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의 찝찝함

임승태

나는 이 연극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켄터키주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이미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2012년 “Complia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 같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초연이 2014년이었다는 점이나 연출의 변에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연극을 세월호, 특히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가만히 있으라”가 남긴 상처는 우리 사회에 여전하기에 이 말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변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제 검열관이 사라졌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어딘가 고약한 데가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은 이 작품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음, 혹은 말 잘 듣지 않음을 실천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은 가만히 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하지 말라는 담탱이의 조회 시간 잔소리는 매번 제 시간에 온 학생들이 듣게 마련이다. 과거 어느 공연에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순간 한 관객이 일어나 오셀로를 권총으로 쏴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은 그 사람보다 정의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재미나 감동과 같은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한 유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끝까지 봐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말 잘 듣는 게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만히 있었던 학생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던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혹은 차예슬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일차적 책임은 선장과 선원, 해경, 대통령에게 있고, 형사를 사칭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 혹은 최대한과 같이 시킨, 혹은 마땅히 시켜야 할 일도 시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커튼 콜 당시 내 뒤의 한 관객은 웃음 지으며 퇴장하는 최대한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외쳤다. 비록 이 말이 내가 관람한 저녁에 나온 관객 반응의 최대치였지만, 점잖은 관객들도 속으로는 그 이상을 외쳤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삼천만원을 잃었다. 옆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스 피싱이 퍽치기 강도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면 핸드폰을 보조 배터리에 연결해서 여섯 시간씩 범죄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을 잘 들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리에게 당하는 양의 약함을 문제삼는 것과 흡사하다. 비극이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아고의 악함을 문제삼지 않고, 오셀로의 귀 얇음과 데스데모나의 지나친 친절을 문제삼는다. 이아고나 최대한은 수퍼 빌런이지, 간단히 헤치울 수 있는 조무라기 악당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오그본/차예슬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건/연극에서 주목할 문제이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이들이야 말로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박종주의 표현대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이 연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스튜어트/최대한의 사악함이나 오그본/차예슬의 불쌍함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 중간에서 이 끔찍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지극한 평범성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하루의 삶 속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것보다 내게 손해가 없기를 바라며, 내게 이익이 된다면 정의를 잠시 외면할 준비도 되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불편한 것은 바로 나의 비열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은 이 연극을 끝까지 참고 봄으로써 카타르시스 없는 불편함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러한 사건에 연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와 (부)매니저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김미옥과 그의 배우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강성기를 비난하면서도 일말의 연민을 거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 주는 불편함은 배우들이 단체로 펠라치오 시늉을 하는 것을 강제로 훔쳐봐야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85분에서 90분간 극장에 앉아서 그것을 접하는 것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사건에 무언의 배우로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사도/마조키즘 성향을 활성화 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옮겨 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김수정의 저자권(authorship)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Compliance 와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선제적으로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Compliance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자가 후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가? 몇몇 대사를 비롯하여 몇가지 설정—Compliance의 금발 머리, 치킨 샌드위치 가게와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노란 머리, 삼계탕 집—상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24일 수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과 말 잘 듣는 관객들


 박종주

90분간, 말 잘 듣는 사람들

직원 열 명이 채 안 되는 어느 식당에 의문의 전화가 걸려 온다. 스스로를 서울지방경찰청 강남 경찰서 강력한 형사라고 밝힌 남자. 그는 가게에서 지갑을 도난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 왔다며 매니저에게 협조를 구한다. 그가 원하는 협조란 놀랍게도 포천에서 서울로 돌아 오고 있는 자신을 대신해 수사를 진행해 달라는 것, 정확히는 용의자에 대한 심문을 대신해 달라는 것이다.
용의자는 2주 전부터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상고 출신의 노란 머리 — 피할 수 없는 용의자의 표식이다 — 여성이다. 잠깐 저어하던 매니저는 형사의 설득에 이 이에 대한 심문과 조사를 실시한다. 사장에게 책을 잡히고 싶지 않은 매니저의 욕망과 자기 사건을 다른 형사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형사의 욕망이 교차하며 사건의 발단이 된다.
심문은 평범하게 소지품 검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훔친 지갑도 그 속의 돈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형사의 요구는 몸 수색으로, 이어서 알몸 수색으로, 조금씩 과감해 진다. 삼계탕을 파는 이 식당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복날, 손님들도 다른 직원들도 모르는 가운데, 직원 대기실에서는 이런 사건이 펼쳐진다.
형사는 종종 언성을 높인다. 매니저가, 혹은 매니저를 대신해 심문을 이어가는 다른 직원이 종종 협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성이 높아지기만 하면 협조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매니저의 남편이 심문을 이어가면서 그 수위는 극에 다다른다. 바닥을 개처럼 기게 하기, 질 속을 검사하기, 구강 성교 강요하기 — 어느새 심문의 목표는 용의자에게 수치심을 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매니저의 남편은 시킨 것 이상을 해 내고, 형사는 기분이 좋아진다.
90분간 작은 방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을 통해 〈말 잘 듣는 사람들〉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 권력의 요구에 부응해 불의마저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가를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어떤 조건들이 맞아떨어졌을 때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를 — 얼마나 말을 잘 듣게 되고 마는지를 가늠하는 사고 실험 말이다.

게으른 실험

84분. 이것은 내가 연극을 관람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짧으면 2, 3분, 길면 8, 9분쯤 되었을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말은 대강 이렇다. 저녁 시간이 되어 손님이 빠져 나가고 조금 한가해 진 주방장이 이 밀실에서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자조치종을 들은 그는 대노한다. 수사는 형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전화 너머 목소리의 주인이 형사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필 형사의 명령을 조금이나마 거부했던 한 사람이, 그리고 형사를 믿지 않은 또 한 사람이, 둘 다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이라고 해 두자.)
그제야 상황을 의심하게 된,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 그의 정체를 확인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의문의 주인공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전까지는 매직 미러 너머로 희미하게 상반신만을 내어 보이고 있던 그는) 와이셔츠에 팬티바람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극단적으로 통제된 변수들 — 바쁜 하루, 폐쇄된 방, 위압적인 공권력, 임금노동자라는 위치 등의 ― 속에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내어 보일 수 있는지를, 평소에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2004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만큼이 실제 사건을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브라와 팬티만 입은 채 방치되는 용의자, 팬티 속에 손을 넣어 확인하는 부매니저, 속옷마저 벗기고 질 속을 확인하는 매니저의 남편, 수 시간째 갇혀 있다 결국 오줌을 싸고 마는 용의자, 이 모든 것이 이미 현실에서 실험된 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17년 어느 낮에 극장에서 감행하기에, 이는 너무나도 게으른 실험이다. 원하는 결과가 이미 나온 바 있는 어느 실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변수들이 너무도 통제되어 있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는 실험, 그러나 자극적인 어느 실험의 재현일 뿐이기에 말이다.
가벽을 세우고 온갖 상자들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모자라 거울에 “증” 마크까지 새겨 놓은, 식당의 직원 대기실을 성실하게 재현한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극적 실험은 없을 것임을, 오줌을 싸는 장면에서는 무대에 정말로 물이 흐르게 하는 것 이외의 연출을 알지 못하는 연극임을 알리는 복선 말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오히려 질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하며 극장에 모인 이들에게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은 아닌가를 물을 절호의 기회를 말이다. 끔찍한 장면에서 탄식을 내뱉던 관객들은 우스운 장면에서 금세 폭소를 터뜨린다.

말 잘 듣는 관객들

이 연극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어느 관객의 리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보다는 이 연극이 덜 게으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보지 않은 6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극장에 앉아 있었던 84분 내내 여기저기서 괴로움의 탄식이 들렸지만, 관객들이 줄이어 자리를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두 명쯤 조용히 나갔을는지는 모르지만.) 84분 째에 내가 자리를 뜨자 그 뒤로 두어 명이 따라 나왔다. 나머지는 아마도 끝까지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웃으며 커튼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관객됨’에 대해 생각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이 보기 싫어도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은 돈을 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끝까지 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돈을 냈기 때문, 이라면 슬픈 일이다. 자신의 시간보다, 자신의 정신보다, 돈을 더 아까워 해야 한다는 상황이 말이다. 혹은 관객으로서의 권리가 소비자로서의 권리로 축소되는 상황이 말이다.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대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기껏 관객‘들’이 모이는 극장이란 장소에서, 관객으로서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라면 말이다.
말 걸어 오는 사람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미 탓에 나도 84분을 버티고야 말았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끝까지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연극을 준비하며 이 사건을 계속해서 생각했을 제작진과 출연진에게서, 우리는 어떤 성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어도 좋았던 것일까?
‘연극됨’에 대해 생각한다. 연극과 관객이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뿐이다. 텅 빈 도화지 같은 관객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연극과 연극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할 일은 얌전히 앉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 관객이 만날 때 말이다.

〈말 잘 듣는 사람들〉
김수정 연출, 극단 신세계 제작.
2017.05.18-05.28. 알과핵 소극장.
5월 20일 관람.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하극상 없는 상황실, 반전 없는 인생 ― 새 세계를 위하여


박종주

1.
등장인물은 셋이다. 대장과 부관과 연락병. 아니, 인물이라고 하기는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뇌의 각 기능을 의인화한 것이니 말이다. 대장은 이성적 판단을, 부관은 기억을, 연락병은 ‘마음부’ 및 ‘신체부’와의 연락을 담당한다. 이들은 무대엔 등장하지 않는 ‘나’의 뇌 속에서 작동하는 기능들이다. 그렇다. 무대는 바로 ‘나’의 뇌 속이다. 이들은 결국 ‘나’들이다. 서로 반목하는, ‘나’들 말이다.
대장은 기억들을 자료 삼아, 그러니까 부관과의 논의를 통해 ‘나’의 할 일을 결정하고 연락병이 이를 마음과 신체에 전달한다. 대장은 요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나’를  취업 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 영단어를 외울 용량이 부족하므로 ― 좋은 기억을 지우고 때로는 ― 지난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은 사치일 뿐이므로 ― 뛰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대장이 잠깐 쉬고 있는 사이, 그러니까 지친 이성의 끈을 잠시 내려 놓은 사이 ‘나’가 자위를 하는 장면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옛 연인을 생각하며 욕망을 해소하는 ‘나’의 모습에 대장은 분노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므로. 대장의 휴식은 이것으로 끝이다. ‘나’를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대장은 이제 바삐 움직이며 명령을 내린다. 우리가 이 연극을 보는 것은 그 명령들이 종종 거부 당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통제에 성공했더라면 ‘나'에게는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은 ‘나’ 하나이므로 이렇다 할 갈등은 없다. 대장과 부관이 이따금 다투지만,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뇌부의 통제를 받는 동안 ‘나’는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때로 손발이 절로 떨리기도 하고 때로 맘이 절로 울적해지기도 한다.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날 때가 있는 것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두뇌부와 마음부 사이에 있다. 두뇌부가 어떻게든 미루고자 하는 갈등이 말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나’가 평면적으로 묘사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작금의 청년들이 모든 내적 갈등을 억압하고 보류하며 ‘평평한 사람’이 되어 생존 투쟁에만 집중해야 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기엔 ‘나’의 삶을 표현하는 키워드들 ― 무급 인턴에서부터 ‘혼밥’까지 ― 도 다소 진부하다. 스토리를 생각하자면, ‘요즘 청년들 삶이 참 팍팍하다더라’ 하는 수준의 무심한 공감 이상을 끌어내기 어렵다.

2.
대신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연극의 요소들이다. 〈브레인 컨트롤〉은 관객들을 무대 곁으로 불러들인다. 흰 선으로 표시된 무대의 삼 면을 스물 몇 개의 의자가 둘러 싼다. 극장에 일찍 온 관객들은 객석 대신 이 의자에 앉아 보다 가까이서 무대를 지켜본다. 배우와의 소통이라든가 하는 참여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가까이서 지켜볼 뿐이다.
의자는 흰 선 바깥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이 있는 곳은 여전히 무대 밖인 셈이다. 관객들은 왜 이리로 불려 온 것일까? ‘나’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마도 관객의 뇌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을, 일들을 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라는 연출의 배려 정도로 생각하자. 어쩌면 정말로 좋은 자리는 그 의자들 뒤에 있는 원래의 객석일지도 모른다. ‘나’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는 스물 몇 명의 ‘나’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자리 말이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는 이따금 관객들을 위한 정보들이 표시된다. 두뇌부의 요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안내가 나오거나 ‘나’가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식이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극”이라는 단어다. 스크린은 연극을 “가상 시뮬레이션”의 동의어로 정의한다.
극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힘든 현실에 지친 ‘나’가 ― 정확히는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난 ‘나’의 마음이 ― 죽음을 향해 달려 갈 때 연락병은 묻는다. “이거 다 연극이죠?” 따라 붙는 대답은 “이건 실제상황이야!”이지만, 우리 관객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연극임을 말이다.
이것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그리고 극의 정조대로 지친 죽음이 피해야 할 결말이라 할 때, 이것은 관객들이 그러한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사고실험일 것이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것인지, ‘나’처럼 살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인지를, 혹은 그렇게 살지 않거나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3.
또한 몇 가지 균열들이, 운이 좋다면, 관객들을 사유의 확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남성이다. 그리고 대장, 부관, 연락병은 아마도 여성이다. (지난 시즌까지는 남성 배우들이 연기했다.)  ‘청년’이 대개 ‘남성청년’과 동치되는 한국사회에서, 이 크로스젠더 캐스팅이 관객들에게 청년층 여성의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70분 남짓의 짧고 급박한 공연에서 충분한 맥락을 갖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대장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하는 ‘어린 여성에 대한 혐오’라는 전략 또한 같이 생각되면 좋겠다.
두뇌부는 쉼없이 마음부를 다잡고 억누르지만, 그리고 그 끝에서 파국에 이르지만, 〈브레인 컨트롤〉은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두뇌부의 대장은, 후손을 낳아 번성하라는 ‘생의 목적’을 알면서도 DNA에 각인된 정보에 의지해 살아남기를 저어한다. 이 두 방향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브레인 컨트롤〉이 모종의 문명을, 그러나 지금의 것과는 다른 어떤 문명을 요구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 상황실에는, 자신의 직분을 벗어나려 드는 인물들이 있다. 대장에게 반말로 반대 의견을 말하는 부관, “외람되지만” 끊임 없이 무언가를 묻는 연락병. 이들은 끝내 대장을 이기지 못해 ‘나’의 파국을 막지 못한다. 마지막에는 대장과 합심해 ‘나’를 살리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인 컨트롤〉이 연극이라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이들의 출연을 통해 무언가를 관객은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반기를 드는 법을 말이다.

4.
나는 돌이다.
더이상 떨지 않는다.
돌은 물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물에서 나는 영원토록 숨을 죽인다.

‘나’는 연극의 처음과 끝에 이런 시를 읊는다. 대장과 부관에 따르면, 인생의 시가 완성될 때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 이 시를 완성한 후 ‘나’는 죽음을 택한다.) 삶이 그 시를 위한 시어를 찾는 과정이라면, 무대 밖 ‘나’들의 삶에는 조금은 다른 시어들이 나올,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를.



〈브레인 컨트롤(Brain Control)〉
정진새 작/연출
극단 문 제작
2017.05.09 ~ 2017.05.14 CKL 스테이지
2017.05.14. 관람

2017년 5월 2일 화요일

세 시간, 나는 왜 그곳에 있었나

박종주

0.
티켓박스에서 표를 찾는데, 매표원이 물어 왔다. “무대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서 보실 수 있는 자리가 있는데, 그리로 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무대가 비어서야 곤란하므로, 네, 하고 답했다. 이쯤에서 나는 약간의 긴장을 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 옆에 앉는다는 것, 그것은 배우들이 말을 걸어오는 일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시작 시각은 여덟 시였다. 그러나 일곱 시 사십 분이 되고 오십 분이 되도록 극장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로비에서, 분장을 한 누군가가, 여기저기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문에 붙어서는 입김으로 이것저것을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리면 문을 두드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극장 입구는 여덟 시가 되어서야 열렸다. 무대 위에 놓인 한 의자로 안내 받았다. 무대에는 디귿 자 모양으로 개인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뚫린 한 변에는 의자만이 놓여 있었고 그 의자에 배우들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무대에는 미음 자로 사람들이 가득 앉았다. 배우들이 앉은 맞은편 변 뒤로는, 또 다른 배우 하나가 벽을 보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연극 〈2017 애국가〉(즉각반응 제작)는 이렇게 시작한다. 마이클 마르마리노스(Michael Marmarinos)의 구상을 토대로 스물한 명의 배우와 스태프가 공동창작한 작품이다. “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이라는 슬로건이 붙은 연극이다.

1.
이런저런 안내방송이 나오고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런웨이 모양의 조명이 들어온다. 배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따라 걷고 그 끝에서 각자의 포즈를 취한다. 그 다음에는 무대 외곽을 따라 돈다. 차례로 일어선 배우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 즈음이면 대사가 시작된다. 한쪽에서 연도를 외친다. 예컨대 1997년,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해다. 혹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해.
시작은 2017년이었던 것 같다. 배우들은 박근혜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주문을 외친다. 해가 바뀔 때마다 굵직한 사건들, 그러니까 성수대교 붕괴라든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같은 것들이 호명된다. 중간중간 인물들 각각의 개인적인 사건들이 함께 이야기된다. 세월호에 대해서는 외치는 대신 입을 막았다 ― 이것이 세월호 사건의 재현불가능성에 관한 것인지 검열에 관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역사는 일어난다, 여기저기서”라고 배우들은 외친다. 그들이 외치는 ‘역사’는 모두 대한민국의 사건들이다. 개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배경으로서 국가는 호명된다. 한참을 외친 후 배우들은 의자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먼저 앉아 있던 관객들의 사이사이다. 빠짐 없이 사람이 앉은, 디귿 자로 배열된 테이블과 의자들은 이제 토론장이 된다.
테이블들 위에는 물컵과 와인잔, 그리고 빈 접시가 놓여 있다. 잠시 후면 와인잔에 와인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또 잠시 후면 접시 위에 빵이며 과일이며가 놓일 것이다. 모두 같은 구성의 테이블들 사이에 하나 눈에 띄는 테이블이 있다. 마이크가 놓인 테이블이다. 이 자리에 앉는 배우는 이 토론장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2.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질문은 이런 식이다. “당신에게 국가國家란 무엇입니까?” 배우들은, 혹은 인물들은, 제각기의 생각을 말한다. “질문하는 것도 하나의 권력이네요”, 대답을 거부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에 대한 대답들이 이어진다. 국가란 삶의 배경, 권력의 장치, 어떤 장벽 ― 모두에게 다른 의미다.
그러고보니 연극 제목에 등장하는 ‘애국가’도 국가國歌다. “당신은 애국가를 적절하게 부를 수 있습니까?” 적절하다는 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또 토론한다. 누군가는 한 소절을 몇 번이고 불러보기도 한다. 국가가 어떤 분위기여야 하는지, 새로운 국가가 필요한 시점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질문들은 여러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토론은 때로 열기를 띠고 때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소재가 변하고 분위기가 변하는 가운데 변함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무대 위의 자리로 안내 받은 관객들이다. 약간의 긴장감과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토론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나는 왜 여기 앉아 있을까, 내게 질문하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3.
십오 분의 인터미션이 끝나면 제 2막이 시작된다. 1막이 진행되는 동안 물컵이며 와인잔이며가 바닥을 드러낸 것, 그리고 테이블 몇 개가 치워진 것을 빼면 무대에는 큰 변화가 없다. 배우들은 테이블 위의 접시들에 먹을 것을 서빙한다. 그 다음에 배우들은 제자리에 앉기도 하고 자리 앞에 눕기도 한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온다. 그는 다른 이들을 차례로 불러내 역할을 맡긴다. 누군가는 1인 시위를 하고 누군가는 구걸을 한다. “공이 굴러가면” 이들은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박근혜의 얼굴이 그려진 공이다. 일곱 살 아이가 도로변에서 갖고 놀던 공이다. “공이 굴러간다.” 사람들이 자신의 배역을 펼칠 틈도 없이 장면이 전환된다.
공이 차도로 굴러가고, 아이는 달리는 차 앞으로 나오려 한다. 예의 그 한 사람은 아이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실은 아직인, 결혼식을 떠올린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다. 전애인에서부터 시부모까지, 사람들은 하객들이 된다.
제 1막이 진지한 토론이었다면 제 2막은 어째선지 가벼운 희극 같은 분위기다. 결혼식 이후에도 제 1막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 각각이 자신에 대해, 자신의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긴 하지만 말이다. 결혼식, 근대식으로 말하자면 최소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의 구성을 알리는 행사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몇 가지 억지스런 유머를 짜내기 위한 도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 듯해 보였다.

4.
〈2017 애국가〉는 국가란 무엇인지, 공동체란 무엇인지, 개인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자폐 노총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어느 노숙인의 하지마비를 웃음을 위해 소비하기도 한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여러가지 대답들을 끊임 없이 내어 놓으며 〈2017 애국가〉는 이 소극장 속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듯 보인다.
제 2막을 이끌던 예의 그 한 사람은 연극의 마무리까지도 맡는다. 건배사다. 이야기하고 이야기했지만 국가가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거창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는 되묻는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한 가지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래서 인물들은 무수한 이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건배에서부터 옆집의 아무개를 위한 건배까지가 이어진다. 각자의 자리에 살아 있는, 죽음을 향해 감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그렇게 함께 하자는 메시지쯤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은 없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있을 뿐이다. 미지수에 상수를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그런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공동체란 것은 말이다. 조사도 술어도 없이 단속적으로 이어진 고유명사들, 그렇게 제시된 완성되지 않은 문장, 그것이 이들이 알아낸 공동체인 모양이다.

5.
다른 배우 한 사람이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연극은 끝을 향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는 외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웃통을 벗고,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는다. “나는 더, 더, 더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연극의 마지막은 연극이라는 장소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거나 혹은 선언인 듯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연극밖에 없어 연극으로 소통하고자 한다는 겸허한 제스쳐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오히려 헛된 자기 도취로 보였다. 세 시간, 나를 무대에 앉혀 놓은 그 시간동안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공동체에 대해 묻고자 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 사람은 다 다른 거야, 술자리에서 흔히 들리는 말 이상을 그들은 하지 못했다. 관객의 위치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했지만 그들은 관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관객에게 말을 거는 법을 몰랐다. (관객들과 함께 춤추는 대목이 한 번 있긴 했지만.)
실패한 실험이길 바란다. 실패한 실험은 다음 번의 실험을 요구한다. 다음 번의 실험이 또한 있기를 바란다. 토론장의 모습을 갖춘 무대를, 토론장의 내용을 갖춘 곳으로 또 한 번 변화시킬 다음이. 무대에 불려 온 관객들이 세 시간 내내 그저 관객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또 한 번 변화시킬 다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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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애국가〉
즉각반응 제작, 마이클 마르마리노스 구상, 공동창작.
2017.4.27.-5.7.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4월 27일 관람