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30일 수요일

화학작용_선돌편 시리즈와 “일회 공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화학작용’ 선돌편 : 7/9~8/31, 선돌극장> 


 스무 개의 극단(혹은 그룹)이 자생적으로 모여 하나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축제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이 게재가 되는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7/9~8/31, 선돌극장) 이들이 만들고 있는 축제의 이름은 ‘화학작용’이다. 예기치 않은 극단들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기획된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오롯이 우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토너먼트 식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편성된 두 개의 팀이 한 회 차의 공연을 구성하는 식이다. 현재 네 번째의 공연 순서까지 진행이 되어 총 여덟 개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화학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공연들의 프로그래밍은 어쩌면 독립된 기획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획적 컨셉을 축제의 이름으로 내 건 숱한 ‘축제식’ 공연들은 기획이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획이 작품을 압도하여 정작 작품의 색채는 기획의 그늘 아래 퇴색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의 목소리가 기획이라는 테두리선에 부식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비단 축제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의 목소리가 기획의 틀에 의존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숱한 과잉 기획의 공연들 가운데 오히려 기획의 독립성이 부재한 ‘화학작용’ 속 공연들은 솔직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란 조금 우연하고도 계산되지 않은 채로 발생한다. 이것은 으레 축제 혹은 기획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하나로 규정되어 왔던 것들,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전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채 계산되지 않은 스무 개의 공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의 층위가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것은 더욱 축제로 다가온다. 스무 개의 극단이 조금 거칠고 솔직하게 모여 있고, 그럼으로 비로소 ‘모여 있다’라는 느낌,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여 있다’라는 느낌을 실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 축제.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굳이 이 공연의 묶음을 축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공연 전체에 대한 리뷰는 축제가 끝나갈 즈음에 다시 쓸 것을 기약하며,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공연 팀에 속해 있던 구자혜 연출의 <일회 공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회 공연>
일시 : 7/20~7/24, 선돌극장
관극일시 : 7/21, 선돌극장
연출 : 구자혜
작가 : 고연옥, 김민정, 백하룡, 이리, 전소영, 오세혁, 정소정, 구자혜, 윤성호, 미하엘 뮐러
출연 : 이리, 장윤실, 박경구, 전박찬, 최순진, 김석기

공연화된 대본의 조각들 :
2006년   고연옥 작 <칼디의 열매>
2007년   김민정 작 <검은 입들의 집>
2013년   구자혜 작 <침입>
    년    미하엘 뮐러 작
2012년   윤성호 작 <미인> 그리고 <미인> 중 공연되지 않은 <누수공사를 기다리며>
2012년   이리 작 <배우L의 독백 - 훈제란과 자전거 도둑에 대하여>
2012년   전소영 작 <오늘의 날씨>
2010년   정소정 작 <뿔>
2001년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윤성호 작 <당신에게>
흥얼거림 : 미하엘 뮐러 중 마지막 페이지 노래 부분 (미하엘 뮐러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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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회공연>에서는 발표는 되었으나 무대 위에 상연되지 못한,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못한 문장들”을 모아서 무대 위 장면으로, 혹은 무대 위 장면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그 미완의 생명들을 소생시킨다. 고연옥, 윤성호, 전소영, 정소정, 백하룡, 이리 작가 등의 작품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의 파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 꺼내어 놓는다. 시작부터 날카롭게 집중력을 모으게 했던 것은 바로 작품이 꺼내어 놓은 이 시선 자체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탄생했던 것의 죽음, 죽은 것의 소생, 탄생과 죽음과 소생 그 사이를 둘러싼 것들. 혹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조차 없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그것들의 사이를 오고 갈 시선의 힘이 왠지 몹시 반가웠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무언가를 애써 에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선의 힘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작품이 취하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사이를 떠도는 시선은 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무대의 잠재 혹은 무대의 잔재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게 하는 쾌감을 자극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분장실 속 물건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불가능하고도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다.


# 윤성호 작 <미인>의 한 장면
  한창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까닭모를)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듯한 연인이 등장한다. (사실 이 이별은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이별이지만, 군 입대라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이 장면은 문맥이 생략된 채로 보여지는 만큼 이 둘의 이별은 까닭 모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문맥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연인이 등장한다. 이 둘은 그들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재연한다. 모든 연인에게는 처음이 있다. 그것은 돌이켜 보고 난 후에야 아는 것이지만. 모든 연인에게는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장면으로 존재한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들이 보낸 한 시절은 마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과 기억, 기억과 또 다른 기억, 사실, 사실과 기억된 사실, 망각. 그들은 첫 순간을 복원해내며 이 단어의 사이와 사이를 떠돈다. 이 둘은 그토록 선명했(으리라 믿었)던 첫 순간을 복원하려 들지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 첫 순간이 한없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순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안다한들, 아니 그것이 설령 우리 스스로의 사건이라 한들, 우리는 어느 순간 순간들의 행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생략, 어느 소소한 망각,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과 그것들을 소생시키려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 작품의 초반을 여는 이 장면에서 가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싼 모든 까닭모를 미완성과 그 미완성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느 한 순간의 미완성이 한데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장면 안에서는 어떤 맺혀진 순간의 힘이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존재했던 것, 기억을 초월한 기억. 어쩌면 이 공연은 생략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라졌으나 존재하는 것, 흔들리면서도 고요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이어지는 윤성호 작 <미인> 가운데 “누수 공사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말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말들, 점증되는 짜증과 불신,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헛소리들, 계속해서 지연되는 시간,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그 상태.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배우들이 지면 속의 카툰처럼 벽면에 붙어 서 있다가 차츰 연극 속의 인물로서 호흡을 찾아가며 무대 위로 서는 동작이 흥미로웠다. 텍스트에서 연극으로, 그 테두리를 넘는 행위를 보여주는 움직임. 죽어 있던 것의 호흡, 생략된 것의 복원. 그리고 바짝 무대 앞 선까지 나온 이들이 한 줄로 정렬하여 반복되는 대사를 읊고 그 대사들의 반복은 시간과 정서의 점증을 빚어내는데, 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그토록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서 있으면서도 정서와 시간의 부피를 증폭시켜내는 힘이란!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제시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이것은 마치 소리 없는 텍스트가 빚어내는 감정과 시간의 증폭 같았다. 다시 말해 연극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독서의 행위 같았다. 관객은 무대 위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 장면이 만드는 효과는 독자가 텍스트를 마주할 때의 효과였기 때문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묵독할 때 텍스트 속의 기호는 낱낱한 문자들일 뿐이나, 독자가 그 기호의 결 사이 사이에서 숨을 쉬며 기호라는 질료를 자신의 감정으로 증폭시키는 묵독의 과정, 그 내면의 행위를 무대 위로 뽑아 표현한 듯한.
  이 대목 즘에서 생각했다. 이 연극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 이유는 (그 숱한 메타 연극들이 저지르고 마는 식상한 화법들처럼) 나 이렇게 논다, 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텍스트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다양하게. 반복되고 늘어지고 지연되고 인내하는 언어의 힘으로 장면의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 안에서 다시 언어는 지루하고도 의뭉스럽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텍스트가 연극 안에서 놀고, 그 놀이 안에서 연극은 장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청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 이리 작 <배우 L의 독백>
  정말 잘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잘 해 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파토가 나버린 일처럼.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공연 때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자 했‘는데’, 갑작스럽게 내일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하고.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루라도 해 보려고 훈제란을 샀‘는데’, 그 훈제란을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혹은 너무 쉽게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일처럼.
  세상에 정말 잘 나오려 했‘는데’, 그렇게 잘 나와서 잘 살려 했‘는데’........... 나오자마자 의미를 상실해버린, 혹은 의미를 박탈당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언어. 그래서 ‘그냥’ (별 각인 없이) 죽어버린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곧 연극 자체가 되게 하는 연출의 방향이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전체적인 할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이 공연 전체의 공기를 오롯이 자기의 이야기 속에 실어내었다. 이 연극은 이런 연극입네, 특히나 이 연극은 이런 ‘메타’ 연극입네, 하면서 연출자나 배우가 직접 나서서 서사를 풀어 놓는 그 숱한 연극 놀이들을 만나 왔지만, 이 작품만의 표현 방식은 특별했다. 지극히 재미없을 수도, 복잡하기만 할 수도 있었던 첩첩 쌓인 메타 서사를 특별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귀에 유유히 전달되게 하는, 자연스러움과 집중력. 아 좋은 스토리텔러의 힘이란!
  이 장면의 연기를 한 배우가 사실은 이 장면의 언어들을 만든 작가(이리) 본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난 후,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낸 ‘메타의 메타의 메타 속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의 작가 속 작가’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 공연조차도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드러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이 구태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서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사라질 뻔한 것들의 운명은 어떤 글을 세우고 부수고의 연속선 안에서 때로는 살아남았고, 때로는 사라졌을 어느 창작의 형체를 둘러싼 것들이다. 창작의 입장에서 창작이란 이토록 불명확한 과정임에도, 수용자에게 창작은 마치 그것이 명확한 테두리를 지닌 무언가로 여겨진다. 하여 미완된 작품의 생략을 복원해내고, 완성된 작품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이 공연의 행위는 이토록 불완전한 창작자와 이토록 명백한(듯 보이는) 수용자 사이의 시선과 시차를 희미한 발짓으로 거스르고, 에둘러가는 데에 있다. 이 공연의 엔딩도 (윤성호 작 <당신에게>의 부분) 이러한 작가의 희미한 정체성에 화두를 실고 있다.

#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곧고 차가운 벽.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 너무도 잘 보인다. 서로 자기의 편에서 단 한 발도 저 편으로 섞이려 들지 않는. 아무리 그 방에서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소통을 갈망해도 현실은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다. 그 차가움과 냉담함과 단절이 너무도 안정적이다. 빗금으로 그어진 조명 분리선. 그 선에 대한 인식 하나로 표현된 일련의 움직임들. 단절된 소통을 다급한 분노로 표현해내는 움직임과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소통 같은 것)를 습기 차게 갈망하면서도 몸으로는 다시 단절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자포. 그것의 반복이 너무도 안정적이고 차갑다. 여고생을 상처받은 사슴 같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 것도 이 장면에서 전해지는 그 철저한 단절, 그 꿰뚫을 수 없는 냉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가느다란 빗금 조명등과 가늘게 삽입된 crack 사운드. 단 두 가지의 질료만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장면일 뿐인데, 이 파편의 유희에서 작품의 질긴 공기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건. 이토록 파편의 시가 해 낼 수 있는 것을 미완의 연극으로 그려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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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되었으나 상연되지 못한, 상연되었으나 생략된 장면과 언어들을 ‘일회 공연’으로 올려 낸 이 작품. 이 작품의 소개를 받았을 때에는 그 생략된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연극이려니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조금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이 자꾸만 빚어내는 어떤 사이를 떠돌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생략이 아닌 생략이 되기까지의 것, 그래서 또한 부활이 아닌 그것이 되살아나기까지의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 연극은 순간이 아닌 순간과 순간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 속 장면들은 오롯이 대본과 유희하고 있다. 대본을 연극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대본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대화가 즐겁다. 대본과 연극 사이의 유희의 대화가. 그래서 두텁고, 새롭고, 줄기차다. 기대할 수 있는 연출과 배우와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즐겁다. ㉦

2014년 7월 22일 화요일

다르게 읽은 콘서트, 좋아서 하는 밴드 <보신 음악회, 더워 The War>

산책

이 글을 쓰기 전에 두 가지 사실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먼저, 좋아서 하는 밴드, 그들의 음악에 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친구에게, 또 <보신 음악회, 더 워 The War>라는 제목에 끌려 콘서트를 보러 갔다. 노래를 찾아 들고, 밴드에 대한 사전 정보들을 파악했다면 좋았을까? (노래를 다시 듣고 있는 지금 생각은, “그렇다.”이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나는 이야기, 서사, 기승전결, 드라마, 이런 것에 집착(?)한다. 잘 짜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집착한다고 내 자신을 다소 비하해서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비단 나만의 성향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사물들에서도 이야기를 찾고, 만들어 낸다. Heider와 Simmel의 유명한 실험은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이 실험에서 사람들은 원, 삼각형의 움직임을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 움직임을 탈출이라고 해석함을 발견했다.






그들의 노래는 아름다웠고 때로는 유쾌했고, (나는 모든 노래를 처음 들었지만,) 조용히 따라 부르는 주변의 나직한 목소리와 가끔 터지는 웃음 소리들이 좋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과 같은 곡 소개나, “젬베를 사려고 밥을 굶었잖아요.”같은 이미 공유된 이야기들은 그들에 대한 궁금함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일종의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밴드의 멤버나 세션 소개가 공연 중반 이후에 치우친 것과 마이크 음량이 작아 가사나 대화가 잘 전달되지 않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좋아서 하는 밴드(조준호(퍼커션, 우쿠렐레)와 안복진(아코디언, 건반), 손현(기타)), 상상 속의 그들은, 꽤 나이가 지긋하고(하지만 생각보다 모두 어리시고), 다른 일을 하면서 “좋아서” 밴드를 하는 뮤지션들이었지만(무지했다), 실제로는 전업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분들이었다. 누가 보컬인지, 혹은 리더인지 궁금했지만, 공연이 끝난 후에야, 그들은 독특한 협업 시스템을 가지고, 각자 다른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신이 쓴 노래를 자기가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출처: “내가 첫 번째였으면 좋겠어” 뮤직 비디오 중) 

밴드를 처음보고, 노래를 처음 들은 초짜 관객은(손현님 표현: 새 거) 노래와 노래 사이를 연결하는 대화들, 이야기들에 관심을 돌리게 됐다. 보신 음악회의 주된 기획으로 보였던 “닭들의 역습”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아쉬웠다. 닭을 먹지 말자고 투쟁하던 그 분(닭 분장을 하고 나온, 그분 이름이 뭐였더라? 닭 대장이었던가)과, 더위를 이기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뮤지션들의 대화는 그 완성도가 아쉬웠다. 메리홀이 아니라 작은 클럽이었다면, 혹은 이 기획 자체를 시도하고 노래만 들려주는 구성이었다면 모를까, 콘서트의 일부분으로 끼워 넣은 이상, 더욱 완성도 있는 쇼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콘서트 시작 전, 자신의 보신 음식을 적어 내라고 했다. 이름과 좌석 번호, 전화번호까지 적어서. 그러나 이 게시판은 삼계탕을 써 넣은 한 관객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또 갑자기 우쿠렐레를 선물로 주는 응모판 이상으로는 쓰이지 못한 점이 아쉽다. 관객들의 메모를 다양하게 활용했다면, 뮤지션들의 여름 나기 방법에 관객을 참여시키는 등, 무대와 객석이 보다 가깝게 상호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닭듥의 역습이라는 이야기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것이다(닭을 초빙한 밴드의 예상처럼 많은 사람이 삼계탕이나 치킨을 쓰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들이 그들의 노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이었다면, 노래에 대한 집중도도 더 높아졌을 것이며, 나 같은 관객에게도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유명한 그들의 팬들은. 라이브로 노래를 듣고, 웃고 감동하는 것으로도 더위를 이길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없거나 그들의 지난 날과 사건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객까지 쉽게 팬으로 만들려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대화,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노래 안에도 이야기가, 기승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들이 날아 오르며 저 멀리로 나아갔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모양도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으며, 가사로 쓰여지고 불려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가스비를 걱정하며 보일러를 돌리는 남자의 마음을 상상하고(“보일러야 돌아라”), 깜짝 깜짝 놀라며 설레는 여자의 발그레한 볼을 떠 올리며(“얼굴 빨개지는 아이”), 감정을 같이 공유하고, 그래서 노래 듣기가 즐거운 것 아닐까? “굿 바이 스타”의 스타가 뮤지션에게는 10만 킬로를 달리고 폐차하게 된 스타렉스였다는 사실도 재미있었지만, 앞으로 “굿바이 스타”를 들으며, 그런 존재를 가진 관객들은 자신만의 그 무엇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기가 막힌 연주나 소름 끼치게 잘 부르는 보컬을 넘어서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그래서 때로는 울컥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되는 것. 그런 힘은 이야기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콘서트의 이야기가 더욱 탄탄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삼계탕이 아니어도, 그들의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르지 못해도,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분명 <보신 음악회>는 좋은 기획인 것 같다. 5년째 이어오는 이 기획은 복날이면 그들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음악을 라이브로 듣는 것 이상으로 객석에 앉은 관객도, 팬도, 뿐만 아니라 뮤지션 그들도 무더위를 이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극장을 나설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을 것 같다.
즐겁게 노래를 듣고 와서, 서사며, 실험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C는 내게 “또 머리로 들었구만.” 하고 퉁을 놨다. 마음으로 노래를 듣기에는, 좋아하는 밴드와 나, 우리가 보낸 시간은 너무 짧다. 시간을 붙잡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들과(김중혁 <모든 게 노래>) 마음을 나누려면, 앞으로 더 긴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모든 노래를 찾아서 (유료로 다운로드 받아서!)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내년에도 <보신 음악회>가 성황리에 개최되길. 저도 따라 부르겠습니다. ㉦

2014년 7월 13일 일요일

공연의 시간과 공간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Drama-Out 1
최희범 (<지극히, 퍼포먼스> 연출)

드라마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드라마(drama)의 어원으로서 행동하다는 뜻의 dran을 들며, 드라마가 다른 예술 양식들과 구별되는 점은 실제 인물들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지난 5월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에서는 출연자들의 행위들로 꽉꽉 채워진 연극이 공연되었다.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이 만든 세 번째 공연 <지극히,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공연된 지 이미 한참 지나기도 했고, 공연 자체가 굉장히 유명해지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이 웹진(drama-in)의 필진 대부분이 공연에 참여했고, 공연준비 및 공연 후유증으로 인해 한 동안 글이 많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약간은 변명이 될 것도 같은 공연 제작 후기를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문장을 두서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시작한 이유는 이 글을 첫 번째로 하여 새로 시작해보려고 하는 연재의 제목을 drama-out*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행위로 꽉 찼던 우리의 공연이 그가 말하는 ‘드라마’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연출로서 참여했던 <지극히, 퍼포먼스> 제작에서 시도해본 연극 혹은 드라마에 대한 일종의 실험의 내용과 나름의 결과를 소개하고, 이러한 것들을 계기로 앞으로 이 연재에 실릴 리뷰들이 공연을 보는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 이 제목이 우리 웹진의 이름과 운을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drama-in의 “drama”가 어떻게 특정되어 있는지가 확실한 상태에서 그에 반하는, 혹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곧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의 drama를 생각했는데, ‘극적이다’ 혹은 ‘드라마틱하다’고 할 때 그런 드라마나 연극에서 공연의 측면보다 희곡 텍스트의 측면이 강조된 의미로서 사용할 때의 드라마 같은 것이다.

<지극히, 퍼포먼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드라마라고 불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출연자의 행위는 있을지언정 플롯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물들의 행동의 결합이 플롯이며 비극과 희극과 같은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이라고 말하는데, <지극히, 퍼포먼스>에서는 행동들이 나열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어떠한 의도 혹은 목적 하에 촘촘하게 구성/결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처음 화두는 “빈 공간, 2시간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들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였다. 즉, 의식적으로 ‘드라마’가 아닌 것을 추구 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만들 공연의 기본 요소에 드라마가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없는 공연의 현장성(liveness)에 대한 실험의 성격이 강한 ‘연극’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이 공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이러한 요소들이 이렇게 표현되었고 결국 그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야’ 하고 이야기 될 수 없는 무엇인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주인공이 된 공연이 가능한가?’ 현장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질문에 가까웠다. 비록 잘 짜인 스토리나 플롯이 없어도, 잘 생기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매력적인 인물(character)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행위를 하는 사람과 그 시간과 그 공간에만 속한 멋진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거기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의 출연자에 대해서 공연이 이루어질 시간과 공간에 진짜로 속할 수 있는 행위들을 찾아나갔는데, 이는 비단 공연에서 ‘연기’를 배제하겠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과연 연기는 관객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가, 내가 아무리 무대에서 실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나를 보는 누군가가 존재할 때 그것은 그저 밥 먹기의 수행(performance)일까, 아니면 밥 먹는 퍼포먼스(performance)일까? 어쨌든 출연자들에게서 ‘과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환영을 만들어 줘야 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처럼 보여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로 하고, 이런 기준으로 우리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찾아서 공연을 구성했다. 이 행위들을 찾아서 장면을 만들고 그것들을 일련의 순서로 구성하는 작업은 무작위로 여러 개의 질문을 뽑아서 출연자들에게 질문하고, 그 중에서 앞서 말한 ‘진짜로’ 할 수 있는지의 기준에 맞는 다양한 행위들을 골라서 그것들을 흥미롭게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재미있는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도 공연의 핵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소개 하겠다. 더 중요한 것은 출연자들이 각각의 행위를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게 하는 것, 혹은 ‘진짜로’하기 위해 한 가지 과제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의도를 말하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공연이 어떤 형태였는지 묘사해보자면, 출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혹은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반복해서 했다. 인사를 계속 하기도 하고, 노래의 한 구절을 반복해서 부르기도 하고, 발레 턴을 계속해서 연습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도 굳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한 가지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과제를 계속해서 하는 과정에서 출연자(연행자)는 그것을 ‘진짜로’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다. 때로는 고군분투하는 중에 그들의 과제가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한 그 과제가 공연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행자의 충동은 존중받았다. 그것은 바뀐 과제로서 그대로 수행되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지만 그 과제는 하는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달라지기도 하는 장면들이 자잘하게 모여서 이 공연을 채웠다. 때로는 각자의 과제를 수행하는 출연자들이 동시에 무대에 존재하면서 그 결합이 특정 공간, 시간에 대한 연상이나 특정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한 연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이 공연에서는 무엇인가를 진짜로 수행(performance)하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극히, 퍼포먼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든 입장에서 맘대로 써본 우리 공연의 이상적인 형태이다. 실제로는 매번의 공연이 모두 조금씩 달랐고, 이 조금씩 다른 것은 어제와 오늘 공연 사이에 큰 차이를 불러오기도 했다. 다른 형태의 공연에 대한 기록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세 번의 공연을 촬영하여 편집한 동영상 링크를 첨부한다. (공연 동영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5fW9GmPu-2k) 기왕에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무엇인가를 ‘진짜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진짜로’가 진짜로 걸리는 단어다. ‘진짜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연기하지 않는, 최대한 ‘일상적’인 상태가 ‘진짜’ 인가? 다양한 주장이 있겠지만 묻어두고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하는 것’ 혹은 ‘본연에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 겁나게 노력하는 것’을 ‘진짜로’ 하는 것으로 특정했다. 어쩌면, ‘진짜로’라기 보다는 ‘제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광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목소리와 기교를 뽐낼 수도 있고, 노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호소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는 후자가 ‘진짜로’ 사랑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사람이 콩쿨에 나가서 노래 실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연의 목적인 사랑 고백에 충실한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음치에 박치라고 해도, 그 광경은 기분 좋은 것, 감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분 좋은 광경’을 만들기를 바랐다. 어쩌면 조금은 무리한 기대일지도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서 우리가 최소한, 내가 하는 것의 본질을 알고 그 것으로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기를, 그리고 그 과정을 관객들이 ‘기분 좋게’ 바라봐 주는 상황, 그러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때, 그 시선이 없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할 일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것은 굉장히 도달하기 힘든 상태일 것이다. 그 상태는 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한 어떤 상태 같다.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조금 더 장난기어린, 그래서 놀이에 가까운 어떤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 과제 자체는 변해도 괜찮은 어떤 것, 실패해도 괜찮은 어떤 것이지만 일단 과제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람과 이상들 속에서 공연이 만들어졌고, 공연이 되었고, 이제는 끝났다. 사실 만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가 한 것은 어쩌면 무대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중 각자에게 가장 쉬운 것들이었다. 많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특정한 것을 ‘제대로’ 혹은 ‘진짜로’ 하기를 요구받지만, 우리는 아무거나 ‘진짜로만’ 하면 되었으니까. 작업인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작업의 다른 점은 숨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랄까. 어차피 뭘 하든 겪게 될 불인데, 잘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꽃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저 불 한가운데에 가면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우리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뭐가 있긴. 재가 된 내가 (혹은 나였었던 무엇인가가) 있겠지. 어떻긴. 개 뜨겁겠지. 내가 그 두려움만 벗어던진다면, 그래서 진짜 활활 타올라버린다면 공연은, 좋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흥미로울 것 같긴 하다.” 여기서 ‘뭘 하든 겪게 될 불’이라는 말을 나는 어떤 형태의 공연을 하든지 ‘진짜로’ 할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고군분투라고 해석했다. 나는 드라마가 있든, 없든, 뭐가 되었든 그 공연이, 그 공연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활활 뜨겁게 타오르길 바란다. 겁나게 뜨겁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기를 바란다. 겁나게 집중해서 자신의 과제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공연의 현장에서 보고 그 에너지를 느끼기를 원한다. 확실히 이런 것들은 앞서 말한 일반적인 의미의 드라마에 연관된 것은 아니다. 텍스트나 어떠한 의미를 위해 봉사하는, 그 의미나 이야기를 향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오르지 않아도 연극의 의미망은 구축될 수 있고, 관객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공연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드라마에 봉사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기억되기에 가치 있는 그러한 순간들을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 drama-out 연재를 이러한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공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쌓는 통로로 삼고자 한다. 비슷한 지점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의 대화도 고대해본다. ㉦

2014년 7월 9일 수요일

[K-POP & 퍼포먼스 1] K-POP에게 라이브를 요구한다는 것

by 시뫄

최근 한 공중파 음악방송의 책임프로듀서가 립싱크 가수에 대해 출연을 제재하겠다고 선언해 논란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립싱크 불가 방침은 이미 수 년 전에 생겼었고 쭉 있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악방송 화면 구석에 테이프 표시가 보이면 립싱크 무대, 없으면 라이브 무대라는 구별 방식을 알고 있었고, 어느샌가 테이프 표시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저 그런가보다 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찬 무대를 꾸며내면서도 라이브로 노래까지 소화하는 요즘 아이돌들은 그만큼 고강도의 트레이닝과 준비 기간을 거쳐서 그렇겠거니 한 것이다. 하지만 립싱크 불가 선언을 한 프로듀서에 따르면 요즘에는 무대용 라이브 버전 AR(All Recorded) 음원이 따로 있어서, 시청자들은 립싱크 공연도 라이브 공연으로 알고 본다고 한다. 그는 립싱크 무대를 시청자 기만이라고까지 표현했고, 이 뉴스는 "금붕어 가수 퇴출"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퍼졌다.

우리나라 가요계는 K-POP, 또는 아이돌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장르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요 프로그램에 나오는 팀들 중 대다수가 아이돌일 뿐더러, 음원차트 순위나 해외수익율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립싱크 제재 방침에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장르 또한 K-POP이다. K-POP은 그 강점이라고 볼 수 있을 안무와 퍼포먼스 등 음악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완전히 라이브로 공연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 외적인 요소들이 없다면 K-POP은 음악 자체로도 지금처럼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K-POP은 듣는 음악보다는 보는 음악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음악을 비롯해 가수의 외모, 의상, 안무, 무대구성 등 모든 비주얼 컨셉과 연출적 요소들까지도 K-POP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단순히 K-POP을 음악의 한 장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 전반으로 확장해서 본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연을 사건(event)으로 보는 공연예술의 기본 전제 하에, 가요 프로그램에서 결국은 중점이 되는 노래가 정작 무대 위의 순간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라면 K-POP 퍼포먼스는 공연이 될 수 없는가?


퍼포먼스를 빼놓고는 EXO를 말할 수 없다! (출처: EXO “늑대와 미녀” M/V)

K-POP을 존재론적 위기에 처하게 할 수도 있을 저 마지막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살아있음(liveness)에 대한 필립 아우스랜더Philip Auslander의 논의를 빌려오기로 했다. 아우스랜더는 연극학에 뿌리를 둔 퍼포먼스 이론을 음악, 매체, 기술에 관련시켜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오늘날처럼 매체화된 문화에서 매체화된 공연(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이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아이돌 가수의 퍼포먼스)로부터 그 권위를 얻는다면,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 즉 라이브 공연의 권위는 그것의 매체화된 버전으로부터 다시 얻기 때문에, 분명히 대치되는 것으로 보였던 두 항들 사이의 도식은 무너지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공연은 그 가수가 실제로 저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가치를 얻는 것인데, 촬영되고 있는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라이브 공연은 결국은 텔레비전으로 보여질, 그것의 연출된 이미지로부터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아우스랜더는 텔레비전으로 보여지는 시각 이미지가 녹화된 것이든 실황중계이든 간에 그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며 텔레비전에 있어서 반복 재생이나 재방송과 생방송 사이의 직관적인 구분은 없기 때문에,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공연의 재생산이나 반복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공연이라고 주장한다.

아우스랜더의 논의에 빗대어 K-POP 퍼포먼스를 보면, 그 공연을 위해 실제로는 노래, 안무, 연기, 무대 구성이 한번에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매체화되어 텔레비전 이미지로 송출되는 순간 그것은 라이브 공연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방송국에서 K-POP 가수들에게 라이브 공연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리고 노래에 있어서 라이브가 핵심적인 가치라고 보는 시각은 여러 단계에서 부적절하고 심지어 불공평하다. 앞서 언급했던 뉴스가 논란이 되었던 이유에는 한 아이돌 가수가 SNS에 올린 코멘트가 있었는데, 그는 방송 무대의 음향에 대해 일침을 놓으며 무작정 가수에게 라이브 공연을 요구하는 것만이 좋은 공연을 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방송국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살아있는" 음악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 가치는 단지 노래만 라이브로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주도 실제 세션들이 라이브로 해야할 것이고, 음향 장치가 좋아야 할 것이며, 방송 상태가 원활하고 균일해야 할 것이고, 어쩌면 우리집 텔레비젼의 사양이 최고급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것을 직접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라이브에 대한 가치판단적 강박은 전통적 음악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클래식 음악은 당연히 현장에서 듣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물론 공연장의 구조나 여타 조건들에 따라 음향은 늘 달라질테고, 그래서 같은 연주자라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공연한 연주의 녹음본이 다른 것보다 높게 평가되곤 한다. 애초에 최적의 음향으로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그러한 감상의 조건들과 미적 가치가 K-POP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아니, 그럴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K-POP의 존재의 이유는 보여지는 것에 있고, 그것도 심지어 "예쁘고 멋있게" 보여지는 것에 있다. 매 공연마다 그 순간에 고유한 가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가치가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시각적 미를 희생해야 한다면? 시각적 이미지로 어필하는 가수들과 그들의 (혹은 그들 자체로서의) 상품으로 돈을 버는 방송국이 계속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K-POP은 그 특성 상 수용자/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춘 상품(이미지, 퍼포먼스)을 내놓게 되는데 수용자/소비자들이 K-POP 퍼포먼스로부터 원하는 것을 클래식 음악 감상에서와 같은 미적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날 극도로 매체화된 시대와 문화에서 우리는 시각 이미지와 그에 따른 변화들을 전통적인 예술적 가치에 대한 침해나 오염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이브 공연에 대한 요구가 전통적 음악 미학까지 운운해야 할 문제라면 퍼포먼스로서의 K-POP이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결국 예술의 정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안이 되겠지만, 사실 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예술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예술이라고 하는 것도 미적이지 않을 때가 많은데, K-POP은 그렇게나 많은 이들에게 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데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