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사샤 발츠 "S"의 몸과 섹슈얼리티

by 김세진

S, © Bernd Uhlig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남자의 나체, 외설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한 덩어리의 물체처럼 보인다. 잠시 후 남자, 여자, 어린 사람,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나와 그 물체 같은 남자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체인 여자와 누워있던 나체의 남자가 만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고정되어 있던 물도 흐르기 시작한다. 사샤 발츠Sasha Waltz의 ‘S’의 시작이다.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세 여자의 자서전적 몸 <치마, 살>

by 이흔정

2013 박소정 콜렉티브 콜라보
2013. 8. 5(Mon)~6(Tue) pm8:00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

텅 빈 무대에 세 개의 서로 너무나 다른, 그러나 또 같은 ‘몸’이 있다. 관객은 세 명의 무용수 박소정, 정정아, Christine Fletcher의 몸을 만난다. 처녀의 붉은 치마에 감춰진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공연 포스터를 보고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세 명의 몸은 자못 실망스러울 수 있다. 매력적으로 잘 가꾸어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런 몸을 상상했다면 말이다. 정정아와 박소정의 몸은 현대무용으로 다져져 다부지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여성의 몸이다. Christine은 키가 족히 180cm는 돼 보이고 머리는 백발에 가까우며 탄력을 잃고 주름진 몸이다. 우리가 무대에서 장시간 ‘보고 싶은’ 몸들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볼수록 점점 그들의 몸이 궁금해지고 또 사랑스러워진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레드마리아>, 여성의 삶은 배에서 시작된다.


by 김재영

<레드마리아> (2012, 경순 감독)

 여성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

 <레드마리아>는 한국, 일본, 필리핀에 살고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사실, 여성의 몸과 노동의 문제를 남성인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노동한다는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자는 목소리에 공감해 본 적도 없다. 여성의 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쯤으로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이런 무관심은 여성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남성인 내가 가해자 집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선입견과 피해의식으로 인해 나는 정작 여성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셰임>: 자학하는 몸의 ‘바디 호러’


by 시뫄

여름에는 마치 공식처럼 호러 영화 포스터 한 두 개 정도는 영화관에 걸려 있기 마련이다. 계절에 상관 없이 일년내내 호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특히 여름처럼 심신을 지치게 하는 무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영화관에서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흐르게 하는 호러 영화 한 편이면 여느 피서지 부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호러 영화는 소재와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물론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감독의 <셰임> (Shame, 2011)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호러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 혹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공포를 끄집어 올리게 하고 그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공포가 몸의 생생한 파괴와 타락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셰임>은 '바디 호러' 영화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은교> : 몸을 보다 / 몸을 읽다


by 백인경


영화 <은교>를 보게 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열일곱 소녀와 일흔 살 노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일흔 살의 박해일이 궁금했다. 거대한 광고판에서 마주친 노인 박해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피부와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순수하게, 어떠한 상상도 기대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슬프고 조금 불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아렸다. 은교의 발가벗겨진 몸이, 서지우의 무기력한 런닝 셔츠가, 노인이 ‘되어버린’ 이적요의 불룩한 배가, 피고 지고 시들어가는 꽃송이처럼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 내밀면 만져질 것처럼.


2013년 8월 8일 목요일

변신, 또는 병신: 극발전소 301, <병신3단로봇>

by 산책

극발전소 301, <병신3단로봇>,
정범철 작, 연출, 키 작은 소나무 극장.

몸 

 무더운 여름이다. 여름은 사람들에게 “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 같다. 세 번의 복날에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라도 몸 보신을 해야 할 것 같고, 탄탄하고, 날씬한 몸을 위해 여름이 오기 전 미리 준비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갖게 만든다. 7월 초부터 “늦었지만 이제라도”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기 위한 팁을 알려주는 각종 동영상이 SNS를 타고 나에게까지 왔다. 정말 7일만 하면, 영상 속의 저 사람 같은 몸을 가질 수 있는 건지 궁금하고, 준비되지 않은(?) 내 몸을 괜히 내려다 보게 되고, “7일만에”, “하루 10분으로” 라는 제목을 믿어 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들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고통 보(이)기 - 프로메테우스 vs 토마스

by 에스티


극단 골목길, <그 사람의 눈물>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지경화 각색, 박근형 연출, 게릴라 극장)




먼저 아버지께서는
이 들쭉날쭉한 암벽을 천둥과 번개의 화염으로
부수어 그대의 몸뚱이를 감추실 것이고,
그러면 바위가 팔을 구부려 그대를 꼭 붙들게 될 것이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대는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오. 그러면 제우스의 날개 달린 개가,
피투성이가 된 독수리가 게걸스럽게도 그대의 몸뚱이를
큼직큼직한 고깃덩이로 갈기갈기 찢게 될 것인데,
이 불청객은 날마다 다가와서
그대의 거매진 간을 포식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그러한 고통의 종말을 기대하지 마시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16-26행)


결박된 그를 보는 것은 그와 한핏줄이자 제우스의 명에 따라 그에게 굴레를 씌우고 쐐기를 박아야 했던 헤파이스토스에게도 탄식이 나오는 일이다. 이에 대한 코로스장의 증언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프로메테우스여, 누구든지 그대의 고통을 보고도 동정하지/ 않는 자는 무쇠의 심장을 갖고 있고 돌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어요. 나는 이런 광경을 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막상 보고 나니까 가슴이 아파요. (242-45. 코로스장은 보기 전에는 그 장면이 가슴 아플 거라는 건 왜 몰랐을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런데 보는 사람에게 이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의 형벌은 프로메테우스 자신에게는 단지 몸이 힘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조그만 나무 가시 하나가 손가락에 박혀도 괴로워하는 범인들과 다르게 그리고 있다. 그는 굴레나 쐐기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결박으로 인한 몸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신적인 명예와 위신에 가해진 “모욕”이다 (97). 이 위대한 신이 지금 이순간 두려워 하는 것은 누군가/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인데(127), 왜냐하면 그는 누구이든 간에 자신의 고통을 ‘보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18). 이처럼 이 극은 서로 반대되는 것, 즉 보는 고통과 보여지는 고통을 동시에 말한다. 역설적인 것은, 그리고 그래서 메타극적인 것은, 그것이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충전된 극장에서 벌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남의 고통을 (맛)보기 위해 이 무더운날 스스로를 어두운 극장 비좁은 객석에 꼼짝없이 결박시켰으니 말이다. 불행히도 나의 가학적 욕구는 충족되지 못했다. 나는 무대 위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보면서 나또한 코로스장의 심정을 가질 수 있기를, 또는 내가 텍스트에서 발견했던 고통의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이 둘 모두에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목과 팔에 감겨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쇠사슬이 자극적인 볼거리에 익숙해진 내게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무대 뒤편 목재 구조물에 팔을 메다는 장면으로는 내 몸도 상상력도 별반 동하지 않았다. 일단 나는 나의 무딘 감수성을 탓해본다.

내각 찾던 것이 칼이라면 그것은 배우의 몸이 아니라 텍스트에 꽂혀 있었다. 원작 초반에 “힘과 폭력”이라는 추상적 캐릭터가 나와서 프로메테우스와 고통의 문제를 주고 받는 장면은 잘려져 나가고 그 대신 프로메테우스가 결박되게 된 계기--대다수의 한국 관객들에겐 여전히 낯선 그리스 신화--가 친절하게 삽입되어 있다. 그 대신 이오의 어머니, 헤라, 그리고 제우스가 등장한다. 이오의 어머니/헤라 그리고 헤파이스토스/제우스를 각각 일인이역으로 배정한 것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인물을 한 사람의 배우가 (다른 가면을 쓰고) 연기하도록 하여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희랍비극의 연기 방법론에 맥이 닿아 있지만, 이오의 아버지를 왕(河神)에서 대장장이로 슬쩍 바꿔 놓은 것은 그다지 납득되지 않는다. 거지들로 코로스를 구성한 것에서 이번 개작의 방향성을 어림 짐작해본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건내 받고 나중에는 도리어 그를 배신하는 자들로 보여준 것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되 책임감은 커녕 그 말을 희화화시켜버린--물론 그것은 정치인들의 지독한 저질 개그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군중들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해석의 단서를 프로메테우스의 대사 중 “운명", “사람사는 세상"과 같은 단어들에서 찾는다. 나는 작가나 연출이 이 작품에서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는 안목에, 아니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 찬사를 표한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박근형의 작품(<마라/사드>, <햄릿> 등)에서 발견되는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적 암시는 그의 작품을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좁은 연극 무대 속에서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는 정치적 코멘트도 보기에 따라서는 ‘급진적’인 정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체제 순응적인 예술이 오랫동안 "순수" 예술로 자리 매김해온 환경 속에서 예술로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튀는 행위일 뿐더러, 정부 여당의 입맛에 맞지 않는 발언을 했다가는 재정적 지원이 아니라 정보기관의 관심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혹시라도 동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관객들은 작품의 형식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며 그것을  예술지상주의적 강박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억될만한 아방가르드 운동이 언제나 내용과 형식의 양측면을 포괄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공연에서 보다 실험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상투적인 의상이나 분장, 그리고 사실적인 효과음 등은 각색을 통해 되살리고자 한 텍스트의 생명력을 불어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경우 이 공연에서 가장 긴장감을 느낀 순간은 극 초반부에 프로메테우스가 불이 담겨진 화로를 들고 등장했을 때이다. 그때 나는 먼저 배우의 손이 뜨겁지 않을까 걱정했고, 곧이어 안뜨겁게 조치했을 거라는 생각에 시시해졌고, 그런 다음에는 화재에 대한 非극적이지만, 극장에서 자주 발생한다는 점에서, 극장적인 걱정에 잠시 빠졌다. 역시나 연극은 “위험한 예술”이다.

불평같은 말들은 이 정도로 하고 질문을 바꿔보도록 하자. 내가 그때 거기서 보고 그래서 느끼고 싶었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대 위에서 실제 고통의 교류가 가능하고, 또한 바람직한가? 당장 교과서적인 행위예술가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가 생각난다.아브라모비치는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이라는 제목의 1975년 퍼포먼스에서 2파운드짜리 꿀 한병을 숟가락으로 퍼먹었고, 와인 한병도 비운 다음 자기 배에 면도칼로 별을 그렸다. 그런 다음 채찍으로 자기 등을  그리고 얼음덩이 위에 드러누웠다. 물론 이때, 역시 이 또한 교과서적인데,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보다 못한 관객들은 그녀를 얼음 위에서 끌어내렸고 공연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이 ‘고통의 교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고 있기가 매우 불편했다는 점이다. 이런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그것이 차력도 마술도 아니라 그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행위로 발생하는 고통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불신의 중지 없이 일어나는 정서적 교류?) 그런데 흥미로운 변화가 2007년에 있었던 아브라모비치의 리바이벌, 혹은 레플리카에서 발견된다. (원하는 경우, http://youtu.be/-82PqjE8Qz4?t=55m11s에서, 55분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75년 퍼포먼스와 거의 동일하게 꿀-면도칼-얼음-채찍의 순서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한 번에 별 한 변씩 총 다섯 세트로 나눠서 진행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제 더이상 아무도 얼음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네 차례 얼음에 올라가고 채찍질하고 별의 다섯 변을 다 완성 하고 나서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고 퍼포먼스를 끝낸다. 이렇게 끝까지 하는 것이 그녀가 75년에 원했던 것일까?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 일을 반복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몸이 여기에 적응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얼음 위에서, 그리고 채찍질을 하면서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조용히 끝까지 지켜만 보는 관객에게 그녀의 고통이 전달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녀의 지난 30년의 경력으로 인해 이제 관객에게 그녀는 일종의 차력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이다. 어쩌면 원활한 공연 진행을 위해 관객들의 개입이 사전에 차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의미에서 개입이 불가능했던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의 기록에 따르면, 75년 당시에는 그녀가 얼음 위에서 30분 동안 꼼짝 않고 누워 있은 후에야 관객 몇명이 나와서 그녀를 얼음에서 끌어내렸다고 한다. 어쩌면 2007년의 관객들은 그때에 비해 너무 빨리, 비록 테이블 위에서 메트로놈이bpm 60 정도로 또각거리고 있긴 했지만, 전환되는 그 속도에 도무지 개입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공연은 완성되지만 고통은 구제받지 못하고 소모되어 버린다.
나는 애초 이 글에 김형준 감독의 <용서는 없다> (2009)를 포함시켜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다시 보는 데 실패했다. 그 모든 것이 미술팀에서 만든 소품임을 알더라도 토막 살인 당한 시체가 부검을 위해 다시 난도질 당하는 이 이중적 하드고어를 보는 것에 도무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아예 볼 생각을 않았던 것 같다. <올드보이> 보다 조금 더 잔혹한 이 복수극에 대해 한 네티즌 리뷰어의 표현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찝찝해진다.”

다시 <눈물>로 돌아와 보자. 난 도대체 뭘 기대했던 것일까? <토마스> 같은 진짜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저 배우가 고통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용서>나 <패션> 같은 가짜의, 하지만 진짜 보다 더 찝찝한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