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혜경궁 홍씨>

by 서유미

<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변호인》이 개봉합니다.

by 에스티


여기 저기서 많은 리뷰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을 아끼고 감상을 대신하여 리어가 죽은 셋째 딸 코딜리어를 안고 외치는 마지막 대사를 옮깁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나서도 이 대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변호인> 예매를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 불쌍한 바보가 목매달려 죽었다.
아냐,
안 돼,
생명이 없어!
어찌하여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
너는 다시 못 오는구나.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제발 이 단추 좀 풀어주게.
고맙네.
이것이 보이는가?
이 애를 봐!
봐, 이 애 입술을!
여기를 봐!
여기를 보라고!
(죽는다.)

- <리어 왕> 5막 2장 (김태원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301-2면)
*산문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인용자가 줄바꿈하였습니다.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햄릿>, 사유하지 않는 삶에 대한 공포

by 시뫄

<햄릿>
오경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3/12/11

비극적 영웅은 치명적인 성격의 결함(hamartia)을 가지며 그 결함이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이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의 토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영웅이 자신과 같이 어떠한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 즉 정화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햄릿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영웅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내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뿌리내린 수많은 햄릿과의 대면을 통해 느낀 것은 카타르시스와 비슷하다. 연민과 공포, 즉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한 자기연민과 그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통한 또 한 번의 자기연민으로 늘 어디엔가 호소하고픈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책으로만, 혹은 기타 매체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햄릿>을 드디어 무대에서 만나러 가는 내 기대는 미친 햄릿을 마주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그것이었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프리뷰: 이윤택의 《혜경궁 홍씨》

by 에스티

이윤택 연출이 직접 쓰고 연출한 <혜경궁 홍씨>가 12월 14일부터 29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됩니다.

이윤택 연출과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김소희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 60대 노인에서 10세 소녀까지 다양한 모습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영조,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는 이 시기 는 TV 드라마 소재로도 많이 사용될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토대로 했다고 하며, 한 여인의 관점에서 궁중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윤택의 팬이라면 기대해도 좋은 부분은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대사에서부터 인물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극작 방식은 <문제적 인간, 연산>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만합니다. 더불어 첫 장면에서 아들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서로의 입장 차이를 팽팽한 대화를 통해 주고받는 방식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만, 같이 본 다른 기자들은 좀 지루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옥집의 내실 삼면으로 된 무대는 회전무대 위에 올려져 원활한 장면 전환을 돕고 있습니다. 작고 좁은 극장에서 수동으로 돌아가는 회전 무대는 그것만으로도 보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나무와 창호지로 된 무대는 한옥의 느낌이 물씬 나는데, 문득 이 나무는 어느 나라 나무를 사용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극에 등장하는 영조의 모습은 매우 독단적인 데가 없지 않은데 그 모습이 최근 북한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극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몇몇 대사들이 요즘 시국에 맞닿아 공명하는 지점도 보입니다.

우리 전통의 소리와 몸짓 또한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로 적절해 보입니다. 무대 공간 위에 악사들의 연주 공간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백장 극장의 적은 객석으로 인해 표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무엇보다 아쉽습니다.

공연문의 국립극단 1688-5966 / www.ntck.or.kr

드라마인 <혜경궁 홍씨> 리뷰 바로가기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15년을 살아 낸 <휴먼코메디>

by 산책


휴먼코메디 (c)사다리움직임연구소 2013.
출처: 코르코르디움 블로그 http://corcordium.tistory.com/

  한 해 동안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극장에 갔다. 신선하고 기지가 넘치는 공연에 감탄하고, 조금은 질투심을 느끼며 넉넉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온 적도 있고, 희곡에 감동받은 적도 있고,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있다. 괜히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가 무척 미안한 적도 있었고, (본인은 한 번 해 본적도 없으면서) 연출을 욕하고 싶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연도 물론 있었다. 모아 둔 표와 프로그램을 꺼내 보고, 깜깜한 공연장에서 뭐라도 써 보려고 끄적거렸던 노트의 기이한 문자들을 해독하면서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나름 재미있다. 연극은 책이나 영화처럼 돌려 볼 수 없고,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두 눈과 두 귀로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움직임을 다 보고 들을 수 없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순간적으로 한 장면이, 그 공연이 지나가버린다. 어떤 인상만을 남기고.

   올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연극은 지난 7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휴먼코메디>이다. 정말 신나게 웃었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다.  <휴먼코메디>는 <가족>, <냉면>, <추적> 이렇게 세 가지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은 하나 남은 아들이 배 타러 가는 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아들이 죽을 것을 예상하기나 한 듯이 갑자기 가족 사진을 찍고, 아들이 떠나는 시간을 자꾸 미루기 위해서 밥을 먹이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 중에 소소한 웃음이 만들어 진다. 두 번째 이야기인 <냉면>은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한 한 팀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노래와 안무를 외우지 못한 소위 ‘구멍’멤버가 계속해서 동작을 놓치는 모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조금 더럽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다). 마지막 <추적>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경찰청 사람들을 패러디하며 모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과 스캔들 등이 얽히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세상의 모든 그저 그런 생에게 - 문삼화 연출, <세 자매>


by 함스타


<세 자매>
연출 문삼화
공상집단 뚱딴지
2013/11/21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소극장


어느날 누군가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많이 속상한 나는 집에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심각하게 생각을 시작한다. 편견없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편견없는 세상을 위해 난 뭘 할 수 있을까 …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나 또한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마침내 생각한다. 아마 그런 세상은 오지 않겠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하고 노래하지 않고,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이 다소 불순하고 허무주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허무의 발바닥 밑에, 밟혀서 단단해져버린 희망이 있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도 없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괴로운 것은 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할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깊이 절망함에도 불구하고 깊이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체홉에서 허무주의를 읽지만, 그렇기에 나는 체홉에서 희망을 읽는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



by 최희범

2013년 11월 29일(금) 저녁 8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김현탁

무대는 도로처럼 가로가 긴 장방형에 가운데 노란 중앙선이 표시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에 약간은 흉물스럽기도 한 러닝머신이, 좌우 양 끝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중년의 남자배우가 뭐라 중얼거리며 걸어 나와 러닝머신에 주목한다(정확히는 손전등으로 러닝머신을 비추며 한 참을 갈등하는 듯하다). 이내 러닝머신에 올라 뛰기 시작한다. 그의 ‘달리기’는 극의 중반부에 한 번 중단되고, 마지막에 그의 죽음과 함께 정지된다.

사실 윌리가 공연 내내 뛰는 것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이미 입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공연을 보러 간 것은 당연히 “뛴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뛸까?”가 궁금해서였다. 심지어 공연장 로비에 비치된 리플릿도 친절하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었다. “본 공연은 윌리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치 플래시백처럼 지나간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윌리는 무대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러닝타임 내내 달리기를 하고, 그의 주위에서 가족들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등장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른 공연에서는 몇 천 원씩 주고 사서 봐야 하는 프로그램북 대신 무료 리플릿을 배치한 것은 원작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배려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리플릿에 적힌 말대로 ‘감각적 체험’을 기대하며 공연을 지켜보았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극단 애인, 《손님》

by 에스티

<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선택의 문 앞에 서서 - 바냐아저씨

 by 김재영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에 대하여

 연극의 마지막 장면. 바냐와 소냐는 무대 중앙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둘은 꽤 오랫동안 침묵한 상태로 타자를 두들기거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들의 일에 무척 몰두해 있는 것 같다. 무대 왼편에는 유모인 마리나가 늘 그렇듯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뜨개질을 한다. 무대 뒤로 의사 아스트로프가 그들의 모습이 생경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퇴장한다.

 연극은 그렇게 끝난다. 1막에서 바냐가 얘기하듯이 그들은 예전의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돌아간다는 것,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라는 노래를 떠올려보자.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당신은 이 가사에 동의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애초에 ‘제자리’라는 것이 정해져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곳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는 시도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좌표축 위에 누군가의 ‘제자리’를 일방적으로 설정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당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완전하지는 않지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일종의 ‘체념’ 상태를 동반한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며,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사람은 그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무대 뒤로 퇴장하다가 멈춰서서 일에 몰두한 바냐와 소냐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스트로프의 시선을 생각해 보라. 바냐와 소냐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예전의 그들의 모습과 전혀 닮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부유하는 삶을 위한 한 편의 동화 : 영화 <젤리피쉬>

by 백인경


지난 11월 12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 (http://www.cinematheque.seoul.kr)에서 열린 이스라엘 영화제에서 5년만에 <젤리피쉬>를 스크린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왠지 이스라엘 하면 모래바람이 부는 노란 빛의 하늘과 서걱거리는 공기를 떠올리며 이것이 LP판이 내는 따뜻한 잡음과 오래된 필름의 낡은 빛과 닮아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대규모도 아니고, 세련된 CG와도 무관한 영화지만 그래서 디지털 디바이스와는 더 어울리지 않는 영화 <젤리피쉬>.

무언가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해석 보다는 번역의 여정이다. 비언어적인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동안 유실되는 것들. 문장으로 포획할 수 없기에 눈 앞에서 상실되어 가는 것들을 온 마음으로 애도하는 동안, 쉴 새 없이 깜빡이는 커서의 비트에 따라 키보드 위에 얹어진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이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 <젤리피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들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대신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2013년 11월 18일 월요일

Bodily Movement in La Divina Commedia by Han, Tae-suk

 
By Hamsta

***Note: this article contains spoilers for Snowpiercer (2013), directed by Bong, Joon-ho

I suppose it cannot but be a challenging work to make a well-known literature into a theatre performance, as one very crucial question may quickly arise; Why should it be staged when it seems just as good enough to be read?* To this question, Edward Gordon Craig would have answered; No, you shouldn't. This modernist theatre-maker thought that Shakespeare’s great plays shouldn't be staged at all. Besides the discrepancy between the staged Hamlet and the imagined Hamlet, what he indeed meant by negating the idea of ‘staging’ is that theatre is not merely the staged text but the reality on its own.

It seems for Han, Tae-suk, her answer in La Divina Commedia is that she tries to go beyond the ‘mere staging’ of this Western classic by means of theatrical devices such as scenography, musicalisation and bodily movement: The huge structure on stage which fully occupies one of the biggest stages in Seoul (it can even revolve!), alternating dialogues and songs with live orchestral music accompanied all the way, and abundant display of bodily dynamics. It will be great if I can deal with each of those, but to my painful realisation, I am not such a capable writer. So I would rather, in this essay, focus my discussion to the bodily aspect, which mostly appealed to my interest.

*No, please don’t tell me you want it to be staged because you gave up teenage-reading and never tried picking it up again from the bookshelf!

http://www.youtube.com/watch?v=s-fLnBfmDaQ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지독한 밀리터리 가스펠 뮤지컬: <해피 투게더>

by 에스티
이수인 작, 연출 <해피 투게더>
2013.11.15-12.15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

이전에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영화와 드라마가 있었지만, 난 그 둘 다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란 남자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병헌과 전지현이 남매로 나왔던 연속극의 제목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병헌이 2군 야구선수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 해에 방송된 <미스터Q>의 경우 본방사수를 할 수 없어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서 봤었지만, 서울에 상경한 이듬해 나는 그만 TV드라마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더 있을까 싶어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니 예전에 노래하다가 틀리면 머리 위에 쟁반이 떨어지던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한 예능 프로의 한 꼭지라고 한다.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원대한 포부가 없더라도 이정도는 누구나 꿈꾸는 소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고, 이 이름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작품의 제목으로 반복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 소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11월 15일 개막한 동명의 연극은 이 제목을 가장 반어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그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다: 연극 <노란달> (부제: 레일라와 리의 발라드)

by 서유미

장소 / 백성희장민호 극장
원작 / 데이비드 그레이그 David Greig, <Yellow Moon>
연출 / 토니 그래함 Tony Graham 
극단 / 국립극단

1895년 크리스마스, 미국 미주리 주에서 '수사슴' 리 쉘튼Lee Shelton이 빌리 리옹스Billy Lyons을 살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Stagger Lee’는 이 사건의 내용을 가사로 옮긴 미국 포크송이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50년대 말 오랜 기간 빌보드 차트에 머무른 로이드 프라이스Lloyd Price의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연극 <노란 달>은 이 노래와 이를 배경으로 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극은, 굉장히 다르지만 동시에 굉장히 비슷한 10대 소년과 소녀의, 일종의 여행기이다. 아버지 없이, 알코올 중독의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리.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하며 진짜 '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레일라. 둘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던 그들은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상과의 소통 불화라는 어떠한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 그러던 어느 밤, 그 사건이 일어난다. 우연히 만난 둘. 때마침 리는 엄마의 남자친구 빌리와 언쟁을 벌이게 되고, 그가 자신의 모자를 뺏으려 들자 그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을을 떠나게 된, 아니 떠날 수밖에 없었던 리와, 그와의 동행 길을 선택한 레일라의 여정이 시작된다.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무겁고, 삐딱한 사회극 - 바람이 쌩쌩 불던 날, 극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by 산책

(이번 글은 다소 감정적인, 또는 개인적인 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은 5편,  11월은 4편의 연극을 예매했다. 한정된 시간과 돈을 고려해 고른 작품들이었다. 극장에 가는 것은 내게 공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놀이”이기 때문에 꽤 고심해서 작품을 고르게 된다. 그런데, 11월에 예약한 첫 공연에 나는 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에 피곤했고, 방바닥은 알맞게 뜨끈했으며, 곧 무한도전(자유로 가요제 마지막 편 – 완성된 노래와 그들의 퍼포먼스가 너무 궁금했다)이 할 시간이었다. 시간을 흘끔거리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앉았다 일어섰다 했지만 결국 나는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보러 가지 않았던 작품은, 막을 내렸다.

왜, 돈을 내고, 작품을 예매하고도,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극장에 가지 않았나. 여러 모로,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누구를 향한 미안한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 피곤했다.


2013년 11월 6일 수요일

우리가 노래하는 당신의 비극을 목격하라 : 음악극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by 이우정

입장하는 관객은 무대로 오른다. 공연시간이 다 되어 채워져 있어야 할 관객석에는 희미한 조명만이 흐른다. 한 가운데 놓인 원형(圓形)을 둘러 내리꽂는 시선으로 차곡히 앉으면 아무 것도, 아무도 아닌 것처럼 무리가 줄지어 등장한다. 그리고 빛으로 끊어내던 시간의 경계 따위는 없이 코러스의 입으로부터 바람소리가 찾아든다.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무대 위 같은 공간, 우리 모두 함께’의 낯선 경험을 주는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의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비극의 대표작이며 심리학적 용어로도 빈번하게 회자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름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적어도 요 몇 년간의 공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름 있는 연출가에 의해서 과감한 시도로 제작되었던 적도, 희랍극 페스티벌로도, 기본으로 돌아가는 극적인 요소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이디푸스인가.’라는 물음에 서재형 연출의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는 다시 한 번의 관람 횟수를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준다. 그의 시도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형식에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범죄 이후에 오는 것들, <크라임(Zbrodnia)>

by 서유미

크라임 Zbrodnia (The Crime)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 이벨리나 마르치니약  Ewelina Marciniak
단체 / 떼아트르 폴스키 비엘스코-비야와 Teatr Polski Bielsko-Biała

“입장은 공연 시작 5분 전부터 가능합니다”

폴란드 연극 단체 떼아트르 폴스키의 <크라임>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해외 초청작들 중 유일하게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객석이 여러 층으로 분리되어 있고 무대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아 배우와 관객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대형 극장과는 달리, 소극장은, 특히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은 무대와 객석 사이 경계가 거의 불분명하고 객석의 높이가 비교적 고른 편이라 마치 큰 방 안에 연극을 구성하는 사람들, 즉 배우들과 관객들이 뒤섞여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적 특징을 선호했던, 이 극단의 <크라임>이라는 연극이 분명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8시 시작인 공연의 입장이 5분 전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공연 준비가 덜 되었겠거니, 했던 것은 나의 착각. 연극은 5분 전부터, 즉 관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무대의 가운데에는 마루 바닥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커다란 칠판이 걸린 벽, 오른 쪽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걸린 벽과 그 아래 황금색 해골들이 쌓여 있다. 중년의 여성과 그의 딸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마루 바닥 위를 배회한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그들은, 차례로 입장하는 관객들을 불안한 시선과 몸짓으로 마주한다. 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관객들에게 때로는 자리 안내를 하기도 하고, 빨리 착석하도록 재촉하기도 한다. 왼쪽에는 부동 자세의 한 남성이 서 있고, 오른 쪽에는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남성이 관객인 마냥 앉아 있다. 무대 위에 이미 현존하는 배우들, 그리고 불안하고 그로테스크한 음악과 조명은 관객들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면서, 연극 <크라임>은 공연 시작 5분 전, 이미 시작되었다.

2013년 11월 2일 토요일

구일만 햄릿

by 에스티

이 글은 첫 인상을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아래 링크의 글에서는 보다 상세한 공연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구일만 햄릿>과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연극의 스펙트럼", <안과밖> 제39호, 2015. 

***


그들이 <햄릿>을 택한 것은 무척이나 잘한 선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 뭔가 어설픈데, 괜찮은걸!' 보는 당시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에 드는 공연을 보았을 때만 얻는 어떤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마음 한켠이 계속 불편하고 무겁다. 

해고된 지 7년. 그날은 정확히 2469일째 날이었다. 아마 내가 그들 주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만 새 일자리를 찾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으리라. 이 순간 나는 이제 그만 상복을 벗어버리라고 말하는 거트루드가 된다. 

"햄릿, 그 어두운 상복을 벗어버리고 폐하께 좀 더 정답고 부드러운 눈길로 대하거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돌아가신 아버님만 흠모할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은 이승에서 영겁의 세계로 떠나는 법이다." (신정옥 역)

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Sfumato: Blurring of Borders

by Hakyung Sim


          The month of October was full of treats for theatergoers in Seoul. Along with the usual domestic performances, works of foreign directors and companies were brought to local stages by festivals such as SPAF (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and SIDance (Seoul International Dance Festival). Though I’m not dance-savvy at all, the array of Western contemporary dance performances interested me.

          Above all, Sfumato, a work presented at SPAF by French choreographer Rachid Ouramdane and his company L’A, appealed with its slogan: “a sociopolitical dance-documentary about climate refugees”. It was introduced that Ouramdane's trip to Vietnam, where he witnessed refugees from a tornado, had inspired him. Sure, the widely anticipated use of water on stage was another appealing point. Seeing several productions recently with water on stage, however, had made “water” less sensational for me; I rather focused on how it was used, or what effects it gave on the overall experience.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스즈키 다다시 <리어왕>

by 최희범

1.
몇 년 전에 스즈키 메소드 워크샵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무엇을 위함인지도 잘 모르면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아래로 이동시키는(grounding) 낮은 자세, 상하좌우 흔들림 없이 걷는 연습 등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이런 훈련이 실제 공연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었고, 워크샵 진행자들의 스즈키 메소드와 공연에 대한 열광어린 찬사를 보며 호기심이 더욱 커졌었다. 그 후 이번에 처음으로 스즈키 다다시 연출의 공연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오래 마음에 담아둔 호기심에 기대가 컸는데 나와 비슷한 기대를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는지, 공연 시작 전부터 객석의 분위기는 조용히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공연 시작 전 암전 상황에서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는 해프닝(!? 이전에는 공연 시작 할 때부터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까지 벌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흔들림 없었고,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하기 위해 몸 전체를 의식하고 통제하고 있을 배우들을 보며 그들이 자신의 몸 전체로 뻗치고 있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그래도 키마이라는 불을 뿜는다: 言語, 소리, music의 창극 <서편제>

by 이진주
 
국립극장, 2013년 9월 18일 15시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가 영화와 뮤지컬을 거쳐, 이번에는 국립창극단의 품에서 창극으로 재탄생했다. 공연 시작 전, 국립창극단의 김성녀 단장은 최초의 창극이 공연된 지 110여년이 흘렀으며 파격과 실험을 통해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다. 창극은 백여 년 전 그 탄생 시점부터 현재까지도 실험 중이다.

  사자의 머리에 염소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 서로 다른 형상을 한 존재들의 결합인 키마이라(Chimaira). 창극 <서편제>는 유서 깊은 판소리의 눈대목들로 이루어진 소리와 극작가 김명화가 써낸 탄탄한 대본, 그리고 전체 줄거리의 배경을 이루는 양방언의 아름다운 기악곡들이 각각 머리, 몸통, 꼬리를 이루고 있었다. 극작과 두 종류의 음악은 서로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으면서, 각각이 가진 훌륭한 장점을 순간순간 충실히 드러내었다. 말로 된 대사는 사건을 발생시키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고, 판소리 대목들은 극중에서 음악이 필요한 부분에서 실제 음악으로 쓰였으며, 양방언의 음악은 배경을 이루면서 빈 곳을 메워주었다. 다만 세 요소가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서로가 역할을 넘겨줄 때 충돌을 일으켜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했다. 이 때 생기는 균열들은 창극이 이종 세포들 간의 혼종임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만 놀고 있다고 여겨지던 혹은 서로 불협하고 충돌한다고 여겨지던 각각의 요소가 조화롭게 만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앙상블로 큰 감동을 주었다.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웃기기 참 힘들겠지만, 웃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 작, <구름> , 남인우 연출, 남인우, 김민승 공동 극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by 산책

화창한 휴일 오후, 보조석까지 놓인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좋은 휴일에 아리스토파네스를 보러 왔을까, 조금 의아했다. <구름>은 2500년 전의, 그리스 희극인데다가(작가의 말 처럼 “비극도 아니고 희극”), 전작인 <개구리>는 이런 저런 말도 참 많았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연은 쉽게 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티켓이라도 선물해 주면 모를까, 도대체 누구에게 자기 돈 내고 이런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야 할 지,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날이 좋은 휴일 오후, 애써 햇빛을 즐기며 극장 마당에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온다. 아니,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렇게 유명한가? 이 사람들은 다 자기 돈 내고 스스로 극장을 찾은 유료 관객들인가? 그러는 나는 여기 왜, 혼자 앉아 있는 건가?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성기웅 + 타다 준노스케 <가모메カルメギ>

by 에스티

1936년 여름의 조선이랬다. 성기웅이 각색한 체홉의 <갈매기>의 배경 말이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무대에는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가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명백한 시대착오에 무심하기에 아무렇지 않고, 아무렇게 버려져 있기에 또 그러하다. 사실 이 전자 기계들은 무수한 신문지 더미와 부서진 가구, 주저 앉은 의자, 휠체어 등과 함께 무대에 나뒹굴고 있다. 이게 뭘까. 쓰나미가 지나간 것 같았다. 여기서 첫번째 질문이 생겼다: 후쿠시마 ‘재앙’ 이후 일본 연극은, 아니 타다상 자신은 어떻게 변했는가?

공연을 보면서 다른 질문이 생겼기에 연출과의 대화 시간에 이걸 질문하진 않았다. 작품과 동떨어진 얘기 같았고, 좀더 사적인 자리에서 물어봐야 할 질문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모임에서 한 번에 여러 개의 질문하는 사람들이 얄미워 보였기 때문에. 고맙게도 연출은 묻지 않았지만 그 무대가 바로 그 ‘쓰나미’에서 영감 받았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못한 질문에 답을 얻었다. <갈매기>의 무대라면 의례히 호수가 배경에 펼쳐지거나 뭔가 꿉꿉한 습기가 느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예를 들어 2007년에 러시아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연출했던 <갈매기>에선 무대 주변에 물을 담았고, 배우들이 그 물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물 20톤을 썼다고 한다! http://avion.egloos.com/m/984050) 베를린 도이체스 테아터에서 작고한 위르겐 고쉬 연출의 Die Möwe에서는 극 초반에 호수에서 멱을 감고 돌아온 야코프 일행이 무대 위에서 젖은 옷을 훌러덩 벗더니 옷을 갈아 입는다 (http://www.deutschestheater.de/spielplan/premieren_repertoire_2013_2014/die_moewe/).  이 느닷없는 노출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 또한 물이다. 그런데 타다의 무대는 바싹 말라 있어서 오히려 결여된 물을 떠올린다. 그에게 쓰나미가 일종의 트라우마임을 짐작하게 하는 지점이다.

2013년 9월 17일 화요일

무대 위에 떠 다니던 그 말들은, 누구의 말일까.


극단 코끼리만보, <말들의 무덤>, 김동현 구성, 연출, 
Hanpac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by 산책


공연을 보러 가기 전, <말들의 무덤>의 “말”이 동물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의 후기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 말이, 그 말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무덤 속의 말,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장에 앉아 미리 읽은 프로그램에서 읽은 다음의 문장은 내 지레 짐작을 죽은 사람들의 말을 무대에서 보겠구나, 하는 기대로 바꾸어 주었다.

 “극장에서 무덤을 열고, 그 안에 있던 ‘말들’을 꺼내 들려줌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가상의 대화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다(프로그램 17쪽).”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아이리스 PC방>: ‘극사발’의 순수하지 못했던 소원

극사발, <아이리스 PC방> 2013년 9월 3-4일, 
홍대CY씨어터

by 에스티

극사발이란 집단이 있다. 풀어보면 꽤 도발적인 이름이다: ‘연극을 통한 사회적 발언’. 이들은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작품 하나를 연습했고, 얼마 전 창단 두 번째 공연을 마쳤다. 그런데 이들이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출품한 이 작품은 비주류 예술을 위한 축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연일 신문지상과 트위터를 통해 뜨겁게 다뤄진 핫이슈인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품 속에서 ‘남조선일보’라는 가상의 유력 일간지 기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연극 잡지보다 먼저 시사주간지에 공연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 되는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얼마나 프린지의 축제 정신에서 벗어나 주류 문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352.html).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사샤 발츠 "S"의 몸과 섹슈얼리티

by 김세진

S, © Bernd Uhlig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남자의 나체, 외설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한 덩어리의 물체처럼 보인다. 잠시 후 남자, 여자, 어린 사람,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나와 그 물체 같은 남자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체인 여자와 누워있던 나체의 남자가 만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고정되어 있던 물도 흐르기 시작한다. 사샤 발츠Sasha Waltz의 ‘S’의 시작이다.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세 여자의 자서전적 몸 <치마, 살>

by 이흔정

2013 박소정 콜렉티브 콜라보
2013. 8. 5(Mon)~6(Tue) pm8:00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

텅 빈 무대에 세 개의 서로 너무나 다른, 그러나 또 같은 ‘몸’이 있다. 관객은 세 명의 무용수 박소정, 정정아, Christine Fletcher의 몸을 만난다. 처녀의 붉은 치마에 감춰진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공연 포스터를 보고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세 명의 몸은 자못 실망스러울 수 있다. 매력적으로 잘 가꾸어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런 몸을 상상했다면 말이다. 정정아와 박소정의 몸은 현대무용으로 다져져 다부지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여성의 몸이다. Christine은 키가 족히 180cm는 돼 보이고 머리는 백발에 가까우며 탄력을 잃고 주름진 몸이다. 우리가 무대에서 장시간 ‘보고 싶은’ 몸들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볼수록 점점 그들의 몸이 궁금해지고 또 사랑스러워진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레드마리아>, 여성의 삶은 배에서 시작된다.


by 김재영

<레드마리아> (2012, 경순 감독)

 여성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

 <레드마리아>는 한국, 일본, 필리핀에 살고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사실, 여성의 몸과 노동의 문제를 남성인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노동한다는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자는 목소리에 공감해 본 적도 없다. 여성의 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쯤으로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이런 무관심은 여성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남성인 내가 가해자 집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선입견과 피해의식으로 인해 나는 정작 여성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셰임>: 자학하는 몸의 ‘바디 호러’


by 시뫄

여름에는 마치 공식처럼 호러 영화 포스터 한 두 개 정도는 영화관에 걸려 있기 마련이다. 계절에 상관 없이 일년내내 호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특히 여름처럼 심신을 지치게 하는 무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영화관에서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흐르게 하는 호러 영화 한 편이면 여느 피서지 부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호러 영화는 소재와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물론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감독의 <셰임> (Shame, 2011)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호러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 혹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공포를 끄집어 올리게 하고 그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공포가 몸의 생생한 파괴와 타락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셰임>은 '바디 호러' 영화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은교> : 몸을 보다 / 몸을 읽다


by 백인경


영화 <은교>를 보게 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열일곱 소녀와 일흔 살 노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일흔 살의 박해일이 궁금했다. 거대한 광고판에서 마주친 노인 박해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피부와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순수하게, 어떠한 상상도 기대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슬프고 조금 불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아렸다. 은교의 발가벗겨진 몸이, 서지우의 무기력한 런닝 셔츠가, 노인이 ‘되어버린’ 이적요의 불룩한 배가, 피고 지고 시들어가는 꽃송이처럼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 내밀면 만져질 것처럼.


2013년 8월 8일 목요일

변신, 또는 병신: 극발전소 301, <병신3단로봇>

by 산책

극발전소 301, <병신3단로봇>,
정범철 작, 연출, 키 작은 소나무 극장.

몸 

 무더운 여름이다. 여름은 사람들에게 “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 같다. 세 번의 복날에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라도 몸 보신을 해야 할 것 같고, 탄탄하고, 날씬한 몸을 위해 여름이 오기 전 미리 준비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갖게 만든다. 7월 초부터 “늦었지만 이제라도”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기 위한 팁을 알려주는 각종 동영상이 SNS를 타고 나에게까지 왔다. 정말 7일만 하면, 영상 속의 저 사람 같은 몸을 가질 수 있는 건지 궁금하고, 준비되지 않은(?) 내 몸을 괜히 내려다 보게 되고, “7일만에”, “하루 10분으로” 라는 제목을 믿어 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들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고통 보(이)기 - 프로메테우스 vs 토마스

by 에스티


극단 골목길, <그 사람의 눈물>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지경화 각색, 박근형 연출, 게릴라 극장)




먼저 아버지께서는
이 들쭉날쭉한 암벽을 천둥과 번개의 화염으로
부수어 그대의 몸뚱이를 감추실 것이고,
그러면 바위가 팔을 구부려 그대를 꼭 붙들게 될 것이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대는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오. 그러면 제우스의 날개 달린 개가,
피투성이가 된 독수리가 게걸스럽게도 그대의 몸뚱이를
큼직큼직한 고깃덩이로 갈기갈기 찢게 될 것인데,
이 불청객은 날마다 다가와서
그대의 거매진 간을 포식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그러한 고통의 종말을 기대하지 마시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16-26행)


결박된 그를 보는 것은 그와 한핏줄이자 제우스의 명에 따라 그에게 굴레를 씌우고 쐐기를 박아야 했던 헤파이스토스에게도 탄식이 나오는 일이다. 이에 대한 코로스장의 증언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프로메테우스여, 누구든지 그대의 고통을 보고도 동정하지/ 않는 자는 무쇠의 심장을 갖고 있고 돌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어요. 나는 이런 광경을 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막상 보고 나니까 가슴이 아파요. (242-45. 코로스장은 보기 전에는 그 장면이 가슴 아플 거라는 건 왜 몰랐을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런데 보는 사람에게 이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의 형벌은 프로메테우스 자신에게는 단지 몸이 힘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조그만 나무 가시 하나가 손가락에 박혀도 괴로워하는 범인들과 다르게 그리고 있다. 그는 굴레나 쐐기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결박으로 인한 몸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신적인 명예와 위신에 가해진 “모욕”이다 (97). 이 위대한 신이 지금 이순간 두려워 하는 것은 누군가/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인데(127), 왜냐하면 그는 누구이든 간에 자신의 고통을 ‘보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18). 이처럼 이 극은 서로 반대되는 것, 즉 보는 고통과 보여지는 고통을 동시에 말한다. 역설적인 것은, 그리고 그래서 메타극적인 것은, 그것이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충전된 극장에서 벌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남의 고통을 (맛)보기 위해 이 무더운날 스스로를 어두운 극장 비좁은 객석에 꼼짝없이 결박시켰으니 말이다. 불행히도 나의 가학적 욕구는 충족되지 못했다. 나는 무대 위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보면서 나또한 코로스장의 심정을 가질 수 있기를, 또는 내가 텍스트에서 발견했던 고통의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이 둘 모두에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목과 팔에 감겨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쇠사슬이 자극적인 볼거리에 익숙해진 내게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무대 뒤편 목재 구조물에 팔을 메다는 장면으로는 내 몸도 상상력도 별반 동하지 않았다. 일단 나는 나의 무딘 감수성을 탓해본다.

내각 찾던 것이 칼이라면 그것은 배우의 몸이 아니라 텍스트에 꽂혀 있었다. 원작 초반에 “힘과 폭력”이라는 추상적 캐릭터가 나와서 프로메테우스와 고통의 문제를 주고 받는 장면은 잘려져 나가고 그 대신 프로메테우스가 결박되게 된 계기--대다수의 한국 관객들에겐 여전히 낯선 그리스 신화--가 친절하게 삽입되어 있다. 그 대신 이오의 어머니, 헤라, 그리고 제우스가 등장한다. 이오의 어머니/헤라 그리고 헤파이스토스/제우스를 각각 일인이역으로 배정한 것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인물을 한 사람의 배우가 (다른 가면을 쓰고) 연기하도록 하여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희랍비극의 연기 방법론에 맥이 닿아 있지만, 이오의 아버지를 왕(河神)에서 대장장이로 슬쩍 바꿔 놓은 것은 그다지 납득되지 않는다. 거지들로 코로스를 구성한 것에서 이번 개작의 방향성을 어림 짐작해본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건내 받고 나중에는 도리어 그를 배신하는 자들로 보여준 것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되 책임감은 커녕 그 말을 희화화시켜버린--물론 그것은 정치인들의 지독한 저질 개그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군중들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해석의 단서를 프로메테우스의 대사 중 “운명", “사람사는 세상"과 같은 단어들에서 찾는다. 나는 작가나 연출이 이 작품에서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는 안목에, 아니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 찬사를 표한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박근형의 작품(<마라/사드>, <햄릿> 등)에서 발견되는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적 암시는 그의 작품을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좁은 연극 무대 속에서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는 정치적 코멘트도 보기에 따라서는 ‘급진적’인 정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체제 순응적인 예술이 오랫동안 "순수" 예술로 자리 매김해온 환경 속에서 예술로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튀는 행위일 뿐더러, 정부 여당의 입맛에 맞지 않는 발언을 했다가는 재정적 지원이 아니라 정보기관의 관심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혹시라도 동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관객들은 작품의 형식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며 그것을  예술지상주의적 강박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억될만한 아방가르드 운동이 언제나 내용과 형식의 양측면을 포괄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공연에서 보다 실험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상투적인 의상이나 분장, 그리고 사실적인 효과음 등은 각색을 통해 되살리고자 한 텍스트의 생명력을 불어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경우 이 공연에서 가장 긴장감을 느낀 순간은 극 초반부에 프로메테우스가 불이 담겨진 화로를 들고 등장했을 때이다. 그때 나는 먼저 배우의 손이 뜨겁지 않을까 걱정했고, 곧이어 안뜨겁게 조치했을 거라는 생각에 시시해졌고, 그런 다음에는 화재에 대한 非극적이지만, 극장에서 자주 발생한다는 점에서, 극장적인 걱정에 잠시 빠졌다. 역시나 연극은 “위험한 예술”이다.

불평같은 말들은 이 정도로 하고 질문을 바꿔보도록 하자. 내가 그때 거기서 보고 그래서 느끼고 싶었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대 위에서 실제 고통의 교류가 가능하고, 또한 바람직한가? 당장 교과서적인 행위예술가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가 생각난다.아브라모비치는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이라는 제목의 1975년 퍼포먼스에서 2파운드짜리 꿀 한병을 숟가락으로 퍼먹었고, 와인 한병도 비운 다음 자기 배에 면도칼로 별을 그렸다. 그런 다음 채찍으로 자기 등을  그리고 얼음덩이 위에 드러누웠다. 물론 이때, 역시 이 또한 교과서적인데,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보다 못한 관객들은 그녀를 얼음 위에서 끌어내렸고 공연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이 ‘고통의 교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고 있기가 매우 불편했다는 점이다. 이런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그것이 차력도 마술도 아니라 그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행위로 발생하는 고통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불신의 중지 없이 일어나는 정서적 교류?) 그런데 흥미로운 변화가 2007년에 있었던 아브라모비치의 리바이벌, 혹은 레플리카에서 발견된다. (원하는 경우, http://youtu.be/-82PqjE8Qz4?t=55m11s에서, 55분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75년 퍼포먼스와 거의 동일하게 꿀-면도칼-얼음-채찍의 순서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한 번에 별 한 변씩 총 다섯 세트로 나눠서 진행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제 더이상 아무도 얼음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네 차례 얼음에 올라가고 채찍질하고 별의 다섯 변을 다 완성 하고 나서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고 퍼포먼스를 끝낸다. 이렇게 끝까지 하는 것이 그녀가 75년에 원했던 것일까?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 일을 반복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몸이 여기에 적응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얼음 위에서, 그리고 채찍질을 하면서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조용히 끝까지 지켜만 보는 관객에게 그녀의 고통이 전달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녀의 지난 30년의 경력으로 인해 이제 관객에게 그녀는 일종의 차력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이다. 어쩌면 원활한 공연 진행을 위해 관객들의 개입이 사전에 차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의미에서 개입이 불가능했던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의 기록에 따르면, 75년 당시에는 그녀가 얼음 위에서 30분 동안 꼼짝 않고 누워 있은 후에야 관객 몇명이 나와서 그녀를 얼음에서 끌어내렸다고 한다. 어쩌면 2007년의 관객들은 그때에 비해 너무 빨리, 비록 테이블 위에서 메트로놈이bpm 60 정도로 또각거리고 있긴 했지만, 전환되는 그 속도에 도무지 개입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공연은 완성되지만 고통은 구제받지 못하고 소모되어 버린다.
나는 애초 이 글에 김형준 감독의 <용서는 없다> (2009)를 포함시켜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다시 보는 데 실패했다. 그 모든 것이 미술팀에서 만든 소품임을 알더라도 토막 살인 당한 시체가 부검을 위해 다시 난도질 당하는 이 이중적 하드고어를 보는 것에 도무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아예 볼 생각을 않았던 것 같다. <올드보이> 보다 조금 더 잔혹한 이 복수극에 대해 한 네티즌 리뷰어의 표현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찝찝해진다.”

다시 <눈물>로 돌아와 보자. 난 도대체 뭘 기대했던 것일까? <토마스> 같은 진짜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저 배우가 고통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용서>나 <패션> 같은 가짜의, 하지만 진짜 보다 더 찝찝한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2013년 7월 31일 수요일

‘외로운 피’를 위한 축제: 2013 한․일 공동제작 연극 <아시아온천>

‘외로운 피’를 위한 축제: 2013 한․일 공동제작 연극 <아시아온천>

6월 11일(화)~6월 16일(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정의신 작, 손진책 연출

by 이흔정

‘어제도’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아시아의 작은 섬. 이 작은 섬 마을사람들은 언제 시작됐는지 모를 나름의 전통과 규율을 따르며 더불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평화롭고 조용한 섬에 느닷없이 외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온천수가 솟는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이다. 이로써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욕망과 가치로 부딪히고 어제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섬에 리조트 사업을 시작하려는 외지인 아유무와 카케루는 이 마을의 중심인물 대지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척박한 황무지에 사탕수수를 기르며 땅과 함께 자라난 대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대지네를 비롯한 토착민들에게 어제도는 단순한 ‘토지’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연극 아시아온천은 이런 토착민과 외지인 사이의 갈등, 전통과 돈이라는 가치의 대립구도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나 메시지자체는 그다지 신선하지도 않고, 어떤 결말을 맞을지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시아온천>을 스토리의 측면에서만 감상하는 것은 공연을 반도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 글에서 다 풀어내지 못할 많은 얘기 거리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 먼저 정의신이라는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신은 1986년, 그가 29살 청년이었을 때 <사랑스런 미디어>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중견극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희곡집은 2007년에 겨우 한국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리 익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의신의 희곡들에는 대부분 신체장애자, 게이 등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등장하고, 그는 섬세하고 따스한 필체와 유머로 그들의 삶에 격려를 보낸다. 그가 마이너리티의 삶에 초점을 두는 것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작가의 배경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배경이 그의 작품세계를 일면 편협하게 만드는 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그런 배경 때문에 그가 마이너리티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그들에게 보내는 격려가 더욱 설득력을 갖고 관객의 가슴을 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흑백영화에서 과부의 피를 만나다: 영화 <열녀문 Bound By Chastity Rule, 1962>

by 김재영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은희 특별전(2013년 6월 13일 ~ 30일, 시네마테크 KOFA 1관)’을 통해 영화배우 최은희의 영화 25편을 상영하였다. 그녀는 1947년 <새로운 맹서>라는 영화로 데뷔하여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1978년 북한으로 납치되어 남편인 영화감독 신상옥과 북한에서 <불가사리>, <소금> 등의 영화를 제작한 후, 198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녀의 굴곡 많은 삶의 흔적은, 마치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영화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시대까지 격변하는 시대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그 속에서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2년 개봉하여 제2회 대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열녀문(감독 신상옥)> 역시 과부의 정절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과 여성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을 통해 여성의 행복한 삶은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작품은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도시에서부터 농촌으로 빠르게 개화가 진행되고 있던 1920년 무렵, 어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평생 과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양반집 아씨(최은희 역)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아씨의 시할머니(한은진 역)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는다. 시할머니는 아씨에게 ‘신불사이군 여불사이부(臣不事二君 女不事二夫) 즉,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며, 외부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를 은장도로 찌르며 마음을 다스리라고 가르치는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이 집안의 머슴인 성칠(신영균 역)은 아씨를 연모하고 있는데, 그는 여성이 자신의 사랑과 욕망에 충실해야 하고,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결국 아씨는 성칠과의 동침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지만,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시아버지의 반대에 막혀 재가하지 못하고 성칠과 아이를 다른 마을로 떠나보낸다.

이 영화에서 아씨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그녀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속하고, 대상화한다.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등 양반 가문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아씨의 고독한 인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녀의 고통과 희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을의 남성들은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새참을 이고 논을 걸어가는 아씨에게 홀아비인 남성이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알고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지’라는 노래를 읊조리며 수작을 부린다. 아씨가 새참을 성칠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숲길에서 다른 남성은 아씨를 강간하려고 하다가 성칠에게 맞고 도망간다. 시동생은 비교적 아씨를 잘 따르고 위하지만, 상사병에 걸린 소년처럼 형수를 사모하는데, 형수가 성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배신감에 그녀를 괴롭히고, 모욕하려고 든다. 성칠은 그녀를 가장 아끼고 그녀의 삶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이지만, 그 역시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나긴 가뭄으로 논이 바짝바짝 말라가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환희에 젖은 채 아씨를 부둥켜 안게 되고, 이를 거부하며 뿌리치는 아씨를 쫓아가 반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는다.


2013년 7월 9일 화요일

‘문명’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노다 히데키의 “THE BEE"

by 시뫄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1)

보통의 도덕관념을 가진 인간은 죄의식, 혹은 양심의 가책을 갖게 마련이다. 그 양심의 가책은 우리로 하여금 소위 비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를 억제하게 한다. 우리가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문명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은 인간이 결국 사회와 평화의 구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압력 때문에 빠져드는 심각한 병이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적인 과거를 강제로 떼어놓은 결과이며,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나 생존조건으로 뛰어들어 추락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한 희생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2)는 다시 말하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해낸 우리의 문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노다 히데키 작, 연출의 <THE BEE>3)에서는 종잇장처럼 구겨져버린다. 잔인함과 폭력성만 남은 이 폐허에서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문명이란 것은 새빨간 거짓말과 같다.

일본의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극에서, 평범한 회사원인 이도는 귀갓길에 경찰들과 기자들이 자신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탈옥범인 오고로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건의 내막을 알아보니 스트리퍼로 일하는 오고로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는 것에 분노한 오고로는 탈옥 후 아내를 만나려 하지만 거부당하고, 무고한 이도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자신의 가족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도는 오고로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오고로와 만나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찰과 자극적인 스토리에 몰려드는 언론에 분노하여 자신도 오고로의 가족을 인질로 잡게 된다. 시종일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예의 바르고 신중한 모습이던 이도는 순식간에 단호한 인질범의 모습을 나타내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어린아이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리로 시작되었던 이도의 폭력은 어느새 그 순환에 선행하게 되고 스스로의 악순환을 만든다. 결국 서로의 가족을 먼저 풀어줄 것을 두고 오고로와 대치중이던 이도가 먼저 상대의 아이를 해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발화시킨다. 즉 이도의 폭력은 더 이상 자신에게 소중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게 되며, 결국에는 길 잃은 그의 폭력성이 이도 바로 자신까지도 대상으로 삼게 된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홍어와 <짬뽕>

by 에스티

2001년 9월 11일 CNN을 통해 중계된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 장면은 이후 미국 거대 자본 영화에서 반복되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탑이 무너질 때나 <아바타>에서 판도라의 홈트리가 미사일 공격으로 쓰러질 때 우리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저택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스타트랙 다크니스>에서 거대한 우주비행선이 맨하탄에 불시착하면서 고층 건물들을 무참히 파괴할 때 이 장면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앵글을 통해 상호 유사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 상업 영화들에서 이 장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리셰일지언정,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환기됨으로써 악당에 대한 반감과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 일치감이 쉽게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예리한 독자의 눈에는 이 글이 현란한 시각 효과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음이 발각되었으리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문학이나 영상으로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9‧11에 버금가는 사건은 아마도 5‧18일 것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만 하더라도 <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 <화려한 휴가> 등의 작품들이 오월의 광주를 그렸고, 이런 시도는 2000년 후반에 들어 <스카우트>나 <수퍼맨이었던 사나이>, 그리고 <26년>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판에서는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윤정환 작/연출의 <짬뽕>이 지난 10년간 공연되어 왔고, 정경진이 쓰고 고선웅이 연출한 <푸르른 날에>도 세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여기서 이들 작품을 따로 검토하거나 그 우열을 가릴 마음은 없다. 이 작품들 모두 국가에 의해 희생된 젊은 청춘을 애도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에 주목하면서도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연극적 재미를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나 간접적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광주는 결코 단순한 볼거리에 머물지 않는 무게로 다가온다. 이 두 작품의 미덕이기도 한 웃음은 이내 감정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갈 준비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독한 면이 있다. 또한, 장신부, 신작로, 그리고 오민호/여산 같은 피해자들이,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나옴으로써 영혼은 죽어버린”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그후로도 고통과 자기 학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관객들의 양심의 문을 자꾸만 불편하게 두드린다. 물론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그날의 기억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면 그 또한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빨강’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이 작품들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카르멘

by 산책

포스터이미지


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지, 알려주세요. 

음악극 <카르멘>을 보고 왔다. <카르멘>은 극단 벼랑끝날다의 작품으로 2010년 초연된 이후 상도 받고, 평이 꽤 좋은 작품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연주자들이 먼저 입장해서 <하바네라>를 연주하면서 기대감을 높였고, 공연 직전에 이벤트를 해서 관객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퀴즈를 내고 선물을 주는 이벤트는 소극장 공연에서 많이 봐 오던 것이지만, 의자 아래 장미꽃을 숨겨 놓고 그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카르멘 와인을 주는 이벤트는 꽤 신선했던 것 같다.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은 나는 집에 가다가 저 와인을 사 가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공연은 극중극중극의 다소 복잡한 구조이다. 카페 주인이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읽어 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카페주인은 『카르멘』의 극중 화자, 죠반니가 된다. 돈 호세와 카르멘의 이야기는 죠반니가 돈 호세를 만나 듣게 된 이야기인 것이다. 카페 주인 박준석이 책을 펴 읽어 내려 가다가 옷을 바꾸어 입고, 안경을 쓰고, 모든 준비를 마치면, 또박또박 읽어 주던 글은 이제 죠반니의 말이 된다. 글에서 말로, 카페 주인에서 극중 화자로 변모하는 장면은 매우 신선했다. 박준석이 읽던 책은 나비처럼 날아가고, 카페는 스페인의 한 도시가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관객들은 죠반니의 안내에 따라 돈 호세와 카르멘을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돈 호세와 카르멘이 처음 등장할 때,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에게 마치 네 마음 속의 돈 호세와 카르멘을 불러 내라는 것처럼, 결국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은 관객 자신의 눈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나의 경우 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드러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