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엔론>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사진출처: http://fb.com/doosanart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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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본) 이수인 연출의 전작들 <오이디푸스왕>, <노부인의 방문>, <왕과 나>에서 일관되게 표현된 소거법이 이 작품에서도 당당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텍스트랄지, 소재랄지, 공연 ‘이전’에 존재하는 질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언가의 재료들이 당당하게 ‘소거된’ 채로 공연을 대면하고 있는 느낌. 나는 이것을 이수인 연출 특유의 소거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일관된 느낌의 소거법이 무대 연출로 전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장면 중간 중간에 난데없는, 사실 자주 불필요하게도 느껴지는 이질적 언어들의 삽입법. “ㅆㅂ”, “ㅆ” 같은 욕이랄지 난데없이 쌀랑한 바람 한 줄기 지나갈 것 같은 엉뚱한 유머나 엉뚱한 리액션의 삽입. 특히 이번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삽입된 손발이 오그라드는 ‘헐리우드’ 액션.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전작들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스타일이라고 느끼고 있다. 마치 체홉의 언어 가운데 “차가 식었네요.”와 같은 대사가 주는 이상하고도 쓸쓸한 효과. 그 어떤 짤막한 생경한 틈새를 굳이 삽입하여 장면의 전체 형세를 순간 정지 화면으로(pause) 만들어 놓는 것.

  기존에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이 두 가지 연출법이 이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나 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소거법은 잘 꾸며진 배경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고, 난데없는 이질감의 삽입 역시 철저하고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구현해내는 연출법들이 더욱 공들인 성찬이 되어 차려져 있었다.    

# 음악적인 리듬으로 배열된 장면들의 미학 :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

  작품 초반부터 주식시장의 생리와 용어들이 발설되는 이 연극은 분명 관객들을 몰입할 수 없게 하는 생경한 요소들을 가득 안고 있다. 그러나 주식 시장의 생리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들의 욕망을 표현해내는 능력, 텍스트를 넘어선 미학적인 표현 능력이 결코 한 순간도 이 작품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면마다 시종 음악과 운동이 겸비되는 비트가 모티프를 이룬다. 무릎을 까딱 까딱거리는 배우들의 몸, 인물들 사이에 까딱 까딱 분절되는 대사들, 복잡하게 깜빡 깜빡거리는 주식 시장의 조명등, 금방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장면들의 명멸성 전환. 무대 위의 모든 율동들이 명멸하는 비트의 미감을 입어 다양한 장면들의 성찬을 이루어낸다. 특히 주식시장을 묘사하는 코러스의 막간 장면들은 비트감 넘치는 단체 쇼트의 효과를 준다. 욕설과 긴장과 욕망이 비협화음처럼 부딪치고 화음처럼 섞이며 떠돈다.

 무대 위의 모든 명멸은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자본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명멸로 다가온다. 이 연극 속의 공간은 주식 시장의 공간과 아울러 자본 시장의 공간성, 그리고 우리 욕망의 공간성마저 확장적으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미술적인 언어, 음악적인 언어가 매우 심플한 지대에서 어려운 경제 용어들을 넘어선, 그리고 복잡한 텍스트를 넘어선 간단한 것들을 발설한다.

# 우리 욕망 속의 해부도 :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이 작품은 비단 엔론을 둘러싼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엔론이 부여한 생존의 논리, 그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논리를 닮았다. 다시 말해 엔론이 만들어 놓은 그 ‘텅 빈’ 상자는 자본주의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꼴이다. 우리는 제각기 실체는 텅 비어 있는 상태로‘라도’ 어떤 한 상자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텅 빈 상자인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다시 그 안의 또 다른 텅 빈 상자를 소유하려 한다.

  우리 욕망의 종착점, 혹은 실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이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깜빡 깜빡 명멸하는 빨간 등으로 연출된다. 이 작은 빨간 등의 명멸이 무대 전체에 명멸하는 조명 효과를 주면서 언제라도 이 모든 우주를 폭파시킬 수 있는 위태로운 핵처럼 표현된다.

  이 작품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욕망체이자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 혹은 이토록 큰 덩어리가 되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이 욕망체의 실제를 무대화한다. 여러 개의 텅 빈 상자들과 아주 작은 크기의 빨간 등, 그리고 빨간 등에 투사된 이 무대 전체의 명멸감, 그리고 이 모든 욕망체가 붕괴될 위기 마다 초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세 마리의 쥬라기 공룡들, 공룡들이 뱉어내는 기분 나쁜 (그것마저 비트감이 탁월했던) 소음들로.

  공룡들이 뱉어내는 소음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초침 소리를 닮았다. 무대에서 비트감으로 표현된 사운드 가운데 하나이다. 엔론의 사장 제프리는 공룡의 소리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의 초침 소리인지 모를 것에 시달린다. 그가 보안 요원을 불러 바닥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는데, 보안 요원이 그건 당신의 손목시계 초침 소리가 아니냐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목 즈음이다. 이 작품에 희미하게 <맥베스>의 모티프가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 욕망이 광기가 되어버린 한 사내. 그렇다면 제프리를 추동하여 텅 빈 상자를 가지게 한 앤디는 레이디 맥베스? 더 거슬러 올라가 제프리가 사장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모함했던 클로디아는 뱅코우를 의식한 인물인가.

  맥베스의 입김이 이 작품 안에 서려 있는 것을 감지하게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극히 희미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이 작품을 빛나게 했다. 결코 맥베스를 맥베스‘적’인 모티프로 활용하지 않고, 맥베스의 입김을 희미한 망령처럼 미약하게 서려놓게 한 것. 그래서 돈, 혹은 돈과 비슷한 무언가에 착종된 현재 우리 모두의 욕망체가 맥베스가 품었던 욕망과 어렴풋이 연결되게 하면서 조금 더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실체가 의식된다.

  예고했던 대로 텅 비어 있던 거대한 상자는 결국 아주 작은 빨간 등에 의해 폭파되어버리고 만다. 얼마 전 커다란, 텅 빈 상자가 아주 작은 등의 폭파로 붕괴되어버리는 사태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이 작품 속의 논리를 단지 미국 시장에서 벌어진 사태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모든 논리는 지금 우리의 현재를 장악하는 논리들 그것 자체의 모습이다. 의도적으로 한 장면에서 엔론의 사장을 “선장”이라 지칭하고 “바지나 입으시죠”라는 대사를 삽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객은 이 연극을 보는 내내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았을 것이다. ㉦

2014년 5월 14일 수요일

우리들의 <알리바이 연대기>

by 산책



연극이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고, 나아가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수 있고, 또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관객들이 그것을 불편해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연극을 멀리하거나 싫어 하지 않을까 때때로 걱정한다. 연극이 정말 좋고, 연극 안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편한 문제들을 다루는 작품에 대해서는 쉽게 입을 떼기 어렵다. 연극은 비싸니까, 어려우니까, 그래서 좋아하지 않을테니까. 그래서 나는 극장에 주로 혼자 간다. 이런 것을 알리바이라고 해야 할까? 알리바이라고 할 만큼, 잘못인 걸까?

  <알리바이 연대기>는 나와 다른 공부를 하는, 다른 관심을 가진 10명과 관극했다. 대부분 관극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가, 작년에 여러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더니 기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소개한 나로서는 이 작품이 정말 좋은지, 모두가 좋아할 만한 작품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하게 되었고, 조금은 가슴을 졸이며 극장에 갔다. 2시간 30여분의 긴 공연 시간에, 시국이 시국인 만큼 마음을 언짢게 할지 모르는 내용 때문에 공연 중에도 때때로 마음이 불편했고, 공연이 끝나고는 이 작품에 대해서 (시키지도 않았고,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설명과 변명을 하고 싶었고, 조금 그렇게 했다. 나의 걱정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린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게 들려주고, 보내준 그들의 감상을 최소한의 편집을 거쳐 함께 싣고자 한다.

  1998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193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2014년에서 끝난다. 그러나 무대 위에는 현재의 나(재엽)와 그 당시의 아버지 뿐 아니라, 그 과거를 회상하는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존재한다. 이 인물들은 무대 위의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해방 당시 어린 아이였던 아버지와, 그 시간을 회상하는 아버지, 그것을 다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재엽까지 우리는 동시에 세 가지 시간, 세 가지 시점을 만나게 된다. 지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아버지에 의해 회상되면서 과거가 되고, 재엽에 의해 다시 전달되면서 과거 완료가 된다. 이렇게 겹겹히 쌓인 시간은 그들의 역사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대구에 살아 극중 지명들이 친근하며, 역사를 공부했고, 지금은 심리학을 공부하는 B는 이렇게 말했다.

인물에 대한 초점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세대별로 이 작품을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젋은층에게는 이전 세대들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그려보는 기회가, 노년층에게는 자신의 지난 세울, 커다란 꼭지들을 되짚어 보며 순간 순간 자신의 모습들을 회상하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해방, 한국 전쟁, 4,19, 5,18, 1990년대까지 이어져 온 학생 운동은 나를 비롯한 젊은 이들에게는 지나간 과거, 글로 배운 과거이다. 부끄러운 과거도, 가슴 아픈 사건도 우리에게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은 분명 이 작품을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옆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은 어렸을 때, 광화문 근처에 사셨고, 김재철이 다니는 거며, 시위 장면들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거리를 둘 수 없이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보다 훨씬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고, 재엽의 아버지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힘겹게 고백하는 자신의 알리바이 역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이제껏 정치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다소 냉소적이었다는 선생님의 말이 쉬이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알리바이에 대해 H는 죄를 지은 사람과 우리를,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만드는 것 같다고, 일부, 나쁜 사람들만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P는 아버지의 인생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알리바이 연대기임을 생각했고, 삶의 사실을 은폐하는 알리바이가 우리 삶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P의 의견에 동의한다. 아버지의 고백이 알리바이인 것은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개인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며, 직접 경험하지 않은 우리조차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또한 아버지의 연대기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건들을 떠 올리게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생각했던 나의 알리바이들을 곱씹게 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라지 않은 K는 무대 위로 소환되는 역사적인 사건과 배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와 역사의 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선생님보다, 그 시대를 배워서 아는 우리들보다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덕분에 그들의 감정과 이야기 전체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에 선생님께서는 남명렬 배우가 유려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인상깊었다는 논평을 하셨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타는 자전거는 정말로 매끄럽고 우아하게 객석과 무대를 가로 질렀다. 이 자전거 장면은 K와 H에게는 더욱 특별한 것이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객석 중간까지 들어 오는 배우를 보고 그들은 조금 놀랐고, 무대를 한층 가깝게 느꼈으며, 무엇보다 무대와 함께 호흡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무척 희미하거나, 극단 뛰다의 <바후차라마타>처럼 객석에서 무대로 내려오는 파격적인(?) 공연들을 소개해주고 싶다. 이런 방식이 이제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연극은 아직 대중적인 예술이 아니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재엽의 아버지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여러번 되뇌었다. 이 땅에서는 뿌리 내릴 수 없는 것처럼 외국 책을 사 모으고, 아들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사람 많은 곳에 서라고 가르쳐 왔다. 우리는 이 의미심장한 충고도, 침묵으로 숨어버린 사람들도 비난할 수 없다. C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다수”이며, 우리 역시 그 “다수”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했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고 말해준 P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 “어떻게”가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버지가 침묵해온 시간들은 애지중지 사랑했던 막내 아들에게 힘겹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 C는 일본에서 태어나셨다는 외할아버지가 재엽의 아버지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홀로 상경해 대학을 다닌 75학번 내 아버지를 떠 올렸다. 아버지가 살아낸 그 시간은 어땠을까.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고백할까. 후에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고백하게 될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도 소용없는 것처럼, 아버지를 따라 자전거를 탄 재엽의 모습은 우리가 그 알라비아의 고리를 쉽게 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마지막 순간 관객을 바라보는 부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각자의 연대기를 되돌아 보라는 요청으로 느껴졌다. 극장을 나오면서 J는 이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사회를 건네줄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알리바이 연대기는 재엽 부자의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극장을 나온 우리는 마음이 무거웠고,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미안했다. 그러나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마음에 남은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공동체적 경험이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났으며, 앞으로 조금은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

2014년 5월 12일 월요일

5월 장바구니

by 산책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았고,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마음의 생채기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꼬박 일주일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쉽게 웃고, 떠들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5월의 장바구니도 무척 늦었습니다. 기다리시던 독자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4월에 예매해 둔 <노래하는 샤일록>을 겨우 보고 왔습니다. 도무지 웃고 싶지 않았고, “배”를 언급할 때마다 가슴을 꼭 여며야 했습니다. 공연도, 글도 다 재미없다고,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뷰티플 민트 라이트가 강제로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술은 대체 뭘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노래를 하고, 듣고, 공연을 하고 보는 것은 (강제로 취소 되어야 할만큼) 부적절한 일인걸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연극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굳게 믿습니다. 때로는 위로를 받을 것이고, 때로는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기력감을 떨치고, 힘을 내서 5월 공연들을 예매했습니다. 공교롭게도 5월에 고른 작품들은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우리 사회의 이야기들입니다.



아버지 역의 남명렬 배우와 소년 재엽 및 재진 역을 맡은 지춘성 배우 (2014 서울연극제 연기상 수상)
사진제공: 국립극단

<알리바이 연대기>, 4월 25일 – 5월 11일, 국립극단 백성희 장민호 극장, 김재엽 작, 연출 

2013년에 제50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 연기상 2013 제6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 무대예술상 2013상을 수상했고, 한국 연극평론가협회 공연 베스트 3, 월간 한국 연극 공연베스트 7로 선정되었습니다. 수상 내역, 선정 순위와 관계없이 2014년 지금부터 1930여년까지 우리 사회의 중요했던 사건들을 아버지의 삶, 형과 나의 삶과 연결시키며 새로운 방식으로 되돌아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장바구니가 게시될 때는 이미 막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지만, 아직 못 보신 분이 있다면 이번 가을에 열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도 공연된다고 하니 조금 기다리시면 다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알리바이 연대기> 리뷰 보기




<황금용>, 5월 9일 – 18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윤광진 연출 

이 작품 역시 2013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최우수작품상, 연출상',  김상렬 연극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베스트3', 한국연극지 선정 '베스트7', 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주위의 추천을 받아 예매하게 되었습니다. 극중 황금용은 식당 이름입니다. 이 식당은 불법체류자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정당한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하냐, 그것도 아니랍니다. 이주민과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을 48개의 장면으로 보여주며, 배우들은 여자, 남자 뿐 아니라 곤충으로도 분한다고 합니다. 독일 극작가의 작품이지만 단일 민족을 자랑해 오던 우리 나라도 더 이상 이주민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점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푸르른 날에>, 4월 26일- 6월 8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 센터, 고선웅 연출 

이 작품은 작년에 이미 관극했습니다. 작년에도 많은 이들에게 소개했고, 올해 역시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한 번 더 보려고 합니다. 5. 18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시종일관 무겁거나, 윤리적인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삶이 역사 속에서, 또 사회 안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것, 그러한 질곡을 빗겨가지 못한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화해가 지금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푸르른 날에>를 다룬 이전 리뷰들

2014년 5월 9일 금요일

국립극단 <템페스트> 프레스 리허설

에스티의 첫날밤에

국립극단 450년만의 3색 만남 III <템페스트>
2014년 5월 9일(금)-25일(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출 김동현
무대 여신동
조명 최보윤

일부러 폭풍을 일으켜 배를 조난 시키는 이야기. 어쩌면 이 시점 아니 시국에 도저히 해선 안될 연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프로스페로의 힘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한동안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바다, 배, 침몰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의 상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공연이 이번 사고를 맞춰서 기획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시국에 '이런 연극'을 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아픔을 기억하는 한 방식이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템페스트>는 2014년 4월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나 <템페스트>를 통해 연극을 죄지은 사람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힘은 주로 말을 통해 전달되는데, 특히나 이 작품은 "말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윤색을 맡은 김덕수 작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벌어지는 <템페스트>의 모든 사건은 섬주인 프로스페로의 말에서 시작하고 그의 말로 끝난다. 나폴리 왕 일행의 배가 난파당하는 첫 장면을 비롯해 작품 전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내 말대로 하라는 연출자 프로스페로의 지시와 말씀대로 했다는 무대감독 에어리얼의 보고가 사건들마다 반복된다. 둘이 주고받는 말은 부부의 눈짓과도 같은 신뢰의 언어이다. 친밀한 신뢰의 말은 처음 만난 청춘남녀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조난당한 나폴리 왕자 페르디난드는 낯선 섬에서 만난 미랜더가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을 듣고서야 그냐가 여신이 아니라 지상의 처녀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말로 사랑을 나눈다. (프로그램, 4)
아쉽게도 8일 오후에 있었던 프레스 리허설에서는 세 장면 정도를 부분적으로 시연했기에 그 말들이 구체화되는 모습은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는 첫 장면에서 그 긴박한 상황을 배우들이 무대 앞에 있는 마이크 앞으로 나와 '말함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나, 캘리번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스피커'라는 점은 그의 '괴물성'을 말에서 찾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오달수의 캘리번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궁금해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날 리허설에서는 맨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아주 잠깐 출연할 뿐이었다.) 그외에 여러 배우들이 함께 약속된 움직임을 사용해서 장면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다양한 소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김동현 연출의 이전 작품들의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무대에는 쓰러져 가는 극장 무대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이 작품이 프로스페로의 연극임을 드러내고 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옷을 갈아입는 것 역시 지극히 '연극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