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9일 토요일

한국 공연예술계 엥떼르미땅들과 사회적 권리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주형일 역, 『정치 실험』 (갈무리, 2018) 서평[1]

김민조
“부자가 되세요!”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 옆에 “자신을 표현하세요!”, “창조적이 되세요!”라는 신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은 장려될 뿐만 아니라 고용적격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창조에 대한 독려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정치 실험』 226~227면.

『정치 실험』에 묘사된 2003년 경 프랑스의 상황과 2018년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온도차는 현저하다. 약 15년 전 프랑스에서는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에 대한 실업보험의 수혜 조건을 강화하고, 소득재분배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재건"이라는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엥떼르미땅[2]들의 투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공연예술계의 경우에는 아직도 실업보험은커녕 예술인복지의 개념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워크페어의 통치성과 권력효과를 운위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 내에 진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을 기화로 하여 국회에서 예술인복지법 개정 및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예술인 사회보장제도는 일반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정부가 추산한 한국의 문화예술인 규모는 약 54만 명에 달하지만 예술인복지법에 의해 수혜를 받은 예술인은 약 3만 4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2016년 기준)은 그 증거들 중 하나이다.[3]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는 연습비와 공연비를 온전히 자비로 충당한다거나 공연에 참여하고도 개런티를 지급받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특히 5년차 이하의 엥떼르미땅들에게는 창작활동을 통해 먹고 사는 모델보다는 창작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충하며 살아가는 모델이 더 일반화되어 있다. 젊은 창작자들은 대체로 이름 있는 팀에 들어가거나 노 개런티 공연을 전전하면서 ‘이 바닥의 생리’에 적응하고 버티며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커리어를 쌓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정부가 제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은 대부분 예술인 개개인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사업이 아니라 ‘유망한’ 극단이나 연출가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이기 때문이다. 지원사업에 선정될 수 있는 팀, 그래서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팀에 팔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게임”은 더욱 심화된다.

랏자라또는 이른바 복지국가의 “서비스”는 투쟁에 의해 획득된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체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부여한 “신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재건”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엥떼르미땅들은 국가가 식별할 수 있는 ‘좋은 예술’의 기준에 부합하는 창작물들을 더 많이, 더 쉼없이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신용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지원사업은 복지사업보다 더 문이 좁고 까다로우며, 더 시혜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국에서 시행되어 온 예술지원사업은 고용적격성을 기준으로 한 “불평등의 미분적 관리에 의한 통치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큐베이팅 사업과 같은 지원사업들은 표면적으로 창작예술인의 ‘육성’을 내세우지만, 이는 예술인들을 보편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추적조사”(신청서류, 면접심사, 교육이수 여부 등)를 바탕으로 걸러낸 소수의 적격자들만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원사업은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는 대신 돈을 내어주는 정부 부처나 정부 출연 재단의 시혜적 태도에 “의존”하게 만든다.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이러한 위계적 관계가 고착화되는 것에 비례해 정치적 타락의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사례는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length principle)에 의거해 2005년 수립된 예술분야 전문 협의체이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 청와대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배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검열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4]

그러나 최근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도 랏자라또가 말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이후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맞선 투쟁, 그리고 2018년 공연예술계 미투·위드유 운동은 ‘경제적인 것’의 프레임 너머에서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존재론을 문제 삼는 새로운 벡터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의 엥떼르미땅들은 자신이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전성과 예속성의 감각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의 관리정치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각 주체들의 사회적 권리를 기각하고 ‘살아남기 위해 동의할 것’을 강요하는 공연예술계 내부의 “품행 정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을 바탕으로 국가의 복지·지원 사업들을 모니터링하고 그 계획의 수립과 시행 과정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2017년부터 새로운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지원사업의 울타리에서조차 배제되어 있었던 청년·신진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최초예술지원, 서울시청년예술단, 유망예술지원, 민간청년예술공간지원 등이 그것이다. 청년예술단의 경우 사업액이 총 54억 원(2017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지원사업의 파이가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선정된 예술인들에게 사업비와 별도로 월 70만원 수준의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복지사업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예술창작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기초적인 생계를 위한 수급비를 지급하는 사업을 도입했다는 것은 분명 진일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랏자라또가 『정치 실험』에서 경고하고 있는 일들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평론가는 2017년 청년예술단이 연간 80회의 활동 증명을 요구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여전히 정부가 예술가를 ‘주체’로 보지 않고 지원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5] 달리 말해 창조에 대한 독려가 여전히 사회적 권리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작동하지 않고 고용 유인이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원사업이 되면 적절한 예술가가 된다”라는 한 청년연극인의 자조적인 표현처럼,[6]지원적격한 예술가로 인증받기 위해 수백 장의 기획서를 쓰고 활동증명서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 자체가 공연예술계 내부의 경쟁 게임을 부추기고 있다. 예컨대 ‘대학로 인력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인들의 소통은 외견상으로 매우 활발하지만, 필자가 경험하기로 각자의 예술관이나 지향성에 대해서 진지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현재 누구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업에 지원할 예정이며 다음번에는 어떤 ‘판’에서 작업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보통 노 개런티에 가까운 공연을 전전하는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경우에는 거리극, 단막극, 영세한 페스티벌 등에서 경력을 쌓아 이름 있는 중·대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장기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청년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프로젝트 극단 중심의 자율적인 협업 체제가 점점 더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사업’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유지되는 한 결국 기존의 경쟁 구도 속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유력한 서울 시내의 극장, 명망가에 의해 지휘되는 극단, 거대 협회 주도의 페스티벌 등에 지원사업이 쏠려 있는 한 엥떼르미땅들이 다양한 삶의 형태들, 전략들, 기술들을 통해 “대항품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난망해진다. 랏자라또는 신자유주의야말로 “다문화주의”의 옹호자라고 말한다. 주체들의 실천을 겉보기에는 다양해보이는 수준으로 관리하는 기술, 그러나 각 계층들과 실천들 사이의 미분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조장하는 기술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혁명”의 위험을 저지하고 경쟁의 원리를 보존한다.

엥떼르미땅의 연대체가 감시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좀 더 나은 지원사업으로 무마하는 것, 새로운 복지사업으로 눈을 가리는 것, 그리하여 국가는 역할을 다했고 문제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자신을 경영하지 못하는 엥떼르미땅들에게 있다는 인식을 시민사회에 유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은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에 가로놓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진단서 내지 경고장이 될 수 있다. 공연예술은 끊임없이 공간 속에 실현되고 또 사라진다는 물질적 기호성을 갖는 장르이다.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빈 시간들”에 충분한 경의를 갖는 것, 비록 그 시간들을 무(無)로 환원시키는 자본의 논리에 고통받을지라도 그것이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전략”[7]에 불과함을 잊지 않는 것, 주체적 재전환의 국면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더 많은 연대체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 이 글은 필자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8년 5월 26일 개최한 『정치 실험』 서평회에서 발제한 서평입니다.
[2] 랏자라또는 엥떼르미땅(intermittent)을 “불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며 특히 공연,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고 밝혔다. 『정치실험』 9면.  
[3] 이종승, 「예술인 복지 정책, 당연권리인 사회보장제도에 진입하기 위하여」,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4] 노이정, 「연극 예술 지원 정책의 개혁 방향」, 《연극평론》 87호, 2017 참조.
[5] 김태희, 「확대되는 청년예술가 지원사업, 서울시와 예술가의 동상이몽」, 《연극평론》 88호, 2018 참조.
[6] 김기일 작가·연출가의 발언. 송경화, 「우리는, 사람을, 만났다」, 《웹진 연극in》, 2017. 5. 11에서 인용.
[7] 류주연 연출가의 발언.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경남 창녕군 길곡면> 월례비평」, 《공연과 이론》 69호, 2018.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