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뒹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뒹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어떤 자기반영을 읽기

박종주

그런 사람들이 있다. 시인에 관한 시를 쓰고, 영화감독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가수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서투른 상상으로 남의 삶을, 자신이 모르는 삶을 지어내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예술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비평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바른 일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하루를 다룬 창작 집단 뒹굴의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가 그런 작업에 속한다.
배경은 어느 반지하 작업실, 여섯 명의 젊은 예술가 ―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사진가, 연극배우, 웹툰 작가, 그래피티 화가, 개념미술 퍼포머, (のう[能]) 배우 ― 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래피티 화가는 물을 담은 스프레이로 벽화를 그리고 있고 퍼포머는 기이한 체위들로 몸을 풀고 있다. 소파에 가로 누운 배우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래피티 화가의 첫 획이 말라 사라질 즈음, 극이 시작된다.
시작은 역시 가난이다. 사진가가 사들고 온 귤, 모두들 오랜만에 먹는 과일이다. 춤이 나올 만큼 기쁜 일이다. 오천 원짜리를 흥정해 삼천 원에 사온 참이다. 주스로는 비타민 공급이 충분치 않더라며, 이들은 신이 나서 귤을 깐다.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그래피티 화가에게 온 문자 한 통. 멋대로 여섯 명 전원의 이름을 적어 넣은 젊은 예술가 지원 사업의 합격 통보다. 잠시 모두들 들뜨지만, 지원금은 고작 이십만 원. 각자에게 필요한 것 중 최소한 ― 물론 그 최소한이란 각자의 예술가적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최소한이다 ― 만을 구비하려 해도 모자란 액수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요새의 트렌드를 좇아 시행된 사업인 융복합 예술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업을 구상할 것, 그리고 이십만 원이라는 제한 내에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예산을 확보할 것. 이 두 가지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극의 전부를 이룬다. 뒹굴의 이 작업 또한 모 기관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므로, 아마도 익숙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십만 원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 작가들의 크고 작은 소망은 쓴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미치를 설치하는 데에 오만 원이 필요하다.[1] 사진가는 시간의 물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순 장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쓰고 싶다.[2] 무위의 퍼포먼스를 하려는,[3] 예술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퍼포머는 자신의 개념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름값’을 필요로 한다. 수작업한 그림을 스캔해 작품을 만들려는 웹툰 작가는 모나미 리미티드 에디션 볼펜 세트를, 자신의 몸만을 쓰는 연극배우는 자신이 먹을 초밥을 필요로 한다. 평소엔 수돗물로 그림을 그리던 그래피티 화가는 이번만큼은 에비앙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리수와 프랑스제 고급 생수는 느낌이 다르니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소재로 삼는 것을 자기반영이라고 칭한다면, 이 자기반영에서는 두 가지의 거울상이 포함된다. 하나는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작가가 처한 사회적 현실이다.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료들을 얻고자 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업의 최소한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욕심이,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금 없이는 작업을 하기 조차 힘든 ― 결국 지원 제도에 종속되어 가는 예술가들의 현실이 비추어진다. 전자가 강조된다면 자아비판이 될 것이고 후자가 강조된다면 사회비판이 될 것이다. 그 둘이 분리가능하다면 말이다.
뒹굴이 무엇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극은 뜬금없는 춤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유머들로 파편화된다. 작가들의 욕망만큼이나, 그들의 구상만큼이나, 극은 파편적이다. 사회비판을 무거운 일이라고 한다면 ― 꼭 사회비판이 무겁고 자아비판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 이 가벼운 블랙코미디는 아마도 자아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없이 표면만의 존중을 내세우는, 끝없이 싸우면서도 균열을 견디지 못하는,[4]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며 좋아하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마 ‘예술계’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아비판인 동시에 사회비판일 것이다. 굳이 작업실을 공유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조합이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예술계의 축소판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극은 자립적인 생태계를 구성하지도,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하지도 못하는 예술계의 실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5] 이렇게 자기비하적인 에피소드들을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다는, 어떤 자만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가들의 태도와 (예술을 대하는) 사회의 현실 모두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비판하고 있지만 초점을 잡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자기반영이라곤 해도 이것이 구체적인 개인들로서의 자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집단으로서의 예술가들을 반영하는 것인지 관객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균열의 끝에 이 작가들은 허위의 결과 보고서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를 한다. 공간을 갖고 있으니 공간을 보는 일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로 한다. 결단을 내린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의 뒤에 서서, 관객들과 함께 무대를 바라본다. 아니,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틀린 말일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무언가 할지도 모를 배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배우들의 부재라는 무대의 상황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이 두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무대는 어두워진다.



[1]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극중에서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는 가로세로 3미터 가량의 독립된 공간과 그곳으로의 입장로 하나미치(はなみち[花道])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미치는 일본의 또 다른 전통극 가부키(かぶき[歌舞伎])의 무대 요소 중 하나로, 객석 사이로 길게 뻗은 통로를 가리킨다. “꽃길”이라는 뜻 그대로, 처음에는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로 나아가 꽃을 받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뒹굴의 얕은 지식이 드러나는 대목인지 하이개그인지는 불분명하다.
[2] 연습에 열 장, 작업에 쉰 장이 필요하다. 쉰 장 중 일부는 관객에게 배포되고 일부는 전시될 것이다.
[3] 다른 성원들은 이를 무이의 퍼포먼스, 무의의 퍼포먼스 등으로 잘못 알아듣는다. 퍼포머의 설명에 따르면 무위의 퍼포먼스란 부재의 현전을 내어 보이는 퍼포먼스이며, 다른 이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리는 일이다. 무위(無爲)에 대해서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참고하라.
[4] “얘들아,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5] 이는 뒹굴의 전작 〈바로 그 얘기〉가 연극계의 관행을 비판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어느 재판의 기록: 뒹굴, 《바로 그 얘기》

글_박종주

1621번째 재판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 뒹굴’의 〈바로 그 얘기〉는 지구 멸망 후 새 행성에 터를 잡은 ‘신인류’들의 재판을 다룬다. 이들은 이를 테면 ‘구인류’가 지구 멸망을 막을 수는 있지 않았을지를, 그 개개인들이 무언가 할 수 있지는 않았을지를 고민한다. 오늘의 피고는 바로 창작에 몰두했던 ― 그러나 지구 멸망의 전조가 된 사건을 주제로 삼았던 ― 한 예술가, 그것도 공연예술가이다. 그리 급한 재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재판은 상아탑 속에서 현실을 방관했던 대학원생 신 모씨의 재판에 이어, 1621번째로 열리는 재판이다.

지구의 위기를 마주한 시점, 작가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작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바로 그 얘기〉는 묻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의재판’임을 유의해야 한다. 피고 ― 어쩌면 예술가답게,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바로 그 예술가 ― 와 판사, 검사는 역할을 바꾸어 가며 서로를 비난하고 또 옹호한다. 연극적으로 진행되는 재판,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 또한 연극의 일부일 뿐이다. 판결을 판결답게 만들고자 한다면, 연극을 현실과 뒤섞어야 하리라.

뒤섞기 위해, 〈그때 그 얘기〉는 아우구스투 보아우(Augusto Boal)가 제한한 ‘포럼 연극’의 형식을 취한다. 관객들은 배심원이 된다. 각자는 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한편 ‘평결 양식’이라는 제목의 설문지를 작성하고 유죄 혹은 무죄에 투표한다. 지금 현실 어딘가에서 또한 위기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면, 배심원들을 설득하려 애쓰는 피고(들)과 검사(들)은 객석을 떠난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가를, 적어도 공연예술가를 심판할 수 있을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피고, 밍기적


피고는 밍 씨 성을 가진 ― 듣기에 따라 민 씨로도 들리는 ― 기적이라는 이름의 인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으키는 작은 기적”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 자리가 작업실인지 극장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검사에 따르면 그는 지구를 멸망으로 이끈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는 시점,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겨우 멸망 직전에야, 이 주에 걸쳐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올렸을 뿐이다.

그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비추는 횃불이자 희망”이며, 그런 예술을 다루는 예술가가 작업실에 틀어박힌 것은 현실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예술가의 역할, 예술가의 임무, 예술가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침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창작”한 작품으로 그는 두 주 동안 사백 명의 관객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관객들이 눈물 흘리게 했다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검사는 묻는다. 눈물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새로운 관점을 열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를. 예술가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공연 예술의 특성상 그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고 둘러 댈 뿐이다. “잘 봤다”, “이런 시기에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루어 주어 고맙다”는 말들을 들었다고 답해 보지만 검사는 믿지 않는다. 인사치레일 뿐은 아니냐고 되묻는다. 연극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이 예술가는 법정에서 갈수록 작아진다. 예술이 어떤 가상인 한, 그러니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도 직접 행동은 아닌 한, 검사가 요구하는 현실적인 효과를 증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극이라는 닫힌 세계


예술가가 겨우 생각해 내는 항변 하나는 자신의 작업이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마뜩찮은 대답인 모양이다. 기록 자체라면 영상이나 사진이 더 잘 해낸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일이라면 대규모 관객을 대하는 영화가 더 용이해 보인다. 정말로 어떤 효과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연극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윤동주의 시집처럼 다시 읽히지 못한다. 영상을 통해 남긴다고는 해도 이는 더 이상 연극이 아니다. 연극이란 그저 찰나의 가상일뿐이다.

그 가상이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관객을 그 세계에 들임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을 ‘연습’할 수 있게 한다면, 아무리 찰나의 가상이라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공연이 끝나면 관객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작가가 관객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 연극의 특성상 그런 효과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확인할 수 없는 이 희망이, 연극을 부여잡을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이다. 연극은 정말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말이다. 피고의 말대로 작가는 등장인물의 세세한 습관 하나하나까지도 창조해 낸다. 한 인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독립적인 어떤 세계인가, 단순히 이 세계의 보잘것없는 한 구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아닌가를 여전히 물을 수 있다. 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고 할 때조차, 그것이 망각되지 않는,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그저 그것을 소비하는, 현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관객들


12월 11일 오후 두 시, 인천의 한 공가(空家)에 모인 배심원들은 호의적이었다. 재생산이 용이한 영화를 연극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복되어 피로감을 주는 뉴스와 달리 공연을 통해 와 닿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 배심원은 주장한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 또 다른 배심원 또한 호의적이다. 개인이 가지는 파급력 자체에 이미 한계가 있기에, ‘의도’를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너무 큰 파장을, 한 예술가에게 직접 세계의 파국을 막기를 바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그는 말한다. 스스로를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세 번째 배심원은 더더욱 적극적이다. 예술가가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예술가가 누구보다도 더 그 사건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예술가의 존재, 그의 작업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고 그는 평한다.

첫 번째 배심원은 덧붙였다. 파급력이 작지조차 않은 것이라고. 마음을 움직이는 연극을 사람은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주변인을 동반해 몇 번이고 보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연극을 보고서 움직인 마음이 겨우 다시 극장을 찾는 데에 쓰일 뿐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지를 묻는 이는 없었다. 극장 밖에서 관객이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배심원들은 아무래도, 닫힌 세계로서의 연극을 그 자체로 지지하고 있는 듯했다. 피고는 맞장구치며 반기지 않았다. 검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관객들 ― 네 명이었다 ― 은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고,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재판정에 따르면 온라인 투표가 또한 이어질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과 온라인 투표 결과를 합산해 최종적인 평이 내려진다. 1622번째 재판에서, 그 결과는 발표될 것이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나고, 이제 다시 물을 차례가 왔다. 연극에 대한 재판이라는 이 연극이 하나의 세계로서 무엇을 창조해 냈는지, 관객들에게 무엇을 제시해 냈는지를 말이다. “시간 예술”인 연극의 특성상, 이 연극 또한 정해진 시간에 끝나야 했고, 그래서(인지) 배심원들과 검사는 추가적인 토론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예술가의 편이라는 것 이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다음번의 재판은 어쩌면, 이 ‘뒹굴’이라는 집단을 피고로 삼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연극계라는 닫힌 세계


이 날 채택되지 않은 증거, 토의되지 않은 주제가 한 가지 있다. 피고는 자신의 공연이 세계에 미친 영향의 증거로 두 편의 평론을 제시한다. 검사는 그것이 피고의 지인들이 쓴 것임을 지적한다. 피고는 좁고 좁은 연극계의 특성상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검사는 그렇다면 그것이 연극계의 구조적인 문제는 아니냐고 문제 삼는다. 판사는 연극계의 구조에 대해 논하려면 별도의 재판을 청구하라고 지시한다.

어쩌면 판사가 다른 재판으로 미루었으므로, 검사도 배심원도 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배심원들에게 주어진 숙제가 하나 있다면, 어쩌면 1622번째 재판의 주제가 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일 것이다. 객석의 반나마를 채우는 지인 관객들, 동문수학한 평론가들, 이렇게 서로 아는 사이에 주고받는 호평들 속에서 어떻게 한 공연의 핵심을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텅 빈 호평들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재생산되는 연극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나 또한 피고를 옹호했던 한 명의 배심원으로서 여기에 덧붙여 본다.

거리시위에서 행인을 설득하는 일과 극장에서 관객을 설득하는 일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점에서 거리시위에 나가지 않은 예술가는 무죄다. 그러나 그가 눈물 이상의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정말로 설득을 시도한 것인가 하는, 지금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남는다. 그가 어딘가로 숨어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작업실이라는 골방이 아니라 연극계라는 골방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유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하 공연장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과 자신을 가르고 있던 벽을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세계의 비극을, 한낱 소재로 전락시켜도 아무 비난 않을 사람들 앞에서만, 자신의 공연을 선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
포럼연극 <바로 그 얘기>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 ‘뒹굴’ (성지수, 김정은, 심하경, 진영화, 최희범)
인천문화재단, 바로 그 지원 주최 “바로 그 시장” 참가작
2016.12.11. 오후3시
인천 중구 신포로 15번길 22-1 임대 중인 건물 2층 한켠에서

2016년 10월 5일 수요일

연기, 연극의 경계에 서다: 뒹굴,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이준영

입구에서 논문 표지처럼 생긴 리플렛을 받고 공연장에 들어가면, 별다른 세트가 없는 무대에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한 명의 배우는 자기소개 후 연극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배우가 요가매트를 깔고 몸을 풀기 위한 일련의 동작을 반복한다. 연극에서 강연을 듣는 것이 익숙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특이하거나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에 관한 강연을 듣는 것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둘의 역할이 바뀐다. 몸을 풀던 배우는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강의를 하기 시작하고, 강연을 하던 배우는 자신이 설명하는 동작의 예시를 보여주기 위하여 요가매트 위에서 동작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관객들을 당혹케 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관객들은 강연에서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해 듣는 대신 강연자(를 연기하는 배우)가 강의의 맥락에서 벗어난 부인과의 부정적인 관계, 개인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바닥을 치고 신발을 집어 던지며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마치 돌림노래를 하듯이 한 배우가 요가매트를 차지하면 다른 배우는 자신이 하던 강의를 다시 이어서 시작한다. 다른 배우가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관한 강의를 하는 동안 요가매트 위에 한참동안 누워있던 다른 배우가 일어나 깜빡 잠이 들었다고 말한 후, 연극에 대한 강연을 이어나간다. 이 모든 과정은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전환된다.
만약 실제 강연 도중에 강연자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잠을 잔다면 강연을 듣는 이들은 공포감을 느끼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껴서 그 곳을 떠날 것이다. 강연 도중에 잠을 자는 것, 감정이 격해져서 바닥을 치며 화풀이를 하고 신발을 벗어던지는 등의 행위는 실제 강연 도중엔 용납될 수가 없다. 하지만 같은 행위를 해도 우리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안심한 채로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연극 안에서라면 강연자라는 본분에서 벗어나 넘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연자’로서의 연기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그저 ‘분을 이기지 못하는 체’하는 연기를 하는 상태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해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전한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극이 정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던 연출자가 등장하여 배우들의 강연자 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 연출자가 코멘트를 하는 상황을 보면서 관객은 두 사람의 강의와 연극을 위한 몸풀기 동작 전체가 연기였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비판의 내용은 듣는 관객들 또한 수긍할 만하며, 그 내용이 딱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이제 극이 끝났구나’라고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연출가가 간혹 보여주는 약간의 과장된 모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직 극이 진행되는 중인지 의심을 품게 만듦으로써 관객을 다시금 상황 안으로 끌어들이고, 연극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를 다시 와해시킨다.
연출가는 자신의 코멘트를 마친 후 관객에게 코멘트를 요청하는데, 필자는 ‘방금 이 장면도 연극의 일부이냐’고 묻는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이 극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고 말았다. 결국 코멘트 시간이 끝나고 연출가가 마지막 인사를 함으로써 극은 정말로 끝나게 된다. 리플렛에는 배우가 두 명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이 극의 배우가 아님에 확신을 가진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극을 보기 전에 리플렛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이 연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별 의미 없이 써 놓은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이 모든 것이 연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연출가의 행동이 극의 일부인지 의문을 품고 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극의 안과 밖을 계속 나누려고 하는 관객은 완전히 모든 것이 박수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연극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이것이 연극인지 아닌지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연극을 구성하는 암묵적인 요소들을 이용하고, 그것이 정말 ‘연극적’인 것인지에 대해 효과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배우가 정해진 무대 밖으로 나가서 관객석을 이용한다든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극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연극에 대해 공부해 본 바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론으로도 실제로 극을 감상함에 있어서도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익숙하다. 즉, 연극의 경계 밖으로 나가서 보다 많은 요소들을 연극에 포섭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존재한다고 상정된 경계를 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그 경계 위에서만 극을 진행한다. 이 점에 있어, 연극과 관객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단순히 관객이 존재하는 공간을 침범해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관객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을 허무는 것일 수 있으며, 그를 위해서 반드시 배우가 관객석에 들어오거나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오로지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관객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배우들의 강연과 몸 풀기, 감정 표출은 연기인가 아닌가? 이는 중요하지 않다. 두 배우 중에 누가 주인공인가? 연극에 대한 강의를 하는 배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몸을 풀다가 담배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강연을 하는 배우가 더 중요한가? 연출자도 배우인가? 코멘트를 하는 관객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들 또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배우와 관객, 연출자 모두가 연극의 규정성을 파괴하는 일종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 역할들은 단순히 ‘연극 외적인 것들이 연극에 참여한다’는 진부한 주제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이것을 지켜보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연극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눈앞에 아무리 황당한 광경이 펼쳐져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있으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해오지 않았던가? 예술을 감상하다 보면 형식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목격하지만 머릿속에서 예술의 범주가 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순간은 아주 드물다. 이 연극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편의상 글에서는 연극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연구 프로젝트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연구일 수도 있고 연극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상황에 빠진다. 결국 배우들이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 표출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아마추어 연기자의 배우 훈련을 중심으로-
9월 23일 17시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
9월 24일 16시, 19시 연세대학교 푸른샘
제작 ‘뒹굴’, 각색/연출 최희범

9월 23일 공연

9월 24일 공연


2016년 8월 10일 수요일

그래, 어떤, 평화

박종주

일상의 풍경風景들

불이 켜지면, 연극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시작한다. 평범한 작은 사무실. 네 명의 직원이 등장한다. 대리가 두 명, 과장이 한 명, 그리고 인턴이 한 명.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맡은 일을 한다. 대리들은 업무를 진행하고 과장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인턴은 커피를 탄다.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들을 하고 있으므로,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래 명세서에 숫자를 잘못 써 넣거나 커피를 탈 때 물 양을 맞추지 못하는 실수조차 없다. 짜증을 내는 사람조차 없이 즐겁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퇴근을 하고 누군가는 야근을 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시 출근할 것이다. 숫자를 틀리거나 물을 쏟지 않는다면, 내일 하루도 즐거울 것이다.

일상에 풍경風磬 달기

도시 사람들은 바람에 둔하다. 뱃사람들은, 그리고 농부들은 바람에 예민하다. 도시 사람에게 바람은 잠깐의 시원함 혹은 추위일 뿐이지만, 뱃사람들에게 바람은 배를 뒤집는 힘이고 농부들에게 바람은 작물을 쓰러뜨리는 힘이다. 창문을 열어두고 나온 날, 혹은 베란다에서나마 여린 풀잎이 자라는 어느 날, 그런데 강한 바람이 부는 날, 그제야 도시 사람은 바람에 예민해진다. 바람이 자신의 일상을 흔들기 시작하므로.
장면이 바뀌면 네 명의 배우들은 아이들이 되고 사무실은 놀이터가, 집기들은 장난감이 된다. 시장놀이부터 병원놀이까지, 또 한 번 평범한 풍경들이 이어진다. 평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 어떤 삶에서는 이 또한 평범하지만 ― 아이들이 뱉는 모든 문장 뒤에 욕설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바람에 예민해지는 방법이 하나 있다. 풍경風磬을 다는 것이다. 창문가의 무언가가 쓰러지지 않아도, 베란다의 꽃잎이 떨어지지 않아도, 바람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풍경風景에 누가 풍경風磬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종이 울린다. 어떤 욕들 뒤에는 종소리가 따라 붙는다. 여성혐오적인 욕설들에 말이다.
하지만 종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종소리에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자연히 그는 놀이에 섞여 들지 못하고, 아이들 사이에는 분란이 인다. 평범한 일상을 위해 사건은 봉합되어야 한다. 싸움을 벌이는 두 아이 사이에서 나머지 두 아이는 노래를 부르고 화해를 주선한다. 누가 왜 화났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색한 미소, 엉거주춤한 악수라도 좋다. 화해는 화해이므로.
다시 사무실, 일상은 반복된다. 다행히 종은 아직 매달려 있다. 여전히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그러나 그때마다 종이 울린다. 사람들은 조금씩 날카로워 진다. 한 번 알게 된 것을 다시 모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눈에 띈 얼룩이 계속 보이고 한 번 눈치 챈 생채기가 계속 아려 오듯 말이다. 다시 사무실, 일상은 변할 것이다. 머리를 울리는 종소리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해.

누가 병신을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런 극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극의 주제인 여성혐오, 혹은 이른바 남성혐오와 관련된 발화들은 종을 울렸지만 “병신”이라는 말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종은 내 머리 속에서만 울리고 있었고, 나는 머리가 아팠다.
또 하나 신경이 쓰인 것은 ‘아이들’이 재현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동물 모양 모자를 쓰고 나왔다. 배우들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사무실 직원들을 연기할 때와는 다른 발성을 했다. 리플렛에는 “어린이, 상스러운 욕설, 밝고 맑은 종소리 등의 장치를 소재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 하나 가능한 추측이 있다면 욕설과 혐오를 아이들의 순수성과 대비시키는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동물 모자를 씌우는 것이 ― 그리고 나의 추측이 맞다면 또한 아이들의 속성을 순수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긴 머리 가발을 씌우고 치마를 입히는 것과 무엇이 다를지 알 수 없었다.
여성혐오를 다루는 극에 어린이나 장애인의 재현에 관한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 여성, 장애 여성을 생각하면 여성혐오를 생각하면서도 이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어떤평화>
연출 성지수
조연출 심하경
드라마터그 백수향, 이준영
출연 김정은, 조민광, 진영화, 최희범
2016년 7월 7-9일, 연세대학교 푸른샘,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