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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3일 일요일

불안한 춤

임승태

인간이 사라진 무대에 로봇이 서 있다. 그리고 움직인다. (하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 말이 좀 어색하지만 작가가 그것을 '춤'이라고 부른 것은 정당한 것 같다. 춤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춤추는 풍선 인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형상을 하지 않은 로봇의 움직임을 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쉽지 않지만 받아들여 보겠다.  

나는 고든 크레이그가 이 광경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래, 21세기에는 내가 꿈꿨던 위버마리오네트가 마침내 인간 배우를 대체하는구나, 라며 무릎을 탁 쳤을까. 아니면 이마를 치면서, 아, 로봇도 인간 배우 만큼이나 통제가 안 되는구나, 라며 탄식했을까. 

관객과의 대화(관대) 시간에 작가의 말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로봇이 인간 배우를 대체하더라도 완전한 제어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로봇은 인간 배우와 달리 제어가 되지 않더라도 연출가가 로봇을 향해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거기서 질문이 생긴다. 제어되지 않는 로봇의 의외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인간 배우의 의외성 역시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술관 '전시'에 더 적합한 퍼포먼스라고 느꼈다. 관람객이 자신이 보고 싶은 시간 만큼만 보고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연 시간 포함) 한 시간 가까이 객석에서 꼼짝 않고 봐야 할 공연이었는지, 끝까지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는 불멍, 물멍하듯이 나는 로봇의 회전 운동을 마치 해파리의 춤을 보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고, 로봇을 움직이는 데 사용했을 법한 프로그래밍 언어, 혹은 수식이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것을 단 한 줄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음악은 공연장에서 듣기에 괜찮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바, 그 음악은 공연 중 연출가가 직접 라이브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비인간을 내세운 공연에서 인간의 직접적 개입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가장 좋았다니, 내가 너무 낡은 '공연성'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관대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얘기가 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공연 도중 있었던 오작동, 걸려 넘어짐 등의 오류에 대한 해명이었다. 공연장에 불러 놓고 할 얘기인가 싶었다. 중간시연회도 아니고 그것도 무려 SPAF에서 말이다. 나중에 다시 보니 이 공연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아트랩코리아의 중장기 협력 프로젝트인 <예술 X 기술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는 사전 고지도 있었다. 그러니 미리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내 탓이지 미완의 공연을 나무랄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 공연도 언제나 수정과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로봇이 하든 인간이 하든 공연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아직 인간이 무대에 있는 공연을 더 보고 싶다. 무서운 속도로 무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에서 '공연예술제' 만큼은 대세를 거슬렀으면 좋겠다. 





2023년 12월 8일 금요일

배꼽을 파는 건 위험하다

지하 극장에 안개가 자욱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은 폴과 함께 깊은 물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을 앞 바다에 있는 신비한 구멍인 배꼽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곳엔 많은 사연과 감정이 서려 있다: 슬픔, 책망과 자책, 분노, 공허 등등.
폴이 배꼽으로 들어가는 건 자기 배 속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며,  
이때 폴과 더불어 관객도 각자의 배꼽 아래 자리한 심연을 바라보게 된다. 
이건 꽤 위험한 일이다. 
배꼽을 “파면 큰일 나니까.” 
그 속을 들여다보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심연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배꼽 안에 들어갔던 폴은 결국 사라진다. 
어디로 갔을까. 
그곳이 알사탕같이 달콤한 곳이길 바라는 것은 너무 낭만적일지라도
고통스럽기보다 평화롭기를 바란다.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이기도 할 테니.

임승태 (i......@gmail.com)



뤂_홀
예시공프로젝트
2023 11.30~12.03
극장 PLOT

출연_박성도, 박영민, 보나 정, 용아, 이성하, 정연
작/연출 백미미
공동연출 보나 정
기획 MJ Kim
조명감독 유보민
음악감독 노영원
프로덕션 매니저 이승찬
디자인 송선영

2023년 1월 19일 목요일

기능 없는 글쓰기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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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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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침투하는 비체들 

2부. 기능 없는 글쓰기


6. 글쓰기, 기능, 미로

민조

이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일단 두 분께서는 전통적인 희곡 장르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계신데요, 연재님께서는 2019년에 저랑 인터뷰하셨을 때 희곡이라는 장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말씀해 주신 적도 있었죠.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났고요.  

2023년 1월 18일 수요일

침투하는 비체들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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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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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침투하는 비체들 


1. 팬데믹 이후 혹은 이전

민조

2022년 9월 《한국극예술연구》에 「이후의 신체를 조형하는 포스트휴먼 극작술-신효진 희곡 <머핀과 치와와>(2021), 김연재 희곡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2021)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실었는데요. 논문을 구상할 때 당연히 ‘비인간’, ‘동물-되기’ 이런 화두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작품들 내에서 소위 ‘서사적 종말’이나 인간 사회 내부의 어떤 거대한 ‘공동(空洞)’이 엿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장르상의 차이가 조금 있는데도요. 비인간 개념을 넘어서 우리의 현실, 관계, 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포스트휴머니즘이 사이버네틱스 기술을 통한 인간의 보완이나 향상 프로젝트로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팬데믹 위기 이후에는 정반대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고 봐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봤던 작품들 중에는 인간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안의 어둠이나 구멍으로 더 들어가려 하고, 그 구멍을 통해서 비인간 존재자들과 만나려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두 분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많이 했고요. 

신효진 작가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머핀과 치와와>가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던 2021년에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요. 

2022년 12월 14일 수요일

극단 성북동비둘기, <걸리버스>


임승태 

김현탁에게는 확고한 자기 세계가 있다. 그게 때론 너무 확고해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긴장을 풀고 바라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하고 있음이 이내 분명히 드러난다. 
이번 공연에서 관객은 비둘기들과 더불어 디지털 세계를 여행한다. 결과적으로 온라인 디지털 세계가 무대라는 오프라인 위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구현된다. 물론 중심에는 배우의 몸이 있다. 이번엔 심지어 음악과 빛까지도 배우의 몸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소리와 빛이 무릎으로 전달된다. 배우들이 쉼없이 런지를 할 때 내 무릎도 함께 시려 온다. 이전 작업에서 사용했던 요소들이 더러 반복된다. 어떤 이는 자기복제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배우들이) 편하려고 반복하는 것은 결코 아닐 테니 시그니처라고 해두자. 
극장에 가기 전에 <걸리버 여행기>를 굳이 다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면 도리어 실망할지도. 공연 소개글도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게 좋다. 성북동비둘기의 공연에 익숙하지 않으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다. 차라리 90년대 말 '걸리버'라는 휴대폰 브랜드가 있었다는 걸 알고 가는 게 낫겠다. "걸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예." 김현탁은 이 카피 때문에 일부러 걸리버 폰을 썼을 것 같다.

2022년 12월 9일~18일, 성수아트홀

2020년 3월 4일 수요일

극장을 닫아야 한다면

임승태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경제활동 전반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행업계, 요식업계와 더불어 공연예술계도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공연 취소 결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공연을 하더라도 개점 휴업에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관객 중 확진자가 발생한 것이다(http://naver.me/GjaByQ7M).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공연을 관람하여 다른 관객들이 접촉자로 분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극장이 새로운 감염 클러스터가 되는 일이 한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공연장 전체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Show must go on. 어떤 상황에서도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 말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을 계속 해야 하는가, 잠시 멈춰야 하는가, 이 문제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해야 하는 걸까.
  공공극장은 대부분 공연 중단을 결정한 상황이지만, 민간극장에게 동일하게 요구할 수는 없는 문제다. 공연을 쉽게 중단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공연 주체들의 생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공연이 중단되고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가 취소되면서 여러 작업자들이 증상도 접촉도 없이 자가격리 중이다. 아르바이트 형태로 공연장의 여러 실무들을 맡고 있던 사람들의 생계도 막막한 상태다. 현재 대학로 공연 다수를 맡고 있는 기획사들은 진행하던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 손실을 그대로 안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연극계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마땅하지만, 그와 더불어 작업자들의 경제적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 마련이 시급하다. 필요하다면 공연장 전체를 일시적으로 닫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정부, 혹은 재단 관계자들은 그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하는 관계자들을 위한 구제책도 함께 제시해주길 바란다.
  소위 '연극의 해'에 찾아온 바이러스로 인해 연극계가 죽어가고 있다. 국립극단의 70주년을 기념하려 했으나, 연극하기 가장 어려웠던 전쟁통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 '신연극 100년'을 기념하려 했으나, 그 즈음(1918년)에 범유행(pandemic)하여 한반도에서만 70만명이 감염되었다는 스페인 독감을 간접 경험하고 있다. 공연은 잠시 멈출지언정 공연계 종사자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더 열심히 찾아야 할 때다. 1592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영국 왕실은 런던을 중심으로 7마일 반경 안의 모든 극장 및 대중 오락 시설을 일시 중단시켰다. 이때 배우들은 지방으로 순회 공연을 떠났고,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머무르는 대신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리스의 능욕>과 같은 시를 썼다. 우리는 현재 지방 공연을 추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모두가 셰익스피어처럼 시를 쓰고 있을 수도 없다. 5G 시대인 만큼 온라인을 이용한 무관객 공연이 시도되고 있다고 하고, 문예위에서는 네이버TV를 이용한 공연 생중계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무대와 관객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든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런 시도들이 다른 민간 공연에도 확대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이 지속될 수 없는 시기에 할 수 있는 대안적 작업들을 개발해야 한다. 각 분야 종사자들이 각자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청회부터 필요하다. 코로나19는 곧 치료약이 나오겠지만, 머잖아 또 다른 바이러스가 찾아올 것이다.

2019년 9월 9일 월요일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혹은 언제인가?

임승태

성공한 건축가 마틴(박윤석)이 50세 생일을 맞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TV 진행자인 로스(이준영)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마틴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실비아라는 이름의 염소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잘못 읽은 게 아니다. 염소다. 그리고 마틴이 말하는 사랑은 여느 반려 동물과 보호자의 관계가 아니라, 성관계를 포함한 것이다. 로스는 이 사실을 마틴의 부인 스티비(김수아)에게 편지로 알리고 그 결과 마틴과 스티비, 그리고 그들의 아들 빌리(박지훈)가 누리던 평화는, 무대가 난장판이 되듯, 산산조각난다.

아들 빌리가 게이라는 설정이 곁들여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충격적일지언정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틴과 스티비 부부는 아들의 게이 정체성을 존중해왔고 그것은 이 가족에게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읽힐 수 있다: 남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수간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마틴이나 그를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일 수 있지만, 작가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작품을 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틴의 어떤 말도 스티비의 반론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비아에 대한 마틴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그 관계에 염소가 동의했음을 마틴은 입증할 수 없고 그래서 그 관계는 일방적이고 진지하기에 더욱 병리적이다.

이 논쟁이 동성애에 대한 ‘메타포’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다. (메타포라는 단어가 실제로 대사로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작가가 혹시라도 이 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염려한 노파심의 반영일 수 있다.) 전선이 이종간(異種間)의 사랑에서 펼쳐짐으로써 동성간(同姓間)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이 그 전선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면 <실비아>는 마치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평화롭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이 2000년에 쓰인 작품이란 점을 감안해야 수간-동성애 메타포가 유의미하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 시점, 특히 미국을 비롯하여 가까이는 대만까지 동성간의 결혼이 허용된 시점에서 보자면 마틴/스티비 같은 부모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이런 부모는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이 작품의 논점이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 극을 마틴이 아니라 빌리를 위해 (어쩌면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위해)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연은 작품의 메시지를 충분히 잘 전달했다. 다만 지난 20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가 많이 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대를 특정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공연 초반 로스가 인터뷰 녹화를 위해 꺼내는 카메라가 DSLR 카메라가 아닌 ENG 카메라였으면 어땠을까. DSLR가 설치되는 순간 동시대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이야기가 동시대라고 하면 특별히 새로울 게 없고 그래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홍석천, 난 “호모다””라는 헤드라인이 스포츠신문 첫면을 크게 장식한 2000년 혹은 그 이전 어느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모든 상황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올비는 의문사 WHO를 유난히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WHEN이 더 중요하다.


***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올비 작, 라성연X베타프로젝트
2019년 8월 7일-11일 선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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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월요일

7번국도 단상

임승태

  무대 위에는 자동차 한 대가 해체되어 있었다. 뼈대를 앙상하게 드러낸 메인 프레임을 비롯하여 시트와 같은 큰 부품들은 뒷무대 구석에 있고 나머지 작은 부품들은 무대 바닥 전체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는 조명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무대는 무언가를 제시하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미지를 스스로 떠올리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직 아이’ 그림과 같다. (지나간 유행을 비유로 든 것에 대해 젊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공연에서 직접 사용하는 가장 주도적인 이미지는 길이다.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여러 장면의 배경이 되는 7번 국도, 그리고 인물과 인물이 만나고 헤어지는 여러 상황 속의 길이 (특히 조명을 통해) 무대에 그려진다. 무대 바닥의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 내는 격자를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그들의 절제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정해진 길로만 가다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체스판 위의 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크고 작은 기계 조각들의 배열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른 이미지를 소환한다. 지영이 이야기를 할 때면 직접 언급은 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공장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혹은 그 반도체가 장착된 전자 기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주영이 이야기 때에는 밥먹으러 갈 때도 맞추어야 하는 군의 대오가 떠오른다.
  하지만 텍스트가 감추고 있던 모든 죽음이 드러나고 나면 앞서 일었던 기계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가져가기 어렵게 된다. 조각난 자동차의 잔해는 어느덧 마치 생명을 다한 유기체가 서서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품들이 무작위로 놓여 있었다면, 혹은 어느 순간 대오가 헝클어진다면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전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무대 위에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만지거나 들거나 옮길 법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8년 낭독극을 못 본 입장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공연은 거대한 무대 오브제 위에서 벌어지는 낭독극 같은 인상을 준다. 배우들은 부품들 사이를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고 나가며 거의 변함없이 부동 자세로 대사를 관객에게 전달했다. 격행대화(stichomythia)의 향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양의 대화가 오고가지만, (의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배우들이 고함치듯 내뱉는 대사들은 그것이 극적 대화이길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단적인 부동성이나 배우들의 절규, 그리고 사이사이 긴 침묵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아는 관객에게 희생자 및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단한 방식이었고,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연극에서 ‘연극적 재미’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관객을 힘들게 만드는 선택이기도 하다. 지루함, 피로함을 토로하는 관객 반응도 적지 않고, 나 역시 공연 후반 5분에 한번씩 핸드폰을 열어본 한 관객의 ‘관크’를 당해야 했다. 최소한 지난 5년간 연극이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왔고 이번 작품은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참사와 연극은 정확히 반대되는 사건이기에 전자를 후자에 담는 시도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조금 더 긴 호흡이 필요해 다음 기회로 미룬다.

7번국도
2019.4.17~2019.4.28
남산예술센터
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95

2019년 3월 25일 월요일

고시원의 햄릿공주

임승태

<햄릿>은 이제 거의 포화상태라고 해도 될만큼 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아직도 해볼만한 게 남아서일까, 아니면 하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만만하고 익숙하기 때문일까. 웬만큼 잘해선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걸 하나라도 가지고 있거나 또 관객이 건질 수 있게만 해도 나름의 성취를 이루는 게 또한 이 <햄릿> 판이다. 올 상반기에도 벌써 여러 <햄릿>이 공연될 예정이고 올 하반기, 그리고 내년 상반기에 공연될 <햄릿> 소식도 들려온다. 모쪼록 각각의 <햄릿>이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고시원의 햄릿공주>(홍승오 작, 이상범 연출)는 햄릿을 제목에서 언급하는 게 적절한가 싶을 정도로 <햄릿> 텍스트의 사용 비율은 낮다. 하지만 원작의 핵심 대사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가 우리시대 청년 예술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함량과 관계 없이 ‘햄릿 맛’이 나는 작품이었다.
2010년대 <햄릿> 들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하는 제4독백을 중심으로 다루더라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후반부의 대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단식농성 중인 임재춘 콜텍 해고노동자가 오필리아로 출연했던 <구일만 햄릿>이 그러했고, 구의역 김군의 죽음을 애도했던 <임영준 햄릿>이 또한 그러했다. <고시원의 햄릿공주> 역시 “(건물) 가진 자의 오만”을 장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같은 노선을 취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햄릿의 제4독백은 삶과 죽음, 잠, 꿈을 언급하는 전반부에 집중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삶을 이어가거나 죽음을 택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외부적인 요인이 있겠으나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할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햄릿> 플롯을 취하는 이상 이 질문에서 극이 끝나는 경우는 드물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고시원의 햄릿공주>는 드문 선택을 한 사례에 해당한다. 초반 두 명의 저승사자(남태관, 김영호 분)가 코믹한 톤을 이끌어가서 그렇지 정소정(이새날 분)이란 인물은 처음부터 이미 사느냐 죽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린 상태다. 청년 자살자가 급증한 바람에 저승의 영혼 수용 능력에 문제가 생겨 자살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승에 내려온 두 저승사자는 정소정의 마지막 순간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개입해 보지만 그의 죽음에의 의지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저승사자(특히 공경)와 더불어 관객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또한 한 인간의 존엄한 결정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공연이 마무리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위험하다. 공공지원금 심사를 받았다면 자살을 미화한다며 우려를 표하는 심사위원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공연을 보는 순간에는 그런 걱정을 설핏했다. 하지만 이날 객석을 채운 20대 관객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청년들에게 헬조선, 지옥고(=‘지’하방 + ‘옥’탑방 + ‘고’시원)가 어느덧 일상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햄릿은 죽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지만, 잠을 자면 꿈을 꿀 텐데 그 꿈이 어떤 꿈일지 알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하길 주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눈 뜨고 있는 현실이 이미 지옥인 상황에서는 현실보다 더 나쁜 꿈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이 작품이 재공연될 수 있었던 것은 정소정의 선택이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8월 9일 목요일

a postscript to “애도의 연극, 연극적 애도”

임승태


사계절 연극제에서 만났던 <임영준 햄릿>을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내 느낌엔 내용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연출의 말에 따르면 2분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이라 한다. 어쩌면 리뷰를 쓴 이후에 다시 보는 것이라 특정 장면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몇 부분이 수정된 것도 발견했다. 그 변화에 내 글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쓰기보다 지난 해 <인디언 밥>에 썼던 글(http://indienbob.tistory.com/1033)을 약간 다듬어 2018년 공연의 리뷰로 대신한다. 다만 한 해가 지나면서 지하철 효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이 파악하는 속도도 느려진 게 아닌가라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욕심 같아서는 임영준이 5년에 한번쯤은 이 연극을 다시 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자칭 ‘대배우’ 임영준이 진정한 대배우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들의 팬들이 함께 보고 축하하며, 또한 우리 사회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대와 객석이 함께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

<햄릿>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는 사실은 그 유명한 극중극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다만 메타극(metatheatre)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라이오넬 에이블(Lionel Abel)이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던 한 가지 내용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햄릿은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극중 인물 스스로 ‘세상은 연극’(theatrum mundi)이라는 인식 하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적극적으로 플롯을 꾸미고 다른 인물을 조종하고 움직인다. 내 생각엔 바로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햄릿>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연극인들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연극적 실험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햄릿>은 극중 인물도, 그것을 공연하는 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극작가 의식에 충만해야 하는 작품인 것이다. 

<임영준 햄릿>은 공연 중 반복되는 여름 노래 메들리만큼이나 밝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과장된 쾌활함 사이에는 데뷔 ‘11년차’ 연극배우 임영준의 자기 연민이 언뜻언뜻 베어난다. 무려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준은 관객이 기대할 법한 연극을 시작하는 대신 자기 얘기, 그중에서도 자기가 해왔던 연극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낸다. 하지만 정작 연습할 때 입었다가 무대 의상이 되었다는,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하기 힘든 쫄 반바지 하나 입고 있는 배우의 행색은 우습고 또 서글프다. 근육과 살이 떨리고, 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를 튀기며 자신의 지난 10년(2017년 기준으로 10년이지만, 지난 1년간의 공연 내역이 추가되지는 않았다)을 되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배역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배우를, 심지어 그의 공연을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몰라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번 각인하면 잊기 어려운 배우가 또한 임영준이라는 것 또한 나는 지난 1년간 경험했다.)

<햄릿>은 지극히 가족극이기도 한만큼 <임영준 햄릿>에 배우의 부모님이 (영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등장은 그토록 당당하던 임영준을 한순간에 조그맣게 만든다. 선왕의 유령이 복수를 재촉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왕자처럼 임영준은 허상에 불과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날 때 욕조 뒤로 숨는다. (2017년 공연에서는 공간소극장의 구조적 이점을 살려 ‘쥐구멍’같은 공간으로 잘도 숨어 들어갔다.) 흥미로운 건 이 상황이 계획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반응을 보며 관객도 적잖이 긴장하게 된다는 점인데, 그건 아마도 관객 다수를 차지한 임영준의 또래들이 비슷한 심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변변한 자리 없이 제 앞가림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머지않아 TV에 나오는 성공한 배우가 되겠다는 임영준의 다짐을 들으며 관객들은 TV라는 말을 대신할 각자의 단어를 속으로 되새긴다. (극장이 넓어져서인지, 관객 구성이 달라져서인지 전년도 만큼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관객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어쩌면 그 원인을 배우에게서 찾을 수도 있다. 마침 오늘 공연에는 그의 부모님이 객석에서 ‘직관’하고 계셨다.)

아무튼 이 연극은 배우 임영준에 대해, 그가 해온 연극에 대해 말하며 <햄릿>의 메타극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적잖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만 80분을 채웠다면 그의 열성 팬이나 친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객이 끝까지 공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라는 희곡에 이런 대사가 있다. “연극에 대한 연극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재미있습니다.” 제작팀의 지인이 아닌 이상 이 소규모 연극을 보러 올 정도의 관객은 이미 연극에 대한 애정 혹은 애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무대에서 되풀이되는 연민의 정서가 특별할 건 없다. 모든 연민이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배우로 살기의 고됨만 있었다면 이 작품은 임영준 본인이 공연 중에 언급하듯 “제목만 햄릿”이라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영준의 다재다능함을 한껏 보여준 다음 하수민, 김정 두 연출가는 애도라는 중요한 주제를 적절히 등장시킨다. 애도에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2014년 이후의 한국 <햄릿>의 주된 흐름이다. 우리는 더 이상 라깡의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 작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이라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 복수를 실행하지 못하고 끝까지 괴로워하는 햄릿의 말과 행동은 비평가들이 오래도록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와 그로인한 막대한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이 인물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 제작된 <햄릿>은, 예컨대 김현탁의 <망루의 햄릿>과 이성열의 <햄릿아비>와 같이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인물의 슬픔을 종종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병치시켰다. 비록 얀 코트(Jan Kott)가 이 말을 하고도 반백년이 넘게 흐르긴 했지만, 세월호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비로소 우리의 “동시대인”이 되었으며, 애도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대상을 향한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유령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기억하고 애도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으라고 요청한다.

무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임영준은 “배고프다”란 말과 함께 컵라면 한 사발을 비운다. 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으나, 앞선 쾌활함이 과장된 것임을 감지했다면 이제 드디어 나올 게 나온다는 느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픈 예술가의 식상한 상징일 수도 있었던 컵라면 장면은 전동차 효과음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십대 정비사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부정적 지표에서는 여전히 OECD 으뜸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이기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1997년생이었던 김 군의 유품 가방에 들어 있었던 컵라면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임영준이 컵라면을 먹는 행위는 자신의 배고픔을 드러내기보다 김 군이 먹지 못한 컵라면을 대신 먹는 하나의 제의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야 말로 배우의 본분이거니와, 그 순간 임영준이 햄릿을 연기하는 목적이 단순히 모든 남자 배우의 로망이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죽음에 있음이 드러난다. 개인적 차원의 살풀이로 시작한 이 연극은 어느덧 사회적 차원의 씻김굿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일까. 임영준, 그리고 김정, 하수민 두 연출가는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이 보기엔 텍스트를 띄엄띄엄 읽고 A급 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저질 B급 코드를 총동원해 공연을 만든 듯 보일지 몰라도 실은 꽤나 성실한 모범생에 더 가깝다. (공연장을 나가며 나는 무대 바닥에 결코 가볍지 않은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의 첫인상은 대사를 이곳저곳에서 마구잡이로 발췌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내 햄릿의 주요 대사가 조목조목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유명한 제4독백이 빠질 수 없다. 임영준은 오디션을 보는 듯 여러 가지로 연기 톤을 바꿔가며 이 독백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낭송한다. 그중에서도 햄릿이 단도를 꺼내들기 직전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왜 <햄릿>이 지금 여기서 공연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별 오디션은 번번이 이 대사 시작 부분에서 멈추는데 이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아래 대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그 누가 견디겠는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폭군의 횡포를, 가진 자의 오만함을,
실연의 아픔을, 법의 더딤을,
관리의 교만을, 유덕한 사람이
무지렁이들에게 받아야 하는 모욕을.
이 단도 한 자루면 자신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부조리는 왕자라는 지위에서 쉽게 되뇔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차라리 백성을 개(돼지)로 여기는 거트루드가 그때나 지금이나 더 현실적이다. 일단 왕자가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면 연극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간접 경험해서라고 해두자. 중요한 건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 당시의 관객도 4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관객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임영준 햄릿>이 공연된 2017년, 그리고 2018년 여름에 이 대사는 구체적으로 구의역 김 군의 이미지로 구체화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갑질, 촛불을 탱크로 막으려 했던 계획, 약자에게만 엄격한 법 따위를 떠올리게 한다.

위 대사는 공연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졸역을 덧붙였으나, 적어도 이 독백의 첫 마디는 <임영준 햄릿> 프로덕션의 것을 직접 인용해야 한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그동안 살펴본 <햄릿> 번역서와 공연에서도 “To be, or not to be” 를 이 만큼 적절하게 옮긴 사례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느냐가 먼저냐 죽느냐가 먼저냐가 문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가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의 일상적 질문이라는 사실이 “왜 햄릿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나머지 부분을 구성한다. 이 질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 임영준의 질문이자 햄릿을 연구하며 비정규직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경력직만 찾는 구인 공고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오르지 않는 급여와 오르기만 하는 전월세금 앞에서 이 질문을 떠올린다. 아프다는데 그러니 청춘이라는 둥 붙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더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둥의 정신승리법을 알려주는 기성세대는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고선 위로하는 척하는 클로디어스를 닮아 있어서 더 밉살스럽다. (물론 임영준 배우가 늘어난 나이와 옆구리 살 때문에 스스로를 햄릿이 아니라 클로디어스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클로디어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다만 그러하더라도 임영준과 함께 햄릿의 질문을 되뇌는 동안 우리 모두는 어찌어찌 여전히 살아남았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존재하는 동안 이 우울한 질문이 계속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이 질문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하지만 <햄릿>은 남아있는 자들이 먼저 가야했던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살아낼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햄릿 왕자도 마지막 순간 호레이쇼에게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호레이쇼에게 맡겨진 임무는 특별히 영웅적이지 못한 우리 대부분의 것이기도 하다.

추신2
지난 1년간 조연출 박정호는 김정 연출의 시그니처 코드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할 수준으로 등장했다. <임영준 햄릿>은 김정 연출의 작품에서 조연출 박정호의 무대 위 역할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사라진 무엇

임승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원작 권여선
각색/연출 박해성
출연 신사랑, 황은후, 노기용, 우정원, 신지우
2017.11.23-12.03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동명 제목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적절한 신체와 음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서술 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서스펜스는 아쉽게도 사라져야 했다. 권여선의 원작은 각 소절이 서로 다른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됨으로 인해 독자가 해당 소절을 읽을 때 이번에는 누가 서술자인지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독자에게 일정한 긴장감과 능동적 참여를 허락한다.

이 두 가지는 두 형식이 가진 특성을 서로 맞바꾼 것이니 얻은 만큼 잃었고, 잃은 만큼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성에 있어서 발생한 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무대 버전에서는 이야기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이야기 하나가 생략되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공연을 보고 난 이후 소설을 통해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이야기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을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할 경우 생략은 불가피하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일야화’처럼 어떤 이야기가 길게 길게 지속되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연극은 한두 시간, 길어도 서너 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도록 신속히 핵심 사건에 접근하고  신속히 결말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소설의 연극화는 기본적으로 압축을 전제하는 작업이므로 단순히 어떤 장면이 생략되는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그냥 서재에 머무르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하지만 이번 각색에서 윤태림의 딸 실종 사건이 원작만큼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것은 소설 각색의 일상 다반사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이 문제가 작품의 제목 혹은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은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에서 왔다.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해언의 동생 다언의 입을 빌어 이 말을 다시 쓴다. 아니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신 당신이라고. 인간들이 도무지 뜻모를 고통 속에서 죽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섭리를 믿을 수 있겠냐고. 오히려 이 모든 게 당신의 무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언과 상희의 대화 속에서 신의 섭리는 부정되는 반면 시에 대한 믿음은 재확인된다. 신은 믿을 수 없지만 시는 믿자는 그들의 대화는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실종된 태림의 딸이 ‘혜은’이 되어 다언의 엄마 품에 있다는 이야기를 포함할 때와 하지 않을 때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섭리를 부정하는 말이 다언의 입에서 나올 때, 독자나 관객은 그녀의 고통을 알기에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절규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가 영아 납치 사건의 주범 혹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같을 수 없다. 이럴 경우 다언과 그녀의 어머니가 벌인 일을 우리가 한편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으로 신의 섭리를 말하는 순간 우리의 도덕 감정은 선뜻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해자가 신의 섭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정의를 실현—그것이 정의 실현이든, 복수이든, 아니면 단순히 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이든—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결정적으로 다언과 독자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신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작가의 결정적 고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다언의 결정적 행동을 삭제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가족을 잃는 불행 앞에서 한 인물이 신적 섭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만들었다. 원작의 경우 정의에 대한 갈망, 섭리에 대한 회의, 그러면서 동시에 자의적 정의의 실현 또한 대안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각색은 결론에서 온전히 섭리에 대한 불신이 제시되고, 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낭만적 전망을 내어 놓는다. 이 소설에서 섭리에 대한 고민이 영(Wm. Paul Young)의 <오두막>(The Shack)이나, 엔도 슈샤쿠(遠藤 周作)의 <침묵> 만큼 심화되지 않는 만큼 주인공이 섭리를 문제 삼는 것으로 끝맺는 각색은 결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선 공교롭게도 신과 시가 서로 경쟁한다. 주인공은 신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을 고발하면서 그 대안을 시에서 찾는다. 하지만 시를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행동 역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에 작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신적 섭리에 일정부분 의구심을 드러내지만 섭리를 부정하고 신이 아닌 시를 믿는 자(들)의 행동 역시 대안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윤태림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위선이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역겨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위선이란 신을 믿는 자 뿐만 아니라 시를 믿는 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음을 경고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연극에서의 각색은 작가가 취하고자 했던 윤리적 긴장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그로인해 시를 우상의 위치에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6월 1일 목요일

리어왕, 누가 왕을 가장 사랑하는가

임승태

1.
등장인물과 플롯에서 몇 가지 주요한 변경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너릴과 리건의 남편인 올버니와 콘월 공작, 그리고 글로스터의 장남 에드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에드거가 배제됨으로써 몇 가지 사건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두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도버 해협에서 리어와 만나고, 곧 절벽에 몸을 던진다. 에드거가 눈먼 아버지의 자살을 막고자 거짓말하는 장면을 해석적 입장에 따라 부차적으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충성스런 신하인 글로스터가 왕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광대가 더는 익살을 부리지 않고 진지해지는 것 역시 아마도 등장인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으나 광대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측면에서 이질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에드거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에드먼드가 전투에서 패배한 코딜리어를 곧장 칼로 찔러 죽이고 이어 켄트는 활로 에드먼드, 거너릴을 차례로 쏴 죽인다.
한편 다른 배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에드먼드가 더 많은 역할을 흡수했다. 서두에서 에드먼드는 원작의 버건디 공작을 대신하여 코딜리어의 구혼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로 직전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버지 글로스터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 터라, 그가 리어가 가장 사랑했던 딸인 코딜리어의 구혼자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2.
이러한 시도가 더 많아져 마침내 국악에서도 바그너와 같은 거대한 종합예술작품이 등장하는 날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각의 요소를 안배하고 완급을 조절할 연출가와 프로덕션에 맞춤하게 드라마를 다듬어줄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하겠다. 지금은 프로덕션을 받치고 있는 각 바퀴가 제각기 움직이는 바람에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축약되고 각색된 <리어>는 원작의 응집력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연희를 연결해주지도 못했다. 음악이나 소리는 전문적이었으나 드라마와 동떨어져 있거나, 없으면 더 좋았을 법할 때에도 배경으로 깔린다. 풍물을 통해 전투 장면을 표현한다는 취지는 좋았고 연희단의 공연도 흥겨웠다. 하지만 풍물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스크린에 비친 영상과 전쟁 효과음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때로는 풍물 소리와 뒤섞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임현빈이 맡은 소리는 애초 이러한 유형의 공연에 대해 내가 기대했던 바이지만, 그가 등장하는 소수의 대목에서만 셰익스피어와 국악이 직접 만날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TV 사극을 생각나게 했고, 대사나 몸짓에서 국악과 어울리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사용되는 영상은 비단 이 공연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를 공연할 경우 재고해야 할 일이다. 영화가 아닌 이상 셰익스피어를 사실적으로 접근해서는 본전을 찾기 어렵다. 빈 무대나 자연광, 변장 등 한국 연극 전통과 맥이 닿아 있는 셰익스피어 본연의 요소들을 이러한 성격의 공연에서 버려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2017년 5월 31일 이화여대 삼성홀
주최: 문화가있는날, 문화체육관광부
작곡 및 음악감독: 박경훈, 이아람
작창 및 소리광대: 임현빈
연주: 박경훈, 이아람, 성시영, 이정석, 전계열, 최태영
안무: 박준희, 소광웅
무용: 소광웅, 이세미, 유지희, 김병훈, 김우정, 조연정
풍물: 평택연희단
배우: 손성호, 남성진, 신현종, 윤상호, 이영숙, 김지은, 원종철, 윤도훈, 김진영, 김성진

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의 찝찝함

임승태

나는 이 연극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켄터키주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이미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2012년 “Complia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 같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초연이 2014년이었다는 점이나 연출의 변에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연극을 세월호, 특히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가만히 있으라”가 남긴 상처는 우리 사회에 여전하기에 이 말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변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제 검열관이 사라졌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어딘가 고약한 데가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은 이 작품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음, 혹은 말 잘 듣지 않음을 실천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은 가만히 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하지 말라는 담탱이의 조회 시간 잔소리는 매번 제 시간에 온 학생들이 듣게 마련이다. 과거 어느 공연에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순간 한 관객이 일어나 오셀로를 권총으로 쏴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은 그 사람보다 정의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재미나 감동과 같은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한 유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끝까지 봐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말 잘 듣는 게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만히 있었던 학생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던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혹은 차예슬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일차적 책임은 선장과 선원, 해경, 대통령에게 있고, 형사를 사칭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 혹은 최대한과 같이 시킨, 혹은 마땅히 시켜야 할 일도 시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커튼 콜 당시 내 뒤의 한 관객은 웃음 지으며 퇴장하는 최대한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외쳤다. 비록 이 말이 내가 관람한 저녁에 나온 관객 반응의 최대치였지만, 점잖은 관객들도 속으로는 그 이상을 외쳤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삼천만원을 잃었다. 옆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스 피싱이 퍽치기 강도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면 핸드폰을 보조 배터리에 연결해서 여섯 시간씩 범죄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을 잘 들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리에게 당하는 양의 약함을 문제삼는 것과 흡사하다. 비극이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아고의 악함을 문제삼지 않고, 오셀로의 귀 얇음과 데스데모나의 지나친 친절을 문제삼는다. 이아고나 최대한은 수퍼 빌런이지, 간단히 헤치울 수 있는 조무라기 악당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오그본/차예슬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건/연극에서 주목할 문제이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이들이야 말로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박종주의 표현대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이 연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스튜어트/최대한의 사악함이나 오그본/차예슬의 불쌍함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 중간에서 이 끔찍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지극한 평범성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하루의 삶 속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것보다 내게 손해가 없기를 바라며, 내게 이익이 된다면 정의를 잠시 외면할 준비도 되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불편한 것은 바로 나의 비열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은 이 연극을 끝까지 참고 봄으로써 카타르시스 없는 불편함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러한 사건에 연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와 (부)매니저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김미옥과 그의 배우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강성기를 비난하면서도 일말의 연민을 거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 주는 불편함은 배우들이 단체로 펠라치오 시늉을 하는 것을 강제로 훔쳐봐야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85분에서 90분간 극장에 앉아서 그것을 접하는 것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사건에 무언의 배우로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사도/마조키즘 성향을 활성화 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옮겨 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김수정의 저자권(authorship)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Compliance 와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선제적으로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Compliance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자가 후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가? 몇몇 대사를 비롯하여 몇가지 설정—Compliance의 금발 머리, 치킨 샌드위치 가게와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노란 머리, 삼계탕 집—상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8일 토요일

휠+애인+산, 제물포 별곡

제물포 별곡: 조선판 베니스의 상인
오유아트홀 (도곡2 주민센터)
2015.8.7

글쓴이_임승태

극단 휠과 애인이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한다고 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minority’였다. 이 드라마에는, 작가 자신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반유대주의 정서가 뚜렷이 드러난다. 반면, 이 극의 타이틀 롤인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친구 바사니오에 대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할만한 근거는 다분하다. 아무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 안토니오와 샤일록이 채무관계로 얽히면서 이 극의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극의 결말은 한쪽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행복하게 해결된 코미디로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법관을 사칭한 채무자의 ‘제수씨’에 속아 재산을 몰수당하는 민족적 소수자의 서러움이 어려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이 1930년대 제물포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전환됨으로써 샤일록의 이름은 긴 다케시로 바뀌었다. 뚜렷한 친일행적을 보이지 않는 그의 이름을 굳이 일본식으로 개명시킨 것은 관객들이 마음 놓고 그를 미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실 극중 인물이 원작의 인물 성격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데, 새 한국식 이름을 암기하며 따라가려니 낯설고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더욱 얄미운 이름인 ‘긴 다케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일록이든 긴 다케시이든 그를 마음껏 미워하긴 힘들다. “제물포 별곡”이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그들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 또한 바로 긴 다케시를 통해서이다. 긴 다케시(백우람 分)는 구만석(안토니오, 호종민 分)의 부친에 의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고리대금업자가 돈을 마다하고 채무자의 살을 취하기 원하는 동기를 제공해준다. 그런데 "몸이 망가졌다"라는 말은 이 극에서 하나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전까지 관객이 배우의 핸디캡을 지우고 극적 가상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다면, 배우가 이 대사를 반복해서 하는 순간 관객은 더이상 배우의 신체적 장애를 모른 척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병신 취급”,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와 같은 대사 역시 단순히 극적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새삼스레 배우들의 몸을 지각하게 만든다. 긴 다케시의 대사는 그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게 어쩌면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제물포 별곡”을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온전히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이들의 연기는 비장애인 배우들과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측면에서 장애인 배우는 무대 위에서 비장애인 배우를 압도한다. 장애인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은 배우 자신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지만, 관객들은 이점이 그들로서는 불가항력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기 보다는 매순간의 의외성에 경탄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비장애인의 연기는 발성이나 표정 등에서 예측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투적이라고 느껴진다. 무대 위의 환상을 배격하고 몸의 현존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극단 애인과 극단 휠이 풀어가야할 과제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앞으로도 몸성(corporeality)이 관객을 매혹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재현과 현존을 오고가게 만드는 공연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2015년 3월 25일 수요일

비행위를 번역하다: 《레르몬토프 희곡 전집》 번역자 신영선 인터뷰

2015년 3월 18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내 한 카페에서

임승태: 신영선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신영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임: 자기소개는 신비주의를 위해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신: 아, 예.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시다는 거죠?
임: 책 표지에 나오기 때문에, 궁금하시는 분들은 서점에 가서 표지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책!

임: 첫 번째 책이 무려 전집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엄청난 작업을 하시게 된 건가요?
신: 제가 봐도 좀 미련한 짓인 것 같구요.
임: ㅎㅎㅎ
신: 여기서 웃으시면 안되죠.
임: 볼드체로 해드리겠습니다.
신: 누난 지금 진지해요. 궁서체로 해주세요. … 논문을 쓰면서 어찌됐건 저는 텍스트를 수십번을 읽어야 했는데, 저는 외국어 텍스트를 그대로 분석하는 건 잘 못하구요. 일단 우리말로 코딩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우리말로 코딩을 한 이후에 분석을 했던 거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산출됐습니다. 어차피 한번 읽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다시 읽어야 해요. 그래서 경제성을 위해서 한 거구요. 읽으면서 제가 읽은 대로 번역을 한 것이고, 물론 이제 출판을 위해서는 조금 더 검증 작업을 거쳤습니다. ‘가장무도회’ 와 ‘두 형제’는 배우들의 리딩을 몇 번 거쳤어요. 기성배우들의 드라이 리딩을 몇 차례 거쳤습니다. 희곡 번역은 어디까지나 공연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공연이 가능한 텍스트를 뽑는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표현을 찾는 작업이 후반부에 들어갔습니다.


임: 죄송하지만, 레르몬토프는 저 또한 그렇고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작가잖아요? 물론 전집이 이제야 소개되었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레르몬토프는 어떤 극작가인지요? 역자 선생님의 박사 논문 제목이기도한 “비행위에서 반행위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아주 쉽게 설명해주신다면?
신: 레르몬토프는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러시아에서도 극작가로 주로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는 소설의 저자로 국내엔 주로 알려져 있고, 시집은 절판이 돼서 거의 찾을 수가 없을 거예요. 희곡 번역은 제가 거의 처음이라 보시면 되고, 대표작인 ‘가장무도회’는 90년대에 번역된 게 있는데, 그 책도 절판되었습니다. 공연은 된 적이 없구요. 극작가로서의 퀄리티를 평가하자면, 초기작품은 16-7세에 나온 거예요. 사춘기의 소산, 사춘기에 연상의 여인들에게 구애했다가 차인 경험들이 대부분 반영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를 찬 여인들에 대한 복수심이 또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는 게 저자에겐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후기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21-2세 때 ‘가장무도회’와 ‘두 형제’가 나오는데요.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 사이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남성 작가들은 군대 전후로 해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의 의미는 상징계 진입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 전까지는 학생이죠. 구애했던 여성들도 작가를 어린애나 친구로 취급, 적어도 성인남성으로는 대접해주지 않았다고 하면, 2년의 사관학교 기간을 거치고 장교로 임관을 하고 뻬쩨르부르그 중앙 사교계에 장교복을 딱 갖춰 입고 진출을 하는 거죠. 무도회도 드나들고 유부녀들과 연애도 하고 이러면서 사교계에 정식으로 장교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진입을 하는 거에요. 그런 입장에서는 작가가 그린 주체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앞의 세 작품의 주체는 행위를 결행하지 못하는 사춘기적 주체입니다. 앞 작품에서는 계속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양부건 친부건 하여튼 자기를 먹여주고 길러준 양육자의 존재가 항상 있어서 그들의 요구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반항해서 행위를 결행하고 싶은데 하면 후레자식이 되는 거에요. 그게 비행위에요. 할 수가 없는 거죠. 이렇게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 사람한테 반항해서까지 이 행위를 결행하기엔 내가 너무 고상한 존재란 자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희생하고 말겠다, 그래서 자기 목표를 주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재귀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그런 종류의 행위를 하는데, 이제 관객 입장에서는 그런 행위를 보면 미칠 것 같죠. ‘아니, 지금 저거 뭐하는 거야, 왜 죽여야지 안죽이고 니가 죽어?’라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행위가 비행위입니다. 있어야 할 게 없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비행위를 마이너스-액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행위에 특별히 주목한 건 우리 세대랑 많이 닮아 있어서에요. 그러니까 니가 취직을 못하는 건 니가 자기 관리 못하고 스펙이 부족하고 니가 노력을 덜해서야. ‘자소서 좀 더 잘 쓰고 플픽도 다시 찍고 실력도 쌓고 토익 점수 지금 900이 넘어도 좀 더 올려봐’라는 식의 주체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하고 많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학생들 봐도 그래요. 어떤 사회 시스템이나 부조리에 대해서 항의 한다기 보다는 제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죠 뭐. 더 잘해야죠. 연애도 외모를 좀 더 잘 가꾸고 스킬도 늘리고 좀 더 잘나고 매력적인 사람이 돼야 연애를 할 자격이나 가치가 생긴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그런 내향성, 자기 비난과 착취 그런 종류의 패턴을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있고, 작가도 그런 종류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권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대신에 수동 공격이나 공격성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는 패턴. 그런데 이런 건 19세기 이전 문학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현상인데 저는 근 200년 전에 이런 현상을 어떤 어린 천재가 포착해냈다는 것, 이런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현대적인 방법으로 연출한다면 굉장히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런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목하실만한 작품은 ‘이상한 사람’이란 작품인데요. 주인공은 천재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만, 주변사람은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그냥 이해 못할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너 진짜 이상하다. 널 정말 이해 못하겠어”라고 하는. 근데 그렇게 이상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은 거죠. 저는 지금 우리 나라 20대의 40%가 그런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데, 그 각자가 다 이상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들이 될 수 있겠죠.
임: 좀더 연령을 낮춰서 중2정도로 갈 수 있겠네요.
신: 그렇죠. 그러니까, 중2병이라는 건 결국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주체의 자기 정립을 위한 발버둥의 단계인건데, 독일로 치면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 질풍노도)식의 어떤 반항적이고 격렬하고 숨쉴 틈 조차 주지 않는 권위적인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을 통해서 자기를 형성하고 과정이라고 본다면, 자기 형성이라는 건 슈투름 운트 드랑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아니고 제 해석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극작가로서의 레르몬토프가 많이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쉴러 초기 희곡들이 슈트룸 운트 드랑에 해당하는데, 그를 포함한 쉴러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있어요. 그 시대에 해당하는 《간계와 사랑》 같은 작품들의 영향이 거의 직접적으로 들어옵니다. 이 영향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독일이나 러시아의 상황에서 권위적인 정권에 불만을 품은 젊은 세대들이 정치적 행위로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문학적으로 자기를 형성하고 자의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소산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임: 신영선 선생님은 러시아 희곡 연구자이시면서, 동시에 등단한 극작가이시기도 합니다. 같은 극작가로서 레르몬토프의 장점이나 매력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그 반대도 좋구요.
신: 사실 저는 극작가로서의 저의 단점을 레르몬토프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하하. 본인이 들으면 울컥하겠는데요? 저와 제 주인공들도 나름대로 개인적인 사유로 행위의 결행을 망설이는 편입니다. 욕망은 있어요. 다 죽이든가 저지르던가 하고 싶죠. 제 희곡은 대부분 죽어야 끝나는데, 그게 살인으로 못 끝나고 자살로 끝나요 대부분. 그게 뭐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비행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저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은 제 희곡과 이 번역본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들 해요.
어찌됐건 레르몬토프의 희곡이 공연이 잘 되지 않았고, 러시아에서도 굉장히 다루기 까다로운 작가로 취급해요. 그게 바로 비행위 때문이거든요. 연출가가 다루고 배우가 작업할 수 있는 건 행위 뿐이에요. 비행위를 어떻게 작업하겠어요? 난감하거든요.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 이상 비행위는 무대에서 형상화하기가 어렵거든요. 갑갑하죠. 관객들도 저게 뭐야? 그냥 저질러.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내가 희생할게. 라고 하면 관객들은 미치는 거죠. 그런 종류의 답답함. 클라이맥스에서 극단적인 행위에 대한 욕망은 있어요. 저지르고 싶고 터트리고 싶은 욕망이 젊은 작가들에게 있지요. 저도 희곡을 20대 초반부터 썼는데, 사회에 대한 복수심도 물론 있고 개인적인 욕망도 있는데 극단적인 행위를 저지르기엔 자의식적인 장애가 너무 많은 거죠. 비행위의 요인이 너무 많아서 주인공은 자기 파괴의 결론을 냅니다. 이 사회와 공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남을 해칠 수도 없어요. 그래서 비행위로 결론을 내는데, 이런 식으로 10년을 넘게 쓰다 보니까 아, 여기에 한번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다 생각하게 됐는데, 그런 지점에 제 박사 논문이 위치해 있구요.
장점에 있어서도 공유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말발이에요. 말발과 서정성. 인정하실지 모르겠는데, 제 희곡에는 내용은 잔혹하지만 표현은 상당히 서정적인 편입니다. 레르몬토프도 시인이기 때문에 어쨌든 화려한 말발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진 않거든요. 그 긴 독백을 듣고 있다 보면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제 경우엔 요즘 시대엔 그렇게 긴 독백을 많이 쓸 수는 없지만, 어쨌든 유려한 언어,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려니 굉장히 민망합니다, 그 실제로 구어적으로 배우들 사이에서 호흡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단문의, 희랍비극에서 격행대화라고 하는 것 있잖아요. 반절씩 치고 받는 대화의 긴박감이라든가,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논리의 정연함이라든가, 한국어의 아름다움, 듣는 텍스트로서의 아름다움, 시극의 가능성, 낭송했을 때 들어줄만한 것인가, 소리로서도 들어줄 만한 것인가, 그런 측면들을 많이 고민합니다.


임: 그러면 행위가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 말이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치 《햄릿》에서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신: 죽일 듯 죽일 듯 죽이지 않는 ...
임: 하나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려면,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행위가 없으니 그 자리에 무언가 다른 게 채워져야 하는 그런 관계 ...
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고대 비극은 그런 고민이 없어요. 저지르죠. 복수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거든요? 근대 비극 같은 경우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라신 같은 경우도 순수한 복수극은 없어요. 말로 하죠. 그 정념을 말로 풀어내는 거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 대신에 내러티브의 정합성은 정밀하게 따지는 편입니다. 스토리는 진행이 되요. 긴박하게 진행되지만, 주인공이 메인 액션을 하는데 많이 주저하게 되는 거죠. 고대 비극이나 아니면 양식극, 이를테면 골도니 희극들의 주인공들은 망설임 없이 딱 저지르잖아요. 음모를 꾸미고 딱 실행하고 어떤 결론을 내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숙고가 들어가는 거죠.
임: 망설임이란 거 자체가 어떻게 보면 비극적인 어떤 것 아닐까요?
신: 비극적인 계기 ... 비극의 원인이 되죠.


임: 아무래도 일반적으로 체호프를 좀 더 익숙하게 생각할 텐데요. 비행위라고 하니까, 체호프의 작품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레르몬토프가 체호프에게 영향을 미친 게 있을까요? 《두 형제》와 《세 자매》와 무슨 관계가 있는 작품인가요?
신: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두 형제’는 러시아 문학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체호프가 레르몬토프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기는 했는데요. 그건 산문 작가로서였습니다.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에 보면 ‘따만’이라는 장이 있어요. 독립된 단편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인데, 구성이 굉장히 정교하고 문장이 아름다워요. 단편소설로 수준 높은 작품인데, 체호프는 그걸 높이 평가했습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이렇게 완벽한 단편 소설은 없었다. 그리고 체호프의 유명한 단편들이 레르몬토프를 모범으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영향을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긴 어려워요. 워낙 이 단편들이 미묘한 작품들이라서요. 극작가로서는 체호프가 레르몬토프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제가 알기로는, 나온 증거는 없어요. 러시아에서 레르몬토프는 워낙 많이 연구 대상이 된 고전 작가인데, 제가 연구사를 검토했을 때 레르몬토프 전체 연구 업적에서 희곡을 연구한 분량이 5%가 안 됩니다. 너무 분석하기 힘들어요. 알려져 있지 않은 탓도 있지만, 레르몬토프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애정이나 평가를 생각하면 조금은 더 있어야 되는데, 지나치게 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일차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텍스트를 소개하고, 기본적인 주석을 하고, 그리고 비행위와 반행위에 대한 저의 주장은 어찌 보면 그 다음 단계에서 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박사논문이 요구하는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저의 독자적인 작업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 세 가지 작업, 텍스트의 정밀한 독해와, 주석과, 적용 및 해석에 대한 부분까지 이것저것 다 하려다 보니까, 전부다 미비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웃음)
임: 좋게 말하면, 블루 오션을 찾으셨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거 같구요. 하지만, 햄릿이 말한 것처럼, 풀이 자라기 전에 말이 굶어 죽는다고…
신: 저는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임: 그전에 풀이 빨리 자라길 다 같이 기원하면서요. 이제 간단한 질문 두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러시아 희곡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호칭이 고약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누가 누구인지, 등장인물이 열 명이면 본문에는 한 삼십 명이 나오는 거 같아요. 그것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저만 하더라도 체호프를 두 번, 세 번 읽으니까 그제야 아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었구나.
신: 걔가 걔였든가, 이제
임: 초보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신: 러시아 인의 인명 체계는 러시아 문학에 들어가기 위한 첫번째 문지방인데, 그 문지방이 조금 높아요. 체계가 이렇습니다. 세례명-부칭-성 이에요. 그래서 체호프라고 하면요. 안톤-파블로비치-체호프이에요. 체호프는 성입니다. 안톤이 세례명이에요. 파블로비치 이게 이상한 건데, 아빠이름이 파벨이란 뜻입니다. 파벨의 아들 안톤이고 체호프 집안 사람이에요. 여자의 경우에는, 누구로 할까요? 궁금한 여자 있으세요?
임: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가져간 소트니코바?
신: 소트니코바 같은 경우엔 예시가 약간 비호감 아닌가요? 소트니코바는 성이죠…. 제가 그 친구 이름까지 알아야 하나요? 남성형은 소트니코프가 됩니다.


(질문자의 머리 속에 떠오른 또 하나의 이름은 샤라포바였다. 이 경우엔 세례명까진 꽤 알려져 있으나, 부칭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통과. 인터뷰를 끝내고 복습 삼아 소트니코바의 이름을 찾아 보았다. 아델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소트니코바, 다시 말해 소트니코프 집안의 드미트리의 딸 아델리나이다. 이분은 요즘 뭐하고 계시는지?)


신: 제가 많이 예로 드는 건 도스토예프스키 부부입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에요. 미하일 아들 표도르. 그리고 마누라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그러니까 그리고리의 딸이에요. 아빠이름이에요. 그다음에 스니트키나. 스니트킨 집안의 여자.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와 결혼했으니까 도스토예프스카야라고 해서 여성형 어미가 붙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에요. 표도르는 가족이나 친구, 가까운 사이에서 페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안나 같은 경우는 아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에게 쓴 편지에 보면 아냐라고 호칭을 해요. 그리고 가장 마지막 단계인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이게 호칭입니다. 세례명하고 부칭을 붙인 게 정중한 호칭이에요. 이를테면 서로 인사를 할 때, 안녕하십니까, 전 OO입니다. 당신의 이름과 부칭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하면 저는 OO입니다가 되는 거죠. 지인들 사이에서 부르는 정중한 호칭이에요. 반말은 아니고, 그런데 부칭을 알고 있고 이름과 부칭을 붙여서 부른다는 건, 안면이 있는 사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성만 부른다는 건 중립적인 호칭이에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번에 새로운 소설을 냈다고 할 때는 그냥 성만 쓰는 거죠. 그런데 요즘 제가 러시아에 가서 상대방에게 부칭 물어보면, 질색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그러세요. 그냥 세례명만 불러주세요. 이렇게 되더라구요. 세례명은 대부분 서양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성인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그럼 카츄샤 같은 경우는 뭐냐, 여러분이 괴로워하시는 <갈매기>의 주인공, 콘스탄틴, 코스쨔라고 부르죠. 이게 이 애칭이에요. 콘스탄틴 트레플레프에서 트레플레프가 성이구요. 니나 자레예치나야에서는 니나가 이름인데, 니나 자체가 애칭입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나스타샤, 나타샤 … 이렇게 점점 짧아지는 거죠. 그리고 애칭이 있고 비칭이 있어요. 약간 하대해서 부르는 건데요. 예까쩨리나 여제 아시죠? 예까쩨리나가 풀네임 세례명이고 까쩨리나, 까쨔 까지 줄어듭니다. 그리고는 카츄샤, 카첸까, 까찌까 이런 식으로 비칭 라인으로 쭉 가요.
임: 그럼 짧아지는 게 점점 ...
신: 격의가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 몇 십 명 처럼 보이죠. 한 사람인데.
임: 그렇다면은 《갈매기》에서 콘스탄틴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고, 꼬스쨔라고 부르기도 하고 ...
신: 어머니는 꼬스쨔라고 부르죠.
임: 부르는 방식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신: 그렇죠. 우리는 《부활》에 나오는 그 인물을 카츄샤라고 기억하잖아요? 그건 그 인물의 신분이 낮다는 뜻이에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여주인공인데, “까쩨리나 이바노브나가 안에 계신가요?” 이렇게 물을 때 어감을 아시겠죠?
우리로 치면 존댓말에 해당하는, 하인들이 들어와서 “까쩨리나 이바노브나, 누가 오셨어요.” 이 정도의 어감인거죠.
임: 보통 공연할 때 보면, 이름이 너무 어려우니까 다 자르고 하나로 통일해서 사용하는데, 그걸 잘못 선택하게 되면, 이런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들었을 때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군요?
신: 그렇죠. 줄이는 건 좋은데, 원래 뜻이 무엇인지는 알고 줄이는 게 좋겠죠.
임: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신: 이것만 넘어 오시면 재미있는 게 많은데 ...
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아마도 이 문제 때문에 중간에 덮는 분들 많을 거에요.
신: 삼분의 일쯤에서 거의 낙오하시죠.


임: 마지막 질문은, 현재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로서 공연을 준비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준비 중인 공연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신: 지금 번역본에 수록된 작품 중 마지막에 《두 형제》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메인 캐릭터는 다섯 명, 하인 한명 해서 배우 여섯 명으로 하는 소극장 작품입니다. 내용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첫사랑, 남편, 불륜남이 한 여자를 놓고 싸운다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첫사랑과 불륜남은 형제지간입니다. 이 두 사람이 ‘두 형제’구요. 이 형제의 아버지, 뒷목 잡으시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거의 아침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 이상의, 영원한 막장이 연출될 거구요. 근데 배우들하고 작업해보니 배우들이 “이건 내 얘기다. 난 이 역할은 정말 해봐야 겠다. 나 그거 뭔지 알아.” 이래서 연습실 상황은 거의 난장판입니다.
임: 이걸 안단 말이에요?
신: 저는 모르겠는데 이 친구들은 알겠다네요. 이 작품을 저희 극단의 첫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구요. 첫 작업으로는 작년 겨울에 라디오 드라마를 한 편 같이 녹음했습니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연기 톤을 서로 맞춰가는 상황입니다. 연출 컨셉은 현대적인 ‘당구장’입니다. 당구장에서 큐를 들고 벌이는 다섯 남녀의 자존심 싸움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공감하시는 분 많을 거 같아요.
임: 언제쯤 공연을 생각하고 계신지?
신: 올해 하반기나 연말, 늦어지면 내년 초까지도 보고 있는데요. 그전에 여름엔 현대무용단하고의 협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작품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희곡인데요. 젊은 연출가 메이에르홀드에게 헌정되고 주연과 연출을 겸했던, 굉장히 과격한 실험극입니다. 저는 컨템포러리 댄스와 접점이 있다고 해서, 어떤 정형화된 춤이 아니라 신체의 자연적인 컨택, 접촉 즉흥(Contact Improvisation)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그런 기법을 써서 한 안무가와 공동연출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런 건 현대 무용이나 현대 연출의 실험적인 작업으로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연일정이 구체적으로 잡히면 그때 다시 한 번 인터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 그리고 러시아 문학 입문 원포인트 강의까지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가려진 것을 보기: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

임승태

죽음의 시선

연극 <노란 벽지>에는 샬롯 퍼킨스 길만의 원작 소설에 본래 없던 시 한편이 삽입되어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방식은 다분히 극적이고 징후적이다. 시를 기억하지 못하던 주인공이 점차 기억을 회복함으로써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2a 30),  이 발견(아나그노리시스)은 안나의 운명을 바꾸는 급전(페리페테이아)을 동반하고 있다. 안나가 처한 상태(신경쇠약)와 원작으로부터 달라진 이 연극만의 결말(안나의 자살)을 놓고 보면, 시에 대한 망각이 중요한 징후이자 복선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사건의 결과를 놓고 보면 “죽음death”이란 마지막 시어는 신경쇠약을 앓는 안나가 이 시를 망각했던 그리고 애써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고자 했던 이유가 된다. 원작 소설에서 ‘나’가 벽지 뒤의 여인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종국에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준다면, 연출가는 여기에 시를 망각했다가 다시 발견하는 흐름을 겹쳐 놓음으로써 그 여인이 주인공 자신의 죽음 충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안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극적 아이러니를 확보하고, 이후 그것을 애써 기억하려는 안나의 모습에서 불길한 결말이 다가오는 서스펜스를 경험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소설이 연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제목을 대신하는 첫 행을 의식한 듯, “한줄기 빛”을 제공한다.

한편 시의 마지막 행에는 원작 소설과 이 연극을 매개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시어가 자리하고 있다. 안나가 망각하고 있던 “시선 (the) look”이라는 단어는 시를 다시 기억해내기 전에 이미 벽지 뒤의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혹은 벽지의 문양으로부터 그 죽음의 사자를 읽어내는 망상의 형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초점을 잃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망자의 시선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 마지막 구절로부터 이 연극이 라이브 카메라, 즉 시선을 조작하고 조정하는 행위를 이끌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수의 역설

2년 전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에서 케이티 미첼의 <줄리 아씨>를 보고 나서 나는 블로그에다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연된다면 큰 호응이 기대”된다고 감상을 남겼었다.  케이티 미첼의 또 다른 작품이 올 해 SPAF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예매를 서둘렀지만, 티켓을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한편에 자리한 걱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가 다시 봐도 흥미로울까? <줄리 아씨>를 보고 나올 때 옆에 있던 한 관객이 했던 말—“이런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 I’ve never seen this before.”—이 나에게도 적절한 반응이었다면, 이제 이런 걸 ‘다시’ 보게 되는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제목과 이야기가 바뀌었을 뿐 같은 형식이 되풀이될 위험성이 농후한 연극을 기다리던 나에겐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극장이란 우리말 단어가 여전히 연극 공연장과 영화관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이 둘의 병존과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줄리 아씨>도 <노란 벽지>도 무대가 크게 상하로 구분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매우 사실적인 세트가 펼쳐지는 아래쪽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 공간이자 촬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크린은 바로 그 무대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복수의 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무대에서 장면을 촬영하면 무대 밖 어디에선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이어 붙여 스크린에 영사함으로써 관객들은 한 편의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촬영 현장과 그 결과물을 위 아래로 동시에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TV 화면 한 켠에서 자주 목격하는 “LIVE” 표식 같은 역할을 하며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더불어 음향 기사는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지도록 필요한 소리를 만들어 덧입힌다. 영화의 효과음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러한 작업이 관객의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흥미가 더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것과 매개화된 것들이 경합을 벌인다. 이 광경은 그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관객은 마치 대위법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이, 아니면 피카소의 입체적 초상화를 볼 때와 같이, 복수의 채널로부터 전달되는 시청각의 자극에 대해 시종일관 선택하고 종합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공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기 위해서는 무대를 편안하게 관조하는 대신 순간순간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눈과 머리를 분주히 굴려야 한다.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 그리고 그것을 교차 편집하는 조정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그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경거리(show)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케이티 미첼이 라이브 시네마 쇼를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연극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구성원의 실수나 기계 오작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라이브 카메라가 사용되는 많은 공연에서 기계 오작동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미스터리는 학교나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빈번히 발생하는 일종의 도시 괴담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 위의 실수에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투사하게 되면서 긴장이 증폭된다. 그런데 이러한 결함들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 이외의 스태프들과 더불어,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물론 촬영상의 실수나 오작동이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그 실수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결점 같은 것이었다면,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마치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큰 가산점을 얻는 트리플 악셀로 승부하려는 어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첫날 공연에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찰나였지만 카메라 스태프 한 사람이 맞은편 카메라의 앵글 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순간 관객들은 마치 안나가 벽지 뒤에서 여자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한 남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공연을 곱씹을수록 이 순간이 하나의 망상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하는 스태프들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 생각하여 지각을 거슬러 ‘없는 것처럼’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에서는 마치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이 물화된 것인 양 그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얻기 위해선 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스크린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가부키의 구로코(黑子)처럼 그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배우와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우리의 습관같이 스크린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돌발 상황이 폭로하는 것은 연극과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관습이라는 필터를 거쳐 여과된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카메라 스태프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은 앞서 그 스케이트 선수가 점프에서 실패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훈련된, 혹은 관습에 무뎌진, 관객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이런 실수를 그저 없는 것처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물론 제작진의 연습 부족을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탈은폐된 이 연극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설령 공연 중에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연을 보는 것이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실수를 기다리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줄리 아씨>를 볼 때, 나는 더 이상 발표 당시의 긴장감을 기대할 수 없는 스트린드베리의 텍스트에서보다 무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영상의 매끄러운 흐름이 혹여 실수나 돌발 사고로 끊어지진 않을까를 긴장하며 보아야 했다. 드라마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이 서스펜스에 주목함으로써 나는 연극을 보는 습관적 태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케이티 미첼의 카메라는 무대 위에 분명히 있거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습적으로 없거나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도 우발적으로도 드러낸다. 프로이트를 따라 사소한 말 실수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을 찾아낼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연극의 공연에서 발생하는 실수로부터 그 저변에 놓여 있는 문제적 연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려서 보여줌: 스크린의 이중성

<노란 벽지>는 분명 <줄리 아씨>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노란 벽지>에서 카메라와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전작에 비해 더욱 진전된 연출가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줄리 아씨>에서는 다섯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배우의 앞, 뒤, 옆, 위 등 배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여러 대의 카메라가 배우를 둘러싸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역 배우와 둘 이상의 부분—뒷 모습이나 손만 비치는 식의—대역이 순차적으로 촬영되고 몽타주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케이티 미첼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매끄러운 영상이 사실은 몸을 조각조각 분할하고 다시 재조합한 분절의 결과임을 폭로함으로써 미디어가 사실임직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하는 조작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노란 벽지>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기에 초점거리를 달리한 두 대의 카메라가 나란히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하여 서로 다른 화각의 영상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 추가된다. 카메라 사이의 각도가 좁혀짐으로써 마치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더 많은 분절이 일어나고, 그만큼 인물의 모습은 더 섬세하게 포착된다. 카메라의 병치는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운동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에 대한 유비를 심화시킨다.

공연 중 간헐적으로 무대 전면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은 <줄리 아씨>에선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전술이다. 이 기간 동안 관객은 가려진 무대를 오직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연극사를 통틀어 이토록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제4의 벽을 관객 앞에 노출시킨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고지식한 제4의 벽은 카메라가 객석 방향을 촬영하기 위함과 같은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욕실이나 계단과 같이 처음부터 오직 스크린을 통해서만 확인해야 하는 공간도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관객을 문자 그대로 벽 뒤에 배치함으로써 벽지 속 그녀가 관객에 대한 은유임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이라면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할 장난을 연출가는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까? 관객을 적잖이 성가시게 만드는 이 장치가 노리는 것은 관객이 시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이화(異化) 효과임이 분명하다. 물론 관객 앞에 벽이 가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조금만 들면 그 벽 바로 위에 걸려 있는 스크린을 통해 벽 뒤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벽은 여전히 있지만 없는 듯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이중성은 스크린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즉 무언가를 보여주는 막이면서 동시에 가리기 위한 막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스크린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이 간편함 때문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촬영자가 프레임에 담고 편집자가 취사선택한 욕망의 몽타주란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선 만들어진 영상을 사실로 곧잘 믿어버린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객의 시선이 미디어를 지배하는 권력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케이티 미첼은 일시적으로 무대를 가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의 불편과 답답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그 잠깐이 불편하다면 미디어에 완전히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의 삶 또한 진실로부터 얼마나 차단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닫힌 본무대가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으로 유도한다고 해서 관객의 시선이 그곳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일방성에 저항하고자 그 동안 열려 있던 본무대 때문에 충분히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주변의 작은 부스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의 작은 부스에서는 한 여성 배우가 내레이터로서 목소리 연기를 펼치고 있고, 우측에는 음향 효과를 만들기 위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음향 장치가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 있었던 <줄리 아씨>에서 음향 담당자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제공했는데, 그에 비해 <노란 벽지>에서는 부스가 이러한 기회를 차단시킨다. 이런 점에선 부스 또한 음향 기사와 관객 사이에 둘러쳐진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보다 정밀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부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내레이터나 음향 기사가 부스 안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공연을 그 출발선에서부터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음향 기사가 라이브로 소리를 만들고 있긴 한 걸까? 그냥 소리를 만드는 시늉만 하고, 실제 소리는 이미 녹음된 것을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현장에서 만드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저 소리가 사실은 그렇게 믿도록 조작된 소리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이 연극은 라이브 공연과 그것을 녹화하고 편집한 영상을 동시에 보게 함으로써 관극 행위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인 동시성과 현장성이 주는 쾌감이 점차 사라질 때, 그 쾌감을 이어가는 동력이 불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의 의지였음 또한 분명해 진다.

스크린 너머로

나는 위에서 일부러 ‘연극’이란 말을 골라 썼다. 왜냐하면 이 공연을 연극이라 부르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이브) 카메라의 은유는 그 비판의 대상과 수위가 더욱 강력하고 통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러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메시지는 현란한 장치 없이 그저 “가난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내용은 없이 형식에만 집착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형식이 돋보이면 내용을 문제삼고 내용이 뛰어날 땐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비평가가 갖춰야 할 객관적 시각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반연극적 편견에 맞서 연극을 옹호하면서도,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내용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1450b 17-8).  케이티 미첼의 연극은 분명히 공연이나 배우 없이는 산출될 수 없는 어떤 효과에 대한 실험이다. 만약 <노란 벽지>의 문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간단히 “스파크 노트”의 친절한 해설을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의 연극화는 그 자체가 형식의 실험이며, 연극에서 소설을 이용하는 것은 내용을 빌어 형식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적어도 소설을 전유하는 연극에서 형식에 매료되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선에서도 불만이 들려온다. 이 또한 연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조롱하는 듯한 모습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작품이 다루는 많은 문제들이 연극성에 대해 더욱 깊은 성찰로 이끌지 연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케이티 미첼의 잡종적 시도로부터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 그 어디에도 결코 침해 받아선 안 되는 경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적 연극이 혹시라도 불쾌했다면 그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연극적 영화 <도그 빌>을 보면서 느낀 쾌감과 한 쌍을 이루는 것 아닐까. 물론 기술이란 언제나 자본의 손을 놓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세한 연극이 거대한 영화와 접목되는 것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하지만 연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연극의 잠재력과 범위를 축소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벽지의 색이 하필 노란색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선 몰라도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것은 작가나 연출가 또는 축제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노란 벽지>가 2014년의 대한민국에 초대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돌발적인, 그렇지만 강력한, 의미이다. 전국이 노란 색으로 도배된 세 계절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안나에게 처방된 휴식 요법, 즉 “가만히 있기”가 결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치명적 망상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일으킨 이 19세기 처방을 고집하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찾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방법이 그 옛날 전쟁 통에 서울을 몰래 벗어난 대통령에 의해, 그리고 가라앉는 배를 빠져나가는 선장과 선원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숙청당했고, 세월호에 남아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과 학생들은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현실의 카메라와 스크린이 얼마나 투명하게 가려진 무대를 중계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60년 전에 라디오는 서울을 빠져나간 대통령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시민들의 지식과 의식이 성숙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미디어가 권력자의 욕망을 몽타주하는 기술도 교묘해졌다. 기성 매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SNS나 외신을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권력자들의 욕망이 경합하는 모습을 더 자주 만날 뿐이다. 이 연극에서 무대 전면이 통째로 덮이고 스크린만 쳐다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을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 나 혼자만의 지나친 상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SPAF에서 초청한 해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작품들을 통해 오늘 이 시점의 한국연극이 나가야 할 바를 점검하고 반성하기 위함에 있다. 지난 여름 적지 않은 연극인들도 시민의 일원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했었다. 연극인들의 참여가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 극장 밖으로 나왔던 연극인들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연극제가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극장 앞에 가로 놓인 거대한 가림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 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옳다면, 지금 스크린으로 가린 그 어떤 것도 결국은 다른 스크린을 찾아 나타나게 되어 있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한 때이다. 애도를 충분히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오백여 명의 학부모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햄릿>이라도 하고, 스크린 뒤에서 곪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이 혁명적이라면 그것은 나라를 뒤집어 엎기를 기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한 인간이 바라보는 방식과 그리하여 사유하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는 <노란 벽지>라는 밖에서 온 연극 하나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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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회 젊은비평가상 공모 관계로 게재가 늦어졌습니다. 후보작으로 거론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를 드립니다.
** 드라마인으로 젊은비평가상 공모 지원작을 보내주시면 게재해드립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이용해주세요.

2014년 9월 5일 금요일

인터렉티브와 미래의 연극

2014 두산아트랩 리뷰 8
에스티

약 한 세기전 전기 조명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 아돌프 아피아는 장차 조명이 연극 무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지 내다보았다: "라이트는 거의 기적적인 유연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밝기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으며, 팔레트처럼 색깔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것은 음영을 창조할 수도 있고, 음악이 그러는 것처럼 공간에 진동의 조화를 퍼뜨릴 수 있다. 우리는 조명에서 공간의 표현력 전부를 추출할 수 있다. 물론 그때 공간은 연기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1954, 파비스 <연극학 사전>에서 재인용). 다른 곳에서도 아피아는 조명의 "무한히 크고 다양한 효과"를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전기 조명은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아는 무대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미래의 연극을 구상했고, 크레이그 역시 무대 위에서의 이미지, 동작, 리듬 등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연출가에 의해 총체성을 획득한 새로운 예술을 기대했다. 그들의 시대에 그것은 기대에 불과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미래가 우리에게는 이미 현실로 자리하고 있다.

카입/황정은/이경화가 함께 만든 "타토와 토"를 보면서 우리 역시 아피아나 크레이그처럼 미래의 연극을 꿈꾸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이번 공연 제목 앞에 "다원"이란 레테르가 붙어야 한다는 건 아직 아피아/크레이그의 미래 조차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무대 예술이 다원적 요소들의 종합 혹은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다원연극"이란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다원이란 접두어는 여전히 연극이 텍스트와 배우의 연기 중심의 예술임을 방증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에서 시도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는 미래 연극에서 시각적 요소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지 내다보게 해주는 기회로는 충분하다. 공연 중간에 하드 웨어 문제로 잠시 중단 되었던 것도 불편하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말끔한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연의 일부같이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 같은 공간에서 터져버린 조명기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

우리가 좀더 나이가 든 미래에 보게 될 연극에서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현란한 CGI(computer-generated imagery)가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영화의 제작 환경이 연극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방식과는 별개로 배우가 실제로 연기하는 환경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스틸컷으로 보게되는 영화 제작 현장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최종적으로 보게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배경은 온통 초록색 스크린 (크리스토퍼 리브가 수퍼맨이던 시절만 해도 파란색이었는데, 헐크가 만들어지는 지금은 초록색이다) 으로 뒤덮여 있고, 배우들은 텅 빈 공간에서 앞으로 후반작업에서 채워질 그 영상들을 상상하며 연기를 펼친다. 이순신 장군에게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고 하나, 명량은 단 세 척의 배만 제작한 다음 복사하기와 붙여넣기--훨씬 더 복잡한 실제 작업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로 채워넣었다고 한다. 10여년 전에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 빌>이 나왔을 때, 연극 공부를 갓 시작한 나로서는 그 영화가 무척 흥미로웠다. 영화가 마땅히 보여줘야 할 사실적 일루젼을 취하지 않고 믿기로 하기 make-believe 의 방식으로 그냥 거기 집이 있는 걸로 한다, 또는 무시무시한 셰퍼트가 짖고 있는 걸로 한다는 식으로 장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 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촬영된 다음 후반 작업이란 걸 하면서 일루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실같은 CGI를 보는 것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 장면이 촬영되던 순간의 연극적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바로 그 촬영장의 상황이 그대로 무대로 옮겨져 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무대 위에 그린스크린을 설치해 두고 배우들이 연기를 펼친다. 관객들은 아무 것도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을 온전히 즐긴다.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 혹은 돌아가는 길에 유튜브로 CGI가 채워진 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난 지금 2100년대를 얘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20세기 초기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시도된 키노드라마가 기술의 발달로 요즘 재활성화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만큼 무대연극과 영상의 접목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도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인터렉티브 연극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좀더 잘 알려진 텍스트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텍스트가 낯설 수록 관객은 텍스트에 주의하게 되고 결국 텍스트가 주도하는 연극이 될 수밖에 없다. 제작하는 입장에서야 수개월간 그 텍스트가 익숙해졌겠지만 처음 보는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인 '나머지 요소'들로 전락한다. 무대 위에서 오로라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하지만 텍스트가 오로라를 반복적으로 선창하고 ("오로라, 라, 라, 라 ...") 그것을 비쥬얼로 보여준다면, 그러한 인터렉티브는 잠시 신기할지언정 그동안 재현적인 연극에서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건투를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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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저의 2014 두산아트랩 리뷰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해주신 예술가 여러분과 독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4년 8월 31일 일요일

모호, 이런 꿈을 꾸었다.

by 에스티

"몽유병환자처럼 잠시 동안 걷는 작가의 경로를 따라온다면 아마도 꿈의 뚜렷한 혼잡함과 삶의 환경들의 다루기 불가능한 뒤섞임의 유사점을 발견할 것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꿈 연극> 작가의 말에서 (조성관, 홍재범 역, 연극과인간, p.7)

조명기, 사다리, 청소기. 본 공연이 시작되기전 오프닝 매치가 한 차례 있었다. 공연 시작 전 갑자기 뻥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기 하나가 터졌고, 램프 파편이 무대에 흩어졌다. 관객들은 깜짝 놀랐고 무대 위에서 졸면서 꿈을 이야기해주려고 기다리던 배우도 하마터면 부상을 입을 뻔 했다. 잠시 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배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남윤일 PD가 곧 설명한 것처럼, 공연이 아니라 사고였다. 공연 시작은 잠시 지연되고 무대 위엔 커다란 사다리와 청소기가 나타났다. 이런 돌발 상황이 배우나 관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측면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극장의 생얼을 구경하는 것도 관객으로선 색다른 재미다. 다들 무대의 fantasy를 기대하면서도, 환상이 제거된 민낯을 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원작인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도, 윤성호 전진모 두 작/연출가의 이전 작품도 접해본 적없고, 심지어 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부분 낯설다. 나는 첫대면에서 말을 잘하는 편은 못된다. 그럼에도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심지어 <몽십야>도 인터넷에서 찾아 급하게 읽었다. 이 공연의 제목이자 첫 대사이기도 한 "이런 꿈을 꾸었다."는 소설을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거칠게 나마 낭독 공연의 형식과 장면의 극화가 접목된 형식으로 난 받아들였는데, 솔직히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우선 이 공연은 나보다 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모델 관객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원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제인 "꿈"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졸립다면' 그건 그만큼 꿈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객석에 앉아서 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꿈 이야기인데 너무 말똥말똥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짜 꿈 같은 연극이라면 일단 졸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공연이 관객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걸 무의식이 활동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지금 내 기분은 어제밤 어떤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 갑갑해 하는 그런 심정과도 닮아 있다. 어쩌면 다가가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른지도 모르겠다. 소설 원작의 에피소드나 그걸 가져온 공연에서 서술되는 꿈들은 흥미로운 게 많았다. 다만 무대에서 서술자를 통해 꿈이 이야기될 때 그 이야기는 관객을 직접 청자로 놓고 이야기 되기 보다는 어딘가 비껴 있다. (배우가 앉아 있는 의자의 각도가 이미 45도로 틀어져 있다.) 객석에 앉은 나는 그 이야기를 훔쳐 듣게 된다. 스토리텔링을 훔쳐 듣고 있는 느낌이랄까. 화자는 육신을 입었으되 청자는 명확하지 않다. 1인칭 화자와 eye contact이 되지 않으니 (소설에서는 독자가 문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우둔한 내 머리는 이내 집중을 놓쳐 버린다. 연출이 이번 공연에서 의도한 것은 생생한 꿈이 아니라 '아스라한' 꿈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느낀 것도 이 아스라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