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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수요일

연기, 연극의 경계에 서다: 뒹굴,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이준영

입구에서 논문 표지처럼 생긴 리플렛을 받고 공연장에 들어가면, 별다른 세트가 없는 무대에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한 명의 배우는 자기소개 후 연극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배우가 요가매트를 깔고 몸을 풀기 위한 일련의 동작을 반복한다. 연극에서 강연을 듣는 것이 익숙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특이하거나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에 관한 강연을 듣는 것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둘의 역할이 바뀐다. 몸을 풀던 배우는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강의를 하기 시작하고, 강연을 하던 배우는 자신이 설명하는 동작의 예시를 보여주기 위하여 요가매트 위에서 동작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관객들을 당혹케 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관객들은 강연에서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해 듣는 대신 강연자(를 연기하는 배우)가 강의의 맥락에서 벗어난 부인과의 부정적인 관계, 개인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바닥을 치고 신발을 집어 던지며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마치 돌림노래를 하듯이 한 배우가 요가매트를 차지하면 다른 배우는 자신이 하던 강의를 다시 이어서 시작한다. 다른 배우가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관한 강의를 하는 동안 요가매트 위에 한참동안 누워있던 다른 배우가 일어나 깜빡 잠이 들었다고 말한 후, 연극에 대한 강연을 이어나간다. 이 모든 과정은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전환된다.
만약 실제 강연 도중에 강연자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잠을 잔다면 강연을 듣는 이들은 공포감을 느끼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껴서 그 곳을 떠날 것이다. 강연 도중에 잠을 자는 것, 감정이 격해져서 바닥을 치며 화풀이를 하고 신발을 벗어던지는 등의 행위는 실제 강연 도중엔 용납될 수가 없다. 하지만 같은 행위를 해도 우리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안심한 채로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연극 안에서라면 강연자라는 본분에서 벗어나 넘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연자’로서의 연기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그저 ‘분을 이기지 못하는 체’하는 연기를 하는 상태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해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전한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극이 정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던 연출자가 등장하여 배우들의 강연자 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 연출자가 코멘트를 하는 상황을 보면서 관객은 두 사람의 강의와 연극을 위한 몸풀기 동작 전체가 연기였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비판의 내용은 듣는 관객들 또한 수긍할 만하며, 그 내용이 딱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이제 극이 끝났구나’라고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연출가가 간혹 보여주는 약간의 과장된 모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직 극이 진행되는 중인지 의심을 품게 만듦으로써 관객을 다시금 상황 안으로 끌어들이고, 연극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를 다시 와해시킨다.
연출가는 자신의 코멘트를 마친 후 관객에게 코멘트를 요청하는데, 필자는 ‘방금 이 장면도 연극의 일부이냐’고 묻는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이 극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고 말았다. 결국 코멘트 시간이 끝나고 연출가가 마지막 인사를 함으로써 극은 정말로 끝나게 된다. 리플렛에는 배우가 두 명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이 극의 배우가 아님에 확신을 가진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극을 보기 전에 리플렛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이 연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별 의미 없이 써 놓은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이 모든 것이 연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연출가의 행동이 극의 일부인지 의문을 품고 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극의 안과 밖을 계속 나누려고 하는 관객은 완전히 모든 것이 박수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연극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이것이 연극인지 아닌지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연극을 구성하는 암묵적인 요소들을 이용하고, 그것이 정말 ‘연극적’인 것인지에 대해 효과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배우가 정해진 무대 밖으로 나가서 관객석을 이용한다든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극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연극에 대해 공부해 본 바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론으로도 실제로 극을 감상함에 있어서도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익숙하다. 즉, 연극의 경계 밖으로 나가서 보다 많은 요소들을 연극에 포섭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존재한다고 상정된 경계를 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그 경계 위에서만 극을 진행한다. 이 점에 있어, 연극과 관객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단순히 관객이 존재하는 공간을 침범해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관객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을 허무는 것일 수 있으며, 그를 위해서 반드시 배우가 관객석에 들어오거나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오로지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관객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배우들의 강연과 몸 풀기, 감정 표출은 연기인가 아닌가? 이는 중요하지 않다. 두 배우 중에 누가 주인공인가? 연극에 대한 강의를 하는 배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몸을 풀다가 담배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강연을 하는 배우가 더 중요한가? 연출자도 배우인가? 코멘트를 하는 관객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들 또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배우와 관객, 연출자 모두가 연극의 규정성을 파괴하는 일종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 역할들은 단순히 ‘연극 외적인 것들이 연극에 참여한다’는 진부한 주제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이것을 지켜보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연극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눈앞에 아무리 황당한 광경이 펼쳐져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있으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해오지 않았던가? 예술을 감상하다 보면 형식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목격하지만 머릿속에서 예술의 범주가 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순간은 아주 드물다. 이 연극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편의상 글에서는 연극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연구 프로젝트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연구일 수도 있고 연극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상황에 빠진다. 결국 배우들이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 표출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아마추어 연기자의 배우 훈련을 중심으로-
9월 23일 17시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
9월 24일 16시, 19시 연세대학교 푸른샘
제작 ‘뒹굴’, 각색/연출 최희범

9월 23일 공연

9월 24일 공연


2016년 8월 10일 수요일

그래, 어떤, 평화

박종주

일상의 풍경風景들

불이 켜지면, 연극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시작한다. 평범한 작은 사무실. 네 명의 직원이 등장한다. 대리가 두 명, 과장이 한 명, 그리고 인턴이 한 명.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맡은 일을 한다. 대리들은 업무를 진행하고 과장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인턴은 커피를 탄다.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들을 하고 있으므로,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래 명세서에 숫자를 잘못 써 넣거나 커피를 탈 때 물 양을 맞추지 못하는 실수조차 없다. 짜증을 내는 사람조차 없이 즐겁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퇴근을 하고 누군가는 야근을 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시 출근할 것이다. 숫자를 틀리거나 물을 쏟지 않는다면, 내일 하루도 즐거울 것이다.

일상에 풍경風磬 달기

도시 사람들은 바람에 둔하다. 뱃사람들은, 그리고 농부들은 바람에 예민하다. 도시 사람에게 바람은 잠깐의 시원함 혹은 추위일 뿐이지만, 뱃사람들에게 바람은 배를 뒤집는 힘이고 농부들에게 바람은 작물을 쓰러뜨리는 힘이다. 창문을 열어두고 나온 날, 혹은 베란다에서나마 여린 풀잎이 자라는 어느 날, 그런데 강한 바람이 부는 날, 그제야 도시 사람은 바람에 예민해진다. 바람이 자신의 일상을 흔들기 시작하므로.
장면이 바뀌면 네 명의 배우들은 아이들이 되고 사무실은 놀이터가, 집기들은 장난감이 된다. 시장놀이부터 병원놀이까지, 또 한 번 평범한 풍경들이 이어진다. 평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 어떤 삶에서는 이 또한 평범하지만 ― 아이들이 뱉는 모든 문장 뒤에 욕설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바람에 예민해지는 방법이 하나 있다. 풍경風磬을 다는 것이다. 창문가의 무언가가 쓰러지지 않아도, 베란다의 꽃잎이 떨어지지 않아도, 바람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풍경風景에 누가 풍경風磬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종이 울린다. 어떤 욕들 뒤에는 종소리가 따라 붙는다. 여성혐오적인 욕설들에 말이다.
하지만 종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종소리에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자연히 그는 놀이에 섞여 들지 못하고, 아이들 사이에는 분란이 인다. 평범한 일상을 위해 사건은 봉합되어야 한다. 싸움을 벌이는 두 아이 사이에서 나머지 두 아이는 노래를 부르고 화해를 주선한다. 누가 왜 화났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색한 미소, 엉거주춤한 악수라도 좋다. 화해는 화해이므로.
다시 사무실, 일상은 반복된다. 다행히 종은 아직 매달려 있다. 여전히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그러나 그때마다 종이 울린다. 사람들은 조금씩 날카로워 진다. 한 번 알게 된 것을 다시 모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눈에 띈 얼룩이 계속 보이고 한 번 눈치 챈 생채기가 계속 아려 오듯 말이다. 다시 사무실, 일상은 변할 것이다. 머리를 울리는 종소리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해.

누가 병신을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런 극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극의 주제인 여성혐오, 혹은 이른바 남성혐오와 관련된 발화들은 종을 울렸지만 “병신”이라는 말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종은 내 머리 속에서만 울리고 있었고, 나는 머리가 아팠다.
또 하나 신경이 쓰인 것은 ‘아이들’이 재현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동물 모양 모자를 쓰고 나왔다. 배우들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사무실 직원들을 연기할 때와는 다른 발성을 했다. 리플렛에는 “어린이, 상스러운 욕설, 밝고 맑은 종소리 등의 장치를 소재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 하나 가능한 추측이 있다면 욕설과 혐오를 아이들의 순수성과 대비시키는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동물 모자를 씌우는 것이 ― 그리고 나의 추측이 맞다면 또한 아이들의 속성을 순수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긴 머리 가발을 씌우고 치마를 입히는 것과 무엇이 다를지 알 수 없었다.
여성혐오를 다루는 극에 어린이나 장애인의 재현에 관한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 여성, 장애 여성을 생각하면 여성혐오를 생각하면서도 이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어떤평화>
연출 성지수
조연출 심하경
드라마터그 백수향, 이준영
출연 김정은, 조민광, 진영화, 최희범
2016년 7월 7-9일, 연세대학교 푸른샘,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다양한 신체, 다양한 ‘이완’: 극단 애인의 <무무> 연습 참관기

글쓴이_최희범

지난 11월 7일 토요일, 극단 애인의 2015년 신작 <무무>의 연습실을 방문했다. 극단 애인은 “연기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극단이다. 연기에 대한 탐구는 애인 작업의 큰 축을 이룬다. 대표 김지수씨가 “배우가 성장하는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고 극단 창단의 이유를 밝힌 것을 보면, 이 극단에게 장애인 단원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연습 참관의 목적은 극단 애인이 작품 연습 이외의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직접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임박한 시기라서 그런지, 아쉽게도 장면 연습과 런쓰루(도중에 끊지 않고 전체 작품을 연습하는 것) 외에 내가 보고자 했던 기본적인 배우 트레이닝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무려!) 두 번의 런쓰루와 연출과 배우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며 장면을 다듬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무무> 연습실, 내가 방문한 날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 연습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성 배우의 발전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이번 연습 참관에서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 배우는 그를 무대에서 처음 본 2년 전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표정은 풍성해졌으며,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신체적 특성들로 인해 “원활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 ‘장애’가 있는 그의 목소리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렁차지는 않았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가 갑자기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그의 근육들이 엄청나게 힘이 붙어서 전보다 확실한 제스처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차이, 이런 성장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는 무엇을 잘하게 되었기에, 나는 그가 연기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느낀 것일까?

배우들이 트레이닝 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강예슬 연출에게 평소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강예슬 연출은 주로 “이완”을 목표로 신체 및 발성 훈련을 한다고 답해 주었다. 특히 연습의 초반에는 연습 시간 대부분을 할애할 만큼 이완 훈련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훈련을 통해 배우들은 매 연습에서 실질적인 신체 및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 공연이 가까워지면 신체, 발성 훈련은 배우 개인들에게 맡겨지는데, 초반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된 배우들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하지성을 비롯한 극단 애인의 배우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완’ 훈련 덕분인가? 관객 앞에 서는 배우가 마냥 몸이 늘어지는 식으로 “이완”할 수는 없을진대, 그렇다면 배우에게 있어서 이완이란 어떤 것인가?

<무무> 장면 연습, 오른쪽 뒤가 하지성 배우(스테판 역), 왼쪽 앞이 최종혁 배우(가브릴라 역)

이완 훈련은 극단 애인만의 독특한 훈련 방식은 아니다. 대부분의 배우 및 연출가들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며, 많은 연기론이나 연기 훈련법들이 배우의 이완을 목적으로 명상, 호흡, 움직임을 접목시킨 트레이닝 방법들을 제시한다. 최초로 사실주의 연기 훈련법들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스타니슬랍스키(Constantin Stanislavsky)는 ‘신체 이완(physical relaxation)’을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연기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그는 스스로도 이완을 위해 요가 등을 훈련(수련)했으며, 이를 자신의 훈련법에 포함시킨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들이 ‘이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게, 코포(Jacques Copeau), 르코크(Jacques Lecoq) 등의 비사실주의 연기론들은 ‘중립(the neutr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데, 많은 연기 방법론들에서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적절한” 혹은 “좋은” 연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다.

장애 퍼포먼스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캐리 샌덜(Carrie Sandahl)은 그녀의 논문 “중립의 독재: 장애와 연기 훈련(The Tyranny of Neutral: Disability & Actor Training)”에서 연기 양식과 상관없이, 한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간주되는 ‘이완’, ‘중립’과 같은 개념들이 장애인 연기자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특히 “중립 상태”라는 비유적 표현이 신체 외형,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유연함, 자연스러움 등 이상화된 신체적 지표들에 의해서 평가된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선천적으로 비대칭적이고 유연하지 못한 근육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혹은 후천적으로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손상된 몸은 “적합하게 이완할 수 있는 신체(a body able to relax properly)”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적절하게 이완할 수 없는 신체는 연기를 위한 기본 조건이 충족될 수 없는, “연기 불가능한(disabled) 신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연기 교육 방법들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논리가 장애인 배우들이 겪는 불평등을 “은밀하게” 심화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선천적인 호흡기 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깊고,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이완된 호흡”을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굽은 등을 가진 누군가는 아예 운동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유연한 근육이 있는, 그래서 아름다워 보일뿐 아니라 안정되어 보이는 어깨 라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에게 ‘이완’이란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인가? 애인의 배우들이 하는 ‘이완’ 훈련은 정확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수행되는 것인가?

우리는 폴란드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의 연기론에서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여자의 흉곽이 길고 좁다면 그 여자는 연기를 하면서 대체로 횡경막을 시각적으로 통제하는 호흡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여자는 오히려 호흡에 척추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척추를 너무 의식하면 안 되고, 반응과 동시에 척추를 사용해야한다. 마치 뱀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바로 생명의 반응이다. 척추를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시키면 결코 안 된다. 척추를 유연하게 하면 호흡도 자유로워질 것이다.”(예지 그로토프스키, 『그로토프스키 연극론』, 현대미학사, 2007, 나진환 편역, 84면)

이 부분에서 그로토프스키는 독특한 신체 조건으로 인해 연기자 호흡의 정석이라고 간주되는 복식 호흡이 불가능한 배우의 경우를 제시하고, 그녀의 신체에 맞는 호흡 및 발성법을 통해서 ‘생명의 반응’으로서의 자유로운 호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로토프스키는 연기 훈련 메소드를 고정시키고 “기술을 얻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연기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장애인 연기자들을 위한 훈련법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모든 훈련은 연기자 개인의 신체, 정신적 조건에 맞추어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모든 훈련은 고정된 형태 혹은 방식의 신체, 목소리, 말투, 호흡, 움직임과 같이 이상화된 목표를 얻어내기 위한 반복 연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두 가지이다.

그로토프스키는 고정된 목표를 추구하며 자신의 신체 작동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을 기계화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기계화는 부자연스러운 연행이나 가식적인 허행을 낳을 뿐 좋은 연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기계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기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신체가 무대 위에서 “본래적”(혹은 “일상적”) 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방해물(blocks)’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이 방해물은 배우 개인이 가진 신체적 “약점” 혹은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특정한 말투, 호흡, 이미지, 나아가 특정한 감정에 매몰되어 훈련이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것이 됨으로써 훈련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토프스키는 배우가 상투적인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자기폭로(self-revelation)’로서의 연기를 하려면, 매 순간 자신의 ‘방해’를 초월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배우의 연행에서 진정한방해 요소는 물리적 약점 자체가 아닌,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신체, 심리, 정신적인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에서 연기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객들 앞에서 자기-폭로를 실행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배우를 양성하는 것이다. 배우의 자기-폭로가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연극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은 종종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배우의 현존(즉, 자기-폭로)은 영적, 정신적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해석된다(Phillip Auslander, From Acting to Performance: Essays i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London; Routledge, 1997). 비록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은 불확실한 형이상학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의 연기론은 여전히 다양한 연기 양식을 시도하는 많은 배우 및 연기 교사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가 특정한 훈련법들이 절대적 효과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은 기술 및 ‘메소드’에 매몰되어 자칫 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연기 훈련들에 제동을 걸며 연기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준다.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훈련법들은 장애인 연기자들에게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로토프스키와 작업한 배우들의 대다수는 비장애인이었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가 제시하는 훈련법들은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신체 및 정신적 능력의 범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연기론은 이상화된 연기 훈련의 목표들, 방법론들을 거부하고 메소드의 개별화를 주장함으로써 다양한 특성 혹은 “약점”을 지닌 몸들 역시 이완된 무대 위 현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이완’ 혹은 ‘중립’을 특정한 신체적 외형이나 소리, 말투 등의 시청각적 특성들에 국한시키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중립’, 각기 다른 ‘이완’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장애인 극단들이 그로토프스키 연기론을 배우 훈련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한다거나, 하지성 배우가 틀림없이 이 같은 ‘이완’ 훈련을 통해서 연기자로서 성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샌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로토프스키를 포함한 기존의 연기 훈련들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사용되는 용어들로 인해 장애인 연기자들이 겪는 불평등을 심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장애인 배우들 혹은 극단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기존의 연기론이나 훈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훈련법들이 다양한 신체를 고려하는 부분들을 눈여겨보고 재해석하여 연기 훈련의 방식과 대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주변화(marginalization)’된 신체가 무대에 오를 때 찾아오는 인식의 변화야 말로 극단 애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 가치이다.


애인에 의해 각색된 <무무>는 지적 장애인인 “게라심”(한정식 分)이 자유를 박탈당한 농노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다른 농노인 “에로쉬카”(백우람 分)의 대사, “나는 한 번도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단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갖지 못한 건 사랑하는 마음이었어. 자유가 없었던 거지. 이 큰 저택에 몸만 묶여있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갇혀 있었던 거야.”라는 말이 여운을 준다. 배우들의 말과 몸짓이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와 만나, 삶과 연극 및 연기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무>는 11월 13일 금요일부터 12월 5일 토요일까지 성북마을극장에서 공연된다.

2015년 11월 1일 일요일

2015 SPAF 폐막작 <폭주 기관차> - “우리는 폭주하고 있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글쓴이_최희범



2015년 10월 30일, 그러니까 어제 저녁에 스파프(SPAF) 폐막작인 <폭주 기관차>를 보고 왔다. 시작 15분 전 쯤 도착한 공연장 앞에는 2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각각 손에 피켓을 들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한 팝업 씨어터 공연의 검열 및 공연 방해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관계자가 관객 한 무리를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3층으로 올려보냈다. 스파프 공연에서 처음 받아보는 마중 서비스였다. 공연장 로비 분위기는 이전 스파프 공연들에서와 사뭇 다르게 어수선했다. 객석에서는 시위 내용이 적힌 종이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오가고, 웅성거리는 소음 가운데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반쯤 정신 나간 듯한, 자신이 희대의 범죄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기관사와 화부가 열차 전체를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 기관차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스파프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두 대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연기하는 두 명의 범죄자는 음악과 긴박한 리듬으로 그들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기관차의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가속되는 극의 리듬, 그리고 그 안에서 얽히는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모순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말로 이 공연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미안하게도) 앞에 적은 간략한 줄거리 및 배우들이 피아노 연주를 통해 굉장히 시끄럽고 히스테리컬하게 광기를 표현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는 점 외에는 공연에 대해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다. 미숙한 한국어 자막 플레이가 이 공연이 과연 그런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인물들의 심리상태가 “탁월하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하기 힘들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담당자가 졸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을 정도로 미숙했던 자막 플레이는, 얼마 전 본 로버트 윌슨의 <소네트> 공연보다 한층 심각한 수준이었다.

<폭주 기관차>는 대사의 내용과 발화의 리듬이 매우 중요한 연극이었다. 일단 대사가 굉장히 길고 많았다. 또한 작품의 서사 전달과 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주로 대사 내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더욱이 주최측이 강조하는 “긴박한 리듬”은 연주되는 음악의 리듬 뿐 아니라 배우들의 발화의 리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즉 인물들의 말과 연주되는 음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작품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국어 자막 플레이와 배우 발화 간에 긴밀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연에서 자막 플레이와 공연 진행 싱크로가 계속 어긋나는데, 어찌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자막으로 인해 짜증이 치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관극은 흥미롭기도 했다. 반쯤 맛이 간 기관사와 화부가 자기들 멋대로 열차 전체를 폭주하게 만든다는 내용은 묘하게 현재의 시국을 연상시켰다. 이러한 연상은 공연장 바로 밖에서 벌어지는 시위로 인해 훨씬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검열 반대 시위 덕분에 이 공연은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공연은 시위 덕분에 연행을 에워싸는 “축제다운”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위대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앞에 진을 쳤다. 이로 인해 공연장에 들어와서 밖의 상황을 떠올릴 때 이 건물을 시위대가 공간적으로 에워싸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또한 공연 시작 전과 종료 후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시위함으로써, 관객들이 공연장에 들어와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전체 과정이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문화 인류학자로서 제의 및 축제성을 연구한 빅터 터너는 이 같은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통해 ‘리미널(liminal)’한 영역이 형성되며,1) 이 영역은 문화적으로 고정된 형상들이 새로운 것과 결합될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그 영역에 속한 사람은 구별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을 일상과 다른 맥락에서 읽게 된다. 터너는 이러한 특성을 ‘리미널리티(liminality)’라고 부르며, 이는 ‘축제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어제의 공연장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규범들로부터 일시적 해방을 누리는 축제의 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공연장 전체를 감싸는 긴장감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통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왠지 모를 동요가 많은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객들의 관극 경험에 부여된 새로운 맥락은 연극 작품을, 공연장의 분위기를, 다른 관객들의 태도 등을 비일상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구조적 상태를 전복하고 반구조의 상황을 만드는 가운데 상하, 우열, 대립의 장벽을 무너뜨리” 는 것으로서의 ‘축제성’을 경험한 것이다.2)

스파프 공연에서 이 같은 ‘축제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인즉, 스파프는 해마다 나름의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테마가 무엇인지, 그래서 각 프로그램들이 축제 전체의 어떤 맥락에서 기획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공연 관람을 통해서 이러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파프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이 테마라는 게 주최측에게도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각각의 공연 단체, 혹은 작품이 얼마나 유명한지, 유서 깊은지, 혹은 “핫”한지 등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스파프라는 축제에서는 10월 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해외 유명한 작품 및 극단들의 공연을 대학로에서 볼 수 있는 기회로서의 “축제”성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최측의 기획 의도와는 무관할지언정, 시위대가 이 공연에 끌어온 정치적 맥락은 공연 감상의 경험을 보다 ‘축제’답게 만들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스파프는 하지 못하는 것을 혹은 하지 않는 것을 해낸 것이다.

이 작품을 만약 국내 극단이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노스페이스 잠바와 수학여행이 무엇인가를 연상시킨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연 금지되거나 방해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연에서 대사를 다 빼고 배우들 피아노 연주로만 공연을 하라는 식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무대를 노래하다”라는 테마를 가지고 이 축제를 기획했고, 그래서 폐막작에서는 “노래”만 나오고 쓸데없는 “말”은 안 나오는 것으로 기획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 이 극단이 외국 단체였던지라 다행히도(?) 이런 혐의를 받지 않고, 무사히 그들이 기획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어제 자막 플레이의 어설픔으로 관객들의 인내심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것은 적어도 고의적 방해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아무쪼록 오늘 폐막작은 보다 나은 자막 플레이와 함께 무사히 마쳤기를, 또한 보다 대규모 진행된 예술 검열 반대 시위가 작품과 또 한 번 멋지게 협업할 수 있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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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놀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으로부터 빌려온 이 개념은 문지방이라는 의미의 ‘limen’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반 게넵은 전이 의례의 세 국면을 분리-전이-통합으로써 설명하며, 여기서 ‘분리’의 국면은 일상으로부터의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의미한다.

2) Victor Turner, Myth and symbol. Crowell Collier and Macmillan, 1968, p. 277.

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장애 연극’에서 ‘장애’ 문제를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장애 연극’에서 ‘장애’ 문제를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애인과 휠 산에서 만나다 1탄”, <제물포 별곡>

글쓴이_최희범

어린 시절에 가끔씩 길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마주치면, 우리 엄마는 나에게 “쳐다보지 마라”고 하셨다. 엄마 나름대로 그들을 배려하고,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교육하신 것이다. 하지만 쳐다보면 안되는 사람이라는 그 찰나의 판단과, 서둘러 거두어버리는 시선에는 저 사람을 모든 시선에 쉽게 상처 받을 약한 존재로 여기는 전제가, 혹은 나와는 다른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겸연쩍음이 들어있던 것은 아닐까? 이는 물론 대상화시키는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대상화를 전제로 하는 통념적인 도덕 의식을 벗어나서는 어쩔줄 모르는 나의 어려움 혹은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봐도 된다.” 혹은 “보면 안된다”는 판단들을 넘어서면,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는 아직도 차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이외의 다른 방식을 잘 모른다.

“어떻게 볼지”에 대한 문제 의식은 장애인들이 만드는 연극을 볼 때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연기자들은 기본적으로 보여질 것을 전제하고 무대에 서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이것은 사실 “쳐다 보면 안된다”는 통념적인 윤리 의식에 완전히 반하는 기획이다. 또한 이러한 통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객이라고 해도, 연기자들이 재현하는 인물과 연기자 본연의 몸이 겹쳐지는 이중적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어떻게”에는 단순히 연기자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할지, 혹은 인물의 특성으로 포함시켜서 볼지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함께,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가 겹쳐져 있다. 그의 손상(impairment)을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옳은가?

이 문제를 연극을 만드는 입장에서 바꿔 생각하면, “장애인들이 무대에 서는 연극이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는 “‘장애’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하는 질문과 연결 될 것이다. ‘장애’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거나, 연극의 내용이 장애 혹은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다루지 않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장애’라는 이름이 붙은 몸이 무대에 서는 연극은 당연히 ‘장애’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연극들이 그 무대 위의 모든 몸들에 대해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결국 장애인들이 만드는 연극은 ‘장애’라는 요소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 입장은 의식적으로 취해지고, 의도적으로 표명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만드는 이들의 의도성과는 별개로 관객들에게 명확하게 드러날 수도 있고, 은근하게 숨겨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불명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작품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음, 곧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애인들이 무대에 오르는 연극은, 어떻게든 ‘장애’에 대한 연극이라는 의미에서 ‘장애 연극(disability theatre)’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물포 별곡> 역시 장애인 연기자들이 출연하는 작품으로서 ‘장애’에 대한 그만의 입장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각색한 작품의 이야기 자체는 ‘장애(의학적인 의미, 사회적인 의미 모두에서)’와 연관된 언급을 거의 담고 있지 않을 뿐더러, 대사나 지시적 행동과 같이 설명적인 요소들을 통해 연기자들이 지닌 특성들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첫 장면에서 무대가 밝아지면 두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무대 위로 들어선다. 이 둘의 다리는 심하게 꼬이고 휘청거린다. 다리와 함께 온 몸이 흔들린다. 이 둘은 술에 취해 있다. 이들의 몸이 흔들리는 것은 술 취한 상태를 연기하기 때문일까? 혹은 저들의 몸은 무대 밖에서도 상당히 지금과 비슷하게 움직일까? 술 취한 몸의 불안정함과 겹쳐지는 연기자들의 신체적 특성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불편함은 극중 인물 “긴 다케시”(백우람 분, 원작에서의 샤일록)가 구만석 일가가 자신을 “병신 취급”했으며,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이 대사는 직접적으로 ‘장애’를 거론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기자의 신체적 특성과 강하게 결부되며 그렇기에 ‘장애’와 관련된 관객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한다. ‘장애’라는 문제에 대해서 특정한 주장이나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자의 현존이 드러내는 ‘장애’의 요소를 재현된 세계에 대한 관객의 인식 가운데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서 느끼는 재현과 현존 사이의 혼란스러움은, 이것이 쉽게 판단되어서는 안되는 문제임을 인식하게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연기자들을,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극중 인물을 장애인으로 혹은 비장애인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을 유보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닐까? <제물포 별곡>은 이렇게 무대 위 장애인 연기자의 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장애’를 이야기 한다. 답을 지시하지 않는 질문은 “어떻게” 볼지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질문들이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 곳곳의 세부적인 요소들은 ‘장애’ 혹은 이를 포함하는 ‘소수성’에 대한 작품의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이 연극의 내용 자체는 ‘소수자’ 문제와 연관된 이야기들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같은 작품에 대한 앞선 리뷰인 “휠+애인+산, 제물포 별곡”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원작이 담고 있는 동성애 문제나 민족적 소수자의 문제를 작품의 서사에서 단순화시켜서 다루는 것은 창작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캐스팅이나 관객 참여 문제와 같이 관객의 연극 경험의 인상에 영향을 주는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장애인 연기자들과 장애인 연기자들이 협업을 하는 작품에서, 서로 사랑에 빠진 선남 선녀(조영운과 이정랑)의 역할을 모두 비장애인 배우들이 맡은 것은 캐스팅의 이유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불편한 사실이다. 또한 영운과 정랑의 결혼식 장면에서 관객 한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하는데, 연기자가 굳이 중년 남성 관객에게 주례사를 부탁한 것은 소수자 문제에 대한, 결과적으로 ‘장애’라는 소수성에 대한 문제 의식 마저 약화시킨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장애 연극’이 ‘장애’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면, 더 일관된 입장을 취하길, 더 세심하게 그 입장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관객의 이기적인 욕심일까?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장애’의 문제를 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리고 이 무거움을 연극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이 무게를 느낀다. 관객들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렇기에 어떤 종류의 장애 연극이든지 어느 순간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포기하면, 그 무게는 온전히 관객들의 짐이 된다. 반대로 이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연극은 이제껏 당연하게 여겼던 관객으로서 나의 시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장애’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하는 내 시선의 폭력성과, 재현과 현존을 무자르듯 나누는 데 길들여진 편협함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장애’라는 낙인은 장애 연극이 지닌 가능성이 될 수도, 자칫하면 내가 지각하는 연행자의 말과 몸짓을 퇴색시키는 색안경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제물포 별곡>과 같은 연극들에서 ‘장애’ 혹은 소수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를 바란다. ‘장애’ 문제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는 선택에서 소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 ’장애’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품을 틀짓는 것을 관객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는 걱정이 있다면, 이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관객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 연극은 시종일관 무겁고 심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은 어떤 거창한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틀짓는 모든 선택들에 대해 이 불편한 문제 의식을 적용하려는 노력과 그 순간들을 채색하는 세심한 배려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배우가 행복한 극단 애인": 김지수 대표 인터뷰

글쓴이_최희범

2015년 4월 25일 부쩍 따뜻해진 토요일 오후에 구로구 오류동의 한 카페에서 극단 “애인”의 김지수 대표를 만났습니다. 극단 애인은 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극단이며, 김지수 대표는 국내 장애 연극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애’만이 이 극단과 이들의 작품을 특징짓는 단어는 아닙니다. 2013년도에 게릴라 극장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에서는, 구성원들이 가진 특성을 무시하거나 무마하려 하지 않고, 끌어안아 작품에 녹여내려는 시도와 노력의 결과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연극과 연기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위한 한 극단 대표의 진지한 고민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김지수 대표가 애인을 창단할 때부터 가지고 온 중요한 목표는 장애인 연기자들의 역량 강화에 힘쓰는 극단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애인의 방향성에 맞추어 장애인 배우들의 연기 문제를 중심으로 편집한 인터뷰 내용을 드라마 인에 소개합니다. 내용이 다소 길어서 주제 별로 나누어 아래와 같이 소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1. ‘애인’ 창단 계기와 과정
2. 극단 ‘애인’에게 좋은 연기란?
3. 장애 연극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
4. ‘애인’의 향후 방향과 계획
5. ‘애인’의 고민, 김지수 대표의 고민: “어떻게 우리들 고유의 움직임을 가지고 관객을 만날 것인가?”



1. ‘애인’ 창단 계기와 과정



최희범: 원래 ‘휠’에서 활동하시다가 나와서 애인을 창단하신 이유가 ‘배우가 행복한 극단’을 만들고 싶어서라고 하셨는데, 혹시 구체적인 계기가 있나요?

김지수: 휠이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갑자기 사람도 많아지고 해야 할 일도 많아졌죠. 제가 보기에는 단체는 계속 커지는데 거기 있는 배우들은 역량 강화가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단체가 커지는 것 보다는 배우들이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장애가 있어서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기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게 있는 것 같거든요. 장애인이라서 무대에 서는 게 아니라 연기를 잘 하는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것을 하고 싶었는데, (휠의 방향이) 그것과 좀 다른 것 같아서 나오게 되었죠.

최: 연극을 할 때 처음 부딪히는 큰 난관이 같이 할 사람들을 찾는 일인 것 같아요. 지금의 단원들을 만나기 위해서 국토 종단 프로그램에 참여하셨다죠? (웃음) 국토 대장정이랑 연극이 그렇게 잘 연결이 되지는 않는데, 단원들을 찾고 힘을 모으게 만든 특별한 비결이 있으신가요?

김: 제가 꿍꿍이를 가지고 갔죠. 처음에 단원들을 찾을 때 연기를 잘 하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이나 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이 있는 사람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 꼭 연기를 안 하더라도 서로에게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백우람 배우 같은 경우는 사진을 전공했거든요. 국토대장정에서 그 친구가 사진을 찍었어요. 생각하기에 저 친구와 연극을 하게 되면 연기를 안 하더라도 우리 극단이 연습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다큐멘터리든 전시회든 그 친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 친구는 장애가 굉장히 심한데 끊기 있게 하더라고요. 아픈데도 쉬지 않고.. 그래서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몇 분을 만났죠. 그 때는 연락처만 받고, 나중에 연락해서 연극을 할 생각이 있는 지를 물어 보았는데, 다행히도 다들 흔쾌히 함께 해 주었어요. 그 때 ‘내가 연극을 하게 되나보다…’ 생각을 했어요. 팀이 꾸려지니까.


2. 극단 ‘애인’에게 좋은 연기란?



최: 연기를 잘 할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 배우 분들이 연기를 정말 잘 하시는 것 같아요. (2013년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 배우들이 뭔가 특별하다.

김: 그건 연출이 잘 끌어 주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연주 연출님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계속 같이 해 주셨는데, 이연주 연출님을 만난 것은 저희 극단에 있어서도 그렇고 저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행운 같은 일이예요.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배우에 대한 생각, 그 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배우에 대한 생각과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잘 맞았어요. 사실 연출이 삼 년 동안 한 작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끝까지 매달려 주신 거죠. (애인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2010년부터 2013년도까지 수정을 거듭하며 여러 차례 공연했다.) 제가 “올해도 다시 이거 가지고 하면 어때요?” 하면 그러자고 해주셨어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연주 연출님의 노고가 많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배우들도 성장할 수 있었던 거죠. 끊임없이 기다려 주고… 정말 저희 배우들과의 작업은 기다려 주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연출님도 말씀 하세요. 애인이랑 작업 하면서 배우들을 기다려 주는 것을 많이 배웠다고. 저희 극단이 알려지게 된 것도 <고도를 기다리며> 때문이고.. 배우들도 한 작품을 계속 하면서 자신들의 연기와 움직임을 생각해 보고 발전할 수 있었어요.

최: 이연주 연출과는 전속적으로 함께 하시는 건가요?

김: 그렇지는 않고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하고, 2012년도부터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를 했어요. 그런데 어쨌든 이연주 연출님도 다른 작업들을 또 하셔야 하니까. 지금 이연주 연출님은 <노란 봉투> 조연출을 하고 계세요. 저는 초반에 외부에서 다양한 연출을 만나는 것을 거부했어요. 왜냐하면 연출들마다 스타일이 있잖아요. 배우들이 자기의 몸이나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알기 전까지 다른 연출들이 자꾸 개입을 해서 그 스타일에 맞추어 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인만의 방식을 찾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저희는 비장애인을 따라 하지 말자는 생각이 있는데. 그게 사실 편하잖아요. 내가 장애인이지만 우리들의 눈도 비장애인에 맞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내가 보기에도 비장애인들의 움직임을 해야지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있거든요. 여기에서 벗어나서 나만의 것을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그런 것에서 생각을 같이 한 이연주 연출가가 있었고. 그래서 저희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가지고 그런 것을 해보려고 했어요. 계속 그런 과정이었기 때문에, 더 다른 작품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요. 한 작품을 계속 가지고 가는 게 배우들이 자기 몸에 대한 어떤 체득을 하기에 더 좋다고 생각을 해서요.

최: 배우에 대한 생각이 이연주 연출님이랑 비슷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인가요? 대표님께서는 <한국연극>과의 인터뷰에서 배우들이 비장애인의 몸짓과 말을 흉내 내지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몸, 호흡, 말투까지 자신의 것으로 녹여 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몸과 호흡, 말투까지 녹여내는 연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예들이 있었는지?

김: 사실 이건 연출님이 말씀하셔야 할 것 같은데…(웃음) 제가 생각한 것만 말씀 드릴게요. 예를 들면,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에는 다른 캐스팅으로 했었어요. 그 때 언어 장애가 있는 친구가 블라디미르를 했었거든요. 블라디미르의 대사가 많은데, 그 친구가 그 때 연극을 처음 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목소리가 작고 대사가 잘 안 들렸어요. 그런데 저도 그렇고 연출님도 그렇고 언어장애 때문에 대사를 또박또박 하게 하려고 하지 마라. 정서가 중요하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서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특히 이 대사들이 의미 있고 한 게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것들을 되풀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그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에 더 신경을 쓰라고 했고요. 사실 관객들에게 대사가 안 들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물론 답답하실 수는 있는데, 저희는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가 꼭 말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비장애인의 연기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물론 전달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이 언어장애가 없는 사람들처럼 대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또 다른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가는 거죠. 함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몸을 이용해서 표현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침묵으로도 할 수 있죠.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계속 고민하면서 갔던 것 같아요. 또 배우들끼리 서로 기다려 주고 보완해 주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에스트라공 역할의 정식 씨는 지적 장애가 있었어요. 언어 장애는 상대적으로 조금 있고. (블라디미르 역할의) 백우람 배우는 언어 장애가 있고요. 그러면 언어 장애가 있는 배우를 더 기다려 주는 거예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아요. 많이 싸우기도 하고요. 이렇게 보완해서 전달 할 수 있는 거죠.

최: 그렇다면 극단 애인에게 있어서 좋은 연기란 어떤 것일까요?

김: 되게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저는 장애가 하나의 표현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장애가 있는 내 몸과, 내 언어와 내 표현이 어떤지에 대해서 본인이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면, 그것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물론 관객들에게는 낯설고 좀 힘들 수는 있어요. 관객들을 고문하면서 연기하면 안 되는데…(웃음) 저는 장애가 하나의 연기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장애가 있는 내 몸도 배우의 움직임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것을 가지고 어떻게 대중을 만날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는 거죠. 정서적으로는 역할에 공감을 잘 해야죠. 사실 장애인들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희곡을 읽었을 때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편은 아니에요. 그런 것들도 꾸준한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읽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부단한 노력과 학습도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장애인 극단을 하면서 어려운 것은, 장애인 배우들이 어디 가서 배울 데가 없다는 거예요. 단원들 중에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는 단원들은 연기 학원에 가서 등록을 하기도 해요. 그런데 일반 배우들과 함께 수업을 듣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만 특별지도를 해 줄 수가 없으니까 따라 가기가 힘들죠. 그래서 수강 (신청)을 하고서도 다니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연극 작업을 통해서 당연히 실력이 향상돼야 하지만, 자기 개발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자기 계발도 극단에서 다 해야 하는 거죠. 제가 배우들은 평소에도 배우여야 한다. 열심히 책도 읽고 몸 관리도 하고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힘든 것 같아요. 나가서 할 데가 없기 때문에… 물론 배우들에게는 무조건 찾아보라고 하지만….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서 무대에 서는 순간을 너무 좋아해요. 자기가 배우라고 느끼는 순간이 그들에게는 정말 최고의 순간인 것 같은데, 어떻게 계속 배우로서 살아가게 할 것이냐가 고민 이예요. 장애인 배우들의 경우에는 개인이 외부에 나가서 프리랜서 배우로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 <한국연극>에 인터뷰 할 때만 해도 극단이 없어져도 배우들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과정이 지나면서 ‘아 극단이 있어야지 배우들도 있을 수 있구나’싶어요. 그런 면에서 극단도 잘돼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김지수 극단 애인 대표
이미지 출처: 비마이너(beminor.com)

최: 대표님께서도 연기도 하셨던 걸로 아는데, 대표님께서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 저는 연기는… 아니지만..(웃음) 저한테도 고민이 있어요. 저도 역시 연기에는 두려움이 많아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있기 때문에 막상 무대에 서면 표현 할 수 있는 게 너무 적다는 걸 느껴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제 생각이 갇혀 있는 것 같아요.무대에 올라갈 때마다 갇혀 있는 저를 느껴요.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요. 사실 제가 배우로서 전념하면 그런 과정이 있을 텐데 아직은 저에게 (그런 과정이) 없었고요. 이번에 <장애 제 3의 언어를 말하다>를 하면서, 역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각하듯이 장애를 가진 몸에서, 말하자면 “해방”되지 않으면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저 역시도 해방 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껴요. 사실 해방되고 싶다는 욕구도 굉장히 커요. 내가 배우로서 활동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몸을 해방 시키는 게 사실 제일 먼저라고 생각을 하는데, 아직은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몸과 몸에 갇혀 있는 정신까지 해방을 시키려면, 그것도 치열한 싸움의 과정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이번에 공연 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걸 제가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3. 장애 연극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



최: 단원들 모임이나 연습은 얼마나 어떻게 하시는지?

김: 저희는 어차피 매일 모이지는 못하니까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데. 전에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만나서 뭐라도 했었어요. 그래도 꾸준히 스터디 형식의 모임을 해 왔는데, 공간이 없으니까 스터디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배우들도 사무실이나 연습실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고요. 저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은 공간 잡는 게 너무 어려우니까 배우들한테 미안한 생각도 들어요. 배우들이 연극을 하지 않을 때 이 사람들이 배우로서 자기를 계발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공간도 장도 없으니까 그게 안타깝고 미안해요. 어쨌든 매일 만나려고 해요. 요즘도 아카데미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고 있는데,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느끼고 있죠. 올해 두 번 공연을 해야 하는데 아직 공연장을 못 잡았어요. 그래서 사실 굉장히 초조해요. 공간을 잡아야 대관료 같은 걸 책정해서 예산을 정확하게 짤 수 있는데. 공간이 없어요. 연습실도 그렇고.

(*애인에서는 여전히 올해 8월과 11월 공연을 위한 공연장을 찾고 있습니다. 승강기나 경사로가 있어서 장애인들이 접근가능한 공연장이어야 하고, 적더라도 휠체어를 타는 관객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추천할 만한 공연장을 아시는 분들은 밑에 답글 하나 부탁드립니다!)

최: 접근성 문제가 있어서 더 그러실 것 같아요.

김: 네. 제가 휠체어를 타니까.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공간, 이런 건 정말 십년이 지나도 별로 해결이 안 되네요. 연습은 대본을 처음 받았다 하면, 1달 반에서 2달은 잡아야 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연습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초반에 대본 읽고 분석 할 때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나서 하다가, 실제로 움직임 연습 들어가면 한 달은 풀로 하죠. 다른 팀들 보다 연습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예요. 분명히 속도의 차이가 있고, 이해의 차이도 있고요. 그러니까 비장애인들이랑 같이 작업할 때, 비장애인들이 답답해하는 것도 있어요. 장애인 연극은 장애인 연극의 속도가 있거든요. 비장애인 배우들은 그런 속도를 같이 가는 걸 힘들어 해요.

최: 장애인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공연에서 장애 연극만이 가진 속도가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모든 공연은 다 나름의 템포가 있지만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신체적, 물리적 특성이 장애물로서가 아니라 연기자들의 특성으로서 작용해서 시간과 공간이 독특하게 구성되어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게 가능한 곳이 극장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작품을 더 보고 싶어요.

김: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건 제 생각 이예요. <봄이 오면 산에 들에>라는 최인훈 선생님의 작품이 있는데, 제가 꼭 하고 싶은 작품 이예요. 거기도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대사가 별로 없고 움직임이나 표현이 많이 있어요. 어떤 연출을 만나서 이런 작품을 언젠가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해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작품을 하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되어 있는… 저희들과 잘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4. ‘애인’의 향후 방향과 계획


최: 애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계신가요?

김: 어쨌든 예술성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은, 저는 고전에서 찾고 싶어요. <고도를 기다리며> 처럼 텍스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고, 저희 단체와 절묘하게 잘 맞는 그런 작품이요. 그런 고전을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연극을 하나의 방향으로 가져가고 싶어요. 또 하나는 장애인 극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가는 이야기예요.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쨌든 장애인 극단이기 때문에 의무감과 책임감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최: 올해 계획은 어떻게?

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사업으로 휠, 애인, 산 세 극단이 협업으로 아카데미를 하고, 8월에 공연을 해요. 또 서울시에서 지원받아서 강예슬 연출이랑 <무무>라는 단편 소설을 하려고 해요.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 소설인데 작품이 참 좋아요.


이미지출처: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최: 지금 대표님의 삶에 연극이란 어떤 것일까요?

김: (웃음) 어떤 걸까…? 연극을 한 지 8년 되었는데, 점 점 책임감이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대학로에 수많은 극단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장애인 극단도 최소한 꾸준히 공연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꼭 우리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문화에 어떤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인이 아니어도요. 저희 이면 더 좋겠지만. 문화 예술의 한 축에 장애인 극단이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극단 내부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감... 너무 의무로만 가는 것 같은데. 저는 연극을 통해서 저희 배우들이나 제 삶이 풍요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연극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하잖아요.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연극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돈이 안 되더라도. 꿈같은 얘기이고, 서울에서는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일 년에 한 번 이라도 나이 들어서도 우리들끼리 모여서 공연 하면서 그렇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최: 단원 분들도 행복 하실 것 같아요.

김: 저 때문이 아니라 연극을 하면서 행복 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요. 사실 연극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장애인들도 가난하죠. 돈이 없죠. 그 중에서 연극해서 더 돈이 없고. 배우들한테 사실 미안하기도 해요. 이번에도 공연하면서 개런티 전혀 없이, 오히려 저희가 돈을 내서 했거든요. 어쩌면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는데. 배우해서 돈은 못 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돈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희 비장애인 단원, 강예슬 연출은 18살에 저희 극단에 들어왔는데, 지금 26살이 되었어요. 작년에 연출로 데뷔 했지만, 아르바이트 인생을 살고 있죠. 아르바이트하고 연극하고 하니까. 그 친구에게도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어떻게 그 친구가 좋은 연출이 될 지, 여기 있었던 시간이 그녀의 삶에 어떤 방향성이 될지가요. 작년에 (공연 한) <너는 나다>는 이연주 연출가가 강예슬 연출의 데뷔를 위해서 저희 극단에 맞추어 써준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 보면, 저는 되게 복이 많아요. 같이 했던 사람들이 어쨌든 저희 극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그런 기회들이 있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인 것 같아요.

최: 그렇게 운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저도 ‘나도 좋은 경험을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만드시는 힘이 아까 국토대장정에서 극단 단원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아요.

5. ‘애인’의 고민, 김지수 대표의 고민: “어떻게 우리들 고유의 움직임을 가지고 관객을 만날 것인가?”


최: 제가 여쭤보고 싶었던 것들은 거의 여쭤 본 것 같아요.

김: 그럼 제 고민을 조금만 얘기할게요. 사실 장애인 배우들의 있는 그대로의 움직임을 가지고 관객을 만나고 싶다고 늘 생각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올해에 굉장히 고민이 많아요. 배우들 스스로의 신체적인 훈련이 필요하고, 아까 말했던 해방도 필요하잖아요. 또 어쨌든 연출이나 작가나 대표가 공유하는 고민들도 필요하고, 여러 시도도 해 봐야 하는데, 그런 길을 어떻게 열어갈지 정말 고민이 많아요. 지금 팔 년 차인데, 올해가 저에게는 고비와 같이 느껴져요.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제 다시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우리만의 어떤 것을, 조금 더 나아진 어떤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가 정말 고민이 되요. 이번 작품 <무무>를 만드는 일도 그렇고요.

최: 정말 고민이 많으실 것 같아요. 아까 단원 분들의 눈도 비장애인에 맞추어져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교육 된 것일 수도 있고 사회화된 것일 수도 있는 시각이나 미적 관점이나 기준 같은 것들이 이런 작업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항상 줄타기를 하셔야 하는 거잖아요. 어디까지를 훈련시키고, 어디까지를 연기자의 조건에 맞출 것인지를. 저도 사실 어디까지를 예술적 혹은 미학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어떤 틀, 어떤 시간과 공간의 틀을 짤 것인지와 어떤 훈련을 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궁금하고 고민도 많이 되요.

김: 저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그래서 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요. 어디까지 배우들에게 맞추어야 하고 어디까지는 대중들에게 맞추어야 하는지… 제가 이렇게 생각하고 애기를 하는 게 맞는지, 또 배우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사실은 배우들이 더 많이 생각을 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쉽지는 않고요. 배우들이 연극을 잘 안 보려고 해요. 연극을 보면 자기는 저렇게 못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대요. 저는 배우들에게 “그걸 버리고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된다. 저 사람처럼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리 극단에서 이야기하는 게 다 거짓말이 된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요. 그래서 제가 그 말을 하는 것이거든요. “너의 눈도 비장애인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냐, 그 눈을 너에게로 우리에게로 돌려서 우리를 봐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그게 사실 너무 힘들거든요. 외부에는 다 비장애인들의 것 들이 있는데 그 안에서 나의 존재를 그리고 나의 몸과 나의 것을 가지고 표현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교감하고 소통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도 사실 쉽지 않거든요. 그런 방법을 찾아 가는 게….

최: 저는 비장애인 배우들에게 장애 연극의 배우들의 움직임이나 연기, 공연들이 좋은 자극과 영감을 준다고 생각해요. 많은 배우들이 와서 보면 느끼는 게 있을 거라고 믿어요. 장애인 배우들의 신체가 다르고, 그 중에서도 개개인의 신체가 너무도 다르지만, 사실 비장애인들도 모두 서로 조금씩, 혹은 많이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때로는 모두가 어떤 특정한 이상적 신체나, 조건, 특성들을 향해서만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자신의 특성을 말소시켜 가면서 까지. 물론 어디까지를 개인의 특성으로 볼 지,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 되기는 하지만요. 이런 가운데서 장애인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큰 자극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점을 제가 (논문에서) 잘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분명히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게 아직 설명이 안 되어 있다면, 그것을 설명함으로써 그런 것이 되는 게 있잖아요. 그런 연구를 하고 싶은 게 지금의 목표이자 꿈인데, 잘 됐으면 좋겠어요. (웃음)

김: 잘 될 거예요. 열심히 해주세요. 저희는 그런 것을 행동으로 찾아가는 입장이고, 연구하시는 분들은 이론으로 만드실 수 있는 거니까 어느 지점에선가 다시 또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네요.(웃음)

2014년 7월 13일 일요일

공연의 시간과 공간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Drama-Out 1
최희범 (<지극히, 퍼포먼스> 연출)

드라마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드라마(drama)의 어원으로서 행동하다는 뜻의 dran을 들며, 드라마가 다른 예술 양식들과 구별되는 점은 실제 인물들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지난 5월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에서는 출연자들의 행위들로 꽉꽉 채워진 연극이 공연되었다.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이 만든 세 번째 공연 <지극히,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공연된 지 이미 한참 지나기도 했고, 공연 자체가 굉장히 유명해지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이 웹진(drama-in)의 필진 대부분이 공연에 참여했고, 공연준비 및 공연 후유증으로 인해 한 동안 글이 많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약간은 변명이 될 것도 같은 공연 제작 후기를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문장을 두서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시작한 이유는 이 글을 첫 번째로 하여 새로 시작해보려고 하는 연재의 제목을 drama-out*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행위로 꽉 찼던 우리의 공연이 그가 말하는 ‘드라마’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연출로서 참여했던 <지극히, 퍼포먼스> 제작에서 시도해본 연극 혹은 드라마에 대한 일종의 실험의 내용과 나름의 결과를 소개하고, 이러한 것들을 계기로 앞으로 이 연재에 실릴 리뷰들이 공연을 보는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 이 제목이 우리 웹진의 이름과 운을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drama-in의 “drama”가 어떻게 특정되어 있는지가 확실한 상태에서 그에 반하는, 혹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곧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의 drama를 생각했는데, ‘극적이다’ 혹은 ‘드라마틱하다’고 할 때 그런 드라마나 연극에서 공연의 측면보다 희곡 텍스트의 측면이 강조된 의미로서 사용할 때의 드라마 같은 것이다.

<지극히, 퍼포먼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드라마라고 불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출연자의 행위는 있을지언정 플롯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물들의 행동의 결합이 플롯이며 비극과 희극과 같은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이라고 말하는데, <지극히, 퍼포먼스>에서는 행동들이 나열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어떠한 의도 혹은 목적 하에 촘촘하게 구성/결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처음 화두는 “빈 공간, 2시간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들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였다. 즉, 의식적으로 ‘드라마’가 아닌 것을 추구 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만들 공연의 기본 요소에 드라마가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없는 공연의 현장성(liveness)에 대한 실험의 성격이 강한 ‘연극’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이 공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이러한 요소들이 이렇게 표현되었고 결국 그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야’ 하고 이야기 될 수 없는 무엇인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주인공이 된 공연이 가능한가?’ 현장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질문에 가까웠다. 비록 잘 짜인 스토리나 플롯이 없어도, 잘 생기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매력적인 인물(character)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행위를 하는 사람과 그 시간과 그 공간에만 속한 멋진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거기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의 출연자에 대해서 공연이 이루어질 시간과 공간에 진짜로 속할 수 있는 행위들을 찾아나갔는데, 이는 비단 공연에서 ‘연기’를 배제하겠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과연 연기는 관객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가, 내가 아무리 무대에서 실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나를 보는 누군가가 존재할 때 그것은 그저 밥 먹기의 수행(performance)일까, 아니면 밥 먹는 퍼포먼스(performance)일까? 어쨌든 출연자들에게서 ‘과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환영을 만들어 줘야 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처럼 보여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로 하고, 이런 기준으로 우리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찾아서 공연을 구성했다. 이 행위들을 찾아서 장면을 만들고 그것들을 일련의 순서로 구성하는 작업은 무작위로 여러 개의 질문을 뽑아서 출연자들에게 질문하고, 그 중에서 앞서 말한 ‘진짜로’ 할 수 있는지의 기준에 맞는 다양한 행위들을 골라서 그것들을 흥미롭게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재미있는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도 공연의 핵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소개 하겠다. 더 중요한 것은 출연자들이 각각의 행위를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게 하는 것, 혹은 ‘진짜로’하기 위해 한 가지 과제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의도를 말하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공연이 어떤 형태였는지 묘사해보자면, 출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혹은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반복해서 했다. 인사를 계속 하기도 하고, 노래의 한 구절을 반복해서 부르기도 하고, 발레 턴을 계속해서 연습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도 굳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한 가지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과제를 계속해서 하는 과정에서 출연자(연행자)는 그것을 ‘진짜로’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다. 때로는 고군분투하는 중에 그들의 과제가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한 그 과제가 공연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행자의 충동은 존중받았다. 그것은 바뀐 과제로서 그대로 수행되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지만 그 과제는 하는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달라지기도 하는 장면들이 자잘하게 모여서 이 공연을 채웠다. 때로는 각자의 과제를 수행하는 출연자들이 동시에 무대에 존재하면서 그 결합이 특정 공간, 시간에 대한 연상이나 특정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한 연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이 공연에서는 무엇인가를 진짜로 수행(performance)하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극히, 퍼포먼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든 입장에서 맘대로 써본 우리 공연의 이상적인 형태이다. 실제로는 매번의 공연이 모두 조금씩 달랐고, 이 조금씩 다른 것은 어제와 오늘 공연 사이에 큰 차이를 불러오기도 했다. 다른 형태의 공연에 대한 기록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세 번의 공연을 촬영하여 편집한 동영상 링크를 첨부한다. (공연 동영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5fW9GmPu-2k) 기왕에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무엇인가를 ‘진짜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진짜로’가 진짜로 걸리는 단어다. ‘진짜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연기하지 않는, 최대한 ‘일상적’인 상태가 ‘진짜’ 인가? 다양한 주장이 있겠지만 묻어두고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하는 것’ 혹은 ‘본연에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 겁나게 노력하는 것’을 ‘진짜로’ 하는 것으로 특정했다. 어쩌면, ‘진짜로’라기 보다는 ‘제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광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목소리와 기교를 뽐낼 수도 있고, 노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호소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는 후자가 ‘진짜로’ 사랑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사람이 콩쿨에 나가서 노래 실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연의 목적인 사랑 고백에 충실한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음치에 박치라고 해도, 그 광경은 기분 좋은 것, 감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분 좋은 광경’을 만들기를 바랐다. 어쩌면 조금은 무리한 기대일지도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서 우리가 최소한, 내가 하는 것의 본질을 알고 그 것으로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기를, 그리고 그 과정을 관객들이 ‘기분 좋게’ 바라봐 주는 상황, 그러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때, 그 시선이 없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할 일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것은 굉장히 도달하기 힘든 상태일 것이다. 그 상태는 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한 어떤 상태 같다.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조금 더 장난기어린, 그래서 놀이에 가까운 어떤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 과제 자체는 변해도 괜찮은 어떤 것, 실패해도 괜찮은 어떤 것이지만 일단 과제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람과 이상들 속에서 공연이 만들어졌고, 공연이 되었고, 이제는 끝났다. 사실 만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가 한 것은 어쩌면 무대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중 각자에게 가장 쉬운 것들이었다. 많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특정한 것을 ‘제대로’ 혹은 ‘진짜로’ 하기를 요구받지만, 우리는 아무거나 ‘진짜로만’ 하면 되었으니까. 작업인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작업의 다른 점은 숨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랄까. 어차피 뭘 하든 겪게 될 불인데, 잘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꽃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저 불 한가운데에 가면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우리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뭐가 있긴. 재가 된 내가 (혹은 나였었던 무엇인가가) 있겠지. 어떻긴. 개 뜨겁겠지. 내가 그 두려움만 벗어던진다면, 그래서 진짜 활활 타올라버린다면 공연은, 좋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흥미로울 것 같긴 하다.” 여기서 ‘뭘 하든 겪게 될 불’이라는 말을 나는 어떤 형태의 공연을 하든지 ‘진짜로’ 할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고군분투라고 해석했다. 나는 드라마가 있든, 없든, 뭐가 되었든 그 공연이, 그 공연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활활 뜨겁게 타오르길 바란다. 겁나게 뜨겁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기를 바란다. 겁나게 집중해서 자신의 과제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공연의 현장에서 보고 그 에너지를 느끼기를 원한다. 확실히 이런 것들은 앞서 말한 일반적인 의미의 드라마에 연관된 것은 아니다. 텍스트나 어떠한 의미를 위해 봉사하는, 그 의미나 이야기를 향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오르지 않아도 연극의 의미망은 구축될 수 있고, 관객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공연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드라마에 봉사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기억되기에 가치 있는 그러한 순간들을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 drama-out 연재를 이러한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공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쌓는 통로로 삼고자 한다. 비슷한 지점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의 대화도 고대해본다. ㉦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



by 최희범

2013년 11월 29일(금) 저녁 8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김현탁

무대는 도로처럼 가로가 긴 장방형에 가운데 노란 중앙선이 표시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에 약간은 흉물스럽기도 한 러닝머신이, 좌우 양 끝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중년의 남자배우가 뭐라 중얼거리며 걸어 나와 러닝머신에 주목한다(정확히는 손전등으로 러닝머신을 비추며 한 참을 갈등하는 듯하다). 이내 러닝머신에 올라 뛰기 시작한다. 그의 ‘달리기’는 극의 중반부에 한 번 중단되고, 마지막에 그의 죽음과 함께 정지된다.

사실 윌리가 공연 내내 뛰는 것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이미 입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공연을 보러 간 것은 당연히 “뛴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뛸까?”가 궁금해서였다. 심지어 공연장 로비에 비치된 리플릿도 친절하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었다. “본 공연은 윌리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치 플래시백처럼 지나간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윌리는 무대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러닝타임 내내 달리기를 하고, 그의 주위에서 가족들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등장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른 공연에서는 몇 천 원씩 주고 사서 봐야 하는 프로그램북 대신 무료 리플릿을 배치한 것은 원작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배려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리플릿에 적힌 말대로 ‘감각적 체험’을 기대하며 공연을 지켜보았다.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스즈키 다다시 <리어왕>

by 최희범

1.
몇 년 전에 스즈키 메소드 워크샵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무엇을 위함인지도 잘 모르면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아래로 이동시키는(grounding) 낮은 자세, 상하좌우 흔들림 없이 걷는 연습 등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이런 훈련이 실제 공연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었고, 워크샵 진행자들의 스즈키 메소드와 공연에 대한 열광어린 찬사를 보며 호기심이 더욱 커졌었다. 그 후 이번에 처음으로 스즈키 다다시 연출의 공연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오래 마음에 담아둔 호기심에 기대가 컸는데 나와 비슷한 기대를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는지, 공연 시작 전부터 객석의 분위기는 조용히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공연 시작 전 암전 상황에서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는 해프닝(!? 이전에는 공연 시작 할 때부터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까지 벌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흔들림 없었고,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하기 위해 몸 전체를 의식하고 통제하고 있을 배우들을 보며 그들이 자신의 몸 전체로 뻗치고 있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