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3일 금요일

우리가 비로소 진실을 내뱉을/삼킬 때: <빈센트 리버>

민예빈

  지난 7월 11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약 3개월간 공연된 연극 <빈센트 리버>가 막을 내렸다. 영국 극작가 필립 리들리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빈센트 리버>는 올해 국내에서 초연되었으며, 연극 <그을린 사랑>, <와이프> 등을 연출한 신유청 연출가가 연출을 맡았다.

   <빈센트 리버>는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빈센트 리버’에 대한 작품이지만, 빈센트 리버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에는 빈센트의 어머니인 아니타와 빈센트의 죽음을 최초로 목격한 데이비(데이비드)가 등장하고, 두 인물의 2인극으로 진행된다. 데이비와 아니타의 대화는 ‘빈센트’로 시작해서 ‘빈센트’로 끝난다.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이유와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아니타 그리고 죽은 빈센트의 잔상에 시달리는 목격자 데이비. 두 인물에게 있어 대화의 쟁점은 연극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 빈센트 리버이나, 연극은 치열하고도 은밀한 대화 속에서 변화하는 데이비와 아니타의 관계에 주목한다. 빈센트가 혐오 범죄로 살해 당한 날의 기억을 꺼내기까지, 두 인물의 이야기는 오래 전의 삶으로부터(아니타는 데이비의 나이였을 적, 데이비는 10대 초반이었을 적으로) 출발한다.

  아니타는 스무 살 남짓할 적에 유부남과 연애하여 빈센트를 임신하고, 이로 인해 엄마와 다툰 후 가출하기에 이른다. 빈센트를 임신하게 되면서 연인과 가족으로부터 관계의 단절을 경험한 아니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아들인 빈센트뿐이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일종의 정신적 죽음을 한 번 경험한 아니타는, 아들인 빈센트에게 모자 관계 이상으로 집착을 보인다. 데이비의 대사 중 빈센트가 대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입학하지 않은 이유는 빈센트의 의지가 아닌 아니타의 의견이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아니타는 빈센트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우려하고 필요 이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아니타의 정서적 결핍과 불안은 그녀의 아들인 빈센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안정적으로 의지할 수도 없고, 어머니의 품을 완전히 떠날 수도 없는 인물로 성장하는 환경을 조성했을 것이다.

  데이비 역시 성장 과정에서 정신적 죽음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폭력적이며, 어머니는 데이비가 어렸을 때부터 암 투병을 했던 병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데이비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며 강요된 이성애주의의 피해자로, 부모에게 순응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은 숨기게 되어 스스로를 억압한다. 특히 건강하지 않은, 병든 어머니의 존재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완전히 심리적으로 분리되지 못하고 강요에 굴복하게 되는 요인을 형성한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연약한 어머니가 있는 가정 환경에서, 데이비가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원치 않는 약혼까지 자행하는 스스로에 대한 억압이 가속화된다. 데이비의 아버지가 우리 사회에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폭력이라면, 어머니는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김으로써 은연 중에 존재하는 압박과 폭력이다.

   아니타와 데이비의 ‘사랑’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측면을 갖는다. 아니타가 유부남과 연애한 것은 불륜으로,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와 사회적 관습의 지배를 받아 금기시되는 사랑의 형태이다. 데이비가 빈센트를 포함한 남성들과 성관계를 가진 것 역시 여전히 금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경향이 있으며, 동성애 혐오는 이러한 사회적 산물이다. 사회적으로 금기의 지배를 받는 불륜과 동성애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몰래 행해지며, 죽음과 버림받음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파멸의 결과는 사랑의 부산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규정한 금기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폭력의 경계선이다.

  금기의 지배를 받는 두 사람에게 중요한 오브제는 술, 마약, 진정제이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아니타와 데이비에게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술, 마약, 진정제 역시 사회 내에서 금기의 지배를 받는다. 술은 연령이 제한되어 있고, 마약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진정제 역시 의사의 처방 없이 복용할 수 없다. 이 오브제들은 사회에서 건강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인데, 아니타와 데이비는 이 금기시된 오브제들을 통해 잠시나마 자신들을 결박하는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탈피하고 서로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한다. 아니타의 술을 데이비가 함께 마시고, 데이비의 마약과 진정제를 아니타가 복용하면서 각자의 도피처를 공유하고, 각자의 가면을 하나씩 벗어버리며 빈센트에 얽힌 진실에 점점 다가간다.

데이비가 경험하는 반동성애적 금기는 빈센트에게도 해당된다. 빈센트는 30년의 삶 속에서 아니타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빈센트와 데이비의 관계는 열렬한 사랑 또는 따뜻한 우정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두 인물은 강요된 이성애주의라는 사회적 관습과 불안정한 가족 관계에 짓눌려 욕망을 숨기고 살아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각자가 경험하는 가족 관계 내에서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억압으로 인해 두 사람의 만남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특히 데이비는 안정적인 ‘집’이 아닌 자신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성관계를 갖길 원하였다.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의 시선과 병든 어머니의 곁에서 빈센트와 데이비는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숨겨야 했으며, 결국 억압된 심리는 서로를 향한 육체적 에로티시즘으로 표출된 것이다.

빈센트의 생전에, 아니타와 데이비의 심리 상태는 금기된 사랑으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라고 공통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빈센트의 죽음은 두 인물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형성한다. ‘빈센트’는 아니타에게 연인과 부모를 대신해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으며, 데이비에게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극 초반부에 데이비는 자신이 빈센트의 연인이었고 그가 살해당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부인한다. 또한 아니타는 빈센트가 소문처럼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며 그 소문을 회피한다. 그러나 두 인물이 부정하고 있던 진실이 점점 벗겨져 가며, 그들은 일련의 퇴행 과정을 경험한다. 각자 가지고 있던 기억을 퍼즐조각처럼 끼워 맞추면서 아니타와 데이비는 자신의 과거와 상대방의 과거를 공유하고 결국 빈센트의 살인 사건에까지 이른다. 데이비의 대사와 함께 텍스트의 공간은 이들이 서있던 집에서 빈센트가 죽은 날 밤 화장실로 이동한다. 그들은 빈센트의 죽음을 부인하며 불안해했던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 빈센트의 죽음을 똑바로 마주보고, 모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니타와 데이비는 서로에게 빈센트였으며, 빈센트가 존재하기 이전에 형성되었던 그들의 결핍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정서적 합일은 ‘키스’로 표현된다. 이 키스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것이 아닌, 빈센트에게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낼 수 있는, 그리고 아니타와 데이비가 서로에게 보낼 수 있는 상처에 대한 애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빈센트 리버>는 2000년에 쓰인 희곡으로, 당시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동성애 혐오 범죄를 소재로 다룬다. 1989년 말과 1990년 초 사이에 런던 서부 지역에서 수차례 발생하였던 동성애 혐오 범죄 사실을 미루어 보면, <빈센트 리버>는 당대 사회의 혐오 문제를 직시하고 파고드는 작품이다. 이 희곡이 쓰인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혐오 문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빈센트 리버>는 2021년 국내에서 초연되었지만, 20년 전이 아닌 현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는 해결되지 않은 혐오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13년 7월 동성 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2014년 이래로 동성 결혼이 시행되고 있다. 동성 결혼이 동성애 혐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자에 대한 선택과 사랑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서구권에서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추세인 반면, 우리나라에서 동성 결혼과 동성애 혐오 문제는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올해 공연된 <빈센트 리버>는 동성애 혐오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우리나라에 문제의 화두를 한 번 더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아니타가 데이비의 이야기를 따라가듯, 데이비가 아니타의 이야기를 따라가듯, 관객들은 두 인물의 대화를 좇아 몇 십 년 전의 추억부터 몇 달 전의 사건까지 일련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두 인물은 각자의 말을 내뱉고 서로의 말을 삼키며, 온 시공간을 무대 위에 펼쳐 놓는다. 작가는 상실을 경험한 아니타와 데이비에게 어떠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관객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빈센트 리버 사망 사건에 대한 일말의 기억을 들을 뿐, 그 이후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얻지 못한다. 데이비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 아니타는 집에 남는 것으로 끝맺는 결말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이야기에 살을 붙인다기 보다는 배우의 입을 통해 말해진 사건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는 그 자체로 현재가 되어 관객들에게 각인된다. ‘앞으로’에 대한 해결책과 가시적인 희망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억압된 삶을 살았던 아니타, 데이비, 그리고 빈센트가 경험한 정서적 결핍과 그러한 삶의 방식이 서로의 관계에 미친 영향을 곱씹어 보게 하며, <빈센트 리버>를 보는 이들에게 ‘앞으로’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다.



<빈센트 리버>

극작: 필립 리들리
연출: 신유청
출연: 서이숙, 우미화, 전국향 (아니타 役), 강승호, 이주승 (데이비 役)
무대: 박상봉
조명: 강지혜
음향: 지미 세르
의상: 홍문기
소품: 노주연
분장: 김남선
관람일: 2021년 5월 9일
충무로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글쓴이 소개

민예빈은 연극과 영화에 대한 글을 씁니다. 존재과 시공간, 언어와 텍스트에 관심을 갖고 비평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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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8일 금요일

광기(狂氣)가 물성(物性)을 만났을 때: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2008,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2021)

글: 조혜인 (https://brunch.co.kr/@hichotheatre)

ⓒ Arno Declair, 2008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은 1947년 처음 개최되어 여름이면 인구 약 8만 정도 밖에 안되는 프랑스 남쪽의 조그만 도시 아비뇽에서 열렸다(임혜경, 76). 아비뇽은 변변한 공연시설 하나 없는 지방의 소도시였는데 유명 배우 장 빌라르와 제라르 필립, 몇몇 뜻을 같이하는 연극인들이 내려와 파리 연극과 차별화하면서 일반인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대중을 위한 연극을 선보였다(임혜경, 76). 포스트코로나(post COVID-19)시대를 맞이한 올해, 이러한 아비뇽의 기운을 담아 LG아트센터에서 기획공연으로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를 선보였다.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과 본 기획공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이 코로나로 발이 묶인 한국 관객들을 위해 LG아트센터 무대로 찾아온다. 올해로 75회를 맞이한 아비뇽 페스티벌은 영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양대 공연예술축제로 손꼽히고 있으며, 이 축제로 인해 작은 도시 아비뇽은 해마다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예술가와 관객들로 북적이는 예술도 도시로 변화한다. (...)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와과 함께 한국 관객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공연 5편을 필름으로 준비했다. 독일의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의 파격적인 <햄릿>, 벨기에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안무가 안느 테레사와 로사스 무용단의 <체세나>를 비롯하여 발표하는 창작극마다 몰리에르상을 휩쓰는 극작가이자 대표 연출가인 조엘 폼므라의 <콜드룸>, 프랑스 오데옹 국립극장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아비뇽 페스티벌 총 감독을 맡고 있는 연출가 올리비에 피의 <리어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프랑스 연극계에 떠오르는 신예 연출가 토마스 졸리의 <티에스테스>까지. 이름 하나만으로도 쟁쟁한 세계 공연예술계 대가들의 작품 5편을 5일간 LG아트센터 무대 위 대형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다. (LG아트센터)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는 LG아트센터 대극장 규모의 스크린을 통해 아비뇽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필자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과 조엘 폼므라 <콜드룸> 두 편을 관람했다.   그 중 <햄릿> 을 중심으로 본고의 논의가 펼쳐질 것이다. 한국 관객인 필자는 아비뇽의 공연과 어떻게 관계 맺었을까?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극’을 선보였다. 아비뇽의 무대 위, 지극히 연극적인 인물들을 통해 필자는 무엇을 감각했으며, 쓸 수 있을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 연극 속의 연극을 하였을까? 샤우뷔네(Schaubühne)의 <햄릿>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극중극은 어떠한 만남을 가질까?

우선 <햄릿>의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스터마이어는 “연극은 삶의 방식에 도전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는 곳이다.”라고 언급하며, 선대 연극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아르또(Antonin Artaud), 메이예르홀드(Vsevolod Emiljevitsch Meyerhold)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성장해나갔다. 이는 <햄릿>에 등장하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실현해 내었다. 오스터마이어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는 원작을 투명하리만큼 해석하고, 원작이 가진 이야기를 ‘지금, 이곳(Here and Now)’의 삶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배우에게 연기적 접근에 있어서 심리적 요구를 하기 전에 작품에서 어떤 장면이 매력있는지, 발전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며 세계관을 만들어간다. 연출가로서 배우에게 작품이 어떻게 해석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흥미로운 텍스트의 부분과 만나게끔 지원하며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오스터마이어는 독일의 동시대 연출가연극(Regietheater)을 공고히 하였지만, 연출가의 컨셉이나 지시에 대한 요구가 아닌 배우가 가진 표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어 또다른 의의가 있다. 오스터마이어는 그가 고집하는 미학을 반복하지 않으며, 매번 텍스트마다 발명을 하듯이 작품을 개발한다. 텍스트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텍스트의 내용을 핵심 삼는다. <햄릿>의 ‘햄릿’ 역을 맡은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는 오스터마이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오스터마이어에게는 희곡의 바닥을 헤집는 일종의 편집적 집착이 있다. 투명해지도록 해석을 한다. 배우에게 세밀하게 설명을 하고 배우는 배역의 역할에 대해 안전하게 느낀다. 그 설명은 리듬과 다이나믹한 구조로 된 일종의 악보와 같다. 거기에 희곡이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재료를 강조하고 아로새길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주어진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명료하고 정확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idinger)

또한 오스터마이어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예를 들어,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언급한 바 있다. 

한번은 오스터마이어가 입센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입센은 나에게 잘 만들어진, 플롯으로부터 촉발된 희곡을 제공해주는데, 이것은 나의 목적을 위해 다시 쓰기와 적용을 가능케 한다.”  

Ostermeier once said of Ibsen. “But he provides me with well-made, plot-driven plays, which I can rewrite and adapt for my purposes.” (Crawley)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작품의 본질에 가 닿으려는 오스터마이어의 작품관이 반영된 <햄릿>은 과연 어떤 공연이었을까?

공연은 햄릿의 아버지인 ‘햄릿 왕’의 장례부터 시작한다. 무대의 온 바닥에는 흙들이 충분히 깔려 있고, 장례식에 내리는 비는 스프링쿨러에서 발사된다. 흙 위에는 앞 뒤로 이동할 수 있는 사각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가로로 된 긴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황금색 체인으로 된 투명막이 내려와있다. 장례 중 햄릿은 손으로 흙을 집어본다. 아버지의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장례가 막 끝나자마자 연회가 시작된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의 결혼이다. 햄릿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애도로 침통해야 할 국가와 왕실에 ‘절제된 마음’이라며 그와 상반되는 분위기의 결혼식이 열린다. 흙, 땀, 물에 흠뻑 젖어 구석에 조촐하게 앉아 은박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햄릿만이 상식적인 애도의 과정을 겪는 국가 및 개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머지 인물들은 게걸스레 식사를 한다. 클로디어스는 거트루드와의 결혼을 선언하는데, 햄릿은 말한다. “전 이런 친자관계 필요 없습니다.”

거트루드의 노래가 이어진다. 괴상한 음색을 내는 거트루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투명막에 이미지로 투사된다. 일렉기타 소리가 삽입되며 그 기괴함은 절정에 치닫는다. 거트루드의 음성은 찢어지고, 햄릿은 거트루드의 위선적인 눈물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거트루드는 베일을 벗자 ‘오필리어’로 변신한다(1인 2역).

햄릿의 국가인 덴마크는 감옥과도 같아졌으며, 햄릿은 실성한 듯 절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 곁에서 디제잉을 이어나간다. (실제로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실제로 DJ 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와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은 햄릿의 기이한 행동에 심히 당황한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나간 식탁 위, 햄릿은 올라가 독백을 한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일에서 흔히 살 수 있는 ‘Ja!’(영어 ‘Yes’에 해당) 우유를 마구 흔들어 뿜어내며 광기에 휩싸인 채 햄릿의 명대사를 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햄릿은 그들이 여기로 오게 된 까닭을 말해준다. 오늘 저녁에 연극이 있을 거란 소식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Sein oder nicht sein, das ist die Frage.”는 다시한번 이어진다. 이번에는 엄숙하게, 비이성적인 햄릿이 아닌 이성적인 햄릿으로 되돌아온 듯 독백을 이어 나간다. 햄릿의 온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으며, 오필리어는 햄릿을 지켜본다.

햄릿은 오필리어와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때, 햄릿의 광기는 또 한번 그 수위가 치솟는다. 필자는 희곡 및 타 <햄릿> 공연으로 오필리어를 접했을 때, 실연으로 인한 오필리어의 자살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둘이 얼마만큼 사랑했기에?’ 라는 물음을 충족시켜주는 공연이 필자에겐 없었다. 그러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고 나니 왜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했을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햄릿은 순백의 옷을 입은 오필리어를 흙 속에 파묻으면서까지 저주하고, 냉대하고, 또 키스하며 자신의 사랑표현을 진심으로 하는 것 같다가도, 또 오필리어를 흙 위로 내동댕이 친다. 흙 위에서 난장을 벌이며 오필리어가 가진 순백의 사랑을 철저하게 더럽히는 장면은 흙이 가진 ‘때묻음’의 속성으로 인해 비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햄릿이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그러한 가학적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가했어야 할 햄릿의 아픔이 진흙처럼 묻어 나온다.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수모를 당했으니 오필리어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감정적 이해가 되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이기에 여성 필자로서 조금은 불편한 부분도 있었지만, 흙이 가지고 있는 물성(物性, Eigenschaft der Materie)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만나 배우의 몸에 뒤엉켰을 때 폭발적인 광기(狂氣, Wahnsinn)가 발산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햄릿의 광기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임과 동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내적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다”(임승태, i). 

햄릿이 연극배우들과 만나 연습을 한다. 특히 연극에서 죽음 이야기를 할 때 숙부를 잘 관찰하라고 당부한다. 연극의 이름은 <쥐덫>이다. 연극을 보기위해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가 등장하고, 이 때 관객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 투명막에 투사된다. 극장에 앉아있는 관객들 또한 같이 <쥐덫>을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점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창출한다. 햄릿 역의 아이딩어는 거트루드로 상징되는 역할로 등장한다. 두 젖꼭지에는 주스를 흘려 마치 피흘림을 연상시키고, 랩으로 왕 역할의 배우의 몸을 마구 감싼다. 왕비 역은 왕 역의 몸에 우유를 붓는다. 왕 역은 괴로워한다. 이어 붉은 피가 부어진다. <쥐덫>의 모든 이야기는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양심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왕이 곤히 자고 있을 때 독살당하는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 역은 결국 죽고, 그의 왕관은 왕비 역에게 간다. 독살 장면에서 배우와 클로디어스의 눈이 마주친다.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는 도망가고 햄릿은 기쁨의 춤을 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할까?

<햄릿>에서 배우들은 직접 카메라를 잡는다. 이런 카메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덴마크 왕실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장치이자 햄릿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햄릿이 계획한 연극 <쥐덫>이 끝나고 배우 아이딩어가 왕비 역에서 햄릿 역으로 전환할 때 햄릿의 배불뚝이 몸매를 위한 속옷을 착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장실 뒤에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고스란히 인지시킨다. 이러한 극중극에 대해서 심정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연기 스타일에서는 ‘가식과 위장’이라는 기본적 원칙으로 반영된다. 그가 뚱뚱보 의상을 입고 뚱뚱한 왕자로 나왔다가, 극 후반에서 뚱뚱이 의상을 벗어 던지는 것도, 가식과 위장의 세상적 현실을 조롱하는 하나의 오브제적 장치다. (심정순)  

이인순 또한 이러한 전환의 사이를 "‘연극적 행위를 감추려 하지 않기에 오는 행위의 진실’로 다가왔고, 또 소외효과가 가져오는 ‘연극놀이’의 자유로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이인순, 254). 또한 극중극은 “허구와 현실, 과정과 결과, 그리고 내용과 형식의 공존 및 이중성에 대한 연극적 사유인데, 이중성은 햄릿의 광증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이기도 하다”(임승태, 43). 광기는 ‘비규범성’과도 맞닿는다. 햄릿은 엉뚱하게 신부복을 입은 채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때 거트루드 앞에서 폴로니어스를 총살한다. 거트루드는 말한다. “Was habe ich getan?”[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Was ist mit dir?”[너에게 무슨 일이 있니?] 특히 거트루드가 오필리어로 전환되는 과정은 인상적이다. 필름이 곧 끊길 듯한 영상이 앞뒤로 반복되듯 배우 ‘예니 쾨니히(Jenny König)’는 반복동작을 취하며 오필리어로 변한다. 무대 위의 흙을 온 얼굴과 몸에 뭍이는 행위를 하고, 오필리어의 마지막은 ‘몸에 생수를 부어’ 표현한다. 흙과 물, 즉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사의 본질을 통해 오필리어의 죽음이 다가온다. 오필리어는 익사하는 장면에서도 대사를 하는데, 그 대사의 리듬마저도 영상이 끊길 때 나는 소리처럼 들린다. 온전히 익사하자 더 이상 오필리어의 말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CD가 불안정하게 튕겨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햄릿은 덴마크로 돌아온 ‘레어티스’와 결투를 치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햄릿의 광기 때문이다. 이 때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햄릿은 다시한번 소리를 치며 “Musik ausmachen!”[음악 꺼!]를 외친다. 음악이 꺼진다. 햄릿의 적은 그 자신의 광기인 점을 다시한번 주지시킨다. 드디어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레어티스는 검을 뽑아 들고, 햄릿은 식탁 위의 숟가락을 집어 든다. 그 사이에 클로디어스는 잔에 독을 타게 되고, 거트루드는 그것을 마신다. 계획에 의해 레어티스의 검에 독이 묻어 있다. 햄릿은 검에 맞는다. 숟가락을 놓은 햄릿 또한 레어티스를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로디어스를 찌른다. 광기에 어린 햄릿의 복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죽어가는 햄릿과 무대를 채우는 진공소리가 남는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아우성을 친다. 햄릿의 절규는 온 덴마크를 찌르고 마지막까지 광기의 동아줄을 붙잡는다.

필자는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보며 햄릿의 ‘광기’에 집중했다. 과연 햄릿이 정신이 멀쩡하지만 끝까지 미친 척을 하는 걸까? 혹은 햄릿이 미친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 정말 미쳐갔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햄릿’만이 그 진실을 안다. 또한 2021 아비뇽 시네마 페스티벌의 <햄릿>은 흙, 물 등 물질이 주는 감각을 스크린을 통해 함께 느끼게 하면서 배우의 감각을 더욱 상상하게 했다. 비록 스크린이라는 겹이 있었지만, 만약 <햄릿>이 공연이 아닌 ‘영화’를 위한 상연이었다면 그만큼 배우의 감각에 대한 상상력에 함께 동참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햄릿이 흙을 먹는 장면이나, 오필리어가 흙을 뒤집어쓰는 장면 등에서, 만약 영화였다면 흙이 주는 냄새나 질감 같은 물성에 대해 간과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물성이 두드러지는 공연일수록 객석에 앉아서 배우와 함께 호흡할 때,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가 물질을 감각하는 것을 함께 더 상상하고 반응하게끔 해주는 것 같다. 만약 실제 아비뇽 객석에 앉아있었다면 그 감각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오스터마이어는 우리들 가까이로 와서 느끼고, 감각하게끔 하는 소통방식을 실천해냈다. <햄릿>의 배우들이 심리적 연기를 지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몸’을 통해 또다른 소통방식을 만들어냈다. 특히 흙, 물질은 이미지라는 정반대의 질감과 충돌한다. <햄릿>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신체와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처럼 <햄릿> 공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물성은 ‘햄릿’이 가진 지독한 광기가 인물들에게 전염되며, 또 다시 공연이 가진 물성이 전염된 광기들과 만나며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경험을 선사해준다. 특히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은 현대인의 고독이 잘 표상화 된 공연으로 아래와 같은 평가는 2021년 현재에도 유효하다. 

객석의 관객은 고통의 열병에 들떠 있는 광기의 청년 햄릿에게 때때로 감정이입이 가능해지고, 햄릿의 동시대적인 거친 언어는 일상에 억압되고 축소된 젊은이들에게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 공연은 포스트모던적인 신체 중심의 감각적 표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적 파스티쉬(pastische) 스타일”(심정순), 그리고 신사실주의가 만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내재된 보편적인 주제 – ‘삶과 죽음’, ‘삶과 연극’, ‘허상과 실제’ – 에 작금의 청년문화가 함께하면서 글로벌한 ‘대중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인순, 264)

이와 더불어 필자는 <햄릿>에서의 극중극은 단순한 복수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고, 감정이입을 통한 보는 이의 양심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검’과 같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관객으로 하여금 선악을 판단하게 하고, 극 속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과 골수를 쪼개는 힘’이 바로 연극에 담겨있다는 반증이다(히브리서 4:12). 이상으로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리뷰를 마무리한다. 두드러지는 광기와 물성으로 인해 2000년대 초반 공연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2021년에 스크린을 통해 만나보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공연예술 관계자들 및 관객들이 아비뇽으로 ‘몸(Körper)’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LG아트센터에 방문해 거리두기를 하며 아비뇽의 옛 공연들을 관람했다. 특히 코로나가 어서 종식되어 <햄릿>과 같은 공연으로 많은 관객들이 배우와 물성을 더욱 가깝게 감각할 수 있는 공연예술계로 나아가길 소망해본다.

참고문헌

심정순.「오스터마이어 <햄릿>: 몸, 감각,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미장센」. 『오늘의 서울연극』제1호, TTIS 편집부, 2020. 10.

“아비뇽 시네마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 LG 아트센터, http://www.lgart.com/UIPage/perform/calender_view.aspx?seq=252591

이인순.「공연분석: 오스터마이어의 <햄릿>(프랑스 2008, 한국 2010)」, 『한국연극학』 Vol.1, No.52, 2014, 229-270. 

임승태.「한국 <햄릿> 상연에서의 광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임혜경.「60주년이 된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과 이론』Vol.- No.23, 2006, 78-86.

Crawley, Peter. <Ostermeier’s ‘Hamlet’: what did you expect?>. THE IRISH TIMES. 2014-08-23, https://www.irishtimes.com/culture/stage/ostermeier-s-hamlet-what-did-you-expect-1.1901339.

<햄릿(Hamlet)>.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라르스 아이딩어, 예니 쾨니히 출연. 샤우뷔네 제작.  2008.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LG 아트센터, 2021. 5.

Eidinger, Lars. 인터뷰.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기예술학과 연기양식론 수업자료 (교수자: 최영주),  조혜인 정리, 202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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