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2일 수요일

To be or not to be ‘Hamlet’, that is the question!

글_김신록

안녕하세요. 배우 김신록입니다. 지난 8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 연극 <비평가>에서, 여자배우인 저는 남자 옷을 입고 ‘스카르파’라는 남자작가를 연기했습니다. 지적이고 밀도 높은 2인극의 리딩 캐릭터를 연습하면서는 ‘내 깜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공연이 올라가고 관객을 만나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인물을 앞으로도 연기하고 싶고, 할 수 있겠다’는 은근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작가인 ‘스카르파’는 인정욕구, 정복욕, 승부욕, 명예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관객들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 마지막 한 명의 관객인 비평가까지 녹다운 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물론 그 욕구의 저변에는 사랑받고 싶은 연약한 마음, 낮은 자존감 등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으나, 겉으로 보기에 그는 오만하고 도발적입니다.

스카르파가 짧게 구현하는 ‘권투경기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저는 잠깐 동안 권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관장님은 제게 ‘성격이 남자 같아서 우직하게 시키는 대로 해내니까 실력이 빨리 는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제가 기대 혹은 편견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 ‘남자같다’고 말합니다.

공연기간 중 지인들이 남성인물을 연기하는 어려움에 대해 묻곤 했는데, 저는 스카르파가 ‘남성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점은 몇몇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없었습니다. 사실, 10년 동안 절필하다시피하며 스승에게 인정받는 걸작을 쓰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스카르파는 저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는 억울함이나 패배감, 이겨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주는 불안과 고독을 알고 있지 않나요? 제 성격이 특별히 ‘남자 같아서’ 스카르파를 이해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연습 때 ‘남성인물을 표현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문제였지요. 부담감을 안고 첫 공연을 올렸을 때, 공연을 본 선배가 ‘남자처럼 하려고 하지 말고 작가처럼 해봐!’라고 조언해 줬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이 인물의 핵심은 남자라는 게 아니라 작가라는 거지!’ 그 날 이후 실체 없는 ‘남자처럼 연기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많은 것이 명쾌해졌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작가’를 연기하는 것이 중요했던 겁니다.

<비평가> 공연 내내 여자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과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여러 SNS에 올라 온 후기와 촌평들을 보면 관객들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화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그동안 왜 굳이 남성인물들이 해왔을까?’하는 의문이 생긴 겁니다. 저 역시 마치 개안하듯, ‘그렇지, 내가 왜 그동안 햄릿이 아니라 오필리어를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신선한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평들 중에는 ‘여자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하면서 극이 새로운 관점에서 완성되었다’는 내용도 다수 있었습니다. 관객들의 해석을 접하면서, 어쩌면 이런 방식의 젠더 프리 캐스팅이 고전작품, 혹은 기존의 전반적인 드라마 연극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동시대적 말 걸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직관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평가> 공연을 통해, 배우와 인물 간의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창작자의 텍스트 해석과 구현, 관객의 해석과 감상에 있어 다층적 관점의 다양한 소통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카르파는 마음의 스승이자 혹독한 비평가인 볼로디아의 마음에 드는 작품을 쓰려다 실패하고, 그에게 대항하는 작품을 쓰려했지만, 결국 극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이 역시 그에게 얽매이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수동적으로 쓰여 진 희곡 속 여성인물들을 조금이라도 더 주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체적인 오필리어’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 ‘인간 햄릿’을 연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배우로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무대에서 발화해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데이지 꽃, 제비꽃, 당신에게 드릴게요’라는 말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데이지 꽃이나 제비꽃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권이 있느냐 하는 문제겠지요. 무대 위에서 이 선택권이 발현될 때 관객들은 또 설레는 마음으로 여자배우가 발화하는 ‘사느냐 죽느냐’에, 혹은 남자배우가 발화하는 ‘데이지 꽃, 제비꽃’에 존재론적인 사유와 감상을 더해 줄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Hamlet’, that is the question!
이 시대에 여자배우가 햄릿이 될 수 있을까 없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이 시대에 여자배우가 오이디푸스가, 리처드3세가, 파우스트가, 바냐가, 쟝이, 프락터가, 에스트라공이, 알런이, 살리에리가, 쥬코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존재론적인 질문이지요!

<비평가>에서 스카르파를 연기한 김신록 배우
사진 더보기 https://photos.app.goo.gl/WPjvkdtUMUk3pN1B6


<비평가> 프로그램북에 수록된 김신록 배우의 글
(위 앨범 링크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2018년 8월 9일 목요일

a postscript to “애도의 연극, 연극적 애도”

임승태


사계절 연극제에서 만났던 <임영준 햄릿>을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내 느낌엔 내용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연출의 말에 따르면 2분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이라 한다. 어쩌면 리뷰를 쓴 이후에 다시 보는 것이라 특정 장면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몇 부분이 수정된 것도 발견했다. 그 변화에 내 글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쓰기보다 지난 해 <인디언 밥>에 썼던 글(http://indienbob.tistory.com/1033)을 약간 다듬어 2018년 공연의 리뷰로 대신한다. 다만 한 해가 지나면서 지하철 효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이 파악하는 속도도 느려진 게 아닌가라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욕심 같아서는 임영준이 5년에 한번쯤은 이 연극을 다시 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자칭 ‘대배우’ 임영준이 진정한 대배우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들의 팬들이 함께 보고 축하하며, 또한 우리 사회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대와 객석이 함께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

<햄릿>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는 사실은 그 유명한 극중극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다만 메타극(metatheatre)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라이오넬 에이블(Lionel Abel)이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던 한 가지 내용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햄릿은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극중 인물 스스로 ‘세상은 연극’(theatrum mundi)이라는 인식 하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적극적으로 플롯을 꾸미고 다른 인물을 조종하고 움직인다. 내 생각엔 바로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햄릿>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연극인들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연극적 실험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햄릿>은 극중 인물도, 그것을 공연하는 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극작가 의식에 충만해야 하는 작품인 것이다. 

<임영준 햄릿>은 공연 중 반복되는 여름 노래 메들리만큼이나 밝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과장된 쾌활함 사이에는 데뷔 ‘11년차’ 연극배우 임영준의 자기 연민이 언뜻언뜻 베어난다. 무려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준은 관객이 기대할 법한 연극을 시작하는 대신 자기 얘기, 그중에서도 자기가 해왔던 연극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낸다. 하지만 정작 연습할 때 입었다가 무대 의상이 되었다는,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하기 힘든 쫄 반바지 하나 입고 있는 배우의 행색은 우습고 또 서글프다. 근육과 살이 떨리고, 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를 튀기며 자신의 지난 10년(2017년 기준으로 10년이지만, 지난 1년간의 공연 내역이 추가되지는 않았다)을 되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배역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배우를, 심지어 그의 공연을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몰라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번 각인하면 잊기 어려운 배우가 또한 임영준이라는 것 또한 나는 지난 1년간 경험했다.)

<햄릿>은 지극히 가족극이기도 한만큼 <임영준 햄릿>에 배우의 부모님이 (영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등장은 그토록 당당하던 임영준을 한순간에 조그맣게 만든다. 선왕의 유령이 복수를 재촉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왕자처럼 임영준은 허상에 불과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날 때 욕조 뒤로 숨는다. (2017년 공연에서는 공간소극장의 구조적 이점을 살려 ‘쥐구멍’같은 공간으로 잘도 숨어 들어갔다.) 흥미로운 건 이 상황이 계획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반응을 보며 관객도 적잖이 긴장하게 된다는 점인데, 그건 아마도 관객 다수를 차지한 임영준의 또래들이 비슷한 심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변변한 자리 없이 제 앞가림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머지않아 TV에 나오는 성공한 배우가 되겠다는 임영준의 다짐을 들으며 관객들은 TV라는 말을 대신할 각자의 단어를 속으로 되새긴다. (극장이 넓어져서인지, 관객 구성이 달라져서인지 전년도 만큼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관객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어쩌면 그 원인을 배우에게서 찾을 수도 있다. 마침 오늘 공연에는 그의 부모님이 객석에서 ‘직관’하고 계셨다.)

아무튼 이 연극은 배우 임영준에 대해, 그가 해온 연극에 대해 말하며 <햄릿>의 메타극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적잖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만 80분을 채웠다면 그의 열성 팬이나 친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객이 끝까지 공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라는 희곡에 이런 대사가 있다. “연극에 대한 연극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재미있습니다.” 제작팀의 지인이 아닌 이상 이 소규모 연극을 보러 올 정도의 관객은 이미 연극에 대한 애정 혹은 애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무대에서 되풀이되는 연민의 정서가 특별할 건 없다. 모든 연민이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배우로 살기의 고됨만 있었다면 이 작품은 임영준 본인이 공연 중에 언급하듯 “제목만 햄릿”이라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영준의 다재다능함을 한껏 보여준 다음 하수민, 김정 두 연출가는 애도라는 중요한 주제를 적절히 등장시킨다. 애도에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2014년 이후의 한국 <햄릿>의 주된 흐름이다. 우리는 더 이상 라깡의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 작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이라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 복수를 실행하지 못하고 끝까지 괴로워하는 햄릿의 말과 행동은 비평가들이 오래도록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와 그로인한 막대한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이 인물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 제작된 <햄릿>은, 예컨대 김현탁의 <망루의 햄릿>과 이성열의 <햄릿아비>와 같이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인물의 슬픔을 종종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병치시켰다. 비록 얀 코트(Jan Kott)가 이 말을 하고도 반백년이 넘게 흐르긴 했지만, 세월호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비로소 우리의 “동시대인”이 되었으며, 애도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대상을 향한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유령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기억하고 애도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으라고 요청한다.

무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임영준은 “배고프다”란 말과 함께 컵라면 한 사발을 비운다. 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으나, 앞선 쾌활함이 과장된 것임을 감지했다면 이제 드디어 나올 게 나온다는 느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픈 예술가의 식상한 상징일 수도 있었던 컵라면 장면은 전동차 효과음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십대 정비사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부정적 지표에서는 여전히 OECD 으뜸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이기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1997년생이었던 김 군의 유품 가방에 들어 있었던 컵라면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임영준이 컵라면을 먹는 행위는 자신의 배고픔을 드러내기보다 김 군이 먹지 못한 컵라면을 대신 먹는 하나의 제의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야 말로 배우의 본분이거니와, 그 순간 임영준이 햄릿을 연기하는 목적이 단순히 모든 남자 배우의 로망이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죽음에 있음이 드러난다. 개인적 차원의 살풀이로 시작한 이 연극은 어느덧 사회적 차원의 씻김굿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일까. 임영준, 그리고 김정, 하수민 두 연출가는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이 보기엔 텍스트를 띄엄띄엄 읽고 A급 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저질 B급 코드를 총동원해 공연을 만든 듯 보일지 몰라도 실은 꽤나 성실한 모범생에 더 가깝다. (공연장을 나가며 나는 무대 바닥에 결코 가볍지 않은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의 첫인상은 대사를 이곳저곳에서 마구잡이로 발췌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내 햄릿의 주요 대사가 조목조목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유명한 제4독백이 빠질 수 없다. 임영준은 오디션을 보는 듯 여러 가지로 연기 톤을 바꿔가며 이 독백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낭송한다. 그중에서도 햄릿이 단도를 꺼내들기 직전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왜 <햄릿>이 지금 여기서 공연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별 오디션은 번번이 이 대사 시작 부분에서 멈추는데 이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아래 대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그 누가 견디겠는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폭군의 횡포를, 가진 자의 오만함을,
실연의 아픔을, 법의 더딤을,
관리의 교만을, 유덕한 사람이
무지렁이들에게 받아야 하는 모욕을.
이 단도 한 자루면 자신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부조리는 왕자라는 지위에서 쉽게 되뇔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차라리 백성을 개(돼지)로 여기는 거트루드가 그때나 지금이나 더 현실적이다. 일단 왕자가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면 연극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간접 경험해서라고 해두자. 중요한 건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 당시의 관객도 4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관객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임영준 햄릿>이 공연된 2017년, 그리고 2018년 여름에 이 대사는 구체적으로 구의역 김 군의 이미지로 구체화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갑질, 촛불을 탱크로 막으려 했던 계획, 약자에게만 엄격한 법 따위를 떠올리게 한다.

위 대사는 공연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졸역을 덧붙였으나, 적어도 이 독백의 첫 마디는 <임영준 햄릿> 프로덕션의 것을 직접 인용해야 한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그동안 살펴본 <햄릿> 번역서와 공연에서도 “To be, or not to be” 를 이 만큼 적절하게 옮긴 사례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느냐가 먼저냐 죽느냐가 먼저냐가 문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가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의 일상적 질문이라는 사실이 “왜 햄릿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나머지 부분을 구성한다. 이 질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 임영준의 질문이자 햄릿을 연구하며 비정규직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경력직만 찾는 구인 공고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오르지 않는 급여와 오르기만 하는 전월세금 앞에서 이 질문을 떠올린다. 아프다는데 그러니 청춘이라는 둥 붙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더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둥의 정신승리법을 알려주는 기성세대는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고선 위로하는 척하는 클로디어스를 닮아 있어서 더 밉살스럽다. (물론 임영준 배우가 늘어난 나이와 옆구리 살 때문에 스스로를 햄릿이 아니라 클로디어스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클로디어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다만 그러하더라도 임영준과 함께 햄릿의 질문을 되뇌는 동안 우리 모두는 어찌어찌 여전히 살아남았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존재하는 동안 이 우울한 질문이 계속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이 질문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하지만 <햄릿>은 남아있는 자들이 먼저 가야했던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살아낼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햄릿 왕자도 마지막 순간 호레이쇼에게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호레이쇼에게 맡겨진 임무는 특별히 영웅적이지 못한 우리 대부분의 것이기도 하다.

추신2
지난 1년간 조연출 박정호는 김정 연출의 시그니처 코드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할 수준으로 등장했다. <임영준 햄릿>은 김정 연출의 작품에서 조연출 박정호의 무대 위 역할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2018년 6월 9일 토요일

한국 공연예술계 엥떼르미땅들과 사회적 권리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주형일 역, 『정치 실험』 (갈무리, 2018) 서평[1]

김민조
“부자가 되세요!”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 옆에 “자신을 표현하세요!”, “창조적이 되세요!”라는 신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은 장려될 뿐만 아니라 고용적격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창조에 대한 독려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정치 실험』 226~227면.

『정치 실험』에 묘사된 2003년 경 프랑스의 상황과 2018년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온도차는 현저하다. 약 15년 전 프랑스에서는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실업보험의 수혜 조건을 강화하고, 소득재분배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재건"이라는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엥떼르미땅[2]들의 투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공연예술계의 경우에는 아직도 실업보험은커녕 예술인복지의 개념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워크페어의 통치성과 권력효과를 운위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 내에 진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기화로 하여 국회에서 예술인복지법 개정 및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예술인 사회보장제도는 일반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정부가 추산한 한국의 문화예술인 규모는 약 54만 명에 달하지만 예술인복지법에 의해 수혜를 받은 예술인은 약 3만 4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2016년 기준)은 그 증거들 중 하나이다.[3]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는 연습비와 공연비를 온전히 자비로 충당한다거나 공연에 참여하고도 개런티를 지급받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특히 5년차 이하의 엥떼르미땅들에게는 창작활동을 통해 먹고 사는 모델보다는 창작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충하며 살아가는 모델이 더 일반화되어 있다. 젊은 창작자들은 대체로 이름 있는 팀에 들어가거나 노 개런티 공연을 전전하면서 ‘이 바닥의 생리’에 적응하고 버티며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커리어를 쌓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정부가 제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은 대부분 예술인 개개인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사업이 아니라 ‘유망한’ 극단이나 연출가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이기 때문이다. 지원사업에 선정될 수 있는 팀, 그래서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팀에 팔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게임”은 더욱 심화된다.

랏자라또는 이른바 복지국가의 “서비스”는 투쟁에 의해 획득된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체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부여한 “신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재건”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엥떼르미땅들은 국가가 식별할 수 있는 ‘좋은 예술’의 기준에 부합하는 창작물들을 더 많이, 더 쉼없이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신용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지원사업은 복지사업보다 더 문이 좁고 까다로우며, 더 시혜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국에서 시행되어 온 예술지원사업은 고용적격성을 기준으로 한 “불평등의 미분적 관리에 의한 통치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큐베이팅 사업과 같은 지원사업들은 표면적으로 창작예술인의 ‘육성’을 내세우지만, 이는 예술인들을 보편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추적조사”(신청서류, 면접심사, 교육이수 여부 등)를 바탕으로 걸러낸 소수의 적격자들만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원사업은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는 대신 돈을 내어주는 정부 부처나 정부 출연 재단의 시혜적 태도에 “의존”하게 만든다.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이러한 위계적 관계가 고착화되는 것에 비례해 정치적 타락의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사례는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length principle)에 의거해 2005년 수립된 예술분야 전문 협의체이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 청와대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배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검열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4]

그러나 최근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도 랏자라또가 말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이후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맞선 투쟁, 그리고 2018년 공연예술계 미투·위드유 운동은 ‘경제적인 것’의 프레임 너머에서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존재론을 문제 삼는 새로운 벡터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자신이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전성과 예속성의 감각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의 관리정치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각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기각하고 ‘살아남기 위해 동의할 것’을 강요하는 공연예술계 내부의 “품행 정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을 바탕으로 국가의 복지·지원 사업들을 모니터링하고 그 계획의 수립과 시행 과정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2017년부터 새로운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지원사업의 울타리에서조차 배제되어 있었던 청년·신진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최초예술지원, 서울시청년예술단, 유망예술지원, 민간청년예술공간지원 등이 그것이다. 청년예술단의 경우 사업액이 총 54억 원(2017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지원사업의 파이가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선정된 예술인들에게 사업비와 별도로 월 70만원 수준의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복지사업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예술창작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기초적인 생계를 위한 수급비를 지급하는 사업을 도입했다는 것은 분명 진일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랏자라또가 『정치 실험』에서 경고하고 있는 일들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평론가는 2017년 청년예술단이 연간 80회의 활동 증명을 요구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여전히 정부가 예술가를 ‘주체’로 보지 않고 지원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5] 달리 말해 창조에 대한 독려가 여전히 사회적 권리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작동하지 않고 고용 유인이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원사업이 되면 적절한 예술가가 된다”라는 한 청년연극인의 자조적인 표현처럼,[6]지원적격한 예술가로 인증받기 위해 수백 장의 기획서를 쓰고 활동증명서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 자체가 공연예술계 내부의 경쟁 게임을 부추기고 있다. 예컨대 ‘대학로 인력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인들의 소통은 외견상으로 매우 활발하지만, 필자가 경험하기로 각자의 예술관이나 지향성에 대해서 진지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현재 누구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업에 지원할 예정이며 다음번에는 어떤 ‘판’에서 작업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보통 노 개런티에 가까운 공연을 전전하는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경우에는 거리극, 단막극, 영세한 페스티벌 등에서 경력을 쌓아 이름 있는 중·대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장기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프로젝트 극단 중심의 자율적인 협업 체제가 점점 더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사업’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유지되는 한 결국 기존의 경쟁 구도 속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유력한 서울 시내의 극장, 명망가에 의해 지휘되는 극단, 거대 협회 주도의 페스티벌 등에 지원사업이 쏠려 있는 한 엥떼르미땅들이 다양한 삶의 형태들, 전략들, 기술들을 통해 “대항품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난망해진다. 랏자라또는 신자유주의야말로 “다문화주의”의 옹호자라고 말한다. 주체들의 실천을 겉보기에는 다양해보이는 수준으로 관리하는 기술, 그러나 각 계층들과 실천들 사이의 미분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조장하는 기술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혁명”의 위험을 저지하고 경쟁의 원리를 보존한다.

엥떼르미땅의 연대체가 감시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좀 더 나은 지원사업으로 무마하는 것, 새로운 복지사업으로 눈을 가리는 것, 그리하여 국가는 역할을 다했고 문제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자신을 경영하지 못하는 엥떼르미땅들에게 있다는 인식을 시민사회에 유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은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에 가로놓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진단서 내지 경고장이 될 수 있다. 공연예술은 끊임없이 공간 속에 실현되고 또 사라진다는 물질적 기호성을 갖는 장르이다.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빈 시간들”에 충분한 경의를 갖는 것, 비록 그 시간들을 무(無)로 환원시키는 자본의 논리에 고통받을지라도 그것이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전략”[7]에 불과함을 잊지 않는 것,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더 많은 연대체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 이 글은 필자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8년 5월 26일 개최한 『정치 실험』 서평회에서 발제한 서평입니다.
[2] 랏자라또는 엥떼르미땅(intermittent)을 “불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며 특히 공연,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고 밝혔다. 『정치실험』 9면.  
[3] 이종승, 「예술인 복지 정책, 당연권리인 사회보장제도에 진입하기 위하여」,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4] 노이정, 「연극 예술 지원 정책의 개혁 방향」, 《연극평론》 87호, 2017 참조.
[5] 김태희, 「확대되는 청년예술가 지원사업, 서울시와 예술가의 동상이몽」,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6] 김기일 작가·연출가의 발언. 송경화, 「우리는, 사람을, 만났다」, 《웹진 연극in》, 2017. 5. 11에서 인용.
[7] 류주연 연출가의 발언.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경남 창녕군 길곡면> 월례비평」, 《공연과 이론》 69호, 2018.에서 인용.  

2018년 5월 4일 금요일

연극 너머의 만남, <낫심>

글쓴이_장영지

매일 다른 배우가 공연 당일 대본을 받고 무대에 선다는 신선한 설정과 초호화 캐스팅*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낫심>에 쏟아졌다. 정시에 티켓팅에 참여했지만 오류 경고만 몇 번 만나고 예매하지 못했다. 아이돌 공연도 아닌, 두산 인문극장 시리즈를 예매하지 못하다니, 처음 경험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나중에 두산이 패키지 구매자를 대상으로 추가 예매를 열어준 덕에 겨우 류덕환 배우 회차 한 장을 손에 넣었다.
** 김선영 전석호 한예리 이석준 우미화 김꽃비 손상규 권해효 진선규 박해수 문소리 나경민 김소진 전박찬 고수희 오만석 구교환 유준상 이화룡 류덕환 이자람 (매회 다른 배우, 출연일순)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호평보다는 혹평이 눈에 띄었다. 당일 대본을 받는 배우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즉흥적인 연기 등을 기대한 사람들은 도무지 배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다소 실망했다. 게다가 작가가 배우를 압도해버리는 대부분의 순간들 때문에 생소한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보다 (내) 배우를 기다린 관객들에게 적잖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2017년 SPAF 초청작 <하얀 토끼 빨간 토끼>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나 역시 배우의 즉흥적인 연기를 기대하며 작품을 예매했지만, 작가는 배우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읽어주는, 작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듯 했으며, 작가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싶어 했다. 몇몇 문장에 감정을 넣어, 배우답게 읽어주는 것 외에는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대본을 읽는 중간 중간 왜 이런 말/행동을 시키는지 불평(?)하기도 했지만 대본을 집어 던지고 나가는 배우는 없었고, 작가가 시키는 대로, 대본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인 이유로 이란을 떠나지 못한다는 작가는 답답하겠지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반복해서 말하게 하면서 메일을 보내달라 요구하는 작가에게 공감이나 연민, 그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보고 나와서는 작가를  ‘배우와 관객을 다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는 심술궂은 사람’ 정도로 판단하고 그런 태도에 대해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대본이 아니라 소설을 쓸 것이지.’ 다만 즉흥적인 상황을 대면한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감동하고, 공연 후 배우와 관객이 나눈 짧은 대화들 때문에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즐겁게 기억하고 있다.
  <낫심>에서도 역시 배우가 텍스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는 없었다. 배우는 대본에 있는 글자를 남김없이 읽으면서 작가의 질문, 지시, 요구에 응해야 한다. 무대 뒤에서 실시간으로 대본을 넘겨주고 있는 작가는 배우가 다 읽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기지 않거나, 잘못 읽으면  X표시를 했다. 게다가 <낫심>은 그야말로 작가 낫심의 이야기였다. 엄마와 이란어를 배우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에 가지 못하는 이방인의 심정을 토로한다. 또 낫심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배우가 그의 어머니에게 이란어로 동화를 읽어주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훌륭한 배우를 소비할 뿐이라고 불평했다. 누군가는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받는 어머니의 존재와 그 순간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하지만 배우가 당일 대본을 받는다는 설정을 잠시 제쳐둔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작가의 강력한 욕망, 텍스트를 충실히 따르는 배우, 어머니 역으로 섭외된 누군가, 이 모든 것은 공연 <낫심>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대는 아무리 진짜처럼 보여도 언제나 가짜였다.
  그러나 몇몇 순간들이 “진짜”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가능하다.  <낫심>은 어쩌면 단순히 연극, 혹은 공연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배우, 관객의 만남, 친교, 경청의 순간들로 80분이 채웠졌다. 낫심은 세련된 한국어와 욕을 묻고 그 단어들을 수첩에 적었으며 배우와 이란 풍습대로 차를 마셨다. 배우는 눈시울을 붉히고 때로 울먹이고 말을 잇지 못하면서 낫심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또 낫심은 우리에게 예크부드 예크나부드(옛날 옛날에), 머먼(엄마), 델람탕쇼테(마음이 구깃구깃해요, 보고 싶어요) 같은 몇몇 이란어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한국어로 표기된 이란어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이란 사람 낫심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낫심은 외국인들의 이란어를 들을 때,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이 말은 배우를 통해 한국어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란 한국어로 표현한  낫심의 마음들을 상상해본다. 어떤 사람은 놀이처럼, 어떤 사람은 그저 공연의 지시사항이기에 스크린의 글자를 따라 읽은 것뿐인데. 어디서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에게 이런 순간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니 그의 외로움이 새삼 실감된다. “잠시 동안 아무도 이방인이 아니었다.”는 말을 이란어로 들었을 때 마침내 그를 훨씬 더 이해하게 되었다. 차근차근 여기까지 왔다.
  그 “진짜” 순간들 때문에 <낫심>과 낫심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들을 돌아본다. 때로 우리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 만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국어로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주 외로움을 느끼고,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만남과 이해가 가능했던 것은 일부 오늘의 배우 덕분이다. 스크린을 보고 대본을 읽느라 자주 객석과 등져야 했지만, 배우는 최선을 다해 관객과 눈을 맞추고, 관객을 살폈다. 작가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텍스트에 압도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을 드러내며, 작가와 관객을 열심히 만났다. 처음 마주하는 즉흥의 상황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배우의 결. 그의 다정함 덕분에 나도 낫심에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낫심>을 연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깊은 이해, 이런 것들이 연극을 연극답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8년 4월 29일 일요일

가공되지 않은 드라마를 꾸려가는 힘의 진실함

<말뫼의 눈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수희 작/연출 
2017/04/06

시작은 오해 

  두 여배우가 억지스러운 고등학생 분장을 하고 등장하여 둘만이 아는 암호 동작을 과장되게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대사로 나누는 첫 장면을 대했을 때 작위적인 드라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조선소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 다음 버스 정류장 앞에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제시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 명 씩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 쉴 틈이 없었다. 첫 공연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미리 계산된 분주함으로 이곳저곳에 배치된 설정들을 정신없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떠들썩함은 조금의 침묵도 어색해서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상으로 다가왔다. 많은 정보들을 인물들의 대사와 행위 곳곳에 알차게 설정시켜 놓고 가는 작품의 시작부는 전체적으로 차분하지 못했고, 꽤나 계산된 드라마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신뢰의 끈   

  그러나 간이식당에서 룸펜으로 나왔던 여자가 맨 앞 장면에 등장했던 수현이었음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 2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수현과 미숙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두 인물의 달콤하지만은 않은 우정이 감지되면서 일단 이 드라마에 몰입하기로 한다. 이 장면에서 작품을 달리 볼 수 있는 것은, 수현과 미숙이 오프닝에서 설정되었던 느낌으로 성장하기는 하였으나 어떠한 전형성도 탈피한 인물로 컸다는 사실이다. 시골 마을에 들어 선 조선소 따위에는 세상 관심이 없다는 듯 현실에 냉소적이고, 아니 세상살이에 냉소적이며,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수현은 어정쩡한 조건부를 단 성인으로 크고 있었고, 어린 시절 크레인 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 보겠다던 미숙은 돈 잘 버는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이 되어 (기껏해야 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자신의 포부를 (이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세파를 끌어안는 힘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 대목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마음이 열린 이유를 말하자면 이 두 인물이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들일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도 작품이 이 두 인물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질타를 하거나 편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면서도 이 두 인물을 나란히 애착 어린 시선으로 추적해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은 점점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커다란 신뢰로 바뀌었고 극은 결국 나의 깊은 내면과 손을 맞잡았다. 알고 보니 작품은 이 두 여자만의 드라마가 아니었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아버지 빽으로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으로 취업한 진수, 그리고 시종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 크레인이 들어 온 후 마을을 드나드는 사모님들을 보고 인생의 비애를 느낀 은옥, 마을에 돈이 돌자 어떻게든 기회 삼아 돈을 벌어보려는 은옥의 남편 등-의 동등한 드라마를 두루 살피며 참 착하게도 여러 고통과 여러 열망, 아니 고통과 열망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여러 당연함들-녹록치 않은 삶에서 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함-을 어떠한 폐쇄적인 주장 없이 평등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시종 작품 속 그 어느 인물의 드라마에도 작가는 편을 들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이의 드라마에 정성을 쏟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어려운 삶의 몫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작품을 만나가는 과정 안에서 흔쾌히 체감된다. 명백한 드라마를 구축하면서도 관객에게 어떠한 드라마도 주입시키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산뜻함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태도는 외면할 수 없는 세계이기는 하나 검은 먹물 같은 인물과 사건, 드라마, 작가의 할 말에 관객을 전부 가두어 놓고 질식케 하는 기존 드라마 연극의 태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이렇게 산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일인이기는 하지만) 작가와 연출자가 연극을 넘어 삶을 응시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즐겁다    

  그리고 즐겁다. 우선 작품은 탄력적인 연극성을 구사하며 즐거움을 자극한다. 작품 초반에 옆에 앉은 관객과 손을 잡으라고 했던 과감한(!) 제안, 은옥의 스토리텔링-은옥은 그 추레한 얼굴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핀 조명을 받으며 자기 고백을 하는데, 이 장면은 그 어느 장면보다 호소력이 짙다. 그 이유는 점층적으로 강렬해지는 핀 조명과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이 가진 고백적 권위도 있겠지만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지닌 생생함의 파장 덕분이다. 호미로 밭을 매다가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타게 된 경위를 서술하는 이 장면에는 한 개인이 바라 본 한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 명시된 뮤지컬적인 장면 연출-이 작품에는 은옥이 댄스홀에서 남편을 마주쳤을 때와 할매가 죽었을 때 뮤지컬적인 장면이 개입되는데 이 두 장면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처럼 가장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살맛나는 상상으로 제시된다.-, 버스 씬-은옥, 할매, 수현과 미숙이 하나의 프레임에 잡히는 버스 씬. 버스 씬에서 조각된 여자들의 풍경을 보며 이 연극은 진정 아무럴 것 없는 남루한 여자 인물들의 돋보임이라고 생각한다.-이 연극적인 의미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연극적 즐거움은 정형화된 드라마를 따르는 척하면서 결코 정형화되지 못하는 생의 균열들에 힘을 모으고 있는 지점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사의 점핑-미숙의 남편이 죽었다는 대사와 함께 붙는 다음 장면은 그 말을 한 할머니의 장례 장면이었던 것-, 구조의 컨트라스트-미숙과 수현의 관계는 기승전결로 완결되지만 작품의 전체 드라마는 결코 정박자로 굴러가지 않는 것-, 작품의 결말까지 발설되지 않는 비밀을 하나쯤 품고 있는 것-은옥의 행방-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인공 같은 인물을 가장 설득력 없는 인물로 설정한 것이 작품 속의 드라마에 균열을 가한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은 수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가장 잘 모르는 불투명한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지 않으며 극의 처음에서 끝까지 가장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제시된다. 얼핏 보면 작품의 서사적 화자 기능을 하는 듯한,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 인물이 전체 극에서 가장 희미한 아웃사이더로 밀려 나 있는 설정은 작품을 구태여 만들어진 극에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비쳐진다. 
  이토록 뚜렷한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만들어내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천착하는 힘으로부터 신중함과 따뜻함을 넘어서 절실함 마저 느낀다. 탄력적인 연극성으로 즐거움을 주는 노력 너머에는 오롯이 사람,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내려 하는 마음이 만져진다. 특히 남미정 배우가 연기한 할매의 모든 순간들이 그렇다. 버스 정류장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할매는 이곳에서 스치듯 만나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소소하고 거대한 싸움들, 저마다 절실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빚어내는 그 숱한 싸움의 순간들마다 막간처럼 개입한다. 드라마가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우물에 함몰되려 할 때마다 빠짐없이 개입되어 허투루 내뱉는 듯 하는 할매의 대사는 매 번 웃기지만 그 어느 정식 대사들보다도 진실하고 진지하다.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누구의 곁에도 에둘러 가 앉아 주고, 그러면서 또 이기적인 그녀는 결코 추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작품 전체를 떠받든다. 

작품의 선함에 대하여

  악인은 아무도 없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모든 삶의 선함을 믿는다. 작품이 직시하는 것은 오로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라는 악한일 뿐이다. 무대 위에는 제각기 이질적인 인물 군상이 한 데 공존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결국 삶을 잘 살아내 보려 하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이기적인 계산도 아니고 현실적인 치열함도 아닌 공동의 선함으로 비쳐진다. 모든 진정한 것들은 보편적이고 순수하다. 이를테면 사랑이나 잘 살아보려는 마음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며 순수한 감각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의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질적인 사람들이 지닌 개개의 선함에 대해서. 커튼콜을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을 잘 살아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삶과 연극의 경계 위에 서서 박수를 쳐 본다.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이예은, "깨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감각’에 대해서"

<처의 감각>
고연옥 작
김 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2018년 4월 13일

친화력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서사로 난해함이 개입될 줄 알았는데 작품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다방면의 친화력을 발산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 공간 속 관객들의 마음이 열릴까 궁금해 하며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합심하여 시종 열심히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더욱 정확히는 ‘생명체’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은 ‘곰’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에 국한되어 민족적인 정서를 그려내지 않고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진정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를 채워낸다. 근원적인 생명성에 대한 명상을 지향하지만 정작 작품의 주된 내용은 각자 다른 곳에 이상을 품은 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 현실을 얼떨결에 (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맞이하게 된 남녀가, 그 이상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차적인 현실을 부단히 열심히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한 부부의 공허와 열심. 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가능한 세계상을 아주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예상된 틀 없이 풀어낸다. 이를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어떠한 삶도 흘려버릴 수 있는 여자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현실도 참아내야만 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지위에서 가족-됨을 풀어내는데, 이러한 시선이 매우 보편적인 서사의 미덕을 획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떠한 순간에도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어떠한 담론으로도 환원하지 않으려는 정성을 보여준다. 비록 엔딩에서 남자는 이상을 향해 떠나가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떠나가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는 뚜렷한 결론을 보여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결말은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서 그다지 확고한 지위를 가지지는 못한다. 작품의 전반은 그럼에도 열심이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이었거나 그 생 안에 들어 차 있던 공허와 어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

남자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되는 정성은 동등하나 이 둘에 부여된 서사의 결은 다르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아 피어오르는 인물은 작품의 제목(‘처’)으로 내세워진 여자가 아닌 남자이다. 마음에 품은 이상은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있으나 구차하고 치열하게 살아내 보려는 남자(백석광 배우 分). 그가 갖지 못한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은 비현실적인 분장과 액팅으로 치장된 코러스 중의 한 명으로 설정되었기에 비록 그것이 진실한 생의 갈망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가 품은 미지의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명하리만치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 생생함은 작품의 결말부에 터져 나오는 그의 독백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동굴에서부터 서서히 세상 밖을 향해 나오는 동선을 보여주듯, 칠흑처럼 까만 조명 에어리어(area)에서 서서히 밝아져 오는 공간으로 진입하며 폭발적으로 “도망 칠거야”라고 외친다. 이 한 마디의 대사에는 그가 상실한 어떤 다른 곳에 있을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살아내 보려 하는 초미시적인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이 모두 한꺼번에 전달된다.
  남자의 생생한 묘사는 최순진 배우 分의 경우에도 돋보였다. 가련하리만큼 끔찍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맹렬한 욕구의 포악함까지, 푸념에서 애원에서 폭력으로 발전, 아니 변질, 아니 폭로되는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진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스펙트럼. 이것 역시 한 절망적인 인간의 생생함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장면을 도사리는 한 인간의 파장은 버릴 것이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생함이란 동물의 생명성과는 달리 이리도 교묘하고 책략적인 잔혹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여자는 살아있는 인물도, 그렇다고 상징화된 어떤 의미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는 경험치인 곰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곰과의 재회를 생의 간절한 열망으로 품은 채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후 남자 인간과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또 다른 남자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큰 흔들림 없이 곰과의 사랑을, 곰과의 사랑에서 얻은 반인반수의 아이를 상실한 기억을 생의 중심에 두며 그 부재감을 대체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남자 인간에게서 낳은 다른 아이이며, 이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일로써 자신의 모든 생 의미를 충족시키려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백석광 배우 分-는 이 여자의 현실화된 버전의 인물이다. 그는 곰과의 사랑이 어떤 다른 인간 여자와의 사랑으로 대치된 이 여자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이 작품은 보다 현실적인 남자의 서사를 통해 여자의 서사를 관객에게 체감될 수 있는 것으로 병행시킨다.)
  여자에게서 감각되는 것을 굳이 단어로 설명하면 희미하지만 인간과 인간 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하고 은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대인 모성일 것이다. (작품에는 이 여자를 모성의 상징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시각들도 존재한다. 여자는 공연 내내 시종 한 명의 딸로서 호명되기를 강요당하는 것, 정작 그녀의 어머니는 초자아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제시되는 것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듬고 있는 모성이란 종국에까지 가서 살아남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능적인 버팀목으로 주제화되지도 않고, 신화적으로 비약되지도 않는다. 단지 동물적인 숨과 피처럼 공연의 전반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정한 주제나 상징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외려 공연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그릇처럼, 하나의 공간처럼, 하나의 숨결처럼. 여자는 물처럼 어떤 공간 속의 공기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마음을, 혹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어떤 갈피를 떠돌며 흘러가듯 존재하여서 극을 보는 내내 잡혀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여자는 관객에게 공감되거나 심지어 낯설어지지도 않는데, 이는 인물의 의도적인 공백화 혹은 부재화라고 감각된다. 여기에는 무용수로서만 무대에 서 온 윤가연 배우의 관습화되지 않은 모든 몸짓과 표현의 몫도 분명히 있었다. 이 배우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몸짓과 발성과 표현들은 ‘연극’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곧잘 설명이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관습적 표현들을 거세시켜버린다. 작품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정작 빼곡하게 들어 차 있던 남자 캐릭터들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어 차 있던 작품의 골격들은 희미해지고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기억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공간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존재 자체이다. 실로 작품에서 ‘처’는 부재하며 오로지 ‘처’를 향하는 모든 뜨거움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하는 ‘처’의 감각이 공연의 전반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공연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도 주제화되거나 신비화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그래서 추앙되지도 강조되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존재했던 것이 조용히 바라다 보인다.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작품 어딘가에 무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을 준다.

공간성

  동굴에서 만나 산장에서 잠자리를 가진 남녀가 이제는 집이라는 현실 공간으로 내려 와 부부 생활을 시작할 때 텅 빈 무대 위에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무대 바닥의 한 가운데가 전체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제 안과 바깥으로 구분된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돈을 벌러 나가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적 현실 무대가 공연의 무대 위에 들어차는 것이다. 경계 없던 땅에 구획선이 생기자 고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전체의 땅은 힘을 잃고 그저 구획선만이 삶의 근거가 되는 이 헛헛한 삶의 사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또 이런 구획선이 생기자 배우들이 객석 안으로 난입하거나 무대 가장자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명확한 도발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처럼 구획선 안에서 벌어졌던 삶을 자연의 힘으로 깔아뭉개듯 다시 무대는 육중하게 하강한다. 흙에서 난 인간이 다시 흙이 되어 돌아가는 순간이다. 재에서 재로. 이 인간 보편의 신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무대의 상승과 하강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열고 닫는 박력 있는 무대 연출이다. 그 거대한 판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 동안의 시간, 그리고 잡음 섞인 움직임의 사운드가 많은 서사를 대신한다.
  장면들을 만들 때 남산예술센터 특유의 공간성이 빛을 발한 대목이 있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성이라 한다면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모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데 쉽게 바라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아무리 객석이 만석이 되어 관객들이 빼곡히 차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몇 초 만에 낱낱이 발견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렇게 객석에서 객석이 잘 들여다보이는 시각성 덕에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객석의 공간으로 진입을 하는 순간에는, 여느 극장에서라면 단지 일차원적인 경계 넘기에 머무를 이 동선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최순진 배우가 객석으로 돌진하여 객석 한 가운데의 열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말 외로워 죽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정말이지 이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멸할 것만 같이 외로운 한 개인의 사투를 보여주는 듯했고(심지어 리어왕의 미친 외로움이 보이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의식하면서 무대의 끝과 끝에서 대화를 나누는 백석광과 그의 옛 여인 장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라는 환상적인 모티프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밖에도 잦은 조명의 변화로 무대와 객석이 율동감 있게 하나가 되었다가 서서히 분리되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의 관극을 하자니 한낮의 운동장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분을 느꼈다. 극장이 지닐 수 있는 공공성, 그 역동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젊음

  작품은 결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두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이지만 끊임없이 쇄도하는 코러스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 배치된 정형화된 극 구조를 구태여 에피소드 식으로 교란시키려 노력한다. 각 챕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시작케 하는 코러스의 재기발랄함과 챕터와 챕터 사이의 입체적인 전환들. 코러스들은 드라마적 구조를 나열적 구조로 해빙시키고 다시 나열적 구조를 드라마적으로 몰입케 하는 흔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인물과 내레이터는 물론이고 한 배우의 몸체들이 되기도 하고, 공간과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 바깥으로 나와 연극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가 연극 자체가 되기도 하는 이 풍부한 코러스들! (17년 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던, 늙지 않는 이수미 배우의 기개에 박수를 보낸다.) 텅 빈 무대 공간을 현란하고 소란하리만치 가득 채운 음악과 조명과 코러스들의 무용적 합(合)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상상력이 낭자함에도 모든 표현들이 닫혀 있지 않고 개방성과 건강함과 귀여움을 내포할 수 있는 힘. 작품을 받아들이기 쉽게, 즐기기 쉽게, 응원하기 쉽게, 신뢰하기 쉽게, 사랑하기 쉽게 만드는 이러한 힘은 많은 부분 코러스들이 만들고 있다.
  실로 이 공연은 무용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이유는 율동감 있게 공간을 연출해서만도 아니고,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해서 윤가연 배우와 백석광 배우가 코러스들과 함께 연극임에도 무용에 더욱 가까울 정도의 완성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용적이라는 인상은 연출자의 열려 있는 상상력 덕분이다. 연극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연극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개방성이 돋보이는 연출. 과도한 연극성을 추구하는 연출자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배타적 숭고함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젊음의 탄력성으로 느껴졌다. 튕겨져 나올 것 같이 기운차고 기분 좋은 표현과 표현력. 그렇다고 빤히 ‘나 젊다’ 식의 선언을 함으로써 자칫 ‘어쩔래’ 식의 도발적 표어를 내거는 것도 아니다. 으스대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으며 숭고한 가름막을 쳐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보지도 않는 이 상큼함. 아니 이 솔직함. 아니 진솔함. 젊은이다운 기상으로 감각되는 이 진솔함.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 들어 차 있는 명랑하고 성긴 기운들. 오색 미러볼이 만드는 바닥의 문양과 예쁘게 반짝거리는 빨간 알전구 등,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듯한 재미있는 음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가는 두 남녀. 사랑도 당위도 책임감도 없이 취해버리는 그 밤의 현실을 이토록 귀여운 환상으로 접근하다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귀엽고 무의미한 순간으로 인해 그토록 녹록치 않은 현실을 길게 길게 살아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한 이러한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럴 법하다. 술이 깨고 바로 다음 날 장면에 객석까지 환하게 들어 온 째한 조명은 정말이지 바로 ‘술 깬 다음 날’ 기분을 이 공간에 들어차게 한다.

‘연극의 감각’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끝이 보이는, 심지어는 이미 끝을 내린 채로 극이 시작되는 숱한 연극 작품들에 지쳐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면에 있어서나 작품을 풀어내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다. 작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에 섣불리 도달해 버린 채로 극을 진행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단단한 틀 안에서 관극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게 하는 숱한 연극 작품들. 그 작품들이 극복하지 못한 성급한 폐쇄성을 이 작품은 차고 넘치는 풍부함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배우가 만들고 또 연출이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을 휘어 감싸는 무용과 젊음이 있었기에, 아니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연극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하는 이토록 소박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낸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하여 :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2018/02/26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_

이예은

첫 인상 

  17세기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소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서사의 형식이나 키쉬, 까슈, 마들렌 등등 첫 장면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유럽 문화를 환기시키는 단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캬바레 공연의 모티프를 수용한 듯한 무대와 의상은 지극히 유럽적인 것을 판소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접합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접합은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명백한 표현들이 그러하듯 인위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작품의 장면 장면마다에 뚜렷한 기획적인 의도가 서려 있으면서도 매 장면이 기획된 것 이상의 활력으로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기에는 구차한 살아있는 표현들 덕분이다. 이 공연은 그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을 글로써 기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 작품의 재미있음을 글로써 찬미하기 위해 ‘신세계’, ‘일대실험’, ‘성스럽기까지 하다’ 등의 표현을 쓰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 표현들은 과장이거나 억지이다. 이 공연을 포함하여 이자람의 작품들은 ‘신세계’나 ‘일대실험’ 등의 수식으로 표현 받을만한 단서들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수식으로 찬미받기에는 사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이자람의 작품은 늘 예상의 범위 안에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다. 여기에 미덕이 있다. 안전한 기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바로 이 두 영역, 안전한 것과 재미있는 것이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자람의 작은 위대함을 느낀다.
  작품의 내용은 ⟪소녀가⟫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제도적, 관습적 담론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저 아이와 여자가 결합된 상태에서 티끌 하나 자신의 존재를 결박할 수 없게끔 만들고 마는 한 소녀가 ‘소녀’라는 단어에 깃든 소녀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 소녀는 ‘소녀’라는 관습에 대항할 생각도, 그 관습과 경쟁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존 관습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보통의 성장가와는 다르다. 작품 속 소녀에게는 관습마저도 ‘미지의 숲’과 다를 것 없는 미지의 것이다.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작품 속 대사와도 같이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생의 모든 절기에 몰입하는 소녀의 행동은 관습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작품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유럽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접합, 내용적으로는 제도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대비라는 뚜렷한 모티프들로 읽히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은 명확하게 기획된 이 모티프들이 결코 안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된’ 것이라는 말은 미안한 표현일 만큼 이 작품만의 스타일로 명확한 말들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만 안일하지 않은 것.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 대중적이지만 작가적인 것. 몹시 이루기 힘든 그 양자들 간의 공존을 이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계가 견실하게 느껴진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세계를 증발케 하여 그 이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주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매혹적인 꿈을 꾸게 하거나 지독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 

  동그란 무대를 세 명의 악사가 둥글게 에워싸서 앉고 빨간 드레스와 슈즈를 신은 배우가 무대 위에 입장했을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와- 무대 좀 봐!” 했다. 이것이 공연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고체적으로 주름 잡힌 겹겹의 커튼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만든 무대 프레임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이 육중한 커튼이 조명에 닿아 다채로운 세계의 질감을 만들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힘차게 형상화해 낸다. 커튼 왼편에는 불투명한 빨간 전구줄이 야무지게 두 줄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조명과 흰 조명, 그리고 푸른 조명이 닿았을 때 명확하게 변화되던 커튼의 다채로운 질감과 함께 빨간 전구줄의 반짝거리던 빛을 기억한다. 반닥반닥 빛나는 재질로 제작된 아담하고 동그란 무대는 경사가 져 있고 바닥에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 무대 오른편 위에 오뚝 솟아 있는 작은 단상이 있는데, 이 공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경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단호한 공간이다. 그리고 배우가 율동을 만들 때 날 서게 회전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빨간 치맛자락의 곡선은 무대를 보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는 명랑한 이미지들을 돋운다. 이 작품은 눈으로 씹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마치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느낌이다. 눈으로 차곡차곡 소화하는 진귀한 이미지들과 함께 귀를 열게 하는 숱한 소리들,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때 나는 소리 “캉 찰캉 찰캉 차르르”, 철로 만든 드레스를 부술 때 나는 소리 “뿌셔뿌셔”, 미지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두근두근두근두근”하고 “가슴이 쓰르르르”하는 소리는 또한 이 작품의 내용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공연을 보면서 많은 순간 작품에 흡인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각, 청각 이미지들이 축적되면서 정말 똑 소리 나게 터져 나오는 표현! 표현! 덕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노골적이고 요염하기도 하고 천진하며 우매하기도 한, 그래서 엄청 웃기기도 한, 그러나 앙큼하게 감추어진 속내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이질적 느낌들이 놀이를 만들고 있는 표현, 표현들. 아주 놀기 좋은 놀이터를 작품의 테두리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정말로 아주 잘 놀고 있는 표현, 표현들. 이를테면 “찰캉!” 소리가 나는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기 전 자유로운 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무대 오른 편 단상 위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바람으로 불어오듯 자유가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찰캉! 찰캉!”하는 철 드레스가 몸에 입혀지는 순간 커튼에 닿아 반사된 백색 조명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그 순간 고조되는 북소리는 그 공간과 시간에 폐쇄적인 테두리를 재빨리 둘러치는 듯하다. 숲을 발견한 소녀가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사방군데 몸을 비벼댈 때에는 너무도 천진하고 야해서, 동시에 자신이 천진한지도 야한지도 모른 채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소녀가 “무엇인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는” 미지의 숲을 기어코 활보하며 “두근두근”대는 장면은 어떠한 관습적 지(知)도 압도해 버리는 미지의 지적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어 사랑스럽다. 소녀가 늑대에게서 달아나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푸른 조명과 함께 저녁 공기를 머금은 듯한 시원한 숲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기에서도 다시, 자유가 느껴진다. 이렇게 풍성한 이미지들과 함께 구성진 대사 몇 마디가 칼을 꽂듯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어 서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칼을 꽂듯 호소하는 순간들처럼 말이다. 이토록 작가가 자신을 호소하면서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 관객과 동반하면서 작가가 할 말을 하고 마는 기술이 놀랍다.   

서사

  작품이 지닌 몇 몇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징으로만 이어진다. 철로 만든 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미지의 숲이 상징하는 것, 나무의 길과 물의 길이 상징하는 것, 느끼한 목소리의 늑대가 상징하는 것.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명징한 상징들은 온갖 제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 작품의 열망과 대조적이다. 결국 작품의 열망은 제압적인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허물어버리는 것에 있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서사를 볼 때, 왜 이토록 제압적인 틀에 매달려서 자유를 꿈꾸어야만 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제압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을 철저히 이분하다보니 전형적인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서사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상징들 뿐 아니라 서사의 구조 또한 지나친 전형성을 따르고 있다. 보통의 여자 아이로 태어나서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게 되고, 그 드레스를 부수어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숲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에게 희롱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도리어 늑대를 희롱하게 된다는 서사의 얼개는 전형적인 동화 다시 쓰기의 구조이다. 기존의 동화 다시 쓰기 구조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구조에 대하여 이 작품만이 취하는 어떠한 태도가 있었더라면 보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조로부터는 어떠한 재발견도 각성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지독한 수미상관식의 대사가 서둘러 에필로그를 장식했을 때에는 설마 이대로 끝을 맺을까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상

  그 많은 매혹적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장면이 끝나고 ‘서사가 싱겁다’는 인상과 함께 보다 큰 차원에서 작품의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위대한 작업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는 재미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이토록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생각해 본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동시에 대중적이거나 명확한 기획 의도를 확보한 것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단어로도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그저 예술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은 뭘까. 동시에 ‘재미’라는 것은 뭘까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그리고 작품에 고찰이 없다면 재미란 무슨 의미일까? 라고도 질문한다. 여기에서 고찰이란 앞서 말한 이 작품에 부재하는 서사적, 주제적인 고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도 고찰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 속 표현들은 시종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끈끈한 줄로 이어 관객과 함께 가려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모든 표현들을 다 주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는 바람에 어떤 표현에 머물러 관객이 생각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작품이 관객에게 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했던 말 가운데 “관객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작가가 토대를 두고 있는 판소리의 정신에서부터 발로된 것이라 생각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관객 사이의 끈끈한 탄성을 다져가며 철저히 공감의 영역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가니 말이다. 무대와의 끈끈한 탄성 안에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50분의 상연 시간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공연과 관객 사이의 끈끈함을 너무 믿으려 하다 보니 기껏해야 정성 어린 우정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과 귀가 지극히 세심하게 열리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어떠한 세계와 정말이지 열심히 맞닿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서사와 상징들을 매우 안전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로 이끌어낸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이를테면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과연 작품 안에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예술의 가치로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