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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하여 :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2018/02/26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_

이예은

첫 인상 

  17세기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소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서사의 형식이나 키쉬, 까슈, 마들렌 등등 첫 장면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유럽 문화를 환기시키는 단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캬바레 공연의 모티프를 수용한 듯한 무대와 의상은 지극히 유럽적인 것을 판소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접합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접합은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명백한 표현들이 그러하듯 인위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작품의 장면 장면마다에 뚜렷한 기획적인 의도가 서려 있으면서도 매 장면이 기획된 것 이상의 활력으로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기에는 구차한 살아있는 표현들 덕분이다. 이 공연은 그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을 글로써 기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 작품의 재미있음을 글로써 찬미하기 위해 ‘신세계’, ‘일대실험’, ‘성스럽기까지 하다’ 등의 표현을 쓰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 표현들은 과장이거나 억지이다. 이 공연을 포함하여 이자람의 작품들은 ‘신세계’나 ‘일대실험’ 등의 수식으로 표현 받을만한 단서들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수식으로 찬미받기에는 사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이자람의 작품은 늘 예상의 범위 안에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다. 여기에 미덕이 있다. 안전한 기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바로 이 두 영역, 안전한 것과 재미있는 것이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자람의 작은 위대함을 느낀다.
  작품의 내용은 ⟪소녀가⟫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제도적, 관습적 담론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저 아이와 여자가 결합된 상태에서 티끌 하나 자신의 존재를 결박할 수 없게끔 만들고 마는 한 소녀가 ‘소녀’라는 단어에 깃든 소녀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 소녀는 ‘소녀’라는 관습에 대항할 생각도, 그 관습과 경쟁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존 관습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보통의 성장가와는 다르다. 작품 속 소녀에게는 관습마저도 ‘미지의 숲’과 다를 것 없는 미지의 것이다.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작품 속 대사와도 같이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생의 모든 절기에 몰입하는 소녀의 행동은 관습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작품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유럽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접합, 내용적으로는 제도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대비라는 뚜렷한 모티프들로 읽히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은 명확하게 기획된 이 모티프들이 결코 안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된’ 것이라는 말은 미안한 표현일 만큼 이 작품만의 스타일로 명확한 말들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만 안일하지 않은 것.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 대중적이지만 작가적인 것. 몹시 이루기 힘든 그 양자들 간의 공존을 이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계가 견실하게 느껴진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세계를 증발케 하여 그 이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주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매혹적인 꿈을 꾸게 하거나 지독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 

  동그란 무대를 세 명의 악사가 둥글게 에워싸서 앉고 빨간 드레스와 슈즈를 신은 배우가 무대 위에 입장했을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와- 무대 좀 봐!” 했다. 이것이 공연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고체적으로 주름 잡힌 겹겹의 커튼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만든 무대 프레임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이 육중한 커튼이 조명에 닿아 다채로운 세계의 질감을 만들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힘차게 형상화해 낸다. 커튼 왼편에는 불투명한 빨간 전구줄이 야무지게 두 줄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조명과 흰 조명, 그리고 푸른 조명이 닿았을 때 명확하게 변화되던 커튼의 다채로운 질감과 함께 빨간 전구줄의 반짝거리던 빛을 기억한다. 반닥반닥 빛나는 재질로 제작된 아담하고 동그란 무대는 경사가 져 있고 바닥에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 무대 오른편 위에 오뚝 솟아 있는 작은 단상이 있는데, 이 공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경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단호한 공간이다. 그리고 배우가 율동을 만들 때 날 서게 회전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빨간 치맛자락의 곡선은 무대를 보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는 명랑한 이미지들을 돋운다. 이 작품은 눈으로 씹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마치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느낌이다. 눈으로 차곡차곡 소화하는 진귀한 이미지들과 함께 귀를 열게 하는 숱한 소리들,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때 나는 소리 “캉 찰캉 찰캉 차르르”, 철로 만든 드레스를 부술 때 나는 소리 “뿌셔뿌셔”, 미지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두근두근두근두근”하고 “가슴이 쓰르르르”하는 소리는 또한 이 작품의 내용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공연을 보면서 많은 순간 작품에 흡인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각, 청각 이미지들이 축적되면서 정말 똑 소리 나게 터져 나오는 표현! 표현! 덕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노골적이고 요염하기도 하고 천진하며 우매하기도 한, 그래서 엄청 웃기기도 한, 그러나 앙큼하게 감추어진 속내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이질적 느낌들이 놀이를 만들고 있는 표현, 표현들. 아주 놀기 좋은 놀이터를 작품의 테두리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정말로 아주 잘 놀고 있는 표현, 표현들. 이를테면 “찰캉!” 소리가 나는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기 전 자유로운 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무대 오른 편 단상 위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바람으로 불어오듯 자유가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찰캉! 찰캉!”하는 철 드레스가 몸에 입혀지는 순간 커튼에 닿아 반사된 백색 조명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그 순간 고조되는 북소리는 그 공간과 시간에 폐쇄적인 테두리를 재빨리 둘러치는 듯하다. 숲을 발견한 소녀가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사방군데 몸을 비벼댈 때에는 너무도 천진하고 야해서, 동시에 자신이 천진한지도 야한지도 모른 채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소녀가 “무엇인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는” 미지의 숲을 기어코 활보하며 “두근두근”대는 장면은 어떠한 관습적 지(知)도 압도해 버리는 미지의 지적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어 사랑스럽다. 소녀가 늑대에게서 달아나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푸른 조명과 함께 저녁 공기를 머금은 듯한 시원한 숲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기에서도 다시, 자유가 느껴진다. 이렇게 풍성한 이미지들과 함께 구성진 대사 몇 마디가 칼을 꽂듯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어 서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칼을 꽂듯 호소하는 순간들처럼 말이다. 이토록 작가가 자신을 호소하면서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 관객과 동반하면서 작가가 할 말을 하고 마는 기술이 놀랍다.   

서사

  작품이 지닌 몇 몇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징으로만 이어진다. 철로 만든 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미지의 숲이 상징하는 것, 나무의 길과 물의 길이 상징하는 것, 느끼한 목소리의 늑대가 상징하는 것.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명징한 상징들은 온갖 제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 작품의 열망과 대조적이다. 결국 작품의 열망은 제압적인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허물어버리는 것에 있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서사를 볼 때, 왜 이토록 제압적인 틀에 매달려서 자유를 꿈꾸어야만 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제압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을 철저히 이분하다보니 전형적인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서사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상징들 뿐 아니라 서사의 구조 또한 지나친 전형성을 따르고 있다. 보통의 여자 아이로 태어나서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게 되고, 그 드레스를 부수어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숲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에게 희롱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도리어 늑대를 희롱하게 된다는 서사의 얼개는 전형적인 동화 다시 쓰기의 구조이다. 기존의 동화 다시 쓰기 구조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구조에 대하여 이 작품만이 취하는 어떠한 태도가 있었더라면 보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조로부터는 어떠한 재발견도 각성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지독한 수미상관식의 대사가 서둘러 에필로그를 장식했을 때에는 설마 이대로 끝을 맺을까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상

  그 많은 매혹적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장면이 끝나고 ‘서사가 싱겁다’는 인상과 함께 보다 큰 차원에서 작품의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위대한 작업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는 재미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이토록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생각해 본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동시에 대중적이거나 명확한 기획 의도를 확보한 것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단어로도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그저 예술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은 뭘까. 동시에 ‘재미’라는 것은 뭘까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그리고 작품에 고찰이 없다면 재미란 무슨 의미일까? 라고도 질문한다. 여기에서 고찰이란 앞서 말한 이 작품에 부재하는 서사적, 주제적인 고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도 고찰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 속 표현들은 시종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끈끈한 줄로 이어 관객과 함께 가려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모든 표현들을 다 주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는 바람에 어떤 표현에 머물러 관객이 생각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작품이 관객에게 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했던 말 가운데 “관객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작가가 토대를 두고 있는 판소리의 정신에서부터 발로된 것이라 생각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관객 사이의 끈끈한 탄성을 다져가며 철저히 공감의 영역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가니 말이다. 무대와의 끈끈한 탄성 안에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50분의 상연 시간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공연과 관객 사이의 끈끈함을 너무 믿으려 하다 보니 기껏해야 정성 어린 우정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과 귀가 지극히 세심하게 열리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어떠한 세계와 정말이지 열심히 맞닿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서사와 상징들을 매우 안전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로 이끌어낸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이를테면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과연 작품 안에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예술의 가치로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2014 수다연극 - 청춘인터뷰 (함스타)

by 함스타

연극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이 하나 둘 차례로 나와서 자기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누구입니다. 스물 여덟살이고요. 데뷔한지 1년 되었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저는 박누구입니다. 서른 두살이고요. 데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등등. 9명의 배우가 각자의 실명과 나이 그리고 데뷔 연차를 밝히면서, 그렇게 <2014>가 시작되었다.

작: 공동창작
연출: 이영석
단체: 프로젝트 그룹 코라
공연일: 2014.02.12. ~ 02.16.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관람일: 2014.02.13.

배우들 자신의 이야기 — 디바이징 씨어터

프로젝트 그룹 코라의 <수다연극>은 이번 <2014>가 처음은 아니다. 2012년 상반기에 <수다연극>의 모태가 되는 공연이 당시 연출이 출강하던 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서 학생들의 실제 이야기를 담아 학기말 공연으로 올려졌고, 이후 앵콜 공연을 거쳐, 같은 해 10월에는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인 두산 아트랩에서 <수다연극: 청춘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2014년 2월, (무려) 예술의 전당에서, (무려) ‘신진 유망 연출가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또 하나의 <수다연극>이 관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안타깝게도 2012년에 몇 차례 이루어진 공연들을 모두 보지 못했지만, 그 컨셉과 창작 방식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었다. 예컨대 연극이 철저히 공동창작으로 구성되었다든가, 연극에서 배우들이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정도는 말이다. 때문에 공연을 보기 전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기대와 의심이라는 야누스의 얼굴로 떠올랐다.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니 ‘삶의 연극화’니 하는 프로그램북의 문구가 이러한 질문에 더욱 불을 당겼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진짜’ 자신들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연극이라는 거짓말, 혹은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거짓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질문에 대한 작품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배우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의 ‘내용’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을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 대한 내용을) ‘연기하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럽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있는 사람은 연출뿐이었다는 것이 이 연극의 최대 아이러니다.)

물론 그렇다. 연극이란 본디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실제인 양 받아들이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약속이 없다면, 그 어떤 말을 한대도 그것은 ‘연극’일 뿐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연극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다연극>과 같이 (그리고 오늘날 다큐멘터리 연극이나 소위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의 연극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공연자들의 실제 이야기로 이루어진 공연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예컨대 <수다연극>의 청춘 배우들은 자신들의 공연에 대해서 ‘연극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분명히 연극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다연극>에서는,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그 말도 거짓말이다.

<수다연극>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연극’이라는 규정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에 항존하여 그것을 아름답고 흥미롭게 만드는 특별한 긴장들이 만나는 지점. 허구냐 실재냐, 거짓이냐 진실이냐, 재현이냐 현존이냐의 문제들이 부딪치는 지점. 이런 지점들을 보다 과감하게 돌파했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 봄직한 굵직한 문제들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2014>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수다’연극의 말, 말,말

<수다연극>을 보고, 혹은 보기 전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술자리에서 들으면 훨씬 재미있을 이야기를 왜 굳이 연극으로 봐야 해?” 혹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극장까지 와서 내가 이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해?”

가능한 대답들 중 유일하게 정당한 대답이 있다면, ‘그것이 들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는가? 잠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대답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당최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인가? 가치라는 게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가? 잠깐, 질문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어 신과 우주에 대한 논증까지 가기 전에 질문의 방향을 돌려보자. 그 이야기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왜 ‘이야기’인가?

2012년에 연출은 다음과 같이 썼다.

“관객은 허구적 캐릭터의 행동action을 ‘보기’ 보다는 무대 위 사람들 삶의 이야기story를 ‘듣게’ 된다. 일상을 영위하는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서 체험이 무대를 채우게 되며, 말하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통해 공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삶의 연극화’와 ‘연극형식의 확장’ 은 그대로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되는 것이다.” (2012년 두산아트랩 <수다연극: 청춘수업>)

2014년의 공연에서도, ‘말하기’가 공연의 혹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라는 연출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 (관객)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말’로써 전달할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공연 후반에 한 배우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고’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공연 내내 그 사고에 대해 에둘러서 암시만 하다가,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다소간’ 털어놓는다. 그렇게 언급을 피하고 싶고, 그렇게 얕게 밖에는 털어놓을 수 없을만큼 그의 인생에 큰 상처가 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리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저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된 도리로서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다 보여주지 않는 배우를 만나러, 속시원치 못한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배우의 가장 사적인 내면의 처절한 밑바닥을 보러 극장을 찾은 것 또한 아니다. 관객은 그저 배우의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을 뿐이다. 그 속에 삶의 진실한 어떤 한 조각이 흔적이나마 담겨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 공명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차라리 배우가 그 당시 느꼈던 처절한 마음을 괴성을 질러서 표현했다면, 막춤이라도 추고 노래라도 불러서 쏟아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관객은 그 슬픔과 상처의 강렬함,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자 달려온 의지까지도 함께 경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관객으로서 나는 그렇다. 배우들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강렬할 수 있을지, 그래서 나를 어디로/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 — 재현과 현존의 경계에서 

르네 마그리트가 평범하디 평범한 파이프 하나를 그리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듯이, 대상은 재현되는 순간 더이상 원본이 아니다. 경험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더이상 그 실재 혹은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결국 <수다연극>은 재현의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무대 위에서 뱉어지는 모든 말들이 단 한 순간도 재현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재현에 그치지 않는 살아있는 순간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세워보고자 하는.

1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이 영화 촬영 현장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좀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이 장면은 실제 경험을 재연한 것도 아니라, 사실상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 분명히 배우들도 그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계속 자신이라는 가면을 쓰지도 벗지도 못하던 배우들이, 재현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역할’이라는 가면을 제대로 쓰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어정쩡한 연기를 보기가 상당히 거북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연출과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 반원형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가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보다 안정을 찾았을 수도 있고, 이야기의 주제가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이 좀 더 깊숙한 주제로 들어가면서 관객의 공감대가 넓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주요했던 건 공간 배치의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객석 발코니를 포함하여 공간을 다원적으로 활용하던 1부와 달리 모두가 관객을 마주보고 일렬로 앉음으로써,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아, 저 유명한 제 4의 벽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더 이상 관객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시선을 주고받으며, 마치 관객이 없는 듯 떠들 수 있게 되었고, 관객들 또한 무대 위 대화를 마치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듯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재현과 현존 사이를 휘청거리며 위험한 줄을 타던 작품은 비록 재현으로 안착되고 말았지만.

삶의 연극화를 꿈꾸며

짐작해 보건대, 연극이 끝나고 연출이 많이 들은 코멘트 중 하나가 “차라리 아주 다 짜고 쳐 보지 그랬어…”가 아닐까 싶다. 아마 제대로 짜고 쳤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작보다 더 완성도 있는 연극, 보기에 즐겁고 편안한 연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연출이 보여준 말을 가지고 노는 뛰어난 감각과 밀도 있는 연출력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이미 가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혹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어려운 법이니까. 프로젝트 그룹 코라가 <수다연극>을 혹은 디바이징 씨어터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싹을 틔운 ‘연극’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소중히 키워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리뷰는 <오늘의 서울연극> 제 41호에서 재수록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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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끼님의 리뷰도 함께 보아요.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2014 수다연극-청춘인터뷰 (한토끼)


 보고 쓴 사람. 한토끼




보러가기 전엔 이영석 연출의 전작 <숨쉬러 나가다>와 같이 말의 밀도가 높은 연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레짐작하고 언어가 주가 되는 연극에 대한 서두를 신나게 미리 써두고 출발했는데. 보고 나니 <우리 사이>와 같은 사실주의적 노선에서 더 나간 쪽으로 분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쓰니 엄청 많이 본 것 같다. 사실 내가 본 4개 남짓 작품들을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나누어본 것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개 안되는 정보라도 잘 나눠서 간수하고 싶어하니까. 아무튼 이영석 연출의 작품들은 당연히 다양했지만 대체로 말이 풍성했는데, 그 때문에 말과 연극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실제 인터뷰같은 수다들이 실제 어느 사람들의 모습들과 겹쳐있었다. 내가 그의 인터뷰를 들을 때에 리얼리티는 리얼리티의 조상이 되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로 이루어진 리얼리티 쯤이 되지 않을까.

<숨쉬러 나가다> 중에서
ⓒ극단신작로2011


연극은 배우를 업으로 결정해 준비 중이거나, 막 시작했거나, 한참 활동 중인 26~33세까지 9명의 배우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대에는 인터뷰 현장인 듯 책상과 물병만이 놓여있다. 각각의 배우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 소개를 하며 시작한다. 몇 살이고, 데뷔한 지 몇 년이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러니까 이 배우들은 자신이 그 배우인 동시에 그 배우를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인터뷰어가 있다. 바로 이 공연의 연출가이기도 한 이영석 연출인데, 그는 직접 무대에 등장해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는 어떤 생각에서 이 배우들을 모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지금의 청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이 공연의 시작이다.

이 과정은 마치 페이크(fake) 다큐멘터리처럼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져서 이 상황이 실제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터뷰인지 아니면 대본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인지 궁금해지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풍부한 현장성을 띠고 있지만 사실 2% 빼고는 다 대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완벽하게 허구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대본 자체가 실제 배우들의 삶과 성격에서 추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다시 쌓아올린 실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적인 허구는 기껏해야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재연한 지점에서만 순간 생겼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형식으로 창작되는 연극을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라고 한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배우들이 참여하는 창작 방법이다. 기존에 준비된 희곡 대신 배우들이 극의 주제 선정과 자료 조사 등 공연 준비의 첫 단계부터 함께 한다. 즉흥극이나 꼬메디아 델라르떼와 비슷하게 보이는 면이 있지만 디바이징 씨어터에서는 참여자들이 진행될 장면과 결말을 미리 합의하여 완성해둔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형식으로 인터뷰 현장을 재현하면서 이 공연에서는 재연의 이중성이라는 긴장감이 생긴다. 관객 모두는 이것이 재연이란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인터뷰 현장을 중계하는 듯 하지만 연극은 원래 짜고 치는 거니까. 관객이 모두 이것이 진짜가 아님을 의심하고 있는 긴장감. 여기에 더하여 어디까지 가정하고 어디까지 속아주어야 하나 고민하는 관객의 이중적 고민. 이러한 지점은 모호함 속에서 관객의 집중을 구하며 극 전반적으로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들의 웃음은 지금 이 순간의 웃음인가, 그때 그 웃음의 재연인가?

이 공연에서 이 모호한 재연성을 지닌 구성 형식으로 조심스럽게 포장해서 관객 앞에 풀어놓는 것은 원래의 소재였던 배우개개인의 잡담 섞인 신변이 오가고 진심 섞인 얘기와 넋두리가 오가는 부산스러운 인터뷰 현장이다. 인터미션이 지나 시작된 2막에서도 연기에 대한 생각에 이어 먹고사는 상황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차분히 이어진다. 여기서 일반적인 연극에서 기대할법한 허구는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관객에게는 다소 김빠질 일일수도 있겠다.

실제 현장인지 아닌지의 진위를 알아내는 것은 이 공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극에서 진짜 인터뷰로 보이도록 집중하면서 조명하는 것은 페이크 속의 새로운 허구적 이야기보다는 인터뷰이의 모습 자체이기 때문이다.

수다연극은 많은 말들로 현실의 어떤 순간과 대상을 다치지 않게 떠다가 정밀하게 다시 풀어놓는다. 이 바탕에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무척 면밀한 관찰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한번 보고 선을 백번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백번 보고 선을 하나 그리는 것. 아마 이 공연을 위한 프로덕션 과정에서도 배우들에 대한 여러 겹의 면밀한 관찰과 이야기 듣기, 꺼내기가 있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 바닥에는 현재를 함께 사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깔려있었을 것이고.

어떤 정황이나 사람을 한마디 말로 정의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때로는 폭력적이다. 어떤 시각의 일방적 설정 자체가 그러하다. 때문에 어쩌면 무언가를 그대로 떠오고 함께 보기 위해서는 수없이 부유하고 떠도는 질문과 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테이블에서 마주하고 나누는 말은 부끄럽거나 솔직하지 못해서 미처 서로에게 다 닿거나 이해되지 못하더라도 그곳의 공기에는 어느 순간 함께 하고 있다는 리얼리티가 떠다니게 마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