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알리바이 연대기> 리뷰를 대신하여

by 에스티

지난 해 많은 관심과 호평이 있었던 <알리바이 연대기>의 재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월초에 오늘 첫공연을 예약했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극장에 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공연을 보고 나왔습니다. 가는 길에도 새로운 뉴스를 열어보고 무소식에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었습니다. 화가 났고 지금도 화가 납니다.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우리 모습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부끄럽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을 떠안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기자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모든 팩트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정치인들은 자기를 뽑아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처럼 기웃거립니다. 죽은 자들과 유가족 앞에서 자기들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역겹습니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것밖에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방치해온 우리들 모두의 탓입니다. 천안함,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때 내 잘못은 아니라며 우리가 만들었던 알리바이의 결과를 우리는 오늘 보고 있습니다.

ⓒ권은비 http://omn.kr/7u4h

2014년 4월 14일 월요일

남자들, 그들의 이야기, <히스토리 보이즈>

by 산책

<히스토리보이즈>. 여성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공연 검색을 해보면 이 작품을 여러 번(일주일에 한 번씩 보러 가는 관객도 있었다!) 본 관객들도 무척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모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여성 관객들인 것 같다. 린톳 선생님을 제외하면 학생도 선생님도 모두 남자다. 옥스포드나 캠브릿지에 가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특별반 아이들은 그들의 시절을 보내고,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 히즈 스토리를 남긴다.


  특별반 아이들인만큼 그들은 시와 경구들을 줄줄 외운다. 셰익스피어며, 오든, 라킨 T.S 엘리엇 등이 줄줄히 등장한다. 비록 니체를 니쇼라 읽을지라도, 그들은 대학에 가기 전 니체까지 읽는다. 그렇게 그들의 토론은 고등학생의 그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폭넓고 깊이가 있다. 내 뒤에 앉은, 꽤 명문대 학교 점퍼를 입은 대학생들이 대체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했다. 나는 그들의 불평이 거슬렸고, 우리의 교육 제도에 대해 불평을 하고 싶었다. 어윈은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다르게 생각하라고,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지루하지 않은 답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정답을 외우고,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튀지 않도록 배워오지 않았나. 따라서 그들의 자유로움, 그들의 공부와 놀이가 우리에게 너무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내 뒤에 앉은 학생들이 불평한 것과 달리 영국 문학사며, 역사를 잘 알지 못해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사전 담당인 포스너가 중요하고 어려운 개념들을 풀이해 준다. 이는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배려하면서도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설정으로 읽힌다 (이와 별개로 극장 밖에서는 친절하게 극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문학과 역사적인 사건을 설명해 주는 드라마터그 노트도 팔고 있었다). 그렇게 노트를 들여다 보며 불쑥 일어나 개념을 설명해 주는 포스너는 대학 졸업 후 신경 쇠약을 앓는 작가가 된다. 정말 작가가 되고 싶었던 스크립스는 아직 작가가 될 꿈만 꾸고 있다. 아, 이쯤해서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8명은 모두 명문대에 합격했고,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말해 주며 3시간 10분의 공연이 끝난다.

 8명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언급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사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젊음과 기대, 두려움, 지나갔으면 좋겠을 사랑,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을 마음들 모두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헥터는 문학이 어느 순간 손을 내밀어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것 같은 순간이 온다고 가르치지만 3시간 10분 동안 내게 진짜 손을 내 밀어 준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지식 전달은 원래 에로틱한 방식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기에, 마치 안수와 같이 오토바이에 돌아가며 아이들을 태우고 성추행을 하는 헥터도, 자신의 성 정체성도, 출신 학교도 속이는 어윈도 나는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이 제목 그대로 남자들, 그들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유일한 여자인 린톳 선생님이 여자로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속터지는 (정확한 대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분통을 터뜨린 것은 확실합니다) 일인 줄 아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역사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남자들의 무능력에 주석을 다는 일이야. 역사는 양동이를 들고 남자들 뒤를 쫓아가면서 청소해주는 여자들인 거라고” 


그녀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난데 없이 분통을 터뜨리고,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에 부합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는 어윈에 의해 홀로코스터 마저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는 식의 새로운 시선을 배워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 합격한 여덟 명의 학생들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뿐이니까. 린톳은 설사 등장하지 않았다해도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 것 같다.
자, 그럼 이제 다시 궁금해진다. 왜 이렇게 여성 관객이 많은 걸까, 여러 번씩 관극하는 관객들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발견하는 것일까.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좋았다. 기고만장한 데이킨이나 소심하고 여린 포스너, 나래이터로서 우리에게 종종 뒷 이야기를 해준 스크립스를 비롯해 모두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어윈을 연기한 이명행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에 감동하는 걸까? 역사나 문학을 배운다는 것, 고등학생들이 성장해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사랑하고 망설이는 것들에 감동하는 것일까?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학, 역사 들은 그야말로 지적이고, 때로는 관능적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앨런 배넛은 왜 영국 최고의 극작가인 걸까? 어윈의 영향인지(이부분에서 작품의 힘을 인정해야 겠네요), 다르게, 거꾸로,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물들의 동기, 행동 이런 것들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아서 일지 모르겠다.

얼마전 파일럿 방송을 마친 <나는 남자다 (KBS)>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남중, 남고, 공대 출신의 남성 방청객 250명과 유재석을 비롯한 6명의 남자 MC들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몰래(?) 시청하는 여자들은 어떤 재미를 느꼈을까? 비슷한 맥락에서 궁금하다.

남자들을 위한 방송이지만 몰래 시청하는 여성들을 환영한다는 경고가 재미있다.

우리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몰래 보고 있다. 객석에 앉은 우리는 조용히,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를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본다(시작 전, 조용한 연극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주의사항을 알려 준다). 데이킨의 데이트며, 헥터의 성추행, 어윈의 성 정체성 등 그들만의 이야기를 몰래 훔쳐 보고 듣고 있다. 프로이트나 라캉으로 가지 않더라도 이것은 우리의 관음증을 자극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즐기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우아하고 지적인 그들의 토론을, 우아하게 즐기는 것일까?

철저하게 그들만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끝나는 <히스토리보이즈>와 달리 <나는 남자다>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남성들의 여신 “수지”가 등장했을 때라 할 수 있겠다. 플라워의 <엔드리스>를 목청껏 부르던 것보다 훨씬 큰 함성으로 “수지”를 외치고, 그녀에게 꽃 한송이 받기 위해 방청객들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 순간 몰래 시청하던 여자 시청자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내 자리를 대체하고도 남을, 아니 전혀 내가 가까이 갈 수 없는 여신과 같은 존재는 순식간에 250명의 남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소유한다. 이는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그들과 같이 살고 있는 린톳이 그 남자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그들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나는 남자다>가 여신을 등장시키는 이런 포맷을 계속 유지한다면, 몰래 보는 여자들은 쉽게 떠날지도 모른다.)

남자들만 등장하는 다른 작품을 떠 올려 보자. 요즈음 박칼린이 연출한, 여성 관객들만 관극할 수 있다는 <미스터쇼>가 나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정보 교환의 보고인 미용실에서 듣게 되었다. 18세 이상의 여성 관객만 입장할 수 있으며 (정말 몸 좋은) 남자 배우들만 등장해 여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다고 한다. 수줍어 하던 관객들이 점점 공연을 즐기게 되고 (이것을 어떤 공연이라 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은 남겨두자) 점점 입소문이 나서 관객도 꽤 많단다. 시작한지 3주 가까이 되었는데, 공연 후기들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즐겼다는 후기들이 대부분인 것같다 (모든 의상을 탈의하는 순간 암전이 되는데 불 켜라고 소리치는 관객도 있다고 한다!). 관객들은 무엇을 보러 가서, 무엇을 즐기는 것일까? 우리는 <히스토리 보이즈>와 <미스터쇼>의 다른 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남자들만 무대에 오르는 이런 일련의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 월 25일 하루만 남자 관객도 입장 가능하다고 한다.

 공연 한 편 보고 쓸데 없는 이야기가 참 길었다. 어떤 블로거는 이 작품이 정말 좋은 작품이었으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역사, 문학, 심지어 불어까지 배우고 싶다고 후기를 남겼다. 이 반응에 대해서도 무척 공감한다. 그렇지만 여성 관객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것도 그렇게 자주, 많이 보는 관객들이 왜 많은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하다. 언제부터인가 극장은 여자들로 넘쳐나고, 이십대 중반 이후의 여성들을 붙잡기 위해 문화예술 분야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여성들은 이제 경제력을, 문화 예술 분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일까?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고 있다고 믿고 싶지만,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즐기도록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

2014년 4월 13일 일요일

극단 뛰다 <바후차라마타>

극단 '뛰다'의 <바후차라마타>
연출 : 배요섭
공연장 : 남산드라마센터
관극 : 4/12 (토) 7시
by 이예은



  '뛰다'의 공연은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고 순례 중에 있는 여행의 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잠깐이나마 그 여행에 동행하고, 공연이 끝나면 여전히 이들은 어딘가에서 그 여행을 멈추지 않아주기를 하는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관객으로서 '뛰다'의 공연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은 그 어떤 작품적인 것을 조금 넘어서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작품을 보듬는 마음에 대한 것이 더욱 크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느끼게 할까, 또 무엇을 반성하게 할까. 연극이란 것이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연극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연극이 이런 것이라면 참 해 볼만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가지게 해 주는...

  사실 '뛰다'는 내가 연극과 첫사랑에 빠질 무렵, 연극이라는 아름다움을 나의 감각 속에 깊숙이 각인시켜 준 극단이다. 하륵, 하륵 하면서 음악 같기도 춤 같기도 한 그 하나의 단어로 결국 세상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어버렸던 <하륵 이야기>는, 분명 작은 무대이면서 하나의 큰 우주였다. 단 하나의 단어로도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말하는 서사의 상상력이 아름다웠고, 동시에 그 상상력의 공간을 채워 넣는 정성 어린 소리들과 율동들의 세밀함이 빛났다. 어떠한 세계의 초월을 거뜬하게 이루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거뜬함을 지극히 정성 어린 습기들로 일구고 있는 농부 같은 견실함이 아름다웠다. 이어지는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또채비놀음놀이>를 기다리고 만나면서 그 어느 어린이 관객보다도 커다랗게 기뻐할 준비를 하며 무대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항상 다시 기다렸다. 그 어떤 새로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줄지. 마치 팀 버튼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커서는 코엔 형제와 미셸 공드리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세상의 다양한 드라마들을 최대한 많이 이 감독들의 연출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뛰다'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러했다. 연극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이 극단의 작업으로 만나고 싶었다. 이러한 기대가 든 것은 연극 집단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뛰다'가 표현하고 드러내려 하는 것은 단지 무언가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품고 있는 그것. 다 말로 할 수도, 다 말해질 수도 없는 정신과 정성. 그것이 장면 장면마다에 결코 거짓말 하는 법 없이 묻어 있어서 좋았고, 그 진심은 배요섭 연출이 이 공연 프로그램북에 쓴 말처럼 “어떤 화려한 미장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임을 안다.

  이 공연에서도 '뛰다'는 그 어떠한 화두 혹은 장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 어떤 주제나 형식으로 따지자면, 이 공연에서 다루고 있는 성 정체성, 성 전환 수술, 트랜스젠더, 동성애 등의 화두를 발설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일인지 모른다. 이 공연은 이 화두를 발설하거나 질문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화두와 관련된 그 어떤 아픔을 이입시키거나 이해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에 있지도 않다. 그러면 이 화두를 둘러싼 무엇에, 어디에 이 공연은 존재할까?

  작품 초반부에 공연은 무던히도 관객과 배우, 그리고 배우와 캐릭터 사이를 소통케 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그럼으로써 현실과 서사, 사실과 사실 가능성, 그리하여 나와 타자 그 ‘사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호소하고 표현하고 싶어 했다. 배우들은 저마다 어떠한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를 하고 있었으나 그 연기의 대부분은 스토리텔링이었기에 허구와 현실 사이를 호소하였고, 장면의 중간 중간에 연출이 “연출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연출로서” 등장하여 무대 위에 허구가 ‘아닌’ 것들을 개입시키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초반부의 이 모든 호소들은 표현되고, 보여지고, 질문되고, 그리하여 호소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연이 중반부 즈음에 달했을 때 연출이 관객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이 무대 위에서 한 번 객석을 바라보면 어떻겠느냐고. 마치 힘겹게, 힘겹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술이나 한 잔 하자’와 같은 태도였다. 초반부의 모든 장면들이 어느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 걸으며 채 율동을 터뜨리지 못한 터라 그 제안에 흔쾌히 자리를 일어나 무대 위로 걸어갔다.

  관객들이 자리를 옮겨 앉았을 때 연출은 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결국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했다는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제까지 이 공연을 보던 관객들이 객석에서 느꼈던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연출이 몇 번 관객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그의 말이 비로소 처음으로 몸으로 들어 왔다. 이어서 그는 그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이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한다. 이 공연의 순간 역시 그러했다. 관객의 몸이 무대의 몸속으로 들어 온 그 순간. 이토록 간단한 몸의 이동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공연의 창작 과정에서의 경험들이 이 공연을 보는 관극 과정 안에서 다시 고스란히 체험되고 있었다.

  무대 위로 관객을 초청한 것은 저 너머의 세계를 한 번 넘어와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무대 위에서 바라본 객석,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 본 무대,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본 이 공연은 이 공연이 그토록 넘어보고 싶었던 그 너머의 세계였다. 관객이 무대의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공연도 실제와 합치되고, 이 모든 재료 안에서 글래디가 고백을 한다. 자신이 성을 바꾸게 된 역사를. 그 고백은 실제이다. 우리는 함께였다. 무대 안에서, 상처 안에서. 너무도 간단한 몸의 움직임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공연 초반부에 그토록 어렵게 호소했으나, 그럼에도 체화되지 못했던 이 공연 속의 화두들. 그 화두들이 체험이 되어, 아픔이 되어, 상상 너머의 것이 되어 이 공간 속에 낭자하다. 공연 초반부에 쌓여 온 것들은 어쩌면 이 순간의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 위한 축적의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체험이라는 것, 예를 들면 간단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이동하는 행위. 그 행위는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선 위에서는 그 어떠한 표현이나 발설이나 그림으로도 풀어내지 못하는 영역의 공감을 너무도 간단하게 끌어낸다. 세상의 모든 화두나 담론들 그 바닥에 서려 있는 아주 간단한 진리,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하고 싶고, 우리 모두는 상처 받으면 아프다 라는 사실 같은 것. 이토록 간단한 진리란 어쩌면 매우 간단한 체험만으로 체득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객석에서 무대로 건너오라고 한 이 공연의 제안처럼. 단, 체험은 그 간단함 속에 오로지 한 가지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 어떠한 거짓도 없는 진심일 것. 그렇기에 체험이란 그 어떠한 표현이나 주제, 방법론을 뛰어넘는 것이다. 진리란 사실 매우 간단해서 그 어떠한 강요도,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리란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이어서 그 어떠한 화두들에도 적용이 된다. 이 공연에서 성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걷어내면, 이 공연의 자세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어그러진 삶 속에 적용된다.

  참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기보다 연극을 체험하고 온 기분이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극장 안에서 크게 숨을 쉬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배우들과 연출이 이 날의 공연이 어떠했는지 스스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보통의 공연 같으면 너무도 당연히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야 노트를 들고 연출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이 날의 공연 모니터링을 하는데, 그 모습을 관객 앞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태도가 예쁘다. 이 공연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 안에서 벌어진 정신적인 것들을 오롯이 관객 앞에 꺼내고 싶어 한다. 그 순수와 그 자연스러움이 관객에게까지 유출될 수 있는 힘이란, 연출이 공연에 개입을 해서도 아니고, 모든 배우들이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건네서도,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서도 아니다.

  이 공연이 해 낸 몫은 그 어떠한 방법이나 내용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힘, 체험의 힘을 이루어내었다는 점에 고마움을 느낀다. 연극에서 체험을 끌어내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운 일일까? 보는 입장에서는 늘 기다리고, 만드는 입장에서는 늘 고민한다. 관객과 가장 몸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단지 그 몸의 열기만으로는 결코 이끌어낼 수 없는 그것. 오히려 우리의 몸이 이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얼마나 우리는 먼 곳에 있는가를 느끼며 극장 문을 나설 때가 대부분이다. 체험을 만나는 일은 마치 진짜 사람을 만나고 오는 일처럼 어렵고, 또 불가해하다. 우리가 ‘함께’라는 것의 체험. 그것은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극장 밖의 세상으로도 흘러들어간다.

  <노래하듯이 햄릿>, <앨리스 프로젝트>,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를 보면서 '뛰다'의 새로운 모습들에 새로운 기대를 가졌었는데, 오늘의 이 공연은 '뛰다'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체험의 에너지와 진실의 깊이와 무게감의 질감이 전작들과 조금 다르다. 더디게, 부디 오래 오래 성장하고, 건강하고, 계속 살아나가길. ㉦

2014년 4월 7일 월요일

4월의 장바구니

by 산책


<히스토리 보이즈>, 3월 14일 ~ 4월 20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히스토리 보이즈>는 영국의 앨런 베냇의 대표작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그들의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영국 초연(2004년) 당시에도 호평을 받고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로도 개봉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3월 연강홀에서 초연되었고, 올해 재공연하게 된 작품입니다. 특별한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많이 알려진 작품인데 저는 이제서야 좀 궁금해져서 뒤늦게 예매했습니다. 벌써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고, 작품이 좋고, 또 멋진 배우들이 많이 출연해서 그런지 여러 번 관극하신 (특히 여성 관객)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3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또 고등학생들의 고민과 토론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데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찾는 데에는 분명 어떤 에너지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열정적으로, 그래서 아름답게 보일 그들의 토론 장면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산책의 <히스토리 보이즈> 리뷰 바로가기



<바후차라마타>, 4월 5일 ~ 4월 20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난 여잔 아니에요. 하지만 여자에 가까워요.”
3월 장바구니에서 소개한 <남산 도큐멘타>와 패키지로 예매한 작품입니다. 예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궁금해서 입니다. 무대에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나를 포함해서 관객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그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분법적인 성(性)의 구분’과 이에 맞서는 ‘대안적 젠더(제3의 성)에 대한 제안’도 좋지만 그저 사람으로서의 그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2부에서 관객들은 연극 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만들어 지는 새로운 이야기와 소통 방식들도 기대해 볼 만 한 것 같습니다.

덧붙임: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좋은 삶이 있을 때 좋은 연극이 있는 것만큼, 좋은 연극이 좋은 삶을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라는 소개가 무척 마음에 드네요.

이예은의 <바후차라마타> 리뷰 바로가기


<노래하는 샤일록>, 4월 5일 ~ 20일, 국립극장 달오름 

이미 드라마인에는 <노래하는 샤일록>에 대한 리뷰가 게재되었습니다(http://www.drama-in.kr/2014/04/shylock.html).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이지요. 첫 번째 작품인 <맥베스>도 즐겁게 관람했기에 사실 별다른 고민 없이 예매한 작품입니다.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 역시 에스티님의 리뷰를 확인하세요). 5월에는 <템페스트>도 예매하려고 합니다(템페스트는 4월 25일까지 예매 시 30% 할인을 받을 수 있답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 연작을 모두 관극하면 이 봄이 다 지나가겠네요. ㉦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에스티의 첫날밤에] 노래하는 샤일록

450년만의 3색 만남 II - 노래하는 샤일록

공연기간 2014년 4월 5일(토)-20일(일)
화-금 20시, 토/일 15시, 월 쉼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극본/연출 정의신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지난 달 <맥베스>에 이어 이번에는 <베니스의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국내 수용 초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특히나 이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샤일록은 지금도 거의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사실 나머지 인물들의 이름은 상당히 까다롭다: 안토니오, 밧사니오, 포샤, 로렌조, 제시카 정도가 그나마 기억할만 하고 나머지 이름들―그라시아노, 사리니오, 사루니오, 네릿사 (프로그램에 따라 표기)―은 발음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라치아노Gratiano 라든지, 레오나르도Leonardo 같은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베네치아라는 점과 코미디라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낸다. 아마 지금 우리식으로 하면 인물의 이름이 카푸치노, 마키아토 정도일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하면 샤일록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누가 샤일록이 제목에서 말하는 바로 그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말하더라도 이상한 점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그만큼 비록, 프로그램에서 강태경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이고,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에서 샤일록이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말일테다.



3색 만남의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 아닌 바람에 서두가 길어졌다. 정의신 연출은 이번 공연의 제목을 <노래하는 샤일록>이라 이름 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제목은 공연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 줄거리는 원작을 따라가지만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 장면은 뮤지컬에 준할 정도로 노래와 음악 사용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이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수정하기 위해 극작가이기도 한 연출가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고쳐쓰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제시카와 로렌조의 서브 플롯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로렌조와 함께 달아났던 제시카는 로렌조의 망나니짓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원작에서 샤일록이 딸의 도주보다 재산을 잃은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면 이번 공연은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로 그려진다. 심지어 돈 대신 안토니오의 살점을 떼내는 일에 있어서도 원작에서는 안토니오의 반유대주의적 고리대금업 방해 행위에 대한 앙심을 동기로 설정했다면, 정의신의 샤일록에게 있어 그의 살을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망가진 딸에 대한 복수로 그려진다. 반면 로렌조는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샤일록의 인간미가 부각되는 만큼 로렌조는 나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신 연출은 인터뷰에서 안토니오의 우울증을 설명하기 위해 동성애를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다(25). 동성애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재현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안토니오가 밧사니오를 비롯한 친구들이 보이는 유대인 혐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에게 연민을 보이는 태도에서 그 또한 또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임을 표명한다. 포샤 또한 죽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언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삶도 사랑도 누리지 못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희극이 이렇게 진지해도 되는 걸까? "희극적 카타르시스"를 바라고 온 관객들이 결말에 당황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의신은 상관 없다며, 오히려 관객이 당황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24). 어쩌면 정의신의 이름을 보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이 정도로 당황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가 이 문제에 무감각하다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대신 이 진지함과 함께 공연은 시종일관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어릿광대 란슬롯은 원작의 재담 대신 슬랩스틱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여기에 안토니오의 네 친구들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정서적 흐름은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걸로 느껴지는데, 그만큼 그 두 장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모로코는 보라색 의상을 입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모로코 군주에 대해서만 "위아래로 흰옷을 입은 황갈색의 무어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Enter Morochus a tawnie Moore all in white,"   

그중에서도 단연 큰 웃음을 선사하는 인물은 구도균이 연기한 그라시아노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대 위에 구현된 베니스의 지형 지물 (다리와 곤돌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또한 전반부에서 연기했던 모로코대공의 강렬한 이미지가 후반부의 그라시아노에게 겹쳐짐으로써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 하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그의 연기만으로도 세 시간이 즐거우리라. 하지만 모로코대공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가장 성공적이기에 곧바로 이번 공연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샤일록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과 모로코대공에 대한 웃음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구도윤의 뱃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검게 칠한 몸 색깔과 손에 쥔 언월도, 수건으로 대충 말아 올린 터번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반아랍 정서를 건드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배 나온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과연 도덕적으로 완벽한 웃음이란 가능한 것일까? ㉦

덧붙임
벨몬트 포샤의 집으로 설정된 공간에 등장하는 촛대는 그 형태가 유대인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를 강하게 시사한다. 혹시나 싶어 관계자에게 포샤를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인지 물어보았으나,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애초 샤일록의 집에 사용될 것으로 만들어졌다가 리허설 과정에서 새주인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공연 사진 더보기: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541617609290750.1073741830.472276802891498&type=3&uploaded=26


2014년 4월 2일 수요일

[DRAMATIC.CITY-1] “놀이(Play), 당신의 감각을 깨운다.” 우메다 테츠야 《0회초, 0회말》

by 이흔정

<0회초, 0회말>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제목의 공연. 단 한 장의 사진과 한 문장의 소개가 전부였다. 


“일상 속의 공간과 사물들 속에서 필연과 우연이 공존하는 우메다 테츠야의 기묘한 세계를, 아이들처럼, 원인과 결과를 따지지 않고, 그저 경험한다.” 

과연 ‘아이들처럼’ 즐기고 경험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무작정 표를 예매했다. 그런데 잠깐의 후회가 들었던 건 이번 공연의 장소인 ‘문래예술공장’을 못 찾아서 헤맬 때였다. 문래예술 ‘공장’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오늘의 공연장은 프로시니엄 무대와 객석이 갖춰진 일반적인 공연장이 아니다. 그리고 공연장을 찾아가는 길에 보이는 그 곳의 풍경 역시 체계적인 계획하에 잘 조성된, 문화생활을 위한 소비와 향유의 공간과는 사뭇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극장 주변, 대학로 소극장들의 주변과 다르다는 것이다. 문래예술공장은 원래 문래동 철공소 거리의 옛 철재상가 자리였는데, 이것이 서울시창작공간의 일환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건물 주변은 애초에 문화와 예술을 위하여 조성된 소비공간이 아니라, ‘생산’과 ‘노동’이 주가 되는 생활공간이다. 그러한 곳에 예술이 침입(?)하여 동일한 물리적 공간을 기존의 건물이 지어진 목적과 달리 ‘전유’하고 있는 곳이다. 주변공간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공연장을 가는 도중 스쳤던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 ‘공연’에 까지 이어져 공연의 이미지와 계속해서 중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은 텅 빈 시멘트 바닥에 잡다하게 널브러진 폐품과 도구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 시작된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하나 둘, 객석에서 걸어 나와 ‘쇠 파이프, 드라이아이스, 캔, 필름 통, 물’ 등을 가지고 뭔가를 한다. 소꿉놀이 하는 애들을 보면 저들만이 아는 약속으로 그 놀이에 일련의 질서가 갖춰져 있듯이,<0회초, 0회말>도 한 동안 관객은 그들의 과학실험 같기도 놀이 같기도 한 일련의 행동을 아리송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다. 거의 세 번째 학생쯤 가서야 그 행동들의 ‘질서’와 ‘약속’을 알아차릴 수 있다. “쇠파이프를 쓸어 소리를 내고-버너 불에 달구고-그것을 드라이아이스에 꽂고-캔에 물을 받아 버너에 끓이고-쌀을 넣고-드라이아이스를 조각 내고-필름 통 안에 그것을 넣고-등등-그러다 알람이 울리면 다시 시작”




사실 이 과정을 세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 공연이 종료되었을 때 당황스럽기도 했다. ‘우리가 얼마나 놀 줄을 모르기에! 한 사람이 어떻게 노는지 보는데 3만원을 지불한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난을 보고 나오는데 왠지 마음이 가벼워지고 피식 웃음이 났다. 나를 포함해 그 사람의 장난에서 습관처럼 ‘의미’와 ‘논리’를 찾으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관객들이 생각나서였을까? 한편으로는 아주 ‘원초적인 인간의 창작욕 혹은 놀이하는 특성’을 배짱 좋게 공연으로 올린 우메다 테츠야라는 작가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열을 받은 파이프가 드라이아이스에 꽂혀 소리가 나고, 물이 떨어져 가벼워진 페트병이 중력에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드라이아이스가 넣어진 필름통은 폭발하듯 펑펑 튀고, 쌀이 약품통에서 익자 김이 나고 알싸한 냄새가 퍼졌다. 낯선 공간에서 예측되지 않는 현상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관객의 시각, 청각, 후각은 일시에 긴장상태가 되고, 본능적으로 그 과정의 질서를 파악하려고 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처음과 끝’을 파악하게 되고, 다시 같은 과정이 반복될 때 관객의 감각은 한층 느슨해지고, 또 전과 다른 우발적 현상과 실수에서 웃게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어린 학생이 드라이아이스가 쪼개지지 않자 발로 밟았다.) 처음에는 ‘공장의 폐품들로 밥을 짓겠다는 것인가, 그러면 그 의미는 뭘까’ 하고 혼자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과잉해석이다. 그저 작가는 주변의 물건들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이것과 저것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등을 실험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물리적 시공간에 존재하는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한 인간으로서.
우메다는 이번 공연을 몇 일 앞두고 사고를 당해서 병실에 누운 채 원격화상시스템으로 학생들에게 행동을 지시했는데, 그렇게 반복된 과정이 시간 속에 쌓여가자 나중에는 마치 그가 하나의 ‘작은 우주 혹은 세계’를 만들어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공연을 보는데 공연장 가는 골목길 철공소에서 본 젊은 청년, 검정색 장갑과 검정점퍼를 입고 뭔가 쇳덩이를 돌리고 있던 청년이 자꾸 생각났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0회초, 0회말>은 마치 문래동 철공소에서 일하는 아버지 옆에서 아들이 혼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만들어낸 동일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 같은, 그래서 일상적이면서 묘하게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하는 공연이었다.




이쯤에서 우메다 테츠야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하자면, 그는 주로 폐품이나 생활용품, 가전제품들의 회전운동, 기압, 중력의 변화에 따른 현상을 이용해 빛이나 소리,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설치작품과 퍼포먼스를 선보여 온 작가이다. 그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했던 <Out of Performance>(2010), <x_sound: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2012) 등의 작품을 찾아보면 그가 하고 있는 익숙한 듯 낯선 놀이에 좀 더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

www.siranami.com (우메다 테츠야 작업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