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한복차림의 여자와 그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보인다. 미니 야외극장! 도둑 관람을 계속 할까 하다가 가야금에 돛이 달려있는 것을 발견하곤 정문으로 달려간다. ‘이건 제대로 봐야 한다!’
  그렇게 들어선 국립극단 마당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극장들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에는 부대시설이나 빈 공간이었던 곳에 저마다의 이름을 주고 약간의 조명을 세워 여러 개의 ‘극장’을 만든 것이다. 각 극장에는 ‘객석’도 있었는데, 마당 한 가운데 큰 세트를 놓고 세워진 ‘작큰극장’에는 캐릭터 방석이 깔린 원기둥 모양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고, 등나무 아래 평상을 무대 삼은 ‘등나무극장’과, 담 사이 구멍으로 훔쳐볼 수 있었던 ‘느티나무극장’에는 층이 낮은 계단식 객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는, 극장 사이를 뛰어다니는, 주저앉아 블록놀이를 하는―하여간 자기 일에 매우 정신을 집중한―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저 지인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2016>을 만난 것이다.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은 어린이청소년극 축제로, 1인극 작품 개발과 어린이청소년극 배우의 창작 역량 강화, 지역 예술 활성화 등을 목표로 한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창작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작은극장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된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이다. 프로그램 참여자로 선발된 배우, 이야기꾼, 독립예술가, 그림책작가, 예술교육자 등이 워크숍을 통해 이 ‘잔치’를 준비한다고 한다. 올해에는 어린이연극인 작은극장 참가작 11작품, 청소년 대상 연극인 청소년작은극장 4작품과 자발적 창작모임인 ‘씨앗모임’의 6작품, 그림책 작가들의 8작품 등등이 국립극단 공간 곳곳을 채웠다. 해를 거듭하면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입소문이 퍼져, 많은 가족들이 찾는 잔치로 자리매김하였다.

‘축제다운’ 축제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친구도 도착하자마자 감탄사처럼 외쳤다. “여기 완전… 완전… 아비뇽이잖아!”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이 풍문으로나 주워들은 외국지명을 떠오르게 한 것은 그 자리가 “연극 축제”에 대한 특정한 기대들을 실현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을 통해 충족된 기대 중 하나는 다양한 공연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상에선 스쳐갔을 공간들 여기저기에서 많은 공연이 동시에 상연되었고, 각 공연은 판소리, 인형극, 가야금 등 저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자주 관람할 수 없었던 형태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며, 모두 무료였다. 입장료도 없이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짧게는 25분에서 길게는 50분 남짓 되는 여러 공연을 보러 다닐 수 있었다. 한 공연이 끝나면 다음 공연들 안내 피켓을 든 크루들이 관객들을 한줄기차로 세워 다음 공연의 ‘극장’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관객들은 여러 피켓 아래에서 다음엔 무엇을 볼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했다.
 (야외공연에 한해서는) 공연 중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이뿐 아니라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의무화되었던 ‘매너’들이 불필요해졌다. 그래서 아이들은 (눈은 공연자에게 고정시킨 채) 누워서 보기도 했고, 집에서 싸온 김밥 도시락을 먹으면서 보기도 했다. 한참 뛰어놀다 와서 공연의 중간부터 관람하기도 하고, 다른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공연예술을 만끽하고 있었다.

2016년 3월 9일 수요일

빛의 제국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는 직사각형의 테이블, 의자 8개, 소파 하나, 여성용 핸드백 하나, 스탠드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다. 커다란 스크린이 정면에 하나, 무대 오른쪽에 하나 설치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마이크가 두 개, 배우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연극의 원작인 <빛의 제국> 소설책이 여러 권, 종이와 연필도 있다. 배우들은 이미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데, 연필로 무언가를 쓰기도 하고, 서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며, 중간 중간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도 한다. 관객을 등지고 앉은 배우는 조용히 기타를 연주하며 흥얼거린다. 일찌감치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웅성거리며 공연에 대한 기대를 나누거나, 인사하는 일도 적었다. 나는 지금 그들이 배우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등장 인물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인물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관람시 유의사항을 안내해준다. 가까운 비상구로 탈출하라는 그 말이 심싱치 않아서 나도 모르게 비상구를 한 번 쳐다 보았다. 같은 옷을 맞추어 입은 두 남자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는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모두 두 남자를 응시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관습적인 연극이 아니라더니, 역시 암전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충돌들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는 140여분의 공연 내내 나는 여러 가지의 충돌들(혹은 혼란들)을 경험했다. 그 중 일부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의도한 것일테고, 어떤 것은 내가(김영하 작가를 좋아하고,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으며, 그래서 어떤 기대 지평을 구축한 내가) 만들어 낸 혼란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관객들도 명쾌하거나, 쉽게 이 작품을 관극하지 못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직후,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서로 작품이 이해되었는지 물었고, 예술가와의 대화(3월 6일 진행)에서도 관객들이 연출가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질문들은 “왜”, 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원작 소설 <빛의 제국>과 연극 <빛의 제국>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은 391페이지의 꽤 두꺼운 볼륨을 자랑한다. 아침 7시, 기영의 집에서 시작되어 다음 날 아침 7시 기영의 집 거실에서 끝이 난다. 10년간 소식이 없던 북에서 갑자기 송환 명령을 보내와 기영은 혼란스러운 24시간을 보내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 실체는 여간해서 포착되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는 더 혼란스러운 진실을 알게 된다. 그의 부인 마리와 딸 현미까지도 어제와는 매우 다른, 이상한 하루를 경험한다.
이상한 하루,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어떤 함정에 빠져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느낌,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똑같아 보이는, 그러나 많은 것이 달라진 새로운 하루가 어이없이 시작되던 아침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2006년 원작 소설을 읽고, 나는 우리 주변에 정말 간첩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물들어 권태를 느끼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신용카드와 전화 사용으로 나의 움직임이 손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렇게 긴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조각내게 되고, 어떤 장면들을 선택하게 된다. 프랑스인인 연출가는 분단 상황,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사랑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상황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신기하다고도 했다. 각색가와 연출, 배우가 읽은 <빛의 제국>은 내가 읽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작품의 흐름이나 의도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분단된 상황이 기영과 마리를 헤어지게 한다고 했지만, 그둘은 헤어질 수도 없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절망, 무력한 인간이 보내는 하루의 인상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사황은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상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장면들은 소설의 내용을 흥미롭게 재현했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촘촘한 맥락이 사라지고 그 일부만 끼어들어 그 재미를 모두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세금 무서운 줄 알라는 마리 아버지의 유언이나, 위 절제 수술을 해서 계속 먹어 줘야 한다는 정팀장의 대사같은 것은 더 웃음을 줄 수 있었을텐데, 서둘러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 의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같다.


여러가지 표현 양식들


이 작품에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극 초반에는 다소 혼란스럽고, 의아했다. 인물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과거를 회상하며 낭독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와 양식적인 연기가 혼재되어 있다. 기영과 마리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의 개인적인 ‘북한에 대한 기억과 체험’이 마이크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 전해지기도 한다. 영상도 빈번하게,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여러 표현 방식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각각의 표현 방식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열심히 메모를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밝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어떤 의도에 따라 분석하기 보다는, 서로 섞여 있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같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하루도, 북한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도, 원하는 대로 삶이 나아갈거라고, 하루 하루 똑같은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확실하지 않다는 것, 어느 순간에는 확실해 보이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너무 낯선 것이 삶이라는 것. 혼재된 표현 양식들의 의도를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런 다양한 층위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이, 우리의 하루도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영상과 무대


그래도 영상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자. <빛의 제국>에는 정말 많은 영상이 사용된다. 이것들은 배경이나 무대를 보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영상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이다. 극 초반 양치하는 김기영(지현준 분), 장마리(문소리 분)의 맨 얼굴, 마리의 담배 피는 모습, 마리와 고성욱 사이의 카톡 대화 장면 등은 마치 영화같다. 반면 무대 위의 연기는 (사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같은 영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주로 마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친구가 죽은 이야기, 자신의 가족 이야기 등을 건네고 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낭독은 영상에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영상 속에서 너무나 사실적으로 샤워를 하던 두 남자가 무대 위에서 양식적으로, 마치 제의에 참여하는 신도처럼 움직이며, 마리와의 쓰리썸 장면을 표현할 때도 어떤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서도) 이러한 느낌은 끝까지 계속된다. 영상 속에서는 그냥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던 선생님 소지현(양영미 분)이 무대 위에서 말을 시작하니, 어딘가 낯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로 보인다. 기영이 그녀의 말을 대신하며 그녀를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낯선 느낌은 마리와 기영의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폭발했다. 영상 속의 두 남녀는 당황하고, 절망하고, 답답해하고, 울고, 체념한다. 그러나 무대 앞쪽에 선 기영와 마리의 대화는 너무 건조하다. 마리는 지난 15년간, 기영이 바뀔 거라 생각하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서야 기영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이다. 영상 속의 그녀는 한숨도 쉬고, 울고 기영을 외면한다. 무대 위의 마리는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기영은 지워진 존재이니, 자신의 비밀도 담담하게 털어 놓을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북으로 가기 직전, 아내를 찾아와 마리가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라면서 목소리에 아무런 욕망을 담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남고 싶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해도, 북으로 가라는 아내의 말에도 그의 목소리는 건조할 뿐이다. 이 순간 기영은 울고 있었지만, 무대 가까이 앉은 관객이 아니고서야 그의 눈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상 속의 기영은 먼산을 바라보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무대 위의 기영와 마리는 가만히 서서, 최대한 건조한 체하며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모를만큼 아쉬운 장면이었다.
예술가와의 대화 때, 어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몰입할 수 없음을 당당히 이야기했고(많은 관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혹시 그렇게 장면을 연출한 이유를 물었다. 연출가는 자신의 의도에 대해 길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클로즈업과 같이 무대 앞쪽에 선 인물의 위치, 마지막 순간까지 담담할 수 밖에 없는 두 인물의 성격, 그래서 소리치고 화내는 식의 감정적 표현을 지양한 이유 등, 말로 들은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으나, 무대 위에서 그것이 정말 표현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연출의 의도를 느꼈을까) 소리치거나 따귀를 때리지 않는다 해도, 감정이 섞인 목소리의 냉담함, 애절함은 느껴질 것이라고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관객의 부질없는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 그 이후


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기영이 집으로 들어가 누운 뒤, 무대와 객석 조명이 모두 꺼졌다. 아연실색하는 마리의 표정을 기대했으나, 그 표정과 감정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졌다. 다른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서 밝힌 것처럼 조금 혼란스러웠고, 당황했다. 프로그램북을 꺼내 뒤적였는데, 어떤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공연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친절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내 선입견때문일지 모른다. “연극은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 사이에 놓여 있는 모호한 공간(프로그램북, 15쪽)”이라고 말한 연출이 모호한 연극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많은 이야기와 질문이 떠오르도록 관객에게 여러 방면으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서로 다른 느낌과 결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충분히 마음을 열고 다른 이야기로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펜을 내려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관극하고 싶다.

2014년 5월 14일 수요일

우리들의 <알리바이 연대기>

by 산책



연극이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고, 나아가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수 있고, 또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관객들이 그것을 불편해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연극을 멀리하거나 싫어 하지 않을까 때때로 걱정한다. 연극이 정말 좋고, 연극 안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편한 문제들을 다루는 작품에 대해서는 쉽게 입을 떼기 어렵다. 연극은 비싸니까, 어려우니까, 그래서 좋아하지 않을테니까. 그래서 나는 극장에 주로 혼자 간다. 이런 것을 알리바이라고 해야 할까? 알리바이라고 할 만큼, 잘못인 걸까?

  <알리바이 연대기>는 나와 다른 공부를 하는, 다른 관심을 가진 10명과 관극했다. 대부분 관극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가, 작년에 여러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더니 기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소개한 나로서는 이 작품이 정말 좋은지, 모두가 좋아할 만한 작품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하게 되었고, 조금은 가슴을 졸이며 극장에 갔다. 2시간 30여분의 긴 공연 시간에, 시국이 시국인 만큼 마음을 언짢게 할지 모르는 내용 때문에 공연 중에도 때때로 마음이 불편했고, 공연이 끝나고는 이 작품에 대해서 (시키지도 않았고,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설명과 변명을 하고 싶었고, 조금 그렇게 했다. 나의 걱정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린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게 들려주고, 보내준 그들의 감상을 최소한의 편집을 거쳐 함께 싣고자 한다.

  1998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193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2014년에서 끝난다. 그러나 무대 위에는 현재의 나(재엽)와 그 당시의 아버지 뿐 아니라, 그 과거를 회상하는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존재한다. 이 인물들은 무대 위의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해방 당시 어린 아이였던 아버지와, 그 시간을 회상하는 아버지, 그것을 다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재엽까지 우리는 동시에 세 가지 시간, 세 가지 시점을 만나게 된다. 지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아버지에 의해 회상되면서 과거가 되고, 재엽에 의해 다시 전달되면서 과거 완료가 된다. 이렇게 겹겹히 쌓인 시간은 그들의 역사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대구에 살아 극중 지명들이 친근하며, 역사를 공부했고, 지금은 심리학을 공부하는 B는 이렇게 말했다.

인물에 대한 초점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세대별로 이 작품을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젋은층에게는 이전 세대들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그려보는 기회가, 노년층에게는 자신의 지난 세울, 커다란 꼭지들을 되짚어 보며 순간 순간 자신의 모습들을 회상하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해방, 한국 전쟁, 4,19, 5,18, 1990년대까지 이어져 온 학생 운동은 나를 비롯한 젊은 이들에게는 지나간 과거, 글로 배운 과거이다. 부끄러운 과거도, 가슴 아픈 사건도 우리에게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은 분명 이 작품을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옆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은 어렸을 때, 광화문 근처에 사셨고, 김재철이 다니는 거며, 시위 장면들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거리를 둘 수 없이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보다 훨씬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고, 재엽의 아버지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힘겹게 고백하는 자신의 알리바이 역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이제껏 정치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다소 냉소적이었다는 선생님의 말이 쉬이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알리바이에 대해 H는 죄를 지은 사람과 우리를,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만드는 것 같다고, 일부, 나쁜 사람들만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P는 아버지의 인생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알리바이 연대기임을 생각했고, 삶의 사실을 은폐하는 알리바이가 우리 삶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P의 의견에 동의한다. 아버지의 고백이 알리바이인 것은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개인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며, 직접 경험하지 않은 우리조차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또한 아버지의 연대기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건들을 떠 올리게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생각했던 나의 알리바이들을 곱씹게 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라지 않은 K는 무대 위로 소환되는 역사적인 사건과 배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와 역사의 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선생님보다, 그 시대를 배워서 아는 우리들보다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덕분에 그들의 감정과 이야기 전체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에 선생님께서는 남명렬 배우가 유려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인상깊었다는 논평을 하셨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타는 자전거는 정말로 매끄럽고 우아하게 객석과 무대를 가로 질렀다. 이 자전거 장면은 K와 H에게는 더욱 특별한 것이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객석 중간까지 들어 오는 배우를 보고 그들은 조금 놀랐고, 무대를 한층 가깝게 느꼈으며, 무엇보다 무대와 함께 호흡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무척 희미하거나, 극단 뛰다의 <바후차라마타>처럼 객석에서 무대로 내려오는 파격적인(?) 공연들을 소개해주고 싶다. 이런 방식이 이제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연극은 아직 대중적인 예술이 아니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재엽의 아버지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여러번 되뇌었다. 이 땅에서는 뿌리 내릴 수 없는 것처럼 외국 책을 사 모으고, 아들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사람 많은 곳에 서라고 가르쳐 왔다. 우리는 이 의미심장한 충고도, 침묵으로 숨어버린 사람들도 비난할 수 없다. C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다수”이며, 우리 역시 그 “다수”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했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고 말해준 P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 “어떻게”가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버지가 침묵해온 시간들은 애지중지 사랑했던 막내 아들에게 힘겹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 C는 일본에서 태어나셨다는 외할아버지가 재엽의 아버지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홀로 상경해 대학을 다닌 75학번 내 아버지를 떠 올렸다. 아버지가 살아낸 그 시간은 어땠을까.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고백할까. 후에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고백하게 될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도 소용없는 것처럼, 아버지를 따라 자전거를 탄 재엽의 모습은 우리가 그 알라비아의 고리를 쉽게 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마지막 순간 관객을 바라보는 부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각자의 연대기를 되돌아 보라는 요청으로 느껴졌다. 극장을 나오면서 J는 이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사회를 건네줄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알리바이 연대기는 재엽 부자의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극장을 나온 우리는 마음이 무거웠고,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미안했다. 그러나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마음에 남은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공동체적 경험이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났으며, 앞으로 조금은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

2014년 5월 12일 월요일

5월 장바구니

by 산책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았고,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마음의 생채기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꼬박 일주일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쉽게 웃고, 떠들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5월의 장바구니도 무척 늦었습니다. 기다리시던 독자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4월에 예매해 둔 <노래하는 샤일록>을 겨우 보고 왔습니다. 도무지 웃고 싶지 않았고, “배”를 언급할 때마다 가슴을 꼭 여며야 했습니다. 공연도, 글도 다 재미없다고,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뷰티플 민트 라이트가 강제로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술은 대체 뭘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노래를 하고, 듣고, 공연을 하고 보는 것은 (강제로 취소 되어야 할만큼) 부적절한 일인걸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연극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굳게 믿습니다. 때로는 위로를 받을 것이고, 때로는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기력감을 떨치고, 힘을 내서 5월 공연들을 예매했습니다. 공교롭게도 5월에 고른 작품들은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우리 사회의 이야기들입니다.



아버지 역의 남명렬 배우와 소년 재엽 및 재진 역을 맡은 지춘성 배우 (2014 서울연극제 연기상 수상)
사진제공: 국립극단

<알리바이 연대기>, 4월 25일 – 5월 11일, 국립극단 백성희 장민호 극장, 김재엽 작, 연출 

2013년에 제50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 연기상 2013 제6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 무대예술상 2013상을 수상했고, 한국 연극평론가협회 공연 베스트 3, 월간 한국 연극 공연베스트 7로 선정되었습니다. 수상 내역, 선정 순위와 관계없이 2014년 지금부터 1930여년까지 우리 사회의 중요했던 사건들을 아버지의 삶, 형과 나의 삶과 연결시키며 새로운 방식으로 되돌아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장바구니가 게시될 때는 이미 막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지만, 아직 못 보신 분이 있다면 이번 가을에 열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도 공연된다고 하니 조금 기다리시면 다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알리바이 연대기> 리뷰 보기




<황금용>, 5월 9일 – 18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윤광진 연출 

이 작품 역시 2013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최우수작품상, 연출상',  김상렬 연극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베스트3', 한국연극지 선정 '베스트7', 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주위의 추천을 받아 예매하게 되었습니다. 극중 황금용은 식당 이름입니다. 이 식당은 불법체류자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정당한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하냐, 그것도 아니랍니다. 이주민과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을 48개의 장면으로 보여주며, 배우들은 여자, 남자 뿐 아니라 곤충으로도 분한다고 합니다. 독일 극작가의 작품이지만 단일 민족을 자랑해 오던 우리 나라도 더 이상 이주민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점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푸르른 날에>, 4월 26일- 6월 8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 센터, 고선웅 연출 

이 작품은 작년에 이미 관극했습니다. 작년에도 많은 이들에게 소개했고, 올해 역시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한 번 더 보려고 합니다. 5. 18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시종일관 무겁거나, 윤리적인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삶이 역사 속에서, 또 사회 안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것, 그러한 질곡을 빗겨가지 못한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화해가 지금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푸르른 날에>를 다룬 이전 리뷰들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에스티의 첫날밤에] 노래하는 샤일록

450년만의 3색 만남 II - 노래하는 샤일록

공연기간 2014년 4월 5일(토)-20일(일)
화-금 20시, 토/일 15시, 월 쉼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극본/연출 정의신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지난 달 <맥베스>에 이어 이번에는 <베니스의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국내 수용 초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특히나 이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샤일록은 지금도 거의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사실 나머지 인물들의 이름은 상당히 까다롭다: 안토니오, 밧사니오, 포샤, 로렌조, 제시카 정도가 그나마 기억할만 하고 나머지 이름들―그라시아노, 사리니오, 사루니오, 네릿사 (프로그램에 따라 표기)―은 발음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라치아노Gratiano 라든지, 레오나르도Leonardo 같은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베네치아라는 점과 코미디라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낸다. 아마 지금 우리식으로 하면 인물의 이름이 카푸치노, 마키아토 정도일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하면 샤일록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누가 샤일록이 제목에서 말하는 바로 그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말하더라도 이상한 점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그만큼 비록, 프로그램에서 강태경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이고,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에서 샤일록이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말일테다.



3색 만남의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 아닌 바람에 서두가 길어졌다. 정의신 연출은 이번 공연의 제목을 <노래하는 샤일록>이라 이름 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제목은 공연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 줄거리는 원작을 따라가지만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 장면은 뮤지컬에 준할 정도로 노래와 음악 사용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이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수정하기 위해 극작가이기도 한 연출가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고쳐쓰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제시카와 로렌조의 서브 플롯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로렌조와 함께 달아났던 제시카는 로렌조의 망나니짓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원작에서 샤일록이 딸의 도주보다 재산을 잃은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면 이번 공연은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로 그려진다. 심지어 돈 대신 안토니오의 살점을 떼내는 일에 있어서도 원작에서는 안토니오의 반유대주의적 고리대금업 방해 행위에 대한 앙심을 동기로 설정했다면, 정의신의 샤일록에게 있어 그의 살을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망가진 딸에 대한 복수로 그려진다. 반면 로렌조는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샤일록의 인간미가 부각되는 만큼 로렌조는 나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신 연출은 인터뷰에서 안토니오의 우울증을 설명하기 위해 동성애를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다(25). 동성애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재현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안토니오가 밧사니오를 비롯한 친구들이 보이는 유대인 혐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에게 연민을 보이는 태도에서 그 또한 또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임을 표명한다. 포샤 또한 죽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언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삶도 사랑도 누리지 못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희극이 이렇게 진지해도 되는 걸까? "희극적 카타르시스"를 바라고 온 관객들이 결말에 당황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의신은 상관 없다며, 오히려 관객이 당황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24). 어쩌면 정의신의 이름을 보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이 정도로 당황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가 이 문제에 무감각하다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대신 이 진지함과 함께 공연은 시종일관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어릿광대 란슬롯은 원작의 재담 대신 슬랩스틱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여기에 안토니오의 네 친구들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정서적 흐름은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걸로 느껴지는데, 그만큼 그 두 장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모로코는 보라색 의상을 입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모로코 군주에 대해서만 "위아래로 흰옷을 입은 황갈색의 무어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Enter Morochus a tawnie Moore all in white,"   

그중에서도 단연 큰 웃음을 선사하는 인물은 구도균이 연기한 그라시아노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대 위에 구현된 베니스의 지형 지물 (다리와 곤돌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또한 전반부에서 연기했던 모로코대공의 강렬한 이미지가 후반부의 그라시아노에게 겹쳐짐으로써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 하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그의 연기만으로도 세 시간이 즐거우리라. 하지만 모로코대공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가장 성공적이기에 곧바로 이번 공연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샤일록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과 모로코대공에 대한 웃음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구도윤의 뱃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검게 칠한 몸 색깔과 손에 쥔 언월도, 수건으로 대충 말아 올린 터번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반아랍 정서를 건드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배 나온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과연 도덕적으로 완벽한 웃음이란 가능한 것일까? ㉦

덧붙임
벨몬트 포샤의 집으로 설정된 공간에 등장하는 촛대는 그 형태가 유대인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를 강하게 시사한다. 혹시나 싶어 관계자에게 포샤를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인지 물어보았으나,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애초 샤일록의 집에 사용될 것으로 만들어졌다가 리허설 과정에서 새주인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공연 사진 더보기: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541617609290750.1073741830.472276802891498&type=3&uploaded=26


2014년 3월 8일 토요일

450년만의 3색 만남 1 - <맥베스>

국립극단 <맥베스>

2014년 3월 8일(토)~23일(일)
명동예술극장
공연문의 1688-5966 (국립극단)

에스티의 첫날밤에 (프레스 리허설)


(재)국립극단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 세 편을 연속해서 무대에 올린다. <맥베스>는 그 선두 주자로 3월 8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병훈 연출은 텍스트에 직접적인 변형이나 가공없이 원작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거짓말 연기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말콤과 맥더프의 대화 장면이 생략된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유혹"을 중심 키워드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혹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세 마녀들은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과 짙은 화장을 한 팜므 파탈 무리로 그려진다. 



물론 맥베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여성은 언제나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이다. 지난 겨울 국립극단에서 해경궁홍씨 역을 맡았던 김소희가 이번에는 사도세자보다 더 무서운 남편을 둔 여성을 연기한다. 사실 이 역할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연출의 말을 통해 이 공연이 어떤 방향을 선택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맥베스 부부는]사랑하는 ... 사이지만 아이가 없음으로 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기 어렵다. 관계 유지를 위해 아이를 대체할 조건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남편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쟁터에 나가있는데다 아이가 없으니 맥베스 부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무기력과 외로움에 젖어있던 맥베스 부인에게 마녀의 유혹은 재밌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일순간 불이 붙을 수밖에 없다. 남편에 대한 맥베스 부인의 사랑은 강력할수록 파괴력도 크다. ...악행을 저지르던 맥베스 부인은 왜 두려워졌을까.  저 깊은 곳에서 왕좌를 얻었으나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이다. 남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철저히 혼자로 남게 되는 그 고적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내 "연출 인터뷰" p.29)

글래머러스한 여인을 마녀로 설정하고, 아이가 없는 무기력한 여인이 왕을 죽이는 모험을 감행한다고 해서 이번 공연이 연출가의 여성혐오가 두드러진다고 말하지는 말자. (작가가 이미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비극은 온전히 맥베스가 책임질 일이지 마녀나 부인 때문에 파멸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혹"이 아니라 "핑계"라 말하고 싶다.) 물론 덩컨 왕을 시해하기까지, 그리고 그 직후까지도 맥베스는 갈등하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맥베스는 아주 능청스러운 연기를 거뜬히 해내고 왕좌에 오른다. 박해수가 연기한 맥베스는 이 장면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이후로 맥베스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누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양심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맥베스는 잠을 대가로 내놓음으로써 범인들의 도덕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까지 등장하던 침대는 이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맥베스의 자리는 이제 침대가 아니라 왕좌로 고정된다.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자리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소품으로 사용되는 검이나 방패, 그리고 타공된 철제 패널로 만든 스크린 등이 관객들에게 무게감을 전달한다.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검이 상당히 무거워 벌써부터 한쪽 팔만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고 한다.) 철제 스크린에는 이미지나 영상이 투사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버남 숲 또한 철제 방패 위에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얼핏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요즘 시대에 영상을 사용하는 게 어느 누군가의 독점적인 아이디어일 수는 없듯이, 그것이 어떤 면에 투사되느냐 또한 누가 먼저인지를 굳이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컴의 병사들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대를 연상하게 한다. 시국에 민감한 관객은 이 장면이나 몇몇 대사들에서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접점을 찾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노골적이지 못한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갑갑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류의 보편적 유산인 셰익스피어를 보러 왔는데, 극장안에서마저 바깥의 지리멸렬을 떠올려야 하는 게 피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정치 싸움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맥베스>인 것을. ㉦


드라마인 페이스북 페이지로 오시면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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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혜경궁 홍씨>

by 서유미

<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프리뷰: 이윤택의 《혜경궁 홍씨》

by 에스티

이윤택 연출이 직접 쓰고 연출한 <혜경궁 홍씨>가 12월 14일부터 29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됩니다.

이윤택 연출과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김소희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 60대 노인에서 10세 소녀까지 다양한 모습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영조,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는 이 시기 는 TV 드라마 소재로도 많이 사용될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토대로 했다고 하며, 한 여인의 관점에서 궁중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윤택의 팬이라면 기대해도 좋은 부분은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대사에서부터 인물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극작 방식은 <문제적 인간, 연산>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만합니다. 더불어 첫 장면에서 아들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서로의 입장 차이를 팽팽한 대화를 통해 주고받는 방식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만, 같이 본 다른 기자들은 좀 지루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옥집의 내실 삼면으로 된 무대는 회전무대 위에 올려져 원활한 장면 전환을 돕고 있습니다. 작고 좁은 극장에서 수동으로 돌아가는 회전 무대는 그것만으로도 보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나무와 창호지로 된 무대는 한옥의 느낌이 물씬 나는데, 문득 이 나무는 어느 나라 나무를 사용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극에 등장하는 영조의 모습은 매우 독단적인 데가 없지 않은데 그 모습이 최근 북한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극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몇몇 대사들이 요즘 시국에 맞닿아 공명하는 지점도 보입니다.

우리 전통의 소리와 몸짓 또한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로 적절해 보입니다. 무대 공간 위에 악사들의 연주 공간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백장 극장의 적은 객석으로 인해 표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무엇보다 아쉽습니다.

공연문의 국립극단 1688-5966 / www.nt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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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그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다: 연극 <노란달> (부제: 레일라와 리의 발라드)

by 서유미

장소 / 백성희장민호 극장
원작 / 데이비드 그레이그 David Greig, <Yellow Moon>
연출 / 토니 그래함 Tony Graham 
극단 / 국립극단

1895년 크리스마스, 미국 미주리 주에서 '수사슴' 리 쉘튼Lee Shelton이 빌리 리옹스Billy Lyons을 살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Stagger Lee’는 이 사건의 내용을 가사로 옮긴 미국 포크송이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50년대 말 오랜 기간 빌보드 차트에 머무른 로이드 프라이스Lloyd Price의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연극 <노란 달>은 이 노래와 이를 배경으로 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극은, 굉장히 다르지만 동시에 굉장히 비슷한 10대 소년과 소녀의, 일종의 여행기이다. 아버지 없이, 알코올 중독의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리.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하며 진짜 '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레일라. 둘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던 그들은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상과의 소통 불화라는 어떠한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 그러던 어느 밤, 그 사건이 일어난다. 우연히 만난 둘. 때마침 리는 엄마의 남자친구 빌리와 언쟁을 벌이게 되고, 그가 자신의 모자를 뺏으려 들자 그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을을 떠나게 된, 아니 떠날 수밖에 없었던 리와, 그와의 동행 길을 선택한 레일라의 여정이 시작된다.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무겁고, 삐딱한 사회극 - 바람이 쌩쌩 불던 날, 극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by 산책

(이번 글은 다소 감정적인, 또는 개인적인 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은 5편,  11월은 4편의 연극을 예매했다. 한정된 시간과 돈을 고려해 고른 작품들이었다. 극장에 가는 것은 내게 공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놀이”이기 때문에 꽤 고심해서 작품을 고르게 된다. 그런데, 11월에 예약한 첫 공연에 나는 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에 피곤했고, 방바닥은 알맞게 뜨끈했으며, 곧 무한도전(자유로 가요제 마지막 편 – 완성된 노래와 그들의 퍼포먼스가 너무 궁금했다)이 할 시간이었다. 시간을 흘끔거리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앉았다 일어섰다 했지만 결국 나는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보러 가지 않았던 작품은, 막을 내렸다.

왜, 돈을 내고, 작품을 예매하고도,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극장에 가지 않았나. 여러 모로,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누구를 향한 미안한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 피곤했다.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웃기기 참 힘들겠지만, 웃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 작, <구름> , 남인우 연출, 남인우, 김민승 공동 극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by 산책

화창한 휴일 오후, 보조석까지 놓인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좋은 휴일에 아리스토파네스를 보러 왔을까, 조금 의아했다. <구름>은 2500년 전의, 그리스 희극인데다가(작가의 말 처럼 “비극도 아니고 희극”), 전작인 <개구리>는 이런 저런 말도 참 많았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연은 쉽게 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티켓이라도 선물해 주면 모를까, 도대체 누구에게 자기 돈 내고 이런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야 할 지,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날이 좋은 휴일 오후, 애써 햇빛을 즐기며 극장 마당에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온다. 아니,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렇게 유명한가? 이 사람들은 다 자기 돈 내고 스스로 극장을 찾은 유료 관객들인가? 그러는 나는 여기 왜, 혼자 앉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