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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일 토요일

뒤늦게 스텔라의 "마리오네트" 뮤비를 보다

에스티

1.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별star과 별자리constellation의 어원적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어원 stella를 얘기하던 중이었다. 나는 스텔라 얘기를 하면서 그 아이들은 소문으로만 들어 겨우 알고 있는 현대 스텔라를 예로 들고 싶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내가 스텔라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자 마자 자동적으로 미묘한 탄식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다른 아이들도 뭔가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7세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런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건 단 한가지 밖에 없는데, 불행히도 나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스텔라를 알려주려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택시로 쓰이던 차를 예로 들려고 했던 나의 불찰이 컸다.

이제 내가 학생들에게 배워야 하는 상황이 왔고, 학생들은 기꺼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스텔라—공식 스펠링은 Stellar인 듯한데, 통상 Stella라고 쓰이고 있다—는 걸그룹의 이름이며, 그 이름은 무척이나 선정적인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얼마나 야하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져서 오늘 집에 돌아가서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나에게 세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는 부인 몰래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소리를 죽이고 엄마 몰래 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심어린 충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 조언은 다름 아니라 “성인 인증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2.
“참혹하다. 한국 대중음악은 외형적으로는 'K-pop 한류'라고 해서 대중음악 산업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음악을 학살하고 난 뒤 얻은 대가다. 링컨이 그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순간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라고. 한국의 음반 산업은 IMF를 지나면서 한번 몰락했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극적 도약에 성공했지만,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이런 것은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한순간 존재하는 페이크(fake)일 뿐이다. 이제 음악은 휴대전화 컬러링처럼 아무 때나 바꾸는 배경음악을 만드는 자나 소비자에게나 그냥 1회성 소비재일 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나 스스로 대한민국의 몇 안되는 1급 문화예술 비평가라 평가하는 강헌 선생이 한 인터뷰에서 2014년 현재 우리 대중음악에 대해 한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복근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걸신”이라 부를만큼 미식가, 혹은 음식 애호가인 강헌 선생이 남자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의 대목에서는 일차적으로 소녀란 말에서 소녀시대가 떠올랐지만, 그와 함께 그제서야 스텔라가 떠올랐다.

3.
이 뮤비가 공개된 지 거의 반년이 지나고서야 나에게 소식이 들려왔다는 건 이 프로모션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유튜브의 조회수가 470만을 넘겼다는 것보다 시청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에 있다. 이 뮤비에 대해 시청자 중 3만 2천여명이 '좋아요'를 클릭했는데, 그에 못지 않게 2만 9천여명이 이 뮤비가 싫다고 표하고 있다. 이 수치는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뮤비나 가인의 “피어나” 뮤비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 두 뮤비에도 '싫어요'가 없지 않지만 '좋아요'에 비해 지극히 작은 수에 불과하다. 보통 정치적으로 논쟁 거리가 있을 때에나 찬반이 비슷한 숫자로 표시되기 마련인데, 도대체 이 뮤비는 뭐가 문제였길래 시청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안좋았음’을 표하게 만들었을까?

가사를 대충 살펴보면, 화자는 헤어진 연인에 대해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그 연인은 다시 돌아올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연락을 한다. 옛 연인에게 놀이감 밖에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화자는 자신을 “너에게 찢기고 아프고 아픈 인형” 마리오네트에 비유한다. 실연의 아픔과 자기 연민을 노래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안무 또한 제목과 가사 내용에 호응하여 끈에 메달린 인형을 재현하는 동작이 적지 않게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멤버들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나머지 동작들이다. 무엇보다 “지울 수가 없는 너니” 부분에서 반복되는 움직임, 즉 두 팔을 등 뒤로 뻗어 잡고, 오른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 딛은 다음 엉덩이를 반시계방향으로 느리게 3회전 하는 대목과, 뒤로 돌아 자기 엉덩이를 손으로 밀어 올리는 동작은 요즘 언론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충격적”이다. 게다가 카라가 “미스터”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펑퍼짐한 의상을 입고 이루어진 반면, 스텔라는 이 춤을 레오타드를 입고 추고 있으니 이 정도면 국내 심의가 허용하는 최대치라 할 수 있다. 이 영상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언론 반응을 보면 이 정도면 19금이 아니라 “29금”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련된 대부분의 기사는 노이즈 마케팅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텔라 멤버들이 이 뮤비에서 마리오네트를 재현하는 것은 텍스트의 요구로 보인다. 노래 가사를 대충이나마인지한 시청자들은 미련 때문에 여전히 끌려다니는 (아마도) 여성 화자에게 감정 이입을 시도하게 되고, 그리고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멤버들의 몸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그들의 춤은 그 자체로 상품화된 인형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몸의 관능성이 텍스트와 충돌을 일으킨다. 마리오네트 같은 처지의 화자의 마음에 공감하기는 커녕 기획사 사장님이 내건 줄에 자기 몸을 맡긴 네 명의 인간 인형을 보게 되니, 이 모순은 결코 즐거운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리오네트”라는 제목은 역설적이지만 이 뮤비의 핵심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4.
순전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눈높이에 다가가고자 “마리오네트” 뮤비를 찾아보았으며, 순전히 이 글을 쓰기 위해 반복해서 보았음을 힘주어 밝힌다. 나는 무려 데뷔한 지 3년이나 된 스텔라를 오늘에야 알게 된 문외한이다. 혹 스텔라의 팬들이 이 글을 읽고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싶고, 어떤 점이 좋은건지 알려주길 희망한다.

참고자료

마리오네트 공식 뮤비
http://www.youtube.com/watch?v=NCQpzHPYRUc

No Cut Version
http://www.youtube.com/watch?v=ObmOW5GZRP8

http://heungseon.com/5704 (가사 참고)

강헌 인터뷰 전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049

2014년 3월 2일 일요일

[두산아트랩] 몸-주체로서 여성, 소리-주체로서 소리꾼: 판소리 단편선 <추물 / 살인>

by 백인경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 그대의 이름은 ‘배우’!

그러나 ‘체화(embodiment)'라는 개념이 서양 연극사에 등장했던 18세기부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자유란 일종의 속박과도 같았다. 그 체화의 개념이란 한 인간으로서 배우 자신을 비워내고 텍스트가 묘사하는 등장인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도 그도 아닌 그 즈음에서,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대 위의 생명체들; 배역을 창출해내는 정신적 주체이자 그 자체로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에 봉헌되는 배우의 신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자 그만큼 더 가혹하고 냉철한 시선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여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텅 빈 무대 위에서 우뚝 서서 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어떠한가? 심청이도 되었다가 심봉사도 되었다가 돌연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연설명도 곁들이며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판을 끌고가는 소리꾼에게도 철저히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고충들이 있었을까? 이번 두산아트랩에서 진행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은 공연예술의 특정 장르를 떠나 무대 위의 다양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 스스로가 노래하는 소리꾼으로서,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판소리와 연극에 대한 오랜 고민과 실험을 무대화했던 이자람(@jjjjjam)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과 손을 잡고 주요섭의 단편 소설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자람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비슷한듯 또 다른 다양한 소리들을 만날 수 있었던건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진과 이승희는 각각 <추물 / 살인>의 소리를 맡아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끌고 나갔다.


2014년 2월 7일 금요일

[두산아트랩-4] 지호진 작/연출 "왕의 의자"

by 에스티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연극을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내는 액션 스펙터클로 설명하는 지호진은 야망이 큰 연출가이다. 두산아트랩의 2014년 네 번째 공연 <왕의 의자> 또한 그가 지향하는 “피지컬 씨어터”의 노정에 있는 작품이기에 관객은 영화에서나 보던 ‘액션 활극’을 코 앞에서 펼쳐지는 ‘라이브’로 본다는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다.


연출이 설명한 대로의 “피지컬리티”, 즉 배우들의 합을 통해 만들어내는 액션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70분 공연의 마지막 10분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화려한 액션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했지만 앞서 60분의 공백이 그만큼 크게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물론 공백이란 표현이 꼭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앞에서도 배우들의 군무와 아크로바틱이 장면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몇몇 배우들은 뺨을 적잖이 맞기도 하고 등짝을 맞기도 한다. 왕에게 주어진 장검은, 비록 이가 나간 게 보이는 모조품이라 하더라도, 꽤 근사한 바람소리를 만들어내고, (실수로 보이긴 하지만) 잘못 휘두른 칼은 객석으로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반대편 객석에 앉은 관객은 코 앞에서 풀스윙으로 휘두르는 골프채 때문에 적지않은 ‘신체적’ 긴장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서사이다. 짧은 공연 시간과 프로덕션의 목적을 고려할 때 서사는 “피지컬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데 봉사하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할텐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할애되고 말았다. 연출이 제작노트에 쓴 다음의 문장에는 많은 고민이 들어 있다:

“더욱 간결해진 서사로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움직임과 무대 활용을 통해 피지컬 씨어터의 특징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사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작품 제목에 완벽하게 압축 요약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게다가 객석에 앉은 이후 약 15분 가량 무대 벽면에 이글거리는 형상으로 영사된 제목을 보고 난 후에는 더더욱,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는 특별한 흥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작가이기도 한 연출의 입장에선 할 수 있는 한 간결하지만 전형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겠지만, 공연의 목적이 이야기의 재미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관객이 당혹스러울만큼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이어도 괜찮지 않았을까?불면증에 시달리는 왕은 나로서는 맥베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차라리 <맥베스>를--<햄릿>이나 <보리스 고두노프>라도 상관없다--필요한 만큼만 가져와 신체 움직임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짧은 공연이라도 이야기를 완결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모든 극작가에게 던져진 저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고전적 올가미는 결국 드라마가 연극 전체를 지배하고 나머지 요소들은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봉사하도록 이끄는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탈춤의 쓰다만 듯한 스토리텔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 속에서 웅얼웅얼하는 대사들은 잘 알아듣기도 힘들고 앞뒤 설명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관객이 알아야 할 이야기는 대체로 명쾌하게 전달되고 그 속에서 연희자들의 몸과 춤사위는 빛을 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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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의 2014 두산아트랩 리뷰 더 보기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두산아트랩2] 안은미 세컨드 컴퍼니의 '19금' <생활무용>

by 에스티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극장에서 보낸 핸드폰 메시지에서부터 극장 앞의 안내 문구까지 흡연, 음주, 전라는 계속 강조되었다. 공연이나 공연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나에게는 반복해서 전달된 이 사전 경고 때문에라도 이 장면들에 더 집중해야 할것만 같다. 공연 시작 전 담당 프로듀서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상기시켜주는데, 흔히 듣는 이 한마디가 오늘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예술적 표현으로 봐달라."

담당 프로듀서는 두산 아트랩과 무용단에 대한 짧은 소개 뒤에 지나가듯 이 말을 덧붙였지만,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전달되는 이 메시지에는 무언가 극장측의 절박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궁금증을 만들어낸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극단 애인, 《손님》

by 에스티

<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사샤 발츠 "S"의 몸과 섹슈얼리티

by 김세진

S, © Bernd Uhlig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남자의 나체, 외설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한 덩어리의 물체처럼 보인다. 잠시 후 남자, 여자, 어린 사람,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나와 그 물체 같은 남자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체인 여자와 누워있던 나체의 남자가 만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고정되어 있던 물도 흐르기 시작한다. 사샤 발츠Sasha Waltz의 ‘S’의 시작이다.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세 여자의 자서전적 몸 <치마, 살>

by 이흔정

2013 박소정 콜렉티브 콜라보
2013. 8. 5(Mon)~6(Tue) pm8:00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

텅 빈 무대에 세 개의 서로 너무나 다른, 그러나 또 같은 ‘몸’이 있다. 관객은 세 명의 무용수 박소정, 정정아, Christine Fletcher의 몸을 만난다. 처녀의 붉은 치마에 감춰진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공연 포스터를 보고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세 명의 몸은 자못 실망스러울 수 있다. 매력적으로 잘 가꾸어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런 몸을 상상했다면 말이다. 정정아와 박소정의 몸은 현대무용으로 다져져 다부지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여성의 몸이다. Christine은 키가 족히 180cm는 돼 보이고 머리는 백발에 가까우며 탄력을 잃고 주름진 몸이다. 우리가 무대에서 장시간 ‘보고 싶은’ 몸들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볼수록 점점 그들의 몸이 궁금해지고 또 사랑스러워진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레드마리아>, 여성의 삶은 배에서 시작된다.


by 김재영

<레드마리아> (2012, 경순 감독)

 여성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

 <레드마리아>는 한국, 일본, 필리핀에 살고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사실, 여성의 몸과 노동의 문제를 남성인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노동한다는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자는 목소리에 공감해 본 적도 없다. 여성의 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쯤으로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이런 무관심은 여성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남성인 내가 가해자 집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선입견과 피해의식으로 인해 나는 정작 여성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셰임>: 자학하는 몸의 ‘바디 호러’


by 시뫄

여름에는 마치 공식처럼 호러 영화 포스터 한 두 개 정도는 영화관에 걸려 있기 마련이다. 계절에 상관 없이 일년내내 호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특히 여름처럼 심신을 지치게 하는 무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영화관에서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흐르게 하는 호러 영화 한 편이면 여느 피서지 부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호러 영화는 소재와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물론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감독의 <셰임> (Shame, 2011)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호러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 혹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공포를 끄집어 올리게 하고 그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공포가 몸의 생생한 파괴와 타락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셰임>은 '바디 호러' 영화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은교> : 몸을 보다 / 몸을 읽다


by 백인경


영화 <은교>를 보게 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열일곱 소녀와 일흔 살 노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일흔 살의 박해일이 궁금했다. 거대한 광고판에서 마주친 노인 박해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피부와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순수하게, 어떠한 상상도 기대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슬프고 조금 불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아렸다. 은교의 발가벗겨진 몸이, 서지우의 무기력한 런닝 셔츠가, 노인이 ‘되어버린’ 이적요의 불룩한 배가, 피고 지고 시들어가는 꽃송이처럼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 내밀면 만져질 것처럼.


2013년 8월 8일 목요일

변신, 또는 병신: 극발전소 301, <병신3단로봇>

by 산책

극발전소 301, <병신3단로봇>,
정범철 작, 연출, 키 작은 소나무 극장.

몸 

 무더운 여름이다. 여름은 사람들에게 “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 같다. 세 번의 복날에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라도 몸 보신을 해야 할 것 같고, 탄탄하고, 날씬한 몸을 위해 여름이 오기 전 미리 준비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갖게 만든다. 7월 초부터 “늦었지만 이제라도”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기 위한 팁을 알려주는 각종 동영상이 SNS를 타고 나에게까지 왔다. 정말 7일만 하면, 영상 속의 저 사람 같은 몸을 가질 수 있는 건지 궁금하고, 준비되지 않은(?) 내 몸을 괜히 내려다 보게 되고, “7일만에”, “하루 10분으로” 라는 제목을 믿어 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들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고통 보(이)기 - 프로메테우스 vs 토마스

by 에스티


극단 골목길, <그 사람의 눈물>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지경화 각색, 박근형 연출, 게릴라 극장)




먼저 아버지께서는
이 들쭉날쭉한 암벽을 천둥과 번개의 화염으로
부수어 그대의 몸뚱이를 감추실 것이고,
그러면 바위가 팔을 구부려 그대를 꼭 붙들게 될 것이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대는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오. 그러면 제우스의 날개 달린 개가,
피투성이가 된 독수리가 게걸스럽게도 그대의 몸뚱이를
큼직큼직한 고깃덩이로 갈기갈기 찢게 될 것인데,
이 불청객은 날마다 다가와서
그대의 거매진 간을 포식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그러한 고통의 종말을 기대하지 마시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16-26행)


결박된 그를 보는 것은 그와 한핏줄이자 제우스의 명에 따라 그에게 굴레를 씌우고 쐐기를 박아야 했던 헤파이스토스에게도 탄식이 나오는 일이다. 이에 대한 코로스장의 증언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프로메테우스여, 누구든지 그대의 고통을 보고도 동정하지/ 않는 자는 무쇠의 심장을 갖고 있고 돌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어요. 나는 이런 광경을 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막상 보고 나니까 가슴이 아파요. (242-45. 코로스장은 보기 전에는 그 장면이 가슴 아플 거라는 건 왜 몰랐을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런데 보는 사람에게 이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의 형벌은 프로메테우스 자신에게는 단지 몸이 힘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조그만 나무 가시 하나가 손가락에 박혀도 괴로워하는 범인들과 다르게 그리고 있다. 그는 굴레나 쐐기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결박으로 인한 몸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신적인 명예와 위신에 가해진 “모욕”이다 (97). 이 위대한 신이 지금 이순간 두려워 하는 것은 누군가/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인데(127), 왜냐하면 그는 누구이든 간에 자신의 고통을 ‘보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18). 이처럼 이 극은 서로 반대되는 것, 즉 보는 고통과 보여지는 고통을 동시에 말한다. 역설적인 것은, 그리고 그래서 메타극적인 것은, 그것이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충전된 극장에서 벌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남의 고통을 (맛)보기 위해 이 무더운날 스스로를 어두운 극장 비좁은 객석에 꼼짝없이 결박시켰으니 말이다. 불행히도 나의 가학적 욕구는 충족되지 못했다. 나는 무대 위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보면서 나또한 코로스장의 심정을 가질 수 있기를, 또는 내가 텍스트에서 발견했던 고통의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이 둘 모두에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목과 팔에 감겨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쇠사슬이 자극적인 볼거리에 익숙해진 내게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무대 뒤편 목재 구조물에 팔을 메다는 장면으로는 내 몸도 상상력도 별반 동하지 않았다. 일단 나는 나의 무딘 감수성을 탓해본다.

내각 찾던 것이 칼이라면 그것은 배우의 몸이 아니라 텍스트에 꽂혀 있었다. 원작 초반에 “힘과 폭력”이라는 추상적 캐릭터가 나와서 프로메테우스와 고통의 문제를 주고 받는 장면은 잘려져 나가고 그 대신 프로메테우스가 결박되게 된 계기--대다수의 한국 관객들에겐 여전히 낯선 그리스 신화--가 친절하게 삽입되어 있다. 그 대신 이오의 어머니, 헤라, 그리고 제우스가 등장한다. 이오의 어머니/헤라 그리고 헤파이스토스/제우스를 각각 일인이역으로 배정한 것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인물을 한 사람의 배우가 (다른 가면을 쓰고) 연기하도록 하여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희랍비극의 연기 방법론에 맥이 닿아 있지만, 이오의 아버지를 왕(河神)에서 대장장이로 슬쩍 바꿔 놓은 것은 그다지 납득되지 않는다. 거지들로 코로스를 구성한 것에서 이번 개작의 방향성을 어림 짐작해본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건내 받고 나중에는 도리어 그를 배신하는 자들로 보여준 것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되 책임감은 커녕 그 말을 희화화시켜버린--물론 그것은 정치인들의 지독한 저질 개그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군중들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해석의 단서를 프로메테우스의 대사 중 “운명", “사람사는 세상"과 같은 단어들에서 찾는다. 나는 작가나 연출이 이 작품에서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는 안목에, 아니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 찬사를 표한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박근형의 작품(<마라/사드>, <햄릿> 등)에서 발견되는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적 암시는 그의 작품을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좁은 연극 무대 속에서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는 정치적 코멘트도 보기에 따라서는 ‘급진적’인 정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체제 순응적인 예술이 오랫동안 "순수" 예술로 자리 매김해온 환경 속에서 예술로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튀는 행위일 뿐더러, 정부 여당의 입맛에 맞지 않는 발언을 했다가는 재정적 지원이 아니라 정보기관의 관심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혹시라도 동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관객들은 작품의 형식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며 그것을  예술지상주의적 강박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억될만한 아방가르드 운동이 언제나 내용과 형식의 양측면을 포괄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공연에서 보다 실험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상투적인 의상이나 분장, 그리고 사실적인 효과음 등은 각색을 통해 되살리고자 한 텍스트의 생명력을 불어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경우 이 공연에서 가장 긴장감을 느낀 순간은 극 초반부에 프로메테우스가 불이 담겨진 화로를 들고 등장했을 때이다. 그때 나는 먼저 배우의 손이 뜨겁지 않을까 걱정했고, 곧이어 안뜨겁게 조치했을 거라는 생각에 시시해졌고, 그런 다음에는 화재에 대한 非극적이지만, 극장에서 자주 발생한다는 점에서, 극장적인 걱정에 잠시 빠졌다. 역시나 연극은 “위험한 예술”이다.

불평같은 말들은 이 정도로 하고 질문을 바꿔보도록 하자. 내가 그때 거기서 보고 그래서 느끼고 싶었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대 위에서 실제 고통의 교류가 가능하고, 또한 바람직한가? 당장 교과서적인 행위예술가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가 생각난다.아브라모비치는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이라는 제목의 1975년 퍼포먼스에서 2파운드짜리 꿀 한병을 숟가락으로 퍼먹었고, 와인 한병도 비운 다음 자기 배에 면도칼로 별을 그렸다. 그런 다음 채찍으로 자기 등을  그리고 얼음덩이 위에 드러누웠다. 물론 이때, 역시 이 또한 교과서적인데,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보다 못한 관객들은 그녀를 얼음 위에서 끌어내렸고 공연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이 ‘고통의 교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고 있기가 매우 불편했다는 점이다. 이런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그것이 차력도 마술도 아니라 그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행위로 발생하는 고통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불신의 중지 없이 일어나는 정서적 교류?) 그런데 흥미로운 변화가 2007년에 있었던 아브라모비치의 리바이벌, 혹은 레플리카에서 발견된다. (원하는 경우, http://youtu.be/-82PqjE8Qz4?t=55m11s에서, 55분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75년 퍼포먼스와 거의 동일하게 꿀-면도칼-얼음-채찍의 순서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한 번에 별 한 변씩 총 다섯 세트로 나눠서 진행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제 더이상 아무도 얼음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네 차례 얼음에 올라가고 채찍질하고 별의 다섯 변을 다 완성 하고 나서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고 퍼포먼스를 끝낸다. 이렇게 끝까지 하는 것이 그녀가 75년에 원했던 것일까?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 일을 반복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몸이 여기에 적응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얼음 위에서, 그리고 채찍질을 하면서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조용히 끝까지 지켜만 보는 관객에게 그녀의 고통이 전달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녀의 지난 30년의 경력으로 인해 이제 관객에게 그녀는 일종의 차력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이다. 어쩌면 원활한 공연 진행을 위해 관객들의 개입이 사전에 차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의미에서 개입이 불가능했던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의 기록에 따르면, 75년 당시에는 그녀가 얼음 위에서 30분 동안 꼼짝 않고 누워 있은 후에야 관객 몇명이 나와서 그녀를 얼음에서 끌어내렸다고 한다. 어쩌면 2007년의 관객들은 그때에 비해 너무 빨리, 비록 테이블 위에서 메트로놈이bpm 60 정도로 또각거리고 있긴 했지만, 전환되는 그 속도에 도무지 개입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공연은 완성되지만 고통은 구제받지 못하고 소모되어 버린다.
나는 애초 이 글에 김형준 감독의 <용서는 없다> (2009)를 포함시켜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다시 보는 데 실패했다. 그 모든 것이 미술팀에서 만든 소품임을 알더라도 토막 살인 당한 시체가 부검을 위해 다시 난도질 당하는 이 이중적 하드고어를 보는 것에 도무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아예 볼 생각을 않았던 것 같다. <올드보이> 보다 조금 더 잔혹한 이 복수극에 대해 한 네티즌 리뷰어의 표현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찝찝해진다.”

다시 <눈물>로 돌아와 보자. 난 도대체 뭘 기대했던 것일까? <토마스> 같은 진짜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저 배우가 고통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용서>나 <패션> 같은 가짜의, 하지만 진짜 보다 더 찝찝한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